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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점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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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가리

 오늘은 오사가리[각주:1]다. 물론 사이지키를 찾아보니 이튿날은 오사가리라 안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봉래를 장식한 2층서 보면 역시 마음만은 오사가리다. 아래서는 갓난아기가 울고 있다. 혀에 종양이 생겼다는데 아감창이 생기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싶다. 가만히 코타츠 안에 들어가 "츠즈라후미"를 읽어도 마음은 어느 틈엔가 그 우는소리를 따라가곤 한다. 우리 집은 순거가 아니다. 속세의 괴로움은 오사가리인 오늘도 거리낌 없이 나를 어렵게 한다. 과거에 어느 오사가리 날, 방에서 누나나 누나 친구들과 하고를 가지고 논 적이 있다. 그 동료 중에는 나 이외에도 나보다 몇 살인가 많은 얌전한 소년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 자리의 소녀들과 나란히 사이가 좋았다. 그런 상황서 하고를 떨어트리면 하고이타를 양보하는 규칙이 있으니 하고이타는 자연스레 나보다 그에게 향하기 쉬웠다. 그러던 사이 어떤 박자인지 그가 날린 금색 하고가 나게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곧바로 커다란 받침대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 나게시의 금색 하고를 꺼내려 했다. 그때 나는 키가 작은 그가 받침대 위에서 발을 세우는 걸 보고는 대뜸 받침대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는 나게시에 손을 걸친 채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누나와 누나 친구들은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나를 혼내고 달랬다. 하지만 나는 결코 받침대를 넘기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매달린 끝에 두 손이 아픈 걸 견딜 수 없었는지 기어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사가리의 기억 속에서도 어린 나이에 질투를 느끼는 속세의 괴로움이 있었던 셈이다. 내가 울린 소년은 그 후 학문을 쌓지 않고 어떤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이제는 벌써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집의 오사가리는 갓난아기의 울음으로 가득 차있다. 그의 집 오사가리는 어떨까.(1월 2일) 

 오사가리에 인상 깊은 대나무 거리와 하늘

 

     나츠오

 카토리 호츠마 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카노 나츠오는 생전에 백 엔의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의 백 엔 월급이라면 물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신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나츠오가 말년에 병상에 누우면 한동안 머리맡에 크고 작은 동전들을 쭉 줄지어서는 빤히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본 제자는 선생님은 나이를 먹고도 아직 욕심을 떨치지 못 했다, 꼴사납다고 평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츠오가 황금을 사랑한 건 치바 카츠가 지폐를 사랑한 것처럼 황금의 힘을 사랑한 건 아닐 터이다. 자리를 벗어나면 이번에는 그 황금 위에 뭘 새겨볼까 하고 일할 궁리를 하고 있었으리라. 스승에게 욕심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 건 그 제자가 꼴사나운 것이다. 카토리 씨는 병상에 누운 나츠오의 심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나도 아마 그럴 거 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후 어떤 남자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럴 법하다고 곧장 찬성해주었다. 그가 말하길 그가 방탕을 멈추지 않는 것도 실은 인생을 돌아보지 않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걸 모르는 속세가 곧장 자신을 비난하는 건 나츠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1월 6일)

