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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라쇼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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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저녁 날의 일이다. 한 하인 하나가 라쇼몬 아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넓은 문 아래에는 남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곳곳에 도장이 벗겨진 커다란 기둥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들러붙어 있었다. 라쇼몬이 스자쿠오오지에 자리한 이상은 이치메카사나 모미에보시를 쓴 사람들이 둘셋 정도는 비를 피하고 있을 법도 하다. 그렇 건만 남자 말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교토는 요 2, 3년 동안 지진, 태풍, 화재, 기근 같은 재해가 차례로 벌어졌다. 그런 마당이니 교토의 쇠퇴가 심상찮을 수밖에 없다. 옛 기록에 따르면 불상이나 불구를 박살 내 붉게 칠하거나 금은 도색이 된 나무를 거리에 쌓아 땔감으로 팔았다 할 지경이다. 교토가 그 모양이니 라쇼몬의 수리를 신경 쓸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황폐해지면 야생 동물이나 도둑 따위가 꼬인다. 심지어는 거둘 사람 없는 시체를 문까지 끌고 와 버리는 습관마저 생겼다. 그런 마당이니 해까지 보이지 않게 되면 영 꺼림칙하게 느껴져 문 주변에 발을 들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대신 어디선가 까마귀가 잔뜩 모였다. 점심에 높은 치미를 보면 까마귀 몇 마리가 원을 그리듯 날며 울었다. 문 위의 하늘이 석양으로 붉게 물들면 검은 먹물이라도 튄 것마냥 잘 보였다. 까마귀는 물론 문 위에 놓인 시체를 뜯어 먹으러 온 것이었다. ――물론 오늘은 시각이 늦은 탓인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곳곳이 무너지고 긴 잡초가 자란 돌계단 위에 까마귀 대변이 하얗게 뭉쳐 있는 게 보였다. 하인은 일곱 계단 중 가장 윗계단에 색이 바란 감색 바지자락을 붙이고, 오른뺨에 난 커다란 여드름을 신경 쓰며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작가는 방금 "하인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고 적었다. 단지 비가 그친다고 어쩔 도리가 있었던 건 아니다. 평소 같았다면 물론 주인의 집에 돌아갔으리라. 하지만 하인은 며칠 전 해고된 참이었다. 방금 적은 것처럼 당시의 교토는 심상치 않게 쇠퇴해 있었다. 이 하인이 평생을 바쳐 일하던 주인에게서 쫓겨난 것 또한, 그 쇠퇴의 작은 여파였다. 때문에 "하인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기 보다는 "비에 갇힌 하인이 갈곳을 잃고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하는 게 적당하리라. 더군다나 그날의 날씨는 헤이안 시대 하인의 Sentimentalisme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시申時[각주:1] 언저리부터 내린 비는 아직도 그칠 생각을 않았다. 때문에 하인은 일단 내일을 어떻게 버틸지――말하자면 어쩔 도리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하려,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하며 스자쿠오오지에 내리는 빗소리를 흘려듣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라쇼몬을 두르고 먼 곳의 소리까지 모아주었다. 저녁의 어둠은 서서히 하늘을 낮추었고 올려다보니 문의 지붕이 기울어져 삐져나온 용마루 끝에 무겁고 어두운 구름을 받치고 있었다
 도리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하려면 수단을 고를 수 없었다. 고르고 있다가는 기둥 아래나 길바닥 위에서 아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문 위로 글려 와 개처럼 버려지기만 하겠지. 고르지 않는다 치면――하인의 생각은 몇 번이나 같은 길을 배회한 끝에 결국 이런 곳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치면"은 언제까지고 결국 "치면"일 뿐이었다. 하인은 수단을 고르지 않는다는 생각을 긍정하면서도 이 "치면"의 마무리를 짓기 위한, 그 뒤에 따르는 "도둑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적극적으로 긍정할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인은 재채기를 하고는 거창하게 일어섰다. 저녁의 찬바람이 스며든 교토는 화로를 찾고 싶어질 정도로 추웠다. 바람은 문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어둠과 함께 사양 없이 불었다. 붉게 칠해진 기둥에 들러 붙은 귀뚜라미도 어딘가로 가버렸다.
 하인은 목을 움츠리고 야마부키카자네를 덧댄 감색 옷을 덮은 어깨를 높이 들며 문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바람 걱정 않고 사람 눈에 들 염려 없이 하룻밤을 편히 잠들만한 곳이 있다면 일단 그곳에서 밤을 지새울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행히 문 위의 다락으로 오르는 폭이 넓은, 역시나 붉게 칠해진 사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위쪽이라면 설령 사람이 있다 한들 죄 시체뿐이리라. 하인은 허리춤에 찬 끝이 셋으로 갈라진 자루의 검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짚신을 신은 발을 사다리의 가장 밑부분에 걸쳤다.
