본문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SMALL

고전 번역928

황량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노생은 죽은 줄만 알았다. 눈앞이 어두워져 자식이나 손자가 울먹이는 소리가 점점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분동이 발끝에 매달린 것처럼 몸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싶더니 불쑥 깜짝 놀라서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베개맡에 도사 여옹이 태연히 앉아 있었다. 주인이 얹어 놓은 기장에도 아직 열이 돌지 않은 듯했다. 노생은 청자 베개에서 고개를 들어서는 눈을 문지르며 크게 하품을 했다. 한단의 가을 오후는 잎이 떨어진 나무 끝자락을 빛내는 볕이 있음에도 살짝 쌀쌀했다. "일어나셨나요." 여옹은 수염을 씹으며 웃음을 죽이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네." "꿈을 꾸셨지요?" "꾸었지요." "어떤 꿈이셨나요." "정말로 긴 꿈이었습니다. 시작은 청하의 최씨라는 여성과 함께였습니다. 아름.. 2021. 3. 16.
고독지옥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는 이 이야기를 어머니께 들었다. 어머니는 본인의 큰숙부께서 들었다고 한다. 이야기의 진위는 알 수 없다. 단지 큰숙부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이런 일도 제법 그럴듯하다 생각할 따름이다 큰숙부는 소위 마당발로 통하는 사람으로, 막부말 게닌이나 문인 사이에 지인을 여럿 두고 계셨다. 카와타케 모쿠아미, 류카테이 카네타즈, 젠자이 안에이키, 토에이, 9대째 단쥬로, 우지 시분, 미야코 센츄, 켄콘바우 료사이 같은 사람들 말이다. 개중에서도 모쿠아미는 "에도사쿠라쿄미즈세이겐"에서 키노쿠니야분자에몬을 쓸 때에 이 큰숙부를 참고로 했다. 작고하신지 오십 년 가까이 되었지만 살아 계실 적에는 금기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신 적이 있으니, 지금도 이름만은 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성은 사이키,.. 2021. 3. 15.
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하나 나는 문득 옛 친구였던 그를 떠올렸다. 그의 이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숙부의 집을 나와 고향의 인쇄소 2층에 자리한 육첩방을 빌렸다. 아래층의 유전기가 돌아갈 때마다 작은 배의 선실처럼 덜덜 떨리는 2층이었다. 아직 제1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기숙사 저녁밥을 먹은 후 이따금 이 2층으로 놀러 갔다. 그러면 그는 유리 창문 아래서 남들보다 한 층 얇은 목을 굽히며 항상 트럼프로 운세를 점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는 놋쇠 등유 램프 하나가 둥근 그림자를 떨구고 있었다. 둘 그는 숙부의 집에서 나와 같은 혼죠의 제3중학교를 다녔다. 그가 숙부의 집에 있던 건 부모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없었다 해도 어머니만은 죽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보다도 이 어머니께――어딘가로 재.. 2021. 3. 14.
그, 두 번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하나 그는 젊은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이름은 밝히지 않아도 되리라. 나는 단지 그의 친구였다. 그의 여동생은 아직도 나를 My brother's best friend라 적고는 한다. 나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전에도 그의 얼굴을 본 것만 같았다. 아니, 그의 얼굴만이 아니다. 방 벽난로에서 타는 불도, 불을 쬐는 마호가니 의자도, 벽난로 위에 놓인 플라톤 전집도 분명히 본 것만 같았다. 그런 감정은 또 그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점점 강해지기만 했다. 나는 그런 광경이 5, 6년 전에 꾼 꿈에서 본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말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시키시마를 입에 물며, 우리 사이의 화제인 아일랜드 작가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I detest Bernard Shaw." 나는 .. 2021. 3. 13.
마스크 - 키쿠치 칸 겉모습 하나는 듬직한 덕에 남들은 굉장히 건강히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내장이란 내장은 평균보다 빈약하다. 그러한 사실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자그마한 언덕을 올라도 숨을 헐떡거렸다. 계단을 올라도 숨을 헐떡거렸다. 신문기자를 할 적에도 관서 같은 커다란 건물의 계단을 오르면 목적지까지 와도 숨이 막혀서 바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었다. 폐 쪽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려 숨을 들이 마셔도, 일정 수준에 이르면 가슴이 답답해져 금세 숨을 내쉬어야 했다. 심장과 폐가 약한 데다가 작년 언저리부터 위장을 다치고 말했다. 내장 중에선 강한 걸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런 주제에 겉모습만은 듬직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항상 건강해 보인다. 스스로는 내장이 약한 걸 정말 잘 알고 있어.. 2021. 3. 12.
여체(女体)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양 아무개라는 중국인이 어느 여름밤, 너무 더운 나머지 잠에서 깨 턱을 괸 채로 누워 별 볼 일 없는 망상에 젖어 있었다. 그러자 불쑥 이 한 마리가 침상의 테두리를 기고 있는 게 보였다. 방안을 밝히는 밝지 않은 빛 안에서, 이는 작은 등을 은가루처럼 빛내며 옆에 자고 있는 아내의 어깨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내는 양을 향해 헐벗은 채로 누워 원만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양은 그 이가 걷는 걸 바라보며 이런 벌레의 세계는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두세 걸음이면 가는 장소도 이는 한 시간이나 들여 걸어야 한다. 심지어 그렇게 걸을 수 있는 곳은 고작해봐야 침상의 위일 뿐이다. 자신도 이로 태어나면 꽤나 지루하리라.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양의 의식이 천천히 몽롱해졌다. 물론 꿈은 .. 2021. 3. 11.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