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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머니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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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방구석에 놓인 전신거울에는 서양풍으로 벽을 칠하고 일본풍 다다미가 있는――상하이 특유의 여관 2층 일부가 또렷이 비치고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하늘색 벽. 그리고 몇 첩인가 되는 새로운 타타미. 마지막으로 거울에 뒷모습을 비추고 있는 머리를 서양식으로 묶은 여자 하나――차가운 빛 속에는 그 모든 게 쓸쓸할 정도로 선명히 담겨 있다. 여자는 아까부터 뜨개질을 하고 있다.
 물론 뒤를 돌아보고는 있다 해도 밋밋한 명선 하오리를 입은 어깨너머론 앞으로 내려온 머리 사이로 창백한 옆얼굴이 살짝 보인다. 물론 살이 많지 않은 귀에 희미하게 빛이 비치는 것도 보인다. 약간 긴 구레나룻은 귀 안쪽을 살짝 옅게 보이게 했다.
 거울이 놓인 방에는 옆방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 외엔 무엇 하나 침묵을 깨는 일이 없다. 아직 그치지 않은 빗소리마저도 여기서는 침묵을 한 층 더 단조롭게 거들 뿐이었다.
 "여보."
 그렇게 몇 분인가가 지난 후, 여자는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불쑥, 하지만 맥아리 없이 누군가를 불렀다.
 누군가――방 안에는 탄젠[각주:1]을 입은 남자 하나가 살짝 떨어진 다다미 위에서 영자신문을 펼친 채로 몸을 길게 뻗고서 누워 있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남자는 가까운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어트리고는 신문에서 눈을 떼는 법이 없다.
 "여보?"
 여자는 다시 한 번 말을 건다. 그런 주제에 여자의 눈 또한 바늘 위에 머물러 있다. "왜 그래."
 남자는 어지간히 시끄럽다는 양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턱수염이 짧은 활동가스러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방 말이에요――이 방, 바꾸면 안 되나?"
 "방을 바꾸다니? 옮긴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겨우 한 숨 잤잖아."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얼마 안 됐어도요――이전 방은 비어 있잖아요?"
 남자는 이래저래 2주가량 두 사람을 갑갑하게 만든 채광이 좋지 않은 3층 방이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칠이 벗겨진 창가 벽에는 변색된 다다미 위에 친즈 커튼이 걸려 있다. 그 창에는 언제 물을 준 건지 꽃이 시들시들한 제라늄이 얄팍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더군다나 창밖을 보면 시종 북적이는 골목에 밀짚모자를 쓴 중국인 인력거꾼이 곳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근데 당신 그 방은 싫다고 그렇게나 타령했잖아."
 "그건 그런데 여기 오니까 또 갑자기 이 방이 싫어져서요."
 여자는 바늘을 멈추고는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썹과 눈이 가까운 데다 눈 끝자락이 가늘고 긴 예민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 주위의 윤곽을 보아도 무언가 힘든 걸 참고 있단 건 조금 상상이 갔다. 이제 보면 관자놀이에도 병적인 느낌이 들 정도의 파란 핏줄이 떠올라 있다.
 "괜찮죠? ……안 돼요?"
 "그치만 저번 방보다 넓고 편하잖아. 부족할 게 없으니까 그렇지――아니면 뭐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는 거야?"
 "이렇다할 건 없는데……"
 여자는 살짝 주저하였지만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정말로 안 돼요?"
 이번엔 남자가 신문 위에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기다 아니다 답하지 않았다.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단지 밖에서는 여전히 쉼 없는 빗소리가 들리고 있다.
 "봄비로군――"
 남자는 잠시 후 등으로 눕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후에서 살게 되면 홋쿠라도 한 번 시작해 보고 싶은걸."
 여자는 아무 대답도 않고 다시 바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후도 나쁜 곳은 아냐. 사택도 크고 정원도 상당히 넓지. 풀이나 꽃을 기르기엔 딱이야. 원래는 옹가화원이라고 해서 말야――" 
 남자는 불쑥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방 안에선 어느 틈엔가 흐느끼는 소리가 작게 울리고 있다.
 "야."
 우는소리가 불쑥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곧 다시 띄엄띄엄 계속되었다.
 "야, 토시코."
 반쯤 몸을 일으킨 남자는 타타미에 한쪽 팔꿈치를 둔 채로 당혹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너 나랑 약속했잖아. 이제 불평 안 한다며. 이제 눈물 안 보인다며. 이제――"
 남자는 살짝 눈을 떴다.
 "아니면 그 일 말고 다른 슬픈 일이라도 있는 거야? 예를 들어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던지 중국이라도 시골엔 가기 싫다던지――"
 "아뇨――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토시코는 눈물을 흘리며 의외일 정도로 격하게 부정했다.
