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어느 저녁, 나는 친구인 두 비평가와 소위 코시벤 가도의 전라로 벗겨진 가로수용 버들 아래를 칸다바시 방향으로 걸었다. 우리 좌우에는 과거에 시마자키 토손이 "좀 더 고개를 들고 걸으라"고 한탄한 하급 관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아직 떠올라 있는 황혼 빛 속에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간다. 저도 모르게 옮겨 온 같은 우울감을 떨쳐내려 해도 미처 떨쳐내지 못한 걸 테지 우리는 외투 어깨를 마주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오오테마치의 정류장을 지날 때가지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 비평가가 붉은 기둥 아래서 추위에 떨며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불쑥 몸을 떨더니
"모리 선생님이 떠오르네"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리 선생님이라니?"
"내 중학교 선생님. 너한테는 아직 이야기한 적이 없었지."
나는 아니라고 하는 대신에 조용히 모자 챙을 낮추었다. 이제부터 아래에 적는 건 그때 이 친구가 걸으며 내게 이야기해준 모리 선생님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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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십여 년 전. 내가 아직 어떤 현립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의 일이다. 우리 반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아다치 선생님이란 젊은 교사가 인플루엔자발 급성 폐렴으로 겨울 방학 동안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게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적당한 후임을 찾을 여유도 없었던 걸 테지. 우리 학교는 차선책으로 당시 어떤 사립 중학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모리 선생님이란 노인께 이제까지 아다치 선생님이 맡던 수업을 잠시 맡기기로 했다.
내가 처음으로 모리 선생님을 본 건 그 취임 당일 오후였다. 우리 3학년 학생들은 새로운 교사가 온다는 호기심에 떠밀려 복도서 선생님의 구두 소리가 들릴 때부터 여느 때 이상으로 조용히 수업이 시작되는 걸 기다렸다. 하지만 그 구두 소리가 햇살이 미처 들지 못하는 차가운 교실 밖에 멈추어 이윽고 문이 열리자――아아, 나는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때의 광경이 역력히 눈에 떠오른다. 문을 열고 들어온 모리 선생님은 무엇보다 그 작은 키가 축제 때 자주 보는 거미남을 연상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 느낌서 암담한 색채를 뺏은 건 거의 아름답다 해도 좋을 맨질맨질 벗겨진 머리로, 후두부 주위에 깨소금 같은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숨이 붙어 있는 게 대부분은 박물학 교과서 볼 법한 타조알을 떠올렸을 테지.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풍채가 범인을 초월한 건 그 수상쩍은 모닝코트 탓으로 이는 과거에 검었을 거란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말 그래도 창백한 옛색을 두르고 있었다. 심지어 선생님의 칙칙한 목깃에는 굉장히 화려한 보라색 넥타이가 마치 날개를 펼친 나방처럼 묶여 있는 놀라운 기억마저 남아 있다. 그러니 선생님이 교실에 돌아 오는 동시에 곳곳에서 웃음을 참는 목소리가 들린 건 그리 신기할 일도 아닐 테지.
하지만 교과서와 출석부를 품은 선생은 마치 학생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의연한 태도로 한 층 높은 교단에 올라 우리의 경례를 받고는 정말로 사람 좋아 보이는 혈색 안 좋은 둥근 얼굴에 애교 섞인 웃음을 드리운 채
"제군"하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그때까지 3년 동안 선생님들께 제군이란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런 만큼 모리 선생님의 "제군"은 우리 일동을 저도 모르게 감탄하여 눈을 뜨게 만드는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제군"이라고 운을 뗀 이상 대략적인 수업 방침에 관한 대연설이 있으리라고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리 선생님은 "제군"이라 말한 채로 교실 안을 둘러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이 처진 선생님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꼬리 근육은 신경적으로 움찔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딘가 가축만 같은 부분이 있는 맑은 눈동자 속에도 끝없이 진정되지 않는 빛이 오가고 있었다. 그게 도무지 말로는 꺼내지 않아도 어쩐지 우리 일동에게 애원하고 싶은 걸 품은 듯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게 무엇인지는 선생님 본인도 분명히 알지 못하는 듯하셨다.
"제군."
