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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마법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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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비내리는 밤의 일입니다. 저를 태운 인력거는 오오모리 외각의 험난한 언덕을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며 겨우 대나무숲에 둘러싸인 작은 서양관 앞에 멈춰 섰습니다. 회색 페인트가 벗겨진 좁고 갑갑한 현관을 인력거꾼이 걸어 둔 제등의 빛으로 보니 주위와 달리 새로운 도자기 문패가 인도인 마틸람 미슬라라는 일본어로 적힌 채로 걸려 있습니다.
 마틸람 미슬라 군이라 하면 이미 아는 분들이 적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미슬라 군은 오랫동안 인도의 독립 계획을 세우고 있는 콜카타 출신의 애국자로 또 동시에 하산 칸이라는 명성 높은 브라만에게 비법을 배운 젊은 마법대가기도 합니다. 저는 마침 한 달 전부터 어떤 친구의 소개로 미슬라 군과 교제를 했는데 정치와 경제 문제로 이런저런 의논을 나누는 일은 있어도 중요한 마법을 쓸 때만은 한 번도 자리에 참석한 적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오늘 밤은 미리 마법을 보여달라고 편지로 부탁하고 나서 당시 미슬라 군이 살고 있던 적적한 오오모리의 외각까지 인력거를 타고 온 것입니다.
 저는 비에 젖은 채로 힘없는 인력거꾼의 제등 빛에 의지하여 문패 아래에 놓인 호출 벨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려 현관에 고개를 내민 건 미슬라 군을 거드는 키가 작은 일본인 할머니셨습니다.
 "미슬라 군 계시나요."
 "계십니다.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붙임성 좋게 그렇게 말하며 곧장 현관에서 똑바로 가면 나오는 미슬라 군의 방에 저를 안내해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비도 오는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새까맣고 눈이 큼지막하며 부드러운 콧수염을 기른 미슬라 군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석유램프의 심지를 꼬면서 기운 차게 제게 인사해주었습니다.
 "아뇨, 당신의 마법을 볼 수 있다면 비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저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어두컴컴한 석유 램프의 빛을 받은 어두컴컴한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미슬라 군의 방은 간소한 서양식이었습니다. 중앙에 테이블 하나, 벽쪽에 적당한 크기의 책장 하나, 그리고 창문 앞에 책상 하나. 그 외에는 우리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줄지어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그 의자나 책상은 하나같이 오래된 거라서 테두리에 붉은 꽃 모양이 새겨진 테이블보마저 지금 당장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실밥이 터져 있었습니다.
 저희는 인사를 마치고는 한동안 대나무숲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방금 전 할머니가 다시 홍차 도구를 가지고 오더니 미슬라 군은 담뱃갑 뚜껑을 열고는
 "한 대 피시죠."하고 권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사양 않고 담배를 받아 성냥불을 붙이며
 "분명 당신이 쓰시는 정령은 진이라는 이름이었죠. 그럼 제가 이제부터 보는 마법도 그 진의 힘을 빌리는 건가요?"
 미슬라 군은 자신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히죽히죽 웃으며 냄새 좋은 연기를 내뿜었습니다.
 "진이라는 정령이 있다는 생각은 벌써 몇 백 년이나 된 낡은 것이지요. 아라비안나이트 시대라 해야 할까요? 제가 하산 칸에게 배운 마법은 당신도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답니다. 수준이 진보된 최면술에 지나지 않으니까요――한 번 보시죠. 이 손을 단지 이렇게 하면 그만입니다."
 미슬라 군은 손을 들고 두세 번 가량 내 눈앞에 삼각형 같은 걸 그렸습니다. 이윽고 그 손을 테이블 위에 두자 테두리에 붉게 장식된 모양의 꽃이 피어올랐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의자를 잡아당기며 꽃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제까지 테이블보 안에 있던 꽃 모양 중 하나임이 분명했습니다. 하물며 미슬라 군이 그 꽃을 제 코끝으로 뻗자 마치 사향 같은 무겁고 갑갑한 냄새마저 풍겼습니다. 제가 너무 신기한 나머지 몇 번이나 감탄사를 내자 미슬라 군은 역시 작게 웃은 채로 그 꽃을 적당히 테이블보 위로 떨어트렸습니다. 물론 떨어진 꽃은 본래의 모양이 되었고 꺾는 건 고사하고 꽃잎 하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별 볼 일 없죠? 이번에는 이 램프를 보시지요."
