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미가 아들과 사별한 건 찻잎을 떼기 시작할 즘이었다. 아들 니타로는 여덟 해 가량을 앉은뱅이나 다름 없이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런 아들이 죽은 건 "내세에 복을 받을 거다"란 말을 듣는 오스미에게도 마냥 슬픈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오스미는 니타로의 관 앞에서 향을 하나 올릴 적에는 어찌 됐든 아사히나의 긴 동굴 따위를 겨우 빠져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니타로의 장례식이 끝난 후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건 며느리인 오타미였다. 오타미에겐 남자 아이 하나가 있었다. 그런 데다가 누워 있던 니타로를 대신하여 밭일의 태반을 해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집을 나서면 아이를 돌보는 게 어려워지는 건 물론이요 생활조차 꾸려낼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하물며 사십구 재도 있으니 오타미에게 새남편을 주고 아들이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밭일을 돕게 하려 했다. 새 남편으론 니타로의 사촌동생인 요키치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 만큼 첫 일주일이 지난 다음 날 아침 오타미가 짐을 꾸려 나갔을 때에는 오스미도 보통 놀란 게 아니었다. 오스미는 마침 손자인 히로츠구가 방 엔가와서 노는 걸 보고 있었다. 학교에서 꽃이 핀 벚나무 가지를 꺾어 와 가지고 놀고 있었다.
"오타미야, 아침까지 아무 말 안 한 건 미안하지만 이 아이랑 나를 두고 나가버릴 거니?"
오스미는 힐난하기보다는 호소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오타미는 돌아보지도 않고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하고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스미는 얼마나 안심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 설마 그럴 리가……"
오스미는 또 질척하게 불만 섞인 탄원을 거듭했다. 또 동시에 자기 스스로의 말에 점점 감상에 젖었다. 끝내는 주름투성이 뺨에 눈물 몇 방울을 흘렸다.
"그래. 나도 너만 괜찮으면 계속 여기 있을 거야――애가 여기 있는데 제가 나갈 리가 없잖아요."
오타미도 어느 틈엔가 눈물을 머금은 채로 히로츠구를 무릎 위에서 안고 있었다. 히로츠구는 묘하게 부끄럽다는 양 방의 낡은 다다미에 던져 놓은 벚나무 가지만 보았다……
―――――――――――――――――
오타미는 니타로가 살아 있을 적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일했다. 하지만 새 남편을 들인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오타미는 그런 이야기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듯했다. 오스미는 물론 기회만 생기면 은근히 오스미를 떠보거나 노골적으로 말을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타미는 그때마다 "네, 내년이라도 되면요"하고 적당한 답을 할 뿐이었다. 이는 오스미에겐 걱정이기도 하면서 기쁜 일임이 분명했다. 오스미는 세간을 신경 쓰면서도 어찌 됐든 며느리가 말처럼 해가 달라지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오타미는 내년이 되어도 역시나 밭일을 나가는 것 이외엔 아무 생각도 않는 듯했다. 오스미는 다시 한 번 또 작년보다 한 층 더 새 남편을 들이라 청했다. 친척에게 꾸지람을 듣고 세간이 수군거리는 게 피곤했던 탓도 있었다.
"오타미야, 저 아이가 저렇게 어린데 남자 없이 해갈 수 있겠어?"
"해가고 자시고 어쩔 수 없잖아요. 저 안에 다른 사람이라도 넣어 봐요. 히로도 불쌍하고 어머니께도 미안하고 애당초 나도 보통 피곤한 게 아닐 테니 말야."
"그러니까 요키치를 데리고 가라니까. 그 녀석도 너한테 가면 도박 안 한다고 하잖아."
"그야 어머니한텐 가족이라도 나한테는 남이잖아요. 뭐, 나만 참으면……"
"그게 어디 한두 해로 끝나나."
"괜찮아요. 히로를 위한 일이니까. 제가 지금 고생해두면 밭이 두 개로 쪼개지는 법 없이 전부 히로한테 갈 테고."
