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주교도의 낡은 달력 중 한 장, 그 위에 보이는 건 이런 문자이다――
탄생하신지 천육백삼십사 년. 세바스치안세바스찬 기록하다.
이 월. 작은 달.
이 월 육 일. 산타 마리야처녀 마리아가 수태하신 날.
이 월 칠 일. 도미이고domingo, 주일.
삼 월. 큰 달.
오 일. 도미이고, 후란시스코Francesco.
십이 일. ……………
2
일본 남부의 어떤 산길. 커다란 녹나무 가지 너머로 동굴 하나가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꾼 둘이 산길 아래로 온다. 나무꾼 하나는 동굴을 가리키며 다른 한 명에게 무어라 말한다. 두 사람은 십 자를 긋고는 동굴을 향해 크게 예배한다.
3
이 커다란 녹나무 가지. 꼬리가 긴 원숭이 한 마리가 가지 위에 앉은 채로 가만히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 위에는 범선 한 척. 범선은 다가오는 듯하다.
4
바다를 달리는 범선 한 척.
5
범선 내부. 서양인 선원 둘, 돛대 아래서 주사위를 굴리고 있다. 그러던 사이 승부로 다툼이 벌어지고 한 선원이 일어서자마자 다른 선원이 옆구리에 나이프를 꽂는다. 수많은 선원은 두 사람 주위로 사방팔방 모여든다.
6
쓰러져 죽은 선원의 얼굴. 불쑥 콧구멍에서 꼬리가 긴 원숭이 한 마리가 턱 위로 기어 온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장 코 안으로 들어간다.
7
위에서 비스듬하게 내려 본 해면. 불쑥 어딘가 공중에서 선원의 시체 하나가 떨어진다. 시체는 물보라 속에서 곧 모습을 감추고 만다. 그 후에는 단지 물결 위에 원숭이 한 마리가 있을뿐이다.
8
바다 너머서 보이는 반도.
9
앞서 나온 산길의 녹나무 가지. 원숭이는 역시나 열심히 바다 위 범선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윽고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온 얼굴에 기쁨을 드리운다. 그러자 또 다른 원숭이 하나가 어느 틈엔가 같은 가지 위에서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있다. 두 마리 원숭이는 손짓을 하면서 잠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눈다. 또 그 후에 온 원숭이는 긴 꼬리를 가지에 두르고 공중에 대롱 매달린 채로 녹나무 가지나 잎에 가로막힌 반대편을 눈 위에 손을 두고서 바라본다.
10
앞서 나온 동굴의 외부. 파초나 대나무가 무성한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점점 날이 저문다. 그러자 동굴 안에서 박쥐 한 마리가 하늘하늘 하늘로 날아오른다.
11
동굴의 내부. '산 세바스치안성 세바스찬'이 홀로 벽 위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산 세바스치안'은 검은 법복을 입은 마흔에 가까운 일본인. 불이 붙은 촛불 하나는 책상이나 물병 따위를 비추고 있다.
12
촛불의 그림자가 드리운 바위벽. 그곳에는 물론 또렷이 '산 세바스치안'의 옆얼굴도 비치고 있다. 그 옆얼굴의 목덜미에 꼬리가 긴 원숭이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머리 위로 오르기 시작한다. 또 이어서 같은 원숭이 그림자 하나가 오른다.
13
'산 세바스치안'이 깍지 낀 두 손. 그의 두 손은 어느 틈엔가 서양인의 파이프를 쥐고 있다. 파이프는 처음에는 불이 붙어 있지 않다. 하지만 서서히 공중에 담배 연기를 뿜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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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온 동굴의 내부. '산 세바스치안'은 불쑥 일어나 파이프를 바위 위로 던지고 만다. 하지만 파이프는 여전히 담배 연기를 뿜고 있다. 그는 놀란 채로 두 번 다시 파이프에 다가가지 않는다.
15
바위 위에 떨어진 파이프. 파이프는 천천히 술을 담은 '후라스코플라스크' 병으로 변모한다. 그뿐 아니라 '후라스코' 병도 한 조각의 '꽃 카스테이라카스테라'로 변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그 '꽃 카스테이라'마저 이제는 더 이상 식품이 아니다. 그곳에는 젊은 경국지색 한 명이 요염하게 앉은 채 비스듬하게 누군가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있다………
16
"산 세바스치안"의 상반신. 그는 불쑥 십자가를 긋는다. 그러고는 안도한 표정을 짓는다.
17
꼬리가 긴 원숭이 두 마리가 한 촛불 아래서 몸을 움츠리고 있다. 어느 쪽도 얼굴을 찌푸리며.
