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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예 감상 강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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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상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문예적 자질을 지녀야 합니다. 문예적 자질이 없는 사람은 그 어떤 걸작을 접하고 그 어떤 좋은 스승을 두어도 역시 항상 감상상의 맹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문예와 미술 사이에 차이는 있지만 그림이나 골동품을 사랑하는 부호 중에 이런 사례가 많은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테지요. 하지만 문예적 자질의 유무도 정도 차가 있으니 테이블이나 의자의 유무처럼 딱 자를 수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괴테나 셰익스피어 같은 문호에 비하면 문예적 자질은 없다 봐도 좋습니다. 혹은 좀 더 별 볼 일 없는 작가와 비교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노다 우타로 선생님에 비하면 문예적 자질――적어도 하이카이적 자질은 많이 있지요. 이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문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일단 문예적 자질도 있다고 자아도취해도 지장은 없습니다. 적어도 자아도취하는 게 행복한 건 분명하지요.
 그럼 문예적 자질만 있으면 문예상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간단한가. 그건 또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창작과 마찬가지로 감상에도 상당한 시련이 필요합니다. 물론 단눈치오는 열다섯에 시집을 냈다던가 이케 타이가는 다섯 살 적에 글을 썼다는 등 고대의 영령들은 창작상으로도 천성의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천재라 불러 마땅한 괴물을 말하는 것이니 우리 같은 범인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조숙함은 훈련을 받지 않았다기보다도 놀랄 정도로 짧은 시간 속에 놀랄 정도로 깊은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 게 타당할 테니까요. 그럼 우리 범인은 더 곱지 않은 상황 속에서 훈련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 같은 범인뿐일까요. 어떠한 천재도 천재 이상이 될 야망을 품으면 당연히 받은 훈련 위에 새로운 훈련을 거듭할 터입니다. 또 실제로 천재의 전기――이를테면 모리 오가이 선생님의 '교테전'(말할 것도 없겠지만 모리 선생께선 소위 괴테를 항상 교테로 쓰십니다.)를 읽어 보시지요. 천재란 거의 어떤 상황에서도 훈련을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재능이라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럼 또 그런 훈련을 받은 결과 감상의 정도가 깊어지고 혹은 감상의 범위가 넓어지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물론 깊고 넓어지는 건 자신의 인생을 풍부하게 합니다. 인생은 생명을 돈 대신에 지불하는 커피점과 마찬가지니까 여러 가지를 맛볼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습니다. 하지만 감상의 정도가 깊어지거나 감상의 범위가 넓어지는 건 또 창작상으로도 적잖은 이익을 줄 터입니다. 본래 예술이란 건――아니, 이는 논의하기보다도 실제 사례를 꼽아보는 게 빠를지 모르겠습니다. 실제 사례란 로댕의 이야기입니다. 로댕은 플로렌스에 갔을 때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종래 미완성이라 불리던 말년의 조각을 보았습니다. 물론 미완성 작품이라 불리는 게 꼭 미켈란젤로 본인이 증명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대리석 덩어리 속에 모호한 인간의 모습이 떠오른, 적당히 형용하자면 천지개벽의 과거 이후로 대리석 덩어리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어라 말로 다 하기 힘든 인간이 겨우 눈을 뜬 느낌의 물건입니다. 로댕은 그런 작품을 보았을 때 미완성――보다 정확히는 되려 막연하고 끝이 없는 아름다움을 겪었습니다. 그로부터 그 대리석 덩어리에 반쯤 인간을 조각한 작품――이를테면 '시인과 뮤즈'를 만들게 됩니다. 그럼 로댕이 내디딘 성장의 한 걸음은 미켈란젤로의 소위 미완성 작품을 접한 것에 이어져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본 게 어디 로댕뿐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무수한 남녀가 그런 작품을 진열한 플로렌스의 박물관에 출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로댕처럼 위대한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았죠. 그렇게 보면 로댕이 내디딘 성장의 한 걸음은 이 미를 감상한 사실에 이어져 있다――그렇게 귀결될지 모릅니다. 이는 어떠한 예술가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분명한 건 감상할 수 있다고 창작할 수 있는 건 아닐 테지요. 하지만 또 감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도저히 창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대의 영령들은 감상 훈련을 받고도 더욱이 훈련을 거듭하려 했습니다. 그것도 문예상의 작품 감상뿐이 아닙니다. 이따금 미술과 음악서도 감상 훈련을 더하고 그 기민함을 포착하여 문예상의 창작에 활용했습니다. 특히 괴테의 평생은 이런 예술적 다욕 그 자체입니다. 물론 감상의 정도가 깊어지고 혹은 감상의 범위가 넓어진 결과 창작상의 이익도 많이 볼 수 있다는 건 더 말 할 필요도 없을 테지요. 하지만 창작에 뜻을 둔――적어도 뜻을 두었다 자칭하는 청년 제군이 공부하는 걸 보면 원고용지와 친한 것치고는 책과 친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야 미켈란젤로의 소위 미완성 작품을 놓치는 걸로 그치지 않습니다. 애당초 플로렌스의 박물관 앞을 그냥 지나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평소부터 이런 경향을 굉장히 유감스러워하고 있으니 지루하기는 해도 아래에서 감상 훈련이 창작에도 중요한 이유를 적어보았습니다.
