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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겨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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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거운 외투에 아스트라한 모자를 쓰고 이치가야의 형무소로 걸어갔다. 며칠 전 우리 사촌 형이 이 형무소로 들어왔다. 나는 사촌 형을 위로하기 위한 친척 총대였던 셈이다. 하지만 내 심정 속에는 형무소를 향한 호기심도 섞여 있었다.
 2월에 가까운 길거리는 홍보용 깃발 정도만 남은 채 전체적으로 차갑게 말라 있었다. 나는 언덕을 오르며 나 자신 또한 육체적으로 한없이 지쳐 있음을 느꼈다. 우리 숙부는 작년 11월에 후두암으로 고인이 되셨다. 그리고 나와 먼 친척 소년은 올해 정월에 가출했다. 또――내게는 무엇보다 사촌 형의 수감이 가장 타격적이었다. 나는 사촌 형의 동생과 함께 나하고는 가장 인연이 먼 교섭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사건에 얽힌 친척간의 감정상 문제는 도쿄서 태어난 사람들 이외엔 통하기 어려운 고집을 낳고는 했다. 나는 일단 사촌 형과 면회를 마치고 일주일이라도 조용히 보내고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치가야 형무소는 풀이 갈라진 높은 위치를 두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어딘가 중세기 같은 문에는 두터운 나무의 격자문이 되어 있고 그 너머선 서리를 뒤집어쓴 노송나무 등이 있는 모래가 깔린 정원이 보였다. 나는 이 문 앞에 서서 긴 반백 수염을 기른 사람 좋아 보이는 간수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 문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차양에 두터운 마른 이끼가 낀 면회인 대기실로 향했다. 얇은 방석이 깔린 그곳에는 나 말고 몇 명인가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검은 치리멘 하오리를 걸친 채 무언가 잡지를 읽는 서른네다섯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묘하게 무뚝뚝한 간수는 이따금 이런 대기실에 와 저금도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면회 순서가 온 사람들의 번호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한사코 기다려도 쉽게 번호를 불러주지 않았다. 한사코 기다려도――내가 형무소 문을 지난 건 이래저래 열 시 가량이었다. 하지만 내 손목시계는 벌써 한 시 십 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물론 배도 고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건 불기운은 찾아 볼 수 없는 대기실의 추위였다. 나는 끝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억누르려 했다. 하지만 의외로 수많은 면회인은 하나같이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특히 탄젠을 두 장 겹친 노름꾼 같은 남자는 신문 하나 읽지 않고 느긋이 귤만 먹고 있다.
 하지만 많았던 면회인도 간수가 부르러 올 때마다 점점 숫자가 줄어 갔다. 나는 기어코 대기실 앞으로 나와 모래가 깔린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겨울 햇살이라도 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불기 시작한 바람도 내 얼굴에 약한 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옹고집이 생겨서 무조건 네 시 전까지는 대기실에 들어가지 않겠다 결심했다.
 아쉽게도 나는 네 시가 되어도 아직 불리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나보다 늦게 온 사람도 어느 틈엔가 불렸는지 대부분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기어코 대기실로 들어가 노름꾼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나니와부시가타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하루에 한 명 밖에 못 만나니까요. 선생님 전에 누가 뵌 거겠지요."
 물론 이런 그의 말은 나를 불안케 했다. 나는 또 번호를 부르러 온 간수에게 사촌 형과 면회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간수는 내 말에 전혀 대답하지 않은 데다가 내 얼굴도 보지 않고 걸어가 버렸다. 동시에 또 노름꾼으로 보이는 남자 또한 두세 명의 면회인과 같이 간수의 뒤를 따라가 버렸다. 나는 한가운데에 서서 기계적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무뚝뚝한 간수에게 증오가 깊어지는 걸 느꼈다.(나는 이렇듯 굴욕을 받았을 때에 곧장 불쾌해지지 않는 걸 항상 이상하다 느끼고 있다.)
 간수가 다시 한 번 부르러 온 건 이래저래 다섯 시가 되었을 때였다. 나는 또 아스트라한 모자를 쓰고 간수에게 같은 걸 물으려 했다. 그러자 간수는 몸을 옆으로 돌린 채로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떠나 버렸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게 이 순간의 내 감정이었다. 피던 담배를 내던지고 대기실 반대편에 있는 형무소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의 돌계단을 오른 왼쪽에는 일본옷을 입은 사람 몇 명인가가 유리창문 너머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유리창을 열고 검은 명주 몬츠키를 입은 남자에게 되도록 조용히 말을 걸었다. 하지만 얼굴색이 달라진 건 나 스스로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저는 T의 면회인입니다. T하고 면회할 수 없나요?"
