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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동화 시대의 여명에서, 한 노인과 한 토끼가 혀잘린 참새의 작은 날개 소리를 들으며 노인의 아내의 죽음을 조용히 슬퍼했다. 멀리서 울적히 울리는 건 오니가시마로 통하는 꿈속 바다의 영원히 그칠 일 없는 파도 소리였다. 아내의 시신이 묻힌 땅 위에는 꽃이 없는 벚나무가 얄팍한 청동가지를 공중으로 뻗고 있었다. 나무 위 하늘에선 여명의 반투명한 빛이 맴돌고 있어 숨소리 정도의 바람마저 불지 않았다. 이윽고 토끼는 노인을 위로하면서 앞발을 들어 해변가에 놓인 두 척의 배를 가리켰다. 한 척은 새하얗고, 한 척은 먹을 끼얹은 것처럼 검었다. 노인은 눈물로 젖은 고개를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 시대의 여명에서, 한 노인과 한 토끼는 꽃이 없는 벚나무 아래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힘없이 작별을 고했다. 노인은 주저.. 2021. 2. 24.
예술과 그 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예술가란 무엇보다도 작품의 완성에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에 봉사하는 게 무의미해지고 만다. 이를테면 인도적 감격일지라도, 그것만 추구한다면 단순히 설교를 듣는 정도로도 얻을 수 있을 터이다. 예술에 봉사하는 이상 우리의 작품에 주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적 감격이어야 한다. 그건 오로지 우리가 작품을 완성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 예술을 위한 예술은 자칫 엇나가면 예술 유희설로 추락한다. 인생을 위한 예술은 자칫 엇나가면 예술 공리설로 추락한다. × 완성이란 읽는데 문제가 없는 작품을 갖추는 게 전부가 아니다. 분화발달한 예술상 이상을 제각기 완벽히 실현시키는 일이다. 그런 게 항상 불가능해서야 그 예술가는 부끄러움을 느껴 마땅하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란 .. 2021. 2. 24.
개구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내가 지금 자는 곳 옆에는 오래된 연못이 있는데, 그곳엔 개구리가 잔뜩 있다. 연못 주위에는 갈대와 창포가 무성했다. 그런 갈대나 창포 너머에는 높은 버들 나무들이 기품 있게 바람과 싸웠다. 또 그 너머에는 조용한 여름 하늘이 펼쳐져, 항상 자잘한 유리 조각 같은 구름이 빛났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실제보다도 훨씬 아름답게 연못의 수면에 비쳤다. 개구리는 연못 안에서 하루도 질리지 않고 개굴굴, 고골골하고 울었다. 살짝 들어 보면 도무지 개굴굴, 고골골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격한 의논을 나누는 중이다. 개구리가 말을 하는 게 꼭 이솝 시대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개중에서도 갈댓잎 위에 자리한 개구리는 대학교수 같은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물은 무얼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 개구리가 헤엄.. 2021. 2. 24.
그의 열여덜 장점 ――난부 슈타로 씨의 인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하나. 영어, 러시아어, 독어 등을 할 수 있다. 단 어느 정도 하는지는 알지 못 한다. 둘. 세심하게 성실하다. 편지를 보내면 반드시 답을 받을 수 있다. 셋. 가정을 사랑한다. 특히 어머니한테 잘 한다. 넷, 논쟁에 용맹하다. 다섯. 작품을 다듬는데 열심이다. 글이 느린 건 퇴고에 열심이기 때문이다. 여섯. 자신의 작품 평가에 겸손하다. 태반의 작품은 '그건 글렀지'하고 말한다. 일곱. 월평에 충실하다. 여덟. 어중간한 통달자 행세나 그럴싸한 사치를 부리지 않다. 아홉. 용모와 풍채가 세련되다. 열. 정진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대작을 만들 생각에 취하거나 읽지도 않을 책을 사는 법이 없다. 열하나. 허투루 방탕해지지 않는다. 열둘. 시력이 좋다. 함께 길을 걷고 있으면 먼 곳에 있는 걸 대신 봐주기.. 2021. 2. 24.
열 개의 바늘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하나 어떤 사람들. 우리는 이 세계에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은 어떤 것이든 보고 느끼는 동시에 해부하고 만다. 즉 그 사람들에게 한 송이 꽃은 아름다운 동시에 필시 식물학 교과서에 실린 장미과 식물로 보이리라. 설령 그 장미꽃이 꺾여 있더라도. …… 단지 보고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보다 행복하다. 성실함이라 불리는 미덕 중 하나는 그런 사람들(보고 느끼는 동시에 해부하는)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평생을 무서운 장난에 써먹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갖은 행복이란 해부하기에 감소하고, 동시에 갖은 고통 또한 해부하기에 증가하리라. "태어나지 않았다면' 운운하는 건 그야말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말이다. 둘 우리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선조.. 2021. 2. 24.
된 사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무로우 사이세이는 된 사람이다. 나는 사실 얼마 전까지 무로우 사이세이만큼 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된 사람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한 집안을 이룬 사람이라 생각하면 된다. 혹은 다른 어떤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면 된다. 무로우는 거창하게 형용하면 자연만물 위에 무로우 성좌가 있다며 안하무인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엉덩이를 붙이는 건 결코 간단하지 않다.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면 내 주위에도 태반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두려워 않는다. 내견도――내견이란 말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스스로에게도 자신은 두려울 게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밑바닥에서는 조금이나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공포의 유무를 이야기할 때면 .. 2021.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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