 "저는 여보랑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어요. 그렇지만――"
 토시코는 고개를 숙이더니 넘치려는 눈물을 억누르려는 건지 얇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잘 보면 창백한 뺨의 밑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화염 같은 절박한 무언가가 타고 있다. 떨리는 어깨, 젖은 눈꺼풀――남자는 그런 걸 지켜보며 현재의 심정과 정반대로 순간 아내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렇지만――이 방은 싫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하잖아? 왜 이 방이 싫냐니까. 그것만 확실히 말해주면――"
 남자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토시코의 눈초리가 가만히 자신의 얼굴로 향하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 눈에는 눈물의 밑바닥에 거의 적의라 해도 손색없는 슬픈 빛이 빛나고 있었다. 왜 이 방이 싫어졌는가?――그건 비단 남자 스스로의 의문이었던 건 아니다. 또 동시에 토시코가 무언으로 남자에게 들이민 반문이다. 남자는 토시코와 눈을 마주하면서 다음 말을 잇는 걸 주저했다.
 하지만 말을 끊은 건 정말로 몇 초 동안의 일이다. 남자의 얼굴에는 서서히 이해의 색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저거야?"
 남자는 감동을 뒤덮듯이 묘하게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나도 신경 좀 쓰이더라."
 토시코는 남자의 말을 듣자 무릎 위에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창밖에선 어느 틈엔가 져가는 햇살이 비를 가늘게 하고 있었다. 하늘색 벽 너머서는 그런 빗소리를 밀어내듯이 지금도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둘

 2층 창문에 선명한 아침햇살이 닿고 있다. 반대편에는 3층짜리 벽돌 건물에 희미하게 이끼가 낀 역광의 집이 자리해 있다. 어두컴컴한 이쪽 복도서 보면 창문은 그 집을 배경으로 한 큼지막한 그림 한 장을 담고 있는 것처럼만 보인다. 튼튼한 떡갈나무 창틀이 마치 액자처럼만 보인다. 그 그림 한 가운에는 여자 하나가 옆얼굴을 보이며 작은 양말을 짜고 있다.
 여자는 토시코보다도 젊어 보인다. 비에 씻긴 아침햇살은 살이 잘 붙은 어깨에――화려한 오시마 하오리 어깨에 크게 내려오고 있다. 햇살은 살짝 고개 숙인 혈색 좋은 뺨에 반사되고 있다. 두꺼운 입술 위에 살짝 난 솜털에도 반사되고 있다.
 오전 열 시와 열한 시 사이――여관은 지금이 하루 중 가장 조용할 시각이다. 장사꾼도 관광객도 장기 투숙객도 대부분은 바깥으로 나가고 만다. 하숙 중인 근무자도 물론 오후까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터만 남은 여관의 긴 복도에는 이따금 실내용 집신 소리를 내는 여종의 발소리만이 남아 있다.

 이때도 그런 발소리가 먼 곳에서 차츰 가까워지더니 창문과 접한 복도에 마흔 가량의 여종 하나가 홍차 도구를 든 채로 그림자처럼 지나갔다. 여종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으니 여자가 있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버린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여종의 모습을 보고는 친근하게 불렀다.
 "오키요 씨."
 여종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어머, 열심이시네요――도련님께서는 같이 안 계시나요?"
 "우리 애? 애는 쉬는 중."
 여자는 뜨개질을 멈추고는 아이처럼 웃었다.
 "그나저나 오키요 씨."
 "무슨 일이십니까? 새삼스럽게."
 여종도 창가로 드는 햇살에 앞치마만을 또렷이 비추며 까무잡잡한 눈가로 웃어 보였다.
 "옆방 노무라 씨――노무라 씨 맞죠? 아내분 이름이 어떻게 되나?"
 "네, 노무라 토시코 씨라 하지요."
 "토시코 씨? 그럼 나랑 이름이 같네. 그분들은 가셨어?"
 "아뇨, 아직 닷새나 엿새는 머무실 겁니다. 그 후로는 우후에 가신다고――"
 "근데 아까 앞을 지나가는데 옆방에 아무도 없던데?" "그게 어젯밤에 갑자기 3층 방으로 바꾸셔서――"
 "그래?"
 여자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듯이 둥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분이지? 여기 오신 날에 아이를 잃으신 분이?"
 "네, 안타까운 일이죠. 곧장 병원에 가시긴 했습니다만."