"하지만 오타미야(오스미는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면 반드시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위 입이 오죽 시끄러운 게 아니잖니. 네가 지금 한 말을 누가 듣기라도 해봐라……"
그런 문답이 두 사람 사이서 몇 번이나 오갔는지는 셀 수 없었다. 하지만 오타미의 결심은 그 문답 속에서 강해지는 법은 있을지언정 약해지는 법은 없는 듯했다. 또 실제로 오타미는 남자의 손을 빌리지 않고 싹을 심고 벼를 자르는 등 이전보다 더 일을 잘 해냈다. 그뿐 아니라 여름에는 소를 기르고 비오는 날에도 모내기에 나섰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강한 항변이었다. 오스미는 끝내 새남편을 들이는 이야기를 단념했다. 물론 단념한 게 꼭 불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
오타미는 여지 손 하나로 한 집안의 생활을 받쳐냈다. 그건 물론 '히로를 위한 일'이란 일념도 있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또 그녀의 마음에 깊게 뿌리내린 유전의 힘도 있는 듯했다. 오타미는 불모의 산지서 이곳까지 이주한 소위 '이주민'의 딸이었다. "오타미는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힘이 쎄다니까. 요전 번에도 벼 뭉터기를 네 개나 짊어매고 가지 뭐야"――오스미는 옆집 할머니에게 번번히 그런 말을 듣곤 했다.
오스미 또한 오타미를 향한 감사의 마음을 열심히 일하는 걸로 드러내려 했다. 손자와 놀아주고 소를 돌보고 밥을 짓고 세탁을 하고 물을 뜨러 가고――집안일도 적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스미는 굽은 허리로도 즐겁게 일했다.
가을이 깊어진 어느 밤, 오타미는 송엽 다발을 품은 채로 겨우 귀가했다. 오스미는 히로츠구를 업은 채로 좁은 봉당 구석서 목욕물을 데우기 위한 장작을 넣고 있었다.
"날이 춥구나, 늦었네?"
"오늘은 평소보다 일이 많아서요."
오토미는 송엽 다발을 내려놓고 진흙투성이 짚신도 벗지 않고 커다란 난로 옆으로 향했다. 난로 안에는 상수리나무 뿌리 하나가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오스미는 곧장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히로츠구를 업은 허리는 목욕통 테두리를 붙들지 않고는 간단히 일어날 수 없었다.
"어서 씻으렴."
"목욕보다 배가 고픈데. 먼저 감자라도 먹어야겠다――삶아 놨죠, 어머니?"
오스미는 저벅저벅 걸어 반찬으로 삶아 둔 고구마를 냄비째로 난로 옆으로 가져왔다.
"진작에 삶아 놨는데 차가워졌구나."
두 사람은 고구마를 꼬치에 꽂아서 함께 난로불에 얹었다.
"히로도 푹 잠든 거 같은데 눕혀두시지."
"아니, 오늘은 날이 추우니 말이야. 내려놓으면 잠이 잘 안 올 게다."
오타미는 그러는 동안에도 연기가 오르는 고구마를 먹기 시작했다. 그건 하루의 노동에 지친 농부만이 알 수 있는 맛이었다. 고구마는 꼬치 끝자락부터 한 입씩 오타미의 뺨으로 향했다. 오스미는 작게 코를 고는 히로츠구의 무게를 느끼면서 재빨리 고구마를 데워갔다.
"너처럼 일하니 남들보다 배는 고플 테니까."
오스미는 이따금 며느리의 얼굴에 감탄으로 가득 찬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오타미는 말없이 그을러진 장작불 빛 안에서 고구마를 먹어 갔다.
―――――――――――――――――
오타미는 이윽고 몸을 아끼지 않고 남자의 일을 뺏어갔다. 때로는 밤에도 칸텔라의 빛에 의지하여 채소를 뽑고 다닌 적도 있었다. 오스미는 그런 남자다운 며느리에게 항상 경의를 느꼈다. 아니, 경의라기 보단 되려 경외를 느꼈다. 오타미는 들이나 산의 일 이외엔 거의 모든 걸 오스미에게 맡겼다. 요즘 들어서는 자신의 속옷마저 자주 빨지 않았다. 오스미는 그럼에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굽은 허리를 뻗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뿐 아니라 옆집 할머니라도 만나면 "오타미가 저렇게 일해주고 있으니 말야, 내가 언제 죽어도 집이 고생할 일은 없을 거야."하고 며느리를 칭찬했다.