 그로부터 몇 분 후의 일이었다. 라쇼몬의 다락으로 오르는 사다리의 중간에서 한 남자가 고양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이며 위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다락 위에서 뻗는 불빛이 남자의 오른뺨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짧은 수염 속에 붉게 부풀어 오른 여드름을 지닌 뺨이었다. 하인은 당초 이 위에 시체만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리를 두세 계단 오르니 위에서 누군가가 불을 붙이고, 심지어는 불을 옮기고 있는 듯했다. 탁한 노란빛이 천장 구석에 쳐진 거미줄을 흔들흔들 비추기에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이 라쇼몬 위에서 불을 밝힌 마당이니 평범한 사람은 아니리라.
 하인은 도마뱀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경사가 급한 사다리를 기다시피하여 가장 높은 곳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몸을 되도록 평평하게 눕히고는 목만 최대한 앞으로 뻗어 머뭇머뭇 다락 내부를 훔쳐본다.
 다락 내부는 소문처럼 여러 시체가 적당히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불빛이 닿는 범위가 생각보다 좁아 수는 미처 알 수 없었다. 단지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던 건 개중에 전라인 시체와 옷을 입은 시체가 있단 점이었다. 물론 남자도 여자도 뒤섞여 있다. 그렇게 모든 시체는 과거에 인간이었던 사실마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흙을 빚어 만든 인형처럼 입을 벌리고 손을 뻗은 채로 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심지어 어깨나 가슴처럼 높은 부분에 희미하게 불빛이 들어, 낮은 부분의 그림자를 한 층 어둡게 하며 영원히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인은 시체가 부패해 나는 악취에 저도 모르게 코를 붙잡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코를 붙잡는 걸 잊었다. 어떤 강한 감정이 이 남자의 후각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하인의 눈은 그때, 처음으로 시체 사이에서 몸을 움츠리는 인간을 보았다. 농암적색의 옷을 입은 키가 작고 마르며 백발을 한 원숭이 같은 노파였다. 노파는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한 시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머리가 긴 걸 보면 아마 여자 시체이리라.
 하인은 6의 공포심과 4의 호기심에 잠시 호흡하는 것마저 잊었다. 옛 기록의 말을 빌리자면 "머리가 거꾸로 선 것"처럼 느낀 것이다. 그러자 노파는 횃불을 마루판 사이에 꽂아놓고는 이제까지 바라보던 시체의 목에 두 손을 뻗었다. 마치 부모 원숭이가 아이 원숭이의 이라도 잡아주듯이 긴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손을 따라 빠져나갔다.
 머리카락이 하나씩 뽑힐 때마다 하인의 마음에서 공포가 조금씩 사라졌다. 동시에 노파를 향한 격한 증오가 조금씩 다가왔다. ――아니, 노파를 향했다기엔 어폐가 있을까. 오히려 갖은 악을 향한 반감이 1분마다 강해졌다. 이때, 누군가가 이 하인에게 방금 문 아래에서 생각하던 아사할지 도둑이 될지 하는 문제를 다시 꺼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하인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아사를 택했으리라. 그만큼이나 하인의 악을 향한 증오는, 노파가 마루에 꽂은 횃불처럼 기세 좋게 불탔다.
 하인은 물론 노파가 왜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합리적으론 그 행위를 선악 중 하나로 치부할 수 없을지 몰랐다. 하지만 하인에겐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이 라쇼몬 위에서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 행위는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악이었다. 물론 하인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도둑이 되려 생각했던 건 진작에 잊어버렸다.
 하인은 두 다리에 힘을 넣고 갑자기 사다리 위로 뛰어올랐다. 검에 손을 얹으며 큰 걸음으로 노파를 향해 걸어갔다. 노파가 놀란 건 말할 것도 없으리라.
 하인을 본 노파는 마치 당겨진 쇠뇌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이 자식, 어딜 가느냐."
 하인은 노파가 시체를 걷어차며 황급히 도망치려는 걸 막고 그렇게 매도했다. 노파는 그럼에도 하인을 떠밀며 떠나려 한다. 하인 또한 보낼 수 없다며 끌고 온다. 두 사람은 한동안 시체 속에서 말도 없이 뒤엉켰다. 하지만 승패는 처음부터 확연했다. 하인은 끝내 노파의 팔을 붙잡아 억지로 비틀어 넘어트린다. 마치 닭의 다리만 같은 뼈와 가죽 밖에 없는 팔이었다.
