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노부코는 여자대학에 있을 적부터 뛰어난 재능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녀가 일찍부터 작가로서 문단에 서리란 건 거의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개중에는 그녀가 재학 중에 이미 삼 백몇 장의 자서전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를 하며 돌아다니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아직 여학교도 나오지 않은 여동생 테루코와 그녀를 뒷바라지하며 홀로 집안을 받친 어머니 앞에서는 그런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다는 복잡한 사정만이 남아 있었다. 때문에 노부코는 창작을 시작하기 전에 세간의 습관처럼 혼담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노부코에겐 슌키치라는 사촌 오빠가 있었다. 그는 당시엔 아직 대학 문과에 재적을 두고 있었는데 역시 장래엔 작가 동료에 몸을 둘 뜻이 있는 듯했다. 노부코는 이 사촌 대학생과 옛날부터 친근하게 왕래했다. 또 서로 문학이라는 공통 화제가 생긴 후로는 더 친근함이 늘었다. 단지 그는 노부코와 달리 당시 유행한 톨스토이즘에 조금도 경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종 프랑스풍의 비꼼이나 경구만을 쓰곤 했다. 그런 슌키치의 냉소적 태도는 이따금 만사에 진지한 노부코를 화나게 하고는 했다. 하지만 노부코는 화를 내면서도 슌키치의 비꼼이나 경구 속에 경멸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기도 했다.
때문에 그녀는 재학 중에도 그와 함께 전시회나 음악회 등에 곧잘 찾아갔다. 그럴 때면 동생 테루코도 동행 했다. 세 사람은 오가는 내내 거리낌 없이 웃고 이야기했다. 단지 테루코는 이따금 이야기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테루코는 어린아이답게 쇼윈도 안의 파라솔이나 비단 숄을 들여다보는 등 소외된 걸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노부코는 그때마다 반드시 화제를 돌렸고 동생도 함께 대화할 수 있게 했다. 그런 주제에 가장 먼저 테루코를 잊는 것 또한 늘 노부코 본인이었다. 슌키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여전히 그럴싸한 농담만 던지며 번잡한 거리 속을 큼지막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노부코와 사촌 오빠의 사이는 보는 사람 모두에게 둘의 결혼을 예상케 했다. 동창들은 그녀의 미래를 굉장히 부러워하고 또 질투했다. 특히 슌키치를 모르는 사람은(우스운 소리지만) 한층 더 그랬다. 노부코 또한 한 편으론 주위의 추측을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은근히 거들기도 했다. 따라서 동창들은 어느 틈엔가 두 사람의 모습에서 신랑신부의 사진 한 장을 떨쳐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노부코는 동창들의 예상과 달리 어떤 상업 회사에서 근무할 예정인 고등 상업 학교 출신 청년과 대뜸 결혼해버렸다. 그리고 식을 마치고 사흘만에 신랑과 함께 근무처인 오사카로 떠나버렸다. 당시 중앙 정류장에서 노부코를 떠나보낸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노부코는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활짝 웃은 채로 자칫 대성통곡이라도 할 듯한 동생 테루코를 많이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동창들은 다들 의아해했다. 그 의아함 속에는 묘한 기쁨과 이전과 뜻이 달라진 질투도 섞여 있었다. 어떤 사람은 노부코를 믿고 전부 어머니의 뜻을 따른 경우라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노부코를 의심하여 마음이 변한 거라 말했다. 하지만 어떠한 해석도 결국 상상에 지나지 않음은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노부코는 왜 슌키치와 결혼하지 않았나? 그들은 그 후로도 틈만 나면 마치 중대한 일이라는 양 이 의문을 입에 올렸다. 그렇게 이래저래 두 달 가량이 지나자――노부코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녀가 쓰고 있다던 장편 소설의 소문도.