 그럼 감상 훈련이 필요하단 건――제게 형편 좋도록 해석하면 이 감상 강좌란 게 필요하단 건 위에도 적었는데 지금 이 감상 훈련을 돕기 위해 약간의 말을 쓰자면 아래와 같이 세 개로 꼽아볼 수 있습니다. 세 개란 건 즉 (하나)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가? (둘) 어떤 걸 감상해야 하는가? (셋) 어떤 감상 논의를 참고해야 하는가?――이와 같습니다. 물론 감상 훈련을 돕는 말이 위 세 가지에만 국한될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위에 적은 세 요소는 비교적 중대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해도 좋으리라 봅니다. 그럼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가? 그런 첫 질문에 들어가 볼까요. 단지 그전에 잠시 주의를 주고 싶은 건 감상을 시작하는 위치입니다. 맹인은 그림을 감상할 수 없고 귀머거리도 음악 감상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또 문예 감상도 먼저 문자를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걸로 시작합니다. 만에 하나 문예 감상의 뜻을 품고서 문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문자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이렇게 말하면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이런 농담 같은 말마저 누구나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증거로 카진이 만요 시대의 말을 써서 우타를 쓰면 이제 듣기도 힘든 고어를 쓰는 건 좋지 못 하다는 비난을 받고 합니다. 하지만 카진은 고어를 모르는 사람 따위는 알 바가 아닙니다. 카진은 고어든 신어든 단지 카진 본인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말을 쓸 뿐입니다. 혹은 그 말을 쓰는 것 이외에 표현하고 싶은 서정과 표현 못할 말을 쓰는 것입니다. 만약 고어에 귀가 익숙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카진을 비난하기 위해 약해를 읽든 코기를 읽든 하여 먼저 스스로 고어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그런 걸 카진만 비난하는 건 불합리한 데다가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한 우스움이 용납된다면 물론 영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왜 햄릿을 영어로 썼는가"하고 셰익스피어를 비난할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영어는 누구도 비난하는 법이 없지요. 단지 카진의 고어만 비난할 따름――이는 분명히 문예 감상은 먼저 문자를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걸로 시작된다는 원칙을 무시한 사례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당연한 일처럼 들려도 역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 원칙만은 분명히 해둬야 합니다.
 또 겸사겸사 단언해두자면 이 "문자를 읽고 그 뜻을 이해한다"는 말은 관보를 읽고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는 걸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논의의 모두에 문예적 자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걸작을 만나고 아무리 좋은 스승을 두어도 감상상의 맹인으로 그칠 뿐이라 말했습니다. 이 "감상상의 맹인"이란 아키히토나 히토마로의 나가우타를 읽으나 은행이나 회사의 정관을 읽으나 별 차이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해한다'란 단순히 벚꽃을 꽃과 나무의 일종으로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일종의 꽃과 나무라 이해하는 동시에 저절로 어떤 감개를 만드는――철학과 같은 말을 쓰자면 인식적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정서적으로도 이해하는 걸 말합니다.
