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어느 가을의 밤중이었다. 난징 키보카이에 위치한 어느 집의 한 방에는 파랗게 질린 중국 소녀 한 명이 낡은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로 접시에 담긴 수박씨를 지루하게 씹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거치형 램프가 옅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방안을 밝게 하기보다도 되려 한층 더 음울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벽지가 벗겨진 방구석에는 이불이 삐져나온 등나무 침대가 먼지 냄새나는 천을 덮고 있었다. 또 테이블 반대편에는 이 또한 낡은 의자 하나가 마치 잊힌 것처럼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엔 어디를 보아도 장식이 될만한 가구는 무엇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소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박 씨를 씹는 걸 멈추고는 이따금 차가운 눈을 들고서 테이블에 접한 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쫓아가면 눈앞의 못 하나에 작은 진주 십자가 하나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는 치졸한 수난을 받은 그리스도가 두 팔을 높게 펼친 채로 닳아버린 표면의 윤곽을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소녀의 눈은 이 야소예수를 볼 때마다 긴 눈꺼풀 뒤의 차가운 색이 순간 어딘가로 사라져 찾아 볼 수 없게 되고는 그 대신 순수한 희망의 빛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또 곧 시선을 돌리면 그녀는 반드시 한숨을 내쉬며 광택이 없는 검은 수자 상의의 어깨를 힘없이 떨구며 다시 한 번 접시 위 수박씨를 씹기 시작했다.
소녀의 이름은 소킨카宋金花라고 하여 빈곤한 집안을 돕기 위해 밤이면 그 방에 손님을 맞이하는 올해로 열다섯 먹은 사창부였다. 진회에 많은 사창부 중에는 킨카만한 용모의 소유주라면 몇몇이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킨카 만큼이나 상냥한 소녀가 둘이나 이 땅에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녀는 엇비슷한 매춘부와 달리 거짓말도 하지 않는가 하면 고집도 부리지 않고 매일밤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이 음울한 방을 찾아 오는 다양한 손님과 놀았다. 그리고 이따금 그들이 내는 돈이 약속한 것보다 많았을 때는 단 한 명뿐인 아버지가 어지간히 좋아하는 술을 한 잔이라도 더 줄 수 있겠다며 기뻐했다.
그러한 킨카의 상황은 물론 그녀의 태생에도 얽혀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 이외에 무언가 이유가 있다면 그건 킨카가 어릴 적부터 벽 위에 걸려 있던 십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돌아가신 어머니께 배운 로마 가톨릭의 신앙을 줄곧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올해 봄, 상하이에 경마를 보러 온 김에 남부 중국의 풍경을 보러 온 젊은 일본 여행가가 킨카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담배를 물고 양복 무릎으로 작은 킨카를 가볍게 품은 채로 문득 벽 위에 걸린 십자가를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너 그리스도야?"하고 부족한 중국어로 물었다.
"네, 다섯 살 때 세례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이런 장사를 하는 거고?"
그의 목소리에는 이 순간 비꼬는 듯한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킨카는 그의 팔에 머리를 뭍으며 여느 때처럼 밝게 송곳니를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장사를 하지 않으면 아버지도 저도 굶어 죽어버리니까요."
"아버지는 노인이셔?"
"네――이제 제대로 서지도 못 하세요."
"하지만――하지만 이렇게 벌어서야 천국에 못 가잖아?"
"아뇨."
킨카는 힐끔 십자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눈초리를 지었다.
"천국에 계신 그리스도는 분명 제 마음을 받아주실 테니까요――그렇지 않고서야 그리스도께선 에카코의 경찰서 사람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젊은 일본 여행가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웃옷의 주머니를 뒤져서 비취 귀걸이 한 쌍을 꺼내 그녀의 귀에 걸어주었다.
"이건 아까 일본에 가져갈 기념품으로 산 귀걸이인데 오늘 밤 기념으로 너한테 줄게."――
킨카는 처음 손님을 받은 날부터 그런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대략 한 달 전부터 이 경건한 사창부는 불행이도 악성 매독을 앓게 되었다. 그걸 들은 동료 친산사는 아픔을 잡는데 좋다며 아편주를 가르쳐주었다. 또 역시나 같은 동료인 모게이슌은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홍람환이나 가로미를 친절히 가져와주었다. 하지만 킨카의 병은 어째서인지 손님을 받지 않고 틀어박혀 있어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어느 날 친산사가 킨카의 방에 놀러 올 때에 이런 미신과 같은 요법을 당연하다는 양 들려주었다.
