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크리스마스
작년 크리스마스 오후, 호리카와 야스키치는 스다쵸의 구석에서 신바시행 승합자동차를 탔다. 그의 자리는 있었으나 자동차 안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만원이었다. 그뿐 아니라 지진 후 도쿄의 길거리는 자동차를 모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야스키치는 오늘도 평소처럼 주머니에 넣어둔 책을 꺼냈다. 하지만 카지쵸에도 이르지 않은 사이에 기어코 독서만은 단념했다. 이 안에서도 책을 읽으라는 건 기적을 행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적은 그의 직업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원광을 두른 과거의 서양 성자의――아니, 그의 옆에 앉은 가톨릭 선교사는 눈앞에서 기적을 행하고 있다.
선교사는 모든 걸 잊은 것처럼 작은 서양 문자가 적힌 책을 읽고 있다. 나이는 벌써 쉰은 되었으리라. 철 테두리의 코안경을 쓴 닭처럼 얼굴이 붉고 뺨에 짧은 수염을 기른 프랑스인이다. 야스키치는 곁눈질로 그 책을 들여다보았다. Essai sur les……그 뒤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내용은 어찌 되었든 종이가 누렇고 활자가 자그마한 도무지 신문 읽듯이는 읽지 못할 물건이었다.
야스키치는 이 선교사에게 가벼운 적의를 느끼며 멍하니 공상에 잠겼다――수많은 소천사는 선교사 주변에 독서의 평안을 지켜주고 있다. 물론 이교도인 승객 중에는 누구도 소천사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대여섯 명의 소천사는 챙이 넓은 모자 위에 물구나무를 서거나 텀블링을 하는 등 여러 곡예를 연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깨 위에 빼곡히 자리한 대여섯 명도 손님의 얼굴을 둘러보며 천국의 농담을 나누고 있다. 이런, 한 소천사는 귀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가 하면 콧기둥 위에서도 의기양양히 코안경 위에 앉아 있다……
자동차가 멈춘 건 오오덴마쵸였다. 동시에 서너 명의 승객이 한 번에 자동차서 내리기 시작했다. 선교사는 어느 틈엔가 책을 무릎 위에 둔 채 두리번두리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자 승객 하차가 끝나자마자 열하나인가 열둘 쯤 먹은 소녀 하나가 가장 먼저 자동차에 들어왔다. 분홍색 서양 옷에 하늘색 모자를 뒤로 비스듬하게 쓴 묘하게 건방져 보이는 듯한 소녀였다. 소녀는 자동차 한가운데에 있는 진주 기둥을 붙든 채로 양쪽 자리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느 쪽에도 비어 있는 자리가 없었다.
"아가씨, 여기 앉으시죠."
선교사는 두터운 허리를 일으켰다. 말은 정말인지 공을 들인 자신감이 넘치는 일본어였다.
"고마워."
소녀는 선교사와 엇갈려 야스키치 옆에 앉았다. 그 "고마워" 또한 얼굴처럼 되바라진 억양을 품고 있었다. 야스키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예로부터 아이란――특히 소녀는 이천 년 전 이번 달 오늘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갓난아기처럼 순진무구하다 믿고 있다. 하지만 그의 경험에 따르면 아이라도 악당이 없진 않다. 그런 아이들을 하나같이 신성하게 여기는 선 세계에 충만한 센티멘탈리즘이다.
"아가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선교사는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소녀는 무릎 위에 털 뭉치를 굴리더니 제법 그럴싸하게 두 개의 뜨개질봉을 움직이고 있다. 그렇게 눈은 끝없이 뜨개질봉을 쫓으며 아양 섞인 대답을 했다.
"나? 나는 내년에 열두 살 돼."
"오늘은 어디 가시나요?"
"오늘? 오늘은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자동차는 그런 문답 사이에 긴자 거리를 달리고 있다. 달린다기보다는 뛴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치 과거 갈랄리호서 폭풍을 맞이한 그리스도의 배에도 필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선교사는 뒤로 돌린 손으로 진주 기둥을 잡은 채로 몇 번이나 자동차의 천장에 키가 큰 머리를 부딪힐 뻔했다. 하지만 제 몸의 안위는 하느님의 뜻에 맡긴 거지 역시나 미소를 지으며 소녀와 문답을 거듭하고 있다.
"오늘이 며칠인지 아시나요?"
"12월 25일이지."
"네, 12월 25일이죠. 12월 25일은 무슨 날이나요? 아가씨는 알고 계시나요?"
야스키치는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선교사는 교묘히 기독교 전도로 이야기를 옮겨 갈 게 분명했다. 코란과 함께 검을 쥔 이슬람교의 전교는 차라리 검을 찼다는 점에서 인간간의 존경이나 정열 따위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도는 상대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마치 근처에 새로 생긴 양복점의 존재를 가르쳐주듯이 은근히 신을 가르쳐준다. 그럼에도 모르는 체를 하면 이번에는 외국어 수업료 대신에 신앙을 파는 일을 권하고는 한다. 특히 소년이나 소녀에게 그림책이나 장난감을 쥐여주고 몰래 그들의 혼을 천국으로 납치하려는 건 당연히 범죄라 불러야 한다. 야스키치의 옆에 있는 소녀도――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뜨개질하는 손을 움직이며 침착히 대답했다.
