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요코하마.
　닛카요코日華洋行의 주인 친사이는 책상에 정장을 입은 두 팔꿈치를 얹고서 불이 꺼진 담배를 물은 채로 오늘도 가득 쌓인 장사용 서류에 바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친즈 커튼이 걸린 방 안은 여전한 잔더위의 적막함에 갑갑할 정도로 지배되어 있었다. 그 적막을 깨는 건 니스 냄새가 나는 문 너머서 이따금 들려오는 희미한 타자기 소리 뿐이었다.
　서류가 일단락된 후, 친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이 탁상 전화 수화기를 귀에 얹었다.
　"우리집에 걸어주게."
　친의 입술에서 나온 말은 묘하게 저력이 담긴 일본어였다.
　"여보세요?――할멈?――와이프 좀 바꿔주게――후사코니?――나 오늘 밤 도쿄에 가야 해――그래, 거기서 자고 올 거고――못 오냐고?――도무지 기차 시간에 맞을 거 같지 않네――그럼 부탁할게――뭐? 의사를 불렀어?――그건 신경쇠약일 거야. 그래. 잘 자고."
　친은 수화기를 본래 위치에 돌려놓고 어째서인지 얼굴에 구름을 드리우며 지방 낀 손가락으로 성냥을 문질러 물고 있던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담배 연기, 꽃과 풀 냄새, 나이프나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 방 구석에서 올라오는 엇나간 카르멘 음악――친은 그런 소동 속에서 한 잔의 맥주를 앞에 둔 채 그저 멍하니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있다. 그의 주위에 있는 건 손님도 직원도 선풍기도 무엇 하나 번잡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선만은 계산대 뒤에 자리한 여자에게 아까부터 줄곧 향해 있었다.
　여자는 척 보기에 스물은 넘지 않은 듯했다. 또 벽에 붙은 거울을 뒤로한 채 끝없이 연필을 움직이며 바쁘게 계산서를 적고 있다. 이마로 내려 온 파마머리, 작게 붉어진 뺨에 밋밋한 청자색 반소매――
　친은 맥주를 다 마시고는 천천히 커다란 몸을 일으켜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친씨. 반지는 언제 사주실 거예요?"
　여자는 그렇게 묻는 동안에도 아무렇지 않게 연필을 움직였다.
　"그 반지가 사라지면."
　친은 잔돈을 찾으며 여자의 손가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미 2년 전부터 금을 얇게 핀 결혼 반지가 자리해 있었다.
　"그럼 오늘밤 사줘요."
　여자는 곧장 반지를 빼고는 계산지와 함게 그의 앞에 던졌다.
　"이건 호신용 반지라서."
　카페 바깥의 아스팔트에는 여름의 차가운 밤바람이 불고 있다. 친은 인파 사이에 석이며 몇 번이나 거리의 하늘 위에 뜬 별을 올려다 보았다. 그 별도 지금 밤만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친의 심경을 1년 후의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들어 오게."
　그 목소리가 아직 끝나기도 전에 니스 냄새가 나는 문이 살짝 열리더니 얼굴색이 창백한 서기 이마니시가 꺼림칙할 정도로 조용히 들어왔다.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친의 얼굴에는 이마니시가 그 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사실에 대한 불쾌함이 드러나 있었다. 이마니시는 차갑게 목례하고는 한 통의 봉투를 남긴 채로 또 이전처럼 소리도 없이 문 너머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문이 이마니시를 보내고 닫힌 후, 친은 재떨이에 담배를 버리고는 책상 위 봉투를 들어 올렸다. 그건 하얀 서양 봉투에 타자기로 받는 이 이름을 적은 평범한 상업용 편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편지였다. 하지만 그 편지를 손에 든 친의 얼굴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혐오의 감정이 드러났다.
　"또냐."
　친은 두터운 눈섭을 찌푸리면서 꺼림칙하다는 양 혀를 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발 뒷창을 책상 끝자락에 얹고는 사실상 회전 의자 위에 누워 종이를 자르는 칼도 쓰지 않고 봉투를 찢었다.