 물론 그런 감개는 호감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지장은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어떠한 정서만은 동반되어야 합니다. 만약 문예 감상에 뜻을 두면서 꽃과 나무의 일종 이외에 벚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께선 정말로 유감이나 일단 문예 감상하고는 인연이 없다고 체념해주셔야 합니다. 이는 연습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문자를 읽지 못하는 것보다도 한층 더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그 증거로 보시지요. 다른 사람보다 문자를 읽을 수 있는 문과 대학교수는 왕왕――아니 되려 종종 자신보다 문자를 읽지 못하는 대학생보다도 감상상으로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문예상 작품을 어떤 식으로 감상해야 하는가. 그건 물론 큰 문제입니다만 일단 제가 주장하고 싶은 건 순수하게 작품을 접하는 것입니다. 이건 이러한 작품이다, 저건 저러한 작품이다. 그렇게 준비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물며 제멋대로인 비평가의 말은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제멋대로지 않은 비평가의 말도 고려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어찌 되었든 작품이 주는 걸 고스란히 받아 들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럼 그 작품은 읽지 않았더라도 이미 두세 작품을 읽은 작가의 작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질문도 받을지 모릅니다. 그 또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일 작가라고 이전과 전혀 다른 작품을 쓸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스트린드베리는 자연주의 시대와 그 이후 꽤나 차이가 나는 작품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영양 줄리"와 "다마스쿠스까지"를 비교해보시지요. 잔혹한 전자의 현실주의는 몽환적인 후자의 상징주의와 현저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런 걸 어느 한 작품에서 얻은 마음가짐으로 임하면 도무지 실망――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어찌 됐든 조금은 감상상으로 꼬이기 쉽습니다. 물론 절대로 어떠한 마음가짐도 가지지 않는 건 사람에겐 불가능하겠지요. 어떤 작품이나 사람 나름의, 또는 유파 나름의, 또는 디자인이나 삽화 나름의 몇몇 암시를 줍니다. 하지만 제가 주장하는 건 그런 걸 배척하란 게 아닙니다. 단지 그런 걸 되도록 적게 하고 싶단 말입니다. 이는 문예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 이야기인데 살로메의 삽화를 그린 비어즐리란 청년이 어느 날 어떤 사람들에게 몇 장의 작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이 역시 명성 높은 "칼라일의 초상"을 그린 휘슬러가 있었습니다. 휘슬러는 비어즐리의 작품에 별 호의를 지니지 않아 그때도 차가운 태도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보는 사이에 점점 감탄했는지 기어코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하고 말했습니다. 그걸 들은 비어즐리는 이 선배의 칭찬이 어지간히 기뻤는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얼굴에 얹고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비어즐리의 작품은 끝내 휘슬러가 가지고 있던 마음가짐마저 박살 냈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휘슬러가 완고히 마음가짐을 버리지 않았다면――그건 꼭 비어즐리만의 불행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휘슬러에게도 불행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었을 쪽에 그 순간의 비어즐리가 얼마나 기뻤을까 생각했습니다. 또 동시에 휘슬러 또한 역시 기뻤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마음가짐을 품지 말라는 건 다른 뜻이 아닙니다. 제멋대로인 비평가의 말로도 무언가 마음가짐이 생긴 결과 의외로 뛰어난 작품도 간과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순수히 접해도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작품에마저 어떠한 감명도 받지 않는 일이 전혀 없다고는 못 합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억지로 감탄하려 하지 말고 그때는 그대로 책을 덮어두는 겁니다. 실제로 어떠한 걸작이라도 작가의 연령, 환경, 또 혹은 교양 같은 여러 제한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누구나 간단히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게 자랑은 못 되어도 적어도 자신을 속이고 감탄한 척하는 것보다야 부끄럽지 않은 일일 터입니다. 하지만 전에 읽어 이해하지 못 했던 작품도 한 번 다시 읽어 보세요. 개중에는 눈이 떠진 것처럼 시원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도 있을 터입니다. 과거 선종의 스님은 "줄탁동시"라 말했습니다. 이는 큰 깨달음을 병아리에 비유하고 한 마리 병아리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알 안 병아리의 부리와 알 바깥의 부모새의 부리가 동시에 껍질을 깨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문예상 작품을 이해하는 것도 역시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독자 자신의 심경만 끌어가면 감상상의 난관도 죽파처럼 돌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심경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그 절반은 나중에 올 문제――즉 어떤 걸 감상해야 하는가? 및 어떤 감상상의 논의를 참고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로 이어집니다만 또 절반은 인간적 수업입니다. 좀 더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문학청년으로는 안 됩니다. 당대의 천재로도 안 됩니다. 자칭 천재는 더욱 안 됩니다. 인정의 기미함을 안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게 어려운 일이다"하고 비웃는 독자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감상은 그 말처럼 그야말로 한 평생의 어려운 일인 셈입니다.