그 사이 노부코는 오사카 외각에 행복해져야 마땅할 신혼 가정을 만들었다. 부부의 집은 외각 중에서도 가장 한적한 소나무 숲에 자리해 있었다. 송진 냄새와 햇살――두 존재는 남편이 집을 비울 때면 2층짜리 신축 셋방 안에 활기찬 침묵을 가져다주었다. 노부코는 그런 쓸쓸한 오후에 이따금 이유도 없이 울적해지면 반드시 바늘통이 담긴 서랍을 열어서는 그 밑바닥에 접혀 있는 복숭아색 편지지를 펼쳐 보았다. 편지지에는 이런 내용이 펜으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오늘부로 언니를 보지 못한다 생각하니 이걸 쓰는 동안에도 하염없이 눈물만 흐릅니다. 언니, 부디 저를 구해주세요. 테루코는 안타까운 언니의 희생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언니는 저를 위해 이번 혼담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니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같이 제국 극장을 보러 간 밤, 언니는 제게 슌 씨를 좋아하냐 물으셨죠. 또 좋아한다면 언니가 힘을 써볼 테니 슌 씨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니는 그때 이미 제가 슌 씨께 드리려 했던 편지를 읽으신 거겠지요. 그 편지가 사라졌을 때는 저는 언니를 정말로 원망했습니다.(죄송합니다. 이것만은 정말로 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때문에 제게는 언니의 친절한 말도 비꼼으로만 느껴졌습니다. 제가 화를 내며 마땅히 대답치 않았던 건 분명 잊으실 수 없을 테지요. 하지만 그로부터 이삼 일 가량이 지나 언니께서 혼담을 서두르셨을 때, 저는 그야말로 죽는 한이 있어도 사과를 하려 했습니다. 언니도 슌 씨를 좋아하셨으니까요.(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만 없었다면 분명 스스로 슌 씨께 가셨을 게 분명하지요. 그럼에도 언니는 슌 씨는 생각도 안 했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어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승낙하셨지요. 저의 소중한 언니. 제가 오늘 닭을 안고 오사카로 가시는 언니께 인사하라 한 걸 아직도 기억하시나요? 제가 기르는 닭에게도 저와 함께 언니께 사과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님마저 눈물을 흘리셨죠."
"언니. 오늘은 오사카에 계시겠지요. 하지만 부디 단 한 시라도 언니의 테루코를 버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테루코는 매일 아침 닭에게 모이를 주면서 언니를 떠올리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노부코는 이 소녀의 풋내가 나는 편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눈물이 흘렀다. 특히 중앙 정차장에서 기차에 타려 하는 동안 몰래 이 편지를 건네준 테루코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부코의 결혼은 정말로 동생의 상상처럼 전적으로 희생적이기만 할까. 그런 의문을 두는 건 눈물 흘린 노부코의 마음에 무거운 추를 올리고는 했다. 노부코는 이 갑갑함을 피하기 위해 잠시 감상에 젖었다. 바깥의 소나무 숲에 한껏 내려오는 햇살이 점점 노랗게 물들어 가는 걸 바라보면서.
둘
결혼 후 두 달 가량은 갖은 신혼부부처럼 두 사람 또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남편은 어딘가 여성적이며 말수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매일 회사에서 돌아와 저녁 후 몇 시간은 반드시 노부코와 함께 보냈다. 노부코는 뜨개질바늘을 움직이면서 요즘 세간에 유행하는 소설이나 희곡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 속에는 이따금 기독교 색채를 띈 여자대학 특유의 인생관이 섞여 있기도 했다. 남편은 저녁 술로 뺨을 붉힌 채로 읽다만 석간을 무릎에 내려놓고 신기하다는 양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본인의 의견은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매주 일요일마다 오사카나 그 근방의 유원지서 갑갑함을 풀러 갔다. 노부코는 기차나 전철에 탈 때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음식을 먹는 관서인이 모두 추잡하게 보였다. 그만큼 얌전한 남편의 태도가 더 기품 있게 보여 기쁘기도 했다. 실제로 깔끔한 남편의 모습은 그런 사람들 속에서도 모자서도, 정장서도, 또 붉은 가죽 구두에서도 화학 비누 냄새와 비슷한 일종의 깨끗하고 맑은 분위기가 풍기는 듯했다. 특히 여름 휴가 중에 마이코까지 발을 옮겼을 때에도 같은 찻집에서 만난 남편 동료들에 비해 한 층 더 자랑스러운 심정을 들게 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 추한 동료들에게 생각지 못한 친근함을 가진 듯했다.