 미슬라 군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 램프를 들었다 내려놓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램프는 그 박자에 마치 팽이라도 되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한 곳에 정지한 채로 램프 통을 중심으로 삼아 기세 좋게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초에 저는 혹여 화재라도 날까 조마조마했습니다만 미슬라 군은 조용히 홍차를 마시며 조금도 소란을 떨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도 끝내는 배짱이 자리 잡아 버려 점점 빨라지는 램프의 회전을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았습니다.
 실제로 램프 뚜껑이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가는 가운데 노란색 불이 단 한 번도 껌뻑이지 않고 빛나는 건 말로 다 못할 정도로 아름답고 신기한 구경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램프가 도는 게 점점 빨라져 기어코 도는 게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더니 어느 틈엔가 이전처럼 위치 하나 어긋나는 법 없이 테이블 위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놀라셨나요? 이런 건 정말로 어린애 속이기입니다. 그래도 바라신다면 하나 더 보여 드리도록 하죠."
 미슬라 군은 뒤로 돌더니 벽 쪽의 책장을 바라봅니다. 이윽고 그 방향에 손을 뻗어 부르듯이 손가락을 움직이니 이번에는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 하나씩 움직여 자연스레 테이블 위까지 날아왔습니다. 또 날아오는 방식이 두 표지를 펼치고는 여름의 저녁 하늘을 오가는 박쥐처럼 퍼덕이며 날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는데, 책은 어두운 램프 빛 속에서 몇 권이나 자유롭게 나돌며 하나하나 차근차근 테이블 위에 피라미드를 쌓아 갔습니다. 심지어 하나도 남김없이 옮겨 오나 싶었더니 곧 처음 온 것부터 움직여 본래의 서재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재밌었던 건 얄팍한 가제본 책 한 권이 역시 날개처럼 표지를 펄럭이며 둥실 공중에 오르더니 한동안 테이블 위에서 원을 그리고는 불쑥 페이지를 훑으며 거꾸로 제 무릎에 떨어진 일이었습니다. 뭔가 싶어 들어 올려 보니 제가 일주일 전에 미슬라 군에게 빌려 준 신작 프랑스 소설이었습니다.
 "책 잘 읽었습니다."
 미슬라 군은 다시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로 제게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대다수의 서적이 테이블 위에서 서재로 돌아간지 오래였습니다. 저는 꿈에서 깬 듯한 심정이라 잠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곧 방금 미슬라 군이 말한 "제 마법은 당신도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답니다"란 말을 떠올리며,
 "이거 참, 대단하다고 건너건너 전해 듣긴 했는데 당신이 쓰는 마법이 이렇게나 신비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다는 건 농담하신 건가요?"
 "농담은요. 누구나 어려움 없이 쓸 수 있습니다. 단지――" 그렇게 말하던 미슬라 군은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한 말투로,
 "단지 욕심 있는 사람은 쓸 수 없습니다. 하산 칸의 마법을 배우려면 먼저 욕심을 버리셔야 합니다. 당신은 그러실 수 있나요?"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만 어쩐지 불안해져 곧장 말을 덧붙였습니다.
 "마법만 배울 수 있다면."
 그럼에도 미슬라 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못을 박는 건 무례하다 생각한 거겠죠. 이윽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럼 가르쳐드리지요. 하지만 아무리 누구나 쓸 수 있다 해도 배우려면 시간이 듭니다. 오늘밤은 저희 집에서 머물고 가시죠."
 "이래저래 죄송하군요."
 저는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몇 번이나 미슬라 군께 인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미슬라 군은 신경 스는 기색도 없이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할머님, 할머님. 오늘밤은 손님이 묵고 가신답니다. 잠자리 준비를 해주시죠."
 저는 가슴이 두근거려 담뱃재를 터는 것도 잊고 석유 빛을 고스란히 받는 친절한 미슬라 군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올려다보았습니다.

