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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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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이야기' 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

 나는 '이야기' 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을 가장 뛰어나다 보지 않는다. 따라서 '이야기'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만 쓴다고는 할 수 없다. 애당초 내 소설도 대개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뎃셍 없는 그림은 성립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설은 '이야기' 위에 성립된다.(내 '이야기'란 말은 단순히 '줄거리'란 뜻이 아니다) 만약 엄밀히 따지자면 '이야기'가 없는 곳에는 어떠한 소설도 성립하지 않으리라. 따라서 나는 '이야기' 있는 소설에도 물론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다프니스와 클로에" 이후로 갖은 소설 혹은 서정시가 '이야기' 위에 성립된 이상, 대체 누가 '이야기' 있는 소설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보바리 부인" 또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전쟁과 평화"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적과 흑"도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어떤 소설의 가치를 정하는 건 결코 '이야기'의 길고 짧음이 아니다. 하물며 이야기가 기발한가 기발하지 못한가는 평가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않을 터이다. (타니자키 준이치로는 다들 알다시피 기발한 '이야기' 위에 선 수많은 소설의 작가이다. 또 그렇게 기발한 '이야기' 위에 선 소설 중 몇 편은 아마 백대의 후세에도 남게 되리라. 하지만 그건 꼭 '이야기'의 기발함이 생명을 주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더욱이 나아가 생각하면 '이야기' 다운 이야기의 유무도 그런 문제서는 논외이다.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야기' 없는 소설을――혹은 '이야기' 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을 가장 뛰어나다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소설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은 물론 단순히 주변 사정을 묘사했을 뿐인 소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갖은 소설 중에서도 가장 시에 가까운 소설이다. 하지만 산문시라 불리는 것보다도 훨씬 소설에 가깝다. 세 번째로 반복하자면 나는 이러한 '이야기' 없는 소설을 가장 뛰어나다 보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순수하단" 점에서 보면――통속적 관심을 가지지 못한단 점에서는 가장 순수한 소설이다. 다시 한 번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뎃셍 없는 그림은 성립하지 않는다.(칸딘스키의 '즉흥' 같은 몇 장의 그림은 예외이다) 하지만 뎃생보다도 색채에 생명을 맡긴 그림은 성립되어 있다. 다행히 일본에 건너온 몇 장의 세잔의 그림은 이 사실을 증명하리라. 나는 그런 그림에 가까운 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럼 이런 소설은 존재하는가? 독일 초기 자연주의 작가들은 이런 소설에 손을 대었다. 근대에서 이런 소설 작가를 찾아 보자면 누구도 쥘 르나르에게 미치지 못한다(내 좁은 견문에 따르면) 이를테면 르나르의 "필립 일가의 가풍"은(키시다 쿠니오 씨의 번역집 "포도밭의 포도지배인"에 수록되어 있다) 얼핏 보기엔 미완성인가 의심이 갈 정도이다. 하지만 실은 '좋게 보는 눈'과 '느끼기 쉬운 마음'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소설이다. 다시 한 번 세잔을 예로 끌고 오자면 세잔은 우리 후대에 수많은 미완성 그림을 남겼다. 마치 미켈란젤로가 미완성 조각을 남긴 것처럼――하지만 미완성이라 불리는 세잔의 그림도 정말 미완성이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은 완성이란 이름을 부여받았다!……하지만 르나르의 소설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물론이요 세잔의 몇몇 그림처럼 미완성의 의심을 받지는 않는다. 나는 불행히도 견문이 짧아 프랑스 사람들이 르나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르나르의 소설이 독창적이었음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럼 이런 소설은 서양인 이외엔 쓰지 못한 걸까? 나는 우리 일본인을 위해 시가 나오야 씨의 몇몇 단편을――'모닥불' 이하의 몇몇 단편을 꼽아보고 싶다.
 나는 이런 소설을 '통속적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내 통속적이란 말뜻은 사건 그 자체를 대하는 흥미이다. 나는 오늘 거리를 걷다 차부와 운전수가 싸우는 걸 보았다. 그뿐 아니라 어떤 흥미를 느꼈다. 이 흥미는 무엇일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극 속 싸움을 볼 때의 흥미하고는 다른 거 같지 않았다. 만약 다르다면 연극 속 싸움은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거리의 싸움은 언제 내게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흥미를 주는 문예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흥미보다도 더 높은 흥미가 있음을 믿고 있다. 만약 이 흥미가 무엇이냐 한다면――나는 특히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기린"의 첫 몇 페이지가 곧 이 흥미를 주는 좋은 사례 중 하나이리라.
 '이야기' 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은 통속적 흥미가 부족한 소설을 말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의미에서는 결코 통속적 흥미 또한 부족하지 않다.(그건 단지 '통속적'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르나르가 쓴 필립이――시인의 눈과 마음을 비추는 필립이 우리에게 흥미를 주는 건一반쯤 우리에게 가까운一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 또한 통속적 흥미라 부르는 게 꼭 부당하지는 않으리라.(물론 나는 내 논의의 방점을 "一평범한 사람이다"에 주고 싶지 않다. "시인의 눈과 마음을 비추는一평범한 사람이다"에 주고 싶다.) 실제로 나는 이런 흥미를 위해 항상 문예를 곁에 두는 수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 우리는 물론 동물원 기린에 감탄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집에 있는 고양이에게도 역시나 애착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세잔을 그림의 파괴자라 한다면 르나르 또한 소설의 파괴자이다. 이런 의미에선 르나르는 물론이요 향로의 향을 뒤집어쓴 지드도 거리의 향을 풍기는 필립도 조금은 이 인기척 적고 함정으로 가득 찬 길을 걷고 있으리라. 나는 그런 작가들의 행보에――아나톨 프랑스나 바레스 이후의 작가들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의 소위 '이야기' 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은 어떤 소설을 가리키는가. 또 나는 왜 이런 소설에 관심을 지니고 있는가――그러한 건 대강 위에 적은 몇십 줄의 문장으로 충분하리라.

     둘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에게 답하다

 다음으로 나는 타지나키 준이치로 씨의 논의에 답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 대답의一반은 (하나) 안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숱한 문학 중 구조적 미관을 가장 많이 지닌 건 소설이다"라는 타니자키 씨의 말에는 승복할 수 없다. 어떤 문예도――겨우 열일곱 자로 이뤄진 홋쿠마저도 "구조적 미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런 논법을 이어가는 건 타니자키 씨의 말을 곡해하는 게 된다. 하지만 "숱한 문학 중 구조적 미관을 가장 많이 지닌 건" 소설보다도 되려 희곡이리라. 물론 가장 희곡 다운 소설은 소설 다운 희곡보다도 "구조적 미관"이 결여되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희곡은 대개 소설보다도 "구성적 미관"으로 풍부하다――이또한 사실은 논의상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소설이라는 문예상의 형식은 "가장"인지 아닌지는 제쳐두더라도 "구성적 미관"에 풍부하리라. 또 타니자키 씨가 말한 것처럼 "줄거리의 재미를 제외하는 건 소설이란 형식이 지닌 특권을 버리는 게 된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문제의 답은 (하나) 안에 적어두었다. 단지 "일본 소설에 가장 결여된 건 이러한 구성하는 힘, 여러가지를 담은 줄거리를 기하학적으로 조립하는 재능이다"인지 어떤지는 나로선 무작정 타니자키 씨의 논의에 찬성할 수 없다. 우리 일본인은 "겐지모노가타리" 같은 과거에서부터 이러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현대 작가를 보더라도 이즈미 쿄카 씨, 마사무네 하쿠초 씨, 사토미 톤 씨, 쿠메 마사오 씨, 사토 하루오 씨, 우노 코지 씨, 키쿠치 칸 씨 등을 셀 수 있으리라. 심지어 그러한 작가 안에서 태연이 다른 색채를 내뿜고 있는 건 "우리의 형님"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 본인이다. 나는 결코 타니자키 씨처럼 우리 동해 고도의 백성에게 "구성하는 힘"이 없는 걸 슬퍼하지 않는다.
 이 '구성하는 힘'의 문제는 아직 몇 심 행이나 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걸 위해서는 타니자키 씨의 논의를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단지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나는 이 '구성하는 힘' 위에선 우리 일본인이 서양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품화옥감" 같은 장편을 계속 이어가는 육체적 역량이 부족하다 생각한다.
 더욱이 타니자키 씨에게 대답하고 싶은 건 "아쿠타가와 군이 줄거리의 재미를 공격하는 심리 중에는 구성 방면보다도 되려 재료에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나는 타니자키 씨가 쓰는 재료에는 조금의 이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크리펜 사건"도 "작은 왕국"도 "인어의 한탄"도 재료상으론 결코 부족함이 없다. 또 타니자키 씨의 창작 태도에도――나는 사토 하루오 씨를 제외하면 아마 타니자키 씨의 창작 태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이리라. 내가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동시에 타니자키 씨도 채찍질하고 싶은 건(내 채찍에 가시가 없는 건 물론 타니자키 씨도 알고 있으리라.) 그러한 재료를 살리기 위한 시적 정신의 여하이다. 혹은 또 시적 정신의 깊이이다. 타니자키 씨의 문장은 스탕달의 문장보다도 명문이리라.(19세기 중엽의 작가들은 발자크도 스탕달도 샌드도 명문을 쓰지 못 했단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믿자면.) 특히 그림 효과를 주는 점에서는 무력에 가까웠던 스탕달은 필적할 게 못 된다.(이 또한 연대 책임자로 브라네스를 데리고 가면 된다.) 하지만 스탕달의 작품 속에 넘치던 시적 정신은 스탕달이 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플로베르 이전에 유일한 l'artiste예술가, 화가였던 멜리메마저 스탕달에게 밀렸던 건 이 문제 때문이리라. 내가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에게 바라고 싶은 건 필경 이 문제뿐이다. "자청"의 타니자키 씨는 시인이었다. 하지만 "사랑하기에"의 타니자키 씨는 불행히도 시인하고는 거리가 멀다.

 "위대한 친구여. 그대는 그대의 길로 돌아가라."

     셋 나

 마지막으로 내가 반복하고 싶은 건 나 또한 앞으로 곁눈질하는 법 없이 '이야기' 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만 쓸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밖에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재능이 그런 소설을 쓰는데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런 소설을 쓰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내가 소설을 쓰는 건 소설이 갖은 문예 형식 중 가장 포용력이 풍부하여 무엇이든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긴 시를 완성한 서양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쩌면 소설보다도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서양인들에게 몇 번이나 아양을 떨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사랑하던 건 시인 겸 저널리스트인 유대인――나의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쇼와 2년 2월 15일)


     넷 대작가

 나는 위에 적은 것처럼 굉장히 난잡한 작가이다. 하지만 난잡한 작가란 사실이 꼭 나를 괴롭히는 건 아니다. 아니, 누구의 괴로움도 아니다. 예로부터 대작가라 칭하는 건 전부 난잡한 작가였다. 그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 갖은 걸 던져 넣었다. 괴테를 고금의 대시인으로 만든 건 설령 전부는 아니라 해도 대부분은 이 난잡함에――이 방주에 올라타는 것보다도 난잡함에 존재한다. 하지만 엄밀히 생각하면 난잡함이란 순수함에 가깝다. 나는 이 점에선 대작가라 불리는 존재에게 언제나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확실히 한 시대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리라. 하지만 그들의 작품이 후대를 움직이기에 충분하다면 그건 단지 그들이 얼마나 순수한 작가였느냐, 그 점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대시인이란 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순수한 시인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말한 "좁은 문"(지드)의 주인공이 한 말도 결코 등한시할 수는 없다. 나는 "이야기" 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을 논할 때에 우연히 이 "순수한"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런 말로 떠오른 가장 순수한 작가 중 한 명――시가 나오야 씨를 논해보려 한다. 따라서 이 논의의 후반은 저절로 시가 나오야론으로 바뀔 테지. 물론 때와 상황에 따라 어떤 옆길로 빠질지는 나 자신도 보증할 수 없다.

     다섯 시가 나오야 씨

 시가 나오야 씨는 우리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작가――그렇지 않다면 가장 순수한 작가들 중 한 명이다. 시가 나오야 씨를 논하는 건 물론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다. 나는 아쉽게도 바쁘기 때문에――좀 더 정확히는 되려 게으르기 때문에 그러한 논의를 읽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정도 이전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은 이전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것조차 안 될지도 모른다……
 (하나) 시가 나오야 씨의 작품은 무엇보다 먼저 이 인생을 훌륭히 살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다. 훌륭히?――이 인생을 훌륭히 사는 것 중 제일은 신처럼 사는 걸 테지. 어쩌면 시가 나오야 씨 또한 지상에 내려온 신처럼은 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청결하게(이는 두 번째 미덕이다) 살고 있는 건 확실하다. 물론 나의 "청결하게"란 말은 비누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도덕적으로 청결하게"란 뜻이다. 이건 어쩌면 시가 나오야 씨의 작품을 비좁은 것처럼 보이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은 비좁은 건 고사하고 넓혀주고 있다. 또 왜 넓혀주고 있는가 하면 우리의 정신적 생활은 도덕적 속성을 감미하는 걸로 그 속성을 감미하기 전보다 더 넓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물론 도덕적 속성을 가한다는 게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물질적 고통을 제외한 고통은 대부분이 속성이 낳는 것이다.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의 악마주의 역시 이 속성에서 만들어진다는 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악마는 신의 이중인격이다.] 더욱이 예시를 찾는다면 나는 마사무네 하쿠초 씨의 작품에마저 이따금 논해지는 염세주의보다 되려 기독교적 혼의 절망을 느끼곤 한다.) 이 속성은 시가 씨 안에 물론 깊게 뿌리내려 있으리라. 하지만 또 이 속성을 자극하는 데에는 근대 일본서 태어난 도덕적 천재――아마 그 이름을 줄 값어치가 있는 유일한 도덕적 천재인 무샤노코지 씨의 영향도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혹시 몰라 다시 한 번 되풀이하자면 시가 나오야 씨는 이 인생을 청결히 살고 있는 작가이다. 그건 작품 속에 있는 도덕적 태도서도 찾아 볼 수 있으리라. ('사사키의 경우'의 마지막 문단은 그 현저한 사례 중 하나이다.) 또 동시에 작품 속에 담긴 정신적 고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장편 '암야행로'를 관통하는 게 실로 이 느끼기 쉬운 도덕적 혼의 고통이다.
 (둘) 시가 나오야 씨는 묘사상으론 공상에 의지하지 않는 리얼리스트이다. 또 그런 리얼리즘의 세밀함은 조금도 앞사람들에게 밀리지 않는다. 만약 이 요소 하나만을 논한다면 나는 어떠한 과장도 없이 톨스토이보다 세밀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는 나오야 씨의 작품을 이따금 단조롭게 한다. 하지만 이 점에 주목하는 자는 그런 작품에서도 만족할 수 있으리라. 세상 사람의 주목을 받지 못한 "입대일면"은 그런 작품 중 한 사례이다. 하지만 그 효과를 거둔 건 (이를테면 단편인 '쿠게누마행'을 봐도) 묘사의 묘함에 극치에 올라 있다. 겸사겸사 '쿠게누마행'에 관해 적자면 그 작품의 디테일은 모조리 사실에 입각해 있다. 하지만 '둥글게 부푼 작은 배에는 곳곳에 모래가 붙어 있다"는 한 줄만은 사실이 아니다. 그걸 읽은 작중 등장인물 중 한 명은 "아아, 정말로 그때엔 XX의 배에 모래가 붙어 있었지"하고 말했다!

