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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참마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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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교[각주:1] 말인가 닌나[각주:2] 초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쪽이든 시대는 이 이야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독자는 단지 헤이안이라는 먼 옛날이 배경이란 것만 알아두면 된다――그 시절 섭정 후지와라노 모토츠네를 모시는 사무라이 중에 고이五位라는 낮은 직책을 가진 아무개가 있었다.
 아무개라 적지 않고 어디의 누구라고 분명히 이름을 밝히고 싶긴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옛 기록에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지 않다. 아마 전해질만한 자격이 없을 정도로 평범한 남자인 것이리라. 애당초 옛 기록의 저자는 평범한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과 일본의 자연파 작가와 많이 다르다. 왕조 시대의 소설가는 의외로 한가하지 않다――어찌 되었든 섭정 후지와라노 모토츠네를 모시는 사무라이 중에 아무개라는 고이가 있었다. 이 사람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고이는 풍채가 보잘 것 없는 남자였다. 가장 먼저 키가 작았다. 또 코가 붉고 눈고리가 내려가 있었다. 콧수염도 물론 짙지 않았다. 뺨이 헬쓱하여 턱이 유달리 얇아 보인다. 입술은――하나씩 세다 보면 끝이 없다. 고이의 외관은 그만큼이나 비범할 정도로 보잘 것 없었던 것이다.
 이 남자가 언제 어떻게 모토츠네를 모시게 되었나. 그건 아무도 알지 못 한다. 하지만 꽤나 이전부터 마찬가지로 색이 바란 스이칸에, 마찬가지로 맥을 못 갖추는 에보시를 쓴 채 같은 역할을 질리지도 않고 매일 반복한 건 사실이다. 그 결과일까. 이제는 누구도 이 남자에게 젊었을 적이 있었다는 걸 믿지 못 한다.(고이는 마흔이 넘었다.) 대신 태어났을 적부터 저 추워 보이는 붉은 코와 형태뿐인 콧수염을 스자쿠오오지의 사거리에 부는 바람에 휘날렸을 거 같다. 위로는 주인 모토츠네부터 아래로는 소를 기르는 아동까지 모두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믿어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풍채를 가진 남자가 주위에게 받는 대우는 적을 필요도 없으리라. 사무라이들은 고이에게 파리만 한 관심도 주지 않았다. 계급을 가리지 않고 도합 20명에 가까운 부하들마저 그의 출입에는 신기할 정도로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고이가 무어라 말해본들 결코 자기들끼리의 잡담을 멈추지 않는다. 공기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에겐 고이의 존재 또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리라. 아래 것들마저 그러니 관직에 앉은 윗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는 건 되려 자연의 이치이리라. 그들은 어린아이 같은 무의미한 악의를 냉담한 표정 뒤에 숨기고는 고이가 무슨 말을 하든 손짓만으로 볼일을 마쳤다. 인간이 언어를 가진 건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 또한 손짓으로는 볼일을 다 하지 못 하는 일이 왕왕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고이의 이해력 문제라 여긴 듯하다. 때문에 그들은 볼일이 없으면 이 남자의 일그러진 에보시 끝부터 갈라진 짚신 끝자락까지 위아래로 훑고는 코로 웃으며 대뜸 등을 돌리고 만다. 그럼에도 고이는 화가 나지 않았다. 모든 부정을 부정으로 느끼지 않을 정도로 기개가 없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물며 동료 사무라이 쯤 되면 나서서 그를 가지고 놀았다. 나이가 많은 동료가 그의 볼품 없는 풍채를 소재로 삼아 낡은 장난을 하려 드는 것처럼, 연하 동료 또한 그걸 기회 삼아 소위 즉흥 화술 따위를 연습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고이의 눈앞에서 코와 콧수염, 에보시와 스이칸을 품평하는 걸 도무지 질려 하지 않았다. 그뿐일까. 그가 대여섯 해 전에 헤어진 돌출턱 여종과 그 여종과 관게가 있었다는 주정뱅이 승려 또한 이따금 그들의 화제가 되었다. 그런 데다가 지독히 성질이 나쁜 장난마저 쳤다. 그런 걸 지금 하나하나 열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술병 속 술을 마시고 오줌을 넣어 둔 것만 말해두면 그 외에는 대강 상상이 가리라 믿는다.