"그럼 알고 있지."
"그럼 오늘은 무슨 날이죠? 아시면 말해보세요."
소녀는 그제야 선교사의 얼굴에 생생한 검은 눈동자를 보냈다.
"오늘은 내 생일이야."
야스키치는 저도 모르게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이미 뜨개질에 진지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어떻게 된 건지 앞서 생각한 것만큼 건방지지 않았다. 아니, 되려 귀여움 속에도 지혜의 빛이 깃든 어린 마리아에게도 밀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야스키치는 어느 틈엔가 자신이 웃고 있는 걸 발견했다.
"오늘은 아가씨 생일인가요!"
선교사는 불쑥 웃음을 터트렸다. 이 프랑스인의 웃음은 마치 사람 좋은 동화 속 거한의 웃음소리만 같았다. 소녀는 이번에는 의아하단 얼굴로 선교사를 보았다. 이는 소녀만이 아니다. 바로 앞에 있는 야스키치를 시작으로 양옆에 자리한 남녀 승객은 대개 선교사를 보았다. 단지 그들의 눈에 담긴 건 의혹도 아닐뿐더러 호기심도 아니었다. 하나같이 선교사의 웃음의 의미를 이해한 미소였다.
"아가씨, 아가씨는 좋은 날에 태어나셨군요. 오늘은 더할 나위 없는 생일입니다. 전세계가 축하하는 생일이지요. 아가씨는 후에――아가씨가 어른이 되면 아가씨는 분명……"
선교사는 말을 붙든 채로 자동차 안을 둘러보았다. 동시에 야스키치와 눈을 맞추었다. 선교사의 눈은 코안경 너머에 웃음기 섞인 눈물을 빛내고 있다. 야스키치는 그 행복으로 가득 찬 회색 눈동자 안에서 갖은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소녀는――소녀도 겨우 선교사가 웃음을 터트린 이유를 알아차린 걸 테지. 지금은 살짝 토라진 듯이 일부러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다.
"아가씨는 분명 좋은 아내가――현명한 어머니가 되실 테죠. 그럼 아가씨,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내려야 할 곳이 되었으니까요. 그럼――"
선교사는 다시 한 번 일동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자동차는 마침 인파가 많은 오와리쵸의 사거리에 멈추었다.
"그럼 다들 잘 있으세요."
몇 시간 후, 야스키치는 역시나 오와리쵸에 있는 가건물 카페 구석에서 이 자그마한 사건을 떠올렸다. 그 통통한 선교사는 전등불이 들어온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그리스도와 생일을 함께 한 소녀는 저녁상 앞에 앉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야스키치 또한 이십 년 전에는 사바고를 모르는 소녀처럼 혹은 죄없는 문답 앞에 사바고를 잊은 선교사처럼 작은 행복을 가지고 있었다. 다이토쿠인의 길일에 포도떡을 샀던 것도 그 시절이다. 니슈로의 대응접서 활동사진을 보던 것도 그 시절이다.
"혼죠 후카가와는 아직 잿더미더군요."
"흐음, 그런가요. 그건 그렇고 요시와라는 어떻게 됐나요?"
"요시와라는 어떻게 됐나――아사쿠사선 요즘 들어 높으신 분의 자제들이 매춘을 한다는군요."
옆자리 테이블서는 두 상인이 이런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카페 중앙에 놓인 크리스마스 나무는 천을 걸친 침엽 가지에 장난감 산타클로스나 은색 별을 걸어두고 있다. 가스난로의 불꽃도 붉게 나무뿌리를 비추고 있는 듯했다. 오늘은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다. "전세계가 축가하는 생일"이다. 야스키치는 식후 홍차를 앞에 두고 멍하니 담배를 피우며 오오가와 건너편으로 사람이 된 이십 년 전의 행복을 꿈꾸었다……
이 몇 편의 짧은 글은 담배 한 개비가 연기가 될 동안 야스키치의 마음을 스쳐간 추억 두세 개를 기록한 것이다.
둘 길 위의 비밀
야스키치가 네 살일 적의 일이다. 그는 츠루라는 여종과 함께 오오미조의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검게 차오른 도랑 너머에는 후에 료고쿠 정차장이 된 명성 높은 오타케구라의 대나무밭이 있었다. 혼죠 일곱 불가사의 중 하나인 너구리의 바카바야시란 건 이 대나무밭 안에서 들리는 듯했다. 적어도 야스키치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너구리의 바카바야시가 들리는 건 물론이요 오이테케보리나 카타하노아시도 오타케쿠라 안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꺼림칙한 대나무밭도 너구리는 어딘가로 쫓겨난 것처럼 햇빛을 머금은 바람 속에 노란 대나무벼를 살랑이고 있었다.
"도련님 이거 아세요?"
츠야(야스키치는 츠루를 이렇게 불렀다)는 그를 보면서 인기척 적은 길 위를 가리켰다. 먼지로 건조한 길 위에는 꽤나 두툼한 선 하나가 희미하게 건너편을 향해 뻗고 있다. 야스키치는 전에도 길 위에서 이런 선을 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처럼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뭘까요? 도련님, 생각해보세요."