 (셋) 하지만 묘사상의 리얼리즘은 꼭 시가 나오야 씨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다. 시가 씨는 이 리얼리즘에 동양적 전통 위에 성립된 시적 정신을 얹어 놓았다. 시가 씨의 아류가 없는 이유는 이 부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또 우리에게――적어도 나로선 가장 가지기 어려운 특색이다. 나는 시고 나오야 씨 본인이 이 부분을 의식하고 있는지 확실히 보증할 수 없다.(갖은 예술적 활동을 의식 속에 둔 건 십 년 전의 나이다.) 하지만 이 한 부분만은 설령 작가 스스로는 의식하지 않았더라도 분명 그의 작품에 독특한 특색을 준다. '모닥불', '재두루미' 같은 작품은 거의 이런 특색에 모든 생명을 맡기고 있으리라. 그러한 작품은 시가詩歌에도 밀리지 않고(물론 이 시가란 말은 홋쿠도 예외로 하지 않는다.) 굉장히 시가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이는 또 현대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인생적'이라 불리는 작품 중 하나――"불상한 남자"에마저 찾아 볼 수 있으리라. 고무공처럼 부풀어 오른 여자의 유방에 "풍년이야 풍년"하고 노래하는 건 도무지 시인 이외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현대 사람들이 그런 시가 나고야 씨의 '아름다움에' 비교적 주의하지 않는 사실에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아름다움'은 극채색 안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또 동시에 다른 작가들의 아름다움에도 역시나 주의하지 않는 사실에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넷) 또 역시나 작가인 나는 시가 나오야 씨의 테크닉에도 주의를 소홀히 하지 않는 한 사람이다. '암야행로'의 후편은 시가 씨의 테크닉 중에서도 일진보를 이룬 작품이리라. 하지만 그런 문제는 작가 이외의 사람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을지 모른다. 나는 단지 초기의 시가 나오야 씨마저 훌륭한 테크닉의 소유자였음을 짧게 소개하고 싶을 뿐이다.
 ――담뱃대는 여성용이었으나 과거의 물건이라 지금 쓰이는 남성용보다 크고 튼실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물부리 쪽에 타마모노마에가 쥘부채를 들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그는 이 선명한 세공에 잠시 황홀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키가 크고 눈이 크며 코가 오똑하고 아름답다기 보다 모든 게 호화로운 여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이는 '그와 여섯 살 연상의 여자'의 결말이다.
 ――다이스케는 꽃병의 오른쪽에 자리한 책장 앞으로 가서 위에 얹은 무거운 사진첩을 꺼내 선 채로 금으로 된 잠금쇠를 풀어 한 장 두 장 읽기 시작했으나 중간까지 오자 뚝하고 손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스무살 가량 되는 여자의 반신이 있다. 다이스케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는 '그로부터'의 첫 회의 결말이다.
 출문일이원문을 나서니 날은 길어도 불수도여기길 떠나는 피곤함도 모르겠다 골육은기단가족들 은헤를 어찌 끊으련만 수중도청사손안 푸른 끈을 잡아 당겨본다 첩하만인강눈 아래는 만길 절벽인데 부신시건기몸을 구부려 깃발을 뽑아본다.
 이는 더욱 오래된 두보의 "전출새구수"란 시의 결말――은 아닌 한 수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눈에게 호소한다――말하자면 한 장의 인물화에 가까운 조형미술적 효과가 있어 결말을 살린 건 같은 일이다.
 (다섯) 이는 필시 여담이리라. 시가 나오야 씨의 '아이를 훔치는 이야기'는 사이가쿠의 "아이지장"(오오케바)를 떠올리면 된다. 또 더욱이 "한의 범죄"는 모 파상의 "랄티스트"(?)를 떠올리게 하리라. "랄티스트"의 주인공은 역시 여자의 몸 주변에 나이프를 꽂는 기인이다. "한의 범죄"의 주인공은 어떤 정신적 여명 속에서 훌륭히 여자를 죽이고 만다. 하지만 "랄티스트"의 주인공은 아무리 여자를 죽이더라도 오랜 세월의 숙련을 거듭한 결과 나이프를 여자의 몸에 꽂지 않고 몸 주변에 꽂는다. 심지어 이 사실을 아는 여자는 냉정히 남자를 바라본 채로 미소마저 짓고 있다. 하지만 세이카쿠의 "아이지장"은 물론 모파상의 "랄티스트"도 시가 나오야 씨의 작품하고는 어떤 관계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는 후세 비평가들에게 모방이란 말을 듣지 않도록 특별히 덧붙인 것이다.

     여섯 우리의 산문

 사토 하루오 씨에 따르면 우리의 산문은 구어문으로 되어 있으니 말하듯이 써야 한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사토 씨 본인에겐 준비하지 않고 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은 어떤 문제를――"문장의 구어화"란 문제를 품고 있다. 근대 산문은 아마 "말하듯이"의 길을 걸어 왔으리라. 나는 그 현저한 사례로서 (가깝게는) 무샤노코지 사네아츠, 우노 코지, 사토 하루오 같은 분들의 산문을 꼽아 볼 수 있다. 시가 나오야 씨도 이 사례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말투'가 서양인의 '말투'는 제쳐두더라도 옆나라인 중국인의 '말투'보다도 음악적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나는 '말하듯이 쓰고 싶다'는 바람도 물론 가지고는 있다. 하지만 또 동시에 한편으론 '쓰는 것처럼 말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나츠메 선생님은 어쩌면 실로 '쓰는 것처럼 말하는' 작가였다.(단 '쓰는 것처럼 말하는 건 즉 말하는 것처럼 쓰기 때문이다' 같은 순환 논법적인 말이 아니다.) '말하는 것처럼 쓰는' 작가는 앞에 꼽은 것처럼 존재한다. 하지만 '쓰는 것처럼 말하는 작가'는 어딘가 바다의 고독한 섬에 나타나리라. 하지만――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말하는 것'보다도 '쓰는 것'이다. 우리의 산문 또한 로마처럼 하루만에 이뤄진 게 아니다. 우리의 산문은 메이지의 과거부터 천천히 성장해왔다. 그 주춧돌을 놓은 건 메이지 초기의 작가들이리라. 하지만 그건 잠시 제쳐두고 비교적 가까운 시대를 보아도 나는 시인들이 산문에 준 힘도 알아두고 싶다.
 나츠메 선생님의 산문은 남들보다 빼어나다. 하지만 선생님의 산문이 사생문寫生文[각주:1]에 부족하다는 건 논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럼 그 사생문은 누구의 손에 있는가? 하이진 겸 비평가였던 마사오카 시키의 천재성에 있다.(시키는 비단 사생문만 아니라 우리의 산문――구어문 상에 적잖은 공적을 남겼다.) 이러한 사실을 돌아보면 타카하마 키요시, 사카모토 시호다 같은 분들 또한 역시 이 사생문의 건축자 안에 들어가야 하리라.(물론 '하이카이시'의 작가 타카하마 키요시 씨가 소설상에 남긴 족적은 별개로 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산문이 시인의 은헤를 받은 건 더욱이 가까운 시대에도 존재한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키타하라 하쿠슈 씨의 산문이다. 우리의 산문에 근대적 색채를 준 건 시집 '추억'의 서문이었다. 그런 점에선 키타하라 하쿠슈 씨 이외에 키노시타 모쿠타로 씨의 산문을 넣어도 좋다

 현대 사람들은 시인들을 파르나스 밖에 서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소설이나 희곡은 갖은 문예상 형식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들은 그들의 일 이외에 또 역시나 우리의 일에도 항상 영향을 주고 있다. 그건 비단 위에 적은 사실만이 증명하는 게 아니다. 우리와 같은 시대의 작가 중에서도 시인 사토 하루오, 시인 무로우 사이세이, 시인 쿠메 마사오 등을 들 수 있는 게 내 설을 명확히 뒷받침해주고 있다. 아니, 그러한 작가들뿐일까. 가장 소설가 다운 사토미 톤 씨마저 몇 편인가의 시를 남겼을 터이다.
 시인들은 어쩌면 그들의 고독에 약간의 한탄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되려 "명예로운 고립"이다.

     일곱 시인들의 산문

 물론 사람에게도 한계가 있는 이상 시인들의 산문은 대부분 그들의 시와 비슷한 수준으로 완성되지 않기 마련이다. 바쇼의 '오쿠노호소미치'도 역시 이 예시서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모두의 한 구절은 전편에 흘러 넘치던 사생적 흥미를 깨놓고 있다. 애당초 "해와 달은 오랜 나그네이며 흐르는 세월 또한 여행자일지니"란 첫 줄만 보아도 가벼움을 띈 후반이 앞부분의 무거움을 미처 받아내지 못한다.(산문에도 야심이 있었던 바쇼는 같은 시대의 세이가쿠의 문장을 "얄팍하게 내려가는 모습"이라 평했다. 이는 담백함을 사랑한 바쇼로서는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산문 또한 작가들의 산문에 영향을 준 건 확실하다. 설령 그게 '하이분'[각주:2]이라 불리는 그 이후의 산문을 통과해 왔다고 해도.

     여덟 시가

 일본 시인들은 현대 사람들에게 파르나스 밖에 있다고 여겨진다. 그 이유 중 절반은 현대 사람들의 감상안이 시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또 하나른 시가는 산문처럼 우리의 모든 생활 감정을 담기 어려운 데에 있다.(시는――낡은 어휘를 쓰자면 신체시는 탄카나 홋쿠보다 이런 점에서 자유롭다. 프롤레트쿨트의 시는 있어도 프롤레트쿨트의 홋쿠는 없다.) 하지만 시인들은――이를테면 현대의 카진도 이런 시도를 꾀하곤 했다. 그 현저한 사례로서 '슬픈 장난감'의 카진 이시카와 타쿠보쿠가 우리에게 남긴 일이다. 이는 아마 오늘날에는 낡은 말이 되었을 테지. 하지만 '신시사新詩社'는 타쿠보쿠 이외에도 이 '오데사의 활'을 이은 또 한 명의 카진을 낳았다. '주연'의 카진 요시 이사무 씨는 그야말로 이런 일을 했다. '주연'이 노래하는 건 하나같이 소설의 향을 두르고 있다.(혹은 심리적 묘사의 그림자를 두르고 있다.) 오오가와바타의 저녁 노을서 낭비를 느낀 요시 이사무 씨는 그런 점에서 이시카와 타쿠보쿠와――빈고와 싸운 이시카와 타쿠보쿠와 좋은 대조를 이루리라.(또 덧붙이자면 '산달래'의 아버지 마사오카 시키가 '빛나는 별'의 자식 키타하라 하쿠슈와 우리의 산문을 만들어내는데 힘을 합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이는 꼭 '신시사'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이토 모키치는 '적광' 속에서 '죽어가는 어머니', '오힐' 등의 연작을 발표했다. 그뿐 아니라 또 십여 년 전에 이시카와 타쿠보쿠가 남긴 일――소위 '생활파'의 노래를 차근차근 완성해냈다. 본래 사이토 모키치 씨의 일만큼 다종다양한 게 없다. 사이토 씨의 가집은 한 수마다 와곤, 첼로, 샤미센, 공장의 굴뚝 소리 등을 울리고 있다.(내가 말하는 건 '한 수마다'이다. '한 수 안에'가 아니다.) 만약 이대로 글을 이어간다면 나는 어느 틈엔가 사이토 모키치 씨의 이야기로 옮겨가겠지. 하지만 그건 편의상 멈춰야만 한다. 나는 아직 이 이야기를 두고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사이토 모키치 씨만큼 일 욕심이 많은 카진은 앞선 시인 중에서도 많지 않았으리라.

     아홉  두 대가의 작품

 물론 갖은 작품은 그 작가의 주관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가령 객관이라는 편의상의 꼬리표를 마련한다면 자연주의 작가 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작가는 토쿠다 슈세이 씨이다. 마사무네 하쿠초 씨는 이 점에서 대척점에 서있다 해도 좋다. 마사무네 하쿠초 씨의 염세주의는 무샤노코지 사네아츠 씨의 낙천주의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뿐 아니라 도덕적이기도 하다. 토쿠다 씨의 세계도 어두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소우주이다. 쿠메 마사오 씨가 '토쿠다스이'라 부른 동양시적정서를 가진 소우주이다. 그곳에는 설령 사바고는 있어도 지옥의 업화는 타지 않는다. 하지만 마사무네 씨는 이 지면 아래에 반드시 지옥을 엿보게 한다. 나는 분명 재작년 여름, 마사무네 씨의 작품을 모은 책을 손에 집히는 대로 독파했다. 인생의 표리를 아는 건 마사무네 씨도 토쿠다 씨에게 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받은 감명은――적어도 내가 받은 감명 중 가장 내게 다가 온 건 중세기부터 우리를 움직여 온 종교적 정서에 가까웠다.

나를 지나 그대는 시장에 들어가고
나를 지나 그대는 영원한 고통에 들어간다…… 

 (추기. 이 2, 3일을 지나 마사무네 씨의 '단테에 관해'를 읽었다. 감개가 적지 않다.)

     열 염세주의

 마사무네 하쿠초 씨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생은 항상 암담하다. 마사무네 씨는 이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종종 잡다한 '이야기'를 만들었다.(물론 마사무네 씨의 작품 중에는 '이야기' 다운 이야기 없는 소설도 적지 않다.) 심지어 그 '이야기'를 옮기기 위해서도 종종 잡다한 테크닉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재능이란 말은 당연히 마사무네 씨께 주어져야 하리라.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마사무네 씨의 염세주의적 인생관이다.
 나 또한 마사무네 씨처럼 우리 인간의 괴로움은 어떠한 사회 조직 아래서도 구원하기 어렵다고 믿고 있다. 고대의 판의 신과 닮은 아나톨 프랑스의 유토피아('하얀 돌 위에서')마저 부처가 꿈꾼 적광토 정도는 아니다. 생로병사는 애별이고와 함께 반드시 우리를 괴롭히리라. 나는 작년 가을, 도스토옙스키의 아들인지 손자인지가 아사했단 전보를 읽었을 때 특히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물론 커뮤니스트공산주의자 치하의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세상이 되어도 필시 우리 인간은 인간인 탓에 도무지 시종 행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돈이 원수다'라는 말은 봉건 시대 이래의 명언이다. 돈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이나 희극은 사회 구조의 변화와 함께 반드시 조금은 줄어들 테지. 아니, 우리의 정신적 생활도 어느 정도 변화를 받을 터이다. 만약 그런 점을 역설한다면 우리 인간의 장래는 혹은 밝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돈 때문에 일어나지 않은 비극이나 희극도 없는 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돈은 반드시 우리 인간을 희롱하는 유일한 힘이라 할 수 없다.
 마사무네 하쿠초 씨가 프롤레타리아 작가들과 입장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나 또한――나는 어쩌면 편의상의 커뮤니스트로 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본질은 어디까지나 필시 저널리스트 및 시인이다. 문예상의 작품도 언젠가는 멸망할 게 분명하다. 실제로 내가 주워 들은 바에 따르면 프랑스어의 리종마저 사라지는 이상 보들레르의 시의 울림도 저절로 희미해져 가리라.(물론 그런 건 어떻게 되어도 우리 일본인에게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한 줄의 시가 가진 생명은 우리의 생명보다도 길다. 나는 오늘도 또 내일처럼 '나태한 날의 나태한 시인'――한 명의 몽상가임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열하나 반쯤 잊힌 작가들

 우리는 적어도 돈처럼 반드시 양면을 가지고 있다. 양면 이상을 갖춘 것도 물론 결코 희소하지 않다. 서양인이 만든 '예술가로서 또 사람으로서'가 이 양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으로서' 실패함과 동시에 '예술가로서' 성공한 자는 도둑 겸 시인이었던 프랑수아 비용 만한 사람이 없다. '햄릿'의 비극도 괴테에 따르면 사상가여야 할 햄릿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 왕자였단 비극이다. 이는 또 어쩌면 양면의 대립이 이룬 비극이라 할 수 있을 테지. 우리 일본은 역사상에도 이런 인물을 지니고 있다. 정이대장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정치가로선 실패했다. 하지만 '금괴집'의 카진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에술가로서 훌륭히 성공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혹은 무언가에서 실패해본들 반드시 예술가로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 더욱이 비극적이라 해야 하리라.
 하지만 예술가로 성공했는가 아닌가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랭보를 비웃었던 프랑스는 오늘날에는 랭보에게 경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설령 오식 투성이었더라도 세 권(?)의 저자였던 건 랭보에게는 행복한 일이다. 만약 저서도 없었다면……
 나는 내 선배나 지인에게 두세 편의 좋은 단편을 썼음에도 어느 틈엔가 잊혀진 몇몇 사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의 작가보다도 어떤 힘은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연이란 건 역시 그점에 있었단 셈이다.(만약 그런 인과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작가가 있다면 그건 예외로 둘 수밖에 없다.) 그러한 작품을 모으는 건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그들을 위한 건 어찌 되었든 뒷사람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리라.
 "너무 일찍 태어났는가. 혹은 너무 늦게 태어났는가." 이는 남만 시인만의 한탄이 아니다. 나는 후쿠나가 반카, 아오키 켄사쿠, 에나미 분조 같은 사람에게도 그런 한탄을 느끼고 있다. 나는 언젠가 서양 잡지서 "반쯤 잊힌 작가들"이란 시리즈의 광고를 보았다. 나도 어쩌면 그런 시리즈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 중 하나리라. 그런 건 딱히 겸손이 아니다. 영국의 로망 주의 시대 유행아였다. '성직자' 작가 루이즈마저 역시 이 시리즈 안에 담겨 있다. 하지만 반쯤 잊힌 작가들이 꼭 과거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 작품은 하나의 작품으로 볼 때는 현대의 아무개 잡지에 실리는 작품들보다도 밀린다고는 할 수 없다.

