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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서쪽의 사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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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이래저래 십 년 전부터 예술적으로 그리스도교――특히 가톨릭교를 사랑하고 있다. 나가사키에 자리한 '일본 성모의 절'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나는 키타하라 하쿠슈 씨와 키노시타 모쿠타로 씨가 뿌린 씨앗을 주운 까마귀에 지나지 않는다. 또 몇 년 전에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순직한 교도들에게 흥미를 느꼈다. 순교자의 심리가 내게는 갖은 광신자의 심리처럼 병적인 관심을 쥐여준 셈이다. 나는 그제야 네 전기 작가가 우리에게 전달한 그리스도란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오늘의 나는 그리스도를 길거리의 사람처럼 볼 수 없다. 어쩌면 그 사실은 서양 사람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웃음을 살지 모른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태어난 나는 그들이 보기에는 질린――되려 넘어트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십자가를 주목해왔다. 일본에 태어난 '나의 그리스도'는 꼭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지 않는다. 붉은감이 맺힌 나무 아래에서 나가사키의 포구 또한 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적 사실을 돌아보지 않는다.(적어도 저널리스틱한 고난을 피하기 위함은 아니다. 만약 진지하게 임하자면 대여섯 권의 그리스도전은 간단히 이 역할을 다 해주리라.) 또 그리스도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충실히 열거할 여유도 없다. 나는 단지 내가 느낀 대로 '나의 그리스도'를 기록할 따름이다. 엄격한 일본의 그리스도교도 글쟁이가 적은 그리스도만은 아마 관대하게 봐주리라.
 

2 마리아

 

 마리아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어느 밤 성령을 느끼고 곧 그리스도를 낳았다. 우리는 갖은 여인들에게서 다소의 마리아를 느끼리라. 동시에 갖은 남자에게도――아니, 우리는 난로에서 타는 불이나 밭의 채소나 도자기병이나 바위로 만들어진 의자 속에서도 다소의 마리아를 느끼리라. 마리아는 "영원한 여성"이지 않다. 단지 "영원히 지키려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의 일생 또한 "눈물 계곡" 안을 지났다. 하지만 마리아는 인내를 거듭하며 한 평생을 걸었다. 속지俗智와 어리석음과 미덕이란 그녀의 한 평생 속에 하나가 되어 살고 있다. 니체의 반역은 그리스도보다도 마리아를 향한 반역이었다.
 

3 성령

 

 우리는 바람이나 깃발 속에서도 다소의 성령의 성령을 느끼리라. 성령이란 게 꼭 '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단지 '영원히 넘으려 하는 것'이다. 괴테는 항상 성령에 Daemon의 이름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항상 이 성령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경게했다. 하지만 성령의 아이들은――갖은 그리스도들은 성령 때문에 언젠가 사로잡힐 위험을 지니고 있다. 성령은 악마나 천사가 아니다. 물론 신하고도 다르다. 우리는 이따금 선악의 피안彼岸에 성령이 걷고 있는 걸 보리라. 선악의 피안에――하지만 롬브로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신병죄의 뇌수 위에 성령이 걷는 걸 발견하였다.
 

4 요셉

 

 그리스도의 아버지, 목공 요셉은 사실 마리아 본인이었다. 그가 마리아만큼 존경 받지 못 하는 건 그런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요셉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필경 불필요한 일인이었다.
 

5 엘리자베스

 

 마리아는 엘리자베스의 친구였다. 세례자 요한을 낳은 게 이 즈가르야의 아내 엘리자베스이다. 보리 안에 겨자 꽃이 핀 건 우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우리의 일생을 지배하는 힘은 역시 그곳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6 양

 

 마리아가 성령을 느껴 아이를 품은 건 양을 술렁이게 할 정도의 추문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아름다운 마리아는 이때부터 괴로움의 길을 걸었다.
 

7 박사들

 

 동쪽 나라의 박사들은 그리스도의 별이 나타난 걸 보고 황금이나 유향, 몰약을 보물 상자에 넣어 바치러 왔다. 하지만 그들은 박사들 중에서도 고작해야 둘셋이었다. 다른 박사들은 그리스도의 별이 나타난 걸 알아차리지 못 했다. 그뿐 아니라 알아차린 박사들 중 한 사람은 높은 곳에 앉아(그는 누구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반짝이는 별을 올려다 보며 그리스도를 연민했다.

"또인가!"
 