 "그럼 병원에서 돌아가신 거야?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
 여자는 앞머리 사이로 엿보이는 이마서 희미한 우울함을 둘렀다. 하지만 곧 본래의 쾌할한 웃음을 되찾고는 장난스러운 눈초리를 지었다.
 "그거면 됐어. 자자, 어서 절로 가버려."
 "정말 지독하신 분이시군요."
 여종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렇게 장난치시면 게이샤한테 전화가 올 때 몰래 남편분께 연결해버립니다?"
 "그러라지? 빨리 가라니까. 홍차 식는 거 아냐?"
 여종이 창문에서 비키자 여자는 다시 뜨개질을 하면서 작게 노래를 불렀다.
 오전 열 시와 열한 시 사이――여관은 지금이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이다. 방마다 놓인 화분서 갈라진 꽃은 이 사이에 여종이 가져가 버려 버린다. 2층, 3층의 놋쇠 손잡이도 이 사이에 보이가 닦는다고 한다. 그런 침묵에 둘러싸인 가운데 단지 거리의 소란만이 유리문을 열어둔 곳곳 창문에서 햇살과 함께 들어오고 있다.
 그러던 사이 문득 여자의 무릎에서 털실뭉치가 굴러떨어졌다. 털뭉치는 튕기자마자 붉은 선을 그리며 데굴데굴 복도로 나가려 했다――그런 줄 알았더니 누군가가 털뭉치를 조용히 들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여자는 등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부끄럽다는 양 인사를 했다. 잘 보니 뭉치를 주은 건 지금 막 여종과 이야기한 삐쩍마른 옆방 부인이었다.
 "감사하기는요."
 털뭉치는 얇은 손가락에서 돼지비계보다도 하얗고 살이 오른 손가락으로 옮겨 갔다.
 "여기는 따듯하네요."
 토시코는 창가로 걸어와서는 눈부시다는 양 눈가를 찌푸렸다.
 "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졸릴 정도에요."
 두 어머니는 그 자리서 행복하다는 양 웃어 보였다.
 "어머, 귀여운 아기양말이네요."
 토시코의 목소리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여자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2년만에 바늘을 들어 본 거예요――너무 한가해서."
 "저는 아무리 한가해도 게으름만 피우는걸요."
 여자는 등나무 의자에 양말을 내려놓고는 도리가 없다는 양 웃었다. 토시코의 말은 무심하게 다시 한 번 여자를 때렸다.
 "댁 자제분은――자제분 맞죠? 언제 태어나셨나요?"
 토시코는 머리카락에 손을 얹으며 힐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우는소리가 들리는 것도 참기 힘들었던 옆방 갓난 아기――그런데 지금은 무엇보다도 토시코의 관심을 끌고 있다. 심지어 그 관심을 채우면 되려 괴로울 뿐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이건 작은 동물이 코브라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토시코의 마음 또한 어느 틈엔가 괴로움 그 자체에 최면 작용이라도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상처를 입은 병사가 일부러 상처를 벌리는 한이 있더라도 잠깐의 쾌락을 즐기는 것처럼 싫으면서도 괴로운 걸 마다하지 않는 병적인 심리의 한 사례인 걸까?
 "요번 정월이었지요."
 여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조금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곧 고개를 들고는 안타깝다는 양 덧붙였다.
 "큰일을 겪으셨죠."
 타이코는 촉촉해진 눈가 안에 무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폐렴이었지요――정말이지 악몽이라도 꾸는 거 같았어요."
 "그것도 오자마자 있었던 일이니까요. 뭐라 위로해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여자의 눈동자에는 어느 틈엔가 희미하게 눈물이 빛나고 있었다.
 "제가 만약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어쩌면 좋을까요?"
 "한때는 많이 슬퍼했지만――이제는 체념했어요."
 두 어머니는 그 자리서 쓸쓸히 아침햇살을 바라보았다.
 "이 주변엔 안 좋은 감기가 도니까요."
 여자는 고심하면서 끊겼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본은 좋지요. 기후도 여기만큼 나쁘지 않고――"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비가 많긴 하네요."
 "올해는 더――어머, 울고 있네요."
 여자는 귀를 기울인 채로 다른 사람처럼 작게 웃었다.
 "잠시 실례할게요."
 하지만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여종이 우는 갓난 아기를 품에 안은 채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갓난 아기를――아름다운 모슬린 옷 안에서 찌푸린 얼굴을 내민 갓난 아기를――토시코가 내심 보지 않으려 한 튼튼하게 턱을 들고 있는 갓난 아기를!
 "제가 창을 닦으러 가니 바로 눈을 뜨시네요."
 "고생이 많네."
 여자는 익숙하게 갓난 아기를 가슴에 받았다.
 "어머, 귀여워라."
