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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 두 번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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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그는 젊은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이름은 밝히지 않아도 되리라. 나는 단지 그의 친구였다. 그의 여동생은 아직도 나를 My brother's best friend라 적고는 한다. 나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전에도 그의 얼굴을 본 것만 같았다. 아니, 그의 얼굴만이 아니다. 방 벽난로에서 타는 불도, 불을 쬐는 마호가니 의자도, 벽난로 위에 놓인 플라톤 전집도 분명히 본 것만 같았다. 그런 감정은 또 그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점점 강해지기만 했다. 나는 그런 광경이 5, 6년 전에 꾼 꿈에서 본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말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시키시마[각주:1]를 입에 물며, 우리 사이의 화제인 아일랜드 작가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I detest Bernard Shaw."
 나는 그가 안하무인히 그렇게 말한 걸 기억하고 있다. 그건 우리 두 사람이 세는 나이로 스물다섯이 된 겨울의 일이었다……

        둘

 우리는 돈을 벌면 카페나 찻집을 찾고는 했다. 그는 나보다도 3할은 더 암컷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루눈이 격했던 어느 밤, 우리는 카페 바리스타의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당시의 카페 바리스타는 중앙에 그라모폰 한 대가 놓여 있어, 동전을 넣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설비가 되어 있었다. 그 밤도 그라모폰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내 끊길 줄을 몰랐다.
 "저기, 직원한테 통역해주겠어? 누구라도 5전을 낼 때마다 내가 10전을 낼 테니 저 그라모폰 좀 꺼달라고.
 "그런 부탁을 어떻게 해. 남이 듣고 싶어 하는 노래를 돈으로 못 듣게 하는 건 악취미 아냐?"

 "그래서야 남이 듣고 싶지 않아 하는 음악을 돈으로 듣게 하는 것도 악취미지."
 그라모폰은 마침 소리가 뚝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곧 사냥모를 쓴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동전 투입구 앞에 섰다. 그러자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댐인지 무슨 말인지를 하면서 접시를 던지려 했다.
 "아서라. 왜 멍청한 짓을 해?"
 나는 그를 끌어내 가루눈이 부는 길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나도 적잖이 흥분한 듯했다. 우리는 팔을 붙든 채 우산도 쓰지 않고 걸었다.
 "나는 이렇게 눈이 내리는 밤이면 어디까지고 걷고 싶어져. 발길이 닿는 어디까지……"
 그는 거의 화를 내듯이 내 말을 끊었다.
 "그럼 왜 걸어가지 않지? 나는 어디까지고 걷고 싶으면 어디까지고 걷고 있어."

 "그건 너무 로맨틱하지."

 "로맨틱한 게 무슨 잘못이야? 걸어가고 싶으면서 걸어 가지 않는 건 고집일 뿐이야. 동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걸어 봐……"

 그는 대뜸 말투를 바꾸더니 Brother하고 내게 말을 걸었다.
 "나 어제 우리나라 정부에 종군하고 싶다는 전보를 보냈어."
 "그래서?"
 "아직 답은 오지 않았어."
 우리는 언젠가 교문관의 창 앞을 지났다. 유리창은 절반가량 눈에 파묻혀 있었다. 전등이 밝게 빛나는 창문 안에는 탱크나 독가스 사진을 시작으로, 전쟁에 관련된 책이 몇 권이나 줄지어 있었다. 우리는 팔짱을 낀 채로 창문 앞에 서있었다. 
 "Above the War――Romain Rolland……"
 "흠, 우리에게는 above가 아니지."

 그건 마치 수탉의 목털이 거꾸로 솟는 것과 비슷했다.
 "롤랑 따위가 뭘 안다고? 우리는 전쟁의 amidst에 있어."
 독일에 대한 그의 적의는 물론 내게 절절히 와닿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그의 말에 약간의 반감을 느꼈다. 동시에 취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난 이만 가볼게."
 "그래? 그럼 나는……"
 "어디 이 근처에 가있어."
 우리는 마침 쿄바시의 키보시 앞에 서있었다. 인기척 없는 밤의 다이콘가시에는 눈이 쌓인 마른 버들나무가 한 그루, 칙칙하게 고인 검은 배수로에 가지를 늘어놓고 있었다.

 "일본 맞군. 특히 이런 풍경은."

 그는 나와 헤어지기 전에 절절하단 투로 이렇게 말했다.

