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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다자이 오사무

달려라 메로스 - 다자이 오사무

by noh0058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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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로스는 격노했다. 기필코 저 포악하기 짝이 없는 왕을 없애겠다고 결의했다. 메로스는 정치를 알지 못한다. 메로스는 마을의 양치기에 지나지 않으니까. 피리를 불며 양과 놀며 지내왔다. 그럼에도 사악한 것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욱 민감하였다. 오늘, 메로스는 날이 채 밝지도 않았을 때 마을을 나서 들판을 넘고 산을 넘어 십 리는 족히 떨어진 이 시라크스시까지 찾아왔다. 메로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아내도 없다. 열여섯 먹은 소심한 여동생과 함께 집을 썼다. 이 동생은, 가까운 시일 내로 마을의 한 기특한 양치기 청년에게 시집을 가기로 하였다.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다. 때문에 메로스는 신부 복장이나 결혼식을 위한 잔치 거리를 사러 이 먼 도시까지 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물품들을 갖추고는 도시의 큰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메로스에게는 죽마고우가 있었다. 세리눈티우스였다. 지금은 이 시크라스에서 석공을 하고 있다. 이제부터 그 친구를 찾아갈 생각이다. 오랜만에 만날 생각을 하니 찾아가는 게 즐거웠다. 걷는 사이 메로스는, 마을의 모습이 수상했다. 한산했다. 이미 해야 졌으니 어두운 건 당연하다. 하지만 어쩐지 밤 하나 때문이라고 꼭 집어 말하기에는 괜스레 쓸쓸했다. 느긋한 메로스도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길에서 만난 젊은이를 붙잡고는, 무슨 일이 있었나, 2년 전에 이 마을을 찾았을 때에는 밤에도 모두가 노래를 부르고, 길거리는 소란스러웠는데, 하고 물었다. 젊은이는 고개를 젓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간 걸어 한 노인과 만나, 이번에는 더욱 강한 말투로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메로스는 양손으로 노인의 몸을 흔들며 한 번 더 물었다. 그러니 노인은 기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께서 사람을 죽이십니다."
"왜 죽이는 것인가."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십니다만, 모두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였느냐?"
"네, 처음은 자신의 매부를. 그리고 자신의 후세를 이을 아들 분을, 여동생 분을, 여동생의 아들을, 황후님을, 그리고 현명하신 신하, 알키스 님까지 죽이셨습니다."
"놀랍군. 왕이 미친 것이냐?"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믿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요즘은 신하의 마음도 의심하게 되어, 조금이라도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는 인질을 하나씩 내놓으려 명하고 계십니다. 명을 거부하면 십자가에 걸고 사형시킵니다. 오늘만 해도 여섯 명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말에 메로스는 격노했다. "어처구니없는 왕이다. 살려두어서는 아니 된다."
 메로스는 단순한 남자였다. 산 물건을 그대로 짊어 맨 채, 느릿느릿 왕궁으로 향했다. 그는 바로 순찰을 하던 경사에게 포박되었다. 조사를 받고, 메로스의 품 안에서 나온 단검 때문에 소란이 커지고 말았다. 그렇게 메로스는 왕의 앞에 끌려 나갔다.
"이 단도로 뭘 할 생각이었는지 말하여라!" 폭군 디오니스는 조용히, 그렇지만 위엄을 가지고 물었다. 그 왕의 얼굴은 창백했고, 미간에 잡힌 주름은 지독히 깊었다.
"폭군의 손에서 이 도시를 구해내는 것이다." 메로스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네가?" 왕은 그런 메로스가 어리석다는 양 비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이군. 네가 내 고독을 아느냐?"
"헛소리 마라!" 메로스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반박했다.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는 건 가장 부끄러운 악덕이다. 왕은 백성의 충성심마저 의심하고 있다."
"의심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걸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너희다. 사람의 마음이란 믿을 게 못 되지. 사람은 사욕의 덩어리이다. 믿을 것이 못 돼." 폭군은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평화를 바라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위한 평화란 말인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평화인가?" 이번엔 메로스가 비웃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여놓고 어디서 평화를 논하는가."
"닥쳐라, 비천한 것." 왕은 고개를 들고 응했다. "입으로는 얼마든지 깔끔한 척을 할 수 있지. 나에게는 사람의 깊은 곳에 있는 것이 훤히 보인다. 네놈도 마찬가지다. 책형에 처한 뒤에 울며불며 사과해도 소용 없을 줄 알아라."