     열둘 시적정신

 나는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와 만나 내 생각을 이야기했을 때 "그럼 네 시적 정신은 어디로 향하는 거야?"하는 질문을 받았다. 내 시적 정신은 가장 넓은 의미의 서정시를 말한다. 나는 물론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타니자키 씨는 "그런 거라면 어떤 거에나 있잖아?"하고 말했다. 나는 그때도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거에나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보바리 부인'도 '햄릿'도 '신곡'도 '걸리버 여행기'도 모조로 시적 정신의 산물이다. 어떤 사상도 문예상 작품 안에 담긴 이상 반드시 이 시적 정신의 정화浄火를 거쳐야만 한다. 내가 말하는 건 그 정화를 어떻게 태우느냐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반 이상 하늘이 내려준 재능에 따르는 일일지 모른다. 아니, 정진의 힘은 의외로 효과가 없는 걸 테지. 하지만 그 정화가 품은 열의 고저는 곧 어떤 작품이 가진 가치의 고저를 정하는 법이다.

 세계는 불후의 걸작에 질색할 정도로 충만해 있다. 하지만 어떤 작가가 죽은 후, 삼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또 우리가 읽을만한 열 편의 단편을 남겼다면 대가라 불러도 지장이 없다. 설령 다섯 편을 남겼더라도 명가의 사례에는 들어가리라. 마지막으로 세 편을 남겼다면 그럼에도 어찌 됐든 일개 작가이다. 이 일개 작가가 되는 것마저 쉽지 않다. 나는 역시나 서양 문학 잡지서 "단편이란 이삼 일 이내에 써버리는 것이다"하는 웰스의 말을 발견했다. 이삼 일은 어찌 되었든 마감일이 앞에 둔 이상은 누구라도 하루만에 쓸 수 있다. 하지만 항상 이삼일 이내에 써버린다고 단언하는 건 웰스가 웰스인 이유이다. 따라서 그는 제대로 된 단편을 쓰지 못 한다.

     열셋 모리 선생님

 나는 요즘 '모리 오가이 전집' 제6권을 독파하여 의아해졌다. 선생님의 배움이 고금을 관통하고 식자가 동서를 두루 갖춘 걸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뿐 아니라 선생님의 소설이나 희곡은 대부분 혼연히 완성되어 있다.(소위 신낭만주의는 일본에도 많은 작품을 낳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희곡 "이쿠타가와"만큼 완성된 건 많지 않을 테지.) 하지만 선생님의 탄카나 홋쿠는 아무리 좋게 봐저도 작가의 영역에 들어가 있지 않다. 선생님은 현대서 보기 드문 귀를 가진 인물이다. 이를테면 "타마쿠시게후타리우라시마"를 읽어 보면 선생님이 얼마나 일본어의 울림을 알고 있는지 엿볼 수 있으리라. 이는 또 선생님의 탄카서나 홋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동시에 체제라는 측면에서도 하나같이 질서 있게 완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는 선생님으로선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의 탄카나 홋쿠는 무언가 미묘한 것을 잃고 있다. 시가는 그 미묘함만 잡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서투름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선생님의 탄카나 홋쿠는 교묘하기는 하나 신기하리만치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다. 이는 선생님께 탄카나 홋쿠가 여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 미묘함은 선생님의 희곡이나 소설서도 역시나 또렷이 드러나 있지 않다.(이게 꼭 선생님의 희곡이나 소설이 무가치하단 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나츠메 선생님의 여흥이었던 한시는――특히 말년의 홋쿠는 저절로 이런 미묘함을 갖추는데 성공하고 있다.(만약 '편협함'이란 비웃음을 받는 걸 신경 쓰지 않는다며는.)
 나는 이런 생각을 거듭한 끝에 필시 모리 선생님은 우리처럼 신경질적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혹은 시인보다 다른 무언가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부에 츄사이"를 쓰신 모리 선생님은 앞서 찾아 볼 수 없는 대가였음이 분명하다. 나는 그런 모리 선생님께 공포에 가까운 경의를 느끼고 있다. 아니 혹은 쓰지 않았더라도 선생님의 기력은 총명함과 함께 나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는 언젠가 모리 선생님의 서재서 일본옷을 입은 선생님과 이야기했다. 넓은 서재 구석에는 산지 얼마 안 된 듯한 돗자리 한 장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좀 먹기 시작한 듯한 낡은 편지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이번에 리츠잔(?)의 편지를 모아 책으로 낸 사람이 왔었네. 나는 그 책이 아주 잘 만들어졌다, 단지 편지가 연대순이 아닌 게 아깝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 사람은 일본 편지에는 아쉽게도 일자가 적혀 있지 않아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건 도무지 불가능하단 대답을 했지. 그리고 나는 이 낡은 편지를 가리키고 여기에 호죠 카테이의 편지가 몇 십 개인가 있다. 심지어 모두 연대순으로 놓았다고 말했지."! 나는 당시의 선생님께서 기세등등 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그런 선생님을 보고 눈을 크게 뜬 게 필시 나 한 명은 아닐 테지. 하지만 솔직히 자백하자면 나는 아나톨 프랑스의 "잔 다르크"보다도 되려 보들레르의 한 줄을 남기고 싶은 사람이다.

     열넷 시라야나기 슈코 씨

 나는 또 요즘 시라야나기 슈코 씨의 '소리 없이 듣다'라는 문집을 읽고 '나의 미학', '수치심 고찰', '동물의 발정기와 음식의 관계' 등의 소논문에 적잖은 관심을 느꼈다. '나의 미학'은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시라야나기 씨의 미학이며 '수치심 고찰'은 시라야나기 씨의 윤리학에 해당한다. 뒤에 건 제쳐두고 전자만 잠시 소개하자면 아름다움이란 우리 생활과 무관계한 것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우리의 선조는 모닥불을 사랑하고 숲에 흐르물을 사랑하고 고기를 담는 토기를 사랑하고 적을 쓰러트리는 봉을 사랑했다. 아름다움은 이러한 생활 필수품(?)에서 저절로 만들어진다……
 그런 소논문은 적어도 내게는 현대에 많은 꽁트보다도 훨씬 존경할만 했다.(시라야나기 씨는 이 소논문의 말미에 이는 "문단의 한 구석에서 나오는 미학을 외치는 목소리 혹은 그를 다룬 번역이 드러나기 이전'에 썼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 나는 미학 따위 전혀 알지 못 한다. 하물며 물미학 같은 건 더욱이 인연이 없는 중생이다. 하지만 시라야나기 씨가 말하는 아름다움의 발생론은 내게도 내 미학을 만들 기회를 주었다. 시라야나기 씨는 조형 미술 이외의 아름다움의 발생을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십 년도 더 전에 어떤 산속 여관서 사슴의 목소리를 드리고 어쩐지 절절히 사람이 그리워지는 걸 느꼈다. 갖은 서정시는 이 사슴 목소리에――암컷을 찾는 수컷의 목소리에 불이 붙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 물질적 미학은 하이진은 물론 멋 옛날의 카진마저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단지 서사시에 한해서는 확실해 태고 백성의 가십에 기원을 두고 있으리라. "일리아스"는 신들의 가십이다. 또 그 가십은 우리에겐 야만한 장엄으로 가득 찬 아름다움을 느끼게 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우리에게는'이다. 태고의 백성은 '일리아스'서 그들의 기쁨이나 슬픔,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뿐 아니라 그 안에서 그들의 마음이 불타 오르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으리라……
 시라야나기 슈코 씨는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 선조의 생활을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뿐이 아니다. 미국의 사막에 도심이 만들어질 적에는 우리는 자손의 선조가 되리라.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마치 지하의 연못처럼 우리의 자손에게도 전해지리라. 나는 시라야나기 씨처럼 모닥불에 친근함을 느낀다. 또 동시에 그 친근함 속에서 태고의 백성을 떠올린다.(나는 '아리가타케 기행' 속에 작게 이런 내용을 썼다.) 하지만 '원숭이에 가까운 우리의 선조'는 그들의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어느 정도 고심을 했을까. 모닥불을 태우는 걸 발명한 건 물론 천재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모닥불을 태워 온 것 역시 몇몇인가의 천재들이다. 나는 이 고심을 떠올렸을 때 불행히도 '지금의 예술 따위 없어도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열다섯 "문예평론"

 비평 또한 문예상의 한 형식이다. 우리를 칭찬하거나 욕하는 것도 필시 자기표현을 위한 일일 테지. 막 위에 떠오른 미국 배우에게――심지어는 죽어버린 발렌티노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 건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호의를――나아가서는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만약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라면……
 어쩌면 소설이나 희곡도 서양인의 작품에 크게 못 미칠지 모른다. 하지만 비평 또한 서양인의 작품에 비해 부족한 것도 분명하다. 나는 이러한 조잡함 속에서 단지 마사무네 하쿠초 씨의 "문예평론"을 애독했다. 비평가 마사무네 하쿠초 씨의 태도는 서양인의 말을 빌리자면 철두철미한 라코닉laconic이다. 그뿐 아니라 "문예평론"은 꼭 문예평론이라곤 할 수 없다. 때로는 문예 속 인생 평론이다. 심지어 나는 담배를 한 손에 들고 "문예평론"을 애독했다. 이따금 돌이 굴러다니는 일직선 길을 떠올리면서 또 그 일직선의 길에 드는 햇빛서 잔혹한 기쁨을 느끼며.


     열여섯 문학적 미개척지

 영국은 꽤나 오랫동안 등한시되어 온 18세기 문학에 주목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전 후에는 누구나 밝은 걸 찾기 때문이리라.(나는 몰래 온 세계가 똑같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또 동시에 대전에 타격을 받지 않은 일본마저 언젠가 이 유행에 전염된 것도 신기해하고 있다.) 하지만 또 하나로는 등한시되어 있었기에 문학자들의 연구에 소재를 주기 쉬운 덕도 있으리라. 참새는 쌀이 없는 곳에는 날아오지 않는다. 문학자들도 마찬가지리라. 따라서 등한시되어 왔단 사실만으로도 이미 발견된 셈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하이카이데라 잇사는 어찌 되었든 텐메이 이후의 하이진들은 거의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그런 하이진들도 서서히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그것도 '평범하다'는 말로는 치부할 수 없는 일면도 서서히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등한시된다는 것도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열일곱 나츠메 선생님

 나는 언젠가 나츠메 선생님께서 풍류 소세키 산인이 된 것에 감탄했다. 내가 알던 선생님은 재기발랄한 노인이다. 그뿐 아니라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선배인 아무개 씨는 어찌 되었든 후진인 나 따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호라, 천재란 게 이런 건가 싶었던 적도 있었다. 언젠가 겨울에 가까운 목요일 밤, 선생님은 손님과 이야기하면서 내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담배 좀 줘봐"하고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담배가 어디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는 도리 없이 "어디 있나요?"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아무 말도 않고 거칠게(이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턱을 오른쪽으로 저으셨다. 나는 머뭇머뭇 오른쪽을 바라보았고 겨우 손님방 구석 책상 위에 놓인 담배 상자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문", "행인", "한눈팔기" 등은 하나같이 선생님의 정열이 낳은 작품이다. 선생님은 정취 있게 사셨을지도 모른다. 또 실제로 조금은 정취 있게 사셨을 테지. 하지만 우리가 아는 말년마저 결코 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물며 "명암" 이전에는 좀 더 사나우셨을 게 분명하다. 나는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신랄하기 짝이 없는 감개를 새로이 쓰고 있다. 하지만 상담할 일이 있었을 때 선생님은 속이 괜찮으셨는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딱히 자네한테 할 충고는 없는데. 단지 내가 자네 입장이었다면……" 나는 사실 이때 선생님께서 턱을 까딱거리셨을 때보다도 더 곤란해할 수밖에 없었다.

     열여덟 메리메의 서란집

 메리메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었을 때 '초월적인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낭만주의자인 메리메인 만큼 '보바리 부인'을 보고 그렇게 느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메리메의 서란집(누구인지 모를 여자에게 쓴 연애편지집)은 여러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를테면 파리에서 쓴 두 번째 편지에――
 르 상 오놀레에 빈곤한 여자 하나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볼품없는 다락방을 거의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또 열두 살 먹은 딸 한 명을 두고 있었다. 그 소녀는 오후부터 오페라서 일하고 대부분은 한밤중에 돌아왔다. 어느 밤에 소녀는 문지기의 방을 찾아 "촛대에 불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문지기의 부인은 소녀를 따라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그 빈곤한 여자는 시체가 되어 누워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소녀는 낡은 트렁크에서 꺼낸 편지 한 다발을 태우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늘 돌아가셨어요. 이건 어머니가 죽기 전에 읽지 말고 태우라 하신 편지고요"――소녀는 문지기의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다. 소녀는 아버지의 이름도 모를뿐더러 어머니의 이름도 몰랐다. 심지어 살길이라고는 단지 오페라서 일하며 원숭이가 되거나 악마가 되는 등 자그마한 단역을 맡는 거뿐이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교훈으로 "한사코 단역이어라 또 선량하여라"라고 말했다. 딸은 지금도 그 교훈대로 선량히 단역만을 맡고 있다.
 또 하나 시골 이야기를 인용하자면 이번에는 칸에서 쓴 편지에――
 글래스에 가까운 어느 농부 하나가 계곡 밑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전날 밤에 굴러떨어졌거나 누가 내던졌으리라. 그러자 같은 동료 농부 중 한 명이 그의 친구에게 자신이 살인범이라 공언했다. "왜 그런 짓을 했어?" "그 남자는 내 양을 저주했어. 나는 내 양치기를 교육해 못 세 개를 냄비에 달여 주문을 외었지. 그리고 그날 밤 그 남자가 죽은 거야"……
 이 서란집은 1840년부터 1870――메리메가 사망한 해까지 걸쳐져 있다. (그의 '카르멘'은 1844년 작품이다.) 이런 이야기 자체는 소설이라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티브를 잡으면 소설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모파상은 어찌 되었든 필립은 그런 이야기에서 몇 개의 아름다운 단편을 쌌다. 우리는 물론 쵸규가 말한 것처럼 "현대를 초월"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는 의외로 짧은 법이다. 나는 메리메의 서란집 안에서 그가 떨어트린 싹을 발견했을 때 이런 걸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메리메는 이 누구인지 모를 여자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할 적부터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또 죽기 전에는 신교도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또한 내게는 니체 이전의 초인숭배가였던 메리메를 생각하면 조금의 흥미를 느끼고는 한다.

     열아홉 고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 것 이외엔 쓸 수 없다. 고전 작가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교수들은 문예평론을 할 때 항상 이 사실을 등한시하고 있다. 물론 이게 꼭 교수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말년에 " 템페스트"를 쓴 셰익스피어에게 동정에 가까운 걸 느끼고 있다.