이는 츠야의 상투수단이었다. 그녀는 무엇을 물어도 쉽게 가르쳐주는 법이 없다. 반드시 한 번은 엄격하게 "생각해보세요"를 반복한다. 엄격히――하지만 츠야는 어머니처럼 나이를 먹었던 것도 아니었다. 겨우 열다섯인가 열여섯 먹은 작은 눈물점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야스키치의 교육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단 생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도 츠야의 친절함에는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도 이 말의 의미를 정말로 알고 있었다면 분명 이전처럼 집요하게 어떤 일에나 "생각해보세요"만 반복하는 어리석은 짓은 피할 수 있었으리라. 야스키치는 그후로 삼십 년 동안 여러 문제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건 그 똑똑한 츠야와 함께 도랑의 거리를 걷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자, 여기에도 하나 더 있죠? 자, 도련님. 생각해보세요. 이 줄은 뭘까요?"
츠야는 다시 한 번 길 위를 가리켰다. 확실히 엇비슷한 두께의 선이 삼 척 가량의 거리를 둔 채로 먼지투성이 길을 달리고 있다. 야스키치는 엄숙히 생각해 본 후, 끝내 그 답을 발명했다.
"누가 봉 같은 걸 가져워서 그린 거겠지."
"그치만 두 줄이잖아요?"
"둘이서 그리면 두 줄이 되는걸."
츠야는 싱긋싱긋 웃으며 "아뇨"하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야스키치는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Delphi의 무녀였다. 길 위의 비밀을 진작에 간파했을 게 분명했다. 야스키치는 서서히 불만이 아닌 이 두 줄의 선을 대하는 경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 이 줄은 뭔데?"
"뭘까요? 자, 저기까지 같은 두 줄이 있죠?"
실제로 츠야의 말처럼 한 줄의 선이 비틀어져 있을 때에는 반대편 선 또한 마찬가지로 비틀어져 있다. 그뿐 아니라 두 줄의 선은 하얀 길이 이어진 저편으로 영원 그 자체처럼 이어져 있다. 이건 대체 누가 무얼 위해 새긴 흔적일까? 야스키치는 환등 속에 비친 몽고의 대사막을 떠올렸다. 두 줄의 선은 대사막에서도 역시나 얇게 이어져 있다………
"츠야, 뭐냐니까?"
"자 생각해 보세요, 뭔가 둘이 갖춰져 있는 거니까요――뭘까요? 두 쌍인 건?"
츠야도 갖은 무녀처럼 막연한 암시를 줄 뿐이다. 야스키치는 더욱 열심히 젓가락이나 장갑 북채 같은 두 쌍인 걸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답에도 간단히 만족하지 않았다. 단지 묘한 웃음을 짓거나 여전히 "아뇨"만 반복하고 있다.
"가르쳐줘. 가르쳐달라니까. 츠야, 이 바보 츠야!"
야스키치는 기어코 발작을 일으켰다. 아버지마저 그의 발작에는 쉽사리 덤비지 않는다. 그건 줄곧 지켜 봐온 츠야 또한 충분히 알고 있으니 츠야는 그제야 엄숙히 길 위의 비밀을 설명했다.
"이건 차바퀴 자국이에요."
이건 차바퀴 자국이에요! 야스키치는 황당함에 사로잡힌 채 먼지 속에서 단속된 두 줄의 선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대사막의 공상은 신기루처럼 소멸했다. 이제는 단지 진흙투성이 짐차 한 대가 그의 마음속에 쓸쓸히 바퀴를 굴릴 뿐이다……
야스키치는 아직도 이 당시 받은 큰 교훈을 품고 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아도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건 되려 평생의 행복일지 모른다.
셋 죽음
이또한 그 시절의 이야기다. 저녁 밥상 앞에 앉은 아버지는 로쿠베 잔을 든 채 모종의 박자로 이렇게 말했다.
"기어코 좋은 곳에 가신 모양이야. 왜 옆마을의 이현금 선생님 있잖아……"
램프빛은 검게 칠한 접시 위를 선명히 비추고 있다. 이럴 때의 그릇만큼 아름다운 색채로 넘치는 일은 없다. 야스키치는 아직도 식물의 색채――가라스미나 맛김, 조개절임, 생강의 색채를 사랑하고 있다. 물론 당시 사랑한 건 그만큼 고급스러운 색채가 아니었다. 되려 지독한 자극으로 풍부한 생생한 색채뿐이다. 그는 그날 저녁도 그릇 앞에서 한 움큼의 강리 위에 누운 참치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살짝 술기운을 두른 아버지는 그의 예술적 감흥을 물질적 욕망이라 해석한 걸 테지. 상아 젓가락을 들어올리고는 일부러 그의 코 위에 간장 냄새가 나는 회를 내밀었다. 그는 물론 한 입에 먹었다. 그리고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좋은 곳 갔고 지금은 내가 좋은 곳에 있어!"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나 큰어머니도 단숨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기지로 가득 찬 그의 답을 이해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 의문은 그의 자존심에 약간의 불쾌함을 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웃게 한 건 어찌 되었든 큰 공적임이 분명했다. 또 집안이 밝아진 것 자체는 한없이 유쾌했다. 야스키치는 곧장 아버지와 함께 되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웃음소리가 조용해진 후, 아버지는 아직 옅은 미소를 품은 채로 큰 손을 야스키치의 목덜미를 튕겼다.