"네 병은 손님한테 옮은 거니까 빨리 다른 사람한테 옮겨버려. 그러면 이삼일 중에 좋아질 게 분명해."
킨카는 턱을 괸 채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사의 말에는 조금 호기심이 동한 듯 보였다.
"정말?"하고 가볍게 되묻는다.
"그럼 정말이지. 우리 언니도 너처럼 도무지 병이 낫지 않았거든. 그래도 손님한테 옮기니까 바로 좋아지더라."
"손님은 어떻게 됐어?"
"그야 손님은 불쌍하지. 덕분에 눈까지 멀었다나 봐."
산사가 방을 떠난 후 킨카는 홀로 벽에 걸린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수난의 그리스도를 올려다보며 열심히 이러한 기도를 올렸다.
"천국에 계신 그리스도님, 저는 아버님을 부양하기 위해 미천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장사는 저 하나 더럽히는 것 이외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대로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손님에게 병을 옮기지 않는 한 이제까지처럼 장사할 수 없습니다. 그럼 설령 굶어 죽더라도――그러면 이 병도 나을 듯합니다만――손님과 한 침대서 자지 않도록 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는 저희의 행복을 위해 미워하지 않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꼴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여자입니다. 언제 어떤 유혹에 빠질지 모릅니다. 천국에 계신 그리스도님, 부디 저를 지켜주십시오. 저는 당신 한 분 이외에 기댈 곳이 없는 여자입니다."
그렇게 결심한 소킨카는 그 후 산사나 게이슌이 아무리 장사를 권해도 완고하게 손님을 들이지 않았다. 또 이따금 그녀의 방에 친숙한 손님이 와도 함께 담배라도 피우는 것 이외엔 결코 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저는 무서운 병을 가지고 있답니다. 옆으로 오면 당신한테도 옮을 거예요."
그럼에도 손님이 취해서 억지로 그녀를 어떻게 해보려하면 킨카는 항상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앓고 있단 증거를 보여주는 걸 꺼리지 않았다. 그러니 손님은 그녀의 방에 쉽사리 놀러 오지 않게 되었다. 또 그와 동시에 그녀의 생활도 하룻밤마다 괴롭게 되었다……
오늘밤도 그녀는 이 테이블 옆에서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방에는 손님이 들어올 기색도 없었다. 그러던 사이 밤은 거리낌 없이 더욱 깊어져서 그녀의 귀에 들어오는 소리라고는 단지 어디선가 우는 귀뚜라미 소리뿐이었다. 그뿐 아니라 불이 들지 않은 방의 추위는 마루에 깔아둔 돌 위에서 서서히 그녀의 쥐수자 신발을, 그 신발 안의 가녀린 발을 물처럼 덮쳐들었다.
킨카는 어두컴컴한 램프불을 아까부터 가만히 바라보았으나 이윽고 몸을 한 번 떨고는 비취 귀걸이를 한 귀를 긁적이며 자그마한 하품을 죽였다. 그러자 그 순간 페인트칠 된 문이 기세 좋게 울리더니 익숙하지 않은 한 외국인이 비틀거리듯 걸어 들어왔다. 그 기세가 어지간히 거쳤던 걸 테지. 테이블 위 램프 불은 한 번 불타오르더니 묘하게 붉게 그을려진 빛으로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손님은 그 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한 번은 테이블에 기대었으나 곧 다시 일어서더니 이번에는 뒷걸음질 치고 다시 닫힌 페인트칠된 문에 등을 기대었다.
킨카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이 익숙지 않은 외국인의 모습에 놀란 시선을 보냈다. 손님의 나이는 서른대여섯쯤 될까. 세로 줄무늬가 그려진 갈색 정장에 같은 재질의 사냥 모자를 스고 있었다. 눈이 크고 턱수염이 있으며 햇살에 뺨이 탄 남자였다. 단지 하나 이해되지 않는 건 외국인이란 건 분명하더라도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검은 머리카락을 모자 아래로 내놓고 불이 꺼진 파이프를 문 채 문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주정뱅이 통행인이 집을 잘못 찾은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시죠?"