     수물 저널리즘

 다시 한 번 사토 하루오 씨의 말을 인용하자면 "문장은 말하듯이 쓰라"고 한다. 나는 실제로 이 문장을 말하듯이 썼다. 하지만 아무리 써도 말하고 싶은 걸 다 해낼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나는 실로 이런 점에서 저널리스트라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직업적 저널리스트를 형제라 여기고 있다.(물론 상대가 됐다고 하면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다.) 저널리즘이란 필시 역사이리라.(신문기사에 오보가 있는 것도 역사에 잘못 전해진 게 있는 것과 같은 일이다.( 역사는 또 필시 전기이리라. 그렇다면 또 그 전기는 소설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실제로 자서전은 '사소설'이란 것과 또렷한 차이를 두고 있지 않다. 잠시 크로체의 논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서정시 등의 시가를 예외로 삼는다면 갖은 문예는 저널리즘이다. 그뿐 아니라 신문 문예는 메이지 타이쇼 두 시대에 소위 문학적 작품에 손색없는 작품을 남겼다. 토쿠토미 소호, 쿠가 카츠난, 쿠로이와 루이코, 치즈카 레이스이 같은 사람들의 작품은 어찌 되었든 야마나카 미세이 씨가 쓴 통신마저 문학적으로는 현대에 많은 갖은 잡지의 잡문보다 못 할 게 없다. 그뿐 아니라――
 그뿐 아니라 신문 문예의 작가들은 그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기에 이름마저 전해지지 않은 경우도 많다. 실제로 나는 이런 사람들 중에서 두세 명의 시인들을 알고 있다. 나는 평생의 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의 작품도(나는 작가의 이름을 알지 못 했더라도) 내게 시적 감격을 주는 한 역시 저널리스트 겸 시인인 오늘날의 내게는 은인이다. 나를 작가로 만든 우연은 역시 그들을 저널리스트로 만들었다. 만약 종이봉투에 담긴 월급 이외에 원고료를 받을 수 있는 걸 행복이라 한다면 나는 그들보다 행복하다.(헛된 명성은 행복이 될 수 없다.) 그런 점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들과 직업적으로 어떤 차이도 지니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저널리스트였다. 오늘도 또한 저널리스트이다. 장래도 물론 저널리스트이리라.
 하지만 그러한 대가들은 또 몰라도 나는 이 저널리스트란 천직에 이따금 질색을  하는 건 사실이다.

 (쇼와 2년 2월 26일)

 

     스물하나 마사무나 하쿠쵸의 '단테'

 마사무네 하쿠초 씨의 단테론은 앞사람의 단테론을 압도하고 있다. 적어도 독특하단 점에선 크로체의 단테론에도 밀리지 않을지 모른다. 나는 그 논의를 애독했다. 마사무네 씨는 단테의 '아름다움'에는 거의 눈을 감고 있다. 그건 어쩌면 의도된 일이리라. 또 어쩌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 걸지도 모른다. 고 우에다 빈 박사도 단테의 연구가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신곡'을 번역하였다. 하지만 박사의 원고를 보면 이탈리어 원문을 번역한 게 아니다. 그 메모가 보여준 것처럼 케리가 영어로 번역한 걸 번역한 것이다. 케리의 영역판을 의존하면서 단테의 '아름다움'을 운운하는 건 어찌 보면 우습게 보일지 모른다.(나 또한 케리의 영역판 이외엔 읽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단테의 '아름다움'은 케리의 영역판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건 분명하다……
 또 '신곡'의 일면이란 단테 말년의 자기변호이기도 하다. 공금 횡령의 의혹을 받은 단테는 역시나 우리처럼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단테가 이른 천국도 내게는 조금 지루하다. 그건 우리가 사실상의 지옥을 걷고 있기 때문일까? 혹은 단테 또한 정죄계 밖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모두 초인이 아니다. 그 듬직한 로댕마저 명성 높은 발자크상을 만들어 세간의 악평을 받았을 때에는 신경적으로 괴로워했다. 고향에서 쫓겨난 단테 또한 신경적으로 괴로워했을 게 분명하다. 특히 사후 유령이 되어 그의 아들에게 나타났다는 건 어느 정도 단테의 체질을――그의 아들에게 유전된 단테의 체질을 보여주리라. 단테는 실제로 스트린드베리처럼 지옥 밑바닥에서 탈출했다. 실제로 '신곡'의 정죄계는 치료 후의 환희에 가까운 걸 품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건 단테의 피부 아래 한 장에도 미치지 못 했으리라. 마사무네 씨는 논문 안에서 단테의 뼈와 살을 음미하고 있다. 그 논문 안에 담긴 건 13세기도 아닐 뿐더러 이탈리아도 아니다. 단지 우리 안에 있는 사바계이다. 평화를, 단지 평화를――이는 비단 단테만 바란 게 아니다. 또 동시에 스트린드베리의 바람이었다. 나는 마사무네 씨가 단테를 올려다보지 않고 그저 단테를 본 사실을 사랑하고 있다. 베아트리체는 마사무네 씨가 말하는 것처럼 여성보다도 천인에 가깝다. 만약 단테를 읽은 후 눈앞에서 베아트리스와 만난다면 우리는 반드시 실망하리라.
 나는 이런 문장을 쓰는 사이에 문득 괴테를 떠올렸다. 괴테가 그린 프리데리케는 가련 그 자체이다. 하지만 본의 대학교수 네이케는 프리데리케가 반드시 그런 여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발표했다. Düntzer 같은 이상주의자들은 물론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괴테 자신도 네이케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프리데리케가 살고 있던 Sesenheim 마을 또한 괴테가 그린 것하고는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Tieck은 일부러 이 마을을 찾았다가 "후회했다"고 전하고 있다. 베아트리체도 또 마찬가지이리라. 하지만 그런 베아트리체는 베아트리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한들 단테 자신은 드러내고 있다. 단테는 말년에 이르러서도 소위 '영원한 여성'을 꿈꿨다. 하지만 소위 '영원한 여성'은 천국 이외엔 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천국은 '하지 않은 일의 후회'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지옥 불속에 '한 일의 후회'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나는 단테론을 읽는 사이에 철가면 아래에 놓인 마사무네 씨의 두 눈의 색을 느꼈다. 옛사람은 "君看双眼色그대여, 그 두 눈동자를 보라 不語似無愁아무 말 없으면 어떤 불안도 없어 보인다"하고 말했다. 역시 마사무네 씨의 두 눈의 색도――하지만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마사무네 씨는 어쩌면 이 두 눈도 의안일지 모른다.

     스물둘 치카마츠 몬자에몬

 나는 타니자키 준이치로, 사토 하루오 두 사람과 함께 오랜만에 인형 연극을 보러 갔다. 인형은 배우보다 아름답다. 특히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단아하다. 하지만 인형을 쓰는 쿠론보는 꺼림칙하다. 실제로 고야는 인물 뒤에 이따금 저런 걸 덧붙였다. 우리도 어쩌면 저런 것에――꺼림칙한 운명에 휩싸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인형보다도 치카마츠 몬자에몬이다. 나는 코하루 지헤이를 보는 사이에 새삼스럽게 치카마츠를 떠올렸다. 치카마츠는 사실주의자인 세이가쿠에 비해 이상주의자에 이름이 걸려 있다. 나는 치카마츠의 인생관을 모른다. 치카마츠는 혹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우리의 작음을 한탄했으리라. 혹은 또 날씨를 보고 다음 날을 걱정했으리라. 하지만 그건 오늘날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게 분명하다. 단지 치카마츠의 쥬루리를 보면 치카마츠는 결코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이상주의자는――이상주의자란 대체 무엇인가? 세이카쿠는 문예상의 사실주의자이다. 또 동시에 인생관상의 현실주의자이다.(적어도 작품에 따르면) 하지만 문예상의 사실주의자가 꼭 인생관상의 현실주의자는 아니다. 아니, '보바리 부인'을 쓴 작가는 문예상으로도 또 낭만주의자였다. 만약 꿈을 추구하는 걸 낭만주의라 부른다면 치카마츠 또한 낭만주의자리라. 하지만 또 일면에는 역시 듬직한 사실주의자이다. "코하루 지헤이"의 카와치야에서 간지로의 모습을 죽여라.(이를 위해서는 분락을 보라.) 그 후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인생의 구석구석에 눈을 준 사실주의자적 희곡이다. 확실히 거기엔 겐로쿠 시대의 서정시도 섞여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서정시를 지닌 것을 낭만주의자로 부른다면――드 릴의 말에 거짓은 없다. 우리는 바보만 아니면 누구나 낭만주의자가 되는 셈이다.
 겐로쿠 시대의 희곡적 수법은 오늘날보다 조금 자연스럽지 않다. 하지만 겐로쿠 시대 이후의 희곡적 수법보다는 훨씬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그런 수법을 제쳐둔다면 "코하루 지헤이"는 심리 묘사상으론 결코 사실주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치카마츠는 그들의 관능주의나 에고이즘에도 눈을 두고 있다. 아니, 그들 속에 있는 무언가 신비한 것에도 눈을 두고 있다.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게 꼭 타헤이의 악의만은 아니다. 오산 부자의 선의 또한 역시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치카마츠는 번번이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비교된다. 그건 종래 사람들의 설보다 한 층 더 셰익스피어적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치카마츠는 셰익스피어처럼 이지를 초월해냈다.(라틴 인종의 희곡가 모리엘의 이지를 떠올려 봐라.) 또 희곡 안에 아름다운 한줄을 흩뿌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극 속에도 희극적 광경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코타츠 속 거지 스님을 보면서 명성 높은 '맥베스' 속 주정뱅이를 떠올렸다.
 치카마츠의 세와모노는 타카야마 쵸규 이래로 시대 위에 놓여 있다. 하지만 치카마츠는 시대물 속에서도 낭만주의자에만 철두철미한 건 아니었다. 이 또한 조금은 셰익스피어적이다. 셰익스피어는 로마 도시에 시계를 두고 돌아보지 않았다. 치카마츠도 시대를 무시하는 건 셰익스피어 이상이다. 그뿐 아니라 신화 시절의 세계마저 모조리 겐로쿠 시대로 만들었다. 그러한 인물도 심리표현상으론 의외로 이따금 현실주의적이다. 이를테면 "일본 후리소데의 시작"마저 코탄소탄 형제의 다툼은 세와모노의 한 장면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코단의 아내의 심리나 아버지를 죽인 후의 코단의 심리는 아마 현대에도 통용되리라. 하물며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연애는 유사 이래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XX이다.
 치카마츠의 시데물은 세와모노보다 물론 황당무계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세와모노에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일본 남부의 해안가에 우연히 떠오른 배 안에 중국 미인이 있는 광경을 상상하라.(국성야합전) 그건 우리 자신의 이국 취미에 아직도 어떠한 만족을 주리라.
 타카야마 쵸규는 불행히도 이러한 특색을 무시하고 있다. 치카마츠의 시대물은 세와모노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지 않다. 단지 우리는 봉건 시대의 거리를 비교적 가깝게 느낄 뿐이다. 겐로쿠 시대의 카와쇼는 메이지 시대의 요정에 가깝다. 코하루는――특히 배우가 연기하는 코하루는 메이지 시대의 게이샤와 닮아 있다. 그런 사실은 치카마츠의 세와모노서 여실히 느끼기 쉽다. 하지만 몇 백 년인가 지난 후――즉 봉건 시대의 거리마저 꿈 속의 꿈으로 변한 후, 치카마츠의 쥬루리를 돌아보면 우리는 시대물이 꼭 아래에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그뿐 아니라 시대물의 한면에는 역시 세와모노와 같은 시대의 다이묘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심지어 세와모노 만큼 여실하단 느낌을 주지 않는 건 봉건 시대의 사회 제도가 우리를 다이쇼의 생활과 거리가 멀게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홉 구름이 낀 곳에 살던 사람마저 치카마츠의 쥬루리는 신기하리만치 애독했다. 그건 치카마츠의 출신 때문이거나 혹은 거리의 완성도에 호기심을 갖게 된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치카마츠의 시대물에서 겐로쿠 시대의 상류 계층을 느낄 수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인형 연극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인형 연극은 쇠퇴중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쥬루리 또한 원작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다. 하지만 내게는 연극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스물셋 모방

 서양인은 일본인이 모방에 뛰어난 걸 경멸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본인의 풍속이나 습관(혹은 도덕)이 우스운 걸 경멸하고 있다. 나는 호리구치 쿠마이치 씨가 소개한 "유키 씨"라는 프랑스 소설의 개요를 읽고('죠세이' 3월호 게재) 새삼스럽게 이 사실을 떠올렸다.
 일본인은 모방이 뛰어나다. 우리의 작품도 서양인의 작품을 모방한 건 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역시 모방에 뛰어나다. 휘슬러는 유화 위에 우키요에를 모방하지 않았나? 아니, 그들은 그들끼리도 역시 모방하고 있다. 또 더욱이 과거로 올라가면 위대한 중국은 그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선례를 남겼던가? 그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모방은 '소화'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화'라고 한다면 우리의 모방 또한 '소화'이다. 같은 수묵을 쓰더라도 일본의 남가는 중국의 남화가 아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노점에 말 그대로 돈카츠를 소화하고 있다.
 심지어 모방을 편의라고 한다면 모방해서 나쁠 게 무엇인가. 우리는 선조에게 이어받은 명도를 휘두르며 그들의 탱크나 독가스와 싸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물질적 문명은 설령 필요 없을 때마저 저절로 모방을 강요하고 만다. 실제로 고대에 그렇게나 서로를 경멸하던 그리스와 로마 같은 온대 기후의 백성마저 이제는 북적이 고안한 추위를 버티는데 좋은 양복을 쓰고 있다.
 우리의 풍속이나 습관이 그들에게 우습게 보이는 것 또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들은 우리의 미술에는――특히 공예 미술에는 이미 약간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건 단지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정이나 사상은 쉽게 보이는 게 아니다. 에도 말기의 영국 공사였던 Sir Rutherford Alcock 뜸을 놓는 아이를 보고 우리는 미신 때문에 자신을 괴롭힌다고 비웃었다. 우리의 풍속이나 습관 속에 담긴 감정이나 사상은 오늘날에도――코이즈이 야쿠모를 배출한 오늘날에도 역시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풍속이나 습관에 물론 웃음이 나오리라. 또 동시에 그들의 풍속이나 습관 또한 우리에게는 우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에드거 포는 음주가란 이유로(혹은 음주가였는지 어떤지 모른단 이유로) 사후의 명성을 잃고 말았다. "이백일두시백편"을 자랑하는 일본에서는 이만큼 우스운 일은 없다. 이렇게 서로를 경멸하는 건 피하기 어려운 사실인 동시에 역시나 슬픈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서도 이러한 비극을 느끼곤 한다. 아니, 우리의 정신적 생활의 대부분은 낡은 우리와 새로운 우리의 싸움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어느 정도 그들을 양해하고 있다.(이는 어쩌면 우리에겐 되려 불명예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들은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우리는 미개인이다. 심지어 일본에 살고 있는 그들이 반드시 그들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아마 세계를 지배하는 그들의 샘플로 삼기에는 부족한 것일 테지. 하지만 우리는 마루젠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그들의 혼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 덧붙이자면 그들 또한 본질적으로는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그들도 함께한) 모두 세계란 방주에 올라탄 인간수의 한 무리이다. 심지어 이 방주 안은 결코 밝지 않다. 특히 우리 일본인의 객실은 번번히 대지진을 마주하게 된다.
 호리구치 쿠마이치 씨의 소개는 아쉽게도 아직 완결 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호리구치 씨에게 해야 할 비평도 실리지 않았다. 단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에 일단 펜을 움직여 보았다.