       ×          ×          ×

 제가 미슬라 군에게 마법을 배워 한 달 가량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이 역시 비가 내리붓는 밤이었는데 저는 긴자의 어떤 클럽 한 방에서 대여섯 명의 친구와 난로 앞에 진을 쳐 가벼운 잡담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곳은 도쿄 중심이니 창밖에서 내리는 비도 길거리의 자동차나 마차 지붕을 적시는 탓인지 오오모리의 대나무숲에 내리는 비처럼 쓸쓸한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물론 창문 안쪽의 밝은 분위기도, 밝은 전등 빛도, 커다란 모로코 가죽 의자도, 또 매끈하게 빛나고 있는 쪽매붙임세공 마루도, 척 보기에 정령이라도 튀어나올 거 같은 미슬라 군의 방하고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담배 연기 속에서 한동안 사냥 이야기나 경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마시던 담배를 난로 안에 던져 넣고는 저를 보면서,
 "너 요즘 마법을 쓴다고 들었는데 우리 앞에서 한 번 보여주지 그래?"
 "좋고 말고."
 저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자못 마법 명인처럼 거만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뭐든지 맡길 테니 세상 마술사들은 못할 법한 신기한 마법 좀 부려줘봐."
 친구들은 다들 찬성인지 의자를 당기면서 재촉하듯이 저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천천히 일어나,
 "잘 보라고. 내가 쓰는 마법에는 속임수도 장치도 없으니까."
 저는 이렇게 말하며 두 손 소매를 걷어 올리고 난로 안에 불타는 석탄을 적당히 손바닥 위로 잡아 올렸습니다. 저를 둘러싸고 있던 친구들은 그것만으로도 혼이 쏙 빠져나갔겠지요. 다들 얼굴을 마주한 채 옆으로 다가가다 화상이라도 입으면 큰일이라며 꺼림칙하다는 양 엉덩이를 뒤로 뺐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없이 침착히 손바닥 위 석탄불을 한동안 일동의 눈앞에 보여주고는 이번에는 기세 좋게 바닥에 흩뿌렸습니다. 그 순간 밖에서 들리던 빗소리와 또 다른 빗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건 새빨갛던 석탄불이 제 손바닥을 벗어나는 동시에 아름다운 금화가 되어 무수한 비처럼 마루 위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다들 꿈이라도 꾼 것처럼 멍한 표정만 지을 뿐 갈채를 보내는 것마저 잊어버렸습니다.
 "간단히 이정도야."
 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본래 의자에 앉았습니다.
 "이거 전부 진짜 금화야?"
 친구 하나가 황당해하며 겨우 그렇게 물은 게 그로부터 대략 오 분 쯤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진짜 금화지. 거짓말 같으면 직접 들어 봐."
 "설마 화상 입는 건 아니지?"
 친구 하나가 머뭇머뭇 마루 위 금화를 손에 들어 봅니다.
 "이거 진짜 금화네. 거기 직원, 빗자루를 가져와서 이거 좀 다 모아줘봐."
 직원은 그 말을 따라 마루 위 금화를 모아서 옆 테이블에 얇게 깔았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테이블을 둘러싸면서,
 "대강 20만 엔은 되겠어."
 "아니 더 될걸. 약한 테이블이 무너지려 할 정도잖아."
 "대단한 마법을 배웠는걸. 석탄불을 곧장 금화로 바꾸다니."
 "이래서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이와자키나 미츠이에 지지 않을 부자가 되어버릴 거야."하고 입을 모아 제 마법을 칭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역시나 의자에 기댄 채로 느긋이 담배 연기를 뱉고는,
 "아니, 내 마법은 한 번 욕심을 부리면 두 번 다시 쓸 수 없어. 그러니 이 금화도 너희가 다 봤으니까 곧장 원래 난로 안으로 던져 넣을 생각이야."
 친구들은 내 말을 듣자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만한 거금을 본래의 석탄으로 돌리는 건 아깝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미슬라 군과 약속한지 얼마 안 됐으니 반드시 난로로 돌려 놓겠다며 고집을 부리며 친구들과 싸웠습니다. 그러자 친구 중에서도 가장 교활한 녀석이 코끝으로 비웃으면서,
 "너는 이 금화를 본래의 석탄으로 돌릴 생각이야. 우리는 그게 싫고. 그럼 아무리 떠들어 본들 결론이 나지 않지.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보니까 이 금화를 판돈으로 삼아서 너하고 우리하고 카드 게임을 하는 거야. 그리고 만약 네가 이기면 석탄으로 돌리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돼.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기면 금화 그대로 우리한테 건네줘. 그러면 서로 명분도 세우고 만족할 수 있잖아."