        셋

 그는 아쉽게도 바람과 달리 종군하지 못 했다. 하지만 한 번 런던에 돌아간 후, 2, 3년만에 일본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적어도 나는 어느 틈엔가 로망 주의를 잃고 있었다. 물론 이 2, 3년은 그에게도 변화를 주었다. 그는 어느 아마추어 하숙집 2층에 하오리나 기모노를 입고 작은 난로에 손을 뻗은 채로 이렇게 불평을 했다.
 "일본도 점점 미국으로 변해가는군. 나는 이따금 일본이 아니라 프랑스에 사는 거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정도는 환멸하고는 하지. 헤른도 말년에는 그랬잖아."
 "아니, 나는 환멸 한 게 아냐. illusion을 지니지 않았는데 disillusion 할 리도 없지."
 "그런 건 공론 아냐? 나는 나 자신에게 마저――아직도 illusion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어두워진 풍경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나는 가까운 시일에 상하이 통신원이 될지 몰라."
 그의 말은 내가 어느 틈엔가 잊고 있던 그의 직업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항상 그를 단지 에술적 기질을 가진 우리 중 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먹고 사는데 있어 영자신문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예술가도 벗어날 수 없는 '장사'를 생각해 되도록 이야기를 밝게 끌어가려 했다.
 "상하이면 도쿄보다는 재미있겠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말야, 그전에 다시 한 번 런던에 가야만 해. ……내가 이걸 너한테 보여줬던가?"
 그는 책상 서랍에서 하얀 우단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 담긴 건 얇은 백금석 반지였다. 나는 그 반지를 손에 얹어 들여다보았다. 안쪽에 새겨진 "모모코에게"란 글자에는 흐뭇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모모코에게' 아래에 내 이름을 넣어 달라 주문했는데 말야."
 어쩌면 장인의 실수였을지도 몰랐다. 혹은 그 장인이 상대 여자의 장사를 생각해 일부러 외국인의 이름을 넣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그에게 동정보다도 되려 쓸쓸함을 느꼈다.
 "요즘은 어디로 가고 있어?"
 "야나기바시. 거기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이 역시 도쿄 사람인 내게는 묘하게 안타까워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틈엔가 기운 찬 얼굴을 되찾아 그가 끊임없이 애독하는 일본 문학의 이야기를 꺼냈다.
 "요번에 타니자키 준이치로의 '악마'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말야, 그건 아마 전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걸 쓴 소설일 거야."
 (몇 달 후, 나는 모종의 이야기를 하다 '악마'의 작가에게 그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이 작가는 웃으면서 내게 적당히 이렇게 말했다――"세계 제일이라면 뭐라도 좋지!")
 "'우미인초' 같은 건 읽어 봤어?"
 "그건 내 일본어 실력으로는 힘들어. ……오늘 밥 정도는 같이 먹을 거지?"
 "응, 그럴 생각으로 왔지."
 "그럼 잠깐 기다려. 저기에 잡지가 네다섯 권 정도 있으니까 읽으면서."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로 멍하니 북 맨 따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휘파람 틈틈이 대뜸 짧게 웃으며 일본어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똑바로 앉을 수 있어. 바지가 좀 끼지만."