18
동굴 내부. '산 세바스치안'은 다시 한 번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그때 커다란 올빼미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내려와서는 날갯바람으로 촛불 불을 끄고 만다. 하지만 한 줄기 달빛만은 희미하게 십자가를 비추고 있다.
19
바위벽 위에 걸린 십자가. 십자가는 또 십자 격자를 둔 직사각형의 창문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직사각형의 창문 바깥은 초가집 하나가 놓인 풍경이 자리하고 있다. 집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는 사이 집은 저절로 창문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또 동시에 방 내부도 보이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산 세바스치안'과 닮은 할머니 한 명이 한 손서 실뭉치를 굴리며 다른 한 손으로 열매가 맺힌 벚나무 가지를 들고 두세 살 아이와 놀고 있다. 아 또한 그의 아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집 내부는 물론이요 그들 또한 역시나 안개처럼 직사각형의 창문을 꿰뚫고 만다. 이번에 보이는 건 집 뒤의 밭. 밭에는 마흔에 가까운 여자 하나가 열심히 이삭을 베고 있다………
20
직사각형의 창문을 들여다보는 '산 세바스치안'의 상반신. 하지만 뒤에서 기울어져 보이고 있다. 밝은 건 창문 밖뿐. 창문 밖은 이미 밭이 아니다. 수많은 남녀노소의 머리가 거기서 움직이고 있다. 또 그 수많은 머리 위에는 십자가에 걸린 남녀 세 명이 두 팔을 펼치고 있다. 한가운데에 걸린 남자는 그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창문 앞을 벗어나려다 그만 비틀비틀 넘어진다――
21
동굴 내부. '산 세바스치안'은 십자가 아래의 바위 위에 쓰러져 있다. 하지만 겨우 고개를 들어 달빛이 들어오는 십자가를 올려다본다. 십자가는 어느 틈엔가 이제 막 태어난 앳된 석가모니로 변모하고 만다. '산 세바스치안'은 놀라서 이런 석가를 본 후 불쑥 다시 일어나 십자를 긋는다. 달빛 안을 스쳐 지나가는 커다란 올빼미의 그림자. 이제 막 태어난 석가는 다시 한 번 본래의 십자가로 변하고 만다………
22
산길. 달빛이 들어오는 산길은 검은 테이블로 바뀌고 만다. 테이블 위에는 트럼프 덱 하나가 놓여 있다. 거기에 남자 손 두 개가 나타나 조용히 트럼프를 섞고는 좌우로 패를 돌리기 시작한다.
23
동굴 내부. '산 세바스치안'은 고개를 숙인 채 동굴 안을 걷고 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에 원광 하나가 빛나기 시작한다. 또 동시에 동굴 안도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다. 그는 문득 이 기적을 깨닫고 동굴 안에 걸음을 멈춘다. 처음엔 놀란 얼굴. 그리고 서서히 기쁨의 표정. 그는 십자가 앞에 몸을 낮추고 다시 한 번 열심히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24
"산 세바스치안'의 오른 귀. 귓볼 안에는 나무가 하나 둥근 열매를 맺고 있다. 귀안은 꽃이 핀 초원. 풀은 모두 살랑 바람에 움직이고 있다.
25
동굴 내부. 하지만 이번에는 외부에 접해 있다. 원광을 드리운 '산 세바스치안'은 십자가 앞에서 일어나 조용히 동굴 밖으로 걸어간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 십자가는 저절로 바위 위로 떨어진다. 또 동시에 물병 속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나와 머뭇머뭇 십자가에 다가가려 한다. 그리고 또 곧장 한 마리.
26
동굴 외부. '산 세바스치안'은 달빛 속에서 서서히 이쪽으로 걸어온다. 그의 그림자는 왼쪽에는 물론이요 오른쪽에도 드리워 있다. 심지어 또 그 오른쪽 그림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긴 망토를 두르고 있다. 그는 그 상반신으로 동굴 밖을 거의 가로막았을 때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27
별만 빛나는 하늘. 갑자기 큰 분도기 하나가 위에서 큰 걸음으로 내려온다. 그건 내려옴에 따라 서서히 다리를 좁히고 기어코 두 다리를 모으더니 서서히 희미해져 사라지고 만다.
28
넓은 어둠 속에 걸린 몇 개의 태양. 그러한 태양 주위에는 지구 또한 몇 개나 돌고 있다.
29
산길. 원광을 드리운 '산 세바스치안'은 두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조용히 산길을 내려온다. 그러고는 녹나무 앞에 앉아 가만히 자신의 발끝을 바라본다.