"그래, 아주 영리한 왕이로군. 그렇게 자신에게 푹 빠져 있으라지. 나는 이미 죽을 각오로 여기에 왔다. 목숨 구걸 따위 할 생각도 없어. 다만――" 메로스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는 발밑을 바라보며 주저하더니, "다만 저에게 온정을 배풀 수 있다면, 처형까지 3일의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하나뿐인 여동생의 결혼이 멀지 않았습니다. 3일 이내에 결혼식을 지켜보고, 반드시 이곳에 돌아오겠습니다."
"웃기는군." 폭군은 쉰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거짓말을 제법 크게 하는군. 도망친 새가 돌아오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네. 돌아옵니다." 메로스는 필사적으로 주장했다. "기필코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단 3일 간만 저를 살려주시지요. 여동생이 제가 돌아올 것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를 믿지 못 하시겠다면, 좋습니다. 이 마을에 시레눈티우스라는 석공이 있습니다. 제 둘도 없는 친구지요. 그 자를 인질로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제가 도망쳐 셋째 날의 해가 질 때까지 여기에 두 발로 서있지 않다면, 그 친구를 대신 죽이시면 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잔혹한 생각을 품고는 웃었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게 뻔하다. 이 거짓말쟁이에게 속는 척을 하여 내버려 두는 것도 재미있겠군. 그렇게 대신 나선 남자를 셋째 날에 죽이는 것도 볼만할 거야. 이래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며 슬픈 표정을 짓고, 그 남자를 처형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정직한 녀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야.
"부탁을 들어주겠다. 그 자를 부르도록. 딱 3일이다. 셋째 날의 일몰까지 돌아오면 된다. 늦는다면 그 남자를 키필코 죽이고 말겠다. 아니, 조금 늦는 것도 좋겠군. 그러면 네 죄는 영원히 잊어주겠다."
"무, 무슨 소리를."
"하하. 목숨이 소중하다면 늦으면 된다. 네 마음은 잘 알고 있으니."
 메로스는 속이 답답해서 발만 동동 구른다. 마음껏 뱉어 내고 싶었던 것이다.
 죽마고우 세리눈티우스는 심야, 왕궁으로 불렸다. 폭군 디오니스의 앞에서 떠나는 친구와 남는 친구는 2년 만에 서로 마주했다. 메로스는 친구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한다. 세리눈티우스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메로스를 껴안았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리눈티우스는 포박되었다. 메로스는 바로 출발했다. 초여름, 별이 하늘을 가득 매운 밤의 일이다.
 메로스는 그날 밤, 하루도 자지 않고 10리의 길을 서둘렀다. 마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오전, 해는 이미 높게 떠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들판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메로스의 열여섯 먹은 여동생도 오빠를 대신해 양들을 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오빠의, 피로에 가득 찬 모습을 보고는 놀랐다. 그렇게 깐깐하게 오빠를 향한 질문 공세가 시작된다.
"아무것도 아냐." 메로스는 억지로 웃어 보인다. "도시에 일이 남아 있어. 바로 돌아가야만 해. 내일 네 결혼식을 열자. 빠른 편이 좋겠지."
 여동생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뻐? 예쁜 옷도 사 왔어. 자, 어서 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와. 결혼식을 내일 올릴 거라고."