　"귀하의 부인이 정조를 지키지 않는 건 벌써 세 번이나 충고했습니다……귀하가 오늘까지 어떠한 단호한 처치도 하지 않는 건……그렇다면 부인은 옛날의 정부와 함께 낮과 밤을……일본인으로서 단지 카페의 서빙을 하는 후사코 부인이……중국인인 귀하를 위해 무한한 동정을 하는 바입니다……앞으로도 부인과 이혼하지 않으면……귀하가 만인의 비웃음 거리가 되는 것도……이 작은 말에 나쁜 뜻이 없다는 건 알아주시길……귀하의 충실한 친구가."
　편지는 힘없이 친의 손에서 떨어졌다.
　……친은 테이블에 기대며 레이스 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노을 빛을 받아 여성용 금시게를 바라본다. 하지만 뚜겅 뒤에 새긴 문자는 후사코의 이니셜이 아닌 듯했다.
　"이게 뭐야?"
　결혼 후 아직 며칠도 지나지 않은 날, 후사코는 서양식 옷장 앞에 앉아 테이블 너머로 남편에게 웃음을 보냈다.
　"다나카 씨가 주신 거예요. 아셔요? 창고 회사의――"
　테이블 위에는 그 다음으로 반지 상자 두 개가 나왔다. 하얀 벌벳 뚜껑을 열어보자 하나는 진주, 다른 하나는 터키옥 반지가 담겨 있었다.
　"쿠메 씨랑 노무라 씨."
　이번에는 산호 구슬로 된 네카게가 나왓다.
　"고풍스럽지? 쿠보타 씨한테 받은 거야."
　그로부터――친은 무엇이 나오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단지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건 모두 네 전리품이구나. 소중히하지 않으면 미안하겠어."
　그러자 후사코는 저녁 노을 속에서 다시 한 번 아름답게 웃어보였다.
　"당신 전리품도 소중히 해야죠."
　그때는 그도 기뻤다. 하지만 지금은……
　친은 몸을 한 번 떨더니 책상에 걸쳐둔 두 다리를 내렸다. 그건 탁상 전화의 벨소리가 갑자기 그의 귀를 놀라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다――그래――연결해주게."
　그는 전화를 받으며 짜증난다는 양 이마의 땀을 닦았다.
　"누구지?――사토미 탐정 사무소란 건 알고 있어. 사무소 누구?――요시이 군?――좋아. 보고는?――누가 와있어?――의사?――그리곤?――그럴지도 모르지――그럼 정차장에 와주게――아니, 막차에는 분명 돌아갈 수 있을 거야――실수하지 말고. 알았네."
　수화기를 놓은 친사이는 마치 넋이 나간 듯이 한동안은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탁상 시게의 바늘을 보고는 반쯤 기계적으로 벨의 버튼을 눌렀다.
　서기 이마니시는 울림에 응해 살짝 열린 문 뒤에서 마른 반신을 뻗었다.
　"이마니시 군. 테이 군한테 전해주게. 오늘 밤 나 대신 도쿄에 출장 좀 다녀와달라고."
　친의 목소리는 어느 틈엔가 힘을 잃고 말았다. 이마니시는 여느 때처럼 차갑게 목례를 하고는 곧장 문 뒤로 숨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친즈 커튼에 닿은 살짝 어두운 서쪽 햇살이 이 방 안의 광선에 무거운 붉은기를 가미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파리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 온 건지 무거운 날개소리를 내면서 멍하니 턱을 괸 친의 주위서 불규칙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카무쿠라
　친사이의 집의 객간에도 레이스 커튼이 걸린 창문 안으로 드는 늦은 여름날의 햇살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햇살의 빛은 사라졌으나 커튼 너머에에 핀 아직 꽃이 한 가득한 협죽도는 이 시원해 보이는 방 공기에 기분 좋은 밝음을 드리우고 있었다.