"좋은 곳에 갔다는 건 죽었단 뜻이야."
갖은 답은 호미처럼 질문의 뿌리를 끊기만 하는 게 아니다. 되려 오래된 질문 대신에 새로운 질문을 싹트게 하는 나무가위의 역할도 한다. 삼십 년 전의 야스키치도 삼십 년 후의 야스키치처럼 겨우 답을 얻었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그 답 속에 새로운 질문을 발견했다.
"죽었다는 게 뭐야?"
"죽었다는 건 말야. 왜 너는 개미를 죽이잖아……"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정성스레 죽음이란 걸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설명도 소년의 논리를 고수하는 그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했다. 확실히 그에게 죽은 개미는 달라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죽은 게 아니다. 단지 그가 죽였을 뿐이다. 죽은 개미는 딱히 그가 죽이지 않더라도 달리지 않는 개미어야 한다. 그런 개미하고는 석등롱 아래나 사철나무 아래서도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이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
"네가 죽인 개미는 죽은 거야."
"죽인 거지 죽은 게 아닌데?"
"죽인 거나 죽은 거나 똑같은 거야."
"그치만 말이 다른 걸."
"그래도 똑같은 거야."
"아냐아냐. 죽인 거랑 죽은 거는 다른 거야."
"이 바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버지에게 혼난 야스키치가 울음을 터트린 건 물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혼이 났다고 한들 모르는 걸 알 수는 없었다. 그는 그 후 몇 달 동안 마치 한 명의 철학자처럼 죽음이란 문제를 계속 생각했다. 죽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인 개미는 죽은 개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개미이다. 이만큼 비밀의 매력으로 가득 차면서도 알기 어려운 문제는 없었다. 야스키치는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어느 날 에코인 경내에서 발견한 두 마리 개를 떠올렸다. 그 개는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든 채 한 마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뿐 아니라 묘하게 엄숙했다. 죽음이란 그 두 마리 개와 어딘가 닮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저녁이었다. 야스키치는 돌아온 아버지와 어두컴컴한 욕탕에 들어와 있었다. 들어와 있다 한들 몸을 씻는 건 아니었다. 단지 가슴 정도 올라오는 목욕통 안에 머뭇머뭇 선 채로 하얀 삼각돛을 편 범선의 처녀항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손님이라도 온 걸 테지. 츠루보다도 연상인 여종 한 명이 불투명해진 유리 장자를 열고는 비누투성이가 된 아버지께 무어라 말을 걸었다. 아버지는 스펀지를 든 채로 "그래, 지금 갈게"하고 답했다. 그러고는 야스키치를 보면서 "너는 좀 더 있다가 나와. 엄마 들어올 거니까"하고 말했다. 물론 아버지가 없다고 돛단배의 처녀항해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야스키치는 잠시 아버지를 보고는 "응"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아버지는 몸을 닦고는 젖은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로 "영차"하고 두터운 허리를 일으켰다. 야스키치는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돛단배의 삼각돛을 바로잡았다. 하지만 유리 장자가 열린 소리에 문득 다시 고개를 들자 아버지는 마침 수증기 속에서 벗은 등을 보인 채로 욕탕을 나가는 차였다. 아버지의 머리는 아직 하얗지 않았다. 허리도 젊어서 똑바로 서있었다. 하지만 그런 뒷모습은 어째서인지 네 살 야스키치의 마음에 절절한 쓸쓸함을 느끼게 했다. "아빠"――一순간 돛단배를 잊은 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두 번째 유리문 소리는 조용히 아버지의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 후에는 단지 물 냄새로 가득 찬 여명만이 펼쳐져 있었다.
야스키치는 적막이 감도는 목욕통 안에서 멍하니 그 커다란 눈을 뜨고 있었다. 동시에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죽음을 발견했다――죽음이란 요컨대 아버지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일이다!