 토시코는 얼굴을 가까이하며 강렬한 젖 냄새를 느꼈다.
 "포동포동하기도 해라."
 살짝 상기된 여자의 얼굴에는 끝없는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는 토시코의 심정을 동정 못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하지만 그 유방 아래서――한껏 부풀어 오른 어머니의 유방 아래서 솟아오르는 득의양양함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셋

 옹가화원의 회화나무나 버들은 오후의 미풍에 흔들리며 정원의 흙과 풀 위에 햇살과 그림자를 흩뿌리고 있다. 아니 흙과 풀만이 아니다. 그 회화나무에 걸린 정원에 어울리지 않는 하늘색 해먹에도 흩뿌리고 있다. 해먹에 누운 여름 바지에 조끼를 입은 살짝 통통한 남자에게도 흩뿌리고 있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인 채로 회화나무 가지에 걸린 중국풍 새장을 바라보고 있다. 새는 문조라고 하는 모양이다. 문조는 명암의 얼룩 속에서 끝없이 나무를 오가며 이따금 자못 신기하다는 양 새장 아래의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그때마다 웃어 보이며 담배를 입에 옮기고는 했다. 혹은 사람과 이야기하듯이 "이 녀석"이니 "왜 그래?"하고 말하기도 했다.
 주위선 정원수가 살랑이는 와중에 희미하게 풀냄새가 풍기고 있다. 한 번 저 멀리서 증기선의 기적 소리가 울린 걸 끝으로 이제 사람이 내는 소리는 찾아 볼 수 없다. 증기선은 저 멀리 물러났겠지. 붉게 탁해진 장강의 물에 눈부신 수맥을 끌며 서쪽이나 동쪽으로 떠나리라. 그 물이 보이는 부두서는 전라나 다름없는 거지 하나가 수박 껍질을 물고 있다. 또 아기 돼지 무리도 길게 옆으로 퍼져 어미 돼지의 젖가슴을 다투고 있을지도 모른다――작은 섬을 보는 게 질린 남자는 그런 공상에 젖어서 어느 틈엔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여보."
 남자는 크게 눈을 떴다. 해먹 옆에 서있는 건 상하이 여관에 있을 때보다 살짝 혈색이 좋아진 토시코였다. 머리에도 여름용 오비에도, 츄카타 무늬가 된 유카타에도 역시 명암의 얼룩을 받으며 서있는 화장기 없는 토시코였다. 남자는 아내를 보며 거리낌 없이 크게 하품을 했다. 그러고는 거창하게 해먹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우편 왔어요."
 토시코는 눈으로만 웃으며 몇 장의 편지를 남자에게 건넸다. 동시에 유카타 가슴가에서 복숭아색 봉투에 담긴 작은 편지 한 장을 꺼내 보았다.
 "오늘은 저한테도 온 거 있죠."
 남자는 해먹에 걸터앉아 이제는 짧아진 담배를 씹으며 적당히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요시코도 옆에 앉아서는 봉투와 같은 복숭아색 종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옹가화원의 회화나무나 버들은 오후의 미풍에 흔들리며 이 평화로운 두 사람에게 햇살과 그림자를 흩뿌리고 있다. 문조는 거의 울지 않는다. 날갯소리와 함께 벌레 하나가 남자의 어깨 위로 내려왔지만 그마저도 곧 떠나고 말았다………
 이런 잠깐의 침묵 후, 토시코는 숙인 고개도 들지 않고 대뜸 이렇게 외쳤다.
 "어머, 옆방 아기도 죽었대요."
 "옆방?"
 남자는 살짝 귀를 세웠다.
 "옆방이라니?"
 "왜요, 그 옆방. 왜 상하이 여관의――"
 "아, 그 애 말야? 안타깝게 됐네."
 "그렇게 튼튼한 아이가……"
 "병이 뭐라는데?"
 "감기라나 봐요. 처음에는 가벼운 감기나 배탈인 줄만 알았는데――라네요."
 토시코는 살짝 흥분하여 조금 빠른 목소리로 편지를 읽었다.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비슷하지 않아요? 주사나 산소 흡입처럼 여러 수단을 써봐도――그리고 이건 어떻게 읽는 거지? 우는소리네. 우는소리도 점점 얇아져서 밤 열한 시 오 분 정도 전에 이미 숨을 거두었다. 그때의 제 슬픔을 이해해주셨으면……"
 "안타깝게 됐네."
