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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독교인의 죽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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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삼백 살의 나이를 가지고 즐거움에 몸을 담는다 하여도 미래영겁 끝없는 즐거움에 비하면 몽환과 다를 바 없다. 

 

―케이쵸역 Guia do Pecador―


선의 길에 들어서려는 자는 가르침을 품은 신비한 단맛을 기억하라.

 

―케이쵸역 Imitatione Christi―

 

하나


 옛날, 일본 나가시카의 "산타 루치야"라는 "에케레시야ecelesia, 교회"에 "로렌조"라는 이 나라의 소년이 있었다. 이는 어느 해 성탄제 밤, 그 "에케레시야"의 문 앞에 주린 채 지쳐 쓰러져 있던 걸 기도를 드리러 온 기독교인이 간호하고 바테렌padre, 신부이 애처롭게 여겨 교회 안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어째서인지 출신을 물으면 고향은 '하라이소paraiso천국', 아버지의 이름은 '데우스Deus, 하나님'라고 여느 때나 아무 일 아니라는 양 웃으며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 대부터 "젠쵸genntio, 이교도"인 것만은 손목에 찬 푸른구슬의 "콘타스contas, 염주"만 보아도 알 수 있으리라. 그러니 바테렌을 시작으로 수많은 "이루만irmão, 형제자매"도 수상한 자는 아니겠지 싶어 친절히 뒤를 봐주었는데 그 굳건한 신앙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페리오레스superiores, 장로"가 혀를 내두룰 정도였으며 일동도 "로렌조"는 천동이라며 말하며 언제 태어나고 누구 아이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허투루 대하는 법이 없었다.