하지만 오타미의 '일병'은 간단히 채워지지 않는 듯했다. 오타미는 또 일 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강 건너 뽕나무 밭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오타미의 말에 따르면 천오백 평 가량 되는 밭을 십 엔 가량의 소작을 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단다. 그보다도 거기서 뽕을 키우고 겸사겸사 누에를 기르면 고치값이 변하지 않는 한 한 해에 백오십 엔은 벌 수 있단다. 하지만 돈이야 어찌 되었든 더 바빠지는 건 오스미로선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겸사겸사 누에를 기르는 건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었다. 오스미는 기어코 불평 섞어 오타미에게 반항했다.
"오타미야, 나라고 도망치는 건 아니야. 아니지만 남자도 없고 애는 아직 젖먹이인데 지금까지도 충분히 많이 일했잖니. 그런데 어떻게 양봉을 하겠단 거야? 조금은 너랑 내 생각도 해야지."
오타미도 시어머니가 우는 마당에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누에를 기르는 건 단념했으나 뽕밭을 만드는 것만은 제 고집을 관철했다. "괜찮죠? 어차피 밭에는 저 혼자 나가니까"――오타미는 불만스럽게 오스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비꼬기도 했다.
또 오스미는 그 날 이후로 새남편을 들이는 걸 생각해 보았다. 이전에도 생활을 걱정하거나 주위 눈치를 보는 통에 새 남편을 들이자 생각한 일은 번번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잠시라도 집안일의 괴로움서 벗어나기 위해 새 남편을 떠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 바람은 이전 바람보다 더 통렬했다.
마침 뒤편의 귤밭에 꽃이 한가득 피었을 쯤이다. 램프 앞에 앉은 오스미는 커다란 밤안경 너머로 은근히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하지만 난로 옆에 안짱다리로 앉은 오타미는 소금에 절인 완두콩을 씹으면서 "또 새 남편 이야기에요? 전 몰라요"하고 상대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의 오스미라면 그것만으로도 많이 포기했으리라. 하지만 이번에는 오스미도 물러서지 않고 설득했다.
"그치만 그렇게만 치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니. 내일 미야시타 장례식에서 우리집이 묘를 파기로 했어. 그럴 때에 남자가 없는 건……"
"뭐 어때요, 제가 할게요."
"너 설마 여자 주제에――"
오스미는 일부러 웃으려 했다. 하지만 오타미의 얼굴을 보자 함부로 웃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 설마 은거라도 하고 싶은 건 아니죠?"
오타미는 무릎을 안은 채로 차갑게 못을 박았다. 갑자기 급소를 찔린 오스미는 저도 모르게 커다란 안경을 벗었다. 하지만 무얼 위해 벗은 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너 그게 무슨 말이니!"
"어머니, 애 아빠 죽었을 때 자지가 한 말 잊은 거 아니죠? 이 집 밭을 둘로 나눠서는 선조님한테도 미안하다고……"
"그래, 그랬다. 근데 말이다 잘 생각해 보니 세상에 영원한 건 없더라. 이래서야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오스미는 열심히 남자를 들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오스미의 의견은 자신의 귀에도 제대로 된 울림을 주지 못 했다. 그건 애당초 오스미의 진심――요컨대 자신이 편해지고 싶단 생각을 꺼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타미는 또 그런 걸 발견하여 여전히 소금 완두콩을 씹으면서 시어머니를 몰아붙일 뿐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곳에는 오스미가 모르는 천성의 달변가도 돕고 있었다.