     스물넷 대작 변호

 "고대 화가는 걸출한 제자를 적잖이 배출했다. 하지만 근대 화가는 지니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돈 때문에 혹은 높은 이상 때문에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고대의 작가가 제자를 가르친 건 대작代作을 만들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기교상의 비밀도 모조리 제자에게 전수된 것이다. 제자가 걸출한 것도 이상할 게 없다"――이러한 사뮤엘 바틀러의 말은 일면으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천직의 재능이란 게 그런 경위로만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촉발된 경우도 많으리라. 나는 얼마 전 플로베르가 모파상을 가르치는데 얼마나 깊고 절실했는지를 알았다.(그는 모파상의 원고를 읽어줄 때에 연속된 두 문장이 같은 구조인 것마저 깐깐하게 따졌다.) 하지만 그런 걸 누구에게나 바랄 수는 없다.(설령 제자에게 재능이 있더라도.)
 오늘의 일본은 예술마저 대량생산을 요구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작가 본인도 대량생산하지 않고선 먹고 입는 것조차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양적 향상의 대부분은 질적 저하이다. 그럼 고대인이 한 것처럼 제자에게 대작을 맡기는 것도 혹은 수많은 재능인을 낳는 일이 될지 모른다. 봉건 시대의 대중작가는 물론이요 메이지 시대의 신문 소설가도 이런 편한 방법을 이용했다 미술가는――이를테면 로댕 역시 부분적으로는 제자에게 자신의 작품을 만들게 했다.
 그러한 전통을 가진 대작은 어쩌면 앞으로는 이뤄질지 모른다. 그뿐 아니라 그게 꼭 한 시대의 예술을 속되고 나쁘게 한다고는 할 수 없다. 제자는 테크닉을 배운 후 지장해도 물론 문제가 없다. 혹은 이대째, 삼대째로 이름을 물려받는 것도 가능하리라.
 나는 아직 불행히도 대작을 받을 기회를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타인의 작품을 대작할 수 있단 자신은 가지고 있다. 유일하게 어려운 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대작하는 건 자작보다도 더 번거로운 일이란 정도다.

     스물다섯 센류

 "센류"란 일본의 풍자시이다. 하지만 "센류"가 경시 당하는 건 비단 풍자시이기 때문은 아니다. 되려 "센류"란 이름이 너무나 에도 정취를 두른 탓에 무언가 문예가 아닌 다른 걸로 보이는 탓이다. 오래된 센류가 홋쿠에 가까운 건 어쩌면 누구나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분 아니라 홋쿠 또한 한 면에는 센류에 가까운 걸 품고 있다. 그 가장 현저한 사례는 "우즈라고로모"(?)의 초판에 있는 요코이 야유의 렌쿠이리라. 그 렌쿠는 포르노그래픽한 센류집――"스에츠무하나"와 비할 바가 없다.

 쉽게 드리워 연꽃에 담겨버린 여명일까나

 이러한 센류가 홋쿠에 가까운 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연꽃이란 물론 조화 연꽃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후대의 센류도 모두 속되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한 것도 또 봉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그들의 기쁨이나 슬픔을 해학 안에 드러내고 있다. 만약 그러한 게 속되고 나쁜 것이라면 현대의 소설이나 희곡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코지마 마사지로 씨는 이전에 센류 속에서 관능적 묘사를 지적했다. 후대는 혹은 센류 속의 사회족 괴로움을 지적할지 모른다. 나는 센류에는 문외한이다. 하지만 센류도 서정시나 서사시처럼 언젠가 파우스트 앞을 지나리라. 물론 에도에서 전해진 여름 하오리를 입은 채로.

 마음보다 시인 내가
 기뻐하는 걸 그대 알까
 홀로 물으니
 바라자면 말로 노래해보라.


     스물여섯 시의 형태

 동화 속 왕녀는 성 안에서 몇 년이나 조용히 잠들어 있다. 탄카나 하이쿠를 제외한 일본의 시의 형태도 역시 동화 속 왕녀와 다를 바가 없다. 만요슈 속의 쵸카는 어찌 되었든 사이바라도 헤이케이모노가타리도 요곡도 쥬루리도 운문이다. 그 안에는 분명 수많은 시의 형태가 잠들어 있을 게 분명하다. 단지 행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요곡은 저절로 오늘날의 시에 가까운 형태를 드러낸다. 그곳에는 반드시 우리의 말에 필연적인 운문이 있으리라. (오늘날 민요로 칭하는 건 적어도 대부분은 시형상으론 도도이츠와 차이가 없다.) 이 잠들어 있는 왕녀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즐거운 일이다. 하물며 왕녀를 깨우는 건 어떨까.
 물론 오늘날의 시는――더욱이 고풍스러운 표현을 쓰자면 신체시는 저절로 이러한 길에 걸음을 옮길지 모른다. 또 오늘날의 감정을 담기에 지난날의 시의 형태는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과거의 시의 형태를 반드시 담습하란 게 아니다. 단지 그러한 시의 형태 속에 무언가 목숨이 담겨 있는 걸 느끼는 것이다. 또 동시에 그 무언가를 지금보다도 의식적으로 움켜쥐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점에서나 격렬한 과도기에 삶을 의탁하고 있다. 따라서 모순에 모순을 거듭하고 있다. 빛은――적어도 일본에선 동쪽보다 서쪽에서 올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에서도 오는 셈이다. 아폴리네르의 연작체 시는 겐로쿠 시대의 렌쿠와 비슷하다. 그뿐 아니라 몇 단계는 덜 완성되어 있다. 이 왕녀를 깨우는 건 물론 누구나 가능한 게 아니다. 하지만 한 명의 스윈번만 나오면――보다 정확히는 더 역량이 큰 한 사람의 "카타우타의 길을 지키는 자"만 나온다면……
 일본의 과거 시 안에서는 인연이 움직이고 있다. 무언가 서로 울리는 게――나는 그 무언가를 포착하는 건 물론이요 그 무언가를 낳을 수 없는 한 사람이리라. 하지만 그 무언가를 느끼는 건 남보다 못하지 않다 믿는다. 이런 건 문예상으론 말석의 말석일지 모른다. 단지 나는 그 무언가에――희미한 인연의 무언가에 신기하리만치 마음이 끌린다.

     스물일곱 프롤레타리아 문예

 우리는 시대를 초월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계급을 초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톨스토이는 여자를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외설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건 또 고리키를 질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고리키는 프랭크 해리스와 대담 중에 "나는 톨스토이보다 예의를 중시한다. 만약 톨스토이를 배웠다 말한다면 그들은 그걸 내 태생 때문이라――백성으로 자랐기 때문이라 해석하리라."하고 정직하게 진심을 이야기했다. 해리스는 또 그 말에 "고리키가 아직 백성이란 건 이 점에서――즉 백성을 부끄러워하는 점에서 드러난다"고 주석을 달았다.
 중산 계급이 혁명가를 몇이나 낳은 건 분명하다. 그들은 이론이나 실행하는데 자신들의 이상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들의 혼은 과연 중산 계급을 초월했던가?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에 반역했다. 심지어 그의 일을 방해하는 악마의 모습을 목격했다. 그의 이지는 새로웠으리라. 그의 혼은 역시 로마 가톨릭의 지옥을 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는 종교상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사회 제도상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혼에 계급의 각인이 새겨져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는 건 반드시 계급뿐만이 아니다. 지리적으로도 크게는 일본부터 작게는 한 시의 한 마을까지 우리의 출생지도 우리를 구속한다. 다른 유전이나 환경 등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잡함에 한탄할 수밖에 없으리라.(심지어 우리를 구성한 게 우리의 의식 속으로 올라온다는 보장이 없다.)
 칼 마르크스는 어찌 되었든 과거부터 이어진 여성 참정권론자들은 하나같이 좋은 아내를 두고 있었다. 과학상의 산물마저 그러한 조건을 보이고 있다면 예술상 작품은――특히 예술상의 작품은 갖은 조건을 보여주는 셈이다. 우리는 제각기 다른 날씨 아래나 제각기 다른 땅 위에 싹튼 풀과 다를 바가 없다. 또 동시에 우리의 작품도 무수한 조건을 갖춘 풀의 열매이다. 만약 신이 본다면 우리의 작품 중 한 편에 우리의 모든 평생을 보여주고 있으리라.
 프롤레티리아 문예는――프롤레타리아 문예는 무엇일까? 물론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프롤레타리아 문명 속에 꽃을 피운 문예이다. 이건 오늘날 일본에는 없다. 또 다음으로 생각하는 건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싸우는 문예이다 이건 일본에 없지 않다.(만약 스위스라도 옆 나라였으면 좀 더 생겼으리라.) 또 생각해 볼 법한 건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를 지니지 않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적 혼을 뿌리에 둔 문예이다.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문예는 물론 세 번째 프롤레타리아 문예와 반드시 양립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새로운 문예를 낳는다면 그건 이 프롤레타리아적 혼이 낳은 문예여야 한다.
 나는 스미다가와의 입구에 서서 범선이나 달마선이 모이는 걸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오늘날 일본에 어떤 표현도 지니지 않은 '생활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생활시'를 노래하는 건 이러한 생활자를 지녀야 한다. 적어도 이러한 생활자가 줄곧 동반해줘야 할 터이다.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 사상을 작품 안에 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작품 속에 석탄처럼 검게 빛나는 시적 장엄을 주는 건 필시 프롤레타리아적 혼뿐이다. 어린 나이에 죽은 필립은 실로 이러한 혼의 소유주였다.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서 부르주아의 비극을 그렸다. 하지만 부르주아를 대하는 플로베르의 경멸이 '보바리 부인'을 불멸로 만든 게 아니다. '보바리 부인'을 불멸로 만든 건 단지 플로베르의 수완뿐이다. 필립은 프롤레타리아적 혼 외에도 잘 단련된 수완을 지니고 있다. 그럼 어던 예술가도 완성을 목표로 걸어야 한다. 갖은 완성된 작품은 방해석처럼 결정을 맺은 채로 우리 자손의 유산이 된다. 설령 풍화 작용을 받더라도.

     스물여덟 쿠니키다 돗포

 쿠니키다 돗포는 재능이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서투른'이란 말은 들어 맞지 않는다. 돗포의 작품은 어떤 걸 보아도 서투르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정직한 사람', '순사', '대나무 문', '비범한 범인'……하나같이 솜씨 좋게 만들어져 있다. 만약 그를 서투르다 말한다면 필립 또한 서투르리라.
 하지만 돗포가 '서투르다'는 말을 들은데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소위 희곡적으로 발전하는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길게도 쓰지 않았다.(물론 어느 쪽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그가 받은 '서투른'이란 말은 저절로 만들어진 걸 테지. 하지만 그의 천재는 혹은 그의 천재의 일부는 실로 그곳에 존재했다.
 돗포는 날카로운 두뇌를 지니고 있었다. 또 동시에 부드러운 심장을 지녔었다. 심지어 그러한 건 불행히도 돗포 안에서 조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비극적이었다. 후타바테이 시메이나 이시카와 타쿠보쿠도 그러한 비극의 인물이다. 물론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그들보다도 부드러운 심장을 지니지 않았다.(혹은 그들보다도 듬직한 실행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비극은 그 때문에 그들보다도 크게 조용했다.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평생은 혹은 비극적이지 않은 비극 속에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욱이 돗포를 보면 그는 날카로운 두뇌 때문에 지상을 바라봐야 하면서 역시나 부드러운 심장 때문에 천상도 바라보아야 했다. 전자는 그의 작품 중 '정직한 사람', '대나무 문' 등의 단편을 낳았고 후자는 '비범한 범인', '소년의 비애', '그림의 슬픔' 같은 단편을 낳았다. 자연주의자도 인도주의자도 돗포를 사랑한 건 우연이 아니다.
 부드러운 심장을 지닌 돗포는 물론 저절로 시인이었다.(이 말은 꼭 시를 쓴다는 게 아니다.) 심지어 시마자키 토손 씨나 타야마 카타이 씨와 다른 시인이었다. 타이가에 가까운 타야마 씨의 시는 그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또 동시에 꽃밭과 닮은 시마자키 씨의 시도 그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시는 좀 더 절박하다. 돗포는 그의 시 중 한 편처럼 언제나 '높은 산의 눈아'하고 부르고 있었다. 소년 시절의 돗포의 애독서 중 하나는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이었다고 한다. 칼라일의 역사관도 어쩌면 그를 움직인 걸지 모른다. 하지만 더욱이 자연스러운 건 칼라일의 시적 정신에 닿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앞서 말한 것처럼 날카로운 두뇌의 소유자였다. "산림에 자유 있다"는 시는 "무사시노"와 다를 바가 없다. "무사시노"는 그 이름처럼 확실히 평원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또 그 잡목림은 산들을 투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쿠토미 로카 씨의 "자연과 인생"은 "무사시노"와 좋은 대조를 이루리라. 자연을 묘사하는 건 어느 쪽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보다도 침통한 색채를 두르고 있다. 그뿐 아니라 넓은 러시아를 포함한 동양적 전통의 옛색을 두르고 있다. 역설적인 운명은 이 옛색 덕에 '무사시노'를 한층 더 새롭게 했다.(수많은 인간은 돗포가 연 '무사시노'의 길을 걸었으리라.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요시에 코간 시 한 명뿐이다. 당시의 요시이에 씨의 작품집은 현대의 '책 홍수' 속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배의 꽃에 가까운 나이브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돗포는 지상에 발을 내렸다. 그리고――갖은 사람들처럼 야만한 인생과 마주했다. 하지만 그가 품은 시인은 한사코 시인이었다. 날카로운 두뇌는 죽음의 문턱에 선 그에게 '병상록'을 쓰게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일면에는 '사막의 비'(?)라는 산문시를 만들게 했다.
 만약 돗포의 작품 중에서 가장 완성된 걸 꼽자면 '정직한 사람'이나 '대나무 문'에 머무르리라. 하지만 그러한 작품은 결코 시인 겸 소설가였던 돗포의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가장 조화가 잘 잡힌 돗포를――혹은 가장 행복했던 돗포를 '사슴 사냥' 같은 글에서 찾아보고 있다.(나카무라 세이코 씨의 초기 작품이 이러한 돗포의 작품에 가까웠다.)
 자연주의 작가들은 모두 정진하여 걸어갔다. 하지만 유일하게 돗포만이 이따금 공중을 날았다……