 메로스는 또 비틀비틀 걸어서 집에 돌아가 제단과 장식, 축하 자리를 갖춘다. 그러고는 곧장 마루에 쓰러지더니 호흡도 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눈을 떠보니 밤이었다. 메로스는 일어나서 곧장 신랑의 집을 찾았다. 그러고는 조금 사정이 생겼으니 결혼식을 내일로 해달라 부탁했다. 신랑이 될 양치기는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건 안 된다, 우리는 아직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으니 포도의 계절까지 기다려 달라 대답했다. 메로스는 기다릴 수 없다, 어떻게든 내일로 해달라고 더욱 밀어붙였다. 신랑 될 사람도 완고했다. 도통 승낙을 내려주지 않은 것이다. 동이 틀 때까지 논의를 이어가서야 겨우 신랑을 달래 납득시킬 수 있었다. 결혼식은 한낮에 열렸다. 신랑신부의 신을 향한 선언이 끝나니, 검은 어둠이 하늘을 뒤덮고 뚝뚝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끝내는 굴대마저 떠내려 갈 정도의 큰 비가 되어버렸다. 식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은 무언가 불길한 걸 느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마음을 추수려 좁은 집안에서 푹푹 찌는 것도 견뎌내며 밝게 노래하고 손뼉 쳤다. 메로스도 활짝 웃으며 잠시간 왕과 나눈 약속마저도 잊을 수 있었다. 결혼식은 밤에 들어서 더욱 흥이 물올랐고, 사람들은 바깥의 호우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메로스는 평생 이렇게 있고 싶다고 바랐다. 동생 부부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몸이 제것이 아니었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메로스는 자신을 채찍질하여 출발을 결의했다. 내일 일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다. 잠시 눈을 붙이고 바로 출발하자. 그런 생각을 한다. 그쯤 되면 제법 비도 잔잔해져 있으리라. 조금이라도 길게 이 집에 머물고 싶었다. 메로스 정도의 남자에게도 역시 미련이란 있기 마련. 환희에 취해 있는 동생에게 다가가,
"축하해. 나는 지쳤으니까 잠깐 눈 좀 붙일게. 일어나면 바로 도시로 나갈 거야. 중요한 일이 있어. 이제는 내가 없어도 남편이 있으니까 쓸쓸할 일도 없지? 네 오빠가 가장 싫어하는 건 사람을 의심하는 것과 거짓말이야. 너도 그건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남편하고 어떤 비밀도 만들어서는 안 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야. 네 오빠는 분명 대단한 남자니까 너도 그걸 긍지로 가지고 있어."
 동생은 꿈이라도 보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메로스는 남편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준비가 부족한 건 서로 매한가지야. 우리 집도 보석이라고는 여동생하고 양이 전부니까.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 전부 주지. 그리고 또 하나, 메로스의 동생이 된 걸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신랑은 손을 비비적거리며 부끄러워한다. 메로스는 웃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들 사이에서 죽은 듯이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여명의 때였다. 메로스는 벌떡 일어난다. 늦어 버렸나, 아니, 아직은 괜찮아. 바로 출발하면 약속의 시간까지 충분하다. 오늘은 그 왕에게 사람의 신의를 보여주겠다. 그리고 웃으며 형벌대 위에 올라가주마. 메로스는 유유히 준비를 시작했다. 비도 제법 양이 줄어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다. 메로스는 양팔을 크게 젓고는 빗속을 화살처럼 달려나간다.
 나는 오늘 밤 죽을 것이다. 죽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나를 믿고 대신 나서준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왕의 간사한 지혜를 깨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달려야만 한다. 그렇게 나는 죽을 터이다. 젊을 적부터 명성을 지켜라. 잘 있거라, 고향이여. 젊은 메로스는 괴로웠다. 몇 번이나 멈춰 설뻔했다. 에잇, 에잇, 그렇게 큰 소리를 질러 자신을 자책하며 달렸다. 마을을 나와, 들판을 가로지르고, 숲을 넘어서고, 옆 마을에 도착했을 때에는 비도 그치고 해는 높게 떠있어, 슬슬 더워지기 시작했다. 메로스는 흠뻑 젖은 이마를 격하게 문지르고, 여기까지 오면 괜찮다. 이제 고향을 향한 미련은 없다. 동생과 남편은 분명 좋은 부부가 되리라. 나에게 지금 걸리는 것은 전무하다. 곧장 왕궁으로 달려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도 없다. 천천히 걸어가자. 그렇게 천성적인 느긋함을 되찾고 좋아하는 노래를 코로 부르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걸어 2리, 3리를 지나고 이윽고 절반쯤 도착했을 때, 재난이 찾아왔다. 메로스의 발이 딱하고 대지에 멈춰 선다. 보아라, 전방의 강을. 어제의 호우로 산의 수원지가 범람하여 탁류를 타고 하류에 모인 것이다. 맹렬한 기세로 다리를 파괴하고, 고막을 강하게 내리치는 격류가 산산조각난 다리 조각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망연자실하여 멈춰 섰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고 소리 높여 보았지만, 배는 남김없이 물결에 휩쓸려 버렸고, 강지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물결은 더욱 부풀어 올라 바다처럼 되었다. 메로스는 강기슭에 웅크리고는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참지 않고 제우스에게 손을 뻗으며 애원했다. "아아, 이 매서운 흐름을 멈추어주소서!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태양도 이미 중천에 떠있습니다. 저것이 져버리기 전에 왕궁에 도착하지 않으면 그 소중한 친구가 저를 대신해 죽고 맙니다."