 또 이 "로렌조"는 얼굴이 옥처럼 맑은 데다가 목소리 또한 여자처럼 부드러워서 수많은 사람들의 애처로움을 끌어당긴 것이리라. 개중에서도 이 나라의 '이루만' 중에 '시메온Simeon'은 '로렌조'를 남동생처럼 대접하여 '에케레시야'에 출입할 때도 반드시 사이좋게 손을 잡았다. 이 '시메온'은 본래 다이묘를 모시던 무가 집안사람이다. 그러니 육체도 발군인 데다가 선천적으로 튼튼하여 바테렌이 '젠쵸'들의 돌부리를 맞을 때에 앞서서 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자가 '로렌조'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은 비둘기와 친해진 사나운 독수리 같다고만 해야 할까. 혹은 '레바논Lubnān' 산의 망루에 포도가 둘러져 있어 꽃이라도 핀 것만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삼 년 가량의 시간이 흐르듯이 지나 '로렌조'는 이윽고 결혼을 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따라서 그쯤 괴상한 소문이 돌았는데 '산타 루치야'의 멀지 않은 마을서 우산 장수의 딸이 '로렌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우산 장수 영감도 천주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기에 딸과 이따금 '에케레시야'를 찾을 때가 있는데 기도하는 틈에도 딸은 향로를 든 '로렌조'의 모습에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하물며 '에케레시야'를 출입할 때는 반드시 머리를 이쁘게 꾸미고 '로렌조'가 있는 방향에서 시선을 트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저절로 다른 신도들의 눈에도 들고 소녀가 길에서 '로렌조'의 발을 밟았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사람이 묘서를 주고받았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러니 바테렌도 가만둘 수 없었던 걸 테지. 어느 날 '로렌조'를 불러서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우산 장수의 딸과 소문이 돌던 모양이던데 설마 사실은 아닐 테지? 어떠냐?"하고 상냥히 물었다. 그러자 '로렌조'는 단지 울적이 고개를 저으며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하고 눈물 머금은 목소리를 반복할 뿐이었다. 바테렌들도 그에 마음이 꺾여 나이도 있고 평소 보인 신양도 있으니 이렇게 말하는데 거짓이지는 않겠지 싶었다. 
 바테렌들의 의심은 그렇게 해소가 되었으나 '산타 루치야'에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선 간단히 그칠 줄 몰랐다. 그러니 형제나 다름없던 '시메온'의 마음고생은 남들보다 더 했다. 처음에는 이런 상스러운 일로 소란스럽게 쑥덕이는 게 자신에게도 부끄러워서 직접 묻는 건 물론이요 '로렌조'의 얼굴마저 설마 싶어 바라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산타 루치야'의 뒤뜰에서 '로렌조'에게 썼다는 소녀의 묘서를 주워 인기척 없는 방에서 '로렌조'의 앞에 그 글을 보여주며 겁주고 달래며 여러 물음을 했다. 하지만 '로렌조'는 단지 아름다운 얼굴을 붉히며 '그 아이는 제게 마음을 주었습니다만 저는 그 문장을 읽기만 하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하고 말했다. 하지만 세간이 술렁이고 있으니 '시메온'은 더욱이 밀어붙이며 물었다. 그러자 '로렌조'는 안타까운 눈초리로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더니 "저는 당신에게마저 거짓말을 하는 인간으로 보이는군요"하고 나무라듯이 말하고는 마치 제비처럼 그대로 방을 떠버렸다. 그런 모습을 본 '시메온'은 자신의 의심이 깊었던 게 부끄러워져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때 달려 오는 자 있었으니 소년 '로렌조'였다. '로렌조'는 뛰어들듯이 '시메온'의 목덜미에 안기고는 신음하듯이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하고 속삭이고는 상대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로 젖은 고개를 숨기기 위함인지 상대를 밀쳐내듯이 몸을 열고는 일사불란히 온 방향으로 다시 뛰어가 버렸다. 그러니 그 '제가 잘못했다' 속삭인 게 딸과 밀회를 가진 걸 잘못했단 건지 혹은 '시메온'에게 차가운 말을 해서 잘못했다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게 그 우산 장수의 딸이 임신했다는 소문이었다. 심지어 뱃속 아이의 아버지가 '산타 루치야'의 '로렌조'라고 아버지 앞에서 똑바로 고했다고 한다. 그러니 우산 장수는 불처럼 화를 내며 즉각 바테렌에게 이를 호소하러 갔다. 이렇게 된 이상 '로렌조'도 도리가 없었다. 그날 바로 바테렌을 시작으로 '이루만'들도 모인 회담이 열려 파문을 선고받았다. 본래 파문될 만한 사안이 있다고 해서 곧장 쫓아내서야 바테렌들도 입에 풀칠하기 곤란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죄인을 이대로 '산타 루치야'에 두어서는 주님의 '그로오리야Gloria, 영광' 문제가 되기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도 눈물을 머금고 '로렌조'를 쫓아내야 한다 말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슬퍼한 건 형제처럼 지냈던 '시메온'이었다. 이는 '로렌조'가 쫓겨났단 슬픔보다도 '로렌조'에게 속았다는 분노가 한층 더 강했기에 그 안타까운 소년이 찬바람이 부는 와중에 침울하게 문을 나온 차에 옆에서 주먹을 휘둘러 그 아름다운 얼굴을 때렸다. '로렌조'는 완력에 얻어맞아 그대로 옆으로 넘어졌으나 이윽고 일어나서는 눈물을 머금고 하늘을 바라보며 "주께서도 용서해주십시오. '시메온'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옵니다"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메온'도 그에는 마음이 꺾인 걸 테지. 잠시간은 단지 문 앞에 서서 주먹을 공중에 휘저었으나 다른 '이루만'도 나와 그 손을 붙잡히는 통에 바람도 불지 않는 듯한 하늘처럼 얼굴을 어둡게 흐린 채로 의기소침히 '산타 루치야'의 문을 나서는 '로렌조'의 뒷모습을 줄곧 바라보았다. 그때 같이 있던 기독교인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찬바람에 흔들리는 햇살이 힘없이 걷는 '로렌조'의 머리 너머, 나가사키의 서쪽 하늘로 기우는 경치와 맞물려 그 소년의 가녀린 모습은 마치 하늘의 화염 속에 서있던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 후 '로렌조'는 '산타 루치야'의 안에서 향로를 들고 있던 과거와 달리 변두리의 주인 없는 오두막에서 지내는 불쌍한 거지가 되었다. 하물며 이전에는 '젠쵸'들이 벌레처럼 대하는 천주의 가르침을 받던 사람이지 않은가. 그러니 마을로 가면 물정 모르는 어린애에게 비웃음 사는 건 물론이요 칼에 지팡이 벽돌에 돌로 맞는 일도 번번이 있었다. 심지어는 나가사키에 돌던 무서운 열병에 걸려 일주일을 꼬박 길거리에 누워 괴로워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데우스"의 무량무변의 사랑과 연민은 그때마다 "로렌조"가 한 목숨을 건지는 것뿐일까 돈이나 쌀을 줄 수 없을 때에는 산의 나무 열매나 바다의 어폐류 등 그날을 건져주고는 했다. 그러니 "로렌조"도 아침저녁 기도는 "산타 루치야"에 있을 적을 잊지 않았고 손목에 찬 "콘타스"도 푸른옥도 색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뿐일까. 밤이 깊어져 인기척이 조용해질 적마다 이 소년은 조용히 변두리 오두막을 나와 달을 밟아서는 친숙한 "산타 루치야"를 찾아 주 "제스 키리스토예수 그리스도"의 가호를 내려달라며 기도하고는 했다.