　역쪽에 놓인 등나무 의자에 앉은 후사코는 무릎의 삼색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그 창밖의 협죽도에 울적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리께선 오늘도 귀가하시지 않는 건가요?"
　이건 그 옆 테이블 위에서 홍차 도구를 정리하던 늙은 하녀의 말이었다.
　"그러게, 오늘밤도 외롭겠어."
　"하다못해 사모님께서 병만 안 가지셨어도 마음을 단단히 하실 수 있었을 텐데――"
　"그 내 병 말야, 그냥 신경이 지친 거뿐이래. 오늘도 야마노우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 이삼 일 정도 푹 잠들면――어머."
　하녀는 놀란 눈으로 주인을 보았다. 그러자 아이 같은 후사코의 얼굴과 눈동자에는 어째서인지 이제까지 없던 공포의 색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왜 그러시나요, 사모님?"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데――"
　후사코는 억지로 웃으려 했다.
　"누가 지금 저 창문에서 슬쩍 이 안의 방을――"
　하지만 하녀가 창문을 통해 밖을 들여다 보았을 때에는 단지 미풍에 살랑이는 협죽도 가지만이 인기척 없는 정원의 들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꺼림칙하군요. 분명 또 옆 별장의 도련님이 장난이라도 친 거겠지요."
　"아냐, 옆집 도련님 같은 게 아니었어. 어딘가 본 적 있는 듯한――그래그래, 왜 언제 할멈이랑 하세에 갔을 때가 있었잖아. 그때 내 뒤를 쫓아 온 사람. 그 사냥 모자를 쓰고 있어. 젊은 사람 같아. 아니면――내 착각이었나?"
　후사코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천천히 마지막 말을 했다.
　"만약 그 남자라면 어떻게 할까요. 나리는 돌아오시지 않았고――뭣하면 영감이라도 경찰에 보내서 신고하게 할까요?"
　"정말, 할멈은 겁도 많구나. 그 사람 따위 몇 명 오든 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아. 그래도 만약――만약 내 착각이었다면――"
　하녀는 수상쩍다는 양 눈을 껌뻑거렸다.
　"만약 내 착각이었다면 나는 이대로 미치광이가 될지도 모르겠어."
　"사모님도 참, 농담이 심하십니다."
　하녀는 안심한 것처럼 작게 웃으며 다시 홍차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냐, 할멈이 몰라서 그래. 나는 요즘 들어 혼자 있으면 말야 누가 내 뒤에 계속 서있는 거 같아. 서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듯한――"
　후사코는 그렇게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자신의 말에 빨려 들기라도 한 것처럼 불쑥 우울한 눈초리를 하게 되었다.
　……전등을 끈 2층 침실에는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나는 어두컴컴함이 펼쳐져 있었다. 단지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만이 희미하게 밝게 보이는 건 달이 떠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그 빛을 받은 후사코는 홀로 창문 옆에 기대어 눈앞의 소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남편은 오늘밤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인들은 이미 잠에 들어버렸다. 창밖에 보이는 정원의 달밤도 조용히 바람만 불고 있다. 그런 가운데 둔한 잡음만이 멀리서 낮게 들리는 건 지금도 바다가 울고 있기 때문일지 몰랐다.
　후사코는 한동안 계속 서있었다. 그러자 서서히 신비한 감각이 그녀의 마음을 깨웠다. 그건 누군가가 뒤에 있으며 가만히 바라보는 그 시선을 그녀의 위에 집중한 듯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침실 안에는 그녀 이외에 누군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만약 있다면――아니, 문은 자기 전에 착실히 단속을 해두었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드는 건――그래, 분명 신경이 지친 탓이리라. 그녀는 여명이 걷히는 소나무숲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이렇게 생각을 고쳐 먹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느낌은 아무리 열심히 없애보려 해도 점점 강해지기만 했다.
