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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추억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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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먼지

 내 첫 기억은 세는 나이로 네 살 일 적의 일이다. 다만 대단한 기억은 아니다. 단지 히로 씨라는 목공 하나가 사다리인지에 오른 채로 망치로 천장을 두드린다. 천장에서는 먼지가 터져 나온다――그런 광경을 기억할 뿐이다.
 이건 에도 시절부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살던 오래된 집을 부술 때의 일이다. 내가 세는 나이로 네 살일 적의 가을, 새로운 집에 살게 되었다. 그러니 옛날 집을 부순 건 늦어도 그 해 봄이었으리라.

     둘 위패

 우리집 불단에는 증조모의 위패나 숙부의 위패 앞에 커다란 위패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건 덴포 몇 년인가에 돌아가신 증조부모님의 위패였다. 나는 어릴 적에 그 검게 바란 금박 위패에 공포에 가까운 걸 느꼈다.
 내가 나중에 듣기로는 증조부는 오쿠보즈로 일하면서 두 달을 오이란으로 팔아버렸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증조모도 증조부가 외박을 거듭하는 통에 집에 땔감이 없을 때는 손도끼로 툇마루를 박살 내 땔감으로 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셋 정원수

 새로운 우리 집 정원에는 동청목, 비자나무, 석곡, 황칠나무, 납매, 팔손이나무, 잣나무 등이 심어져 있었다. 나는 그런 나무 중에서도 특히 한 그루 납매를 사랑했다. 하지만 잣나무만은 무언가 꺼림칙했다.

     넷 "테츠"

 우리 집에는 아이 돌보미 이외에도 "테츠"라는 여종 하나가 있었다. 이 여종은 후에 "겐 씨"라는 목공의 아내가 되기에 "테츠"란 별명을 받았다.
 1월인가 2월의 어느 밤, (나는 세는 나이로 다섯 살이었다) 지진 때문에 눈을 뜬 "테츠"는 경황이 없어 머릿맡의 사방등을 들고 방에서 방으로 뛰어다녔다. 나는 그때 방 다다미에 기름때가 묻은 걸 기억하고 있다. 또 밤중의 정원에 눈이 쌓인 걸 기억하고 있다.

     다섯 고양이의 혼

 '테츠'는 겐 씨에게 시집 간 후로도 이따금 우리 집에 놀러왔다. 나는 그때 '테츠'가 이야기해준 이런 괴담을 기억하고 있다――어느 날 오후, '테츠'는 긴 화분에 뺨을 얹고 반쯤 졸고 있었다. 그러자 작은 불덩이 하나가 '테츠'의 얼굴 주변을 날기 시작했다. '테츠'는 놀라서 눈을 떴다. 불덩이는 물론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테츠'가 믿기로는 그건 네다섯 날 전에 죽은 '테츠'가 기르던 고양이의 혼이 온 게 분명하다고 한다.

     여섯 쿠사조시[각주:1]


 우리 집 책상자에는 쿠사조시가 잔뜩 담겨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러한 쿠사조시를 사랑했다. 특히 "서유기"를 번안한 "금비라이생기"를 사랑했다. "금비라이생기"의 주인공은 어쩌면 내 기억에 가장 또렷이 남은 등장인물일지 모른다. 바위를 가르는 신이라는 두건과 법의를 입은 눈초리가 무서운 대천구였다.

     일곱 너구리 님

 우리 집에는 할아버지 대부터 너구리 님이란 걸 모셨다. 그건 붉은 천에 얹힌 한 쌍의 토우 너구리였다. 나는 이 너구리 님께도 무언가 공포를 느꼈다. 너구리 님을 기리게 된 게 어떤 연유인지는 아버지나 어머니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직 어두컴컴한 창고방 구석 선반에 너구리 님의 자리를 모시고 밤이면 반드시 그 앞에 자그마한 촛대를 놓고 있다.

     여덟 난

 나는 이따금 좁은 정원을 걸어 아버지의 흉내를 내 잡초를 뽑았다. 정원은 물기가 많은 탓인지 여러 풀이 자랐다. 나는 어느 겨울, 동청목 아래서 가는 풀을 찾아 재빨리 그걸 뽑으려 했다. 내 행동을 안 아버지는 "모처럼 자란 난을 뽑아버렸어"하고 몇 번이나 어머니께 한탄하였다. 하지만 딱히 그탓에 혼난 기억은 없었다. 난은 돌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하나둘 자라고는 했다. 