 "번호 호출할 테니 기다리시죠."
 "벌써 열 시부터 기다리고 있어요."
 "곧 부르러 올 겁니다."
 "부르러 오지 않으면 한사코 기다리기만 해야 합니까? 해가 져도 기다리기만 해요?"
 "자자, 진정하고 기다려주세요. 일단 기다려주세요."
 상대는 내가 날뛰는 걸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화가 난 동안에도 이 남자에게 조금 동정했다. "내가 친척 총대면 상대는 형무소 총대이다"――그런 우스운 생각도 들고는 했다.
 "벌써 다섯 시가 넘어가잖아요. 면회만은 할 수 있도록 편의 좀 봐주세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일단 대기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벌써 어두워져 가는 대기실 안에는 마루마게를 한 방금 전 여자 하나가 이번에는 잡지를 무릎 위에 덮은 채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있었다. 제대로 본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고딕 양식 조각만 같았다. 나는 그 여자 앞에 앉아 여전히 형무소 전체에 감도는 약자에 대한 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불린 건 이래저래 여섯 시가 되었을 참이었다. 나는 이번엔 눈이 동글동글하여 몸이 가벼워 보이는 간수의 안내를 받아 겨우 면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면회실이 말만 방이지 고작해야 가로세로 두세 척 정도의 공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내가 들어간 방 외에도 페인트칠이 된 문이 수없이 늘어진 게 공중화장실이랑 똑닮아 있었다. 면회실 정면의 좁은 복도 너머론 반달 모양의 창문 하나가 있어 면회인이 그 창문에 얼굴을 드러내는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사촌 형은 이 창문 너머서――빛이 잘 들지 않는 유리 창문 너머서 둥글게 살찐 얼굴을 드러냈다. 의외로 달라지지 않은 사실은 나를 어느 정도 안심케 했다. 우리는 감상주의를 섞지 않고 짧게 용무를 나누었다. 하지만 내 오른쪽 옆에는 오빠를 만나러 온 듯한 열여섯, 열일곱 먹은 여자가 홀로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사촌 형과 이야기하면서도 이 오른쪽의 울음소리에 귀가 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은 누명이니까 설명 좀 잘 해주세요."
 사촌 형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사촌 형을 바라본 채로 무어라고도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사실은 나를 갑갑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내 왼쪽에서는 띄엄띄엄 머리가 벗겨진 노인 한 명이 역시나 반달 모양의 창문 너머로 아들로 보이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는 생각이 많은데 막상 만나고 나면 다 까먹고 마는구나."
 나는 면회실을 나서며 어쩐지 사촌 형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 둘의 연대 책임처럼도 느껴졌다. 나는 다시 간수에게 안내를 받아 차가움이 몸에 스며드는 형무소 복도를 큰 걸음으로 걸어 현관으로 향했다.
 야마노테에 위치한 사촌 형의 집에는 나와 피를 나눈 사촌누나 한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나는 어수선한 거리를 지나 겨우 요츠야미츠케 정류소로 나와 만원 전철에 타기로 했다. "만나지 않고 혼자 있을 때엔" 그렇게 말한 묘하게 맥없는 노인의 말은 아직도 내 귀에 남아 있었다. 내겐 그것이 여자의 우는소리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손잡이를 붙잡은 채로 저녁노을 속에서 전등을 밝힌 코지마치의 집들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사람 나름"이란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삼십 분 가량 지난 후, 나는 사촌 형의 집 앞에 서서 콘크리트 벽에 붙은 벨을 눌렀다. 살짝 들려오는 벨 소리는 현관 유리창에 전등불이 들어오게 했다. 그렇게 나이를 먹은 여종 하나가 조심스레 유리문을 열더니 "어라……"하고 감탄사를 내더니 곧장 나를 거리와 맞닿은 2층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그 방 테이블에 외투와 모자를 벗어던지니 순식간에 이제까지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오는 걸 느꼈다. 여종은 가스난로에 불을 붙이고 나를 방안에 홀로 남긴 채 떠나갔다. 약간의 수집벽을 지니고 있던 사촌 형은 방벽에도 두세 장의 유화나 수채화를 걸어두었다. 나는 멍하니 그러한 그림을 번갈아 보고는 새삼스레 유위전변[각주:1]이란 옛날 말을 떠올렸다.
 그 전후로 찾아온 건 사촌 형이나 사촌누나의 동생이었다. 사촌누나도 내 예상보다 훨씬 침착한 듯했다. 나는 사촌 형의 전언을 되도록 정확히 두 사람에게 전하고 앞으로의 대처를 상담하기 시작했다. 사촌누나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려 들진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 도중도중에 아스트라한 모자를 들어 올려 내게 이런 말을 걸었다.
 "이상한 모자네. 일본에서 만드는 거 아니지?"
 "이거? 이건 러시아 사람이 쓰는 모자야."
 하지만 사촌 형의 동생은 사촌 형 이상으로 "사회인"이었던 만큼 여러 장애물을 보고 있었다.