　후사코는 기어코 마음을 굳게 먹고 머뭇머뭇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침실 안에선 친숙한 삼색 고양이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건 병적인 신경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건 말 그대로 한 순간의 일이었다. 후사코는 곧장 이전처럼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이 방을 가득 채운 어둠 어디엔가 숨어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이번에는 그 무언가의 눈이 창문을 뒤로한 후사코의 얼굴에 곧장 시선을 보낸단 점이었다.
　후사코는 온몸의 전율과 싸우면서 가까운 벽에 손을 얹고는 곧장 전등 스위치를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익숙한 침실이 달빛과 섞인 어둠을 몰아내며 듬직한 현실로 바뀌었다. 침대, 서양 휘장, 세면대――지금은 모든 게 낮과 같은 빛 속에서 기쁠 정도로 또렷이 드러나 있다. 그런 데다가 그게 무엇 하나 그녀가 친과 결혼한 일 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한 행복한 주위를 보면 아무리 꺼림칙한 환상도――아니, 하지만 무서운 무언가는 눈부신 전등 빛에도 드러나지 않았고 단 한 시도 풀어주지 않는 응시의 눈을 후사코의 얼굴에 붓고 있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감추고는 무작정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심정에는 갖은 경험을 초월한 공포가……
　후사코는 일 주일 전의 기억에서 한숨과 함께 해방되었다. 그 박자에 무릎에 있던 삼색 고양이는 그녀의 무릎에서 뛰어내리고는 털이 아름다운 등을 높게 세우며 가볍게 하품을 했다.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하는 법입니다. 영감은 언젠가 정원 소나무를 손질하더니 대낮 하늘서 수많은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리네 마네 그런 소리를 하더군요. 그럼에도 알다시피 미치기는 고사하고 일이 없을 때면 저한테 잔소리만 하지 않습니까."
　하녀는 홍차 그릇을 들어 올리며 아이를 위로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걸 들은 후사코의 뺨에는 처음으로 미소인 듯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정말로 옆집 도련님이 장난을 친 게 분명해. 그런 일로 놀라다니 영감도 역시 겁이 많구나――어머, 떠드는 사이에 벌써 해가 져버렸네. 오늘밤은 그이가 돌아오지 않으니까 상관 없긴 한데――할멈, 목욕물은 준비 됐어?"
　"물론이지요. 뭣하면 제가 온도 좀 봐드릴까요?"
　"됐어. 바로 들어갈 거고."
　후사코는 겨우 가볍게 벽의 등나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밤도 옆집 도련님이 불꽃놀이를 하려나."
　하녀가 후사코의 뒤에서 조용히 떠날 적에는 이미 협죽도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두컴컴한 공허의 손님방만이 남았다. 그러자 두 사람에게 잊힌 그 자그마한 삼색 고양이는 불쑥 무언가를 찾은 것처럼 단숨에 문에 달려 들었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의 다리에 몸을 문지르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방에 펼쳐진 저녁 색 안에는 그 삼색 고양이의 두 눈동자가 꺼림칙한 인광을 내뿜는 것 이외에 어떠한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요코하마.
　닛카요코의 숙직실에는 긴 의자에 누운 서기 이마니시가 그리 밝지 않은 전등 아래서 신간 잡지를 펼쳐두고 있었다. 이윽고 가까운 테이블 위에 그 잡지를 내려놓고는 웃옷 주머니에서 소중히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면서 창백한 뺨에 한사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은 친사이의 아내 후사코가 모모와레로 머리를 묶은 반신이었다.
　
　카마쿠라
　하행선 막차의 기적이 별과 달이 뜬 밤하늘에 올랐을 때 개찰구에 나온 친사이는 나 홀로 자리에 서 가방을 품은 채로 쓸쓸한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전등이 어두컴컴한 벽가 벤치에 앉아 있던 키큰 정장남 하나가 두터운 등나무 지팡이를 끌면서 엉기엉기 친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활달히 사냥모자를 벗고는 소리만 낮추어 인사를 했다.