        넷

 내가 마지막으로 그와 만난 건 상하이에 자리한 카페였다.(그는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후, 천연두에 걸려 죽고 말았다.) 우리는 밝은 유리등 아래에 탄산 위스키를 놓은 채로 좌우 테이블에 무리 지은 수많은 남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두세 명의 중국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미국인이나 러시아인이었다. 그 가운데에 청자색 가운을 걸친 여자 한 명이 누구보다도 흥분하여 떠들고 있었다. 그녀는 몸은 말랐지만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가공된 청자석을 떠올렸다. 실제로 그녀는 아름답다 하여도 어딘가 병적이었음이 분명했다.
 "저 여자는 뭐야?"
 "저 사람? 저 사람은 프랑스의……뭐 배우 같은 거겠지. 니니라는 이름으로 통하는데――그보다 저 영감님 좀 봐."
 "저 영감님"은 우리의 옆에서 두 손에 붉은 포도주잔을 들고 밴드의 연주에 맞춰 끊임없이 머리를 움직였다. 만족 그 자체라 해도 지장이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열대 식물 가운데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재즈에 괘나 관심이 동했다. 하지만 물론 행복한 노인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저 할아버지는 유대인인데 상하이에 이래저래 30년간 살고 있지. 저런 사람은 대체 어떤 생각을 가진 거지?"
 "어떤 생각이면 어때."
 "아니, 좋지 않지. 나 같은 건 이미 중국에 질려버렸거든."
 "중국이 아니라 상하이겠지."
 "중국이야. 베이징에도 한동안 머무른 적이 있거든……"
 나는 그의 그런 불평을 비꼴 수밖에 없었다.
 "중국도 점점 미국처럼 변해 가나 보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한동안 아무 말도 않았다. 나는 후회에 비슷한 걸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색함을 풀기 위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느꼈다.
 "그럼 어디서 살고 싶은데?"
 "어디에 살아도――꽤나 많은 곳에 살아봤는데, 내가 지금 살고 싶은 건 소비에트가 통치하는 러시아 뿐이야."
 "그럼 러시아에 가면 되잖아. 너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 아냐."
 그는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나는 아직도 당시 그가 보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대뜸 낮도 있고 있던 만엽집의 시를 꺼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날아가지 못 하네. 새가 아니기에."
 나는 그의 일본어 실력에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자만 내심으론 묘하게 감동하고 있었다.
 "저 영감도 물론이지만 니니마저 나보다는 행복할 거야. 무엇보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곧 쾌활해졌다.
 "그래, 그래. 안 들어도 알아. 너는 '방황하는 유대인'인 거지?"
 그는 탄산 위스키를 단숨에 마시고는 다시 한 번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시인, 화가, 비평가, 신문작가……또 있어. 아들, 형, 독신, 아일랜드인……그리고 기질상의 로맨티스트, 인생관상의 현실주의자, 정치상의 공산주의자……"
 우리는 어느 틈엔가 웃으며 의자를 밀쳐내 일어났다.
 "그리고 여자친구한테는 정인[각주:2]이지."
 "그래, 정인……또 있지. 종교상의 무신론자, 철학상의 물질주의자……"
 밤의 길가는 안개보다도 증기에 가까워져 있었다. 가로등의 빛 탓인지 묘하게 노란색으로 보였던 것이다. 우리는 팔짱을 낀 채로 스물다섯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큰 걸음으로 아스팔트를 걸었다. 스물다섯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하지만 나는 더 이상 어디까지고 걸어가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 너한테 이야기 안 했나? 내가 성대를 확인한 이야기?"
 "상하이에서?"
 "아니, 런던에 돌아갔을 적에――성대를 확인했더니 세계적인 바리톤이라네."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이러니하다는 양 웃었다.
 "그럼 신문 기자 같은 걸 할 게 아니라……"
 "물론 오페라 배우가 되었다면 카루소 정도는 갔을지 모르지. 하지만 이제 와선 도리가 없어."
 "평생의 손해를 봤군."
 "무얼, 나만 손해 봤나. 전 세계 사람이 손해 본 거지."
 우리는 배의 등불이 빛나는 황푸강 기슭을 걸었다.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는 턱으로 "봐봐"하고 신호를 보냈다. 안갯속에서 희미해진 물 위에선 하얗고 작은 개의 시체 하나가 미적지근한 파도에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또 작은 개는 누가 한 것인지 목 근처에 꽃을 가진 풀 하나를 걸고 있었다. 잔혹하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만엽짚의 시를 읊은 이후로 약간의 감상주의에 전염되어 있었다.
 "니니로군."
 "혹은 내 안의 성악가겠지."
 그는 이렇게 대답하자마자 한없이 큰 재채기를 했다.

        다섯

 니스에 사는 그의 여동생이 오랜만에 편지를 보냈기 때문일까. 나는 불과 2, 3일 전 날 밤, 꿈속에서 그와 이야기를 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만났을 때가 분명했다. 난로에는 불이 들어와 있었고, 마호가니 테이블이나 의자가 불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묘한 피곤함을 느끼며, 당연히 우리 사이에 벌어진 아일랜드 작가들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내게 닥치는 졸음기와 싸우는 건 간단하지 않았다. 나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의 말을 들었다.
 "I detest Bernard Shaw."
 하지만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어느 틈엔가 잠에 들어 버렸다. 그러자――저절로 눈이 떠졌다. 밤은 아직 미처 걷히지 않은 것이리라. 천에 둘러싸인 전등은 어두컴컴한 빛을 내리쬐고 있다. 나는 바닥 위에 엎드려 묘한 흥분을 다스리기 위해 "시키시마" 하나에 불을 붙여보았다. 하지만 꿈속에서 잠든 내가 지금 눈을 뜬 건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다.

  1. 당시 담배 브랜드 중 하나 [본문으로]
  2. 남몰래 정을 통하는 남녀 사이에서 서로를 이르는 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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