 남자는 다시 한 번 해먹에 얕기 기대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남자의 머리 한구석에선 여전히 죽기 직전의 갓난 아기 하나가 작은 신음을 하고 있다. 그랬던 신음은 어느 틈엔가 우는소리로 바뀌어 갔다. 빗속을 꿰뚫는 건강한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로――남자는 그런 환상 속에서도 아내가 읽는 편지에 귀를 기울였다.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또 언젠가 뵈었을 때의 일이 떠오릅니다. 그 당시 일은 부디 용서해주시길――아아, 싫어라. 정말로 세상이 싫어지네요."
 토시코는 우울한 눈을 들고는 신경적으로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새장 속 문조를 보자마자 기쁜 기색으로 가련한 두 손으로 손뼉을 쳤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저 문조를 놔주죠."
 "놔준다니? 네가 아끼는 새잖아."
 "네, 네, 아끼는 새라도 상관없어요. 옆방 아기를 위한 추선[각주:2]이에요. 왜 방조[각주:3]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 방조를 해주는 거예요. 문조도 기뻐할걸요――나는 손이 안 닿으려나? 안 닿으면 당신이 내려줘요."
 회화나무 밑으로 달려 간 토시코는 발돋움을 해가며 되도록 팔을 뻗었다. 하지만 새장을 건 가지에는 손가락 조차 잘 닿지 않았다. 문조는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날개를 퍼덕거린다. 그 박자에 먹이 상자 속 기장이 새장 밖으로 날렸다. 하지만 남자는 재밌다는 양 그저 토시코를 바라볼 뿐이었다. 뒤로 젖힌 목, 부풀어 오른 가슴, 발 끝자락으로 무게를 받치는 다리――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안 닿나?――안 닿네."
 토시코는 발돋움을 한 채로 남편 쪽을 보았다.
 "좀 내려봐요."
 "어떻게 내려? 받침대라도 있으면 또 모를까――게다가 놔주더라도 지금 당장 놔줄 건 없잖아?"
 "그치만 지금 놓아주고 싶은걸요. 내려줘요. 내려주지 않으면 괴롭힐 거예요. 잘 알아두라고요. 해먹을 풀어버릴 거예요――"
 토시코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눈에도 입술에도 감출 수 없는 웃음이 담겨 있다. 심지어 거의 평정을 잃은 굉장히 행복한 웃음이다. 남자는 이 순간 본 아내의 미소서 모종의 잔혹함마저 느꼈다. 햇빛을 받은 풀초의 안쪽서 항상 인간을 지켜보는 꺼림칙한 힘에 비슷한 잔혹함을.
 "허튼짓 말고――"
 남자는 담배를 던져버리고는 농담처럼 아내를 혼냈다.
 "애당초一그 뭐였더라. 옆방 아내분께 미안하지 않아? 그쪽은 아기가 죽었는데 우리는 웃고 떠들고……"
 그러자 토시코는 어떻게 된 것인지 얼굴이 불쑥 창백해졌다. 그런 데다가 토라진 아이처럼 속눈썹이 긴 눈을 아래로 깔고는 무어라 말하는 법도 없이 복숭아색 편지를 찢어버렸다. 남자는 조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색함을 밀어내기 위함인지 다시 쾌활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도 뭐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건 행복이긴 하지. 상하이에 있을 때엔 곤란했으니까. 병원에 있으면 마음만 앞서고 나오면 걱정만 앞서고――"
 남자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토시코는 발밑을 보자마자 그림자진 뺨 위로 어느 틈엔가 눈물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당혹스럽다는 양 짧은 콧수염만 만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보."
 갑갑한 침묵이 이어진 후, 그런 목소리가 들렸을 때도 토시코는 아직 남편 앞에서 색이 좋지 않은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왜?"
 "저는――저는 악독한 걸까요! 그 아기가 죽은 게――"
 토시코는 불쑥 남편의 얼굴에 묘하게 열기를 품은 눈초리를 보냈다.
 "죽은 게 기뻐요. 안타깝기도 하지만――그래도 저는 기뻐요. 기쁘면 안 되는 건가요? 악독한 건가요? 네, 여보?"
 토시코의 목소리에는 이제까지 없던 거친 힘이 담겨 있었다. 남자는 와이셔츠의 어깨나 조끼에 이제는 한가득 들기 시작한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무언가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게 엄숙히 앞을 가로막기라도 한 것처럼.

(다이쇼 10년 8월)

  1. 솜을 두껍게 둔 소매 넓은 일본 옷((방한용 실내복; 또, 잠옷으로 쓰임)) [본문으로]
  2. 죽은 사람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爲)하여 착한 일을 함 [본문으로]
  3. 새를 날려 보냄. 불교(佛敎)의 방행회 등(等)에서, 공덕(功德)을 쌓기 위(爲)해 잡은 새를 놓아주는 일이 있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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