     명도

 요전 번에 우치다 햣켄 씨의 '명도'(신 소설 신년호 게재)란 글을 읽었다. '명도', '산도쿄전', '불꽃놀이', '건', '뚝', '표범' 등 모두 꿈을 적은 것들이다. 소세키 선생님의 '몽십야'처럼 꿈이란 소재를 다룬 게 아니다. 실제로 본 꿈을 그대로 적은 이야기다. 완성도는 여섯 편의 글 중 '명도'가 가장 훌륭하다. 고작 세 페이지 가량의 짧은 글이지만 그 안에는 동양적이고 기분 좋은 Pathos가 흐르고 있다. 하지만 햣켄 씨의 글이 재밌는 건 그런 정취 때문만은 아니다. 그 여섯 편의 글을 읽으면 문단에서 벗어난 것만 같다. 작가가 문단의 티끌 속에서 우리와 같은 호흡을 하고 있다면 도무지 그런 꿈 이야기는 쓰지 못 했을 것 같다. 쓰더라도 그런 식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 같다. 즉 내게는 현재의 문단 유행에 사로잡히지 않은 점이 재밌었던 것이다. 이는 나 자신의 이야기인데 모종의 박자로 이전에 낸 단편집을 읽고 있으면 어딘가 유행에 사로잡혀 있다. 사실을 말하면 나도 다른 사람의 평가에 쩔쩔매지 못할 정도로 자아도취의 한 조각도 지니지 못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에 따르면 역시 어딘가 사로잡혀 있다.(시대의 영향이란 의미는 아니다. 좀 더 얄팍하게 사로잡혀 있다.) 나는 그게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햣켄 씨의 글처럼 자유로운 작품을 마주하면 괜히 더 재밌게 느껴진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명도'의 평가는 썩 좋지 않은 모양이다. 어쩌다 눈에 들어온 아무개 신문의 비평가는 전혀 와닿지 않는 듯했다. 이건 또 한 편으로는 당연하지 싶다. 동시에 한 편으로는 당연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1월 10일)

     나가이 다이스케

 우리 전후 연령의 사람들 중엔 소세키 선생님의 '그 후'에 마음이 동한 사람이 많은 듯하다. 그렇게 동한 사람들 중에서도 내가 여기에 쓰고 싶은 건 그 소설의 주인공 나가이 다이스케의 성격에 반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사람들 중에는 반한 걸로 모자라 스스로 다이스케를 자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주인공은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이다. '그 후'가 발표된 당시 세간에 유행하던 자연파 소설 중에는 우리 주위에도 수없이 많을 법한, 그런 의미에선 인생에 충실한 성격 묘사가 많았다. 하지만 자연파 소설 중에서 '그 후'처럼 주인공의 모방자를 낳은 작품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비단 '그 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베르테르나 르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 시대를 동요시킨 성격이다. 하지만 아무리 서양이라도 그들과 같은 인간은 많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많지 않은 인간이 되려 모방자를 낳은 건 많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많지 않다는 건 어디에도 없단 뜻은 아니다. 어디나 있다고는 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딘가에 있을 법한 마음을 품은 말이다. 사람은 그 주인공이 가까이서 살지 않단 점에 마음이 흔들릴 만한 의미를 찾게 된 것이리라. 그리고 또 주인공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듯한 점에서 마음이 흔들릴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리라. 그러니 소설이 인생에 또 인간의 욕심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가까이에 살지는 않되 어딘가에 살 법한 성격을 창조해야만 한다. 이게 통속이란 의미에선 이상주의적 소설가가 짊어져야 하는 큰 임무이다. 카라마조프를 쓴 도스토옙스키는 이 큰 임무를 훌륭히 이루어냈다. 앞으로의 일본에선 누가 이런 성격을 만들어낼까.(1월 13일)

     비웃는 악마


 하나의 영령을 지닌 사람들 중에는 두 개의 자신이 깃드는 일이 있다. 하는 항상 활동적이고 정열을 품은 자신이다. 다른 하나는 냉혹하며 관찰적인 자신이다. 이 두 가지 자신을 가진 사람들은 자칫하면 창작력 대신에 단지 현명한 비평력을 얻는데 그치기 쉽다. M. de la Rochefoucauld가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몰리에르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이 두 분열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었다. 신기하게도 이 두 자신을 동시에 살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가 고금서 독보하는 이유는 그런 장엄한 모순 속에 있다. Sainte-Beuve가 쓴 몰리에르논을 읽어 보니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도 나 자신 속에서 냉혹한 자신이 산다는 걸 느낀다. 이 악마를 물리치는 건 내 얼굴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만약 나이를 먹음과 함께 악마의 힘이 강해진다면 나 또한 메리메처럼 "내 친구 아무개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시작하는 일도 싫어질 거 같다. 특히 허무의 유전이 있는 동양인인 내게는 간단한 일일지 모른다. L'Avare나 École des Femmes를 쓴 몰리에르는 동종이 적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성격이 좋지 않은 아내 때문에 고민하고 폐병으로 괴로워하고 작가와 배우와 극장 감독이란 세 역할의 번잡함에 쫓기면서도 이 비웃는 악마의 손에 빠지지 않았던 몰리에르는 정말로 부러워 마땅한 몇 안 되는 행복자이다.(1월 14일)


