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란 남자는 영웅의 그릇이 아니지요."
한나라 대장 여마통은 안 그래도 긴 얼굴을 한 층 더 길게 늘리고는 얼마 없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얼굴 주위에는 열 개의 얼굴이 중앙에 놓인 등불의 빛을 받아 밤의 막사 안에 떠올라 있다. 얼굴에 하나같이 웃음이 떠오른 건 서초 패왕의 목을 따낸 오늘의 승전이 주는 기쁨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런가?"
코가 높고 눈빛이 날카로운 얼굴 하나가 살짝 비꼬는 웃음을 머금은 채 여마통의 미간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여마통은 어째서인지 당황한 듯했다.
"그야 강하기는 하지요. 도산 우왕묘에 있다는 돌 가마솥마저 찌그러트렸다니까요. 오늘 벌어진 전투만 해도 그렇죠. 저는 한때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좌가 죽고 왕황이 죽었습니다. 그 기세란 게 말로는 다 못해요. 그야 강하기는 합니다."
"하하."
상대의 얼굴은 태연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 바깥은 조용했다. 멀리서 두어 번 가량의 호각 소리만 들릴 뿐, 말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어디선가 말라버린 나뭇잎의 냄새가 들어온다.
"근데 말이죠." 여마통은 주위의 얼굴을 둘러보고 자못 "그런데"하고 말하는 양 눈을 껌뻑였다.
"영웅이 될만한 그릇은 못 됩니다. 증거는 역시 오늘 벌어진 전투죠. 오강까지 몰아붙였을 때 초군은 고작 스물여덟 기 있었습니다. 벌떼처럼 모인 저희 대군과 싸워본들 의미가 없어요. 더군다나 오강의 정장이 친히 나와서는 강동까지 배로 건너자 했다더군요. 만약 항우에게 영웅의 그릇이 있다면 수치스럽더라도 오강을 건넜을 겁니다. 그리고 권토중래하겠지요.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럼 영웅의 그릇이란 게 상황 판단에 능해야 한단 뜻인가?"
그런 말에 일동의 입에서 조용한 웃음이 퍼진다. 하지만 여마통은 의외로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수염에서 손을 떼고는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여, 코가 높고 눈빛이 날카로운 얼굴을 이따금 힐끔힐끔 보며 기세 좋게 손짓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항우는 말이죠, 항우는 오늘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스물여덟 명의 부하 앞에서 '항우를 망하게 하는 건 하늘이다. 힘이 부족한 게 아니다. 그 증거로 이만한 군세로 반드시 한의 군대를 세 번은 물리쳐보리라'하고 말했다는군요. 그리고 실제론 세 번은 고사하고 아홉 번이나 이겼습니다. 저는 그게 비겁하다는 거지요. 자신의 실패를 하늘에 떠넘긴다――하늘도 민폐라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오강을 건너서 강동의 건아를 규합해 다시 중원을 겨룬 후라면 또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훌륭히 살 수 있는 걸 죽어버린 겁니다. 제가 항우가 영웅의 그릇이 아니라는 건 상황 파악이 어두웠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든 걸 천명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태도가 문제이지요. 영웅은 그래서는 안 된다 봅니다. 소승상 같은 학자는 어떻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여마통은 의기양양히 좌우를 보며 잠시간 입을 닫았다. 그의 논의가 옳은 말이라 생각한 것이겠지. 일동은 서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레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가운데 코가 높은 얼굴만이 불쑥 눈동자 안에 일종의 감동을 드러냈다. 검은 눈동자가 열울 두른 것처럼 빛났다.
"그런가. 항우는 그렇게 말했나."
"말했답니다."
여마통은 긴 얼굴을 상하로 크게 움직였다.
"약해 빠졌지요. 아니, 적어도 남자 답지 않습니다. 영웅이란 하늘과 싸워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천명을 알고도 싸워야 하지요."
"그렇지."
"그럼 항우는――"
유방은 날카로운 눈빛을 들고 가을을 품은 등불의 빛을 가만히 보았다. 반쯤 혼잣말처럼 천천히 이렇게 답했다.
"그러니 영웅의 그릇이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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