그러던 사이 노부코는 오랫동안 버려둔 창작을 떠올렸다. 그렇게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에만 한두 시간 가량 책상에 앉아 있기로 했다. 남편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드디어 여류 작가가 되는 거구나"하고 상냥한 입가에 옅은 웃음을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펜은 생각만큼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턱을 괴고는 뜨거운 하늘 아래 소나무숲의 매미 소리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했다.
그렇게 계절이 잔더위가 남은 초가을로 넘어갈 즘. 남편은 어느 날 출근하면서 목가의 안감이 땀에 젖은 걸 보고 바꾸려 했다. 하지만 안감은 하나같이 빨랫방에 맡겨져 있었다. 매일 같이 몸가짐을 깔끔히 하는 남편은 불쾌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바지를 입으며 "소설만 쓰면 곤란하지"하고 여느 때와 달리 노부코를 비꼬았다. 노부코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웃옷의 먼지를 털었다.
그로부터 이삼일이 지난 어느 밤. 남편은 석간에 나온 식량 문제를 보고 생활비를 좀 줄일 수 없겠냐는 말을 꺼냈다. "너도 한사코 여학생인 건 아니잖아"――그런 말도 덧붙였다. 노부코는 맥아리 없는 대답을 하면서 남편의 옷깃에 자수를 놓았다. 그러자 남편은 의외일 정도로 집요하게 "그 옷깃 장식도 사는 게 되려 싸지 않아?"하고 역시 질척거리는 투로 말했다. 노부코는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편도 끝내는 질렸다는 얼굴로 상업 잡지만 지루하게 읽었다. 하지만 침실 전등을 끄고 나자 노부코는 남편의 등을 향해 "이제 소설 안 써요"하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에도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노부코는 같은 말을 전보다 더 작게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는소리가 새어 나왔다. 남편은 두세 마디로 노부코를 꾸짖었다. 그 후로도 노부코가 울먹이는 소리는 띄엄띄엄 들렸다. 하지만 노부코는 어느 틈엔가 남편에게 매달려 있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원래대로 사이좋은 부부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 열두 시가 넘어도 남편이 회사에서 돌아오지 않는 밤이 있었다. 심지어 겨우 돌아오나 싶었더니 우비를 혼자 벗지 못할 정도로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노부코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바지런히 남편의 환복을 거들었다. 남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이렇게 비꼬았다. "오늘밤 내가 안 왔으면 소설이 어지간히 잘 풀렸을 텐데 말야"――그런 말이 여자 같은 입에서 몇 번이나 나왔다. 노부코는 그날 밤 침상에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모습을 테루코가 보면 분명 같이 울어줬겠지. 테루코, 테루코. 내가 생각하는 건 너 하나뿐이야――노부코는 번번이 마음속으로 여동생을 부르며 남편의 술냄새에 괴로워하며 거의 잠도 자지 못하고 뒤척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다음날이 자연스레 화해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몇 번인가 반복되는 사이에 가을은 점점 깊어져 갔다. 노부코는 어느 틈엔가 책상에 앉아 펜을 드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때는 남편도 이전만큼 그녀의 문학담을 신기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밤마다 긴 화로를 두고 사사로운 가정 경제 이야기로 시간을 떼우는 법을 배웠다. 저녁 반주 후 남편이 가장 귀를 기울이는 화제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부코는 무엇이 안타까운지 이따금 남편의 얼굴색을 살피고는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요즘 들어 길어진 수염을 씹으며 평소보다 쾌활하게 "이제 아이라도 생기면――"하고 저 혼자 생각에 잠긴 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즘부터 매달 잡지에 사촌 오빠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노부코는 결혼 후로 까먹기라도 한 것처럼 슌키치와 편지를 나누지 않게 되었다. 단지 그의 동향은――대학 문과를 졸업했다느니 동인잡지를 시작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여동생의 편지로 알 수 있었다. 또 그 이상을 알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잡지에 실린 걸 볼 때 느끼는 그리움만은 옛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노부코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몇 번이나 홀로 웃고는 했다. 슌키치는 역시나 소설 속에서도 냉소와 해악이란 두 무기를 미야모토 무사시처럼 사용하였다. 하지만 노부코는 어쩐지 그 경쾌한 비꼼 뒤에 무언가 이제까지의 사촌 오빠에게 없는 쓸쓸한 체념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어쩐지 잘못을 하는 것도 같았다.