 하지만 같은 "에켈리시야"서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은 요즘 들어 거의 "로렌조"를 신경 스지 않게 되어 바테렌을 시작으로 누구 하나 그를 안타깝게 여기는 자가 없었다. 그러하니 파문 때부터 소행무참한 소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매일 밤마다 홀로 "에켈리시야"를 찾을 정도로 신앙이 깊다는 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또한 "데우스"의 천만무량한 계획 중 하나이니 도리가 없다 받아들인 "로렌조" 입장에서는 애처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또 우산 장수의 딸 이야기다. "로렌조"가 파문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미처 열 달을 채우지 못한 여자 아이를 낳았다. 아무리 완고한 아버지라도 첫 손자 얼굴은 미워할 수 없었던 걸 테지. 딸과 함께 소중히 간호하며 스스로 품에 안아 보기도 하고 때로는 가지고 놀 인형을 들려주기도 했다. 우산 장수는 당연히 그렇더라도 여기서 보기 드문 건 "이루만"인 "시메온"이었다. 그 "쟈보악마"도 때려눕힐 듯한 거한이 소녀가 아이를 낳자마자 한가할 때마다 우산 장수를 찾아 무시무시한 팔뚝에 갓난아기를 안고서는 씁쓸한 얼굴에 눈물을 머금고 동생이라 사랑했던 가녀린 "로렌조"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소녀만은 "산타 루치야"를 나온 후 단 한 번도 "로렌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원망스러운 듯한 기색이 있었는가 하면 "시메온"이 찾는 것마저 어딘가 불쾌해하는 듯했다.
 이 나라 속담에도 빛과 어둠은 지키는 자 없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일 년이란 세월은 눈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이때 생각지도 못한 큰일이 일어났는데 하루 밤중에 나가사키 마을의 절반을 태운 그 대화제였다. 그 순간의 무시무시한 광경은 심판의 나팔 소리가 하늘의 불빛을 꿰뚫어 울렸나 싶을 정도로 온몸의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때 그 우산 팔이의 집은 운 나쁘게도 바람 아래에 놓인 탓에 서서히 불꽃에 휩싸였다. 그렇게 온 가족이 황급히 도망쳐 나와 보니 딸이 낳은 여자아이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방에 눕혀둔 걸 잊고 여기까지 도망친 것일 테지. 그러자 우산 장수는 발을 끌면서 소란을 떨었다. 딸 또한 사람들이 막지 않으면 불속에 뛰어들어 구해낼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바람은 더욱 강해져 불꽃의 혀는 천상의 별마저 태울 것처럼 울부짖었다. 그러니 불을 끄러 모인 사람들도 단지 허둥지둥하며 미친 듯한 딸을 말리는 것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수많은 사람을 밀치며 달려온 게 있으니 그 "이루만" "시메온"이었다. "시메온"은 화살마저 끄떡없을 듯한 듬직한 몸으로 상황을 보기도 전에 용맹히 불꽃 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너무 큰 기세 탓에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다. 두세 번 연기를 연기를 넘는가 싶더니 등을 돌려서 일사불란히 도망쳤다. 그러고는 우산 장수와 딸 앞에 와서 "이 또한 '데우스'의 계획이십니다. 포기하시죠"하고 말했다. 그때 우산 장수 옆에서 누구인지 모를 목소리로 "주여, 도와주소서"하고 외치는 게 들렸다. 목소리가 익숙하여 "시메온"이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틀림없는 "로렌조"였다. 깔끔하게 마른 얼굴은 화염 빛에 붉게 올라 있었고 머리에 흩날리는 흑발도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으니 애처로운 듯 아름다운 눈썹으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로렌조"가 거지의 모습을 무리진 사람들 앞에 서서 눈도 떼지 않고 불타는 집을 바라보았다. 또 그건 정말로 잠깐의 일이었다. 무시무시한 바람이 불꽃을 부채질하는가 싶었더니 "로렌조"의 모습은 똑바로 불 기둥, 불 벽, 불 들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시메온"은 저도 모르게 온몸으로 땀을 흘리며 하늘 높게 "쿠루스십자가"를 긋고는 자신 또한 "주여, 도와주소서"하고 소리쳤으나 어째서인지 그 눈에는 찬바람에 흔들리는 햇살을 받으며 "산타 루치야"의 문에 서있던 아름답고 쓸쓸한 "로렌조"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주위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로렌조"의 기특한 행동에 놀라면서도 파문 당한 과거를 잊지 못한 걸 테지. 그 자리서 만들어진 평판은 바람을 타고 술렁임 위에 얹어졌다. 그 말이란 즉 "역시 부모의 정에는 이기지 못하나 보다.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 하여 그림자도 드러내지 않았던 '로렌조'가 지금 한 아이의 목숨을 구하려 불에 들어갔다"하고 누구랄 것도 없이 매도한 것이다. 이는 우산 장수도 마찬가지였는지 "로렌조"의 모습을 보고는 뒤숭숭한 마음의 술렁임을 숨기지 못하는지 서서 몸부림치며 무어라 어리석은 소리만을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정작 딸만은 미친 듯이 대지에 몸을 낮추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일사불란히 기도를 올리며 움직이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하눌에는 불똥이 비처럼 내렸다. 연기도 땅을 쓸어내며 위로 올라왔다. 그럼에도 딸은 묵묵히 고개를 조아리고 자신도 세상도 잊고 기도에만 전념했다.
 그러는 사이 다시 불앞에 무리진 사람들이 한 번 술렁이는가 싶었더니 머리가 난잡하게 헝클어진 "로렌조"가 손에 어린 아이를 안고서 날뛰는 불 안에서 내려오듯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불 붙은 들보 하나가 반으로 꺾여버렸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이르는가 싶었더니 "로렌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 자리에는 단지 불기둥이 산호처럼 오르고 있었다.
 너무나 흉악한 일에 그간의 감정도 가신 "시메온"을 비롯하여 우산 장수까지 그 자리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모두 눈앞이 깜깜해졌다. 개중에서도 딸은 무서우리만치 울며 소리치고 한 번은 정강이를 드러내며 일어섰으나 이윽고 번개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럴 만도 하다. 엎드린 딸의 손에는 어느 틈엔가 어어린아이가 생사가 확실하지 않은 모습으로 안겨 있었으니까. 아아, 넓고 빈틈없는 "데우스"의 지혜, 힘은 아무리 칭송해도 부족하다. 불타 무너진 들보에 얻어맞으면서도 "로렌조"가 필사의 힘을 짜내어 던진 아이가 운 좋게 딸의 발밑에 상처 하나 없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 딸이 대지에 드러누워 기쁜 눈물을 흘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우산 장수의 입에서는 "데우스"의 자비를 칭송하는 목소리고 저절로 흘러 넘쳤다. 아니, 흘러넘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해야 할까. 그보다 앞서 "시메온"은 흩날리는 불바람 속에 "로렌조"를 구할 일념으로 말 그대로 달려들었고 우산 장수의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부끄럽고 안타까운 기도의 목소리가 되어 밤하늘에 높게 울렸다. 이는 비단 우산 장수만이 아니었다. 부녀를 둘러싸인 기독교인들은 모두 목소리를 맞추어 "주여, 도와주소서"하고 울며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비루젠 마리야처녀 마리아"의 아들, 모든 사람의 괴로움과 슬픔을 자기 일처럼 보는 우리의 주 "제스 키리시토"는 이미 그 기도를 들어주신 듯했다. 보라, 비참하게 그을려진 "로렌조"는 "시메온"의 팔에 안겨 불과 연기 안에서 구출되지 않았나.
 하지만 그날의 큰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는 "로렌조"가 일단 기독교인들의 손에 끌려 바람 위에 자리한 "에케레시야"의 문 옆에 눕혀졌을 때의 일이다. 그전까지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던 우산 장수의 딸은 문으로 나온 바테렌 앞에 무릎을 꿇고는 사람들 눈앞에서 "이 아이는 '로렌조' 님의 씨가 아닙니다. 진실은 제가 옆집의 '젠쵸'의 아이와 밀회하여 생긴 딸입니다"하고 생각지도 못한 "코히산Confissão, 참회"를 한 것이었다. 그 궁지에 몰린 목소리의 떨림도 그렇고 그 눈물 젖은 두 눈동자도 그렇고 이 "코히산"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는 듯했다. 그러하니 어깨를 나란히 한 기독교인들은 하늘을 태울 듯한 맹화도 잊고서 숨조차 쉴 수 없다는 양 목소리를 삼켰다.