30
위에서 비스듬하게 내려다 본 산길. 산길에는 달빛 안에 돌 하나가 구르고 있다. 돌은 서서히 돌도끼로 바뀌고 또 단검으로 바뀌고 마지막으로 피스톨로 바뀌고 만다. 하지만 피스톨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또 어느 틈엔가 본래처럼 단순한 돌멩이로 바뀌어 있다.
31
산길. '산 세바스치안'은 선 채로 역시나 발끝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자가 두 개인 것도 다를 바 없다. 또 이번에는 고개를 들고 녹나무 뿌리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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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받은 녹나무 뿌리. 거친 나무껍질에 둘러싸인 뿌리는 처음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서서히 그 위에 세계에 군림한 신의 얼굴이 하나씩 선명히 떠오른다. 마지막으로는 수난의 그리스도의 얼굴. 마지막으로는?――아니, "마지막으로는"이 아니다. 그것도 서서히 네 번 접은 도쿄 XX 신문으로 바뀌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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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의 측면. 챙이 넓은 모자에 망토를 입은 그림자는 스스로 똑바로 일어선다. 물론 서버렸을 때는 이미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다. 산양처럼 수염을 기른 눈이 날카로운 서양인 선장이었다.
34
산길. '산 세바스치안'은 녹나무 아래서 선장과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얼굴색은 무겁다. 하지만 선장은 입술에 끝없이 냉소를 드리우고 있다. 그들은 잠시간 이야기한 후 함께 옆길로 들어간다.
35
바다를 내려다 본 곶 위. 그들은 거기에 선 채로 무어라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선장은 망토 안에서 망원경 하나를 꺼내 '산 세바스치안'에게 "보라"는 손짓을 한다. 그는 조금 주저한 후 망원경으로 바다 위를 본다. 그들 주위의 풀과 나무는 물론 '산 세바스치안'의 법복은 바닷바람 때문에 줄곧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선장의 망토는 움직이지 않는다.
36
망원경에 비친 첫 번째 광경. 몇 장의 그림을 걸어 둔 방 안에 서양인 남녀 두 명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촛불이 꺼진 테이블 위에는 술잔이나 기타, 장미꽃 등이 놓여 있다. 그때 또 서양인 남자 하나가 불쑥 방문을 밀더니 검을 뽑고 들어온다. 다른 한 명의 서양 남자도 곧장 테이블에서 멀어지더니 검을 뽑아 상대를 맞이하려 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상대의 검에 심장을 찔려 바닥으로 쓰러지고 만다. 서양인 여자는 방구석으로 뛰쳐나가 두 손으로 뺨을 누르며 가만히 이 비극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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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에 비친 두 번째 광경. 커다란 책장이 연이어진 방 안에 서양인 남자 하나가 멍하니 책상에 앉아 있다. 전등불이 꺼진 책상 위에는 서류나 장부, 잡지 등이 놓여 있다. 그때 서양인 아이 하나가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서양인은 이 아이를 안고 몇 번이나 얼굴에 입맞춤을 한 후 "저기로 가렴"하는 손짓을 한다. 아이는 순순히 나간다. 서양인은 다시 책상에 앉아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그러자 불쑥 머리 주위에 연기가 만들어진다.
38
망원경에 비친 세 번째 광경. 어떤 러시아인의 반신상을 둔 방 안에 서양인 여자 하나가 타자기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그때 서양인 할머니 한 명이 조용히 문을 열고 여자에게 다가가 한 통의 편지를 내밀며 "읽어 보라"는 손짓을 한다. 여자는 전등불에 이 편지를 비추자마자 격렬한 히스테리를 일으키고 만다. 할머니는 놀라서 뒷걸음질로 문으로 향한다.
39
망원경에 비친 네 번째 광경. 표현파 그림과 닮은 방 안에 서양인 남녀 둘이 테이블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신비한 빛이 들어오는 테이블 위에는 시험관이나 깔때기나 풀무 등이 놓여 있다. 그때 두 사람보다 키가 큰 서양인 남자 인형 하나가 꺼림칙하게 문을 밀며 인공 꽃다발을 들고 온다. 하지만 꽃다발을 주기도 전에 기계에 고장이 났는지 대뜸 남자에게 달려들어 무작정 바닥으로 밀쳐낸다. 서양인 여자는 방구석으로 도망쳐 두 손으로 뺨을 누르며 불쑥 두서없는 웃음을 터트린다.