     스물아홉 다시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에게 답하다

 나는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의 '수다록'을 읽고 다시 한 번 이 문장을 쓸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뜻도 타니자키 군에게만 답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심을 두지 않고 논의로 싸울 수 있는 상대는 세간에 그리 많지 않다. 나는 그 굴일인을 타니자키 준 이치로 씨에게 발견했다. 이는 어쩌면 타니자키 씨에겐 민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가볍게 내 논의를 들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
 불멸인 건 예술만이 아니다. 우리의 문예론 또한 불멸이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문예란 무엇인가? 운운하는 걸 논하고 있으리라. 그러한 생각은 내 펜을 둔하게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잠시간 이데아의 핑퐁을 가지고 놀아보면――
 (1) 나는 혹은 타니자키 씨 말처럼 좌고우면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아마 하고 있으리라. 나는 어찌된 악연인지 똑바로 돌진하는 용기가 결여되어 있다. 심지어 간혹 이러한 용기를 얻으면 대부분 어떤 일에나 실패한다. '이야기' 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 이야기를 꺼낸 것도 어쩌면 이런 사례 중 하나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타니자키 씨도 인용한 것처럼 '순수한가 아닌가의 한 점으로 예술가의 가치가 정해진다'고 말했다. 이는 물론 '이야기' 다운 이야기가 없는 소설을 가장 뛰어나다 여기지 않는다는 말하고는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이나 희곡 속에 순수한 예술가의 면모가 어느 정도 존재하나 보려 한다.('이야기' 다운 이야기를 지니지 않은 소설――이를테면 일본의 사생 문맥의 소설 모두가 순수한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준다고는 할 수 없다.) "시적 정신 운운하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고 말한 타니자키 씨에 대한 대답은 이 몇 줄로 충분하리라.
 (2) 타니자키 씨의 소위 '구성하는 힘'은 내게도 이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나 또한 일본 문예에――특히 현대의 문예에 이러한 힘이 부족하단 걸 반드시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만약 타니자키 씨가 말하는 것처럼 그러한 힘이 드러나는 게 꼭 장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면 앞서 내가 꼽은 모 작가도 역시 그러한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는 비교적 그렇다는 문제이니 어떤 표준 위에서 유무를 논해도 도리가 없으리라. 또 내가 시가 나오야 씨께 미치지 못하는 걸 "육체적 역량의 느낌 유무에 있다"고 말하는 건 나로선 찬동할 수 없다. 타니자키 씨는 나보다도 더 나를 높게 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단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타인은 반드시 말해주는 법이다"――메리메는 그의 서란집 안에서 이러한 늙은 외교관의 말을 인용했다. 나 또한 이 말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지키고 있다 믿는다.
 (3) "괴테가 위대한 건 스케일이 크면서도 순수성을 잃지 않는 점이다." 이는 타니자키 씨의 말이다. 나도 이의는 없다. 하지만 잡다한 대시인은 있어도 순수하지 않은 대시인은 없다. 따라서 대시인을 대시인으로 만드는 건――적어도 후대에 대시인으로 이름을 알리는 자는 잡다하단 것에 귀착된다. 타니자키 씨는 "잡다하다"란 말을 볼품없게 느끼는 거겠지. 그건 우리의 정취 차이이다. 나는 괴테에게 "잡다하다"는 말을 주었다. 하지만 그게 꼭 "소란스럽다"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만약 타니자키 씨의 어휘에 따르자면 "포용력이 크다"와 같은 뜻이라 봐도 좋다. 단지 이 "포용력이 크다"란 고대 시인을 평가하는데 너무나도 중대시되고 있는 건 아닐까? 보들레르나 랭보를 대시인으로 치는 사람들은 위고에게 원광을 주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심정에 적잖이 동정한다. (본래 괴테는 우리의 질투를 선동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같은 시대의 천재에게 질투하지 않았던 시인마저 괴테에게 울분을 토한 자는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질투를 드러낼 용기도 없다. 괴테는 전기에 따르면 원고료나 인세 이외에도 연금이나 생활비를 받았다. 그의 천재성은 어찌 되었든 천재를 조장한 환경이나 교육도 어찌 되었든 마지막으로 그의 에너지를 낳은 육체적 건강도 어찌 되었든 이것만이라도 부러워하는 건 나 하나만이 아니리라.)
 (4) 이는 타니자키 씨에게 답하는 게 아니다. 우리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각기의 체질 차이 아닐까"하는 타니자키 씨의 말에 조금 감개를 토해내고 싶은 것이다. 타니자키 씨가 사랑하는 시키부는 그녀의 일기 중 한 구절에 "세이 쇼나곤은 아주 의기양양히 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똑똑한 체 글자를 쓰지만 잘 보면 그만큼 대단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남들보다 뛰어난체하는 사람은 반드시 말로가 지독해집니다……이리도 애처롭게 이상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속이 빈 열매가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한 사람의 말로는 어떨까요. 좋을 리도 없겠지요."하는 말을 남겼다. 나는 남근이 생생한 세이가문의 소녀를 자처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 (시키부의 과학적 교양은 체질 차이를 언급할 정도로 진보되지 않았다 한들) 나를 크게 훈계하는 타니자키 씨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다시 타니자키 씨에게 답하며 이러한 감개를 늘어놓는 건 논의는 어찌 되었든 '수다록'의 문장의 리듬이 당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왕년, 심야의 자동차 안에서 나를 위해 예술을 논해준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서른 "야생이 부르는 소리"

 나는 이전에 코후카이에 나온 고갱의 "대지의 여자Te Nave Nave Fenua(?)"를 보았을 때 무언가 나를 반발하는 걸 느꼈다. 장식적인 배경 앞에 가만히 서있는 오렌지색 여자는 시각적으로 야만인의 피부서 나는 냄새를 뿜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질색한 데다가 장식적인 배경과 조화하지 않는 것에도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술원 전시회에 나온 두 장의 르누아르는 하나같이 이 고갱에게 이기고 있었다. 특히 작은 전라 소녀의 그림은 어느 정도는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리라――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갱이 그린 그 오렌지색 여자는 점점 나를 위압했다. 그건 실제로 대지의 여자에 빨려 드는 것에 가까운 위력이었다. 심지어 역시나 프랑스 여자도 내게는 매력을 잃지 않았다. 만약 화면의 아름다움을 운운한다면 나는 아직도 대지의 여자보다 프랑스의 여자를 높게 치고 싶다……

 나는 이러한 모순과 비슷한 걸 문예 속에서도 느끼고 있다. 더욱이 또 숱한 문예 평론 속에서도 대지파와 프랑스파가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고갱은――적어도 내가 본 고갱은 오렌지색 여자 속에서 인간수 한 마리를 표현해냈다. 심지어 사실파의 화가들보다 더 통렬하게 표현했다. 어떤 문예 평론가는――이를테면 마사무네 하쿠초 씨는 대부분이 인간수 한 마리를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척도로 둔다. 하지만 어떤 문예 평론가는――이를테면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는 대부분 한 마리의 인간수보다 한 마리의 인간수를 포함한 화면의 아름다움을 척도로 둔다.(물론 문예 평론의 척도란 게 반드시 이 둘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실천도덕적 척도가 있는가 하면 사회도덕적 척도도 존재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척도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가지지 않는 것도 신기할 게 없다 믿고 있다.) 물론 대지파는 프랑스파와 양립하지 못 할 건 없다. 양쪽의 차이는 이 땅에 낳은 갖은 차이처럼 몽롱하다. 하지만 양 극단을 꼽으면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만은 어찌 됐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소위 괴테, 클로체, 스핀칸 상회의 미학에 따르면 이 차이도 '표현' 한 마디에 안개처럼 사라져버리리라. 하지만 어떤 작품을 만드는데 번번이 우리를――혹은 나를 기로에 서게 하는 건 사실이다. 고전적 작가는 교묘하게도 이 기로를 한 번에 걸어갔다. 그들에게 우리처럼 작은 이들이 미치지 못하는 건 아마 그 점이리라. 르누아르는――적어도 내가 본 르누아르는 그런 점에선 고갱보다도 더 고전적 작가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렌지색 인간수의 암컷은 무언가 나를 끌어 들인다. 그러한 '야생이 부르는 소리'를 우리 안에서 느끼는 게 나 하나뿐일까?
 나는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갖은 조형 미술 애호가처럼 먼저 그 침통한 힘으로 가득 찬 고흐에게 기울어져 있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우아함을 갖춘 르누아르에게 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혹은 내 안에 있는 도시인이 한 일일지 모른다. 또 동시에 루느아르를 경멸한 당시의 애호가의 경향에 삐뚤어진 것또한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십 년 가량 지나 보니――훌륭히 완성된 르누아르는 아직도 나를 두드린다. 하지만 고흐의 사이프러스나 태양은 이미 나를 한 번 유혹하였다. 그건 오렌지색 여자의 유혹하고는 또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 절박한 것에 말하자면 예술적 식욕을 자극 받은 건 매한가지다. 무언가 우리의 혼 밑바닥에서 필사적으로 표현을 요구하는 것에――
 심지어 나는 르누아르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는 것처럼 문예상의 작품서도 우아하게 아름다운 걸 사랑한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을 걸은 자는 간단히 그 매력을 잊지 못한다. 특히 우리 도시 사람은 그런 점에선 누구보다도 약하다. 프롤레타리아 문예가 부르는 소리도 물론 나를 움직이곤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나를 움직인다. 순수하여 잡다해지지 않는 건 아마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테지. 하지만 내가 아는 작가 중에는 외견상으로라도 꾸며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도 없지는 않다. 나는 항상 이런 사람에게 조금의 부러움을 느끼고 있다……
 나는 누군가가 붙인 꼬리표에 따르면 소위 '예술파'의 한 사람이다.(이러한 명칭이 존재하는 건 또 동시에 이런 명칭을 낳은 분위기가 존재하는 건 전세계에서 일본뿐이리라.) 내가 작품을 쓰는 건 나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기 위해 쓰는 게 아니다. 하물며 현대의 사회 조직을 일신하기 위해 쓰는 건 아니다. 단지 내 안의 시인을 완성시키기 위해 쓸 뿐이다. 혹은 시인 겸 저널리스트를 완성하기 위해 쓸 뿐이다. 따라서 '야성이 부르는 소리'도 나로선 등한시할 수 없다.
 어떤 친구는 모리 선생님의 시가에 불만을 쓴 내 문장을 읽고 내가 감정적으로 모리 선생님께 각박하게 굴었다 비난했다. 나는 적어도 의식적으론 모리 선생님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되려 모리 선생님께 감복한 한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모리 선생님께도 부러움을 느낀 건 분명하다. 모리 선생님은 마차를 끄는 말처럼 정면만 본 작가는 아니다. 심지어 고집 그 자체처럼 한 번도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타이스" 속 하프누슈는 신에게 기도하지 않고 인간의 아이었던 나사렛의 그리스도에게 기도하였다. 내가 언제나 모리 선생님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심정을 지닌 건 어쩌면 이런 하프누슈에 가까운 탄식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서른하나 "서양이 부르는 소리"

 나는 고갱의 오렌지색 여자에게서 "야생이 부르는 소리"를 느꼈다. 하지만 또 르동의 "젊은 부처"(츠치다 바쿠센 씨 소장?)서 "서양이 부르는 소리"를 느낀다. 이 "서양이 부르는 소리" 또한 나를 움직인다.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도 타니자키 씨 자신 속에서 동서양 모두의 상극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내 '서양이 부르는 소리'란 타니자키 씨의 '서양이 부르는 소리'하고는 조금 다를지 모른다. 나는 그 때문에 내가 느끼는 '서양'을 써보기로 했다.
 "서양"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항상 조형미술 안에서 나온다. 문예상 작품은――특히 산문은 의외로 이 점에선 통렬하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인간은 인간수란 사실에 동서의 차이가 적기 때문이리라.(가장 가까운 사례를 꼽자면 아무개 의학 박사가 어떤 소녀를 능욕한 건 전적으로 신부 세르기우스가 백성의 딸을 대한 것과 다르지 않은 남성의 심리 때문이다.) 또 우리의 어학적 소양은 문예상 작품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리라. 우리는――적어도 나는 서양인이 쓴 시문의 의미만은 이해 못할 건 없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가 쓴 시문――이를테면 본쵸의 "나무 갈래가 선명히 아름다운 버드나무랴"를 대하는 것만큼 글자 하나 음 하나까지 음미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서양이 나를 부르는데 조형미술을 통하는 게 꼭 우연은 아닐지 모른다.
 이 '서양'의 밑바닥에 뿌리내린 건 언제나 신비한 그리스이다. 물의 차고 따스함은 과거 사람도 말한 것처럼 마셔서 알아 볼 수밖에 없다. 신비한 그리스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장 빠르고 짧게 그리스를 설명하자면 일본에도 있는 그리스 도기 몇 개를 보라 권하리라. 혹은 또 그리스 조각의 사진을 보라 권하리라. 그러한 작품의 아름다움이란 그리스 신들의 아름다움이다. 혹은 질릴 정도로 관능적인――말하자면 육감적 아름다움 속에 무언가 초자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매력을 품은 아름다움이다. 이 돌에 스며든 사향의 향처럼 정체 모를 아름다움은 시 속에도 역시 존재한다. 나는 폴 발레리를 읽었을 때(서양 비평가는 무어라 말할지 모르겠다.) 보들레르가 이전부터 항상 나를 움직여 온 아름다움과 만났다. 하지만 내가 가장 직접적으로 이 그리스를 느낀 건 앞서 말한 한 장의 르동이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사상상 대립은 여러 논의를 낳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논의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는다. 단지 가두 연설에 귀를 기울이는 듯이 듣기만 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 그리스적 아름다움은 그런 문제에 문외한인 내게도 "무섭다"해도 지장이 없다. 나는 여기에서만――이 그리스에서만 우리의 동양에 대립하는 '서양이 부르는 소리'를 느낀다. 귀족은 부르주아에게 자리를 양보했으리라. 부르주아도 또 프롤레타리아에게 곧 자리를 양보하리라. 하지만 서양이 존재하는 한 신비한 그리스는 반드시 우리를――혹은 우리의 자손을 끌어 당길 게 분명하다.
 나는 이 문장을 쓰는 사이에 고대 일본에 건너온 아시리아의 하프를 떠올렸다. 위대한 인도는 우리 동양을 서양과 악수시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서양은――가장 서양적인 그리스는 현재는 동양과 악수하지 않는다. "Les Dieux en Exil" 속에서 십자가에 걸린 그리스 신들이 서양의 한 시골에 살고 있단 내용을 적었다. 하지만 그건 외진 시골이라도 어찌 되었든 서양이었다. 그들은 우리 동양에는 한 시도 살지 않았으리라. 서양은 설령 헤브라이즘의 세례를 받은 뒤라도 무언가 우리 동양과 다른 혈맥을 지니고 있다. 그 가장 현저한 사례는 혹은 포르노그래피일지 모른다. 그들의 육감 그 자체마저 우리와 정취가 다르다.

 혹은 사람들은 1915년에 죽은 독일의 표현주의 속에서 그들의 서양을 발견한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렘브란트나 발자크 안에서도 그들의 서양을 발견하는 경우도 물론 많으리라. 실제로 하타 토요키치 씨는 로코코 시대의 예술에 하타 씨의 서양을 발견하였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서양을 서양이 아니라 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서양의 뒤에서 항상 눈을 뜨고 있는 한 마리 불사조――신비한 그리스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워한다?――혹은 두려워하는 게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묘하게 저항하면서 역시 질질 끌려가는 동물적 자기에 가까운 걸 느끼지 않을 수는 없다.
 나는 만약 눈을 감는다면 이러한 '서양이 부르는 소리'에는 눈을 감고 싶다. 하지만 눈을 감는 건 반드시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나는 불과 네다섯 일 전 밤에 무로우 사이세이 씨와 함께 오랜만에 파이프를 문 채로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사이 십 년 넘게 잊고 있던 보들레르릐 한 줄을 떠올렸다.(그건 내게는 실험 심리적으로도 관심이 있는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신비한 장엄에 가득 찬 한 장의 르동을 떠올렸다.
 이 '서양이 부르는 소리'도 역시 '야성이 부르는 소리'처럼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려 한다. 아폴로를 대하는 디오니시스에게서 그의 우상을 발견한 "짜라투스투라"의 시인은 행복했다. 현대의 일본에 태어난 나는 문예적으로도 나 자신 속에서 무수한 분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도 혹은 나 하나에게――어떤 일에나 영향을 받기 쉬운 나 하나에게 국한된 일일까? 나는 이 신비한 그리스야말로 가장 서양적인 문예상의 작품을 우리 일본어로 번역하는 걸 가로 막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혹은 우리 일본인이 정확히 이해하는 것마저(어학상의 장해는 잠시 제쳐두더라도) 가로 막는 게 아닐까 싶다. 한 장의 르동은――아니, 언젠가 프랑스 미술 전시회에 나온 모로의 "살로메"(?)마저 이러한 점에선 내게 동서를 갈라 놓은 대양을 떠올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뒤집으면 서양인이 한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만 해야 하리라. 나는 대영박물관에 한 동양학자가 있단 걸 들었다. 하지만 그의 한시 영역은 적어도 우리 일본인에겐 원작의 제호미를 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의 한시론도 성당盛唐을 폄하하고 한위漢魏를 띄우는 건 앞사람의 설을 깨는 것이라 해도 역시 우리 일본인이 간단히 긍정할 수는 없다. 피카소는 흑인의 예술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이 동양적 예술에――이를테면 다이구료칸의 글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건 언제가 될까.