 하지만 고이는 이러한 야유에 무감각했다. 적어도 옆에서 보기엔 무감각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말을 들어도 얼굴색마저 바꾸지 않았다. 조용히 옅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해야 할 일만 마치고 있다. 단지 동료들의 장난이 지나쳐 머리에 종이 조각이 꽂히거나 검 자루에 조리가 묶여도 그는 웃는지 우는지 알지 모를 웃음을 지으며 "그대들은 못 됐구만"하고 말했다. 그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듣는 자는 누구라도 잠시 어떠한 가련함을 느끼고 만다.(그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건 이 붉은코 고이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모르는 누군가가――다수의 누군가가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빌려 그들의 무정함을 나무라고 있다.)――그런 감정이 몽롱하게나마 그들의 마음에 잠시 스며 들기 때문이리라. 단지 그런 마음을 한사코 유지하는 자는 극히 적었다. 그런 가운데 한 사람, 어떤 무이無位[각주:3]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그는 탄바노쿠니에서 온 남자로, 아직 부드러운 콧수염이 겨우 코 아래에 자라기 시작한 정도의 청년이었다. 물론 이 남자도 처음엔 다른 이들과 같이 아무 이유도 없이 붉은코 고이를 경멸했다. 하지만 어느 날 모종의 계기로 "그대들은 못 됐구만"하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도무지 그게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이 남자의 눈에만은 고이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영양이 부족하고 혈색이 나쁘며, 얼빠진 고이의 얼굴에도 세간의 박해에 울먹이는 "인간"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무이의 사무라이는 고이를 생각할 때마다 세상 모든 것이 갑자기 본래의 하등함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얼어 붙은 거 같은 붉은코와 셀 수 있을 정도의 콧수염이 어쩐지 자신의 마음에 약간의 위안을 가져다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단지 이 남자 하나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다. 그런 예외를 제외하면 고이는 여전히 주위의 경멸 속에서 개처럼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에게는 옷 다운 옷이 하나도 없었다. 둔한 청색의 스이칸과 같은 색의 사시누키가 한 벌씩 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빛이 바라 남색인지 감색인지 구분 가지 않게 되었다. 스이칸은 그나마 어깨가 조금 처지고 마루쿠미의 실이나 키쿠토지의 색이 바란 게 고작이지만 사시누키 쯤 되면 소맷자락의 손상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 시타누키 아래로 시타노하카마도 입지 않은 얇은 다리가 나와 있는 걸 보면, 입이 험한 동료가 아니더라도 마른 관직자의 수레를 끄는 마른 소의 걸음이라도 보는 듯한 꼴사나움이 느껴졌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타치도 굉장히 볼품없어서, 자루의 금구도 볼품없었고 검은 자루의 칠도 벗겨져 있다. 이런 차림에 붉은코를 하고 꼴사납게 조리를 질질 끌며 안 그래도 굽은 등을 추운 하늘 아래서 한 층 더 둥글게 말고는 연신 좌로 우로 눈동자를 굴리면서 짧은 보폭으로 걷질 않는가. 길가의 상인마저 바보 취급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런 일마저 있었다……
 어느 날, 고이가 산죠보몬을 지나 신센엔 쪽으로 가던 차에 예닐곱 명의 아이가 길거리에 모여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걸 보았다. "팽이"라도 돌리는 건가 싶어서 들여다보니 어디서 흘려 들어온 듯한 삽살개 목을 밧줄로 묶고는 치고 때리고 있는 중이었다. 겁 많은 고이는 이제까지 무언가에 동정을 하더라도 주의를 신경 쓰느라 행동으로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상대가 어린아이인 만큼 꽤나 용기가 생겼다. 때문에 되도록 웃어 보이며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제 그만하거라. 개도 맞으면 아프지 않겠느냐"하고 말했다. 그러자 돌아 본 아이는 눈을 치켜뜨며 경멸하듯이 고이의 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말하자면 동료 사무라이들이 용무가 없을 때에 이 남자를 보는 듯한 눈으로 본 셈이다. "왜 참견이야." 아이는 한 발 물러나더니 오만하게 입술을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빨간코 주제에." 고이는 그 말이 자기 얼굴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욕을 들어 화가 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쪽이나 당한 자신이 한심했던 것이다. 그는 겸연쩍은 심정을 씁쓸한 웃음으로 감추며, 다시 조용히 신센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선 예닐곱 명의 아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눈을 아래로 잡아 내리거나 혀를 내밀고는 했다. 물론 그는 알지 못 했다. 알더라도 이 굳세지 못 한 고이가 무얼 할 수 있으랴……
 그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지 경멸 받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며 어떠한 희망도 지니지 못 했는가. 그렇지는 않다. 고이는 5. 6년 전부터 참마죽이란 음식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고 있다. 참마죽이란 산속의 참마를 안에 잘라 넣고 그걸 갈근즙으로 끓인 죽을 말한다. 당시에는 이게 더할 나위 없는 미식으로, 위로는 천자의 식단에도 오르곤 했다. 따라서 고이 같은 인간의 입에는 1년에 한 번, 임시객[각주:4] 때에나 먹는 음식이었다. 하물며 그 순간마저도 먹을 수 있는 건 목을 축이는 정도의 소량이었다. 그런 참마죽을 질릴 정도로 먹어 보는 게, 그가 꽤나 전부터 품고 있던 유일한 욕망이었다. 물론 그는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도 그게 자신의 평생을 관통하는 욕망이란 걸 명백히 인식하지 못 했으리라. 하지만 사실 그는 그 때문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인간이란 때로는 채워질지 어떨지 모르는 욕망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만다. 그 어리석음을 비웃는 자는 필시 인생이란 길의 구석에 자리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고이가 망상하던 '참마죽에 질리다'는 말은 의외로 간단히 현실이 되었다. 그 전말을 적는 게 이 참마죽 이야기의 목적이다.