     아홉 몽중유행

 나는 그 시절에도 지금처럼 몸이 허약한 아이였다. 특히 변비가 오면 반드시 경련하는 아이였다. 내 기억으로 마지막으로 경련한 아홉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열도 있어 마룻바닥에 누워 큰어머니가 머리를 묶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던 사이. 경련이 일어났는지 쓸쓸한 해변가를 걷고 있었다. 또 그 해변가에는 인간보다도 괴물에 가까운 여자 하나가 코시마키 하나 차림으로 몸을 던지기 위해 합장을 하고 있었다. 그건 "묘묘구루마"란 쿠사조시 안의 삽화였던 거 같다. 이 꿈속의 광경만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정신이 들었을 때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열 "츠야"


 내가 가장 친했던 건 '테츠' 뒤에 온 '츠루'였다. 우리 집은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여종도 '츠루' 하나만 남았다. 나는 '츠루'를 '츠야'라 불렀다. '츠야'는 다른 여자들보다 로맨틱한 취미에 젖어 있었을 테지. 우리 어머니가 말하기를 삿갓을 쓴 승려 두세 명이 지나는 걸 보면 "복수하러 가는 걸까요?"하고 물었다고 한다.

     열하나 우편통

 우리 집 문 옆에는 우편통 하나가 붙어 있었다. 어머니나 큰어머니는 해가 지면 번갈아서 문 옆으로 가서 이 우편통 옆에서 길가의 사람들을 바라보고는 했다. 봉건시대 여성의 기질은 메이지 32년, 33년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을 테지. 나는 이때 "자, 하늘이 참새색으로 물들었지?"하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내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했다.

     열둘 뜸

 나는 무언가 장난을 치면 반드시 큰어머니께 잡혀 새끼발까락에 뜸을 받았다. 내가 당초 무서웠던 건 뜸의 열보다도 뜸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나는 손발을 버둥거리면서 "딱딱산이 활활산이 된다"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했다. 이는 물론 불이 붙는 걸 보고 자연스레 연상한 것이리라.

     열셋 박제 꿩

 우리 집에 오는 사람 중에 "오이치 씨"란 사람이 있었다. 다이치인가 어딘가에 있던 야나기파의 "고린"의 아내분이셨다. 나는 이 '오이치' 씨께 여러 그림책이나 장난감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기뻐했던 건 커다란 박제 꿩이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적에 꽁지깃이 잘린 꿩을 기부한 걸로 기억하고 있다. 확실하지는 않다. 단지 지금도 이상한 건 꿩 박제를 받았을 때 아버지가 내게 한 말이다.

 "옛날에 우리 옆집 살던 XXX(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란 사람이 새해 첫날의 맑은 하늘을 하얀 봉황 한 마리가 나카즈 쪽으로 날아가는 걸 봤다고 했지. 맨날 헛소리만 하는 사람이었어."

     열넷 유령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적에 어딘가의 나가우타 여교사가 남편의 원령에 사로잡혔다느니 여기서 일하는 할머니가 며느리 유령에게 괴롭힘당한다느니 여러 괴담이 돌았다. 그런 걸 내게 들려준 건 우리 할아버지 대에 여종을 하던 "오테츠 씨"란 할머니셨다. 나는 그런 이야기 때문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경계서 여러 유령에게 공격받고는 했다. 심지어 그러한 유령은 대개 "오테츠 씨"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열다섯 마차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작은 마차를 나귀에게 끌게 하고 또 마차에 아이를 태워 거리를 돌아다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이 작은 마차를 타고 오타케구라를 지나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돌보던 "츠야"는 어째서인지 그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나만 마차에 태우는 건 위험한 일이라 생각한 탓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파란 장막을 내린 장난감보다 아주 조금 큰 마차가 조금씩 걷는 건 어린눈에도 굉장히 세련되어 보였다.


     열여섯 물가게

 그 즘에는 아직 혼죠도 우물물을 사용했다. 하지만 식용수만은 물가게를 사용했다. 나는 아직도 얼굴이 붉은 물가게 할아버지가 물통의 물을 동이에 붓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고 보면 이 "물가게 할아버지"도 꿈과 현실의 경계서 나타나는 유령 중 한 명이었다.

