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나는 문득 옛 친구였던 그를 떠올렸다. 그의 이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숙부의 집을 나와 고향의 인쇄소 2층에 자리한 육첩방을 빌렸다. 아래층의 유전기가 돌아갈 때마다 작은 배의 선실처럼 덜덜 떨리는 2층이었다. 아직 제1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기숙사 저녁밥을 먹은 후 이따금 이 2층으로 놀러 갔다. 그러면 그는 유리 창문 아래서 남들보다 한 층 얇은 목을 굽히며 항상 트럼프로 운세를 점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는 놋쇠 등유 램프 하나가 둥근 그림자를 떨구고 있었다.
둘
그는 숙부의 집에서 나와 같은 혼죠의 제3중학교를 다녔다. 그가 숙부의 집에 있던 건 부모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없었다 해도 어머니만은 죽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보다도 이 어머니께――어딘가로 재혼한 어머니께 소년다운 정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느 가을, 내 얼굴을 보자마자 머뭇거리듯 물었다.
"얼마 전에 동생이(여동생 하나 있었던 걸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집간 곳을 듣고 왔거든. 다음 일요일에라도 가보지 않을래?"
나는 바로 그와 함께 카메이도의 구석진 마을로 향했다. 동생 집은 의외로 빨리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이발소 뒤편에서 이어진 집 한 척이었다. 남편은 근처 공장에 일하러 갔는지 집을 비운 듯했고, 보잘 것 없는 집 안에는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린 아내――그의 여동생 말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여동생임에도 그보다도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뿐 아니라 길게 뻗은 눈꼬리 말고는 그와 거의 닮아 있지 않았다.
"그 아이는 올해 태어난 거야?"
"아뇨, 작년에."
"결혼한 것도 작년이잖아?"
"아뇨, 재작년 3월이에요."
그는 무언가에 부딪히듯이 열심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여동생은 이따금 아이를 달래며 붙임성 좋게 반응할 뿐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차가 담긴 찻잔을 손에 든 채로, 뒷문 밖을 가로 막는 벽돌 울타리의 이끼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뒤죽박죽인 두 사람의 대화에 모종의 쓸쓸함 따위를 느꼈다.
"형님은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냐니……역시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죠."
"어떤 책을?"
"강담본 같은 거요."
실제로 집 창문 아래에는 낡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도――강담본 같은 거도 놓여 있으리라. 하지만 내 기억에는 아쉽게도 책에 관한 건 남아 있지 않다. 단지 나는 붓꽂이 안에 선명한 공작 깃털 두 개가 꽂혀 있는 걸 기억하고 있다.
"그럼 또 놀러 올게. 형님께 안부 전해줘."
여동생은 여전히 갓난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정숙하게 인사를 해보았다.
"그러신가요? 그럼 주위 분들께 제 안부도 전해주세요. 영 신발이 고쳐지지 않아서요."
우리는 어두워져 가는 혼죠 거리를 걸었다. 그도 처음 얼굴을 본 여동생의 태도에 실망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길을 따라 놓인 울타리벽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내게 이런 말을 할 따름이었다.
"이러고 걷고 있으면 묘하게 손가락이 떨리잖아. 꼭 전기라도 뒤집은 거처럼 말야."
셋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여 제1고등학교의 시험을 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낙제했다. 그가 인쇄실 2층을 빌리기 시작한 것도 그쯤부터이다. 동시에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책에 열중하기 시작한 거도 그때부터였다. 나는 물론 사회학에 관한 어떤 지식도 가지지 못 했다. 단지 자본이니 착취니 하는 말에 어떤 존경――이라기 보다 어떤 공포를 느꼈다. 그는 그 공포를 이용해 이따금 나를 비난했다. 베를렌, 랭보, 보들레르――그런 시인은 당시의 내게는 우상 이상의 우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시시나 아편 제작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와서 돌아 보면 당시에 우리가 나눈 토론은 마땅히 기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에게 반박했다. 단지 우리의 친구 중 한 명――K라는 의과생만은 항상 우리를 이렇게 평했다.