       ―――――――――――――――――

 어느 해 정월 2일. 모토츠네선에서 소위 임시객이 열린 적이 있었다. (임시객은 니구에서 다이쿄가 열리는 같은 날에 섭정관백가가 대신 이하의 상달부를 불러 여는 향연으로, 다이쿄와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고이 또한 다른 사무라이들 사이에 섞여 향연의 남은 안주를 나눠 먹었다. 당시엔 아직 취식이란 습관이 없어서 남은 안주는 그 집의 사무라이가 한 곳에 모여 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이쿄와 다를 바 없다 해도 과거의 일이니 가짓수는 많은 주제에 대단할 건 없다. 떡, 과자, 생선찜, 말린 새, 빙어, 가까운 강의 붕어, 훈제 도미, 복어 알, 구운 문어, 새우, 큰감자, 작은 감자, 귤 꼬치감 같은 종류였다. 단지 그중에 참마죽이 있었다. 고이는 매년 이 참마죽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항상 머릿수가 많아 마실 수 있는 양은 많지 않다. 올해는 특히 적었다. 그리고 어쩐지 평소보다 맛이 좋다. 때문에 그는 마신 후의 그릇을 뚫어져라 보며 콧수염에 묻은 걸 주먹으로 닦으며 누구구에게랄 것도 없이 "언제쯤 되면 이게 질리게 될까."하고 말했다.
 "경께서는 참마죽에 질린 적이 없으신가 봅니다."
 고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비웃었다. 날카로우면서도 느긋한 무인 다운 목소리엿다. 고이는 굽은 허리의 목을 들어 겁을 먹은 듯이 그 사람 쪽을 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 시절 같은 모토츠네의서 일하던 민부쿄[각주:5] 토키나가의 자식, 후지와라노토시히토였다. 어깨폭이 넓고 키가 발군인 듬직한 거한으로, 삶은 밤을 씹으며 쿠로키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꽤나 거하게 취한 듯했다.
 "유감인걸요." 토시히토는 고이가 얼굴을 들어 올리는 걸 보고 경멸과 연민을 하나로 뒤섞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괜찮으시다면 토시히토가 질리게 해드리겠습니다."
 평소에 괴롭힘당하는 개는 가끔 고기를 던져주면 간단히 따르는 법이다. 고이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그 얼굴을 하고서 토시히토의 얼굴과 빈 그릇을 번갈아 보았다.
 "싫으십니까."
 "……"
 "말씀을 하시죠."
 "……"
 고이는 그러는 동안 주위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걸 느꼈다. 답 하나로 또 일동의 비웃음을 받아야 한다. 혹은 어떻게 대답한들 결국 바보 취급 당할 거 같았다. 그는 주저했다. 만약 그때 상대가 조금 성가시다는 투로 "싫으시면 됐습니다"하고 말하지 않았다면 한사코 그릇과 토시히토를 번갈아 보았으리라.
 그 말을 들은 고이는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감사합니다."
 그 문답을 들은 사람은 모두 동시에 실소했다. "아니……감사합니다."――그렇게 말하며 고이의 답을 흉내내는 사람마저 있었다. 노란 귤과 붉은 귤을 올린 그 위에서 누른 에보시나 세운 에보시가 웃음과 함께 파도처럼 움직였다. 개중에서도 가장 큰 목소리로 기분 좋게 웃은 건 토시히토 본인이었다.
 "그럼 그 안에 따라 드리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올라온 웃음과 지금 마신 술이 목에서 하나로 뒤섞였기 때문이다. "……잘 받으시지요."
 "감사합니다."