     열일곱 유치원

 나는 유치원을 다녔다. 유치원은 유명한 에코인 옆 에히가시 초등학교 부속 유치원이었다. 이 유치원 정원 구석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는 항상 그 낙엽을 주워 책 안에 끼워둔 걸 기억하고 있다. 또 어느 둥근 얼굴의 여학생을 좋아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단지 참 신기한 건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이나 이름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작년 가을, 유치원 시절 친구를 만나 그 이야기를 한끝에 "그 사람도 기억하려나"하고 말했다. 
 "그야 기억할 리가 없지."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섭섭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은 소녀에 어울리지 않는 싸리나 갈대에 이슬을 흩뿌린 소매가 긴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열여덟 스모

 지역 탓인지 주변에는 스모 선수가 많이 살았다. 실제로 우리 집 뒤쪽에는 나이 먹은 미네기시가 산 적도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적에는 마침 히타치야마나 우메가타니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대였다. 나는 아라이와 카메노스케가 히타치야마를 꺾어 높은 평가를 받은 걸 기억하고 있다. 비단 아라이와만 아니라 쿠미니야마나 카사호코처럼 어딘가 니시키에 속 스모에 가까운 남자다움이 묻어나는 스모를 두루 좋아했다. 하지만 스모란 내게 무언가 막연한 반감 같은 걸 주기 쉬웠다. 그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몸이 약했던 탓일지 모른다. 또 평소 보던 스모가――머리를 와라타바네로 묶은 채로 훈도시를 하고 고약을 바르고 있었던 탓일지 모르겠다.

     열아홉 우지시산

 우리 집은 우지시산이란 사람에게 잇츄부시[각주:2]를 배웠다. 이 사람은 술이니 기예 탓에 빌린 돈을 모조리 써버렸다고 한다. 나는 이 "스승님"이 술버릇이 안 좋았던 걸 기억하고 있다. 또 작은 셋집임에도 2, 3평의 정원에 정원수를 심어 겨울엔 열매를 맺은 상록수 아래에 마른 소나무 잎을 깔아둔 걸 기억하고 있다.
 이 "스승님"은 장수하셨다. 말년에 된장을 사러 나가 눈덮인 거리서 굴렀을 때에도 겨우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래도 훈도시는 안 더러워져서 다행이네"하고 말했다고 한다.


     스물 학문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 "스승님"의 외동아들에게 영어와 한문과 글자를 배웠다. 하지만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단지 영어 T나 D의 발음을 외운 정도이다. 그럼에도 나는 밤이 되면 내셔널 리더나 니혼가이시를 품고 아이오이쵸 니쵸메의 "스승님" 집으로 향했다. It is a dog――내셔널 리더의 첫 행은 아마 그런 문장이었겠지. 하지만 그보다 또렷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모종의 박자로 "스승님"이 말한 "누구 씨도 요즘 들어 차림이 아주 자연미 넘치는구나"하는 말이었다.

     스물하나 활동사진

 내가 처음으로 활동사진을 본 건 다섯인가 여섯이었을 때이리라. 나는 분명 아버지와 함께 그런 신기한 걸 상영하던 오오카와바타의 니슈로로 향했다. 활동사진은 지금처럼 커다란 막에 틀어주지 않았다. 적어도 화면 크기는 겨우 여섯 척[각주:3]이나 네 척 정도 됐으리라. 또 내용도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밤 화면 속에서 물고기를 낚은 남자 하나가 커다란 물고기가 바늘에 걸려 물속으로 끌려가는 내용을 본 걸 기억한다. 그 남자는 밀짚모자를 쓰고 바람에 날리는 버들이나 갈대 뒤에서 긴 낚싯대를 들고 있었다. 나는 신기하게도 그 남자가 넬슨과 비슷하게 생긴 걸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내 기억이 잘못된 걸지도 모르겠다.