 탁류는 메로스의 외침을 비웃기라도 하는지, 더욱 격해졌다. 물결은 물결을 부르고, 비틀고, 부채질한다. 그렇게 시간은 사라져 간다. 이제는 메로스도 각오했다. 헤엄쳐 넘어갈 수밖에 없다. 아아, 신들이여 지켜봐 주시지요! 탁류에도 지지 않는 사랑과 진실됨의 위대한 힘을 지금 발휘해 보일 터이니. 메로스는 흐름에 파고들어, 백 마리의 뱀처럼 꿈틀거리는 물결을 상대로 필사적인 투쟁을 개시했다. 혼신의 힘을 팔에 담아 다가오는 소용돌이를 가르며, 무턱대고 나아가는 고군분투의 모습을, 신도 불쌍타 여겼는지, 끝내는 연민을 품어주었다. 흘러가면서도 반대편 나무뿌리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메로스는 말처럼 몸을 크게 떨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시라도 허투루 쓸 수는 없었다. 태양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언덕을 올라 안심하고 있을 때, 불쑥 눈앞에 한 무리의 산적이 나타났다.
"기다려."
"무슨 짓이냐. 나는 태양이 기울 때까지 왕궁에 가야만 한다. 비켜라."
"그럴 수는 없지. 가진 걸 전부 놓고 가라."
"나에게는 이 목숨 말고는 남은 게 없다. 그 하나뿐인 목숨도 이제는 왕에게 주어야만 한다."
"그 목숨이 필요한 거다."
"그럼 왕의 명령으로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군."
 산적들은 말없이 일제히 곤봉을 들어 올렸다. 메로스는 훽 몸을 꺾고는 날아가는 새처럼 가까이에 있던 한 사람을 덮쳐 그 곤봉을 빼앗았다.
"유감이지만 정의를 위해서다!" 맹렬한 일격. 바로 세 사람을 쓰러트리고 남은 자들의 기가 죽은 틈을 타 달려 나가 언덕을 돌파했다. 단숨에 언덕을 내려왔지만, 역시나 피로가 쌓인 데다가 오후의 작열하는 태양이 쨍하고 내려와 메로스는 몇 번이나 현기증을 느꼈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하고 마음을 다잡고 비틀비틀 두세 걸음을 걷고는 끝내 무릎을 꿇었다. 일어설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울기 시작했다. 아아, 아, 탁류를 이겨내고, 산적을 셋이나 쓰러트려 여기까지 달려온 메로스여. 진정한 용사 메로스여. 이런 곳에서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다니 한심하구나. 너의 사랑하는 벗은 너를 믿었기에 죽어야만 한다. 너는 희대의 불신자, 그야말로 왕의 인간상에 일치하는 자이다. 그렇게 자신을 타일러 보지만, 온몸이 마비되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거리의 초원에 철퍼덕 쓰러졌다. 몸이 지치면 정신도 지치기 마련.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용사에게 어울리지 않은 섞은 근성이 마음 구석을 좀먹었다. 나는 이렇게나 노력한 것이다. 약속을 깰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신의 보살핌 아래에서 나는 최대한 노력했다.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달리지 않았나. 나는 불신자가 아니다. 아아, 가능하다면 내 가슴을 찢어발겨 붉은 심장을 보고 싶구나. 사랑과 신뢰의 혈액만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 심장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 중요한 때에 정신도 근성도 다하고 말았다. 나는 불행한 남자다. 분명 비웃음 당하겠지. 나의 가족도 비웃음 당하겠지. 나는 친구를 속였다. 도중에 쓰러지는 건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아,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 이것이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세리눈티우스여, 용서해다오. 너는 나를 믿어주었다. 나도 너를 속이지 않았다. 우리는 정말로 두터운 벗이었던 것이다. 그 어느 때도 어두운 마음을 서로의 가슴에 품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래,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고맙다, 세리눈티우스여. 잘도 나를 믿어주었다. 그걸 생각하면 견딜 수 없다. 벗과 벗 사이의 신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보석일 테니까. 세리눈티우스여, 나는 달렸다. 너를 속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믿어다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탁류를 돌파하고, 산적 무리도 뿌리치고 단숨에 언덕을 내려오지 않았나. 