 순수하게 작품을 접하는 건 그 작품을 앞에 두고 느낀 모든 감정을 보존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라면 이번에는 되도록 세심히 눈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소설이라면 줄거리의 발전 방식이나 인물 묘사 방식은 물론이요 한 줄에 문자를 어떻게 썼는지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는 창작에 뜻을 두는 청년 제군에게는 특히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고대의 작품이라 불리는 작품을 세심하게 읽어 보세요. 한 편의 감명을 드러내는 원천은 온갖 곳에 숨어 있습니다. 명성 높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고금에 없는 장편입니다. 하지만 그 무서운 감명은 훌륭한 세부 묘사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로스토프 백작 가문의 독일인 가정교사를 보시지요.(제1권 제18장) 이 독일인 가정교사는 주요 인물이 아닌 걸로 모자라 되려 출연하지 않아도 지장이 없을 정도의 단역입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백작가 만찬회를 그린 몇 줄 안에서 그의 성격을 역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독일인 가정 교사는 음식이나 디저트(식후에 나오는 과자나 과일) 술 종류를 남김없이 외우려 노력했다. 그건 나중에 세세하게 고향 가족에게 적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고용인이 냅킨에 쌓인 술병을 든 채로 이따금 그냥 지나칠 때면 크게 분개해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되도록 그런 술은 필요 없다는 듯이 굴려 했다. 그가 술을 바라는 건 딱히 목이 마르기 때문도 아니요 근본이 비열했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굉장히 품위 있는 호기심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불행히도 누구 하나 인정해주지 않았다――그는 그런 게 안타까웠다."
 번역은 굉장히 부족합니다만 큰 뜻은 전해졌으리라 봅니다. 앞에도 잠시 적은 것처럼 이런 세심한 아름다움 없이는 "전쟁과 평화" 17권의 감명――그 묵직하고 장엄한 감명을 낳을 수는 없습니다――이는 창작의 이야기지만 이를 감상으로 옮기자면 이러한 세부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다면 그 묵직하고 장엄한 감명은 도무지 또렷이 포착할 수 없습니다. 단지 무언가 막연한 감상을 받는데 그칠 뿐입니다. 이 세심하게 눈을 주는 일은 한 편의 대국을 잊지 않는 이상 섬세해질수록 좋습니다. 러시아에 태어나지 못한 우리는 도무지 톨스토이의 모든 문장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건 도리 없는 운명입니다만 적어도 외국인이라도 엿볼 수 있는 구석은 모조리 간파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중국인은 과거에 "일자지사"라 말했습니다. 시는 한 글자만이라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신운神韻을 전하는 게 불가능하니 그 한 글자를 찾아주는 사람을 "일자지사", 한 글자의 스승이라 부르는 셈입니다. 이를테면 당의 임번이라는 시인이 천태산 건자봉에서 놀았을 때 절의 벽에 한 시를 적었습니다. 그 시를 편의상 보기 좋게 풀어보면 "절정의 초가을이 서늘한 밤을 낳네. 학은 소나무에 맺힌 이슬을 흩뿌려 옷을 적신다. 앞 봉의 달은 강 하나의 물을 비추며 승려는 산의 중턱에서 죽방竹房을 여는구나."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천태산을 떠나 수십 리――라고 해봐야 그리 먼 거리는 아닙니다만 어찌 됐든 수십 리를 걷는 사이에 문득 임번은 "강 하나"보다 "강 절반"이 더 적절하지 싶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고생스럽게 건자봉을 되돌아보니 누군가가 이미 벽에 적은 '강 하나'를 '강 절반'으로 바꿔놓은 후였습니다. 선수를 놓친 임번은 이 개작을 바라보면서 뼈저리게 "태주(천태산이 위치한 땅 이름)에 이만한 사람이 있는가"하고 길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시 한 편의 생사가 한 글자에 걸려 있다면 "일자지사"는 또 동시에 "일편지사", 한 편의 스승이어야 합니다. 이를 감상으로 옮기면 한 자를 알면 한 편을 안다――혹은 한 편을 알기 위해서는 한 자를 알아야 한다고 바꿔 말해야 할 터입니다. 지금 어떠한 한 줄도 등한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나츠메 선생님의 사례를 들어 보려 합니다.