     스물둘 카와비라키[각주:4]


 역시 니슈로의 관람석에서 카와비라키를 보던 때였다. 오오카와는 물론 등을 실은 무수한 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자 그 오오카와 위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주위에 있던 손님 중에는 다른 관람석이 떨어졌네 어쩌네 이런저런 이야기가 퍼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무다리였던 료고쿠바시의 난간이 부러져 사람들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그 후에 이 참사를 환등인지로 비추는 걸 본 적이 있는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스물셋 다크좌

 나는 당시 에코인 경내에서 여러 구경거리를 보았다. 풍선 타기, 뱀 공연, 오니 머리, 아무개 서양인이 굉장히 높은 널판지에서 공중제비하며 떨어지는 것――하나하나 세고 있으면 끝이 없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었던 건 다크좌가 다루는 인형이었다. 그중에서도 또 재밌었던 건 익살스러운 서양 무뢰한 둘이 괴물의 집에서 자는 장면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상대의 이름을 항상 칼리플라라 불렀다. 나는 아직도 색양배추를 먹을 때마다 이 "칼리플라"를 떠올린다.

     스물넷 나카즈

 당시의 나카즈는 말 그대로 갈대가 무성한 델타였다. 나는 그 갈대 속에서 나가레칸죠[각주:5]나 말뼈를 보고 거림칙해 한 걸 기억하고 있다. 또 초등학생 선배가 "이건 벼야 갈대야?"하고 묻는 통에 당혹스러워한 것도 기억하고 있다.

     스물다섯 코토부키자

 혼죠에 코토부키자가 생긴 것도 그쯤이었다. 나는 해가 기울어져 가던 어느 날, 어떤 초등학교 선배와 모토마치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아연 골함석을 실은 짐차가 몇 대나 지나갔다.
 "저건 어디로 가지?"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디 가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코토부키자! 그럼 저 짐차에 실려 있는 건?"
 나는 이번에는 기세 좋게 말했다.
 "양철!"
 하지만 이건 괜히 선배의 냉소만 살 뿐이었다.
 "양철? 저건 아연이야."
 나는 이런 문답 때문에 묘하게 의기소침해진 걸 기억한다. 그 선배는 중학교를 나온 후에 폐병을 앓아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스물여섯 괴롭히는 아이

 유치원에 들어간 나는 누구에게도 괴롭힘당하지 않았다. 물론 도쿠 탓에 번번이 울고는 했다. 하지만 그건 싸우고 나서 있었던 일이다. 때문에 나 또한 세 번에 한 번은 도쿠를 울린 기억을 지니고 있다. 도쿠는 소우부테츠도 사장인지의 차남으로 태어나 지기 싫어하는 골목대장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세간에 많은 "괴롭히는 아이"를 만났다. "괴롭히는 아이"는 스기우라 요시로였다. 스기우라는 내 옆자리서 무언가 구실을 잡으면 이따금 나를 꼬집고는 했다. 더군다나 스기우라의 집앞을 지나면 늑대와 닮은 개보고 나를 뒤쫓게 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생각해 보면 Greyhound그레이하운드란 개였으리라.) 나는 이 개에 쫓긴 끝에 다다미 가게에 뛰어든 걸 기억하고 있다.
 나는 지금 막연히 '괴롭히는 아이'의 심리를 생각하고 있다. 그건 소년에게 나타난 가학적 성욕이지 않았을까? 스기우라는 우리 반 중에서도 가장 얼굴이 하얀 소년이었다. 그분 아니라 유명한 부호의 첩이 낳은 소년이었다.

     스물일곱 그림

 나는 유치원에 들어갈 적엔 해군 장교가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로 어느 틈엔가 화가 지망으로 바뀌었다. 우리 숙모는 카노 쇼교쿠라는 호가이의 제자와 결혼하였다. 우리 숙부도 재판관이었던 우코쿠에게 남화를 배웠다. 하지만 내가 되고 싶었던 건 나폴레옹의 초상화니 라이온이니를 그리는 서양 화가였다.
 나는 당시 모은 서양 명화의 사진판을 지금도 몇 장인가 남겨두고 있다. 나는 요즘 다른 일을 하는 김에 그러한 사진판을 다시 거내 보았다. 그러자 그중 한 장은 나무 아래에 금발 미인을 세운 위스키 회사의 광고 그림이었다.