 "어쨌든 요전 번에도 형의 친구들이 XX 신문 사회부 기자에게 명함을 건넸어요. 그 명함에는 입막음 비용 중 절반은 스스로 낼 테니 잔금을 넘겨주라 적혀 있었죠. 제가 알아보니까 그 신문 기자한테 이야기한 게 형의 친구 본인이라니까요. 물론 절반을 건넨 건 아니에요. 단지 잔금을 건네라 한 거죠. 거기다가 신문기자도 신문기자라서……"
 "저도 일단은 신문기자니까요. 귀가 따가운걸요."
 나는 스스로를 북돋기 위해 그런 농담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촌 형의 동생은 취기를 머금은 눈을 충혈시킨 채로 연술이라도 하듯이 말을 이었다. 농담조차 허투루 할 수 없는 험악함이었다.
 "더군다나 예심 판사를 화나게 하기 위해 일부러 판사를 붙잡아서는 형을 변호할 지경이니까요."
 "그건 직접 이야기를 하면……"
 "왜 안 했겠어요? 마음은 정말 감사한데 판사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되려 좋은 뜻이 무의미해진다고 고개를 숙여 부탁했어요."
 사촌누나는 가스난로 앞에 앉은 채로 아스트라한 모자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솔직히 자백하자면 사촌 형의 동생과 이야기하면서도 모자만 신경 썼다. 불 안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모자는 내 친구가 베를린의 유대인 마을을 찾았다 우연히 모스크바로 가게 되었을 때 겨우 구한 물건이었다.
 "그렇게 말해도 안 듣던가요?"
 "안 듣기만 할까요. 자기는 우리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건데 실례되는 소리 말라잖아요."
 "하기사 그래서야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없죠. 법률상 문제는 물론이고 도덕적 문제도 안 되니까요. 일단 겉보기엔 친구를 위해 시간이나 수고를 들이고 있죠. 실제로는 친구를 위해 함정을 파는 걸 돕는 셈이라도요――저도 어지간히 분투주의지만 그렇게 떠느는 녀석에겐 어쩔 도리가 없어요."
 이런 우리의 대화 중에 우리를 불쑥 놀래킨 건 "T 군 만세"란 목소리였다. 나는 한 손을 창틀에 두고 창문 너머로 거리를 보았다. 좁은 거리폭에는 사람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그뿐 아니라 XX쵸 청년단이라 적은 제등 몇 개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사촌누나와 사촌 형의 동생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제야 사촌 형이 XX 청년단 단장이란 직함도 지니고 있었음을 떠올렸다.
 "인사를 해야겠네요."
 사촌누나는 그제야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제가 다녀오죠."
 사촌 형의 동생은 적당히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방을 뒤로했다. 나는 그가 분투주의임에 부러움을 느끼며 사촌누나의 얼굴을 피해 벽에 걸린 그림 따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스스로도 괴로웠다. 그렇다고 무언가 운을 떼었다 두 사람 모두 감상적으로 되는 건 더더욱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벽에 걸린 그림 한 장서――사촌 형 자신의 초상화에서 원근법 실수를 발견했다.
 "누군 만세 소리 할 처지가 아닌데 말이죠. 이렇게 말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사촌누나는 끝내 묘하게 형식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웃 사람들은 아직 모르나요?"
 "네……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뭐가요?"
 "T 말이에요, 아버지하고."
 "그거야 T 씨 입장에선 여러 사정이 있는 거겠죠."
 "그럴까요?"
 나는 어느 틈엔가 짜증을 느껴 사촌누나에게 등을 돌린 채로 창문 앞으로 걸어 갔다. 창문 아래 사람들은 여전히 만세 소리를 하고 있었다. 만세는 "만세, 만세"하고 삼창이 되었다. 사촌 형의 동생은 현관 앞으로 나서 손에 제등을 든 수많은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좌우에는 작은 사촌 형의 딸 둘도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이따금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지독히 추운 밤, 나는 사촌 형의 거실서 얼마 전부터 시작한 박하 파이프를 물고 사촌누나와 마주본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첫 이레가 지난 집 안은 꺼림칙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촌 형의 백목 위패 앞에는 심지 하나가 불을 붙이고 있었다. 또 위패를 둔 상 앞에는 두 딸이 이불을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이를 고스란히 먹은 사촌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나를 괴롭힌 하루를 떠올렸다. 하지만 내 입으로 나온 건 이런 당연한 말이었다.
 "박하 파이프를 피고 있으면 추위가 더 강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그러게, 나도 손발이 차네."
 사촌 누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양 난로의 재 따위를 치우고 있었다………

(쇼와 2년 6월 4일)

 

 

 

 

 

  1. 이 세상(世上)의 모든 현상(現象)은 그대로 있지 않고 인연(因緣)에 의(依)하여 변해 가는 것이라는 말로, 세상사(世上事)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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