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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콘바루카이의 '스미다가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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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느 이른 봄 밤, 후지미쵸의 호소가와코 무대에 콘바루카이의 노를 보러 갔다. 좀 더 정확히는 되려 사쿠라마 킨타로 씨의 '스미다가와'를 보러 간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무대를 찾은 건 "하나가타미"인지가 끝난 후 "스미다가와"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나는 어떠한 시바이를 보아도 관람석을 가득 매운 손님보다 재밌는 시바이를 만난 적이 없다. 물론 내 친구가 쓴 멋진 시바이는 예외이다. 그런 시바이를 볼 때는 대개 관객 따위는 잊고 만다. 왜냐면 옆에서 자신의 시바이를 보는 작가는 관객보다 재밌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어찌 되었든 시바이의 관객은 시바이보다도 항상 재밌기 마련이다. 노도 이 예외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시절 노의 관객 중에는 아가씨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또 그 아가씨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작은 하품을 눌러 죽이며 장엄한 태도를 갖추곤 한다. 더군다나 오늘 밤 관객은 아가씨만 많은 게 아니었다. 내 좌우로는 둥글둥글 살찐 프랑스 대사 클로델 씨를 시작으로 남녀 서양인도 대여섯 명이 오페라 글래스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스미다가와'를 보기도 전에 이러한 도미에의 그림 중 한 장 같은 관람석을 본 사실에 만족했다. 물론 나 자신도 풍자화 속 한 명이 된다는 걸 각오한 바이다.
 "스미다가와"는 조용히 시작되었다. 이 '조용히"는 쉽게 쓰이는 그런 형용사가 아니다. "이는 무사시노쿠니 스미다가와의 나루터지기"라는 호쇼 신 씨의 대사와 함께 하늘에서 큰 강물이 눈앞에 떠오르는 모습이 참으로도 조용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바람 속에서 사냥감 냄새를 구분한 사냥견처럼 자그마한 전율이 퍼지는 걸 느꼈다――이렇게 말하면 대단한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우타이도 배우지 않고 노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으니 별 볼 일 없는 관객인 건 물론이다. 하지만 신 씨의 짧은 대사는 확실히 내게 전율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경험에 따르면 예술적 흥분의 도래를 미리 경고하는 봉화였다. 이것만은 누가 뭐라 해도 내게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다음으로 젊은 여행자 하나가 천천히 다리 위로 올랐다. 이 사람이 무슨 배우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참으로 "구름과 안개, 또 산을 넘어 수많은 길과 나라를 지나"온 것처럼 몸이 깡마른 청년이었다. 신 씨의 나루터지기는 당당하다. 저렇게 묘하게 남자답고 살점이 붙은 나루터지기는 분명 스미다가와에 배 따위 띄우지 않았으리라. 심지어 그 당당한 나루터지기를 부조화라 느끼지 않는 건 마치 가부키의 불이 들어온 달서 부조화를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는 가부키보다 한층 더 사실의 세계에 고집하지 않는다. 수많은 현실성 부족은 물론 시 안에서 소멸하고 만다. 하지만 현실성의 과잉만은 반대로 무대의 일루전을 파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이 깡마른 여행자의 모습서 살짝 현실성의 과잉을 느꼈다. 요컨대 여행자는 나리히라 이후의 스미다가와의 나루터 물에도 익사한 개가 떠오를 수 있다는 현실을 지나치게 떠올리게 한 것이다. 이는 물론 여행자역을 맡은 배우의 죄는 아니다. 단지 이 역할을 맡게 된 불운 탓이다. 나는 나 자신도 말라 있기에 불만을 느끼는 한편으로 여행자에게 큰 동정을 느꼈다.
 물론 이 여행자는 말랐다 할지라도 평범한 여행자는 아니었다. 스미다가와를 넘기 위해 온 쓸쓸한 몇 명의 여행자를 한 몸으로 대표하는 명예직이다. 그뿐 아니라 또 "도심에서 내려온 미치광이 여자"를 우리 관객에게 알리러 온 예술상의 선도자이다. 나는 "이 소동은 다 무엇이냐"는 나루터지기의 대사와 함께 무사시노의 풀이 나부끼는 가운데 한 줄의 길이 나타나는 걸 느꼈다. 과거의 햇빛은 그 길 너머에 모호한 술렁임을 비추고 있다. 도심에서 내려온 광녀도 그 안에 섞여 있을지 모른다. 아니, 광녀는 이미 어느 틈엔가 전등이 밝은 다리를 지나 무대에 올라와 있다. 