킨카는 살짝 꺼림직해져 역시나 테이블 앞에 선 채로 캐묻듯이 물었다. 그러자 상대는 고개를 젓고 중국어는 모른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는 물고 있던 파이프를 놓고는 무어라 뜻 모를 원만한 외국어로 한 마디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킨카 쪽이 테이블 위 램프 빛에 귀걸이의 비취를 드러내며 고개를 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손님은 그녀가 당혹스러운지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리고는 불쑥 큰소리로 웃으며 적당히 사냥 모자를 벗고 비틀비틀 걸어왔다. 그리고 테이블 건너편의 의자에 허리 힘이 빠진 것처럼 앉았다. 킨카는 이때 이 외국인의 얼굴이 언제 어디인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분명히 본 듯한 일종의 친근함을 느꼈다. 손님은 거리낌 없이 쟁반 위 수박씨를 집어 들었다. 단지 그걸 씹지 않고 킨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는데 이윽고 묘한 손짓을 섞어 가며 무어라 외국어를 하기 시작했다. 킨카는 그 뜻도 알 수 없었으나 단지 이 외국인이 그녀의 장사에 조금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건 희미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인과 긴 밤을 보내는 건 킨카에겐 드문 일도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는 의자에 앉고는 거의 습관이 되어 있는 붙임성 좋은 웃음을 보이며 상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님은 그 농담을 아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한두 마디 말하고는 기분 좋게 웃으며 전보다도 더 눈이 어지럽게 여러 손짓을 쓰기 시작했다.
손님이 뱉는 숨에는 술 냄새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붉어진 그 얼굴은 이 삭막한 방의 공기가 밝아지나 싶을 정도로 남자 다운 활력으로 넘쳐 있었다. 적어도 킨카에게는 평소에 익숙한 난징의 중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가 이제까지 봐온 어떤 동서양의 외국인보다도 훌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도 한 번 얼굴을 본 듯한 방금 전 감각만은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킨카는 손님의 이마에 걸린 검게 말린 머리를 바라보며 가볍게 애교를 보이는 사이에도 이 얼굴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열심히 불러내려 했다.
"요전 번에 뚱뚱한 사모님과 함께 배를 타고 온 사람일까? 아니아니, 그 사람은 머리색이 훨씬 붉었어. 그럼 진회의 공자님 사당에 사진기를 들이밀던 그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 사람은 손님보다 나이가 더 많았던 거 같아. 그래그래 언젠가 이섭교 옆 음식점 앞에 인파가 모여 있을 때 마침 이 손님과 아주 닮은 사람이 두꺼운 등나무 지팡이를 휘둘러서 인력거부의 등을 때렸었지. 어쩌면――하지만 그 사람 눈은 더 파랬던 거 같아……"
킨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여전히 유쾌한 외국인은 어느 틈엔가 파이프에 담배를 담고서 향이 좋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르더니 갑자기 또 무어라 말하더니 이번에는 얒먼히 히죽히죽 웃고는 한손의 손가락을 두 개 뻗어 킨카 앞에 내밀며 ?이라는 뜻의 몸부림했다. 손가락 두 개가 2 달러라는 금액을 말해준다는 건 물론 누구의 눈에도 명백했다. 하지만 손님을 받지 않는 킨카는 솜씨 좋게 수박씨를 씹으며 아니라는 사인을 두 번 가량 역시나 웃는 얼굴로 저어 보였다. 그러자 손님은 테이블 위에 무례하게 두 팔꿈치를 얹은 채로 어두운 램프 빛 속에 취한 얼굴을 드러낸 채 가만히 킨카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또 손가락 세 개를 내밀고 답을 기다리는 듯한 눈초리를 보였다.
