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고전 번역928 라쇼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느 저녁 날의 일이다. 한 하인 하나가 라쇼몬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넓은 문 아래에는 남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곳곳에 도장이 벗겨진 커다란 기둥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들러붙어 있었다. 라쇼몬이 스자쿠오오지에 자리한 이상은 이치메카사나 모미에보시를 쓴 사람들이 둘셋 정도는 비를 피하고 있을 법도 하다. 그렇 건만 남자 말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교토는 요 2, 3년 동안 지진, 태풍, 화재, 기근 같은 재해가 차례로 벌어졌다. 그런 마당이니 교토의 쇠퇴가 심상찮을 수밖에 없다. 옛 기록에 따르면 불상이나 불구를 박살 내 붉게 칠하거나 금은 도색이 된 나무를 거리에 쌓아 땔감으로 팔았다 할 지경이다. 교토가 그 모양이니 라쇼몬의 수리를 신경 쓸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황.. 2021. 2. 26. 영웅의 그릇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항우란 남자는 영웅의 그릇이 아니지요." 한나라 대장 여마통은 안 그래도 긴 얼굴을 한 층 더 길게 늘리고는 얼마 없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얼굴 주위에는 열 개의 얼굴이 중앙에 놓인 등불의 빛을 받아 밤의 막사 안에 떠올라 있다. 얼굴에 하나같이 웃음이 떠오른 건 서초 패왕의 목을 따낸 오늘의 승전이 주는 기쁨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런가?" 코가 높고 눈빛이 날카로운 얼굴 하나가 살짝 비꼬는 웃음을 머금은 채 여마통의 미간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여마통은 어째서인지 당황한 듯했다. "그야 강하기는 하지요. 도산 우왕묘에 있다는 돌 가마솥마저 찌그러트렸다니까요. 오늘 벌어진 전투만 해도 그렇죠. 저는 한때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좌가 죽고 왕황이 죽었습니다. 그.. 2021. 2. 26. 애독서의 인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릴 적 제일 좋아한 애독서는 '서유기'였다. 이건 지금도 내 애독서이다. 이만한 걸작 비유담은 서양에선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으리라. 명성 높은 버니언이 쓴 '천로역정'도 이 '서유기'는 이길 수 없다. 또 '수호전'도 애독서 중 하나이다. 이 또한 지금도 애독하고 있다. 한때는 '수호전'에 나온 108 호걸의 이름을 모조리 암기한 적도 있다. 그때도 오시카와 순로의 모험소설보다 '수호전'이나 '서유기' 쪽이 훨씬 더 재밌었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도쿠토미 로카 씨의 '자연과 인생'이나 타카야마 조규의 '평가잡감', 코지마 우스이의 '일본산수론'을 애독했다. 동시에 나츠메 씨의 '고양이'나 이즈미 쿄카 씨의 '풍류선', 사이토 료쿠 씨의 '아라레 사케'를 애독했다. 때문에 남 말 할 수는 없었다... 2021. 2. 26. 악마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바테렌 우르간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 하는 것까지 보였다고 한다. 특히 인간을 유혹하러 오는 지옥의 악마 따위는 고스란히 형태가 보였다 전해진다. ――우르간의 푸른 눈동자를 본 자라면 누구나 그런 말을 믿었다고 한다. 적어도 남만사의 데우스 여래를 예배하는 봉교인 사이에선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로 통했다. 고본사에 전해지기를 우르간은 오다 노부나가의 앞에서 자신이 교토에서 본 악마의 모습을 말했다고 한다. 인간의 얼굴과 박쥐 날개, 산양의 다리를 지닌 기묘한 작은 동물이었다. 우르간은 이 악마가 어느 때는 탑의 구륜 위에서 손뼉을 치며 춤추고, 어느 때는 태양빛을 두려워해 대문 지붕 아래에서 몸을 움츠리고 겁에 떠는 모습을 이따금 보았다. 아니, 그뿐일까. 어느 때는 산속 법사의 등에 매달리고, 어.. 2021. 2. 26. 소설 작법 10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 소설은 갖은 문예 중에서 가장 비예술적이란 걸 알아야 한다. 문예 중의 문예는 시뿐이다. 즉 소설은 소설 속 시 덕에 문예 중 하나로 취급될 뿐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역사서나 전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2. 소설가는 시인인 이외에 역사가 내지는 전기작가기도 하다. 따라서 인생(한 시대의 나라)과 마주해야 한다. 무라사키시키부부터 이하라 사이카쿠에 이르는 일본 소설가의 작품은 이 사실을 증명해준다. 3. 시인은 항상 자신의 내면을 누군가를 향해 호소해야 한다.(여자를 꾀기 위해 연가를 짓는 걸 보라.) 소설가는 시인인 이상으로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이기에, 전기 중 하나인 자서전 작가 또한 소설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해야 한다. 때문에 소설가는 일반인에 비해 스스로의 암담한 인생과 자주 마주하게 된.. 2021. 2. 26. 소설의 독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내 경험에 의하면 현대의 독자는 대개 소설의 줄거리를 읽는다. 그 다음으로는 소설 속에 그려진 생활에 동경을 품는다. 이러한 현상엔 이따금 신기할 때가 있다. 실제로 내 지인 중 하나는 경제적으로 꽤나 어려워하면서 부호나 귀족만 나오는 통속 소설을 애독한다. 그뿐 아니라 본인의 생활과 비슷한 소설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세 번째 경우로는 두 번째와 달리 독자 본인의 생활과 엇비슷한 것만 찾는 독자가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세 마음은 동시에 우리 속에서도 존재한다. 나는 줄거리가 재미 있는 소설을 애독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생활과 먼 생활을 쓴 소설도 애독하고는 한다. 마지막으로 나 스스로의 생활과 가까운 소설을 애독하는 경우도 물론 존재한다. 단 소설을 감상.. 2021. 2. 26. 이전 1 ··· 141 142 143 144 145 146 147 ··· 155 다음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