노부코는 그 후로 남편에게 더욱 상냥히 행동하게 되었다. 남편은 추운 밤 화로 앞에서 한사코 밝게 웃고 있는 노부코의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얼굴은 이전보다 젊었고 항상 화장을 하고 있었다. 노부코는 뜨개질 거리를 펼치며 두 사람이 교토에서 식을 올렸을 때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그 기억이 자세한 게 의외면서도 기쁜 모양이었다. "잘도 그런 걸 기억하네"――남편이 그렇게 놀리면 노부코는 반드시 말없이 눈으로만 아양을 떨어 보았다. 하지만 왜 그만큼 잊지 못하는지는 스스로도 마음속으로 의아할 때가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동생의 약혼이 끝났다는 내용이었다. 또 그 편지 속에는 슌키치가 테루코를 맞이하기 위해 야마노테 교역에 신혼집을 구했단 내용도 덧붙여져 있었다. 노부코는 곧장 어머니와 동생에게 긴 축하 편지를 보냈다. "이쪽은 사람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식에는 못 갈 거 같지만……" 그런 문구를 적는 사이(노부코는 그 원인을 알지 못했으나) 펜이 무거워지는 일도 서너 번은 있었다. 그러면 노부코는 고개를 들고 반드시 바깥의 소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소나무는 초겨울 하늘 아래에 어두운 푸른색으로 울창히 무리 지어 있었다.
그날밤 노부코와 남편은 테루코의 결혼을 화제로 삼았다. 남편은 여느 때처럼 옅은 웃음을 지으며 노부코가 동생의 말투를 흉내 내는 걸 즐겁게 들었다. 하지만 노부코는 어쩐지 자신에게 테루코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만 잘까"――두세 시간 후, 남편은 부드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창하게 화로 앞에서 일어났다. 노부코는 아직 동생에게 줄 축하품을 정하지 못해 부젓가락으로 재에 글자를 끄적이고 있었으나 불쑥 고개를 들고는 "그나저나 기분이 묘하다. 나한테 동생이 새로 생기는 거 아냐"하고 말했다. "당연하지, 여동생도 있는데."――노부코는 남편의 그런 말에 깊은 생각에 잠긴 채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테루코와 슌키치는 12월 중순에 식을 올렸다. 당일은 오후 조금 전부터 살랑살랑 하얀 게 떨어졌다. 노부코는 홀로 점심을 마쳤음에도 그때 먹은 생선 냄새가 입에서 가시지 않았다. "도쿄에서도 눈 내리려나"――그런 생각을 하면서 노부코는 가만히 어두컴컴한 방의 화로에 기대고 있었다. 눈은 점점 더 거세져 갔다. 하지만 입안의 비린내는 역시 집요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셋
다음 해 가을, 노부코는 회사 명령을 받은 남편과 함께 오랜만에 도쿄 땅을 밟았다. 하지만 짧은 일정에 해야 할 일이 많았던 남편은 첫날에 노부코의 어머니를 찾아뵈어 얼굴을 뵌 거 말고는 단 하루도 노부코와 함께 외출할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따라서 교외에 자리한 동생 부부의 신혼집을 찾을 때에도 노부코 홀로 개척지 같은 황량한 전철 종점을 찾고 홀로 차를 빌려 이동해야 했다.
동생 부부의 집은 파밭 근처에 있었다. 단지 주변에는 하나같이 셋방으로 보이는 신축 건물이 비좁게 이어져 있었다. 바깥으로 나온 문, 홍가시나무 울타리, 그리고 빨랫줄에 말리는 빨래감――어느 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평범한 거리 모습은 노부코를 크게 실망스럽게 했다.
