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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속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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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죽은 자 산 자"

 "문장구락부"가 기억에 남은 다이쇼 시대 작품이 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답을 생각하던 사이에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내 기억에 남은 건 마사무네 하쿠초 씨의 "죽은 자 산 자"이다. 이는 내 '참마죽'과 같은 달에 발표되었기에 특히 큰 인상을 남겼다. '참마죽'은 '죽은 자 산 자'만큼 완성되어 있지 않다. 단지 어느 정도 새로울 뿐이다. 하지만 '죽은 자 산 자'는 평가가 좋지 않았다. '참마죽'은――'참마죽'의 평가가 좋지 않았던 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독후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깊은 단편이네."――나는 당시 '죽은 자 산 자'를 읽은 쿠메 마사오 군이 그렇게 말한 걸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문장구락부'의 물음에 응한 사람 중엔 누구도 '죽은 자 산 자'를 꼽지 않은 듯하다. 심지어 '참마죽'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몇 사람의 대답 속에 들어 있었다.
 이 사실이 증명하는 것처럼 세간은 새로운 것에 주목하기 쉽다. 따라소 새로운 것에 손을 얹으면 아무튼 작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꼭 세상에 한 획을 긋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죽은 자 산 자'는 '참마죽'하고 비할 바가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 그분 아니라 또 마사무네 하쿠죠 씨 본인도 단편 작가로선 '죽은 자 산 자'를 쓴 전후에 가장 예술적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당시의 마사무네 씨는 별 인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둘 시대

 나는 이따금 이렇게 생각한다――내가 쓴 문장은 설령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썼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나 자신의 작품보다 되려 한 시대의 흙 위에 자란 몇 포기의 풀 중 한 포기라 생각한다. 그러니 자랑할 일은 못 된다.(실제로 그들은 그들이 아니면 쓰지 못 했을 작품을 쓰고 있다. 물론 그곳에 시대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묘하게 실망하고 만다.

     셋 일본 문예의 특색

 일본 문예의 특색――무엇보다도 독자에게 친밀(intime)하단 것. 이 특색의 좋고 나쁨은 지금 해야 할 이야기가 아니다.

     넷 아나톨 프랑스

 Nicolas Ségur의 "아나톨 프랑스와 대화"에 따르면 이 미소 지은 회의주의자는 정말로 철저한 염세주의자이다. 그런 일면은 Paul Gsell의 "아나톨 프랑스와 대화"(?)에도 드러나 있지 않다. 그는 '당신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미소 짓고 있지 않은가?'란 질문에 야만히도 이렇게 대답했다――"그들은 연민 때문에 미소 짓고 있다. 그건 문예상의 기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아나톨 프랑스의 말에 따르면 인생은 단지 의지하는 힘과 행위 하는 힘 위에서만 안정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지하기 위해서는 한 부분만을 봐야 한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이지와 감수성의 저주를 받은 우리에겐.
 "에피쿠로스의 정원"의 사상가, 드레퓌스 사건의 챔피언, "펭귄의 섬"의 작가였던 그도 여기서 새로운 얼굴을 가지게 된다. 물론 단지 물질주의적으로 해석하면 나이 먹고 병을 앓게 된 게 그의 인생관을 어둡게 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그의 작품 중 비교적 등한시된걸――혹은 사실상 완성도가 나쁜걸(이를테면 '붉은 알'처럼) 그의 평생의 문예적 체계에 연결 짓는 망을 지니고 있다. 병적인 '붉은 알'도 그에게는 필연적인 작품이었을 테지. 나는 이 대화나 서란집에서 더욱 새로운 '아나톨 프랑스론'이 만들어질 걸 믿고 있다.
 이 아나톨 프랑스는 십자가를 짊어진 목양신이다. 물론 신시대는 그 속에서 단지 전세기부터 금세기에 걸친 다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기말 사람이 된 나는 역시 그런 파도 속에서 유사 이래의 우리를 발견하고 있다.

     다섯 자연주의

 자연은 우리가 일정한 연령에 이르렀을 때 우리를 "봄에 눈뜨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굶주렸을 때 격렬한 식욕을 준다. 그리고 그들이 전장에 섰을 때 탄환을 피할 본능을 준다. 그로부터 몇 년인가(혹은 몇 달인가) 동첩 생활 후 그 연인과 뒤엉키는데 혐오의 정을 주고 있다. 또……
 하지만 사회의 명령은 자연의 명령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분 아니라 이따금 반대되어 있다. 그게 전부라면 지장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자연의 명령을 부정하는 무언가 신비한 걸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갖은 자연주의자는 이론상의 극좌익에 서야만 한다. 혹은 극좌익 너머에 있는 암흑 속에 서야 한다.
 "지구 밖으로!" 그렇게 말한 보들레르의 산문시는 결코 탁상 위의 산물이라 할 수 없다.