킨카는 살짝 의자를 비틀어서는 수박 씨를 씹은 채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손님은 2 달러의 돈으로는 그녀가 몸을 맡기지 않는다 생각한 듯했다. 그렇다고 말이 통하지 않는 그에게 사정을 이해시키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할 듯했다. 그래서 킨카는 새삼스레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면서 차가운 시선을 밖으로 돌리거는 도리가 없다는 양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상대 외국인은 잠시 옅은 웃음을 지은 채로 주저하는 듯한 기색을 보인 후, 네 손가락을 뻗어 또 무어라 외국어를 들려주었다. 지친 킨카는 뺨을 붙들며 작게 웃을 기력도 없었으나 곧장 이렇게 된 이상 한사코 고개만 젓다 상대가 포기하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손님의 손은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라도 찾듯이 기어코 다섯 개 모두 세워지고 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손짓과 몸짓을 섞은 답이 없는 문답을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손님은 끈기 좋게 한 개씩 손가락 수를 늘린 결과 끝내는 십 달러의 돈을 내도 아깝지 않다는 뜻을 보여주게 되었다. 하지만 사창부에게는 거금인 십 달러도 킨카의 결심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의자서 벌어나 비스듬하게 테이블 앞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상대가 두 손의 손가락을 다 보여주자 짜증 난다는 양 발을 구르며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어떻게 된 것인지 못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틀어져 살짝 금속 소리를 내면서 밑에 깔린 돌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뻗어 소중한 십자가를 들어올렸다. 그때 별생각 없이 십자가에 조각된 수난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자 신기하게도 그게 테이블 너머의 외국인 얼굴과 겹쳐 보였다.
"어디서 본 거 같더니 이 그리스도 님의 얼굴이셨던 거야."
킨카는 검은 수자 웃옷 가슴에 진주 십자가를 품은 채로 테이블을 둔 손님의 얼굴에 그만 놀란 시선을 보냈다. 손님은 역시나 램프 빛에 술기운이 보이는 얼굴을 붉게 드리우며 이따금 파이프의 연기를 내뿜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심지어 그 눈은 그녀의 모습에――아마 하얀 목덜미부터 비취 귀걸이를 한 귀 주변까지 끝없이 헤매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손님의 모습도 킨카에게는 상냥한 권위의 일종으로 가득 차있는 듯했다.
이윽고 손님은 파이프를 멈추고는 과장스럽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딘가 웃음 섞인 말을 걸었다. 그게 킨카의 마음에는 사실상 교묘한 최면술사가 피술자의 귀에 속삭이는 암시와 같은 작용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 기특한 결심도 완전히 잊었는지 가만히 웃는 눈을 낮추고는 진주 십자가를 손으로 매만지며 이 괴상한 외국인 옆으로 부끄럽다는 양 다가갔다.
손님은 바지 주머니를 뒤져 짤랑짤랑 은 소리를 내면서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잠시간 킨카가 선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 안의 옅은 웃음이 열을 품은 듯한 빛으로 바뀌었나 싶더니 대뜸 의자에서 뛰어올라 술 냄새가 나는 정장 팔에 있는 힘껏 킨카를 안았다. 킨카는 마치 상심한 것처럼 비취 귀걸이를 찬 고개를 뒤로 젖혀 올려다 본 채로 단지 창백한 뺨의 밑바닥에는 선명한 핏기를 희미하게 드리우며 코끝으로 다가온 그의 얼굴에 황홀한 시선을 보냈다. 이 신기한 외국인에게 그녀의 몸을 자유롭게 하게 둘 건가. 혹은 병을 옮기지 않도록 그의 입술을 쳐낼까.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물론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킨카는 수염투성이인 손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맡기며 단지 불타는 듯한 사랑의 환희가 처음으로 안 사랑의 환희가 격렬하게 가슴에 올라오는 걸 느낄 뿐이었다…………
둘
몇 시간 후, 램프가 꺼진 방안에는 단지 귀뚜라미 소리만이 침대서 새어 나오는 두 사람의 숨소리에 쓸쓸한 가을 정취만 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킨카의 꿈은 먼지투성이 침대의 천에서 옥상 위에 자리한 달밤으로 연기처럼 높게 올라갔다.
* * *
――킨카는 자단 의자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여러 음식에 젓가락을 옮기고 있었다. 제비집, 샥스핀, 삶은 계란, 훈제 잉어, 돼지 조림, 데친 해삼――요리는 아무리 세어도 도무지 끝을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식기가 모조리 푸른 연꽃이나 금색 봉황이 그려진 훌륭한 쟁반이었다.