     스물여덟 수영

 내가 수영을 배운 건 일본 수영 협회였다. 내가 수영 협회에 다닌 유일한 작가인 건 아니다. 나가이 후우 씨나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도 역시 수영 협회를 다녔다. 당시엔 수영 협회도 갈대가 무성한 나카즈에서 야스다의 건물 앞으로 옮겨 갔다. 나는 그곳에 두세 동급생을 데리고 다녔다. 시미즈 마사히코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겠지 싶어서 물 안에서 똥 싼 적 있다? 그랬더니 바로 떠올라서 깜짝 놀랐어. 똥은 물보다도 가볍더라고."
 이런 이야기를 한 시미즈도 해군 장교가 된 후 작년(다이쇼 13년) 봄에 고인이 되었다. 나는 그 두세 주 전에 전근처인 미시마에서 온 시미즈의 편지를 기억하고 있다. 
 "이게 너한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거야. 나는 후두 결핵에다가 폐결핵도 겪고 있어. 아내는 나와 같은 병에 걸려 나보다도 먼저 죽어버렸어. 이제는 올해로 다섯 살 된 여자아이 하나만 남은 셈이야……일단 생전의 인사까진"
 나는 답신의 펜을 쥐면서 추운 봄의 미시마 해역을 생각하며 어떤 홋쿠를 적고는 했다. 이제 그 홋쿠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후두 결핵이라도 절망하면 안 된다"는 안일한 위로였단 것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스물아홉 체벌

 내가 초등학생일 적엔 체벌도 흔했다. 심지어 뺨을 때리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멱살을 잡고 뒤흔들거나 마루 위에 내던지거나 했다. 나는 한 번은 맞은 걸로 모자라 글자 공부용 종이를 든 채로 삼십 분이나 서있어야 했다. 이럴 때에 얻어맞는 건 딱히 아프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학생 앞에 서있는 건 괴로운 일이다. 나는 언젠가 이탈리아의 파쇼는 사회주의를 위해 아주까리기름을 마시게 해 복통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러운 벤치 위에 선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뿐 아니라 파쇼의 형별도 어쩌면 당사자에겐 그리 잔혹하지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른 홍수

 나는 이따금 홍수도 겪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떤 홍수도 마루 위로 올라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어머니나 큰어머니가 탁한 물속에 자를 넣고는 이만큼 불어났네 저만큼 불어났네 술렁이던 걸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밤에 눈을 뜨자 끊임없이 어디선가 작은 종이 계속 울리던 걸 기억하고 있다.


     서른하나 답안

 분명 초등학교 2, 3년일 적, 우리 선생님은 우리 책상에 귀퉁이가 파란 갱지를 나눠주더니 "귀여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쓰게 했다. 나는 코끼리를 "귀여운 것"에, 구름을 "아름다운 것"에 적었다. 내게는 그게 진실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답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구름이 뭐가 아름다워? 코끼리도 크기만 하잖아?"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더니 내 답안에 X표를 했다.

     서른들 카토 키요마사

 카토 키요마사는 아이오이쵸 니쵸메의 골목에 살고 있었다. 물론 그건 무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굉장히 작은 통가게였다. 하지만 주인의 표찰을 보면 분명 카토 키요마사였다. 그뿐 아니라 발에 그려진 문장도 뱀눈알이었다. 나는 이따금 이 가게의 주인인 키요마사를 보러 갔다. 키요마사는 짧은 턱수염을 기르고 망치나 대패 같은 걸 쓰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어쩐지 대단하게만 보였다.

     서른셋 일곱 불가사의

 그 시절엔 어느 집이나 램프를 섰다. 따라서 거리도 어두웠다. 이런 거리는 메이지라 해도 '혼죠 일곱 불가사의'하고 얽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나는 야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토마치도리를 걸으며 오타케구라의 덤불 너머서 바카바야시를 들은 걸 기억하고 있다. 그건 이시하라나 요코아미의 축제서 듣던 하야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200년 된 너구리의 바카바야시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 시라도 빨리 집에 가려 걸음을 재촉했다.

     서른넷 동원령

 나는 역시나 야학을 끝내고 돌아 오는 길에 혼죠 경찰서 앞을 지났다. 경찰서 앞은 평소와 달리 장대 끝에 달린 제등 한 쌍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이상하지 싶어서 부모님께 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건 내가 집을 비운 사에 "동원령 발령"이라는 호외가 우리 집에도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러일전쟁에 관한 이런저런 작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 한 쌍의 제등만큼 선명히 기억하지는 않는다. 아니, 나는 오늘도 장대 끝 제등을 볼 때마다 혼례보다도 먼저 전쟁을 떠올린다.