넷 바다
야스키치가 바다를 알게 된 건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일 적이다. 물론 바다라고는 해도 만리의 대양을 알았던 건 아니다. 단지 오오모리 해안가에 자리한 비좁고 갑갑한 도쿄만을 알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비좁고 갑갑한 도쿄만도 당시의 야스키치에겐 경이였다. 나라 시대의 카진은 바다에 주는 사랑을 "카토리의 바다에 큰 배의 닻을 내리면 누구나 사람을 그리네"하고 노래했다. 야스키치는 물론 사랑을 알지 못했고 만요수의 우타 같은 건 더욱이 몰랐다. 하지만 햇빛에 흐려진 바다서 어딘가 묘하게 슬픈 신비를 느낀 건 사실이다. 그는 바다에 터를 낸 찻집의 옆에서 한사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하얗게 빛나는 돛을 단 배가 몇 척이나 떠올라 있었다. 긴 연기를 하늘에 끈 돛대가 둘 달린 증기선도 떠올라 있었다. 날개가 긴 한 무리의 갈매기는 마치 고양이처럼 울면서 해면을 비스듬하게 날았다. 그 배나 갈매기는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가? 바다는 단지 몇 중의 김발 너머서 푸르게 흐려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바다의 신비함을 더욱 선명하게 느낀 건 전라가 된 아버지나 숙부와 함께 얕은 물로 내려갔을 때였다. 야스키치는 당초 모래 위로 조용히 다가오는 파도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나 숙부와 바다 안으로 들어간 거의 이삼 분간의 감정이었다. 그 후 그는 파도는 물론이요 갖은 바다의 행복을 향락했다. 찻집서 바라보던 바다는 어딘가 남일처럼만 느껴져 신기한 동시에 꺼림칙했다――하지만 간석지에 서서 보는 바다는 커다란 장난감 상자와 같았다. 장난감상자! 그는 진짜 신처럼 바다란 세계를 장난감으로 삼았다. 게나 소라게는 눈부신 간척지를 우왕좌왕 걷고 있다. 파도는 지금 눈앞에 한 움큼의 해초를 옮겨주었다. 저 나팔과 닮은 건 역시 소라고동일까? 이 모래 속에 숨어 있는 건 바지락이 분명하다……
야스키치의 향락은 장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향락 속에서도 약간의 쓸쓸함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까지 바다색이 푸르다 믿었다. 료고쿠의 '태평'서 파는 겟코나 토시가타의 니시키에를 시작으로 당대 유행이었던 석판화의 그림도 하나 같이 푸른색이었다. 특히 엔니치의 "카라쿠리"가 보여주는 황해 해전의 광경은 황해임에도 불구하고 지독할 정도의 푸른 바다서 하얀 물줄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색은――확실히 눈앞에 펼쳐진 바다의 색도 저 깊은 곳은 푸르게 흐려져 있다. 하지만 해변가의 바다는 조금도 푸른색을 두르고 있지 않다. 진창의 물과 다를 바 없는 흙색을 하고 있었다. 아니 진창의 물보다도 한 층 더 선명한 구리색을 하고 있다. 그는 이 대자색 바다서 예상을 배신 당한 쓸쓸함을 느꼈다. 하지만 또 동시에 용맹히도 잔혹한 현실을 승인했다. 바다를 푸르다 생각하는 건 깊은 곳만 본 어른의 착각이다. 이는 누구라도 그처럼 해수욕을 하면 이의가 없을 진리임에 분명했다. 바다는 사실 구리색을 하고 있다. 양동이의 녹과 비슷한 구리색을 하고 있다.
삼십 년 전의 야스키치가 가진 태도는 삼십 년 후의 야스키치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 태도이다. 구리색 바다를 승인하는 건 한 시라도 빠른 게 좋다. 도 이 구리색 바다를 푸른 바다로 바꾸려 하는 건 결국 헛수고로 끝날 뿐이다. 그보다도 구리색 바다서 아름다운 조개를 발견하자. 바다도 그러는 사이 깊은 곳처럼 푸른색으로 가득 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장래에 동경하느니 되려 현재에 안주하자――야스키치는 예언가적 정신으로 가득한 두세 친구를 존경하면서도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는 여전히 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오오모리의 바다서 돌아온 후, 어머니는 어디선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 옛날이야기" 중 "무라시마 타로"를 사주셨다. 이러한 옛날이야기를 읽어주는 걸 기대한 건 물론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그건 가진 물감으로 삽화를 하나하나 칠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 "무라시마 타로"에도 곧장 색채를 더하기로 했다. "무라시마 타로"는 한 권 속에 열 개 가량의 삽화가 있었다. 그는 일단 무라시마 타로가 용궁을 떠나는 그림을 칠하기 시작했다. 용궁은 녹색 기와에 붉은 기둥이 있는 궁전이다. 오토히메는――그는 잠시 생각한 후 오토히메도 역시 의상만큼은 붉은색으로 칠하기로 했다. 무라시마 타로는 생각할 것도 없다. 어부의 옷은 짙은 남색, 허리 밭침은 옅은 노란색이다. 단지 얇은 낚싯대에 줄곧 노란색을 칠하는 게 의외로 어려웠다. 거북이도 털만 녹색으로 칠하는 게 여간 깐깐한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바다는 구리색이다. 양동이의 녹과 닮은 구리색이다――야스키치는 이러한 색채의 조화서 예술가스러운 만족을 느꼈다. 특히 오토히메나 무라시마 타로의 얼굴에 옅은 붉은색을 더하는 건 굉장히 생동감 넘치는 정치를 전해준 것처럼 믿겼다.
야스키치는 곧장 어머니께 그의 작품을 보여주러 갔다. 무언가를 뜨고 있던 어머니는 돋보기안경 테두리 너머로 삽화의 색채에 눈을 주었다. 그는 당연히 어머니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 색채에 그만큼 감탄하지 않은 듯했다.
"바다색이 이상하네. 왜 파란색으로 안 칠했어?"
"그치만 바다는 이런 색인 걸."
"구리색 바다는 없는 걸."
"오오모리 바다는 구리색 아냐?"
"오오모리 바다도 파란색이야."
"아냐, 딱 이런 색이었어."
어머니는 그의 고집에 놀람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아니, 그가 발작을 일으켜 "무라시마 타로"를 찢은 후에도 이 의심할 여지없는 구리색 바다만은 믿지 않았다……"바다" 이야기는 그뿐이다. 물론 오늘날의 야스키치는 이야기의 체재를 갖추기 위해 좀 더 소설스러운 결말을 붙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이러한 몇 줄을 덧붙이는 것이다――"야스키치는 어머니와 나눈 문답 속에서 또 하나 중대한 발견을 했다. 그건 누구나 구리색 바다에는――인생에 자리한 구리색 바다에는 눈을 감기 쉬운 법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만조는 오오모리의 바다에도 푸른색 파도를 일게 한다. 그럼 현실이란 구리색 바다인가 혹은 푸른색 바다인가? 결국 우리의 리얼리즘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아울러 야스키치는 이전처럼 기교 없이 이야기를 끝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체재는?――예술이란 숱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무엇보다 일단 내용이다. 형용은 아무래도 좋다.