"그런 토론에 열내지 말고 나랑 같이 스사키라도 가자."
K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히죽히죽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야 물론 속으로는 스사키든 어디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초연히('초연히' 외의 다른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태도였다.) 골든 배트 1를 입에 문 채로 K의 말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따금 선수를 쳐서 K의 콧대를 꺾으려 했다.
"혁명이란 즉 사회적인 멘스라치온을 말하는 거지……"
그는 다음 해 7월에는 오카야마의 제6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로부터 반 년 가량은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이리라. 그는 끊임없이 편지를 써서 근황을 전했다.(그 편지에는 항상 그가 읽은 사회학과 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곁을 떠나 나는 약간 부족함을 느꼈다. 나는 K와 만나면 반드시 그의 이야기를 했다. K또한――K는 그에게 우정보다는 사실상 과학적 흥미에 가까운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 녀석은 아무리 생각해도 영원히 아이로 남을 거 같아. 그나저나 그런 미소년인 주제에 조금도 호모 에로틱한 기분이 들지 않는단 말이지. 왜 그런 걸까?"
K는 기숙사의 유리 창문을 배경 삼아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시키시마 2의 연기를 솜씨 좋게 하나씩 원으로 내뱉으며.
넷
그는 제6고등학교에 입학해 채 1년도 되지 않아 병을 얻어 숙부의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병명은 신장 결핵이었다. 나는 이따금 과자 따위를 들고 그가 쓰는 서생방을 찾았다. 그는 항상 마루 위에서 얇은 무릎을 안은 채로, 생각보다 쾌활하게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방구석에 놓인 변기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유리로 만들어져 오싹한 혈뇨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몸으로는 글렀어. 감옥 생활도 불가능할 테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바쿠닌은 사진만 봐도 듬직한 게 보이는데 말야."
하지만 그를 위로하는 게 전무하지는 않았다. 숙부의 딸을 향한 극히 순수한 연애가 그랬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연애를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어느 어두운 봄날의 오후, 그는 대뜸 내게 자신의 연애를 밝혔다. 대뜸?――아니, 꼭 대뜸이지는 않았다. 나는 갖은 청년처럼 그의 사촌을 보았을 때부터 그의 연애에 모종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미요는 지금 학교 친구들하고 오다와라에 가있어. 내가 요전 번에 별 생각 없이 미요의 일기를 읽었는데 말야……"
나는 이 "별생각 없이"에 약간의 냉소를 품었다. 그러나 물론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랬더니 전차 안에서 알게 된 대학생 이야기가 적혀 있더라고."
"그런데?"
"그래서 미요한테 충고라도 해주려고……"
나는 기어코 입을 열고 이렇게 비평하고 말았다.
"그건 모순된 거 아냐? 너는 미요를 사랑해도 되는데, 미요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된다――그런 논리가 어딨어. 그야 네 감정 속에선 또 다른 문제겠지만."
그는 척 보아도 불쾌한 듯했다. 하지만 내 말에는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그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했을가? 나는 단지 스스로도 불쾌해졌음을 기억하고 있다. 그건 물론 환자인 그를 불쾌하게 만든 일에 대한 불쾌함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그래, 들어가.'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과장이 더해진 가벼운 투로 이렇게 덧붙였다.
"책 좀 빌려줄래? 다음에 또 올 때 겸사겸사 가져와도 좋으니까."
"어떤 책?"
"천재의 전기 같은 게 좋으려나."
"그럼 장 크리스토프 가져올까?"
"그래, 두터운 게 좋아."