     서른다섯 히사이다 우노스케

 히사이다久井田란 글자는 잘못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를 히사이다 씨라 불렀다. 그는 우리 집의 유우 배달부 중 한 명이었다. 또 동시에 오늘만큼 많지 않은 사회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이 히사이다 씨께 사회주의의 신조를 배웠다. 그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피와 살에 물들지 않았다. 하지만 러일전쟁 중에 비전론자에게 악의를 가지지 않은 건 분명 히사이다 씨의 영향이었다.
 히사이다 씨께서는 5, 6년 전 대뜸 나를 찾으셨다. 내가 그와 어른끼리의 사회주의론을 나눈 건 이때뿐이다.(그는 그로부터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아마기산의 눈 속에서 동사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론보다도 그의 옥중 생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츠메 씨의 '행인' 속에 와카노우라에 간 남녀가 도무지 밥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아 접시를 물리죠? 그런 걸 감옥 안에서 읽으니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런 이야기도 해주었다.

     서른여섯 불똥

 비가 내렸던 어느 날 저녁, 나는 마찻길의 모랫길에서 보병 소대가 지나는 걸 만났다. 보병은 총을 어깨로 짊어 맨 채 묵묵히 행군했다. 하지만 그 신발은 모래에 쓸릴 때마다 이따금 불똥을 튀겼다. 나는 이 작은 불똥에서 무언가 비정한 심정을 느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시라야나기 슈코 씨의 '이수離愁'란 단편집을 읽고 역시 보병의 신발에서 튀는 불똥을 다룬 글을 발견했다.(내게 시라야나기 슈코 씨나 카미츠카사 쇼켄 씨의 이름을 가르쳐준 것도 어쩌면 히사이다 씨였을지 모른다.) 나 또한 같은 걸 보았기 때문일까, 아직 중학생이었던 내게는 꽤나 감명 깊은 일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통해 시라야나기 씨의 책을 읽게 되었고 어느 틈엔가 러시아 문학자의 이름을――특히 투르게네프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 단편집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서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시라야나기 씨의 문장에 아직도 사랑과 아까움을 느끼고 있다. 특히 도쿄 하늘을 감싸는 "다갈색 아지랑이"란 말에서.


     서른일곱 일본해 해전

 우리는 모두 일본해 해전의 승패를 일본의 큰일이라 믿었다. "오늘은 날씨가 맑지만 파도가 높다"란 호외는 나와도 승패는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어느 날 점심시간에 우리 반 선생님이 호외를 들고 교실에 와 "얘들아 기뻐해라, 크게 이겼단다"고 말했다. 이때 우리의 감격은 확실히 국민적이었을 테지.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쿠니키다 돗포의 작품을 읽고 "전보"란 단편에 역시 이런 감격이 묘사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황국의 흥망이 이 일에 걸렸다" 운운하는 신호를 나눴다는 건 아마 어떠한 전쟁 문학보다도 시적인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십 년 후, 해군 기관 학교의 이발사에게 이발을 받으며 그 또한 러일전역서 "아사히"의 수병이었던 관계상 일본해 해전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굉장히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뭐 그 신호는 항상 있었습니다. 일본해 해전 때가 유일하게 호외로 나갔을 뿐이에요."

     서른여덟 유술

 나는 중학교에서 유술을 배웠다. 또 하마쵸가시의 오타케란 도장으로 아침 연습을 다닌 적도 있다. 중학교에서 배웠던 유술이 어떤 유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타케의 유술은 분명 텐진신요류였다. 나는 중학교 시합에 나갔을 때 상대의 연습복에 손을 얹자마자 곧장 훌륭한 배대 뒤치기를 당해 반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 앞으로 고꾸라진 걸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내 유도 친구는 니시카와 에이지로 한 사람이었다. 니시카와는 지금 톳토리의 농림 학교인지서 선생 노릇을 하고 있다. 나는 그 후로도 수재라 불리는 몇몇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첫 수재는 니시카와였다.