그렇게 노부코가 집을 찾았을 때 받아 준 건 의외로 사촌 오빠 쪽이었다. 슌키치는 별난 손님을 앞에 두고서도 이전처럼 "안녕"하고 쾌할하게 말했다. 노부코는 그가 어느 틈엔가 밤톨 머리를 하고 있지 않는 걸 보았다. "오랜만이네." "자, 올라와. 아쉽게도 나밖에 없지만." "테루코는? 어디 갔어?" "심부름. 여종이랑"――노부코는 묘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등이 화려하게 장식된 코트를 현관 구석에 걸어두었다.
슌키치는 노부코를 서재 겸 손님방으로 쓰는 팔 첩 방에 앉혔다. 방은 어디를 보아도 책이 난잡하게 샇여 있었다. 특히 오후의 햇살이 잘 드는 문 옆의 작은 자단 책상 주변에는 신문 잡지나 원고용지가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런 가운데 젊은 아내의 존재를 말해주는 건 단지 토코노마에 세워진 산지 얼마 안 된 토코뿐이었다. 노부코는 그런 주위에서 신기하다는 눈초리를 잠시간 떼어놓지 못했다.
"오는 건 편지로 알았는데 오늘 올 줄은 몰랐네"――슌키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립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오사카 생활은 좀 어때?" "슌키치 씨야말로 어때? 행복해?"――노부코 또한 두세 마디 나누는 사이에 역시 옛날 같은 그리움이 되살아 나는 걸 느꼈다. 편지조차 자주 쓰지 않은 이래저래 2년 가량의 어색한 기억은 그녀의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화로에 손을 뻗은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슌키치의 소설, 같이 아는 지인의 이야기, 도쿄와 오사카의 차이, 아무리 이야기 해도 화제는 끝날 줄을 몰랐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평소 생활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 사실은 단순히 사촌 오빠와 이야기할 뿐이라는 노부코의 감각을 한 층 더 강하게 했다.
하지만 이따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 오기도 했다. 노부코는 그때마다 작게 웃은 채로 화로의 재를 보았다. 그에는 기다린다고 하지 못할 정도로 작게 무언가를 기다리는 심리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고의일까 우연일까. 슌키치는 곧장 화제를 찾아 항상 그 마음을 박살 냈다. 노부코는 서서히 사촌 오빠의 얼굴을 살피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담배 연기를 마시며 딱히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꾸미고 있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사이 테루코가 돌아왔다. 테루코는 언니의 얼굴을 보고는 어쩔 도리 없이 기뻐했다. 노부코도 입술은 웃었으나 눈에는 어느 틈엔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간 슌키치도 잊고 작년 이후의 생활을 서로 묻고는 했다. 특히 테루코는 아주 활기차여 뺨에 혈색이 돌면서 지금도 키우고 있는 닭 이야기까지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슌키치는 담배를 문 채로 만족스레 두 사람을 바라보며 여전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때 여종도 돌아왔다. 슌키치는 여종의 손에서 몇 장의 메모를 받아서는 곧장 책상에 앉아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루코는 여종도 자리를 비운 게 의외인 듯했다. "그럼 언니가 왔을 때엔 집에 아무도 없었던 거야?" "그래, 슌 씨만 있었어"――노부코는 그렇게 대답하는 게 평상심을 강하게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슌키치가 고개를 돌리더니 "남편한테 고마워해. 이 차도 내가 끓였다니까"하고 말했다. 테루코는 언니와 얼굴을 마주하고 장난스레 쿡쿡 웃었다. 하지만 남편에겐 일부러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코는 동생 부부와 함께 저녁 식탁을 둘러싸게 되었다. 테루코가 설명하기를 접시에 오르는 계란은 모두 집에서 기르는 닭이 낳은 것이라 한다. 슌키치는 노부코에게 포도주를 권하면서 "인간의 생활에는 약탈도 포함되어 있는 거지. 이런 작은 계란 하나부터 말야"――그런 사회주의에 가까운 논리를 늘어놓고는 했다. 그런 주제에 자리에 앉은 세 사람 중에 가장 계란에 애착을 가진 건 슌키치 본인임이 분명했다. 테루코는 그게 우습다고 말하고는 아이처럼 웃었다. 노부코는 그런 식탁 분위기에서도 먼 소나무 숲 한가운데 있는 적적한 방에서 보내는 저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는 식후 과일을 먹은 후에도 끝날 줄을 몰랐다. 