 "뭘 하려 했지. 말해라. 말하지 않으면 이렇게 해주마."
 하인은 노파를 밀치고는 대뜸 검을 뽑아서 하얀 강철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럼에도 노파는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손을 벌벌 떨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눈을, 눈덩이가 눈꺼풀 바깥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동그랗게 뜨고, 벙어리처럼 집요하게 입을 다문다. 그런 모습에 하인은 처음으로 노파의 생사가 자신의 손안에 지배되고 있다는 걸 명백히 의식했다. 그리고 그런 의식은 이제까지 격하게 타오르던 증오를 어느 틈엔가 식게 만들었다. 그 후에 남은 건 그저 어떤 일을 마치고 그게 원만히 해결되었을 때의 부드러운 자신감과 만족뿐이었다. 때문에 하인은 노파를 내려다보며 살짝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검비위사청의 사람이 아니다. 지금 막 이 문 아래를 지나가던 여행자지. 그러니까 너를 붙잡아 어쩔 생각은 없다. 단지 지금 이 문 위에서 뭘 하려 했는지, 그것만 말하면 돼."
 그러자 노파는 동그랗게 뜬 눈을 한 층 더 크게 뜨며 하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눈꺼풀이 붉어진 육식조 같은 날카로운 눈으로 보았다. 그러고는 주름으로 거의 코와 일체가 된 입술을 뭐라도 우물거리듯 움직였다. 얇은 목에선 뾰족한 목뼈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때, 목에선 까마귀가 우는 듯한 목소리가 신음하듯 하인의 귀로 전해졌다.
 "이 머리를 뽑아서, 이 머리를 뽑아서 가발로 만들려 했지."
 하인은 노파의 답이 의외로 평범하여 실망했다. 그렇게 실망함과 동시에 이전의 증오가, 차가운 매도와 함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런 기색이 상대에게도 전해진 것이리라. 노파는 한 손에 시체 머리에서 뽑은 긴 머리를 여전히 쥐며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그래, 죽은 사람의 머리를 뽑는 건 나쁜 일일지 모르지. 하지만 여기에 죽어 있는 사람은 모두 그 정도는 당해도 싸는 인간들이야. 지금 내가 머리를 뽑은 여자는 뱀을 사척씩 잘라 말린 걸 말린 생선이랍시고 군인들에게 팔아먹었지. 역병으로 죽지 않았다면 지금도 팔았을 거야. 심지어 이 여자가 파는 말린 생선은 맛이 좋다며 군인들이 빠짐없이 사 먹었다는군. 나는 이 여자가 나쁜 짓을 했다 생각하지는 않아. 그러지 않으면 아사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내가 지금 하는 일도 나쁜 일은 아니잖나? 이것도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테니 어쩔 수가 없지. 그럼 그렇게 어쩔 수 없는 걸 잘 알던 이 여자는 나도 봐주지 않겠나?"
 노파는 대강 그런 말을 했다.
 하인은 검을 수납하고 자루를 왼손으로 누르며 냉정히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오른손으로는 뺨에 붉게 부풀어 오른 커다란 여드름을 신경 쓰며 들었다. 하지만 듣는 도중에 하인의 마음에 어떤 용기가 심어졌다. 그건 방금 문 아래에서 이 남자에게 빠져 있던 용기였다. 또 방금 전 문 위로 올라 노파를 붙잡았을 당시의 용기하고는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용기기도 했다. 하인은 아사할지 도적이 될지 고민만 한 게 아니다. 그때 이 남자의 심정을 좀 더 이야기 해보자면, 아사 운운은 거의 생각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의식 바깥으로 몰려 있었다.
 "분명 그렇겠지."
 노파의 이야기가 끝나자 하인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확인했다. 그렇게 한 발 앞으로 나서서는 불쑥 오른손을 여드름에서 떼어 노파의 멱살을 잡고는 물어 뜯듯이 말했다.
 "그럼 내가 벗겨 먹어도 원망해선 안 되겠지.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몸이니까."
 하인은 재빠르게 노파의 옷을 벗겨냈다. 그리고 발에 매달리려는 노파를 거칠게 시체 위로 밀어 쓰러트렸다. 사다리까지는 고작해야 다섯 걸음. 하인은 벗긴 옷을 품에 안고 순식간에 사다리를 타고 밤의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잠시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노파가 시체 안에서 전라의 몸을 일으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노파는 중얼거리는 듯,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여전히 타는 불빛에 의지해 사다리 부근까지 기어갔다. 그러고는 짧은 백발을 기울여 문 아래를 내려다 본다. 밖에는 그저 어둡고 끝을 알 수 없는 밤만 펼쳐져 있다.
 하인의 행방은 아무도 알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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