"어머니야 무슨 상관이에요. 먼저 가실 텐데――근데요? 어머니, 제 입장 돼서 생각해 보면 그런 말 못 해요. 나라고 뭐 남한테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서 이러고 사는 줄 아세요? 뼈마디가 아파서 밤에 잠도 못 잘 때에는 괜한 고집을 부렸다고 뼈저리게 느낄 때도 있어야. 그래도 말이죠 이게 다 집을 위한 거다, 히로를 위한 거다 그런 생각으로 울며불며 하는 일이라고요……"
오스미는 단지 멍하니 며느리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마음은 또렷이 어떤 사실을 보았다. 그건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저히 눈을 감을 때까지는 편해질 수 없단 사실이었다. 오스미는 며느리와 대화가 끝난 후 다시 한 번 커다란 안경을 썼다. 그리고 반쯤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오타미, 세상이란 게 좀처럼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이야. 너도 한 번 잘 생각해보거라. 이제 나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이십 분 후, 누군가 마을의 젊은이 하나가 어두운 와중에 노래를 읊으며 조용히 집앞을 지나갔다. "젊은 숙모는 잡초를 자르는가. 잡초야 나부껴라. 낫아 부러져라"――노래 소리가 멀어졌을 때 오스미는 다시 한 번 안경 너머로 오타미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하지만 오타미는 램프 너머에 길게 다리를 뻗은 채로 하품만 할 뿐이었다.
"어서 주무세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오타미는 겨우 그렇게 말하고는 완두콩을 한 웅큼 쥔 후 거창하게 난로 옆에서 일어났다……
―――――――――――――――――
오스미는 그 후 삼사 년 동안 묵묵히 괴로움을 견뎠다. 그건 말하자면 젊은 말과 같은 고삐를 맨 늙은 말이 경험하는 괴로움이었다. 오타미는 여전히 집을 나가 척척 밭일을 해냈다. 오스미도 남이 보기엔 여전히 차근차근 집안일을 돌보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채찍의 그림자는 끝없이 그녀를 위협했다. 어느 날은 목욕물을 올려놓지 않아서, 또 어느 날은 겨를 말리는 걸 잊어서 또 어느 날은 소를 놓아주어서 오스미는 항상 드센 오타미에게 비꼼이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괴로움을 견뎠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인내와 종복에 익숙한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로는 손자인 히로츠구가 어머니보다 할머니인 자신을 더 따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밖에서 보기에 오스미는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아니 조금이나마 차이가 있다면 단지 이전처럼 며느리를 칭찬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변화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 했다. 적어도 옆집 할머니에겐 언제나 "내세에 복받을" 오스미였다.
또 여름 햇살이 내려오는 한낮, 오스미는 헛간 앞을 두른 포도 울타리 잎을 등진 채 옆집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위선 외양간의 파리 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옆집 할머니는 이야기하면서 짧은 담배를 피우고는 했다. 그건 아들이 남긴 개비를 모은 것들이었다.
"오타미 씨는 어디 갔어? 흥, 마른 풀을 자르러 갔다고? 젊은데 못 하는 게 없구만."
"무슨, 여자가 밖에 나가느니 집안일을 잘 하는 게 낫지."
"아니, 밭일을 좋아하는 건 좋은 일이야. 우리 며느리는 결혼하고 칠 년 동안 밭은 고사하고 잡초 뽑으러 가는 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이 걸 빨고 자기 걸 빨고 매일 아주 느긋하게 지내고 있어."
"그게 낫지. 아이 차림도 좋고 자기도 깔끔하게 다녀야 남들 보기도 좋은 법이야."
"그래도 요즘 젊은 애들은 밭일을 싫어하니까――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소리? 소 방귀 소리야."
"소 방귀? 정말이지――하기사 이 더운 날에 좁쌀 줍는 건 어린애들한테는 힘들겠지."
두 노인은 이런 식으로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었다.