다섯 환등
"이 램프에 이렇게 불을 붙이는 겁니다."
장난감 가게 주인은 금속제 램프에 노란 성냥불을 붙였다. 또 환등의 뒷문을 열고 가만히 램프를 기계 안으로 옮겼다. 일곱 살의 야스키치는 숨도 쉬지 않고 테이블 앞에 자세를 낮춘 주인의 손을 바라본다. 깔끔한 머리를 왼쪽에서 가른 묘하게 색이 창백한 주인의 손을 바라보고 있다. 시간은 겨우 세 시나 되었을까. 장난감 가게 바깥 유리 문은 한껏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끝없이 인파를 비추고 있다. 하지만 장난감 가게 안은――특히 이 장난감 상자를 대충 쌓아 올린 가게 구석은 저녁의 어두컴컴함과 다를 바 없었다. 야스키치는 이곳에 왔을 때 무언가 꺼림칙함에 가까운 걸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환등에――환등을 보여주는 주인의 모습에 갖은 감정을 잊고 있다. 아니, 그의 뒤에 선 아버지의 존재마저 잊고 있다.
"램프를 넣으면 저족에 저렇게 달이 뜨죠――"
이윽고 자세를 일으킨 주인은 야스키치보다도 되려 아버지 너머의 하얀 벽을 가리켰다. 환등은 그 하얀 벽 위에 마침 대략 삼 척 가량의 빛나는 원을 그리고 있다. 부드러운 노란색으로 빛나는 원은 확실히 달과 닮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얀 벽의 거미줄이나 먼지도 그곳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 이렇게 그림을 넣지요."
덜컥하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빛나는 원은 어느 틈엔가 희미하게 무언가를 비추고 있다. 야스키치는 금속의 뜨거운 냄새에 한 층 더 호기심을 자극받으며 가만히 그 무언가를 보았다. 무언가――거기에 비친 건 아직 풍경인지 인물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단지 희미하게 구분이 가는 건 덧없는 비눗방울과 닮은 색채였다. 아니, 색채만 닮은 게 아니다. 이 하얀 벽에 비친 건 정말로 커다란 비눗방울이었다. 꿈처럼 어디선가 떠오른 희미한 빛 속의 비눗방울이다.
"저 희미한 건 렌즈의 초점을 맞추면――요앞의 렌즈죠――곧장 보다시피 또렷해집니다."
주인은 다시 한 번 자세를 낮추었다. 그와 동시에 비눗방울은 서서히 한 장의 풍경화로 바뀌었다. 다만 일본의 풍경화는 아니었다. 수로의 양쪽에 집이 자리한 어딘가 서양의 풍경화였다. 시각은 저녁에 가까울 즘이리라. 초승달은 오른쪽 집들 위에 희미하게 빛을 내뿜고 있다. 그 초승달도 집도 집의 창문에 자리한 장미도 빼곡히 자리하여 물 위에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람 그림자는 물론이고 아무리 둘러봐도 갈매기 한 마리 날고 있지 않다. 물은 단지 막다른 다리 아래로 똑바로 흐르고 있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풍경이지요."
삼십 년 후의 야스키치에게 베네치아의 매력을 가르쳐준 건 단눈치오의 소설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야스키치는 이러한 집이나 수로에서 기댈 곳 없는 쓸쓸함을 느꼈다. 그가 사랑하는 풍경은 붉게 칠한 커다란 관음당 앞에 무수한 비둘기가 나는 아사쿠사였다. 혹은 또 높은 시계 아래에 철도마차가 지나는 긴자였다. 그러한 풍경에 비하면 이 집이나 수로는 얼마나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는가. 철도마차나 비둘기는 없어도 좋다. 하다못해 건너편 다리 위에 기차라도 하나 있었다면――마침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다. 커다란 리볼을 찬 소녀 하나가 오른쪽에 자리한 창문 중 하나서 불쑥 자그마한 고개를 내밀었다. 어떤 창문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강 초승달 아래의 창문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소녀는 얼굴을 내미는가 싶더니 더욱이 그 얼굴을 내게 돌렸다. 그리고――멀리서도 알 수 있는 사랑스러운 얼굴에 의심할 여지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건 고작해야 일이 초 동안 있었던 일이다. 저도 모르게 "어라?"하고 눈을 떴을 때에는 소녀는 어느 틈엔가 창문 안으로 모습을 감춘 걸 테지. 창문은 어느 창문이나 마찬가지로 인기척 없는 커튼을 내려놓고 있다……
"자, 이제 비추는 법은 알았지?"