 "나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커다란 말 발자국 안에 빗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봄날' 속 '뱀')
 "바람이 높은 건물에 부딪혀 생각처럼 우직이 지날 수 없어 대뜸 번개에 꺾이더니 머리 위에서 비스듬하게 포장 도로로 불기 시작한다. 나는 걸으면서 쓰고 있던 보울러 햇을 오른손으로 눌렀다."('봄날' 속 '따스한 꿈') 
 이건 하나같이 수많은 말속에서 한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을 그린 수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자의 말발자국은 빗속 시골길을 떠오르게 하고 후자는 또 번개 형태의 바람에 대도시의 거리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러한 사례로 가득 한 게 물론 나츠메 선생님으로만 국한되진 않습니다. 예로부터 명작이라 불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이러한 묘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묘함을 직시하지 못하는 한 충분히 감상하는 건――특히 창작상의 이익을 얻는 건 불가능하다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물론 앞서도 말한 것처럼 세부에 눈을 준다고 해도 물론 그건 큰 뜻을 놓치지 않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세부에 주의하는 걸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라고 칭한다면 이 전체의 큰 뜻을 보는 건 "마음을 억누르는 법"이라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혹은 또 전자는 "어떻게 썼는가?"의 문제, 후자는 "무엇을 썼는가?"의 문제로 구별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론 이 "무엇을 썼는가?"의 문제로 들어가 보죠.
 앞서 "무언가를 섰는가?"의 문제로 들어간다고 말했는데 "문예 강좌"도 슬슬 완결에 가까워져 이 문제를 논하는 건 뒤로 미룰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건 앞서도 이미 조금 이야기하였고(제5호의 '감상강좌'의 두 페이지에서 세 페이지에 이르는 부분) 또 제 '문예일반론'의 '내용'에도 통하는 게 있으니까 필시 논하리라고는 할 수 없을 테지요. 단지 가볍기 실제적인 이야기만 해보자면 "무엇을 썼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교양도 필요합니다만 무언가 마음 가짐이 없으면 작품 안의 사건이나 인물 등을 독자 자신의 몸으로 옮겨보는 것――즉 체험에 맞춰보는 것입니다. 이는 소설이나 희곡 감상은 물론이고 서정시 등의 감상에도 조금의 도움이 될 테지요. 아나톨 프랑스 말 중에 "나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독자는 그걸 읽을 때에 독자 자신의 일을 생각하길 바란다"라는 게 있습니다. 이는 확실히 좋은 충고입니다. 예를 들어 입센은 "인형의 집" 안에 무언가를 썼는지 알고 싶다면 당신의 부부 생활을――혹은 당신의 부모님의 부부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간단히 노라의 비극을 볼 수 있을 게 분명합니다. 또 지금 당신과 맞닿은 양옆의 집에 노라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을 터입니다. 우리는 문예상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또 실제로 우리의 감상력도 그 몸을 씻어보면 문예적 자질 위에 우리의 크고 작음에 비례하고 있을 테지요. 문학청년으로는 안 됩니다. 당대의 천재로도 안 됩니다. 자칭 천재는――제가 또 어느 틈엔가 이전 번의 말을 반복하고 있었군요.
 그럼 무엇을 감상해야 하는가? 저는 과거의 걸작을 감상하는 게 제일 좋다고 봅니다. 이는 골동품의 이야기인데 진위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진품'만 봐야 한다. 설령 참고를 위한 것이더라도 '가짜'에 눈을 주면 되려 속기 쉽다고 합니다. 문예상 작품을 감상하는 것 또한 이러한 이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걸작만 접하면 다른 작품의 길고 짧음에도 무신경해집니다. 이는 일상 경험에 비추어봐도 바로 알 수 있을 테지요. 분뇨의 악취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장미의 향을 알지 못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요. 그럼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문예상 작품만 읽는 건 감상력을 가장 쇠약하게 만드는 손해 보는 일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생각은 감상력을 약하게 하는 것 이외에도 창작적 기백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본래 사대가문의 한 명으로 불리는 예찬이라는 선생은 대나무나 오동이 무성한 곳에 청비각이라는 별장을 만들어 항상 옛사람의 명시나 명화에 친숙해지는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별장을 만드는 건 누구나 은행 통장과 논해야 할 이야기입니다만 어찌 되었든 과거의 걸작만은 반드시 친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걸작이라 해도 무작정 과거의 걸작만 읽으라는 건 아닙니다. 