     서른아홉 니시카와 에이지로

 니시카와의 별명은 사자였다. 그건 얼굴이 어딘가 사자를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니시카와와 동급생이었기에 적잖이 계발을 받았다. 중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영역 "사냥꾼의 수기"나 "사포"를 읽은 건 니시카와 없이는 힘들었을 테지. 하지만 나는 니시카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무언가 해주었다면 그건 단지 발을 걸어서 니시카와를 울리는 것뿐이었으리라.
 나는 또 니시카와와 함께 여름 방학에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니시카와는 나보다 유복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큰 여행을 하더라도 경비는 20엔을 넘지 않았다. 나는 역시 니시카와와 함께 나카자토 카이잔 씨의 "다이보사츠우토게"에 가까운 타바야마란 곳에 머물러 1등 35전이란 숙박비를 낸 걸 기억한다. 하지만 여관은 청결했으며 밥도 계란 프라이 같은 걸 내주었다.
 아마 아직 잔설이 심한 아카기잔에 오를 때였으리라. 니시카미는 구부정하게 걸으며 대뜸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슬플 거 같아?"
 나는 잠시 생각한 후 "슬프겠지"하고 대답했다.
 "나는 슬프지 않을 거 같아. 너는 창작의 길을 걸을 거니까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두는 게 좋겠다."
 하지만 나는 당시 아직 작가가 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들었는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마흔 공부

 나는 중학 시절엔 물론 복습이란 걸 하지 않았다. 단지 시험공부는 이따금 했다. 시험 당일에는 어떤 학생이나 운동장에서도 책을 읽곤 했다. 나는 그걸 볼 때마다 "나도 좀 더 공부할걸"이란 후회를 동반한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시험을 마치고 나오면 그런 생각은 고스란히 까먹고 말았다.

     마은하나 돈

 나는 1엔을 받아 서점에 책을 사러 가면 어째서인지 1엔치 책을 사지 못했다. 하지만 1엔을 다 쓰면 내가 원하는 책을 살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이따금 70전이나 80전의 책을 든 후 그 책을 산 걸 후회했다. 그건 물론 책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 마음속에서 중산 하층 계급을 느끼고 있다. 오늘날에도 중산 하층 계급의 자제는 무엇을 살 때마다 역시나 1엔을 들고 있을지언정 1엔을 전부 쓰는 건 주저되고 마는 게 아닐까?

     마흔둘 허영심

 어느 겨울에 가까운 날의 저녁, 나는 모토마치도리를 걸으며 대뜸 거리 사람들이 나를 전혀 보지 않는 걸 느꼈다. 동시에 또 묘한 쓸쓸함을 느꼈다. 하지만 딱히 "두고 보라지"하는 용기는 들지 않았다. 옅은 남색으로 물든 하늘에는 몇 개의 별도 떠있었다. 나는 그러한 별을 보며 되도록 기세를 부리며 걸었다.

     마흔셋 발화 연습

 우리 중학교는 가을이 되면 발화 연습은 물론이요 도쿄에 위치한 어떤 연대의 기동 연습에도 참가했다. 체조 교관――어떤 육군 대위는 항상 우리에게 엄격히 굴었다. 하지만 실제 기동 연습이 되면 이따금 명령을 실수하여 큰 소리로 상관에게 혼나고는 했다. 나는 항상 이 교관에게 동정한 걸 기억하고 있다.

     마흔넷 벌명

 갖은 도쿄 중학생이 교사에게 붙이는 별명만큼 얄팍하게 진실로 다가가는 건 없다. 나는 아쉽게도 오늘날엔 그러한 별명을 잊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4, 5년 전 내 사촌누나의 아이 중 한 명이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어떤 중학교 선생님을 "맛폰이 어쩌고"하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물론 "맛폰"이 뭐냐고 물었다.
 "뭐고 자시고 없어요. 그냥 그 선생님 얼굴을 보면 저절로 맛폰이란 말이 떠올라요."
 나는 그로부터 조금 뒤 그 중학생과 전철을 타서 우연히 그 선생님의 풍채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자――나 또한 역시 문장으로는 도무지 진실을 전할 수 없다. 정말로 별명 그대로 "맛폰"이란 느낌이 들었다.

  1. 江戸 시대의 삽화가 든 통속 소설책의 총칭 [본문으로]
  2. 浄瑠璃 가락의 하나((江戸 시대 중기에 京都의 都一中가 창시한 것)). [본문으로]
  3. 2 미터 가량 [본문으로]
  4. 그 해의 강놀이 개시를 축하하여 냇가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연중 행사 [본문으로]
  5. 출산 중 죽은 여성을 기리기 위해 물가에 봉을 세우고 붉은 천을 둘러 지나는 사람에게 물을 끼얹아 달라고 하는 풍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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