이윽고 모리 선생님은 다시 한 번 되풀이하셨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마치 그 제군이란 목소리의 반향을 잡으려는 것처럼
"오늘부터 제가 제군에게 초이스 리더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하고 참으로 황급히 덧붙였다. 우리는 더더욱 호기심의 긴장을 느껴서 조용히 또 열심히 선생님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모리 선생님은 그 말과 동시에 다시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로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시더니 대뜸 마치 스프링이 튀는 듯한 동작으로 의자에 앉으셨다. 그리고 이미 펼쳐져 있던 초이스 리더 옆에 출석부를 펼쳐 들여다보셨다. 이 당돌한 마무리가 우리를 얼마나 실망시켰는가. 아니, 실망을 넘어 우리를 얼머나 우습게 만들었는가. 그런 건 아마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다행히 선생님은 우리가 웃음을 터트리기 전에 가축 같은 눈을 출석부에서 떼고는 곧장 우리반 중 한 명을 "군"을 붙여가며 지명했다. 물론 곧장 자리서 일어나 해석해 보라는 신호였다. 그렇게 그 학생은 자리서 일어나 로빈슨 크루소의 한 구절을 도쿄 중학생 특유의 간들어지는 투로 해석해 낭독했다. 모리 선생님은 이따금 보라색 넥타이를 매만지면서 오역은 물론이요 사사로운 발음 차이까지 하나하나 정중이 집어주셨다. 발음은 묘하게 과장된 구석은 있어도 대개 정확하고 명료한 게 선생님 본인 또한 이 방면에 특히 뛰어나신 듯했다.
그 학생이 자리에 앉고 선생님이 다시 해석하며 읽기 시작하자 우리 사이에는 다시 실소가 퍼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렇게나 발음의 묘함을 간파해낸 선생님께서도 막상 번역면에서는 일본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일본어의 가지수를 알지 못하셨다. 혹은 알더라도 그 자리서 바로바로 떠올리지 못하신 걸 테지. 예를 들어 단 한 줄을 번역하더라도 "그래서 로빈슨 크루소는 기어코 기르기로 했습니다. 뭘 기르기로 했냐면 그 묘한 동물인데――동물원에 있는――뭐라고 해야 하죠――왜 흔히 연극을 하는――제군도 알고 계시겠지요. 있잖아요. 얼굴이 붉은――네, 원숭이요? 맞아요, 원숭이요. 그 원숭이를 기르기로 했죠."
그야 원숭이마저 이 모양이니 조금만 성가신 말이 나오면 몇 번이나 주위를 둘러봐야 비로소 번역어를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모리 선생님은 그때마다 지독히 당황하셔서 보라색 넥타이를 찢어 발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번번이 목덜미에 손을 가져가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학생들을 보았다. 그런가 하면 두 손으로 벗겨진 머리를 붙들고 책상 위에 고개를 숙인 채 정말로 면목 없다는 양 기운을 잃고 만다. 그럴 때면 안 그래도 작은 선생님의 몸이 마치 공기가 빠진 고무풍선처럼 한없이 쪼그라들어 의자 아래로 내려온 두 다리마저 둥실 공중에 떠오르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학생들은 또 그런 걸 우스개거리 마냥 쿡쿡 웃는다. 그렇게 선생님이 두어 번 해석을 반복하는 사이 그런 웃음 소리도 점점 대담해져 끝내는 가장 앞줄마저 공공연히 술렁이게 되었다. 이러한 우리의 웃음소리가 선량한 모리 선생님을 얼마나 상처 입혔을까――나는 오늘날 그 각박한 울림을 떠올리면 그만 귀를 덮어버리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모리 선생님께서는 쉬는 시간 나팔이 울 때까지 용감히 해석을 거듭하셨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 한 줄을 다 읽고는 다시 이전과 같은 유유한 태도로 우리의 경례에 답하고는 그전까지의 참담한 악투도 전부 잊어버린 것처럼 침착히 교실을 나가셨다. 그 뒤를 쫓아 우리 사이에서 터진 폭풍과 같은 웃음소리, 일부러 소란스럽게 책상 뚜껑을 열었다 닫는 소리, 또 교단에 뛰어올라 모리 선생님의 몸짓이나 목소리를 바로 흉내 내는 학생들――아아, 심지어는 반장 완장을 찬 나마저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선생님의 오역에 관한 지적을 한없이 들은 사실마저 떠올러야 하는 걸까. 선생님의 오역에 관한? 나는 그 당시마저 과연 그게 진짜 오역인지 확실한 건 무엇 하나 알지 못한 채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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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서너 일 지난 어떤 오후의 쉬는 시간. 우리 대여섯 명은 기계체조장의 모래사장에 모여서 교복 등을 따스한 겨울 햇살에 드러내며 머지않아 다가올 학년 시험 이야기 따위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학생과 함께 철봉에 매달려 있던 체중 18관 1의 탄바 선생님이 "하나둘"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 위로 뛰쳐내려 조끼에 운동모를 쓴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내
"그래서, 이번에 새로 오신 모리 선생님은 어떠니?"하고 물었다. 탄바 선생님 또한 우리반에 영어를 가르쳐주셨는데 유명한 운동 애호가이며 시를 읊는 걸 좋아하셔 영어 그 자체를 싫어하던 유도나 검도 선수 같은 호걸들 사이에서도 꽤나 평판이 좋았다. 선생님이 그렇게 묻자 호걸들 중 하나가 미트를 가지고 놀면서
"네, 별로――뭐냐. 다들 별로 안 좋다고 말해요."하고 어울리지도 않게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탄바 선생님께서는 바지 모래를 손수건으로 털면서 의기양양히 웃어 보이셨다.