 고이는 얼굴을 붉히며 어물거리며 다시 이전의 대답을 반복했다. 주위가 이번에도 웃은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 말을 듣기 위해 일부러 확인한 토시히토에 이르러서는 전보다도 더 재밌다는 양 넓은 어깨를 흔들며 폭소했다. 이 북쪽의 야인은 생활 방식을 둘 밖에 알지 못 했다. 하나는 술을 마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웃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담소의 중심은 머지않아 두 사람에게서 벗어났다. 이건 어쩌면 다른 일행이 설령 비웃음이라 할지라도 이 붉은코 고이에게 주목이 모이는 게 불쾌하다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담소는 이리저리 옮겨 갔고, 술도 안주도 적어졌을 적에는 아무개라는 견습 사무라이가 행전 한 쪽에 두 발을 넣고 말을 타려 했다는 이야기가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고이만큼은 전혀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마 참마죽 세 글자가 그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앞에 훈제 꿩이 있어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쿠로키잔이 있어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단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서 맞선이라도 보는 소녀처럼 서리낀 병주변까지 순진하게 상기시킨 채 비어 있는 검은 그릇을 한사코 바라보며 대단할 것도 없이 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

 그로부터 네다섯 날이 지난 날의 오전. 카모가와의 강가를 따라 아와다구치로 이어지는 거리를 말로 조용히 걷는 두 남자가 있었다. 한 명은 짙은 옥색의 수의狩衣에 같은 색의 하카마를 입고 우치데 타치를 찬 "검은 수염과 엽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또 한 명은 볼품없는 둔청 스이칸에 얇은 옷 두 개를 겹쳐 입은 마흔가량의 사무라이로, 오비를 묶는 꼴도 칠칠지 못 한 데다가 붉은코에 콧구멍 주위가 콧물투성이인 것도 그렇고 차림새가 굉장히 꼴사나웠다. 다만 말은 앞에 놈은 털이 불그스름하고 뒷말은 털이 하얀 젊은 말이어서, 길가는 상인이나 사무라이도 돌아 볼 정도로 발이 빨랐다. 또 두 사람 모두 말의 걸음에 뒤처지지 않게 따라가는 것이 쵸도가케[각주:6]와 토네리[각주:7]임이 분명했다――이게 토시히토와 고이 일행인 건 일부러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겨울이니 조용하게 밝은 햇살이 드리우며, 하얗게 물든 강가의 돌 사이와 조용하고 잔잔히 흐르는 물 옆에서 갈라져 있는 쑥잎이 흔들릴 정도의 바람도 없다. 강에 몸을 담은 키가 작은 버들은 입 없는 가지에 사탕처럼 매끄러운 햇빛을 받아 가지 끝에 내려앉은 할미새 꼬리의 움직임마저 선명하게 비추어 길거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히가시야마의 어두운 녹색 위에 서리 내린 비로드 같은 어깨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건 아마 히에이잔이리라. 두 사람은 그 안에서 안장의 나전을 눈부신 해에 빛나게 하면서 채찍 한 번 휘두르는 법 없이 느긋이 아와다구치로 향했다.
 "저를 데리고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고이가 익숙하지 않은 손에 고삐를 몰며 말했다.
 "바로 앞입니다. 그렇게 걱정하실 만큼 멀지 않아요."
 "허면 아와다구치인가요."
 "일단 그리 생각해두시면 됩니다."
 오늘 아침, 토시히토는 고이를 불러냈다. 히가시야마 근처에 온천이 있으니 거기에 가자는 것이었다. 붉은코 고이는 그런 걸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온천에 들어가지 않아 온몸이 가려웠다. 참마죽도 받아 입욕마저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미리 토시히토가 끌고 온 하얀말을 올라 탔다. 그런데 고삐를 몰며 여기까지 와보니 토시히토는 근처에 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실제로 그러는 사이 아와다구치를 지나갔다.
 "아와다구치가 아닌가 봅니다."
 "좀만 더 가면 됩니다."
 토시히토는 작게 웃으며 일부러 고이의 얼굴을 보지 않고 조용히 말을 끌었다. 양쪽의 인가는 서서히 찾아 보기 힘들어졌다. 지금은 넓은 겨울밭 위에 먹이를 찾는 까마귀들만 보일 따름. 산의 뒤편에 남은 눈색도 희미한 푸른색을 내뿜고 있다. 뾰족한 두공 가지가 밝으면서도 눈에 아픈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마저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그럼 야마시나 부근일까요."
 "야마시나보다 좀 더 가야 하지요."
 확실히 그러는 사이 야마시나도 지나쳤다. 그뿐일까. 어느 틈엔가 세키야마도 지나 이래저래 오후가 조금 지났을 적에는 기어코 미이데라 앞까지 왔다. 미이데라에는 토시히토와 친한 스님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스님을 찾아 점심을 대접 받았다. 점심을 먹고는 또 다시 말에 타서 길을 서둘렀다. 행로는 이제까지 온 길에 비해 확연히 인기척이 적었다. 특히 당시는 사방에 도적이 횡횡한 뒤숭숭한 시대이다――고위는 굽은 허리를 한 층 더 낮추며 토시히토의 얼굴을 올려다 보며 물었다.
 "아직 멀었을까요."
 토시히토는 작게 웃었다. 장난을 치다 들킨 아이가 어른을 볼 때의 웃음이었다. 코 끝에 잡은 주름과 눈꼬리 근육의 떨림 등을 보면 웃을지 말지 주저하는 듯했다. 그리고 기어코 이렇게 말했다.
 "실은 말입니다. 츠루가까지 데려가려 했지요." 토시히토는 웃으면서 채찍을 들어 먼 하늘을 가리켰다. 그 채찍 아래에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선명히 빛나는 오우미 연못이 빛나고 있다.
 고이는 당황했다.