 딸이 눈물을 머금은 채 말을 이어나가길 "저는 늘 '로렌조 님'을 연모하였는데 신앙심이 견고하셔 저를 차갑게 대하기에 그만 원한을 품고 뱃속의 아이를 '로렌조' 님의 씨라고 거짓으로 고발해 저를 괴롭게 한 걸 후회하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로렌조' 님의 숭고함은 저의 대죄를 미워하지 않는 걸로 모자라 오늘밤은 제 몸이 위험한 것도 잊으시고 '인헤루노지옥'와 같은 화염 속에서 제 딸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그 연민과 그 듯이 그야말로 주 '제스 키리시토'의 재래이라 믿습니다. 그러하니 소첩이 거듭 지은 극악을 생각하면 이 몸을 '쟈보'의 손톱에 찢겨 나가도 원한이 없겠지요." 딸은 "코히산"을 미처 마치지 못한 채 땅에 몸을 던진 채 울음을 터트렸다.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기독교인들 사이서 "마루치리Martyrio, 순교"다, "마루치리"다 하는 목소리가 파도처럼 이른 게 마침 이때였다. 기특하게도 "로렌조"는 죄인을 연민하는 마음에 주 "제스 키리시토"의 뒤를 밟아 거지까지 추락했다. 그러하니 아버지라 모시는 바테렌도 형과 같은 '시메온'도 모두 그 마음을 몰랐던 것이다. 이게 '마루치리'가 아니면 무엇이랴.