 광녀는 사쿠라마 킨타로 씨다. 나는 니노마츠에 선 킨타로 씨의 보고 모습을 아름다운 미치광이구나 하고 감탄했다. 검게 칠한 삿갓이 살짝 빛나고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워 옅은 푸른 옷이 잘록해서――뭐 타이마데라의 에마키 속 여인이라도 만난 듯한 심정이었다. 광녀는 "참으로 부모 마음이란"하고 서서히 한탄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도――목소리는 좀 설명하기 어렵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화려함에 쓸쓸함이 깃든 목소리이다. 내 옆에 있던 영국인도 아내와 얼굴을 마주하며 원더풀 보이스니 뭐니 했다. 목소리만은 외국인도 알 수 있을 게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가느다란 정취가 담긴 것도 살짝 미울 정도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셔츠 아래서 자그마한 전율이 전해지는 걸 느꼈다. 
 광녀는 지우타이 목소리 속에서 겨우 스미다가와의 나루터에 도착했다. 하지만 남자다운 나루터지기는 그냥 태워주지 않는다. "도시 사람이고 광녀라면 재밌게 미쳐보라" 그런 형편 좋은 주문을 늘어놓는다. 나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속에서 천재의 비극을 발견했다. 천재 또한 이 광녀처럼 무언가를 찾는 여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행히도 그 정열을 이해하지 않는다. 같은 길을 마음먹은 여행자마저 냉정히 그 고통을 간과하고 있다. 하물며 처자식을 부양하는 것 이외에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행복한 천하의 나루터지기는 마치 천재의 정열을 개의 곡예로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삼천 년 내내 쾌활히 "미쳐 보아라"고 반복하고 있다. 천재도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구경거리로 삼을 수밖에 없다. 광녀는――광녀 또한 지금은 나루터지기 앞에서 숨겨 온 춤을 선보이고 있다.
 광녀의 춤도 아름다웠다. 특히 하얀 양말을 심은 발은 참으로 미묘하게 움직였다. 그 발만은 지금 떠올려도 확실히 꺼림칙하다. 나는 실제로 그 발을 만져 보고 싶단 욕망을 느꼈다. 적어도 양말을 벗기고 가만히 바라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도무지 그 발은 평범한 육체의 일부 같지 않았다. 반드시 발 뒤축 주름 사이에 세밀한 눈이라도 붙어 있을 듯하다. 하지만(나 또한 갖은 비평가처럼 '하지만'을 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난점을 말하자면 킨타로 씨의 기술은 너무나 아름다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만큼 한 걸음이라도 엇나가면 섬교의 병을 낳을 듯하다. 옛사람은 반드시 이 경지에 안주하지는 않았으리라. 더욱이 고색창연한 뜻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으리라――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태워주어라 나루터지기, 그리고 타거라"하는 지우타이 목소리와 함께 광녀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일어선 나루터지기 앞에서 살며시 합장을 했다. 나는 선대 슈쵸 이후로 명성 높은 오야마도 조금은 보았다. 하지만 아직 이때의 킨타로 씨만큼 아름답다 느낀 기억은 없다. 옛 뜻을 얻는 건 물론 좋은 일이리라. 하지만 옛 뜻을 얻지 않더라도 이만큼 아름답다면 조금도 부족하지는 않을 터이다.
 그 후의 '스미다가와'를 길게 늘어놓는 건 괜한 말을 할 뿐이다. 확실히 아역을 쓰지 않은 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마추어인 내게는 논할 자격도 없는 동시에 논할 관심도 없는 바이다. 단지 나는 우메와카마루의 유령이 나오지 않는 게 조금도 불만스럽지 않았다. 아니 실은 이런 때에도 일부러 아역을 쓰지 않은 건 모종의 기회로 미소년을 한 번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던 아시카가 시대의 유품이지 싶다. 어찌 되었든 나는 '스미다가와'서 아름다운 걸 보고 만족했다――그것만 전해지면 충분하다.
 만약 겸사겸사 덧붙일 게 있다면 그건 당초 관심을 끈 노 관객들이다. 버나드 쇼는 파일럿 와그너의 오페라를 감상하려면 누워서 귀만 열어두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런 충고가 필요한 건 먼 서양의 미개국뿐이다. 일본인은 모두 배우지 않고도 감상의 길을 익힌 모양이다. 그 밤도 노 관객 대부분은 우타이본을 앞에 둔 채 무대에는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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