살짝 취기가 돈 슌키치는 전등 아래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일류에 가까운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런 북적거리는 대화는 노부코를 다시 한 번 젊게 만들었다. 그녀는 뜨거운 눈초리로 "나도 소설을 써볼까"하고 말했다. 그러자 사촌 오빠는 대답 대신에 구르몽의 경구를 논했다. "뮤즈는 여자이다. 따라서 그들을 자유롭게 포로로 삼을 수 있는 건 남자뿐이다." 그런 말이었다. 노부코와 테루코는 동맹을 맺고 구르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 여자가 아니면 음악가가 못 된다는 소리야? 아폴로는 남자잖아"――테루코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는 사이 밤이 깊어졌다. 노부코는 기어코 자고 가기로 했다.
자기 전에 슌키치는 툇마루의 덧문을 한 장 열고 잠옷 차림 채로 좁은 정원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누구를 부르는 법도 없이 "잠깐 나와 봐. 달이 이쁘다"하고 말했다. 노부코는 홀로 그의 뒤에서 정원용 신발을 신고 내려왔다. 양말을 벗은 노부코의 발에서는 차가운 이슬이 느껴졌다.
달은 정원 구석에 놓인 마른 노송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사촌 오빠는 그 노송나무 아래서 살짝 밝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풀이 꽤 자랐네"――노부코는 거친 정원을 머뭇머뭇 걸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음력 13일 밤인가"하고 중얼거렸다.
잠깐의 침묵 후, 슌키치는 조용한 눈초리로 "닭장에 가볼래?"하고 말했다. 노부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닭장은 노송나무 반대편 구석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주위에는 단지 닭냄새가 나는 희미한 빛과 그림자만 있을 뿐이었다. 슌키치는 그 닭장을 들여다보고는 거의 혼잣말처럼 "자고 있네"하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계란을 사람한테 닭이"――노부코는 풀 속에 선 채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정원에서 돌아오니 테루코가 남편 책상 앞에서 멍하니 전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말매미 한 마리가 뚜껑 위서 기고 있는 전등을.
넷
다음날 아침, 슌키치는 빳빳한 정장을 입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현관으로 향했다. 듣자 하니 죽은 친구의 일주기라 묘를 찾는다고 한다. "알았어? 기다려야 해. 오후에는 돌아 올 거니까."――그는 외투를 입으면서 노부코에게 단단히 일렀다. 하지만 노부코는 가련한 손에 그의 중절모자를 든 채로 조용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테루코는 남편을 보내고는 언니를 화로 반대편에 불러서는 바지런히 차를 내왔다. 옆집 아내분 이야기, 방문 기자 이야기, 그리고 슌키치와 봤다는 어떤 외국 가극단 이야기――그 외에도 유쾌한 화제가 많은 듯했다. 하지만 노부코의 마음은 울적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항상 적당한 대답만 하는 스스로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는 그게 테루코의 눈에 들게 되었다. 동생은 걱정스레 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왜 그래?"하고 물었다. 하지만 노부코는 왜 그런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기둥 시계가 열 시를 가리켰을 때, 노부코는 힘이 없는 눈초리로 고개를 들고는 "슌 씨가 안 오네."하고 말했다. 테루코도 언니의 말을 따라 힐끔 시계를 보았지만 의외로 냉정히 "아직 올 때가 안 됐지――"하고만 대답했다. 노부코는 그 말에서 남편의 사랑에 질린 새 신부의 심정에 담겨 있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노부코의 마음은 기어코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테루는 행복하겠어"――노부코는 턱을 소매 안에 묻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자연스레 그 안에 담긴 진지한 부러움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테루코는 마냥 순수하게 역시 활기차게 웃으며 "가만 안 둬"하고 노려보는 흉내를 냈다. 그러고는 곧 "언니도 행복한 주제에"하고 어리광 부리듯 덧붙였다. 그 말은 노부코를 푹하고 찔렀다.