 그럼에도 저는 고개를 저어 그 요청을 거절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이윽고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저와 테이블 위 금화를 교활히 번갈아 보더니,
 "카드 게임을 안 한다는 걸 보니 금화를 우리한테 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럼 마법을 쓰기 위해 욕심을 버렸다는 네 결심도 의심스러운데?"
 "아니, 나는 꼭 이 금화가 아쉬워서 석탄으로 돌리는 게 아냐."
 "그럼 게임을 하자고."
 몇 번이나 이런 벽창호 같은 문답을 반복한 후, 기어코 저는 친구의 말처럼 테이블 위 금화를 판돈 삼아 카드 게임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물론 친구들은 크게 기뻐하여 곧장 트럼프 덱 하나를 꺼내더니 방 구석에 놓여 있던 게임용 테이블을 둘러싼 채로 아직 주저하는 저를 빨리 하라며 재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도리 없이 한동안 친구들을 상대로 마지못해 카드 게임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평소엔 카드 게임을 잘 하지도 않던 제가 그날 밤만 거짓말처럼 척척 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또 묘해서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던 게 점점 재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미처 십 분도 되지 않아 저는 어느 틈엔가 모든 걸 잊고 열심히 카드 게임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애당초 금화를 가져갈 생각으로 카드 게임을 시작한 친구들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다들 초조해진 나머지 얼굴색이 달라질 정도로 열중하여 승부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저는 한 번도 지지 않을뿐더러 끝내는 금화와 거의 동일할 정도의 돈을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방금 전 사람 나쁜 친구 하나가 마치 미치광이 같은 기세로 제 앞에 카드 한 장을 내밀며,
 "자, 뽑아. 나는 내 재산을 전부 걸겠어. 땅도, 집도, 말도, 자동차도 하나도 남김없이 걸겠어. 대신 너는 그 금화 말고 이제까지 네가 이긴 돈을 전부 걸어야 해. 자, 뽑아."
 저는 그 순간 욕심이 생겼습니다.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산만 같은 금화뿐일까 모처럼 제가 따낸 돈마저 한 번 운 나쁘게 지면 전부 상대 친구에게 뺏기고 말 터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승부서 이기면 저는 상대의 전 재산을 한 번에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쓰지 않으면 마법을 배운 보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한 저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 몰래 마법을 쓰면서 결투라도 하는 기세로,
 "좋아, 먼저 뽑아봐."
 "9."
 "킹."
 저는 승리의 포효를 지르며 새파랗게 질린 상대의 눈앞에 뽑은 카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패 안의 킹이 마치 혼이라도 깃든 것처럼 왕관을 쓴 고개를 들고는 훌쩍 카드 밖으로 몸을 내밀고는 기품 있게 검을 든 채로 히죽 꺼림칙한 웃음을 짓고는,
 "할머님, 할머님. 오늘밤은 손님이 묵고 가신답니다. 잠자리 준비를 해주시죠."
 익숙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어떻게 된 것인지 창밖에 내리던 비마저 불쑥 오오모리의 대나무숲에 내리는 비처럼 쓸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번쩍 정신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저는 어두컴컴한 석유램프의 빛을 받으며 마치 카드 속 킹처럼 웃고 있는 미슬라 군과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제 손가락 사이에 놓인 담뱃재마저 아직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걸 보아도 제가 한 달이라 생각한 건 고작해야 이삼 분 사이에 본 꿈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이삼 분이란 짧은 시간이 제가 하산 칸의 마법을 배울 자격이 없다는 인간임을 증명해준 건 저 스스로에게도 미슬라 군에게도 명백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부끄럽게 고개를 숙인 채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 마법을 쓰려면 일단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당신께선 그만한 수행이 되지 않은 것이지요."
 미슬라 군은 유감이라는 눈초리를 보내며 테두리에 붉은 꽃 모양이 장식된 테이블보 위에 팔꿈치를 얹은 채 조용히 저를 타일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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