　"친 씨지요? 제가 요시이입니다."
　친은 거의 무표정하게 가만히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고생 많으셨습니다."
　"방금 전에 전화 드렸는데――"
　"그 후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친의 말투에는 상대의 말을 튕기는 듯한 힘이 있었다.
　"없었습니다. 아내분은 의사가 돌아가고는 저녁가지 할멈을 상대로 무언가 이야기하시는 듯했습니다. 또 목욕이나 식사를 마치고 열 시까지는 측음기를 듣고 계셨습니다."
　"손님은 한 명도 안 왔고요?"
　"네, 한 명도."
　"그쪽이 감시를 그만둔 건?"
　"열한 시 이십 분이죠."
　요시이의 대답도 정확했다.
　"그 후론 막차까지 기차도 없는 거고요."
　"없습니다. 상행도 하행도요."
　"이거 참, 감사하군요. 돌아가면 사토미 군께 잘 부탁한다고 전해주시죠."
　친은 밀짚모자 챙에 손을 얹고는 요시이가 사냥모자를 벗는 것에는 눈도 주지 않고 모래를 깐 바깥으로 큰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예의가 없었던 탓일까. 요시이는 친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살짝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하지만 곧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경쾌한 휘파람을 불면서 정차장 앞의 여관에 두터운 등나무 지팡이를 끌며 갔다.

　카마쿠라.
　한 시간 후 친사이는 그들 부부의 침실 문에 도둑처럼 귀를 얹고서 가만히 상황을 살피는 자신을 발견했다. 침실 밖 복도에는 숨막히는 듯한 어둠이 한 가득 주위를 봉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단 한 점,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건 문 너머의 전등빛이 열쇠구멍으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친은 거의 파열할 듯한 심장 고동을 억누르면서 문에 딱 붙인 귀에 전신의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침실 안에서는 어떤 목소리도 줍지 못 했다. 그 침묵이 또 친에게는 한 층 더 견디기 힘든 가책이었다. 그는 눈앞의 어둠 밑바닥에 정차장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생각지 못한 일이 다시 한 번 또렷이 보이는 듯했다.
　……가지를 교차한 소나무 아래에는 모래에 축축한 안개가 내린 좁은 길이 이어지고 있다. 맑은 하늘에 뜬 무수한 별도 이 소나무 가지의 무게가 내린 이곳에는 빛을 잘 주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에 가까운 건 띄엄띄엄 심어진 참억새에 흘러 오는 바닷바람이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친은 아까부터 나 홀로 밤과 함께 강해진 소나무 향을 맡으며 이러한 적적한 어둠 속에 주의 깊게 걸음을 옮겨 갔다.
　그러는 사이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의아하다는 양 가던 길을 들여다 보았다. 그건 그의 집 벽돌 울타리가 몇 걸음인가 앞에 검게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송악에 둘러싸인 고풍한 울타리로 보이는 주위에 숨어 드는 듯한 발자국 소리가 불쑥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에 힘을 주어도 소나무나 참억새의 어둠이 깊은 탓인지 정작 중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곧장 느낀 건 그 발소리가 이쪽으로 오지 않고 반대편으로 간다는 점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 길을 걸을 자격이 나한테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친은 마음 속으로 일찍부터 의심을 품은 스스로를 꾸지랐다. 하지만 이 길은 그의 집 뒷문 말고는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을 터이다. 그렇게 생각하면――그 찰나에 친의 귀에는 그 뒷문을 여는 소리가 저 너머서 흘러 온 바닷바람과 함께 희미하게나마 전해졌다.