     이케니시 곤스이

 "노련해지면 되려 말하기 어렵다. 그런 말이 있으나 그건 수없이 속사를 읊어온 자를 일컫는 말이다. 아무리 운취에 젖은 사람이라도 열일곱 자에 걸맞지 않은 많은 뜻을 열일곱 자에 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의 하이진도 모두 이를 시도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한두 종의 구만 남겼을 뿐이다. 이케니시 곤스이가 실로 그 작가이다." 이는 마사오카 시키의 말이다.(하이카이대요, 156 페이지) 시키는 그 후 예시로서 곤스이의 구 두 개를 실었다. 그건 "이모를 버려 탕파에 빛나게 한 별과 달의 밤"과 "쿠로즈카와 츠보메온나 잡은 화롯불이랴."란 두 구이다. 나는 곤스이의 이러한 구가 '열일곱 자에 걸맞지 않은 많은 뜻을 열일곱 자에 담은 것"이라면 어떠한 반론도 지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선 부손이나 쇼하 또한 '열일곱 자에 걸맞지 않은 많은 뜻을 열일곱 자에 담'지 않았는가. '목 베이게 돼 부부가 되어 맞은 여름날일까'나 '푹 잠든 남자 원망스러운 방망이 소리 들리네'도 역시나 복잡한 내용을 열일곱 자에 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빛나는"이니 "잡은" 같은 또렷한 말이 없기에 한 층 더 성공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보면 시키가 평가한 말은 곤스이에게도 해당하기는 하나 곤스이만의 특색이라 단정 짓는 건 지나친 생각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 곤스이의 특색은 무엇인가. 그건 그가 열일곱 자 안에 만인이 알지 못 하는 일종의 매서움을 담는 수완이지 싶다. 시키가 꼽은 두 구를 보아도 가장 먼저 나를 움직인 건 그 안에 담긴 꺼림칙함이다. 한 번 곤스이 구집을 펼쳐 보면 이런 종류의 구는 달리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귀인의 종 박살 내는 죄 속에 밝아 온 구름
뜨거움 품고 사랑 찾는 고양이 요수로 가네
밤에 핀 벚꽃 괴이해 하는 홀로 가는 낚시꾼
버려진 아이 모기한테 던져준 산제물이랴<
사람의 혼은 사라지고 가지 끝 등롱 걸리네
천박히 벌레 우는 와중에 스님 하나 서있네
불 그림자 뒤 모닥불 지켜보는 어부 한 사람

 구의 좋고 나쁨은 어찌 되었든 이러한 구가 주는 느낌은 부손도 아닐뿐더러 쇼하도 아니다. 겐로쿠에서도 곤스이 단 한 사람뿐이다. 나는 곤스이 작품 중에서 이렇게 매서운 구만이 가장 신묘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곤스이가 다른 대가와 가장 차이를 두는 건 여기에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곤스이의 통칭은 하치로베, 호는 자등헌이었다. 쿄호 4년 죽었으며 향년 일흔셋이었다.(1월 15일)