 "츠루가면 에치젠의 츠루가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 에치젠의――"
 토시히토가 츠루가 사람, 후지와라 아리히토의 사위가 된 후로 츠루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건 고이도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츠루가까지 데려갈 거라고는 이제까지 생각도 못 했다. 애당초 수많은 산과 강 너머에 있는 에치젠노쿠니에 이런 남자 둘뿐 이서 어떻게 무사한단 말인가. 하물며 요즘 들어선 길거리 행인이 도적에게 죽었다는 소문마저 곳곳에서 돌고 있다――고이는 애원이라도 하듯이 토시히토의 얼굴을 보았다.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히가시야마인가 싶으면 야마시나이고. 야마시나인가 싶으면 미이데라고. 심지어 끝내는 에치젠노 츠루가라니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처음부터 그리 말씀해주셨으면 하인이든 누구든 데리고 오지 않았겠습니까――츠루가라니요."
 고이는 거의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만약 "참마죽을 먹는 게" 그의 용기를 고무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거기서 헤어져 교토로 홀로 돌아왔으리라.
 "토시히토가 있으니 천 명은 있다 생각하시지요. 가는 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고이가 당황한 걸 본 토시히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비웃었다. 쵸도가케를 부르고는 가지고 오게 한 화살통을 짊어매고는, 역시나 그 손에 칠흑의 진궁을 들어 안장 위에 눕히며 앞에 서서 말을 몰았다. 이렇게 된 이상 똑부러지지 못 한 고이는 토시히토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연약해진 심정으로 황량한 주위의 강과 들을 바라보면서 잘 기억나지 않는 관음경을 입속으로만 외며, 붉은 코를 안장 앞부분에 문지르다시피하여 매가리 없이 터벅터벅 말을 몰았다.
 말발굽 소리가 울리는 들은 끝을 모르는 누런 모에 뒤덮혀 있다. 곳곳에 자리한 물웅덩이도 푸른 하늘을 차갑게 비춘 채로 어느 틈엔가 이 겨울의 오후를 제법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 그 끝에는 산줄기 하나가 해에 등을 지고 있는데, 빛나는 잔설의 빛도 없어서 보라색으로 뜬 어둠을 길게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쓸쓸한 겨울 참억새에 가로막혀 두 종자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때, 토시히토가 불쑥 고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에 좋은 심부름꾼이 있군요. 츠루가에 보내도록 하지요."
 고이는 토시히토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겁을 먹은 채로 활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애당초 사람 모습이 보일만한 곳이 아니다. 단지 개머루인지 뭔지의 덩굴이 관목에 뒤엉켜 있는 가운데 한 마리 여우가 따스한 털색을 기울어 가는 햇살에 드리우며 느긋이 걸었다――그렇게 생각하던 가운데, 여우는 황급히 몸을 튕기더니 일사불란 무작정 달려갔다. 토시히토가 불쑥 채찍을 휘둘러 그 방향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이도 정신없이 토시히토의 뒤를 쫓았다. 종자도 물론 뒤처질 수는 없다. 한동안은 돌을 걷어차는 말발굽 소리가 쓸쓸한 들판의 정적을 깼다. 그러나 이윽고 토시히토가 말을 멈춘다 싶었더니 언제 잡은 건지 여우의 뒷발을 붙든 채로 안장 옆에 내걸고 있었다. 여유가 달릴 수 없게 될 때까지 쫓다 말 아래에 깔아 손으로 쥐어 든 것이리라. 고이는 옅은 수염에 고인 땀을 황급히 담으며 겨우 그 옆에 말을 세웠다.
 "자, 여우놈아 잘 들어라." 토시히토는 여우를 눈앞에 높게 들어 올리며 일부러 거창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대로 오늘 밤중에 츠루가에 자리한 토시히토 저택에 가서 이렇게 말해라. '토시히토가 지금 손님을 데리고 오고 있다. 내일 사시에 타카시마 부근까지 남자들을 보내라. 또 안장을 얹은 말 두 필도 동행시켜라'. 알겠느냐. 잊지 말아라."
 말을 끝낸 토시히토는一팔을 휘둘러 여우를 저 먼곳의 수풀 속으로 던졌습니다.
 "잘 달리는데요."
 겨우 따라잡은 두 종자는 도망치는 여우를 바라보며 손뼉을 치고는 야유했다. 낙엽 같은 색을 한 동물의 등은 저녁노을 안을 매섭게, 나무뿌리나 돌부리에 걸리는 법도 없이 한없이 달려갔다. 일행이 선 곳에서는 그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여우를 쫓는 가운데, 그들은 어느 틈엔가 광야가 원만한 곡면을 그리며 물이 모인 하류와 이어지는 곳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도량이 넓은 심부름꾼이로군요."
 고이는 솔직한 존경과 찬미를 토하며 여우마저 심부름꾼으로 쓰는 거친 무인의 얼굴을 새삼스레 올려다보았다. 자신과 토시히토 사이에 얼마나 격차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단지 토시히토의 뜻에 지배당하는 범위가 넓은 만큼, 그 의지 속에 내포된 자신의 뜻 또한 그만큼 자유로워진 것을 든든하게 느꼈을 뿐이다――아첨이란 아마 이럴 때에 가장 자연스레 생기기 마련이리라. 독자는 앞으로 붉은코 고이의 태도서 아첨꾼 같은 무언가를 발견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이 남자의 인격을 허투루 의심해서는 안 됐다.