8 헤로데

 

 헤로데는 어떤 커다란 기계였다. 그런 기계는 폭력을 통해 약간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필요해진다. 그는 그리스도를 두려워했기에 베들레햄의 어린아이를 몰살했다. 물론 그리스도 이외의 그리스도도 그들 안에 섞여 있었으리라. 헤로데의 두 손은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아마 이 두 손을 앞에 두고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그건 몇 세기인가 전의 길로틴에게 느끼는 불쾌함이다. 우리는 헤로데를 미워하는 건 물론이요 경멸할 수도 없다. 아니, 되려 그를 위해 연민을 느낄 뿐이다. 헤로데는 항상 옥좌 위에서 우울한 얼굴을 한 채 감람이나 무화과 안에 담긴 베들레헴을 내려다보았다. 한 줄의 시조차 남기지 않은 채……
 

9 보헤미아적 정신

 

 어린 크리스토는 이집트에 가거나 더욱이 "갈랄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머물고는 했다. 우리는 그런 어린아이를 사세보나 요코스카에 전임하는 해군 장교 가정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의 보헤미아적 정신은 스스로의 성격 이전에 이런 환경에도 담겨져 있던 걸지도 모른다.
 

10 아버지

 

 그리스도는 나자렛에 살기 시작한 후, 요셉의 자식이 아님을 알았으리라. 혹은 성령의 아이라는 걸――하지만 그건 전자보다도 중대한 사안은 아니다. '사람의 아이' 그리스도는 이 순간부터 두 번째 탄생을 이루었다. '하녀의 아이' 스트린드베리는 먼저 자신의 가족을 모반했다. 그건 그의 불행인 동시에 그의 행복이었다. 그리스도도 분명 같았을 터이다. 그는 그런 고독 속에서 운 좋게도 그의 전에 태어난 그리스도――세례자 요한과 만났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도 요한과 만나기 전의 그리스도가 마음에 품은 음영을 느끼고 있다. 요한은 메뚜기와 산꿀을 먹으며 황야 속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살던 황야에 꼭 빛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리스도 스스로 안에 있었던 어두컴컴한 황야에 비하면……
 

11 요한


 세례자 요한은 로망주의를 이해하지 못 하는 그리스도였다. 그의 위엄은 가공하지 않은 금처럼 그에 빛을 남기고 있다. 그가 그리스도에 미치지 못 한 것도 아마 그 사실 때문이리라. 그리스도에게 셰례를 받은 요한은 떡갈나무처럼 듬직해졌다. 하지만 감옥에 들어간 요한은 가지나 잎에 뻗은 떡갈나무의 힘을 잃었다. 그의 마지막 통곡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통곡처럼 언제나 우리를 움직인다.

"그리스도는 너였는가, 나였는가?"
 요한의 마지막 통곡은――아니, 꼭 통곡만은 아니다. 두터운 떡갈나무는 말랐을지언정 아직도 외견만은 가지를 치고 있다. 만약 이 기력마저 없었다면 스물몇 살의 그리스도는 결코 차갑게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내가 나타났음을 요한에게 들려주어라."
 

12 악마


 그리스도는 40일의 단식 후, 바로 눈 앞에서 악마와 문답했다. 우리도 악마와 문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의 단식이 필요하다. 우리 중 누군가는 이런 문답 가운데 악마의 유혹에 지고 마리라. 또 어떤 자는 유혹에 지지 않고 우리를 지키리라. 하지만 우리는 평생 악마와 문답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빵을 물리쳤다. 하지만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주역을 두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라는 악마의 이상주의적 충고를 물리쳤다. 하지만 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변증법을 준비해두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갖은 나라와 그 영예"를 물리쳤다. 혹은 그게 빵을 물리친 것과 똑같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빵을 물리친 건 현실적 욕망을 물리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 세 답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끊어내지 못 하는 갖은 지상의 꿈을 물리친 것이다. 이 논리 이상의 논리적 결투는 그리스도의 승리임이 분명했다. 야곱의 천사와 한 것도 아마 이런 결투였으리라. 악마는 끝내 그리스도 앞에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마리아라는 여인의 자식인 건 잊지 않았다. 악마와 나눈 이 문답은 언젠가부터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일생에선 꼭 대사건이라 부를 수 없다. 그는 그의 일생 중에 몇 번이나 "사탄이여, 물러나라."하고 말았다. 실제로 그의 전기 작가 중 한 명인――루가는 이 사건을 기록한 후, "악마는 이 유혹을 끝으로 잠시간 그를 벗어났다."고 덧붙이고 있다.
 

