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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928

연못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는 연못 옆을 걷고 있다. 낮인가 밤인가. 그마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어디선가 왜가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덩굴로 뒤덮인 나뭇가지 사이로 옅은 빛이 감도는 하늘이 보였다. 연못은 내 키보다 큰 갈대가 수면을 뒤덮고 있다. 물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름도 움직이지 않는다. 물 밑바닥에 사는 물고기도――물고기가 이 연못에 살기는 하는 걸까. 낮인가 밤인가. 그마저도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요 대여섯 날 동안 이 연못 옆만을 걸었다. 추운 아침 햇살의 빛과 함께 물냄새나 갈대 냄새를 몸에 두른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비개구리의 목소리가 덩굴에 뒤덮인 나뭇가지에서 하나하나 작은 별을 부른 기억도 있었다. 나는 연못 옆을 걷고 있다. 연못에는 내 키보다 큰 갈대가 수면을 뒤덮고 있다. 나는 먼 옛날.. 2021. 4. 3.
서쪽의 사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이래저래 십 년 전부터 예술적으로 그리스도교――특히 가톨릭교를 사랑하고 있다. 나가사키에 자리한 '일본 성모의 절'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나는 키타하라 하쿠슈 씨와 키노시타 모쿠타로 씨가 뿌린 씨앗을 주운 까마귀에 지나지 않는다. 또 몇 년 전에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순직한 교도들에게 흥미를 느꼈다. 순교자의 심리가 내게는 갖은 광신자의 심리처럼 병적인 관심을 쥐여준 셈이다. 나는 그제야 네 전기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한 그리스도란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오늘의 나는 그리스도를 길거리의 사람처럼 볼 수 없다. 어쩌면 그 사실은 서양 사람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웃음을 살지 모른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태어난 나는 그들이 보기에는 질린――되려 넘어트리는 .. 2021. 4. 2.
타니자키 준이치로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느 초여름 오후, 나는 타니자키 씨와 칸다 외출을 나섰다. 타니자키 씨는 그 날도 검은 양복에 붉은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장대한 옷깃 장식에 상징적인 로맨티시즘을 느꼈다. 물론 이건 나뿐만이 아니다. 길거리 사람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와 같은 인상을 받았으리라. 엇갈리면서도 다들 뚫어져라 타니자키 씨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타니자키 씨는 도무지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건 자네를 보는 거지. 미치유키같은 걸 입으니까." 나는 마침 여름용 외투를 대신해 아버지의 미치유키를 빌려 입고 있었다. 하지만 미치유키는 다도 스승도 보다지의 스님도 입는다. 대중의 눈을 끈 건 분명 한 송이 장미꽃을 닮은 비범한 넥타이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타니자키 씨는 나처럼 로직을 존중하지 않는 시인이기에.. 2021. 4. 1.
상매성모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마쿠사 하라죠. 올라오는 화염. 날아오는 화살과 탄환. 겹겹이 쌓인 남녀의 시체. 그런 가운데 손에 부상을 입은 한 노인. 노인은 돌담 위에 건 마리아의 초상을 보며 소리 높여 "할렐루야"하고 외웠다. 또 한 발의 탄환. 노인은 곧 엎드려 두 번 다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백의의 성모는 돌담 위에서 묵묵히 그 모습을 내려보고 있다. 엄숙히, 유유히. 백의의 성모? 아니, 나는 알고 있다. 그건 백의의 성모가 아니다. 확연히 단순한 여인이다. 한 떨기 장미를 사랑하는 단순한 서양 여인이다. 잘 보아라. 그 여인의 밑에는 이런 금색의 서양 문자마저 적혀 있다. 빌헬름 담배 상회,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21. 3. 31.
쿠게누마 잡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는 쿠게누마의 숙소 2층에 누워 있었다. 또 머리맡에는 아내와 큰어머니가 앉아 정원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오늘은 비가 내릴 거야"하고 말했다. 아내와 큰어머니를 믿어주지 않았다. 특히 아내는 "이런 날씨에요?"하고 말했다. 하지만 2분도 지나지 않아 보기 드문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나는 인기척 없는 소나무 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내 앞에는 하얀 개가 한 마리. 꼬리를 흔들며 걸었다. 나는 그 개의 불알을 보고 옅은 붉은색에 쌀쌀함을 느꼈다. 길모퉁이가 나오자 개가 불쑥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분명히 빙긋 웃었다. × 나는 거리의 모래 속에 비개구리 한 마리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때 저 녀석은 자동차가 오면 어쩔 셈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은 자동차는 한 대.. 2021. 3. 30.
소세키 공방의 겨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는 어린 W군과 옛친구 M에게 안내를 받으며 오랜만에 선생님의 서재를 찾았다. 서재를 다시 세운 이후로 볕이 잘 들지 않게 되었다. 또 중국에서 사온 다섯 학이 그려진 융단도 어느 틈엔가 색이 바래버렸다. 또 본래 경사로 된 당지가 놓여 있던 토코노마는 선생님의 사진이 놓인 불단으로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다를 바가 없다. 서양 서적이 놓인 서재가 있다. '무현금' 액자가 있다. 선생님이 매일 원고를 쓰시던 작은 자단 책상도 있다. 벽돌 난로도 있다. 병풍도 있다. 엔가와 쪽에는 파초도 있다. 파초의 잎 뒤에선 커다란 꽃마저 썩어 있엇다. 동으로 된 도장도 있다. 세토의 각로도 있다. 천장에는 쥐가 갉아먹은 구멍도……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천장은 안 바꾼..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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