     여섯 함순

 성욕 속에 시가 있다는 걸 전시대 사람은 진작 발견해냈다. 하지만 식욕 속에도 시가 있다는 건 함순이 없었다면 알지 못 했으리라. 우리는 얼마나 얼빠져 있는가!

     일곱 어휘

 "여명"이란 뜻의 "평명"은 어느 틈엔가 "합장"이란 뜻이 되고 "죽은 아버지"를 뜻한 "선인"은 어느 틈엔가 "고인"이란 뜻으로 변모했다. 나 자신도 '모습"이나 "형태"란 뜻으로 "태도"란 말을 쓰고 굉장한 재해의 내용으로 "대홍련"이란 말을 썼다. 우리의 어휘는 이처럼 꽤나 혼란을 낳는다. "굴지인"이란 말은 누구도 "제일인"이라 쓰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잘못 쓰면 물론 잘못은 소멸된다. 따라서 이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틀리면 된다.

     여덟 콕토의 말

 콕토는 "예술이란 과학이 육화된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물론 내 해석에 따르면 "과학이 육화된 것"이란 말뜻은 "과학에 살을 붙인"이란 뜻이 아니다. 과학에 살을 붙이는 건 장인이라도 간단히 할 수 있겠지. 예술은 자신의 피와 살점 속에 과학을 갖추고 있을 터이다. 여러 과학자는 예술 속에서 그들의 과학을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의――혹은 직관의 고귀함은 그곳에 존재한다.
 나는 이 콕토의 말이 신시대 예술가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갖은 예술상의 걸작은 "2x2는 4"로 끝날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2x2는 4"부터 시작된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꼭 과학적 정신을 버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학적 정신은 시적 정신을 중시한다는 점 역설적으로 담겨 있다는 사실만을 지적해두고 싶다.

     아홉  "만약 왕이 된다면"

 "내가 만약 왕이 된다면"이란 영화에 따르면 갖은 범죄에 정통한 프랑수아 비용이 훌륭한 애국자로 변모해 있다. 또 샬럿 공주만을 사랑한 순수한 사랑꾼으로 변모해 있다. 마지막으로 시민의 인기를 모은 소위 "민중의 아군"이 되었다. 하지만 만약 채플린마저 비난해 마지않는 오늘날의 미국에 비용이 태어났다면――그런 건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역사상 인물은 이 영화 속 비용처럼 몇 번이나 변모를 거듭하리라. "만약 왕이 된다면"은 실로 미국이 낳은 영화였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비용 다음으로 대시인이 된 삼백 년의 성상을 세어 "개관 후"란 말의 괴상함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개관 후"에 일어난 건 신화나 수화獣化(?) 이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세기가 흐른 후에는――그대에도 향이 오르는 건 단지 "행복한 소수"뿐이다. 그뿐 아니라 비용은 일면에는 애국자 겸 "민중의 아군" 겸 모범적 연인의 향을 피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 감정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어찌 되었든 비용은 대시인이었다."

     열 두 서양 화가

 피카소는 항상 성을 공격한다. 잔 다르크가 아니면 무너트릴 수 없는 성을. 그는 어쩌면 성이 무너지지 않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홀로 석화시 아래서 고집스럽게도 성을 공격하고 있다. 그런 피카소를 지나 마티스를 볼 때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게 꼭 나만 그런 건 아닐 터이다. 마티스는 바다에 요트를 띄우고 있다. 무기 소리나 화약 냄새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복숭아색에 하얀 줄무늬가 있는 삼각돛만이 바람을 품고 있다. 나는 우연히 이 두 사람의 그림을 보고 피카소에게 동정을 느끼는 동시에 마티스에게 친근함이나 부러움을 느꼈다. 마티스는 우리 아마추어의 눈으로도 리얼리즘을 품은 팔을 지니고 있다. 또 리얼리즘을 품은 팔은 마티스의 그림에 색채를 드리우지만 이따금 그림의 장식적 효과에 약간의 파탄을 낳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어느 하나만 고른다면 나는 피카소를 택하리라. 투구 쓴 머리가 불에 타고 창자루가 부러진 피카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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