13 첫 제자들


 그리스도는 고작 열두 살 때에 자신의 천재성을 보였다. 하지만 세례를 받은 후로도 누구도 제자가 되려 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마을을 전전하던 그는 필시 외로움을 느꼈으리라. 그럼에도 끝내 네 제자들은――심지어 네 어부들은 그의 좌우에 서지 못 했다.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의 평생을 관통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둘러싸여 서서히 날카로운 혀를 가진 고대의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14 성령의 아이

 

 그리스도는 고대의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또 동시에 고대의 보헤미안이 되었다. 그의 천재는 활약을 거듭했고 그의 생활은 한 시대의 사회적 약속을 짓밟았다. 그를 이해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이따금 히스테리를 일으키게 하며――하지만 스스로에게는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시 속에 어느 정도의 정열을 느끼고 있었을까. "산상설교"는 스물몇 살이었던 그가 감격에 찬 산물이다. 그는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미치지 않으리라 느꼈다. 이 바다처럼 높아진 그의 천재적 저널리즘은 물론 적을 불렀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실로 그들에게는――그리스도보다도 인생을 알고 따라서 인생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그들에게 이런 천재의 식견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5 여인


 많은 여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그중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는 한 번 그에게 만난 탓에 일곱 악귀의 공격을 받은 것도 잊고 시적 연애마저 느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끝난 후, 그녀가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이런 연애의 힘 덕이었다. 그리스도 또한 많은 여인들을――그중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했다. 그들의 시적 연애는 아직도 제비붓꽃처럼 향기를 내뿜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따금 그녀를 보는 걸로 자신의 쓸쓸함을 위로했으리라. 후대는――혹은 후대의 남자들은 그들의 시적 연애에 냉담했다. (물론 예술적 주제 이외에는) 하지만 후대의 여인들은 항상 이 마리아를 질투했다.
"왜 그리스도 님은 누구보다 먼저 어머니 마리아 님께 부활을 보여주시지 않은 걸까?"
 이것이 그녀들이 내뱉은 가장 위선적인 한숨이었다.
 

16 기적


 그리스도는 이따금 기적을 해냈다. 하지만 그리스도 본인에게는 하나의 비유를 만드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리스도는 기적에 혐오의 감정을 품었다. 그 때문에라도――느끼고 있던 기독교적 사명이 그에게 길을 가르쳐주게 되었다. 그가 기적을 행하는 건 후대에 루소가 일갈한 것처럼, 그의 길을 가르치는데 불편함을 주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어린양들'은 한사코 기적을 바랐다. 그리스도 또한 세 번에 한 번은 그 바람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성격은 그런 면에도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기적을 할 때마다 반드시 책임을 피해왔다.
"네 신앙이 너를 구했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과학적 진리임에 분명했다. 그리스도는 어느 때에 도리 없이 기적을 행했기에――어떤 오랜 지병에 괴로워하는 여자가 그의 옷자락을 만졌기에 그는 힘이 나간 걸 느꼈다.[각주:1]그가 기적을 행하는 것에 약간의 주저를 느낀 건 그런 이야기에도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리스도는 후대의 신자는 물론이요 그의 열두 제자들보다도 훨씬 날카로운 이지주의자였다.
 

17 배덕자


 그리스도의 어머니, 아름다운 마리아도 그리스도에게는 비단 어머니라 할 수 없었다. 그가 가장 사랑한 건 그의 길을 따르는 자였다. 또 그리스도는 열정을 태우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담히도 제 뜻을 말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필시 문밖에서 들어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초연히 서있었으리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안에서 마리아의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 설령 우리 스스로 안에서 그리스도의 정열을 느끼더라도――하지만 그리스도 본인은 이따금 마리아를 연민했으리라. 눈부신 천국의 문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예루살렘을 바라봤을 때에는……
 