 하니 당사자인 '로렌조'는 딸의 '코히산'을 들으면서도 두어 번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일 분으로 머리는 타고 피부는 그을러서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데다가 말을 기색마저 전혀 없었다. 딸의 '코히산'에 가슴이 찢어진 우산 장수와 '시메온'은 그 머리맡에 앉아 어떻게든 로렌조를 돌아보았으나 그 숨은 시시각각 짧아졌으니 마지막은 그리 멀지 않을 터였다. 단지 평소와 다르지 않은 건 저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는 별과 같은 눈동자 색뿐이었다.
 이윽고 딸의 '코히산'을 들은 바테렌은 거칠게 부는 밤바람에 하얀 수염을 나부끼며 '산타 루치야'의 문을 뒤로한 채 엄숙히 말하길 "후회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한 좋은 일을 인간의 손으로 어찌 처벌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도 더욱 '데우스'의 뜻에 몸을 맡기고 조용히 심판의 날을 기다리시지요. 또 '로렌조'가 자신의 몸을 주 '제스 키리시토'처럼 바친 뜻은 이 나라 기독교인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덕행입니다. 제아무리 소년의 몸이라 해도――" 아아, 이건 또 무슨 일일까. 거기까지 말하던 바테렌은 그만 입을 뚝 다물고 마치 '하라이소'의 빛을 본 것처럼 가만히 발밑의 '로렌조'의 모습을 보았다. 그 얌전한 모습은 어떠한가. 그 두 손이 떨리는 것도 평소 일은 아닐 테지. 아아, 바테렌의 뺨 위에는 끝을 모르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보라, "시메온". 보라, 우산 장수. 주 "제스 키리시토"의 피보다도 붉은 불빛을 온몸에 받고 소리도 없이 "산타 루치야"의 문 옆에 누운 아름다운 소년의 가슴에는 불타 찢어진 옷 틈새로 깔끔한 두 유방이 옥처럼 드러나 있지 않은가. 지금은 타버린 얼굴서 저절로 묻어나는 상냥함은 숨길 수 없으리라. 그래, '로렌조'는 여자였니라. '로렌조'는 여자였니라. 보아라. 맹화를 뒤로한 채 울타리처럼 자리한 기독교인들다. 간음의 계를 깼단 이유로 "산타 루치야"를 쫓겨난 '로렌조'는 우산 장수의 딸과 마찬가지로 눈초리가 상냥한 이 나라의 여자였니라.
 그 찰나의 경외란 마치 '데우스'의 목소리가 별빛도 보이지 않는 먼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았다. 그러하니 '산타 루치야' 앞에 자리해 있던 기독교인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벼와 같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하나같이 '로렌조'의 주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가운데 들리는 건 단지 하늘을 불태우는 끝없는 화염의 울림뿐이었다. 아니, 누군가의 울먹이는 소리도 들렸는데 이는 우산 장수 딸의 것일까. 혹은 스스로 형이라 자처한 그 '이루만' '시메온'의 것일까. 이윽고 그 적막이 주위를 뒤흔들며 '로렌조' 위에 높게 손을 뻗은 바테렌들이 경을 외는 목소리가 엄숙하고 슬프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경 읽는 소리가 그쳤을 때, '로렌조'라 불린 이 나라의 젊은 여성은 아직 어두운 밤 너머에, '하라이소'의 '그로오리야'를 올려다보며 입술에 마음 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 여자의 평생은 그 외엔 무엇 하나 알려진 게 없다 들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할까. 세상의 모든 존귀함은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찰나의 감동의 극치이다. 어두운 밤의 바다에도 비유하자면 번뇌심의 하늘에 파로를 일으켜 아직 나오지 않은 달빛을 물방울 안에 사로잡는 것이야말로 사는 보람이 있는 목숨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렌조'의 마지막을 아는 건 '로렌조'의 평생을 아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내가 소장한 이 책은 나가사키 야소회가 출판한 것으로 이름은 '레겐다 오우레아'라 한다. 이는 즉 LEGENDA AUREA이란 뜻이다. 하지만 내용은 꼭 서유럽의 소위 "황금전설"은 아니다. 그들이 사도성인의 언행을 기록한 것처럼 일본을 찾은 서고됴가 용맹정진히 사건을 찾아 수록해 복음전도의 일환으로 짠 책이다.