가장 이득이 많음과 함께 가장 취하기 쉬운 건 새로운 문예의 고전일 테죠. 서양 소설을 예시로 들자면――서양 소설에도 종류가 많습니다만 일단 근대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러시아 소설을 예로 들자면 무조건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체호프 등을 읽어보세요. 무작정 새로운 걸 손에 집는 건 저널리스트와 미츠비시 포목전에 맡겨두면 충분합니다. 그보다도 위대한 앞사람의 고심을 맛봐야 합니다. 시대에 뒤처지는 걱정은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갖은 새로운 작품이야말로 금세 시대에 뒤처지고 맙니다. 또 그림의 이야기인데 불과 얼마 전까지 살아 있던 인상파 대가 르누아르는 "우리는 무엇도 새로운 일은 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옛 대가의 발자취를 밟았을 뿐이다. 그런 걸 새로운 것처럼 떠들어댄 건 세간뿐이다."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히 감상에 머물지 않고 창작에 뜻을 두는 청년 제군은 한층 더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합니다. 만약 제군이 만요슈를 읽고 혹은 바쇼를 읽는 걸 보고 시대에 뒤처졌다 웃는 사람이 있으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이렇게 말했다――정도로는 아무도 놀라지 않겠군요. 그럼 르누아르가 이렇게 말했다고 일격을 가해주세요. 단지 그것만으로도 정말 편하겠지 싶어서 르누아르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럼 어떤 감상 논의를 참조해야 하는가? 이것도 제가 믿는 바에 따르면 비평가보다도 되려 작가가 쓴 문예상의 평론이 유익합니다. 물론 결코 저 자신의 '감상 강좌'의 광고는 아닙니다. 단지 작가가 쓴 건 어딘가 작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미묘한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혹은 작가의 고심담이라 해도 좋을 테지요. 그런 논의도 과거의 것을 접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 역시 새로운 문예의 고전적 작가의 논의라도 계발을 받는 게 좋겠지요. 만약 우타의 이야기라도 괜찮다면 마사오카 시키의 "카진에게 쓰는 글"이나 사이토 모키치 씨의 "도바만고"나 시마키 아카히코 씨의 "가도소견"을 보시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우타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 문예를 감상하는데도 무익하지 않을 테죠. 또 예술 이외의 예술에 관한 어엿한 작가의 붓이 이룬 예술상의 논의 혹은 고심담은 의외로 허투루 치부할 수 없습니다. 이 또한 낡은 게 싫다면 로댕, 세잔, 르누아르 등의 어록을 참고하세요. 지금 아래에 곱은 건 청나라의 화가심개주가 쓴 "개주 학화편"의 몇 구절입니다. 이 책은 본래 남화가 사이서 널리 읽히던 책인데 그럼에도 지금까지 통용됩니다. 아뇨, 되려 지금에도 통절한 말이 많은 듯합니다.
 "화려함을 쓰는 걸 기교라 한다. 기교가 섬세해야 비로소 우아해진다. 기교가 기묘하면 반드시 정격을 경시하게 된다. 우아함을 없애고 정격을 경시하면 그 미려함이 극에 다른다지만 그로 대중을 놀래키고 속세를 속이기는 쉬워도 실제로는 미불의 소위 술집에나 걸려 마땅한 그림이 될 뿐으로 사대부의 서정을 그리는 것은 되지 않는다."
 "만약 우직이 나가지 않고 언덕에 미끄러지려 하면 이 또한 병이다. 그러니 질을 갖추고 싶은 자는 일단 이경명수하고 식량굉원해야 한다. 이를 더하는 게 배움과 견문이니 이를 샇아가면 자연스레 식견이 갖춰지고 파란노성하리라."
 "만약 그러한 통인재자의 정을 끌어와 흥을 맡긴다, 또 정취에 젖고 심지어 반드시 이의 규격에 맞추고 움직임을 흉내 낸다면 이러한 건 아직 올바른 정취라 할 수 없다. 사문의 가르침을 받음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깊이를 더 깊게 해야 한다. 이미 자신을 보통내기로 두지 않고 다시 돌아 볼 적에 의아한 부분이 많음에도 이를 나쁘게 보지 않는 것도 이는 척도가 일그러졌을 뿐이다. 이를 인정하고 욕심을 품더라도 아직 평범함을 넘지는 못 한다. 이는 결코 우아함이라 할 수 없다. 그 우아함이 올바르지 않은 것은 또 만약 올바르더라도 아직 우아하지 않은 것은 그 욕심이 어느 정도냐에 걸렸다."
 본래 '감상 강좌' 쯤 된다면 할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꼽은 세 문제만은 다 이야기해버렸으니 이걸로 일단 끝을 보려 합니다. 어쩐지 이렇게 끝을 내니 몸도 제대로 안 씻고 탕에서 나온 듯한 부족함이 느껴집니다만 그건 '문예 강좌'의 상황 상 도리 없는 일입니다. 부디 그런 점은 관대하게 봐주셨으면 합니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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