18 기독교


 그리스도 스스로도 기독교를 실행하지 못 했다. 역설이 많은 시적 종교이다. 그는 천재이기에 자신의 인생마저 웃으며 던져 버렸다. 와일드한 그에게서 로맨티스트의 첫 시작을 발견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솔로몬의 온갖 영광"은 바람에 나부끼는 한 송이 백합꽃보다 못 했다[각주:2]. 그의 길은 단지 시적으로――미래의 일로 번뇌하지 말고 생활하라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그야 물론 유대인들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 분명했다. 하지만 갖은 천국도 윤회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비누 냄새가 나는 장미꽃으로 가득 찬 기독교의 천국은 언젠가 공중에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대신 몇 개의 천국을 만들어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천국에 매료되게 한 첫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의 역설은 후대에 무수한 신학자나 신비주의자를 낳게 했다. 그들의 의논은 그리스도를 망연케 했으리라. 하지만 그들 중 어떤 자는 그리스도보다도 기독교적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현생을 마주 볼 것을 가르쳤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걸――우리를 무한한 길로 달리게 하는 나팔 소리를 느끼리라. 동시에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괴롭혀 마지않는걸――근대식 표현으로는 세계고世界苦를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19 저널리스트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에 가까울 뿐으로 바깥은 볼 수 없다. 적어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건 우리 스스로에 가까운 것뿐이다. 그리스도는 갖은 저널리스트처럼 이 사실을 직시했다. 신부, 포도밭, 당나귀, 장인――그의 가르침은 항상 눈앞에 있는 걸 이용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나 '탕자의 비유'는 그런 그의 걸작시이다. 추상적인 말만 스는 후대의 기독교적 저널리스트――목사들은 한 번도 그리스도의 저널리즘에 가진 그런 효과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리라. 그는 그들과 비교하면 물론, 후대의 그리스도들에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저널리스트였다. 때문에 그의 저널리즘은 서쪽의 고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그는 실로 낡은 불꽃에 새로운 장작을 더하는 저널리스트였다.
 

20 여호와


 그리스도가 특히 날카로웠던 물론 천상의 신이다. "우리를 만든 건 신이 아니다. 신이야말로 우리가 만든 것이다."――그런 물질주의자 구르몽의 말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리라. 그건 우리의 허리춤에 걸린 사슬을 끊어내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허리에 새로운 사슬을 더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사슬은 낡은 사슬보다도 강할지 모른다. 신은 커다란 구름 속에서 세밀한 신경 계통 안으로 내려왔다. 심지어 갖은 이름 하에 역시나 그곳에 있다. 그리스도는 물론 눈앞에서 이 신을 보았으리라.(신과 만나지 못 한 그리스도가 악마와 만났을 거 같지 않다.) 그의 신 또한 갖은 신처럼 사회적 색채가 강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태어난 "주된 신"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이 신을 위해――시적 정의를 위해 거듭 싸워왔다. 그의 갖은 역설은 그곳에 근간을 두고 있다. 후대 신학은 그러한 역설을 시의 바깥에서 해석하려 했다. 그리고――누구도 읽은 적 없는 지루한 책을 무수히 남겼다. 오늘날의 볼테르는 우스울 정도로 '신학'의 신을 죽이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다. 하지만 '주된 신'은 죽지 않았다. 동시에 그리스도도 죽지 않았다. 신은 콘크리트 벽에 이끼가 생기는 한, 항상 우리 위에 군림하시리라. 단테는 프란체스카를 지옥에 떨구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이 여인을 불꽃 안에서 구해냈다. 한 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은 자는――아름다운 한순간을 지닌 자는 항상 '끝이 없는 목숨'에 발을 들이고 있다. 감상주의의 신이라 불리기 쉬운 것도 아마 이런 사실 때문이리라.
 

21 고향


"예언자는 고향에 들어가지 못 하고."――어쩌면 그리스도에게는 그 시작이 십자가였을지 모른다. 그는 끝내 모든 유대인을 고향으로 삼아야 했다. 기차나 자동차나 배나 비행기는 오늘날, 온 세계를 그리스도의 고향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갖은 그리스도는 고향에 들어가지 못 한 게 분명하다. 실제로 포를 받아들인 건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22 시인


 그리스도는 한 송이 백합을 "솔로몬의 온갖 영광"보다 더욱 아름답다 느꼈다.(물론 그의 제자들 중에도 그만큼 백합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제자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대화상의 예절을 내려놓고서라도 야만적인 말을 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밖에서 들어가는 건 아무것도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는 걸 모르느냐? 그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뱃속을 거쳐 몸 밖으로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음식이란 깨끗한 것이다."[각주:3]

 

23 나사로


 그리스도는 나사로의 죽음을 듣고 이제까지 흘리지 않던 눈물을 흘렸다. 이제까지 없던――혹은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눈물을. 나사로가 죽음에서 돌아온 건 그런 그의 감상주의 덕이다. 어머니 마리아를 돌아보지 않았던 그는 왜 나사로의 형제들――마르타나 마리아 앞에서 눈물을 흘렸을까? 이 모순을 이해하는 자는 그리스도의――혹은 갖은 그리스도의 천재적 이기주의를 이해하는 자이다.
 