 내던져진 여우는 원만한 곡면을 구르 듯이 내려가 물이 없는 하류의 돌 사이를 솜씨 좋게 깡충깡충 뛰어넘어, 이번에는 반대편 곡면에 기세 좋게 올랐다. 오르면서 돌아 보자 자신을 붙잡은 사무라이 일행은 아직 먼 경사 위에서 말을 나란히 한 채 서있었다. 그 모든 게 손가락이 갖춰진 정도로 작게만 보였다. 특히 저물어가는 햇살을 받은 붉은털과 하얀털의 말이 서리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그린 것보다도 또렷이 떠올랐다.
 여우는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참억새 사이를 바람처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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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행은 예정대로 다음 날 사시에 타카지마 부근까지 왔다. 그곳은 비와코에 자리한 자그마한 부락으로, 어제와 달리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 몇몇 초가집이 띄엄띄엄 존재할 뿐이었다. 언덕에 자란 소나무 사이에는 잔잔한 회색 물결이 맴도는 호수의 수면이 닦는 걸 잊은 거울처럼 살풍경하게 펼쳐져 있다――그곳에 이르지 토시히토가 고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보시지요. 남자들이 마중 나왔군요."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다. 두 필의 안장마를 끈 2, 30명의 남성들이 누구는 말에 앉아, 누구는 걸어서 누구는 또 스이칸 소매를 찬바람에 나부끼며 호수의 언덕과 소나무 사이를 지나 일행 쪽으로 서두르고 있다. 이윽고 가까워지니 말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안장에서 내려오고 걷던 사람들은 길거리에 무릎을 꿇어 하나같이 공손히 토시히토가 오는 걸 기다렸다.
 "역시 그 여우가 심부름을 제대로 해줬나 봅니다."
 "변화를 타고난 동물이라 그 정도 용무를 다 하는 건 대단한 일도 아니지요."
 고이와 토니히토가 그런 말을 하는 사이, 일행은 가신들이 기다리는 곳까지 왔다. "잘 했다" 토니히토가 그렇게 말한다. 무릎을 꿇던 사람들은 바삐 일어나 두 사람의 고삐를 들었다. 갑자기 모든 게 밝아졌다.
 "밤에 별난 일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모피 깔개 위에 앉으려는 동안, 농암적색의 스이칸을 입은 백발 가신이 토시히토 앞으로 나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더냐" 토니히토는 가신들이 가져온 술잔이나 그릇을 고이에게도 권하며 의젓히 물었다.
 "그게 말입니다. 술시 가량에 마님께서 살짝 이상해졌습니다. '나는 언덕가의 여우니라. 오늘 주인의 말을 받아 왔으니 다가와 잘 들으라'하고 말씀하시지 뭡니까. 그렇게 일동이 앞으로 나서니 마님께서 말씀하시길 '주인은 지금 손님을 데리고 내려오고 있느니라. 내일 사시에 타카지마 부근까지 남자들을 보내고 안장을 얹은 말 두 필을 동행시켜라'하고 명하셨지요."
 "그건 또 별난 일이로군요." 고이는 토시히토의 얼굴과 가신들의 얼굴을 잘 안다는 양 번갈아 보아 양쪽 모두가 만족할만한 맞장구를 쳤다.
 "그것도 그냥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겁이라도 먹으신 것처럼 벌벌 떨면서 '늦으면 안 된다. 늦으면 내가 주인의 화를 산다'고 대뜸 엉엉 우시는 겁니다."
 "해서 어찌하였느냐."
 "그 후로는 별일 없이 쉬셨습니다. 저희가 나갈 때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하셨습니다."
 "어떠십니까." 가신의 말이 끝나자 토시히토는 고이를 보고 의기양양히 말했다. "토시히토는 동물도 쓸 수 있습니다."
 "이거 참 놀라울 따름입니다." 고이는 붉은코를 문지르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황당하다는 양 과장스럽게 입을 열어 보였다. 콧수염에는 방금 기울인 술이 맺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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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의 일이었다. 고이는 토시히토 저택의 한 방에서 절등대를 원치도 않게 바라보며 잠들지 못 하는 긴 밤을 말똥말똥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저녁에 도착할 때까지 토시히토나 토시히토의 종자와 담소하며 넘어 온 소나무산, 작은 강, 들판 혹은 풀과 나뭇잎, 돌, 들에 난 불의 연기――그러한 것이 하나씩 고이의 마음 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황혼의 아지랑이를 지나 겨우 이 저택에 이르러 장궤에서 올라오는 석탄의 불은 불을 봤을 때의 안도감――그 또한 이렇게 잠들려 하면 먼 옛날에 있었던 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고이는 네다섯 촌의 면이 들어간 노란 히타타레[각주:8] 아래서 편하게 다리를 뻗으며 멍하니 자신의 잠자리를 둘러보았다.