그녀의 의자 뒤에는 강사 장막이 쳐진 창문이 있었고 또 그 창문 밖에는 강이 있는지 조용한 물소리나 노 젓는 소리가 끝없이 이곳까지 들려왔다. 그녀에겐 그게 어릴 적부터 익숙한 진회를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분명 천국의 마을에 있는 그리스도의 집이었다.
킨카는 이따금 젓가락을 멈추고 테이블 주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넓은 방에는 용 조각이 된 기둥이나 커다란 국화 화분이 요리 증기에 흐릿해져 있는 것 이외엔 인기척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이블 위에선 식기가 하나 빌 때마다 곧장 어디선가 새로운 요리가 따스한 향기를 내뿜으며 그녀의 앞으로 옮겨져 왔다. 그런가 하면 또 젓가락을 집지 않은 사이에 꿩 통구이 따위가 날갯짓해 소흥주병을 쓰러트리며 방 천장에 퍼덕퍼덕 날아가 버린 적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킨카는 누군가가 소리도 없이 자신의 의자 뒤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젓가락을 쥔 채로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떻게 된 것인지 있는 줄 알았던 창문이 사라져 있고 단자 방석을 깐 자단 의자 위에 익숙지 않은 한 외국인이 진주 물담배 파이프를 문 채로 유유히 앉아 있었다.
킨카는 그 남자를 본 순간 그게 오늘밤 그녀의 방에 머물러 온 남자란 걸 알았다. 하지만 그와 다른 유일한 점은 마치 초승달 같은 빛의 고리가 그 외국인의 머리 위에 한 척 가량 걸려 있단 점이었다. 그때 또 킨카의 눈앞에는 어쩐지 김이 오르는 접시 하나가 마치 테이블에서 튀어 오른 것처럼 대뜸 맛있어 보이는 요리를 옮겨왔다. 그녀는 곧장 젓가락을 들고 접시 속 진미를 집으려 했으나 문득 자기 뒤에 있는 외국인을 떠올려 어깨너머로 그를 돌아보며
"당신도 드세요."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너만 먹거라. 그걸 먹으면 네 병이 오늘 밤중에 나아질 거야."
원광을 갖춘 외국인은 역시나 물담배를 문 채로 무한한 사랑을 머금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안 드시나요?"
"나 말이냐? 나는 중국요리를 싫어한다. 너는 아직 나를 모르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중국요리를 먹은 적이 없다."
난징의 그리스도는 그렇게 말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자단 의자서 벗어나 놀란 킨카의 뺨에 뒤에서 부드러운 키스를 해주었다.
* * *
천국의 꿈이 깬 건 이미 가을 여명의 빛이 좁은 방에 희미하고 차갑게 퍼져 갈 즘이었다. 하지만 먼지 냄새나는 천을 덮은 작은 배 같은 침대 안에는 아직 따스하고 희미한 어둠이 남아 있었다. 그 어둠에 떠올라 있는 반쯤 숙인 킨카의 얼굴은 색도 알 수 없는 낡은 이불에 둥근 턱을 묻은 채로 아직도 졸린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혈색 나쁜 뺨에는 어젯밤의 땀이 묻은 것인지 기름기 섞인 머리가 날려 있었고 밝은 입술 틈새에도 찹쌀 같은 얇은 이빨이 희미하게 하얀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킨카는 잠이 깬 지금도 국화나 물소리, 꿩 통구이나 예수 그리스도, 그 이외에 여러 꿈의 기억에 꾸벅꾸벅 마음을 헤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침대 안이 점점 밝아지자 그녀의 기분 좋은 꿈 기분에도 안하무인 한 현실이 어젯밤 신비한 외국인과 함께 이 등나무 침대에 오른 사실이 의식을 짓밟으며 들어왔다.
"만약 그 사람에게 병을 옮겼다면――"
킨카는 그렇게 생각하자 불쑥 마음이 어두워지더니 오늘 아침 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게 견딜 수 없이 힘들 거 같았다. 하지만 한 번 눈이 뜬 이상 햇살에 탄 그리운 그의 얼굴을 한사코 보지 않는 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주저한 후, 그녀는 머뭇머뭇 눈을 뜨고는 이제 완전히 밝아진 침대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생각과 달리 이불을 덮은 그녀 이외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닮은 그는 물론 인기척마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럼 그것도 꿈이었을까."