24 카나의 혼인잔치


 그리스도는 여인을 사랑했지만 여인과 이뤄지는 걸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건 무함마드가 네 여인과 이뤄지는 걸 허락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 시대를――혹은 사회를 넘지 못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누구보다도 자유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도 영향을 준 건 분명하다. 후대의 초인은 개들 사이에서 가면을 쓰는 게 필요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가면을 쓰는 것도 자유롭지 못 한 것 중에 하나로 두었다. 소위 '난롯가의 복음'의 거짓말은 물론 그에겐 확연했으리라. 미국의 그리스도――휘트먼 역시 이 자유를 고른 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시 안에서 그리스도를 느끼리라. 그리스도는 아직도 크게 웃으며 춤추는 자와 꽃다발, 악기로 가득 찬 카나의 혼인잔치를 내려다보고 있다. 물론 그곳엔 대신 그가 갚아야 하는 약간의 쓸쓸함은 있었으리라.
 

25 하늘에 가까운 산위의 문답

 

 그리스도는 높은 산 위에서 그가 태어나기 전의 그리스도들――모세나 엘리야와 이야기했다. 그건 악마와 싸우는 것보다도 더욱 의미 깊은 일이었으리라. 그는 그 며칠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가 십자가에 걸릴 걸 예언하였다. 그가 모세나 엘리야와 만난 건 그가 정신적 위기에 처해 있었단 증거이다. 그의 얼굴은 "태양처럼 빛나고 그 옷은 하얗게 빛난다"고 되어 있었던 것도 꼭 두 그리스도가 그의 앞에 내려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의 일생 속에서 이때에 가장 엄숙했다. 그의 전기작가는 그들 사이의 문답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던진 물음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다. 그리스도의 일생은 짧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이때에――겨우 서른이 된 그의 일생을 총결산해야 하는 괴로움을 맛보았다. 모세는 나폴레옹도 말한 것처럼 전략에 능한 장군이었다. 엘리야 또한 그리스도보다도 정치적 천재에 축복받았으리라. 그뿐 아니라 현재는 과거가 아니다. 이제는 홍해의 파도도 갈라지지 않으며, 불수레도 내려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들과 문답하면서 끝내 자신이 괴로운 죽음에 다가가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가까운 산위에는 바위 무더기가 얼음처럼 개인 태양빛 속에 담겨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깊은 계곡의 밑바닥에는 석류나 무화과도 향을 내뿜고 있으리라. 또 집들의 연기도 올라오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스도는 아마 그런 하계의 인생에 그리움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그의 길은 싫더라도 도리 없이 인기척이 드문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의 탄생을 고한 별은――혹은 그를 낳은 성령은 그에게 평화를 주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내가 죽었다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하늘에 가까운 산 위에서 그리스보다 앞서 떠난 "위대한 죽은자들"과 이야기한 건 사실 그의 일기에만 살며시 기록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26 어린아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가르친 역설 중 하나는 "내가 분명히 말해둔다. 너희가 변화되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각주:4]이다. 이 말은 조금도 감상주의적이지 않다. 그리스도는 이 말 안에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어린아이에 가깝다는 걸 드러내고 있다. 또 동시에 성령의 아이였던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괴테는 자신의 "타소" 속에서 역시나 성령의 아이였던 자신의 괴로움을 노래하였다. "어린아이와 같을 것"은 유치원 시대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의 보호 없이는 인생은 견디기 어렵지만, 그 외에는 황금의 문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말에는 또 세간지[각주:5]를 향한 그의 경멸도 담겨 있다. 그의 제자들은 솔직히(어린아이를 앞에 둔 그리스도의 그림이 우리에게 불쾌함을 주는 건 후대의 위선적 감상주의 때문이다.) 그의 앞에 선 어린아이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으리라.
 