　"이상한데. 저 뒷문은 오늘 아침만 해도 잠궈 뒀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친사이는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개처럼 방심하는 법 없이 주위를 신경 쓰며 가만히 그 뒷문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뒷문은 닫혀 있다. 있는 힘껏 밀어도 움직일 기척을 보이지 않는 건 어느 틈엔가 원래대로 잠겨 버린 모양이었다. 친은 그 문에 기대며 무릎까지 올라 온 참억새 안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지만 방금 전 발소리는 이제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송악이 무성한 울타리 위에는 불빛도 들지 않는 그의 집이 밤하늘에 우뚝 솟아 있다. 그러자 친의 마음에는 갑자기 슬픔이 몰려왔다. 무엇이 그렇게 슬픈가. 그건 그 스스로도 분명히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곳에 선 채로 약한 벌레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눈물이 뺨으로 차갑게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후사코."
　친은 거의 신음하듯이 그리운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 순간이었다. 높은 이층 방에 생각지도 않던 눈부신 전등불이 들어왔다.
　"저 창문은――저건――"
　친은 거친 숨을 삼키고 가까운 소나무 뿌리를 보면서 기어 오르듯이 이 층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이층 침실의 창문은 유리문을 열어 젖혀 그 너머의 밝은 실내를 보이게 했다. 그리고 거기서 새어나오는 빛이 울타리 안에 무성한 소나무 가지를 어두컴컴한 하늘에 희미하게 드리우게 했다.
　하지만 신기한 건 그뿐이 아니엇다. 이윽고 그 이 층 창문에는 이쪽을 보는 듯한 그림자 하나가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쉽게도 전둥 불이 뒤에 있어 얼굴은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모습이 여자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했다. 친은 저도 모르게 울타리의 송악을 붙잡고 넘어지려는 몸을 받치면서 괴롭고 짧게 신음했다.
　"저 편지는――설마――후사코만큼은――"
　잠시 후 친사이는 어렵지 않게 울타리를 뛰어 넘고는 정원의 소나무 사이를 지나 거침 없이 2층 바로 아래에 놓인 객간 창가에 숨어 들었다. 그곳에는 꽃도 잎도 이슬에 젖힌 축축한 죽협도 한 무리가………
　친은 어두컴컴한 툇마루에 건조한 입술을 깨물며 한 층 더 질투심 깊게 귀를 세웠다. 그건 이때 문 너머서 방금 전 그가 들은 듯한 주의 깊은 신발 소리가 두세 번 마루에 울렸기 때문이었다.
　발소리는 곧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흥분한 친의 신경에는 곧 창문을 닫는 소리가 고막을 찌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 후로는――또 긴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은 곧장 색을 잃은 친의 이마에 마른 나무처럼 차가운 식은땀을 짜내었다. 그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찾았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는 건 그 손잡이 곧장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빗인지 핀인지가 불쑥 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걸 줍는 소리는 어째서인지 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소리는 하나 또 하나 말 그대로 친의 심장을 때렸다. 친은 그 때마다 몸을 떨면서 그럼에도 귀만큼은 고집스럽게도 침실 문에 얹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흥분이 극도에 달했다는 건 이따금 그가 주위에 던지는 미치광이와 같은 시선으로도 명백했다.
　괴로운 몇 초인가가 지난 후, 문 너머서 희미하지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가 하면 곧장 침대 위에 누군가가 조용히 누운 듯했다.
　만약 이런 상태가 일 분만 더 이어졌다면 친은 문앞에 선 채로 실신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때 문에서 새어나오는 거미줄처럼 몽롱한 빛이 하늘의 계시처럼 그의 눈앞에 드리웠다. 친은 곧장 마루에 기어서는 손잡이 아래에 있는 열쇠구멍으로 물어 뜯을 듯한 시선을 실내로 보냈다.
　그 찰나 친의 눈앞에는 영원히 저주할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요코하마.
　서기 이마니시는 안주머니에 후사코의 사진을 되돌리고는 조용히 긴 의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소리도 없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스위치를 비트는 소리와 함께 방이 곧장 밝아졌다. 그 방안의 탁상 전등 빛은 어느 틈에 거기에 앉았는지 타자기 앞에 앉은 이마니시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니시의 손가락은 곧 바쁜 운동을 이어갔다. 그와 동시에 타자기는 쉼 없는 울림을 이루며 몇 행의 문자가 단속된 한 장의 종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귀하의 부인이 정조를 지킨다면 더 이상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요. 하지만 귀하는 애욕의 나머지……"
　이마니시의 얼굴은 이 순간 증오 그 자체의 마스크였다.