때 낀 이불을 밀쳐낸 킨카는 침대 위에 일어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고는 무겁게 내린 천을 들고서 아직 흐릿한 시선으로 방 안을 둘렀다.
방은 차가운 아침 공기에 잔혹한 이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갖은 물건의 윤곽을 묘사했다. 낡은 테이블, 불이 꺼진 램프, 그리고 한 다리는 바닥으로 쓰러지고 다른 한 다리는 벽을 향한 의자――모든 게 어젯밤과 똑같았다. 그뿐일까 테이블 위에는 퍼진 수박씨 안에 자그마한 진주 십자가마저 둔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킨카는 눈부신 눈을 찰싹이며 망연히 주위를 둘러보며 잠시간 흐트러진 침대 위에서 차갑게 누워 있었다.
"역시 꿈이 아니었던 거야."
킨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 외국인의 알 수 없는 행방을 생각했다. 물론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그녀가 자는 사이에 슬며시 방을 빠져나가 돌아간 걸지 모른다는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그녀를 애무한 그가 한 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돌아가버리는 건 믿기지 않는다기보다도 되려 믿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런 데다가 그녀는 그 수상한 외국인에게 아직 약속받은 십 달러의 돈마저 받지 못 했던 것이다.
"아니면 정말 돌아간 걸까."
그녀는 무거운 가슴을 안으며 이불 위에 벗어 둔 검은 수자 웃옷을 걸치려 했다. 하지만 대뜸 그 손을 멈추더니 그녀의 얼굴에는 서서히 생생한 핏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건 페인트칠 된 문 너머서 그 수상한 외국인의 발소리라도 들었기 때문일까. 혹은 베개나 이불에 스민 그의 술 냄새가 우연히 부끄러운 어젯밤 기억을 불러냈기 때문일까. 아니, 킨카는 이 순간 자신의 몸에 일어난 기적을, 도리 없이 악화되었던 매독이 하룻밤만에 나은 걸 깨달은 것이었다.
"그럼 그 사람이 그리스도셨던 거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옷 차림으로 구르듯이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차가운 돌바닥 위에 무릎 꿇고서 부활한 주와 말을 나눈 아름다운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열성적인 기도를 올렸다……
셋
다음 해 봄의 어느 밤, 소킨카를 찾은 젊은 일본 여행가는 다시 한 번 어두컴컴한 램프 아래서 그녀와 테이블을 둔 채 앉아 있었다.
"아직도 십자가를 걸고 있네."
그날 밤 그가 모종의 박자로 놀리듯이 그렇게 말하자 킨카는 불쑥 진지해져 하룻밤 난징에 내려 온 그리스도가 그녀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젊은 일본 여행가는 홀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외국인을 안다. 그 녀석은 일본인하고 미국인 혼열아다. 이름은 아마 George Murry일 거고. 그 녀석은 내 지인인 로이텔 전보국 통신원에게 기독교를 믿고 있는 난징의 사창부의 하룻밤을 사고 그 여자가 새근새근 자는 사이에 살짝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했다지. 내가 요전 번에 왔을 때에는 마침 그 녀석도 나와 같은 상하이 호텔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얼굴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듣자 하니 영자신문의 통신원이라는데 남자다운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글러 먹은 인간이었지. 그 녀석이 그 후 지독한 매독으로 끝내 발광해버린 건 이 여자의 병이 옮은 걸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 여자는 지금도 그런 무뢰한 혼열아를 예수 그리스도라 믿고 있다. 나는 이 여자를 위해 진실을 밝혀야 할까 아니면 입을 다물고 영원히 과거의 서양 전설 같은 꿈을 보게 해줘야 할까……"
킨카의 이야기를 끝낸 후 그는 성냥불을 붙여 향이 강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러 열심히 맞장구를 치는 척 이런 궁한 질문을 했다.
"그래? 그거 신기하네. 근데――근데 그럼 너는 그 후로 한 번도 앓지 않은 거야?"
"네, 한 번도."
킨카는 수박 씨를 씹으며 얼굴을 밝게 빛내고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 글을 적는데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의 작품 "진회의 하룻밤"에게 진 빚이 적지 않다. 추기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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