나는 체념에 가까움 심정으로 야요이쵸에 자리한 기숙사로 돌아왔다. 유리가 깨진 자습실에는 아쉽게도 아무도 자리하지 않았다. 나는 어두컴컴한 전등 아래에서 독일어 문법을 복습했다. 하지만 도무지 실연한 그에게――설령 실연이라도 그 대상이 숙부의 딸인 그에게 부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섯
그는 이래저래 반년이 지난 후, 어떤 해안가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말이야 거처지 대부분은 병원에서 지내는 꼴이다. 나는 겨울방학을 이용해 그를 찾아 먼 길을 향했다. 그의 병실은 햇살이 잘 들지 않고 틈새로 바람이 드는 2층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여전히 기운차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문예나 사회 과학에 관한 건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저 종려나무를 볼 때마다 묘하게 동정심이 들지 뭐야. 왜 저 위에 나뭇잎이 움직이지?"
종려나무는 마침 유리 창문 바깥에서 끝자락의 잎을 흔들고 있었다. 그 잎은 전체도 흔들렸지만 세밀하게 갈라진 잎 끝자락 또한 신경질적으로 떨었다. 실제로 근대적인 애처로움을 두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 병실에 나 홀로 남은 그를 생각해 되도록 밝게 대답했다.
"움직이네. 바다 앞 종려는 무슨 고민이 있는 걸까……"
"그래서?"
"그게 다야."
"뭐야 재미없게."
나는 이런 대화 속에서 점점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장 크리스토프는 읽었어?"
"그래. 조금이지만……"
"더 읽은 생각은 없어?"
"어지간히 두터워야지."
나는 다시 한 번 침울해지려는 기분을 바로잡았다.
"요전 번에 K가 병문안 왔다면서?"
"그래, 그날 돌아갔지만. 생체해부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유쾌하지 못 한 이야기를 하냐."
"왜?"
"왜냐고 해도……"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 바람이 잦아든 걸 보고 해안가를 산책하기로 했다. 태양은 이미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주위는 아직 밝았다. 우리는 낮은 소나무가 자란 모래언덕의 경사면에 앉아 바다쇠오리 둘이 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래는 차갑지? 근데 계속 손을 넣고 있어 봐."
나는 그의 말을 따라 시들어가는 홍법맥이 심어진 모래 안으로 한 손을 넣어 보였다. 그 안에는 태양의 열기가 살짝 남아 있었다.
"응, 조금 꺼림칙한걸. 밤이 돼도 따듯하려나?"
"뭐, 금방 식어버리겠지."
나는 어째서인지 이런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 끝에서 검게 물들어 가던 태평양도……
여섯
그가 죽었단 이야기를 들은 건 다음 해의 음력 새해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병원 의사나 간호사들은 음력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밤을 새가며 노래하고 노는 파티를 계속하였다. 그는 그런 소란에 잠들지 못 해 화가 나, 침대 위에 누운 채로 큰 목소리로 그들에게 호통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크게 각혈을 하여 크게 죽어버렸다고 한다. 나는 검은 테두리가 그려진 한 장의 엽서를 바라보며 슬픔보다는 덧없음을 느꼈다.
"또한 고인이 소지하던 서적은 모두 불태웠습니다. 만에 하나 빌려주신 책이 그 안에 섞여 있었을 경우, 죄송하지만 용서를 빕니다."
엽서 구석에는 손글씨로 그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문구를 읽으며 몇 권의 책이 불에 휩싸여 타는 모습을 상상했다. 물론 그런 책 중에는 언젠가 내가 그에게 빌려준 장 크리스토프의 1권도 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이 사실은 감성적이었던 당시의 내게 묘한 상징 따위로만 다가왔다.
그로부터 대여섯 날이 지난 후, 나는 우연히 만난 K와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K는 여전히 차가웠음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입에 물은 채로 내게 이런 걸 물었다.
"X는 여자를 알았을까?"
"글쎄……"
K는 나를 의심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나저나 X가 죽고 나니 어째 승리자라도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
나는 조금 망설였다. 그러자 K는 딱 자르 듯이 스스로의 물음에 대답했다.
"적어도 나는 그런 기분이 들어."
나는 그 이후로 K와 만나는데 약간의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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