     탁지 종교소설

 오늘 혼고 거리를 걷다가 문득 탁지의 종교소설이란 책을 발견했다. 값을 물으니 열다섯 전 달란다. 물질생활상 미니멈하게 사는 나는 요전 번에 카후쿠 그릇을 사려다 십팔 엔 오십 전이란 말에 기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열다섯 전 정도라면 못 살 신분도 아니었다. 나는 곧장 세 개의 백동을 대신해 얄팍한 책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지금 책상 위에 낡은 표지를 드러내고 있다. 탁지 종교소설은 서력 천구백칠 년 중국에서는 광서 삼십삼 년, 홍콩의 예견회(Rhenish Missionary Society)가 출판한 책이다. 역자는 독일 선교사 Genãh란 사람이다. 단 번역에 이용한 책은 Nisbet Bain의 영역판이라고 한다. 내용은 명성 높은 스승과 인간과 열두 편의 작품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은 물론 희귀한 책도 아닐 터이다. 문구당에 부탁하면 곧장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표지를 펼치니 원작자 톨스토이의 사진이 있는 게 어쩐지 유쾌하다. 적당히 페이지를 펼쳐보니 목색мужик, 가부단кафтан, 고미사кумыс 등의 서양어 음역이 나오는 것도 내게는 역시 신기했다. 이런 번역이 이뤄진 걸 원작자 톨스토이는 알고 있었을까. 홍콩과 상하이의 중국인 중에는 우연찮게 이런 책을 읽은 덕에 평생 탁지를 스승으로 모신 청년이 몇 명인가 있을지도 모른다. 탁지는 그런 남쪽의 청년에게서 많은 경애를 품은 편지를 받지는 않았을까. 나는 탁지 종교소설을 앞에 두고 이런 문장을 쓰면서 그런 공상을 해보곤 했다. 탁지란 톨스토이 백작을 말한다.(1월 18일)

 "서양 사람은 자유를 잃었다. 회복의 기미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동양 사람은 이 자유를 회복할 사명을 지녔다." 이는 겸사겸사 인용해 본 톨스토이의 서란 속 한 구절이다.(1월 30일)

     인세

 Jules Sandeau의 사촌이 Palais Royal의 카페로 가니 출판 회사인 Charpentier가 발자크와 인세를 상담하고 있었다. 그 후 그들이 잊고 있던 종이를 봤더니 숫자가 무작정 잔뜩 적혀 있었다. 상드가 발자크와 만나 그 숫자의 의미를 묻자 그건 십만 부 팔렸을 때 저자가 받는 인세라고 한다. 당시 발자크가 정한 인세는 3 프랑 반짜리 octavo판 한 권이 팔릴 때마다 정가의 1할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니 일본 작가가 현재 받고 있는 인세와 큰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건 발자크가 외제니 그랑데를 쓸 때였으니 천팔백십이 년이나 십삼 년 쯤의 이야기다. 일본의 인세란 서양보다 대략 백 년 가량 뒤처져 있다 생각하면 된다. 원고 졸부라 해도 일본에선 대부분의 소설가가 빈곤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1월 30일)


     일미관계

 일미관계라 해본들 외교 문제를 논하는 건 아니다. 문단에만 존재하는 일미관계를 이야기하고 싶다. 일본에서 배울 수 있는 외국어 중에선 영어만큼 범위가 넓은 것도 없다. 그러니 일본 문사들도 대부분 영어에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이든 미국이든 본래의 영어 문학은 쇼나 와일드 이외엔 별로 일본서 유행하지 않는다. 읽히는 건 역시 대륙문학이다. 그리고 영어로 번역된 대륙문학은 미국을 위한 경우가 많다. 왜냐면 휘트먼 이후로 예술적으로 거칠어진 미국은 다른 나라의 천재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상 일본의 문단은 그리 현저하진 않더라도 근래엔 미국의 유행에 영향을 받고는 한다. 이바네스의 이름이 들리기 시작한 것도 이런 사례 중 하나이다.(내가 고등학생이었을 적에는 그 '성당의 그림자' 이외에 영어로 번역된 이바네스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바다 건너의 불이 조용해지면 이번에는 파피니 같은 이탈리아 문학이 일본에도 소개될지 모른다. 이는 대륙 문학이 아니지만 이전 문단의 한각에 아일랜드 문학이 휩쓸고 간 것도 불씨는 미국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일미 관계는 영어 문학이 유행하지 않는 만큼 의외로 주목을 받지 못 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어쩌다 마루젠에 가봤더니 이바네스, 블레스트 가나, 알라르콘, 피오 바로하 같은 스페인 소설이 잔뜩 줄지어 있었기에 이런 글을 쓰고 싶어졌다.(2월 1일)

