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타 군은 항상 뚱뚱했다. 그뿐 아니라 항상 얼굴이 붉었다. 나츠메 선생님은 타키타 군을 킨타로라 불렀다. 하지만 그 얇은 눈은 되려 키쿠지도와 쏙 닮아 있었다.
나는 대학 재학 중에 타키타 군과 처음 만나 이래저래 십 년 가량 친밀하게 어울렸다. 타키타 군에게 복어회를 대접받았다가 호된 위경련을 겪은 적이 있다. 또 운페이를 논한 후, 난죽 한 폭을 받은 적도 있다. 갖은 편집자 중에서 나와 가장 친근하게 지낸 건 타키타 군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아직도 타키타 군과 찻집 한 번 간 적이 없었다. 타키타 군은 아마 나 따위는 대화할 상대가 못 된다 생각하는 것이리라.
타키타 군은 열성적인 편집자였다. 특히 작가를 선동해 소설이나 희곡을 쓰게 하는데 독특하고 묘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나 따위도 시종 타키타 군에게 작품을 칭찬받거나, 선배의 작품을 보여줘 고심거리를 만드는 등 이런저런 채찍들을 받은 탓에 어느 틈엔가 백 편 가까운 단편소설을 써버렸다. 이건 내가 타키타 군에게 가장 감사하고 싶은 일이다.
또 나는 중앙공론사에게서 원고료를 앞당겨 받을 때다 타키타 군을 번거롭게 했다. 처음 앞당겨 받은 돈은 십 엔 전후였으리라. 나는 그 돈마저 궁핍해진 끝에 밤 여덟 시쯤에 타키타 군의 옛집을 찾았다. 타키타 군의 옛집은 니시카타쵸에서 키쿠자카를 내려 나오는 골목에 있었다. 내가 그 집을 찾은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현관인지 정원인지에 하얀 꽃이 잔득 피어 있는 걸 기억하고 있다.
타키타 군은 본직인 문예 이외에도 그림이나 골동품도 사랑했다. 나는 그 덕에 현대의 작품 이외에도 친카쿠나 운페이의 뛰어난 완성작을 몇 개인가 볼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보지 못 한 것 중에도 뛰어난 건 많았을 테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타키타 컬렉션은 현대의 작품보다 우수했다. 단지 타키타 군은 내 감상안을 좋게 보지 않았다. "아쿠타가와 씨의 미술론은 문학론만큼 신용할 수는 없다니까요."――타키타 군은 항상 이렇게 말하며 내 눈을 옹이구멍이라 칭했다.
타키타 군이 일본 문예에 헌신한 점이 많았다는 건 내가 굳이 상기시킬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당대 문인을 들어 타키타 군의 신세를 졌다고 말하자면 그건 고인에게 맡기더라도, 고인을 믿을만한 일은 아니리라. 오호라, 우리 소년들은 번번이 타키타 군에게 폐를 끼쳤다. 하지만 타키타 군 본인 또한 아마 토쿠타 슈세이, 혹은 타아먀 카타이 등, 우리의 선배에게 신세 진게 적지 않으리라.
나는 타키타 군의 타계 소식을 들은 밤, 무로우 군과 함께 장례식을 찾았다. 타키타 군은 소위 관어정을 베개 삼아 누워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았을 때 말로 못 할 쓸쓸함을 느꼈다. 그건 내게 친절했던 친구의 죽음 때문이라기보다도, 혹은 내게 관대했던 편집자의 죽음 때문이라기보다도, 되려 그 타키타 군이라는 커다란 정열가의 죽음 때문이었다. 나는 사십구재가 끝난 지금도 타키타 군을 떠올릴 때마다 이런 쓸쓸함을 느끼고 있다. 타키타 군만큼 열렬히 생활하는 사람은 일본에는 그리 많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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