40
망원경에 비친 다섯 번째 광경. 이번에는 이전 방과 똑같다. 단지 달라진 건 그 안에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는 사이 대뜸 방 전체가 엄청난 연기 속에서 폭발하고 만다. 그 후에는 불탄 들판만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버들 하나가 강 옆에 자란 풀이 긴 들판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또 그 들판에서 날아 오르는 몇 마리일지 모르는 백로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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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 위. '산 세바스치안'은 망원경을 들고 선장과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다. 선장은 잠시 고개를 젓고 하늘의 별을 하나 빼와서 보여준다. '산 세바스치안'은 몸을 뒤로 빼고 황급히 십자를 그으려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긋지 못하는 듯하다. 선장은 별을 손바닥 위에 얹고 그에게 '보라'는 손짓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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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얹은 선장의 손바닥. 별은 천천히 돌로 바뀌고 돌은 또 감자로 바뀌고 감자는 세 번째로 나비로 바뀌더니 나비는 마지막으로 굉장히 작은 군복 차림의 나폴레옹으로 바뀐다. 나폴레옹은 손바닥 중앙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본 후, 빙글 이쪽에 등을 돌리고는 손바닥 바깥으로 소변을 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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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산 세바스치안'은 선장의 뒤에서 맥없이 돌아온다. 선장은 잠시 멈춰 서 마치 금반지라도 벗기듯이 '산 세바스치안'의 원광을 떼어버린다. 그렇게 두 사람은 녹나무 아래서 다시 한 번 무어라 이야기한다. 길 위에 떨어진 원광은 서서히 커다란 회중시계가 된다. 시각은 두 시 삼십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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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한 산길. 하지만 이번에는 나무나 바위는 물론 산길에 선 그들 자신도 비스듬하게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달빛 속의 풍경은 어느 틈엔가 무수한 남녀로 가득 찬 근대 카페로 바뀌고 만다. 그들이 지나고는 악기의 숲이 나온다. 물론 한가운데에 선 그들을 시작으로 모든 게 비늘처럼 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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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내부. '산 세바스치안'은 춤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다. 그때 내려온 꽃다발. 춤추는 사람들은 그에게 술을 권하거나 그의 목에 매달리려 한다. 하지만 얼굴을 찌푸린 그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듯했다. 서양인 선장은 그런 그의 바로 뒤에 서서 여전히 냉소를 지은 얼굴을 절반만 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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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바닥. 바닥 위에는 신발을 신은 발이 수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러한 발은 또 어느 틈엔가 말 다리나 학 다리나 사슴 다리로 변하고 있다.
47
카페 구석. 금 단추를 찬 옷을 입은 흑인이 홀로 커다란 북을 두드리고 있다. 이 흑인도 어느 틈엔가 녹나무 그루 하나로 변하고 만다.
48
산길. 선장은 팔짱을 낀 채로 녹나무 뿌리서 기절한 '산 세바스치안'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를 안아 올리더니 반쯤 그를 끌다시피 해 동굴로 오른다.
49
앞서 나온 동굴 내부. 하지만 이번에도 외부와 접해 있다. 달빛은 이제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둘이 돌아오니 저절로 주위도 희미하게나마 밝아진다. '산 세바스치안'은 선장을 붙잡고 다시 한 번 열심히 이야기한다. 선장은 역시나 냉소하며 그의 말에 답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겨우 두세 마디 이야기하자 아직 어두컴컴한 바위 뒤를 가리키며 그에게 "보라"는 손짓을 한다.
50
동굴 내부 구석. 턱수염이 자란 시체가 바위 벽에 기대어 있다.
51
그들의 상반신. '산 세바스치안'은 놀람이나 두려움을 보이며 선장에게 무어라 이야기한다. 선장은 한 마디 대답한다. '산 세바스치안'은 뒤로 물러나 황급히 십자가를 그으려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불가능하다.
52
Judas ………
53
앞서 나온 시체――유다의 옆얼굴. 누군가의 손이 이 얼굴을 잡고 마사지하듯이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러자 머리는 투명해지고 마치 한 장의 해부도처럼 골수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만다. 골수는 처음에는 희미한 서른 장의 은화를 비춘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그 위에 그걸 비웃고 연민하는 사도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그뿐 아니라 그 너머에는 집이나 호수, 십자가, 외설적인 형태를 한 손, 감람나무 가지나 노인――여러가지가 떠오르고 있는 듯하다………
54
동굴 내부 구석. 바위 벽에 기대어 있던 시체는 서서히 젊어지기 시작하고 기어코 갓난아기로 변해버린다. 하지만 갓난아기의 턱에도 턱수염만은 남아 있다.