아버지의 말은 멍한 그를 현실 세계로 불러냈다. 아버지는 담배를 문 채로 지루하다는 양 뒤에 자리하고 있다. 장난감 가게 바깥의 거리도 여전히 인파가 그치지 않은 듯했다. 주인도――머리를 깔끔하게 가른 주인은 잔재주를 마친 마술사처럼 묘하게 창백한 뺨 주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야스키치는 불쑥 이 환등을 한 시라도 빨리 그의 방으로 가져가고 싶어졌다……
야스키치는 그날 밤 아버지와 함께 밀랍을 칠한 천 위에 다시 한 번 베네치아의 풍경을 드리웠다. 공중에 떠오른 초승달, 양쪽의 집들, 집의 창문에 자리한 장미꽃을 비춘 한 줄기 수로의 빛――그건 모두 앞서 본 것과 같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소녀만은 고개를 내밀지 않는다. 창문이랑 창문은 아무리 기다려도 축 처진 커튼 뒤에 집들의 비밀을 숨기고 있다. 야스키치는 기어코 참지 못했는지 램프 상태를 신경 쓰던 아버지께 탄원하듯이 말했다.
"그 여자애는 왜 안 나와?"
"여자애? 여자애가 어디 있어?"
아버지는 야스키치의 질문 의미마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아냐, 지금은 없지만 얼굴만 창문에서 내밀었잖아?"
"언제?"
"장난감 가게 벽에 비췄을 때."
"그때도 여자애 같은 건 없었는데."
"그치만 얼굴을 내민 게 보였는걸."
"무슨 소리야?"
아버지는 무슨 생각인지 야스키치의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리고 불쑥 야스키치도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 정도로 밝고 큰 목소리를 냈다.
"자, 이번엔 뭐 볼까?"
하지만 야스키치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베네치아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밝은 수로의 물에 조용히 커튼을 비추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 어딘가의 창문에서 커다란 리본을 찬 소녀 하나가 갑자기 얼굴을 내미리라――그는 그렇게 생각하자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을 느꼈다. 동시에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어떤 기쁜 슬픔을 느꼈다. 그 그림의 환등 속에 힐끔 고개를 내민 소녀는 실제로 무언가 초자연적인 영령이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닐까? 혹은 또 소년에게 일어나기 쉬운 환각의 일종에 지나지 않았던 걸까? 그건 물론 그도 해결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야스키치는 삼십 년이 지난 오늘날마저 몸에 스며드는 진로에 지쳤을 때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은 베네치아의 소녀를 떠올리고 있다. 마치 몇 년이나 얼굴을 보이지 않은 첫사랑의 여인이라도 떠올리듯이.
여섯 엄마
여덟 살이던가 아홉 살이던가. 어찌 됐든 어느 한 쪽의 가을이었다. 육군 대장 카와시마는 에코인의 젖은 불상 석단 앞에 자리하여 아군 군대를 검열하였다. 물론 군대라 해도 아군은 야스키치를 비롯한 네 명 밖에 없었다. 그것도 금색 단추 교복을 입은 야스키치 하나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콘가스리나 메쿠라지마의 통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물론 코쿠기칸의 그림자가 경내에 드리우는 에코인이 아니다. 아직 찬바람 부는 아침에 네즈미코조의 묘 근처에도 은행 낙엽의 산이 만들어지는 한참 과거의 에코인이다. 묘하게 시골 같던 당시의 풍경――에도라기 보다는 에도의 변두리 혼죠의 당시 풍경은 과거에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비둘기만은 지금도 똑같다. 아니, 비둘기도 다를지 모르겠다. 그날도 젖은 불상 석단 주위는 비둘기로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어떤 비둘기도 오늘날처럼 깔끔해 보이진 않은 듯했다. "문 앞에 내린 비둘기 한 마리를 팔아버렸네"――이러한 텐보의 하이진이 꼭 에코인의 비둘기를 노래한 건 아니리라. 하지만 야스키치는 이 구를 볼 때마다 반드시 젖은 불상 석단 주위에 무리진 비둘기를――목의 깊은 곳에 깃든 목소리에 옅은 햇살의 빛을 울리던 비둘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줄톱집 아이인 카와시마는 유유히 검열을 마친 후 메쿠로지마의 품 안에서 나이프나 새총이나 고무공과 함께 한 다발의 카드를 꺼냈다. 이는 다가시 가게서 파는 군인 장기 카드였다. 카와시마는 모두에게 한 장씩 카드를 넘기며 네 명의 부하를 임명(?) 했다. 여기서 임명을 공표하자면 바가지집 아이인 히라마츠는 육군 소장, 순사의 자제인 타미야는 육군 대위, 장신구 가게의 자제인 오구리는 단순한 공병, 호리카와 야스키치는 지뢰였다. 지뢰는 나쁜 역할이 아니다. 공병만 만나지 않으면 대장마저 잡을 수 있는 역할이다. 야스키치는 물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둥글둥글 살찐 오구리는 임명이 끝나자마자 공병이란 사실에 불평을 호소했다.
"공병은 재미없어. 카와시마, 나도 지뢰로 해줘, 응?"
"너는 항상 잡히기만 하잖아."
카와시마는 진지한 얼굴로 달랬다. 하지만 오구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조금도 겁먹지 않고 대답했다.
"거짓말하지 마. 요전 번에 대장을 잡은 것도 나잖아."
"그래? 그럼 이 다음엔 대위 시켜줄게."