노부코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왜 그렇게 생각해?"하고 되물었다. 그러고는 곧장 후회했다. 테루코는 순간 묘한 표정을 짓고는 언니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 얼굴에도 숨기기 어려운 후회가 담겨 있었다. 노부코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남이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거긴 하지."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기둥 시계의 초침 소리 밑에서 화로가 내는 소리를 가만히 흘려 듣고 있었다.
"그래도 형부는 상냥하잖아?"――이윽고 테루코는 조용한 목소리로 머뭇머뭇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분명한 애석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노부코의 마음에는 무엇보다도 연민에 반발했다. 노부코는 신문을 무릎 위에 얹고 그걸 내려다보며 일부러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신문에는 오사카와 마찬가지로 쌀값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러던 사이 조용한 방안에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노부코는 신문에서 눈을 떼고 화로 너머서 소매에 얼굴을 얹고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울 거 없어"――테루코는 언니가 그렇게 위로해도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노부코는 잔혹한 기쁨을 느끼며 잠시간 동생의 떨리는 어깨에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여종의 귀를 방해하듯이 테루코를 보면서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나는 너만 행복하면 그게 제일이야. 정말이야. 슌 씨가 너를 사랑해 주기만 하면――"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는 사이 노부코의 목소리 또한 자신의 말에 움직여져 점점 감상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테루코는 대뜸 소매에서 얼굴을 떼고는 눈물에 젖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의외일 정도로 슬픔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참을 수 없는 질투만이 불타듯이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그럼 언니는――언니는 왜 어젯밤에도――" 테루코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다시 얼굴을 소매에 묻고 발작적으로 격렬히 울기 시작했다……
두세 시간 후, 노부코는 마지막 전철을 타기 위해 막이 쳐진 인력거를 타고 있었다. 노부코의 눈에 담기는 바깥 세계는 앞의 막을 잘라낸 사각 셀룰로이드 창문뿐이었다. 그곳에선 변두리 집들과 여러 잡목의 가지가 천천히 그러면서 끝없이 뒤로 뒤로 흐르고 있었다. 만약 그런 가운데 하나라도 움직이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옅은 구름을 띄운 차가운 가을 하늘뿐이었다.
노부코의 마음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런 조용함을 받쳐주는 건 쓸쓸한 체념일 따름이었다. 테루코의 발작이 끝난 후, 새로운 눈물과 함께 한 화해는 두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본래의 사이좋은 자매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로서 지금도 노부코의 마음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촌 오빠의 귀가도 기다리지 않고 이 인력거 위에 몸을 맡겼을 때, 동생과 영원한 타인이 된 듯한 심정이 그녀의 마음속에 짓궂게 얼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노부코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때 셀룰로이드 창문 안에는 북적이는 거리 속에서 지팡이를 든 채 걷는 사촌 오빠의 모습이 있었다. 노부코는 동요했다. 차를 멈춰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엇갈릴까. 노부코는 그런 동요를 억누르며 잠시간 막 아래서 허무한 주저를 거듭했다. 하지만 슌키치와 노부코의 거리는 서서히 가까워졌다. 슌키치는 옅은 햇살을 받으며 물가가 많은 거리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슌 씨."――그런 목소리가 순간 노부코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려 했다. 실제로 슌키치는 그때는 이미 그녀의 인력거 옆에 익숙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 주저했다. 그러는 사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기어코 인력거와 엇갈려 버렸다. 살짝 탁한 하늘, 띄엄띄엄 놓인 집, 높은 나무들의 누런 가지――그리고 여전히 인기척이 적은 변두리 거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가을――"
노부코는 그런 쓸쓸한 막 아래서 온몸으로 적막함을 느끼며 그런 생각에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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