55
갓난아기의 시체 발 뒤편. 어느 쪽의 발 뒤편 또한 한가운데에 한 송이씩 장미꽃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러한 건 서서히 바위 위에 꽃잎을 떨구고 만다.
56
그들의 상반신. '산 세바스치안'은 기어코 흥분하여 또 선장에게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다. 선장은 어떤 답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숙히 '산 세바스치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57
모자 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눈매가 날카로운 선장의 얼굴. 선장은 천천히 혀를 내밀어 보인다. 혀 위에는 스핑크스 하나가 놓여 있다.
58
동굴 내부 구석. 바위 벽에 기대어 있던 갓난아기의 시체는 서서히 또 변하기 시작해 기어코 서로 목마를 태운 두 마리 원숭이가 되고 만다.
59
동굴 내부. 선장은 '산 세바스치안'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산 세바스치안'은 고개를 숙인 채로 선장의 말을 듣지 않는 듯하다. 선장은 불쑥 그의 팔을 잡고는 동굴 밖을 가리키며 그에게 '보라'는 손짓을 한다.
60
달빛으로 가득 찬 산속 풍경. 이 풍경은 저절로 "물가"로 충만한 험악한 바위 무리로 바뀌고 만다. 공중에 떠오른 해파리 무리. 하지만 그것도 사라지고 말고 그 후에는 작은 지구가 하나 넓고 어둡게 돌아가고 있다.
61
넓은 어둠 속에서 돌아가는 지구. 지구는 도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 틈엔가 오렌지로 바뀐다. 거기에 나이프 하나가 나타나 오렌지를 둘로 잘라버리고 만다. 하얀 오렌지의 절단면은 하나의 자침을 드러내고 있다.
62
그들의 상반신. '산 세바스치안'은 선장에게 기댄 채로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어쩐지 광인에 가까운 표정. 선장은 역시나 냉소를 지은 채로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또 망토 안에서 해골 하나를 꺼내 보인다.
63
선장 손 위에 놓인 해골. 해골 눈에서는 불나방 하나가 하늘하늘 공중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또 셋, 둘, 다섯.
64
동굴 내부 공중. 공중은 전후좌우서 날아오는 무수한 불나방으로 가득 차 있다.
65
그러한 불나방 중 하나. 불나방은 공중을 나는 사이에 한 마리 독수리로 바뀌어 버린다.
66
동굴 내부. '산 세바스치안'은 역시나 선장에게 기대어 어느 틈엔가 눈을 감고 있다. 그뿐 아니라 선장의 팔을 떼어내고는 바위 위로 쓰러지고 만다. 하지만 또 상반신을 일으켜 다시 한 번 선장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67
바위 위로 쓰러져 버린 '산 세바스치안'의 하반신. 그의 손은 몸을 받치면서 우연히 바위 위의 십자가를 잡는다. 처음에는 참으로 머뭇머뭇, 그러나 또 불쑥 착실히.
68
십자가를 뻗은 '산 세바스치안'의 손.
69
뒤를 향한 선장의 상반신. 선장은 어깨너머로 무언가를 보고 실망으로 가득 찬 쓴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또 조용히 수염을 쓰다듬는다.
70
동굴 내부. 선장은 재빨리 동굴을 나와 희미하게 밝아 오는 산길을 내려간다. 그에 따라 산의 풍경도 서서히 아래로 옮겨간다. 선장의 등 뒤에는 원숭이 두 마리. 선장은 녹나무 아래로 오거는 잠시 멈춰 서 모자를 벗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 인사를 한다.
71
동굴 내부. 하지만 이번에도 외부와 접해 있다. 착실히 십자가를 쥔 채로 바위 위에 쓰러져 있는 '산 세바스치안'. 동굴 외부는 서서히 아침 햇살을 빛내기 시작한다.
72
비스듬하게 위에서 내려다 본 바위 위의 '산 세바스치안'의 얼굴. 그의 얼굴은 뺨 위로 서서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힘없는 아침 햇살 속에서.
73
산길. 아침빛이 드리운 산길은 또 저절로 이전처럼 검은 테이블로 변하고 만다. 테이블 왼쪽에 놓인 건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 한 장뿐.
74
아침 햇살이 드리운 방. 주인은 마침 문을 열어 누군가를 보내는 중이다. 이 방구석 테이블에는 술병이나 술잔 트럼프 따위가 놓여 있다. 주인은 테이블 앞에 앉아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크게 하품을 한다. 수염이 자란 주인의 얼굴은 서양인 선장과 똑같았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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