카와시마는 싱긋 웃고는 곧장 오구리를 회유했다. 야스키치는 아직도 이 소녀의 잔꾀의 날카로움에 놀라고 있다. 카와시마는 초등학교도 마치기 전에 열병으로 죽어버렸다. 하지만 만에 하나 죽지 않고 다행히도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적어도 지금은 어린 나이에 기예를 갖춘 시회의원이라도 되었을 터이다……
"개전!"
이때 그렇게 목소리를 높인 건 정문 앞에 진을 친 역시나 네다섯 명의 적군이었다. 적군은 오늘도 변호사의 자제 마츠모토를 대장으로 삼은 듯했다. 콘가스리의 가슴에 붉은 셔츠를 드러낸 채 머리를 양옆으로 반씩 가른 마츠모토는 개전 신호를 하기 위함인지 학교 모자를 높게 휘두르고 있다.
"개전!"
카드를 쥔 야스키치는 카와시마의 호령을 듣는 동시에 누구보다도 먼저 소리를 질렀다. 또 동시에 조용히 무리지어 있던 비둘기는 무시무시한 날개소리를 내면서 크게 하늘로 올랐다. 그렇게――그렇게 미증유의 격전이다. 연기는 서서히 산을 이루고 적의 포탄은 비처럼 우리 주변서 폭발했다. 하지만 아군은 용맹히도 적진에 육박했다. 물론 적의 지뢰는 엄청난 불기둥을 지르며 아군 소장을 가루로 만들었다. 하지만 적군도 대령을 잃고 또 야스키치가 가장 두려워 하는 유일한 공병을 잃고 말았다. 이를 본 아군은 전보다 더 맹렬히 공격을 이어갔다――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단지 야스키치의 공상에 떠오른 에코인의 격전 광경이다. 하지만 그는 낙엽만 밝은 쓸쓸한 경내를 달리면서 연기 냄새를 고스란히 느끼고 날아오는 포화의 섬광을 느꼈다. 아니, 어떤 때지는 대지 밑바닥에서 폭발의 기회를 기다리는 지뢰의 심정마저 느껴졌다. 이러한 발랄한 공상은 중학교에 들어간 후 어느 틈엔가 그를 떠나버렸다. 오늘날의 그는 전쟁놀이 속에서 여순항의 격전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되려 여순항의 격전 속에서도 전쟁놀이를 볼 정도였다. 하지만 추억은 다행히도 그를 소년 시절로 불렀다. 그는 일단 무엇보다도 당시의 공상을 다시 떠올리는 걸 더할 나위 없는 쾌락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연기는 서서히 산을 이루고 포탄은 비처럼 우리 주변서 폭발했다. 야스키치는 그 안을 똑바로 가로질러 적 대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의 대장은 몸을 피하고는 단숨에 진지로 도망 치려했다. 야스키치는 그걸 쫓았다. 그러다 돌부리에 걸렸는지 거창하게 굴러버렸다. 또 동시에 용맹한 공상도 비눗방울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제 영광으로 가득 찬 한순간 전의 지뢰가 아니었다. 얼굴은 코피로 범벅이 되었고 바지 무릎에는 구멍이 뚫렸으며 모자도 뭣도 없는 소년이었다. 그는 겨우 일어나서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적과 아군은 이 소란에 모처럼의 격전도 중지한 채로 야스키치의 주위로 모였다. "얘 다쳤다"하고 말하는 녀석이 있다. "나 좀 봐봐"하고 말하는 녀석도 있다. "우리 탓 아니다"하고 말하는 녀석도 있다. 하지만 야스키치는 아픔보다도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팔꿈치로 얼굴을 가린 채로 엉엉 울었다. 그러자 불쑥 귓가에 비웃음을 날린 건 육군 대장 카와시마였다.
"엄마라면서 운대요!"
카와시마의 말은 곧장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웃음을 터트리게 했다. 특히 크게 웃은 건 지뢰가 되다 만 오구리였다.
"웃기다, 엄마라면서 운대!"
하지만 야스키치는 울기는 했어도 "엄마"하고 말한 기억은 없었다. 그걸 말한 것처럼 선동하는 건 여느 때처럼 카와시마의 짓궂음이다――이렇게 생각한 그는 슬픔과 분함에 더욱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었다. 하지만 기개 없는 그에게는 누구 하나 호의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입을 모아 카와시마의 말을 흉내 내면서 하나둘 어딘가로 달려가 버렸다.
"와, 엄마라면서 운다!"
야스키치는 서서히 멀어져 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원망하며 어느 틈엔가 또 그의 발밑으로 내려온 무수한 비둘기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줄곧 훌쩍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야스키치는 그 후로 이 "엄마"를 카와시마가 발명한 거짓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삼 년 전쯤 상하이에 샹륙함과 동시에 도쿄에서 건너온 인플루엔자 때문에 어떤 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열은 입원한 후로도 간단히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하얀 침대 위에서 몽롱한 눈을 감은 채로 몽골의 봄이 옮겨 온 황사의 굉장함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느 뜨거운 오후, 소설을 읽고 있던 간호사가 불쑥 의자서 일어나더니 침대 옆으로 다가와 신기하다는 양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 일어나 계셨어요?"
"무슨 말이세요?"
"지금 엄마라고 하셨잖아요?"
야스키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에코인 경내를 떠올렸다. 카와시마도 어쩌면 짓궂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닐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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