     서른둘 비평시대

 비평이나 수필이 유행하는 건 즉 창작이 부진한 걸 보여주고 있다――이는 내 논의가 아니다. 사토 하루오 씨의 논의이다.('츄오코론' 5월호 게재) 또 동시에 미야케 이쿠사부로 씨의 논의이다.('분게이지다이' 5월호 게재) 나는 우연히 같은 궤적을 따른 두 분의 논의에 관심을 느꼈다. 두 분의 논의는 정확하리라. 오늘날의 작가들은 사토 씨 말처럼 지쳐 있는 게 분명하다. (물론 '나는 지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작가는 예외이다.) 혹은 쉼 없는 제작 때문에(세계에 일본 문단만큼 작품의 범람을 강요하는 곳은 없다.) 혹은 또 주변의 잡다한 일 때문에 또 혹은 다투기 어려운 연령 때문에 혹은 또――사정이야 여럿 있더라도 어찌 되었든 조금은 지쳐 있으리라. 실제로 서양 작가 중에도 말년에는 비평의 펜을 들어 시간을 떼운 작가도 적지 않았다……
 사토 씨는 이 비평 시대에 한층 더 근본적인 것에 닿을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미야케 씨의 "가장 근본적인 비평"을 요구하는 것도 아마 사토 씨와 큰 차이가 없으리라. 나 또한 두 분이 비평하는 펜에도 핏방울이 맺히기를 바라고 있다. 무엇이 가장 근본적인 비평인가?――그건 제각기 말이 다를지 모른다. 또 제각기 말이 다른 건 "진정한 비평"이 출현하는 걸 사실상 어렵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제각기 다르더라도 일단 우리의 신조나 의문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마사무네 하쿠초 씨는 "문예 평론"이나 "단테에 관해" 안에서 훌륭히 이런 일을 해냈다. 마사무네 씨의 논의는 비평적으로 다소의 결점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언젠가 라사레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과실을 나무라기보다 우리의 정열을 받아주리라."
 미야케 씨는 또 "비평을 모두 (전) 소설가의 손에 맡기는 건 되려 문학의 진보와 발전을 정체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읽었을 때 "시인은 자신 속에 비평가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비평가는 자신 속에 시인을 가지고 있단 보장이 없다."란 보들레르의 말을 떠올렸다. 실제로 시인은 자신 속에 비평가를 지니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비평가는 그의 비평을 '비평'이라는 문예상의 어떤 형식으로 완성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가?――그건 또 별개의 문제이다. 미야케 씨의 소위 '진정한 비평가'가 출현하는 걸 바라보는 건 적어도 나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니리라.
 단지 일본의 파르나스는 어떤 옛 습관에 사로잡혀 있다. 이를테면 시인 무로우 사이세이 씨가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건 결코 잔기술이 아니다. 하지만 소설가 사토 하루오 씨가 이따금 시를 쓰는 건 신기하게도 잔기술이다.(나는 언젠가 사토 씨 본인이 "내 시는 결코 잔기술이 아니다"하고 분개해 한 걸 기억하고 있다.) 만약 "소설가 만능"의 말에 상당하는 사실을 세어보자면 그야말로 그 하나뿐이리라. 소설가 겸 비평가의 경우도 역시 이 사실과 마찬가지다. 나는 '오가이 전집' 제3권을 읽고 비평가 오가이 선생님이 당시의 "전문적 비평가"를 얼마나 능가하려 하는지를 알았다. 또 동시에 이러한 비평가가 없는 시대가 얼마나 쓸쓸한지 알았다. 만약 메이지 시대의 비평가를 세어보자면 나는 모리 선생님이나 나츠메 선생님과 함께 시키를 꼽아보고 싶다. 도쿄의 장난꾸러기 사이토 료쿠는 오른쪽으로 모리 선생님의 서양의 가르침을 배우고 왼쪽으로 코타 선생님의 일본과 중국의 가르침을 빌렸음에도 필경 비평가의 영역에는 들어가지 못했다.(하지만 나는 수필 이외에 어떤 것도 완성하지 못한 사이토 료쿠에게 항상 동정을 느끼고 있다. 료쿠는 적어도 문장가였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다……
 비평가였던 모리 선생님은 자연주의 문예가 성횡하는 메이지 시대를 준비하셨다.(심지어 역설적인 운명은 자연주의 문예가 성횡한 시대에는 모리 선생님을 반자연주의자 중 한 명으로 두었다. 그건 어쩌면 모리 선생님의 눈이 좀 더 먼 하늘을 보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메이지 이십 년대에 졸라나 모파상을 이야기한 모리 선생님마저 반자연주의자 중 한 명이 된 건 역설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나는 만약 당대도 비평 시대라 부른다면――미야케 씨는 "우리는 마땅히 올 일본 문학의 융성기에 거의 절망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고 말하고 있다. 만약 다행히도 이 말이 미야케 씨 한 사람의 감개였다면――우리는 얼마나 맘편히 새로운 작가들을 기다릴까. 혹은 또 어느 정도 불안하게 새로운 작가를 기다릴까.
 소위 "진정한 비평가"란 겨를 벼에서 나누기 위해 비평의 펜을 들리라. 나 또한 이따금 나 자신 속에서 그런 메시아적 바람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 자신을 위해――나 자신을 이지적으로 노래하기 위해 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평 또한 내게는 그런 점에선 소설을 쓰거나 홋쿠를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사토, 미야케 두 분의 논의를 읽고 내 비평을 서문에 붙이기 위해 일단 이 문장을 심기로 했다.
 추기, 나는 이 문장을 다 쓴 후 호리키 요시조 씨의 계발을 받아 우노 코지 씨가 비평 이름에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고의로 우노 씨의 흉내를 낸 게 아닐뿐더러 또 프롤레타리아 문에에 대한 공동전선을 짤 생각도 없다. 단지 문예상의 문제만을 논하기 위해 막연히 붙였을 따름이다. 아마 우노 씨도 내 마음을 이해해주시리라.

     서른셋 "신감각파"

 "신감각파" 시비를 논하는 건 이미 시대에서 뒤처진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신감각파"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또 작가들의 작품을 다룬 비평가들의 비평을 읽고 무언가 써보고 싶단 욕망을 느꼈다.
 적어도 시가는 어떠한 시대에도 "신감각파"를 위해 진보하고 있다. "바쇼는 겐로쿠 시대 최대의 신인이었다"라는 무로우 사이세이 씨의 판단은 정확함에 분명하다. 바쇼는 항상 문예적으로는 신인이려 노력했다. 소설이나 희곡도 그 안에 시가적 요소를 지닌 이상――넓은 의미로는 시가인 이상 언제나 "신감각파"를 기다려야 한다. 나는 키타하라 하쿠슈 씨가 얼마나 "신감각파"였는지를 기억하고 있다.("관능의 해방"이란 말은 당대 시인들의 표어였다.) 또 동시에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가 얼마나 "신감각파"였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오늘의 "신감각파" 작가들에게도 물론 흥미를 느끼고 있다. "신감각파" 작가들은――적어도 그 안의 논객들은 내가 "신감각파"를 대하는 생각보다도 새로운 이론을 발표했다. 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그걸 충분히 알지 못했다. 단지 "신감각파" 작가들의 작품만은――그것도 나는 알지 못할지 모른다. 우리는 작품을 발표할 쯤 "신이지파"란 이름을 받았다.(물론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이 이름을 쓰지 않은 건 확실하다.) 하지만 "신감각파"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어떤 의미에선 우리의 작품보다도 "신이지파"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그런 어떤 의미란 게 무엇인가. 소위 그들의 감각이란 게 이지의 빛을 두르고 있단 점이다. 나는 무로우 사이세이 씨와 함께 우스이산 위의 달을 보았을 때 불쑥 무로우 씨가 묘기산을 "생강 같은걸"하고 말한 걸 듣고 확실히 묘기산은 한 덩어리 생강과 똑닮은 걸 발견했다. 이러한 감각은 이지의 빛을 두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감각은――이를테면 요코미츠 리이치 씨는 나를 위해 후지사와 타케오 씨의 "말은 갈색 사상처럼 달려갔다"(?)란 말을 인용해 그곳에 그들이 가진 감각의 비약이 있음을 설명했다. 이러한 비약은 나도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한 줄은 분명히 이지적 연상 위에 성립하고 있다. 그들은 소위 그들의 감각 위에도 이지의 빛을 더했다. 그들의 근대적 특색은 혹은 그 점에 있으리라. 하지만 만약 소위 감각 그 자체를 새로운 목표로 삼는다면 나는 역시 묘기산에 한 덩어리의 생강을 느끼는 걸 보다 새롭게 해야만 한다. 아마 에도의 과거부터 있던 한 덩어리 생강을 느끼는 걸.
 "신감각파"는 물론 일어나야만 한다. 그또한 갖은 새로운 사업처럼 (문예상으로) 결코 간단하지는 않다. 나는 "신감각파" 작가들의 작품에――그보다도 그들의 소위 "신감각"에 경복하기 어려운 건 앞에서 쓴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을 대하는 비평가들의 비평 또한 가혹함을 잃었으리라. "신감각파" 작가들은 적어도 새로운 방향을 향해 그들의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것만은 누구나 인정해야만 한다. 이 노력을 비웃는 건 단순히 오늘날 "신감각파"라 불리는 작가들에게 타격을 주는 걸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앞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또 나아가서는 그들 후에 올 "신감각파" 작가들이 목표를 착실히 정하는데도 역시 타격을 주리라. 그건 물론 일본 문예를 발전시키는 일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어떻게 불리더라도 소위 "신감각"을 가진 작가들은 반드시 앞으로도 나타나리라. 나는 벌써 십여 년 전 분명 쿠메 마사오 씨와 함께 "소도샤"의 전시회를 구경한 후 쿠메 씨의 "이 정원의 노송나무만 봐도 '소도샤'처럼 보이는 건 참 신기해"하고 감탄한 걸 기억하고 있다. "소도샤"처럼 보이는 건 그야말로 십 년 이전의 소위 "신감각" 때문임이 분명했다. 이러한 소위 "신감각"을 내일의 작가에게 기대하는 나를 성급하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만약 진정 문예적으로 "새로운 걸" 추구한다면 그건 어쩌면 이 소위 "신감각"일지도 모른다.(새로운 건 아무것도 아니란 논의는 물론 이 문제 밖에 있다.) 소위 "목적의식"을 지닌 문예마저 "목적 의식" 그 자체의 새로움과 옛됨을 잠시 제쳐둔다면(설령 그걸 따진다 해도 버나드 쇼가 나타난 건 1890년대이다.) 실은 수많은 앞사람들이 걸은 길이다. 하물며 우리의 인생관은――아마 "이로하 카루타" 속에 모조리 담겨 있으리라. 그뿐 아니라 그러한 새로움과 옛됨은 문예적인――혹은 예술적인 새로움과 옛됨이 아니다.
 나는 소위 "신감각"이 얼마나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지를 알고 있다. 이를테면 사토 하루오 씨의 "스페인 개의 집"은 아직도 새로움을 잃지 않았다. 하물며 동인잡지 "성좌"에 실렸을 적은 어느 정도 새로웠으리라. 하지만 이 작품의 새로움은 조금도 문단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어쩌면 그탓에 사토 씨 본인마저 이 작품의 새로움을――나아가서는 이 작품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 이외에도 물론 많으리라. 하지만 특히 현저한 건 우리의 일본 아닌가?

     서른넷 해명

 나는 몇 번이나 되풀이한 것처럼 "줄거리 없는 소설"만 쓰라는 게 아니다. 따라서 딱히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와 대척점을 세우는 게 아니다. 단지 이러한 소설의 가치도 인정 받고 싶다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전혀 인정하지 않는 논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논적이다. 나는 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와 논의를 나누는 동안 누구도 내 어깨를 받쳐주길 바라지 않는다.(또 동시에 타니자키 씨의 어깨를 받쳐주길 바라지 않는 것도 물론이다.) 우리의 의논이 시비를 논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부터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요즘 잡지의 광고 따위서 내 "줄거리가 있는 소설"마저 "줄거리가 없는 소설"이라 이름 붙여진 걸 보고 이 문장을 쓰기로 했다. "줄거리 없는 소설"이란 게 어던 건지 간단히 이해 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다. 또 둘셋의 내 지인은 내 이야기를 정당히 이해하고 있다. 이제는 멋대로 하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서른다섯 히스테리

 나는 히스테리 요법 중 그 환자가 생각하는 걸 무엇이든 쓰게 한다――혹은 말하게 한다는 걸 듣고 조금도 농담 없이 문예의 탄생은 히스테리에도 밀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호두연함의 무뢰한은 제쳐두더라도 누구나 조금은 히스테릭하다. 특히 시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히스테릭한 경향을 지니고 있으리라. 이 히스테리는 삼천 년 이래로 항상 그들을 괴롭혔다. 그들 중 어떤 이는 그 때문에 죽었고 또 그들 중 어떤이는 그 때문에 기어코 발광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그 때문에 자신들의 기쁨이나 슬픔을 열심히 노래했다――이렇게도 생각 못할 건 없다.
 만약 순교자나 혁명가 중에서 어떤 종류의 마조히스트를 찾아 볼 수 있다면 시인 속에서도 히스테리 환자는 적지 않으리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은 즉 나무 아래 구멍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 외친 신화 속 인물의 심정이다. 만약 이러한 심정이 없었다면 적어도 "치인의 고백"(스트린드베리)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히스테리는 왕왕 한 시대를 풍미한다. "베르테르"나 "르네"를 낳은 것 또한 이 시대적 히스테리이리라. 더욱이 또 온 유럽을 십자군에 들게 한 것도――하지만 그건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 간질은 고대에 "신성한 병"이란 이름을 받았다. 그럼 히스테리도 어쩌면 "시적인 병"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히스테리를 일으킨 셰익스피어나 괴테를 상상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상을 하는 건 그들의 위대함을 상처 입히는 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위대함을 이루는 건 이 히스테리 바깥에 있는 그들의 표현력 그 자체이다. 그들이 몇 번 히스테리를 일으켰는가. 그런 건 혹은 심리학자의 문제리라.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표현력 그 자체에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쓰면서 문득 태고의 숲속에서 격렬한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무명 시인을 상상했다. 그는 그의 마을 사람들에게 비웃음의 표적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이 히스테리를 촉진한 그의 표현력의 산물만은 마치 지하 연못처럼 몇 대나 이어져 흐르리라.
 나는 히스테리를 존경하는 게 아니다. 히스테릭해진 무솔리니는 물론 국제적으로 위험하다. 하지만 만약 누구도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는다면 우리를 기쁘게 하는 문예상 작품은 어느 정도 줄었으리라. 나는 단지 이 점에서 히스테리를 변호하고 싶다. 어느 틈엔가 여자의 특권이 된――하지만 사실상 누구에게나 다소의 가능성이 있는 히스테리를.
 전세기의 끝자락도 문예적으로는 분명 시대적인 히스테리에 빠져 있었다. 스트린드베리는 "푸른 책" 안에서 이 시대적 히스테리에 "악마의 소행"이라 이름 붙였다. 악마의 소행인가 선한 신의 소행인지는 물론 내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시인들은 하나같이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실제로 비르고프의 전기에 따르면 그 듬직한 톨스토이마저 반광란으로 가출한 건 얼마 전 신문에 나온 어떤 여성 히스테리 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서른여섯 인생의 종군기자