―――――――――――――――――
니타로가 죽고 팔 년 가량, 오타미는 여자 손 하나로 한 가족의 생활을 받쳐왔다. 또 동시에 오타미의 이름은 마을 밖에도 퍼졌다. 오타미는 이제 "일병"에 밤낮을 지세우는 젊은 과부가 아니었다. 하물며 마을 젊은 이들의 "젊은 아줌마"는 더우 아니었다. 대신 며느리의 본보기였다. 요즘 처녀들의 귀감이었다. "저 못 너머 오타미 씨를 봐라"――그런 말이 잔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입에서나 나올 정도였다. 오스미는 이제 옆집 할머니에게도 괴로움을 호소하지 않았다. 또 호소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밑바닥은 또렷이 의식하지는 않을지언정 어딘가 하늘의 이끎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믿음도 이제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는 손자인 히로츠구 이외엔 의지할 게 하나도 없었다. 오스미는 열두 살 먹은 손자에게 필사적인 애정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마지막 버팀목도 번번히 끊기려 했다.
어느 맑은 가을 오후, 책 보따리를 짊어 맨 손자 히로츠구는 허둥지둥 학교에서 돌아왔다. 오스미는 마침 헛산 앞에서 솜씨 좋게 식칼을 움직이며 감을 말리고 있었다. 히로츠구는 좁쌀 겨를 말리는 돗자리를 가볍게 뛰어넘더니 두 발을 모은 채로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아무 맥락 없이 또 진지하게 이렇게 물었다.
"할머니, 우리 엄마가 대단한 사람이야?"
"왜?"
오스미는 식칼을 든 손을 멈추고는 손자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도덕 시간에 그렇게 말했는걸. 히로츠구 엄마는 이 주변서 달리 찾아 볼 수 없는 대단한 사람이래."
"선생님이?"
"응, 선생님이. 거짓말이지?"
오스미는 당황했다. 손자마저 학교 선생님에게 그런 허풍을 배우고 있다니――오스미에게는 이만큼 의외인 일도 없었다. 하지만 잠깐의 당황 후, 발작적인 분노에 휩싸인 오스미는 다른 사람처럼 오타미를 매도했다.
"그럼 거짓말이지. 새빨간 거짓말이야. 너희 엄마는 밖에서 열심히 일하며 남들 앞에서는 대단한 것처럼 굴지만 마음은 지독한 사람이다. 할머니만 몰아붙이고 기만 쎄서……"
히로츠구는 단지 놀라서 얼굴색을 바꾼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오스미는 감정이 몰려 온 걸까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할미는 오직 나만을 의지하며 살아왔다. 그걸 잊으면 안 돼. 너도 언젠가 열일곱이 되면 바로 며느리를 들여서 할머니 숨 좀 쉬게 해다오. 엄마는 징병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느긋한 소리를 하지만 난 못 기다린다! 알겠니? 너는 할머니한테 아빠 몫까지 두 명 몫의 효도를 하는 거야. 그러면 할머니도 나쁘게는 안 대하마. 너한테 뭐라도 줄 테니까……"
"이 감도 나 줄 거야?"
히로츠구는 벌써 바구니 안의 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럼. 주고말고. 너는 나이는 어려도 말은 잘 알아듣는구나. 언제까지고 그걸 잊으면 안 돼."
오스미는 울다울다 되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작은 사건이 있었던 다음 날 밤, 오스미는 기어코 자그마한 일로 오타미와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자그마한 일이란 오타미의 감자를 오스미가 먹었단 것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는 동안 오타미는 냉소를 품으면" 어머니가 일하기 싫으면 그냥 죽으면 돼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오스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질렀다. 마침 그때 손자인 히로츠구는 할머니 무릎에 고개를 얹은 채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오스미는 그런 손자마저 "히로, 히로, 일어나"하고 흔들어 깨우고는 한사코 이렇게 매도했다.