 구성은 상하 두 권, 미농지에 기록된 초서로 히라가나문이며 인쇄가 선명하지 않아 활자가 불명확한 구석이 있다. 상권 표지에는 라틴어로 제목이 적혀 있고 그 아래 한자로 "御出世以来千五百九十六年, 慶長二年三月上旬鏤刻也"라 두 줄로 적혀 있다. 연대 좌우에 나팔을 부는 천사 그림이 있다. 기교는 굉장히 유치하나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다. 하권 표지는 "五月中旬鏤刻也" 빼고는 상권과 동일하다.
 두 권 모두 종이 숫자는 약 육십 여 페이지로 수록된 황금 전설은 상권 여덟 장, 하권 열 장이다. 그 외에 각권의 앞에 저자 불명의 서문 및 라틴어로 기록된 목차가 있다. 서문은 문장이 뛰어나고 이따금 서양 문장을 직역한 듯한 어법도 있는 걸 보아 바테렌인 서양인이 썼지 싶다.
 위에 적은 '기독교인의 죽음'은 해당 '레겐다 오우레아' 하권 제2장을 따른 것으로 아마 당시 나가사키의 한 교회서 일어난 사실의 충실한 기록이지 싶다. 단 기록 중 큰불이라는 게 "나가사키항초"를 비롯한 기록을 찾아봐도 그 유무가 확실하지 않아 사실의 정확한 연대는 알아 볼 수 없다.
 나는 '기독교인의 죽음'을 발표하는데 필요상 다소의 문맥을 건드렸다. 만약 원문의 뛰어남을 망치거나 훼손하는 일이 없다면 나로선 다행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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