 히타타레 아래에 토시히토가 빌려준 짙은 노란색의 두터운 면옷을 두 장이나 껴입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혹여 땀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따듯했다. 거기에 저녁 먹으며 한껏 마신 취기가 거들고 있다. 머리맡의 빈지문 하나 너머에 서리 낀 정원이 있지만 이만큼 취하니 조금도 춥지 않았다. 교토에 자리한 자신의 방하고는 모든 게 천지차이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이의 마음에는 어울리지 않는 불안이 남아 있었다. 먼저 시간이 흐르는 게 느리게만 느껴졌다. 심지어 그와 동시에 해가 뜨는 게――참마죽을 먹게 된다는 게 그렇게 빨리 와서는 안 될 거만 같았다. 또 이렇게 모순된 두 감정이 서로 맞선 후에는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에서 오는 진정되지 않는 기분이 오늘 날씨처럼 오싹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 게 똘똘 뭉쳐 방해하는 통에 모처럼 따듯함에도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
 그러자 바깥 정원에서 누가 큰 목소리를 내는 게 귀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오늘 도중까지 맞이하러 와준 백발 가신이 무언가 보고하는 듯했다. 그 건조한 목소리가 서리에 울리는 게, 살을 도려내는 듯한 초겨울 바람처럼 한마디씩 고이의 뼈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하인들아 들어라. 주인께서 말씀하시길 내일 아침 묘시까지 두 께 3촌, 두께 5척의 산참마를 젊은 것 하나, 늙은 것 하나씩 가지고 오라신다. 잊으면 안 된다. 묘시까지야."
 그런 게 두세 번 반복된다 싶었더니 이윽고 인기척이 사라지고 주위는 본래의 조용한 겨울밤으로 돌아왔다. 그런 정적 속에서 절등대의 기름 소리만 울린다. 붉은 풀솜 같은 불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고이는 하품을 꾹 깨물며 다시 정처 없는 생각에 빠졌다――산참마라 하는 걸 보면 물론 참마죽을 만들 생각으로 가지고 오게 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잠시 바깥에 집중한 덕에 잊고 있었던 방금 전 불안이 어느 틈엔가 되살아 났다. 특히 전보다도 한 층 강하게 된 건 너무 빨리 참마죽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으로 끈덕지게 사상의 중심을 벗어날 줄 몰랐다. "참마죽에 질린다"는 게 이렇게나 빨리 현실이 되어버려서야 모처럼 이제까지 몇 년이나 참으며 기다려 온 게 괜한 노력처럼만 느껴진다. 가능하면 불쑥 무언가가 잘못되어 한 번 참마죽을 먹을 수 없게 되고, 또 그게 해소되어 간신히 먹게 되는 절차 따위를 거치고 싶었다――이런 생각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한 곳을 도는 가운데, 고이는 어느 틈엔가 여행길의 피로에 이기지 못 하고 푹 잠에 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곧장 어젯밤에 들은 산참마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고이는 다 제쳐두고 빈지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잠에 들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묘시가 지나 버린 것이리라. 정원에 깔린 네다섯 장의 돗자리 위에는 대략 이삼천 개 가량 되는 통나무 같은 것이 기울어진 노송나무 지붕에 끝자락에 닿을 정도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잘 보면 그 모두가 두께 3촌, 두께 5척보다 훨씬 큰 산참마였다.
 고이는 막 일어난 눈을 문지르면서 거의 당황에 가까운 경악에 휩싸여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원 곳곳에는 새로 박은 듯한 말뚝 위에 5석은 들어갈 냄비가 대여섯 개씩 이어져 하얀 천아오를 입은 여 시종들이 몇 십 명이나 그 주위를 움직이고 있다. 불을 피우는 하인, 재를 치우는 하인, 혹은 새로운 백나무통에 "감갈수액"을 떠와 냄비 안에 붓는 하인. 모두 참마죽을 만드는 준비로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바빴다. 냄비 아래서 올라오는 연기와 냄비 안에서 올라오는 수증기가 아직 미처 사라지지 않은 새벽 아지랑이와 하나가 되어 정원에 한 가득, 눈앞도 또렷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잿빛으로 물든 가운데 붉은 건 타오르는 냄비 아래 화염뿐이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게 전장이나 화재 현장이라도 방불케 하는 소동이었다. 고이는 새삼스럽게 이 거대한 산참마가 이 커다란 냄비 속에서 참마죽이 되는 걸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참마죽을 먹기 위해 도쿄에서 일부러 에치젠의 츠루가까지 여행 온 사실을 생각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정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고이의 동정해 마땅할 식욕은 이때에 이미 절반가량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고이는 토시히토나 장인 아리히토와 함께 아침밥을 먹으러 향했다. 앞에는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무서운 참마죽과 겨우 한 말이나 될까한 은수저였다. 고이는 방금 지붕까지 쌓인 산참마를 몇 십 명의 젊은 남자가 얇은 칼을 솜씨 좋게 움직여 끝자락부터 도려내듯 기세 좋게 자르는 걸 보았다. 또 그렇게 잘린 걸 시녀들이 우왕좌왕하면서 하나도 남김없이 냄비에 넣는 모습을 보았다. 끝으로 그 산참마가 돗자리 위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에, 참마 냄새와 감갈 냄새를 머금은 수많은 수증기 기둥이 냄비 안에서 맑은 아침 하늘을 향해 희미하게 올라오는 걸 보았다. 이런 걸 눈앞에서 본 고이가 그릇에 담긴 참마죽을 본 지금, 아직 입도 대지 않았건만 배가 부른 것처럼 느끼는 건 아마 도리 없는 일이리라――고이는 주전자를 앞에 둔 채 불편하다는 양 이마의 땀을 닦았다.