27 예루살렘으로


 그리스도는 한 시대의 예언자가 되었다. 동시에 스스로 안의 예언자는――혹은 그를 낳은 성령은 스스로 그를 가지고 놀았다. 우리는 촛대의 불에 타죽는 나방에게서도 그를 느끼리라. 나방은 단지 나방 한 마리로 태어났기에 촛대의 불에 타죽는다. 그리스도 또한 나방과 다르지 않다. 쇼는 십자가에 걸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 그리스도에게 번개와 같은 냉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기 전에 그의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건 그에겐 어쩔 수 없는 운명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그는 그곳에서도 천재였던 동시에 역시 필경 "사람의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몇 세기를 거듭된 "메시아"라는 말이 그리스도를 지배하였다고 가르쳐지고 있다. 나뭇가지가 깔린 길 위에서 "호산나, 호산나."하는 말에 얻어맞으며 나귀를 달리게 한 그리스도는 그 자신인 동시에 갖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었다. 그의 후에 태어난 그리스도 중 한 명은 먼 로마의 길 위에 재생한 그리스도에게 "어디에 가느냐?"하는 질책을 들었다 전해지고 있다. 그리스도 또한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다면 역시나 다른 예언가 중 한 명에게 "어디에 가느냐?"하는 질책을 들었으리라.

 

28 예루살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들어간 후, 그의 마지막 싸움을 했다. 그 싸움은 광채는 부족할지언정 모종의 격렬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길의 무화과를 저주했다. 심지어 그건 무화과가 그의 예측을 배신해 하나도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갖은 걸 사랑한 그도 여기서는 반쯤 히스테릭하게 자신의 파괴력을 휘둘렀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각주:6]

 그건 더 이상 정열으로 불타던 청년 그리스도의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복수를 시작한 인생에 대한(그는 물론 인생보다도 천국을 중시하는 시인이었다.) 노성한 그리스도의 말이었다. 그 안에 담긴 게 꼭 그의 세간지만은 아니었다. 그는 모세 이후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인간상에 정이 떨어진 것이리라. 하지만 그의 짜증은 그에게 여호와의 "궁에 들어가 그 안에서 사고파는 자들을 궁에서 쫓아내고, 태은자의 건, 비둘기를 파는 자의 의자"를 쓰러트리게 했다.
"이 궁도 머지 않아 무너지고 마리라."
 어떤 여인은 그렇게 말하는 그를 위해 그의 이마에 향유를 부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여인을 꾸짖지 말라 명하였다. 그리고――십자가에 마주한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를 이해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상냥한 말 속에 숨어져 있다. 그는 향유 냄새를 풍기며(그건 흙먼지를 뒤집어쓰기 마련인 그에게는 보기 드문 일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조용히 그들에게 말했다.

"이 여자는 내 몸에 향우를 부어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각주:7]

 겟세마니의 감람은 골고타의 십자가보다도 비장하다. 그리스도는 사력을 다하며 자기 자신하고도――스스로 안의 성령하고도 싸우려 했다. 골고타의 십자가는 그의 위에 서서히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제자들은――베드로마저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 했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갖은 그리스도는 인기척 없는 밤중에 반드시 기도하고 있다. 동시에 갖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음이 괴로와 죽을지경"[각주:8]인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한 채 감람나무 아래에서 잠들어 있다…………
 

29 유다


 후대는 언젠가부터 유다의 위에도 악의 원광을 빛내고 있다. 하지만 유다가 꼭 열두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빴던 건 아니다. 베드로마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그리스도를 모른다 말하였다. 유다가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것 또한 오늘날의 정치가들이 자신의 수령을 파는 것과 매한가지였으리라. 파피니 또한 유대가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것을 큰 수수께끼 중 하나로 세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명확히 누구에게라도 팔릴만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대사제들은 유다 이외에도 여러 유다를 세고 있었을 터이다. 단지 유다는 도구가 될만한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런 조건 이외에 우연도 섞여 있으리라. 후대는 그리스도를 '신의 아이'로 삼았다. 그건 동시에 유다 스스로의 안에서 악마를 발견하게 되었단 뜻이다. 하지만 유다는 그리스도를 판 후, 백양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어버렸다.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건――신의 목소리를 들은 존재였다는 건 혹은 그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유다는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미워했다. 십자가에 걸린 그리스도도 물론 그를 괴롭게 했으리라. 하지만 그를 이용한 대사제들의 냉소 또한 그를 분개하게 했으리라.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그런 유다를 향한 그리스도의 말은 경멸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의 자식" 그리스도는 어쩌면 스스로의 안에서도 유다를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다는 불행히도 그리스도의 아이러니를 이해하지 못 했다.
 