나정도 되는 남자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아아, 이 이상 나에게 바라지 말아다오. 내버려다오.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나는 졌으니까. 한심하다고 웃어다오. 왕은 나에게 조금 늦게 오라 속삭였다. 늦으면 너를 죽이고 나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왕의 비겁함을 증오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왕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어. 나는 늦어버리겠지. 왕은 나를 비웃고 방면하리라. 그러면 나는 죽는 것보다 괴롭겠지. 나는 영원한 배신자가 되는 것이야. 지상에서 가장 명예스럽지 못한 인종이지. 세리눈티우스여. 나도 죽을 것이다. 너와 함께 죽게 해다오. 너만은 나를 믿어주었을 거야. 아니, 그것도 나의 착각인가? 아아, 차라리 악덕자로서 살아남을까. 마을에는 나의 집이 있으니까. 양도 있지. 동생 부부도 설마 나를 마을에서 내쫓지는 못할 거야. 정의니, 신뢰니, 사랑이니, 생각해 보면 다 하찮기 짝이 없어.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 세계의 정법 아니었나. 아아, 이제는 모든 게 바보 같군. 나는 지독한 배신자인 것이다. 이제는 다 될 대로 되라지. 도리가 없어. ――사지를 던지고 몸을 배배 말았다.
 문득 귀에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고개를 들고 숨을 삼키고 귀를 기울인다. 근처에서 물이 흐르고 있는 모양이다. 비틀비틀 일어나 보니, 바위 사이에서 무언가가 작게 속삭이며 용수가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메로스는 마치 그에 이끌리기도 하는 것처럼 몸을 굽혔다. 물을 양손으로 받아 한 모금 마신다. 후우, 하고 긴 한숨이 나와 꿈에서 깨는 것만 같았다. 걸을 수 있다. 가자. 몸의 피로 회복과 함께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의무 달성의 희망이었다. 자신을 죽여 명성을 지킬 희망이었다. 기울어 가는 태양은 붉은빛을, 나무의 잎에 던져, 잎도 가지도 불타는 것처럼 빛나고 있다.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 않나. 나는 신뢰받고 있다. 나의 목숨 같은 건 아무 문제없다. 죽어서 사과한다는 헛소리는 이제 할 수 없다. 나는 신뢰에 대답해주어야만 한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오직 그것 하나. 달려라! 메로스.
 나는 신뢰받고 있다. 신뢰받고 있다. 방금 전에 들려온 악마의 속삭임은 꿈이다. 나쁜 꿈이다. 잊으면 된다. 오장 육부가 지쳐 있을 때에는 불쑥 그런 꿈도 꾸는 것이다. 메로스, 네 수치가 아니다. 역시 너는 진정한 용사다. 다시 일어서 달리고 있지 않은가. 고맙다! 나는 정의의 사도로서 죽을 수 있으니까. 아아, 태양이 기울어 간다. 점점 기울어 간다. 기다려주십시오, 제우스여. 저는 태어날 때부터 정직한 남자였습니다. 이대로 정직한 남자로 남아 죽게 해주시지요.
 행인을 밀고, 뛰어넘어 메로스는 검은 바람처럼 달렸다. 평원에서 열린 잔치 중앙을 가로질러 사람들을 눕히고, 개를 차서 날려버리고, 작은 강을 뛰어넘고, 조금씩 기울어 가는 태양보다 열 배는 빨리 달렸다. 일단의 여행자와 엇갈렸을 때, 불길한 대화가 귀에 들려왔다. "지금은 그 남자도 형벌대에 올라가 있겠지." 그래, 그 남자, 그 남자를 위해 나는 이렇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남자를 죽게 둘 수는 없다. 서둘러라 메로스. 늦어서는 아니 된다. 사랑과 진실됨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람 따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메로스는 지금, 거의 전라나 다름없었다. 호흡도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두 번, 세 번 입에서 피가 나왔다. 보인다. 저 멀리서 작게, 시라크스의 탑루가 보였다. 탑루는 석양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아, 메로스 님."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과 함께 들려왔다.
"누구냐." 메로스는 달리며 물었다.
"피로스트라스트라고 합니다. 당신의 벗인 세리눈티우스 님의 제자이지요." 그 젊은 석공도 메로스의 뒤를 따라 달리며 외쳤다. "이제는 글렀습니다. 헛수고입니다. 이제 그만 달리시지요. 이제 그분을 구할 수는 없어요."