 "참마죽에 질리는 일이 없으셨다 했지요. 부디 사양 말고 드시지요."
 장인 아리히토는 아이들에게 일러 다시 몇 개의 은주전자를 가지고 오게 했다. 안에는 하나같이 참마죽이 넘치려 했다. 고이는 눈을 감고서 안 그래도 붉은 코를 한 층 더 붉히며 주전자의 참마죽 절반가량을 커다란 토기에 따라서 마지못해 마셨다.
 "아버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양하실 거 없으십니다."
 토시히토도 옆에서 새로운 냄비를 권하며 짓궂게 웃더니 이렇게 말한다. 고이는 곤란했다. 사양 없이 말할 수 있다면 참마죽은 애당초 한 그릇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참아가며 냄비의 절반가량을 비웠다. 이 이상 마시면 목도 넘기 전에 되돌아올 거 같았다. 그렇다고 마시지 않으면 토시히토나 아리히토의 마음을 욕보이는 게 된다. 때문에 그는 다시 눈을 감고는 남은 절반을 삼 분지 일 가량 마셨다. 이제는 한 입도 마실 수 없을 거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충분히 받았습니다――이거 참 감사합니다."
 고이는 웅얼거리듯이 그렇게 말했다. 어지간히 곤란해 보이는 게 턱수염에도 코 끝에도 겨울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땀이 구슬처럼 맺혀 걸려 있었다.
 "이거 너무 적게 드시는군요. 손님께서 사양하시는 모양이구나. 다들 뭐 하느냐."
 아이들이 아리히토의 말을 따라 새로운 냄비를 들어 그릇에 참마죽을 따르려 한다. 고이는 벌레라도 쫓듯이 양손을 움직여 다시 사양했다.
 "아니, 이미 충분합니다……실례지만 충분합니다."
 만약 이때 토시히토가 대뜸 집 너머를 가리키며 "저거 보시지요"하고 말하지 않았다면 아리히토는 다시 고이에게 참마죽을 권하며 멈추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토시히토의 말은 일동의 주의를 건물 쪽으로 끌어갔다. 노송나무 지붕 건물에는 마침 아침해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눈부신 빛 안에 동물 한 마리가 광택 좋은 털을 씻으며 얌전히 앉아 있다. 잘 보니 그건 그제 토시히토가 갈대밭 길에서 붙잡은 언덕가의 들여우였다.
 "여우도 참마죽이 먹고 싶어 왔나 봅니다. 이놈들아, 저 녀석에게도 참마죽을 주어라."
 토시히토의 명령은 곧장 이루어졌다. 지붕에서 내려온 여우는 곧장 정원에서 참마죽을 받아먹었다.
 고이는 참마죽을 먹는 여우를 바라보며 이곳에 오기 전의 자신을 속으로 그리워했다. 그건 수많은 사무라이에게 우롱당하는 그였다. 어린아이마저 "빨간코 주제에"하고 매도하던 그였다. 색이 바란 스이칸에 사시누키를 입고서 주인 없는 삽살개처럼 스이자쿠오오지를 어슬렁거리며 걷는 애처롭고 고독한 그였다. 하지만 또 동시에 참마죽에 질리고 싶단 바람을 나 홀로 소중히 지켜 온 행복하던 그였다――그는 더 이상 참마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와 함께 온 얼굴의 땀이 서서히 코끝부터 말라 가는 걸 느꼈다. 츠루가의 아침은 설령 맑더라도 몸에 스며 드는 것만 같은 찬바람이 불었다. 고이는 황급히 코를 부여잡는 동시에 은냄비를 향해 커다란 재채기를 했다.


  1. 877년~884년 [본문으로]
  2. 885년~888년 [본문으로]
  3. 직위가 없는 [본문으로]
  4. 平安 시대, 정초에 摂政∙関白 등이 대신((大臣)) 이하의 귀족을 불러 베푼 사적인 연회. [본문으로]
  5. 민정을 맡는 역직 [본문으로]
  6. 궁에서 의식을 치를 때 화살을 드는 역. [본문으로]
  7. 황궁 경비나 잡일을 맡는 역무. [본문으로]
  8. 옛날 예복의 일종((소매 끝을 묶는 끈이 달려 있고 문장(紋章)이 없으며 옷자락은 はかま(=하의) 속에 넣어서 입음, 옛날에는 평민복이었으나 후에 무가(武家)의 예복으로 사용되고 公家들도 입었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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