30 필라투스


 필라투스는 그리스도의 일생에선 단지 우연히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결국 대명사에 지나지 않는다. 후대 또힌 이 관사에 전설적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아나톨 프랑스만은 그런 색채에 속지 않았다.
 

31 그리스도보다도 바라바를


 그리스도보다도 바라바를――그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바라바는 반역을 꾸몄으리라. 또 동시에 사람들을 죽였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절로 그의 행위를 이해하였다. 니체는 후대의 바라바들을 길거리 개로 비유했다. 그들은 물론 바라바의 행위에 분노나 증오를 느꼈으리라. 만약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건 그들이 사회적으로 느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정신적 노예들은――육체만 듬직한 병졸들은 그리스도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는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하고 소리치고는 했다. 그리스도의 비극은 그런 희극 속에 있는 만큼 안타깝다. 그리스도는 정말로 정신적으로 유다인의 왕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천재를 믿지 않는 개들은――아니, 천재를 발견하는 건 쉽다 믿는 개들은 유다인의 왕의 이름 하에 진짜 유다인의 왕을 비웃었다. "예수님이 전혀 대답하지 않으시자"[각주:9]――그리스도는 전기작가가 기록한 것처럼 그들의 심문이나 조소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어떤 대답도 불가능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바라바는 고개를 들고 무엇이든 명확히 대답했으리라. 바라바는 단지 그의 적에게 반역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스스로에게――자신 안의 마리아에게 반역하였다. 그건 바라바의 반역보다도 더 근본적인 반역이었다. 동시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반역이었다.
 

32 골고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필시 "사람의 자식"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각주:10]

 물론 영웅 숭배자들은 그의 말을 냉소하리라. 혹은 성령의 자식이 아닌 자는 단지 그의 말 속에서 "자업자득"을 찾아내리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사실 그리스도의 비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비명 때문에 한 층 더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뿐 아니라 그의 일생의 비극을 한 층 더 현실적으로 가르쳐주었다.
 

33 피에타


 그리스도의 어머니, 나이를 먹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시체 앞에 앉아 있다――그런 구도의 Pieta라 불리는 건 꼭 감상주의적이라 할 수 없다. 단지 피에타를 그리려 하는 화가들은 마리아 한 사람만을 그려야 한다.
 

34 그리스도의 친구들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들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는 단 한 사람도 지니지 않았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지녔다 친다면 그건 아리마태아의 요셉이다. "날이 저물었을 때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이 찾아왔는데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자"[각주:11]――마태보다도 오래 되었다는 마가는 그의 그리스도 전기 속에 그런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겼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이에 따르는 자들"이란 말과 전혀 결이 다르게 했다. 요셉은 아마 그리스도보다도 세간지가 풍부한 그리스도였으리라. 그가 "먼 빌라도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빈 사실"은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동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양을 쌓은 의원 요셉도 이때만은 솔직하기 짝이 없었다. 후대는 빌라도나 유다보다도 그에게 훨씬 냉담하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열두 제자들보다 그를 알고 있었으리라. 요한의 목을 접시에 올린 건 냉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살로메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목숨을 잃은 후, 그를 매장할 사람들 중에 아리마태아의 요셉을 두었다. 그는 그 점에서 요한보다도 그나마 나은 행복을 드러내고 있다. 요셉도 의원이 되지 않았다면――그건 갖은 "만약………했다면"처럼 필경 묻지 않는 게 좋은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무화가 아래나 상감을 한 잔 앞에서 이따금 그의 친구인 그리스도를 떠올렸으리라.

 

35 부활


 르낭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걸 마리아의 상상력 탓으로 돌렸다. 상상력 때문에――하지만 그녀의 상상력에 비약을 준 건 그리스도이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는 그의 부활을――그가 무언가로 다시 태어난 걸 보고 있다. 그는 어쩌면 다이묘가 되거나 혹은 연못 위의 오리가 되거나, 또 혹은 연꽃이 되고는 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마리아 외에도 사후의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셈이리라. 그는 3일 후에 부활했다. 하지만 육체를 잃은 그가 전 세계를 오가는 데에는 더욱 긴 세월을 필요로 했다. 때문에 가장 힘이 있었던 건 그리스도의 천재를 전신으로 느낀 저널리스트 바울로였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건 그들은 몇 세기가 흐름에 따라 셰익스피어의 부활을 인정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했다. 하지만 사후의 그리스도도 윤회를 이룬 건 분명하다. 갖은 걸 지배하는 유행은 역시 그리스도 또한 지배했다. 클라라가 사랑한 그리스도는 파스칼이 존경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 개들이 그를 우상으로 삼는 건――또 그리스도의 이름 하에 횡포를 휘두르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후에 태어난 그리스도들이 그의 적이 되어버린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마찬가지로 다마스커스에 향하던 도중에 반드시 그들의 적 안에 있는 성령을 볼 수밖에 없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괴롭히느냐? 가시 채찍을 뒷발질해 봐야 너만 다칠 것이다."[각주:12]