"히로, 일어나라, 히로 일어나. 엄마가 한 말 좀 들어라. 엄마가 할미보고 죽으란다. 잘 들어라. 그야 엄마 대신에 돈은 조금 못 벌었지만 그 삼천구백 평 되는 밭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가 개간한 거다. 그런데 네 어미가 뭐라냐. 편하고 싶으면 죽으란다――그래, 애미야. 내가 죽으마. 내가 뭐가 무서워서 못 죽겠냐. 아니, 네 지시는 안 받을란다. 내가 나를 죽이는 거야. 죽고 싶어서 죽는 거다. 죽어서 너한테 들러붙어주마……"
오스미는 큰 소리로 매도하며 울음을 터트린 손자와 마주 안았다. 하지만 오타미는 여전히 난로 옆에 누워서 딴청만 피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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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스미는 죽지 않았다. 대신 다음해 토왕의 마지막 날, 건강만이 자랑이던 오타미는 장티푸스에 걸려 발병한지 팔 일만에 죽어버렸다. 물론 당시 장티푸스 환자는 작은 마을에서도 몇 명이나 발생했다. 심지어 오타미는 발병하기 전에 역시나 장티푸스로 죽은 대장장이 장례식에서 구멍을 팠다. 대장간에는 장례식 날 겨우 병원에 옮겨진 어린 제자도 남아 있었다. "그때 옮은 거지"――오스미는 의사에게서 돌아와 얼굴을 붉힌 환자 오타미를 향해 그런 비난을 했다.
오타미의 장례식 날에는 비가 내렸다. 하지만 마을 사람은 촌장을 시작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괴롭게 죽어간 오타미를 안타까워하고 소중한 가장을 잃은 히로츠구나 오스미를 애처롭게 여겼다. 특히 마을 총리는 곧 지자체에서 오타미의 근로를 표창할 거라 말했다. 오스미는 그런 말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뭐 운이 없었다고 체념해야지. 우리도 오타미의 표창 일로 작년부터 군에 들락날락했어. 촌장님이나 나는 기차 값까지 써가며 다섯 번이나 군수님을 뵈러 갔고. 다들 고생이 많았지. 하지만 우리도 포기했으니까 다들 포기하는 게 나아"――사람 좋은 총리는 농담도 심하다고 덧붙였다. 또 초등학교 교원은 불쾌하다는 양 그 모습을 보았다.
오타미의 장례식을 마친 밤, 오스미는 불단이 놓은 방 구석서 히로츠구와 함께 모기장 안에 들어가 있었다. 평소에는 물론 둘이서 불을 끈 채 안에서 잠들곤 했다. 하지만 오늘 밤 불단에는 아직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런 데다가 묘한 소독약 냄새도 낡은 다다미에 스며 들어 있었다. 그런 탓인지 오스미는 좀처럼 잠에 들 수 없었다. 오타미가 죽은 건 확실히 그녀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이제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잔소리를 들을 걱정도 없었다. 거기에 저금은 삼천 엔 가량 되었고 밭도 삼천구백 평이나 되었다. 이제는 손자와 매일 같이 쌀밥을 먹어도 되었다. 평소에 좋아하는 송어절임을 먹을 수도 있었다. 오스미는 이만큼 안도해본 적이 없었다. 이만큼 안도한?――하지만 기억은 또렷이 구 년 전 어느 밤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밤도 한숨 돌린 건 오늘 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건 분명 피를 나눈 아들의 장례식이 끝난 날이었다. 오늘 밤은?――오늘 밤도 한 손자를 낳은 며느리의 장례식이 끝난 참이었다.
오스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떴다. 손자는 그녀의 바로 옆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오스미는 그 얼굴을 바라보는 사이 자신의 한심함을 느꼈다. 또 동시에 자신과 나쁜 인연을 맺은 아들 니타로나 며느리 오타미도 한심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그 변화는 서서히 아홉 해 동안 쌓인 증오나 분노를 밀어냈다. 아니, 그녀를 위로하던 장래의 행복마저 밀어냈다. 오스미도 니타로도 오타미도 모두 한심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부끄러움을 전부 드러낸 자신이야말로 가장 한심한 인간이었다. "오타미, 왜 죽어버린 거니?"――오스미는 저도 모르게 불단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불쑥 뚝뚝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오스미는 네 시가 된 걸 들어서야 겨우 피로에 젖어 잠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 초가집의 하늘은 차갑게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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