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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84

금주 - 다자이 오사무 술을 끊으려 한다. 요즘 술은 인간을 비굴하게 만드는 듯하다. 과거에는 술을 통해 소위 활력을 길렀다는 모양인데 요즘은 단지 정신을 얄팍하게 만들 뿐이다. 요즘 들어선 술을 미워하는 지경이다. 만에 하나 금주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술잔을 박살 내야 한다. 평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정신이 얼마나 인색해져 있는가. 한 병의 배급주에 열다섯 개의 눈금을 긋고 매일 한 눈금씩 마시고 이따금 지나쳐 두 눈금이라도 마시면 곧장 한 눈금치 만큼의 물을 붓고는 병을 눕혀 흔들어 술과 물의 화합 발효를 꾀하고 있으니 정말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다. 또 배급 나온 540ml 가량의 소주에 질 나쁜 녹차를 한가득 넣고 그 갈색 물을 작은 잔에 붓고는 이 위스키엔 찻기둥이 서있군, 유쾌해 하고 허세를 부리며 호쾌하.. 2021. 10. 11.
하나의 약속 - 다자이 오사무 난파되어 노도에 삼켜져 해안가에 내동댕이 쳐져 필사적으로 매달린 곳은 등대의 창가였다. 아, 살았구나. 도움을 청하려 창문 안을 보니 등대지기와 아내, 그 어린 딸이 다소곳하면서도 행복한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다. 아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내 비참한 목소리 하나로 이 단락도 전부 깨지고 말 테지. 그런 생각을 했더니 목으로 나오려던 "살려줘!"란 목소리가 아주 잠깐 당혹스러워 한다. 아주 잠깐이다. 곧 큼지막한 파도가 덮쳐 와 그 소심한 피난자를 삼켜 먼 바다까지 납치했다. 이제 살아날 도리는 없다. 이 조난자의 아름다운 행위를 대체 누가 보았을까. 아무도 보지 못 했다. 등대지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일가단락의 식사를 계속했을 게 분명하다. 조난자는 노도에 삼켜져(혹은 눈보라 부는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2021. 10. 7.
6월 19일 - 다자이 오사무 아무런 볼일도 없이 원고용지를 마주했다. 이런 게 진짜 수필이란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6월 19일이다. 맑은 날이다. 내가 태어난 날은 메이지 42년 6월 19일이다. 나는 어릴 적에 묘하게 삐뚤어져서 자신을 부모님의 진짜 아이가 아니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형제 중에서 나 혼자만 동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용모가 곱지 않아 일가족이 챙겨주는 통에 서서히 삐뚤어진 걸지 모른다. 한 번은 창고에 들어가 여러 서류를 찾아 본 적도 있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옛날부터 우리 집에 출입하던 사람들에게 몰래 물어보고 다닌 적도 있다. 그 사람들은 크게 웃었다. 내가 태어난 날의 일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이었죠. 저 작은방에서 태어나셨어요. 모기장 안에서 나셨지요. 굉장히 순조로웠어요. 금.. 2021. 6. 19.
내가 좋아하는 말 - 다자이 오사무 다들 너무 그럴싸한 말을 쓰려고 합니다. 미사를 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우가이가 좋은 말을 했습니다. "술을 기울이되 효모를 마시진 마라." 고로 말합니다. 제게 좋아하는 말은 없습니다. 2021. 6. 5.
소설의 재미 - 다자이 오사무 소설이란 본래 여자들이 읽는 것이지 소위 머리 좋은 어른이 얼굴색을 바꿔가며 읽거나, 하물며 탁상을 두드리며 독후감을 논하는 성질의 물건이 아닙니다. 소설을 읽고 자세를 고쳤다느니 고개를 숙였다느니 하는 사람은, 농담이라면 또 몰라도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미치광이의 행동이라 해야 할 테지요. 이를 테면 집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내가 소설을 읽고 남편이 출근 전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묶으며 요즘 어떤 소설을 읽냐고 묻습니다. 아내가 대답하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가 재밌었어요. 남편이 조끼 단추를 잠그며 바보 취급하듯이 묻길 어떤 내용인데. 아내가 살짝 상기되어 그 줄거리를 이야기하다 스스로의 설명에 감격해 웁니다. 남편은 웃옷을 입으며 말하길 흠, 그건 재밌겠네. 그렇게 남편은 출근하여 밤.. 2021. 6. 3.
달려라 메로스 - 다자이 오사무 메로스는 격노했다. 기필코 저 포악하기 짝이 없는 왕을 없애겠다고 결의했다. 메로스는 정치를 알지 못한다. 메로스는 마을의 양치기에 지나지 않으니까. 피리를 불며 양과 놀며 지내왔다. 그럼에도 사악한 것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욱 민감하였다. 오늘, 메로스는 날이 채 밝지도 않았을 때 마을을 나서 들판을 넘고 산을 넘어 십 리는 족히 떨어진 이 시라크스시까지 찾아왔다. 메로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아내도 없다. 열여섯 먹은 소심한 여동생과 함께 집을 썼다. 이 동생은, 가까운 시일 내로 마을의 한 기특한 양치기 청년에게 시집을 가기로 하였다.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다. 때문에 메로스는 신부 복장이나 결혼식을 위한 잔치 거리를 사러 이 먼 도시까지 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물품들을 갖추고는 도시의..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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