     Ambroso Bierce

 일미 관계를 논한 김에 미국 작가 중 한 명을 꼽아보자. 앰브로즈 비어스는 색이 확고한 작가이다. (하나) 단편 소설을 구성할 때 그만큼 날카로운 기교가도 적다. 평론가가 포의 재래라 말하는 건 이 점에서도 분명하다. 그런 데다가 그가 즐겨 그리는 건 역시 포와 마찬가지로 꺼림칙한 초자연의 세계이다. 이 방면의 소설가로는 영국의 Algernon Blackwood가 있는데 도무지 비어스의 적이 아니다. (둘) 그는 또 비평이나 풍자시를 쓸 때면 신랄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레진스키라는 폴란드계 시인은 그의 독설에 놀아난 결과 자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비평을 읽어 보면 정밀도의 절묘함은 없더라도 날카로운 관찰안으로 풍부한 건 알 수 있다. (셋) 그는 같은 시대 작가 중에선 가장 세계주의자였다. 남북전쟁에 종사한 적도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잡지의 주요 집필자였던 적도 있다. 런던에 글을 팔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개중에는 그의 말버릇이 너무 남을 다치게 한 나머지 암살 당했다는 소문도 있다. (넷) 그의 저서에는 열두 권의 전집이 있다. 단편소설만 읽고 싶은 사람은 In the Midst of Life 및 Can Such Things Be? 두 권을 읽어보면 좋다. 나는 이 두 권 속에서 특히 전자를 권하고 싶다. 후자에서 걸작은 하나둘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섯) 그의 평전은 한 권도 없다. 오 헨리 등과 비교해보면 여기서도 그는 참 박복하다. 그를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켐브릿지판 History of American Literature 제2판의 386~7 페이지, 혹은 Cooper 저 Some American Story Tellers의 비어스론을 보면 된다. 앞서 적어두는 걸 잊었는데 년대는 1838~1914?이다. 일본 번역판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소개도 이게 처음이리라.(2월 2일)

     모시

 나는 '용'이란 소설을 썼을 때 '모시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팻말 앞에 서있다"고 적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주의주기를 모시옷을 입게 된 건 가마쿠라 시대 이후라 한다. 그 증거로 겐지모노가타리의 하츠세모데 이야기에도 모시 옷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의 주의에 감사했다. 하지만 내가 모시옷 운운을 적은 건 "신귀산록기", "분강절록기" 등의 에마키모노에 따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주의를 받아도 완고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후 모종의 이유로 미야모토 세이스케 씨와 이야기하게 되자 모시옷은 곤쟈쿠모노가타리에도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곤자쿠를 보니 혼쵸의 부 6권의 기록 종진서상인의관음조둔적난지명어에 "하지만 낮에 모시가 바람이 휘날렸을 때 희미하게 보인 것만으로도 이 죄를 용서해 운운"하고 되어 있다. 나는 마음이 개운해지는 걸 느꼈다. 동시에 뜻은 굽히지 않았음에도 역시 문헌에 증거가 없는 게 이제까지 조금 섭섭했음을 알았다.(2월 3일)

     감초

 언덕길의 흙이 숫돌 가루처럼 말라 있다. 한적한 산길 마을이라 길에는 돌멩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양쪽에는 오래된 초가집이 빼곡히 햇살을 받고 있다. 우리 두 중학생은 그 길을 척척 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갓난아기를 업은 소녀 하나가 짙은 그림자를 발밑에 드리우며 조용히 언덕을 내려왔다. 소녀는 소매에 감긴 손에 줄기가 긴 감초를 꽂고 있었다. 뭘 위한 건가 싶었더니 한낮의 햇살이 곤히 잠든 갓난아기의 얼굴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한 감초였다. 우리는 엇갈리면서 가만히 미소를 나누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것도 모르는 듯이 역시나 조용히 지나갔다. 뺨이 희미하게 햇살에 탄 의젓한 소녀였다. 그 얼굴은 어쩐지 지금도 또렷이 떠오를 때가 있다. 사토미 군이 말하는 소위 한눈에 반했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걸지 모르겠다.(2월 10일)

(다이쇼 10년)

  1. 새해 첫날부터 3일까지 사이에 내리는 비나 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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