　가마쿠라.
　친의 침실문은 박살나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엔 침대도 서양 휘장도 세면대도 또 밝은 전등빛도 모조리 일주일 전과 같았다.
　친사이는 방구석에 앉은 채로 침대 앞에서 몸을 맞대고 있던 두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하나는 후사코였다――보다 정확히는 되려 방금 전까지는 후사코였던 '물건'이었다. 이 얼굴이 보라색으로 부풀어 오른 '물건'은 반쯤 혀를 토한 채로 옅은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한 명은 방구석에 있는 친사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친사이였다. 이는 후사코였던 '물건'에 몸을 얹은 채로 손톱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대의 목덜미에 두 손가락을 깊게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쌍한 유방 위에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몇 분인가의 침묵이 지난 후, 바닥 위 친사이는 아직 괴롭게 신음하면서 천천히 살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곧장 옆에 놓인 의자 위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그때 방구석에 있던 친사이는 조용히 벽쪽을 벗어나 후사코였던 '것'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보라색으로 부풀어 오른 얼굴에 한없이 슬픈 눈초리를 보냈다.
　의자 위 친사이는 그 이외의 존재를 알아차리자마자 미치광이처럼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충혈된 눈 안에는 엄청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모습을 한 번 보고는 그 살기는 서서히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로 변해 갔다.
　"누구야 너."
　그는 의자 앞에 멈춰 선 채로 숨이 막히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방금 전 소나무 안을 걷던 것도――뒷문으로 숨어 든 것도――이 창문가에 서서 밖을 보던 것도――내 아내를――후미코를――"
　그의 말은 한 번 끊기고는 다시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가 되었다.
　"너지? 누구야, 너."
　또 한 명의 친사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개를 들고 슬프다는 양 상대 친사이를 보았다. 그러자 의자 앞 친사이는 이 시선에 꽂히듯이 꺼림칙할 정도로 커다란 눈을 지으며 점점 벽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그 입술에선 '너 누구야'하는 말만 반복하듯이 이따금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또 한 명의 친사이는 후사코였던 '물건' 옆에 꿇어 앉아 서는 가만히 그 얇은 목덜미에 손을 돌렸다. 그리고 목덜미에 남아 있는 무수한 손가락 흔적에 입술을 맞추었다.
　밝은 전등 빛으로 가득 찬 묘 내부보다도 조용한 침실 안은 이윽고 자그마한 우는 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여기에 있는 두 친사이는 벽쪽에 선 친사이도 마루에 기는 친사이처럼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도쿄.
　대뜸 '그림자'의 영상이 사라졌을 때 나는 한 여자와 함께 어떤 활동사진관 박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지금 사진은 끝난 걸까?"
　여자는 우울한 눈초리를 내게 보냈다. 그게 내게는 '그림자' 속 후사코의 눈을 연상케 했다.
　"어떤 사진?"
　"지금 거. 제목이 '그림자'였잖아."
　여자는 말 없이 무릎 위에 놓인 프로그램을 내게 건네주었다. 하지만 어디를 찾아 보아도 '그림자'란 제목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는 꿈을 꾼 거려나. 그렇다면 꿈에서 안 깨는 건 묘하잖아. 더군다나 그 '그림자'란 묘한 사진이――"
　나는 짧게 '그림자'의 개요를 설명했다.
　"그 사진이라면 나도 본 적이 있어."
　내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여자는 쓸쓸한 눈 밑바닥에 미소의 색을 띄우며 거의 들리지 않듯 이렇게 대답했다.
　"서로 '그림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자."

(다이쇼 9년 7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