 나는 시마자키 토손 씨가 스스로를 "인생의 종군기자"라 부른 걸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또 근래 히로츠 가즈오 씨가 같은 말을 마사무네 하쿠초 씨에게도 붙였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두 분이 사용하는 "인생의 종군기자"란 말을 분분명히 아는 건 아니다. 그건 아마 근래 만들어진 "생활자"에 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리라. 하지만 만약 엄밀히 말하자면 적어도 사바계에 태어난 이상은 누구도 "인생의 종군기자"는 될 수 없다. 인생은 우리에게 도리 없이 "생활자"임을 강요하리라. 도리 없이 생존 경쟁의 한복판에 던져두는 것이다. 누군가는 스스로 나아가 승리를 얻으려 하리라. 그리고 또 누군가는 냉소나 기지나 영탄 속에서 방어적 태도를 취하리라. 마지막으로 또 누군가는 어느 쪽에도 또렷한 의식을 지니지 않고 "생존" 하리라. 하지만 어느 쪽도 실상은 도리 없는 "생활자"이다. 유전이나 환경의 지배를 받은 인간 희극의 등장인물이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이겨내리라. 그들 중 어떤이는 또 패배하리라. 하지만 어느 쪽도 수명이 남은 한――우리는 모두페타가 말한 것처럼 "하나같이 집행 유예 중인 사형수이다". 이 집행 유예의 시간을 무엇을 위해 쓸지는 우리의 자유이다. 자유이다?――하지만 그곳에도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을지는 의심스러우리라. 우리는 실로 다종다잡한 인과를 짊어진 채 태어났다. 또 그 다종다잡한 인과는 우리 자신마저 전부를 인식하고 있다곤 할 수 없다. 옛 사람은 진작이 이 사실을 Karma란 한 마디로 설명했다. 갖은 근대의 이상주의자들은 대부분 이 카르마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깃발이나 창은 끝내 그들의 에너지를 보여주는데 그쳤다. 그들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건 물론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적으로 근대 이상주의자만이 아니다. 우리는 카네기의 에너지에도 강함을 느끼는 건 분명하다. 만약 이 강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누구도 사업가나 정치가의 입지담을 읽으려 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카르마는 그 때문에 조금도 권위를 잃지 않는다. 카네기의 에너지를 낳은 건 카네기가 짊어매고 온 카르마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카르마 때문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만약 우리에게――적어도 내게 '체념'이란 하늘의 은혜가 내린다면 그건 단지 이 점에만 있다.
 우리는 모두 다소의 "생활자"이다. 따라서 듬직한 "생활자"에겐 저절로 경의를 품게 된다. 즉 우리의 영원한 우상은 전투의 신 마르스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카네기는 잠시 제쳐두고 니체의 "초인" 또한 한 꺼풀을 벗겨내면 바로 이 마르스의 환생이었다. 니체가 체자레 보르자에게도 감탄한 건 우연이 아니다. 마사무네 하쿠초 씨는 "미츠히데와 죠하" 속에서 "생활자" 중 "생활자"였던 미츠히데로 하여금 죠하를 비웃게 했다.(이러한 마사무네 하쿠초 씨가 "인생의 종군기자"라 불리는 건 그야말로 역설적이라 해야 한다.) 이는 단지 미츠히데만의 비웃음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도 생각지 않고서 항상 이러한 비웃음을 하고 있다.
 우리의 비극은――혹은 희극은 이 "인생의 종군기자"에 머물기 어려움에 숨어 있다. 심지어 우리 "생활자"가 카르마를 짊어진 사실에 숨어 있다. 하지만 예술은 인생이 아니다. 비용은 그의 서정시를 남기기 위해 "긴 패배"의 일생을 필요로 했다. 패하는 자를 패하게 두어라. 그는 사회적 습관 즉 도덕에 등을 돌릴지 모른다. 혹은 또 법률에도 등을 돌리리라. 하물며 사회적 예절에는 남들보다 더 등을 돌릴 터이다. 그러한 약속을 어긴 벌은 물론 그들 스스로가 짊어매야 한다. 사회주의자 버나드 쇼는 그의 "의사의 딜레마" 속에서 부도덕한 천재를 구하는 것보다 평범한 천재를 구하기로 했다. 쇼의 태도는 적어도 합리적이라 해야 하리라. 그들은 박물관의 유리 속에 박제된 악어를 보는 걸 사랑한다. 하지만 한 마리 악어를 구하는 것보다 한 마리 나기와 말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동물애호회도 아직 맹수와 독사를 애호할만큼 관대하지 않은 건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건 인생의 말하자면 Home Rule의 문제이다. 다시 한 번 비용을 예로 들자면 그는 일류 범죄자였을지언정 역시나 일류 서정시인이었다. 
 어떤 여인은 "우리 집에 천재가 없어 다행이에요"하고 말했다. 심지어 그 "천재"란 말은 조금도 비꼼을 품지 않았다. 나 또한 우리 집에 천재가 없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다.(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천재의 속성에서 배덕성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전원이나 시장 사람들에겐 고금의 천재보다 "생활자"의 미덕을 갖춘 자가 많으리라. 서양인은 "사람으로서"란 이름 하에 이따금 고금의 천재 중에서도 "생활자"의 미덕을 꼽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새로운 우상 숭배를 믿지 않는다. "예술가로서의" 비용은 어찌 되었든 "예술가로서의" 스트린드베리는 우리가 애독할만 하다. 하지만 "사람으로서"의 스트린드베리는――아마 내가 존경하는 비평가 XYZ 군보다도 더 어울리기 어려우리라. 따라서 우리의 문예상 문제는 필시 "이 사람을 보라"가 아니다. 되려 "이러한 작품을 보라"이다. 물론 "이러한 작품을 보라"고 해도 몇 세기는 큰강처럼 이러한 작품을 보기 전에 흘러가고 마리라. 심지어 또 그 몇 세기는 어쩌면 지푸라기 한 올처럼 이러한 작품을 망각 속에 밀어넣고 마리라. 만약 예술 지상 주의를 믿지 않는다면(이러한 신앙을 지니는 게 꼭 먹기 위해 쓰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적어도 먹기 위해서만 쓰지 않는 한은.) 시를 쓰는 건 옛사람도 말한 것처럼 밭을 만드는 것보다 못하리라.
 나는 시마자키 토손 씨는 물론 마사무네 하쿠초 씨도 "인생의 종군기자"가 아님을 믿고 있다. 아무리 두 대가가 재능이 있더라도 이제까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을 바로 되어버리는 도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우리 안에서 "미츠히데와 죠하"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나는 나 자신을 대할 때는 다소의 죠하가 되더라도 대신 나 이외의 사람을 대할 때는 다소의 미츠히데가 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리 안의 미츠히데는 반드시 우리 안의 죠하를 비웃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정도 비웃어주고 싶은 건 분명하다.

     서른일곱 고전

 "선택된 소수"란 게 반드시 최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소수인지는 의심스럽다. 되려 어떤 작품에 드러난 어떤 작가의 심정에 닿을 수 있는 소수이리라. 따라서 어떤 작품도――혹은 또 어떤 작품의 작가도 "선택된 소수" 이외의 독자는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선택되지 않은 다수의 독자"를 얻는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나는 "겐지모노가타리"를 칭찬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하지만 실제로 읽은 건(이해하고 향락한 건 묻지 않더라도) 나와 교류하던 소설가 중에선 단 둘――타니자키 준이치로 씨와 아카시 토시오 씨뿐이었다. 그럼 고전이라 불리는 건 혹은 오천만 인 중 쉽게는 읽히지 않는 작품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요슈는 겐지모노가타리보다 훨씬 많이 읽히고 있다. 그건 꼭 만요슈가 겐지모노가타리보다 뛰어나기 때문은 아니다. 그분 아니라 둘 사이에 산문과 운문이란 차이가 있기 때문도 아니다. 단순히 만요슈 속 작품은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겐지모노가타리보다 훨씬 짧기 때문이다. 본래 동서 고전 중 수많은 작가를 지닌 건 결코 길지 않다. 적어도 아무리 길더라도 실질적으론 짧은 걸 모아 놓은 것들 뿐이다. 포는 시에서 이 사실에 따라 그의 원칙을 주장했다. 또 비어스(Ambrose Bierce)는 산문에서도 역시나 이 사실을 따라 그의 원칙을 주장했다. 우리 동양인은 이러한 점에서 이지보다 지혜에 이끌려 저절로 그들의 선구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처럼 모두가 이 사실을 따라 이지적 건축을 쌓지는 않았다. 만약 이 건축을 꾀한다면 장편 겐지모노가타리마저 적어도 목소리의 가치를 잃지 않는단 점에선 마침 좋은 재료를 주리라.(하지만 동서의 차이는 포의 시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이래저래 백 행의 시를 마침 좋은 길이로 적어냈다. 열일곱 음의 홋쿠는 물론 그에게는 "에피그램적"이란 이름 하에 배척되었으리라.)
 갖은 시인의 허영심은 밝혔든 그렇지 않았든 후대에 남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아니, "갖은 시인의 허영심은"이 아니다. "그들의 시를 발표한 갖은 시인의 허영심은"이다. 한 행의 시도 쓰지 않고 자신이 시인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그들은 크고 작음을 묻지 않고 그들의 시적 평생상 가장 평화로웠던 시인들이다.) 하지만 성격이나 환경 때문에 운문이나 산문의 시를 쓰고 만 사람들에게만 시인의 이름을 준다면 갖은 시인들의 문제는 아마 "무엇을 썼는가"보다 "무엇을 쓰지 않았는가"에 있으리라. 그건 물론 원고료에 따른 시인들의 생활 속 불편함이다. 만약 불편하다면――봉건 시대의 시인 이시가와 로쿠쥬엔은 또 동시에 여관 주인이었다. 우리도 글장사만 아니었다면 무언가 다른 장사를 발견했을지 모른다. 우리의 신경이나 견문도 그 때문에 혹은 넓어지리라. 나는 이따금 글장사만으로는 생계를 꾸리지 못했던 과거에 약간의 부러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도 또 후대에는 고전을 남기리라. 물론 먹기 위해 쓴 것도 고전이 되지 않는단 보장은 없다.(만약 어떤 작가의 자세로 본다면 단지 "먹기 위해 쓴다"는 건 정말 좋은 자세이다.) 다만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것처럼 후대로 뛰어 넘기 위해서는 몸이 가벼울 걸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럼 고전이라 불리는 건 혹은 어떤 사람에게나 읽히기 쉬운 걸 말하는 걸지 모른다.

     서른여덟 통속소설

 소위 통속소설이란 시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을 비교적 속되게 쓴 것으로 소위 에술 소설이란 시적 성격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의 생활을 비교적 시적으로 적은 것이다. 두 차이는 누구라도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하지만 소위 통속소설 속 사람들은 확실히 시적 성격의 소유주이다. 이건 결코 역설이 아니다. 만약 역설적이라면 이러한 사실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청년 시절에는 성격 위에 시적 음영을 드리우기 쉽다. 하지만 그건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잃고 만다.(서정시인은 이런 점에선 실로 영원한 소년이다.) 따라서 통속소설 속 사람들은 노인일 수록 우스워지기 쉽다.(단 이 소위 통속소설은 탐정 소설이나 대중 소설을 포함하지 않는다.)
 추기. 이 문장을 심은 후 나는 신조 좌담회에 출석해 츠루메 유스케 씨의 계발을 받아 소위 통속소설과 서양인의 소위 Popular novel의 차이를 생각했다. 나는 소위 통속소설론은 소위 포퓰러 노벨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베넷(Arnold Bennett)은 그의 포퓰러 노벨에 Fantasies의 이름을 주었다. 그건 사실상 말이 되지 않는 세계를 독자를 위해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이런 의미는 반드시 환괴가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인물이든 사건이든 문예적으로 진실의 인각을 새기지 않는 세계란 뜻이다.

     서른아홉 독창

 세간은 메이지와 다이쇼의 예술상 총결산을 하고 있다. 왜 하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다. 무얼 위한 일인지도 내게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 일본 문학 전집이라 하여 메이지 다이쇼 문학 전집이라는 문예상의 총결산은 물론이요 메이지 다이쇼 명작 전시회 또한 역시나 그림상의 총결산이다. 나는 이러한 총결산을 보고 독창이란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느꼈다. 옛 사람이 남긴 걸 핥지 말라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한 일을 보면(혹은 한 일을 보아도라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새삼스럽게 독창이란 게 가볍게 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우리는 설령 의식하지 않더라도 어느 틈엔가 앞사람의 발자국을 뒤쫓는다. 우리가 독창이라 부르는 건 조금이나마 앞사람의 뒤를 벗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겨우 한 발자국 정도――아니,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그때는 한 시대를 뒤흔들 터이다. 그뿐 아니라 고의로 반역하자면 더더욱 앞사람의 걸음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의리로라도 예술상의 반역에 찬성하고 싶은 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실상 반역자는 결코 드물지 않다. 혹은 앞사람의 뒤를 쫓은 것보다도 훨씬 많으리라. 그들은 확실히 반역했다. 하지만 무엇에 반역했는지는 또렷이 느끼지 못했다. 그들의 반역은 대부분 앞사람보다 앞사람의 추종자에게 반역한 것이다. 만약 앞사람을 느끼고 있었다면――그들은 그럼에도 반역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도 필시 앞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으리라. 전설 학자는 해안가 전설 속에서 수많은 일본 전설의 프로토타입을 발견했다. 예술 또한 연구해 보면 역시 초본이 드물지 않다.(나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작가들은 그들이 초본을 쓰고 있지 않음을 의식하지 않았단 걸 믿고 있다.) 예술의 진보도――혹은 변화도 아무리 큰 인물을 지녔더라도 한 달음에는 면목을 바꾸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이 느린 걸음 속에서도 다소의 변화를 꾀한 건 우리가 존경하기에 마땅하다.(히시다 슌소는 이 사람 중 하나였다.) 신시대의 청년들은 독창의 힘을 믿고 있으리라. 나는 적어도 믿고 있다 바라고 있다. 다소의 변화는 그 점 이외에선 어디서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과거부터 세계는 앞사람이 만든 커다란 꽃다발 하나가 있었다. 그 꽃다발에 한 송이 꽃을 꽂는 것만으로도 큰일이다. 그걸 위해서는 새로운 꽃다발을 만들 정도의 마음가짐도 필요하리라. 이 마음가짐은 혹은 환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환각이라 웃어 버리면 고대의 예술적 천재들도 역시 환각을 쫓고 있었으리라.
 단지 이 마음가짐에도 분명히 환각을 인정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분명히 환각을 인정하는건?――하지만 그들 또한 저절로 다소의 환각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런 문제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한 사람이다. 하지만 메이지 다이쇼 예술의 총결산을 보고 독창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낄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 다이쇼 명작 전시회를 본 사람들은 여러 그림의 좋고 나쁨을 논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 한 사람은 좋고 나쁨을 논할 여유마저 없다.

     마흔 문예상의 극북

 문예상의 극북은――혹은 가장 문예적인 문예는 우리를 조용하게 할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에 접했을 때엔 황홀해질 수밖에 없다. 문예는――혹은 예술은 그 점에 무서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 갖은 인생이 실행적 측면이 주된다면 어떠한 예술도 뿌리에는 우리를 거세하는 힘을 다소나마 지니고 있다 해야 하리라.
 하이네는 괴테의 시 앞에 정직히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원만구족한 괴테가 우리를 행동으로 내보내지 않는 점에 만강한 불평을 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하이네의 심정이라 가볍게 지나 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이네는 이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한 구절 속에서 예술의 모태에 육박하고 있다. 갖은 예술은 예술적일 수록 우리의 정열(실행적인)을 조용하게 만든다. 이 힘을 지배 받으면 간단히는 마르스의 자식이 될 수 없다. 거기에 안주할 수 있는 건――순일무잡한 예술가들은 물론 바보도 역시나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하이네는 불행히도 이런 적광토를 얻지 못했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전사 제군이 예술을 무기로 고른 걸 꽤나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제군은 언제나 이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리라.(물론 하이네의 하인만큼도 휘두르지 못하는 건 예외이다.) 하지만 또 이 무기는 어느 틈엔가 제군을 조용하게 만들지 모른다. 하이네는 이 무기를 억누르면서 심지어 이 무기를 휘두른 한 명이다. 하이네의 소리 없는 신음은 혹은 그 점에 숨어 있으리라. 나는 이 무기의 힘을 내 온몸에 느끼고 있다. 따라서 제군이 이 무기를 휘두르는 것도 남일처럼 바라보지 않는다. 개중에서도 내가 존경하는 한 사람은 이러한 예술의 거세력을 잊지 않고 이 무기를 휘둘러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다행히도 내 기대처럼 된 모양이다.
 다른 사람은 혹은 이런 것도 웃어 버리리라. 그건 나도 각오한 바이다. 내 시선은 얕을지도 모른다. 설령 또 얕지 않더라도 십 년 전의 경험은 한 사람의 말은 타인에게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는 걸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나는 어찌 되었든 남처럼 노력을 거듭하며 겨우 이 예술의 거세력이 크다는 걸 알아차렸다. 따라서 단지 이뿐이라도 내게는 역시 중요한 일이다. 문예의 극북은 하이네가 말한 것처럼 고대의 석인과 다를 바 없다. 설령 미소는 품고 있더라도 항상 냉철하고 조용하다.

 

 

 

  1. 자연(自然)을 있는 그대로 묘사(描寫)한 글 [본문으로]
  2. 俳句의 맛이 풍기는 간결한 산문(散文)((흔히, 俳句가 따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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