 우리는 단지 망망대해의 인생 속에 머물러 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건 잠 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갖은 자연주의자는 외과의처럼 잔혹히 이 사실을 해부하고 있다. 하지만 성령의 자식들은 항상 그런 인생 위에 무언가 아름다운 걸 남겼다. 무언가 '영원히 넘으려 하는 것'을.
 

36 그리스도의 일생


 물론 그리스도의 일생은 갖은 천재의 일생처럼 정열로 불탄 일생이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보다도 아버지 성령의 지배를 받았다. 그의 십자가 위의 비극은 실로 그곳에 존재했다. 그의 후에 태어난 그리스도 중 한 사람――괴테는 "천천히 늙으니 어서 지옥에 가는 게 낫다"고 바랐다. 하지만 천천히 늙은 데다가 스트린드베리가 말한 것처럼 말년에는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성령은 이 시인 안에서 마리아와 조화를 이루어 살고 있다. 그의 "위대한 이교도"의 이름이 꼭 빗나간 건 아니다. 그는 사실 인생 상에선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컸다. 하물며 다른 그리스도보다도 컸던 건 물론이다. 그의 탄생을 알리는 별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별보다 더 둥그렇고 더 빛났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괴테를 사랑하는 건 마리아의 자식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마리아의 자식들은 밀밭이나 장의자 위에도 충만해 있다. 아니, 병영이나 공장, 감옥 안에도 많으리라. 우리가 괴테를 사랑하는 건 단지 성령의 아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 속에서 언젠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라. 괴테 또한 그의 시 안에서 그리스도의 수염을 뽑고 있다. 그리스도의 일생은 비참했다. 하지만 그의 후에 태어난 성령의 자식들의 일생을 상징하였다.(괴테마저 이 사례에서 벗어나지는 못 한다.) 기독교는 언젠가 사라지리라. 적어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일생은 언제나 우리를 움직이리라. 그건 천상에서 지상에 오르기 위해 비참하게도 꺾여나간 사다리이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내리붓는 거센 빗속에서 기울어진 채로……
 

37 동쪽의 사람


 니체는 종교를 "위생학"이라 불렀다. 그건 종교만이 아니다. 도덕이나 경제 또한 "위생학"이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 저절로 건강을 유지하게 하리라. "동쪽의 사람"은 이 "위생학"을 열반 위에 세우려 했다. 노자는 이따금 자연 그대로 부처와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우리는 피부색처럼 또렷이 동서가 나누어져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혹은 갖은 그리스도의 일생이 우리를 움직이는 건 이 때문이다. "예로부터 영웅이란 전부 산굽이로 돌아갔다". 그런 노래는 항상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하지만 "천국이 다가왔다"는 목소리 또한 역시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노자는 그에 소년 공자와――혹은 중국의 그리스도와 문답을 나누었다. 거친 인생은 갖은 그리스도들을 항상 조금은 괴롭게 했으리라. 태평성대가 되길 바란 "동쪽의 사람"들도 이 사례에선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다. 그러나 사람의 자식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아마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 한 무서운 사실을 머금고 있다. 우리는 여우나 새가 되는 것 이외에는 간단히 잠자리를 찾을 수 없다.

 

 

 

 

방황하는 유대인도 그랬지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적 부탁드립니다.

  1. 누가복음 8장 43절~50절 [본문으로]
  2. 마태복음 6장 29절 [본문으로]
  3. 마가복음 7장 18~19 [본문으로]
  4. 마태복음 18장 3절 [본문으로]
  5. 세속의 일을 아는 지혜. [본문으로]
  6. 마태복음 22장 21절 [본문으로]
  7. 마태복음 26장 11~12 [본문으로]
  8. 마가복음 14장 34절 [본문으로]
  9. 마태복음 27장 14절 [본문으로]
  10. 마태복음 27장 46절 [본문으로]
  11. 마태복음 27장 57~58 [본문으로]
  12. 사도행전 26장 14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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