"아니, 아직 태양은 지지 않았다."
"지금 막 그분이 사형에 처해진다고 합니다. 아아, 당신은 늦고 말았습니다. 원망스럽기 그지없어요. 아주 조금, 조금이라도 일렀다면!"
"아니, 아직 태양은 지지 않았다." 메로스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마음을 품고 붉고 커다란 석양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릴 수밖에 없다.
"그만하시지요. 이제 그만 달리시죠. 이제는 자신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분께서는 당신을 믿었습니다. 형장에 끌려가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왕께서 아무리 그분을 놀려도, 메로스는 옵니다, 하고 대답하며, 강한 신념을 품고 있다는 걸 보이셨습니다."
"때문에 달리는 것이다. 그가 나를 믿고 있으니 달리고 있는 것이다. 늦지 않는다. 늦지 않으면 아무 문제없어. 사람의 목숨도 문제없는 것이야. 나는 더욱 크고 무서운 것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와라! 피로스트라토스."
"아아, 드디어 미쳐버렸나. 그럼, 그래, 달려 보아라. 어쩌면 늦지 않을 수도 있어. 달려 보아라."
 말할 것도 없다. 아직 태양은 지지 않았으니까. 메로스는 마지막 사력을 다해 달렸다. 메로스의 머리는 텅 비어 있다. 그 어떤 생각도 하고 있지 않다. 그저 영문 모를 거대한 힘에 이끌려 달렸다. 태양은 천천히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마지막 한 편의 빛마저도 사라지려 할 그때, 메로스는 질풍처럼 형장에 돌입했다. 늦지 않았다.
"기다려라. 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메로스가 왔다. 약속대로 지금 돌아왔다." 그렇게 큰 소리로 형장의 관중을 향해 외친 것이었지만, 갈라진 목에서는 쇤 목소리만 나올 뿐으로, 군중은 누구 하나 그의 도착을 알지 못 했다. 이미 형벌대 기둥에 걸려 묶인 세리눈티우스는 서서히 위로 향했다. 메로스는 그걸 목격하고 마지막 용맹함을 드러낸다. 방금 전, 탁류를 헤엄친 것처럼 관중을 가르며 달려간다.
"집행자여, 나다! 죽어야 하는 건 나 메로스다! 그를 인질로 삼은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갈라진 목소리로 한껏 외치며 끝내는 형벌대에 올라가, 올라가는 친구의 양발에 매달렸다. 관중이 술렁인다. 멋지다, 용서해라, 수많은 말이 들려온다. 그렇게 세리눈티우스의 포박은 풀어졌다.
"세리눈티우스." 메로스는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나를 때려다오. 있는 힘껏 뺨을 때려다오. 나는 도중에 한 번 나쁜 꿈을 꾸었어. 네가 만약 나를 때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포옹할 자격마저 없을 테니 때려다오."
 세리눈티오스는 다 알겠다는 양 고개를 끄덕이고는, 형장에 가득 울릴만큼 힘차게 메로스의 오른뺨을 때렸다. 때리고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는,
"메로스, 나를 때려다오. 같은 소리가 날 정도로 내 뺨을 때려다오. 나는 3일 동안 단 한 번, 너를 의심했으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너를 의심했어. 네가 나를 때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포옹할 수 없어."
 메로스는 팔을 비틀어 세리눈티우스의 뺨을 때렸다.
"고맙다, 벗이여." 둘 다 동시에 그렇게 말하고는 꼬옥 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군중에서도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폭군 디오니스는 군중의 등 뒤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지만, 이윽고 두 사람에게 다가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였다.
"너희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너희는 내 마음에 이긴 것이야. 신뢰는 결코 공허한 망상이 아니었어. 부디 나를 그 사이에 넣어다오. 나를 너희의 동료로 삼아주었으면 한다."
 드디어 관중들이 환성을 터트렸다.
"만세, 임금님 만세."
 한 소녀가 붉은 망토를 메로스에게 건넸다. 어쩔 줄 모르는 메로스. 친구는 그런 메로스의 귀에 작게 속삭여주었다.
"메로스, 자기 몸을 훑어보고 어서 그 망토를 입는 게 좋아. 이 귀여운 소녀는 네 전라를 모두가 보는 게 분한 것이니까."
 용사의 얼굴은 지독히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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