"너보다 못하시냐?"
"그야 저보다야 잘 하죠."
"그럼 따질 거 없네."
호걸은 미트를 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의기소침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반의 영어 수재가 도수가 높은 근시 안경을 고쳐 쓰고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어른스러움으로
"하지만 선생님, 저희 대부분은 전문학교에 들어 갈 예정이니까 가능하면 좋은 선생님께 배우는 게 좋죠"하고 항변했다. 하지만 탄바 선생님은 여전히 용맹이 웃으시면서
"야, 고작해야 한 학기다. 누구한테 배우나 매한가지야."
"그럼 모리 선생님은 한 학기만 가르치시는 건가요?"
그 질문에는 탄바 선생님도 조금 급소를 찔린 듯했다. 세상 살이에 탁월한 선생님은 그에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운동모를 벗으며 짧게 짜른 머리의 먼지를 기세 좋게 털고는 불쑥 우리 일동을 둘러보며
"그야 모리 선생님께서는 연세도 있으시니 우리하고는 다른 부분도 많겠지. 오늘 아침도 내가 전철에 타니까 선생님이 한가운데에 서계셨는데 환승역에 가까워지자 '차장, 차장'하고 부르시더라고. 웃겨서 좀 곤란했다니까. 어찌 됐든 특이하신 분인 건 맞아."하고 교묘히 화제를 돌려버리셨다. 하지만 우리 또한 굳이 탄바 선생님의 말을 빌릴 필요는 없었다. 두 눈으로 모리 선생님의 그런 부분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모리 선생님은 비가 오면 양복에 게다를 신고 오신다니까요."
"항상 하얀 손수건으로 감싸서 허리에 차고 있는 그거, 모리 선생님의 도시락이죠?"
"모리 선생님이 전철 손잡이를 잡고 있는 걸 봤더니 털실 장갑이 구멍 투성이었대요."
우리는 탄바 선생님을 둘러싸고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사방에서 늘어놓았다. 그에 끌려가기라도 한 걸까. 우리 목소리가 하나같이 높아지자 탄바 선생님도 어느샌가 붕 뚠 목소리와 함께 운동모를 손가락 끝으로 돌리며
"그보다 그 모자가 낡아가지고――"하고 저도 모르게 입에 올릴 뻔한 마침 그때였다. 기계 체조장과 마주하여 대략 열 걸음 가량 떨어져 있는 2층짜리 교사 입구서 모리 선생님이 그 낡은 보울러 햇을 쓰고 특유의 붉은 넥타이를 손에 든 채로 유유히 작은 몸을 드러내셨다. 입구 앞에는 1학년일 테지. 아이처럼만 보이는 학생 예닐곱 명이 말뚝박기를 하고 놀며 있었는데 선생님의 모습을 보자 다들 앞다투어 정중히 인사를 했다. 모리 선생님 또한 입구의 계단 위에 드리운 햇살 속에 선 채로 보울러 햇을 들어 웃어 보이는 걸로 인사를 받아 주시는 듯했다. 그 광경을 본 우리는 모두 일종의 수치를 느껴서 북적였던 웃음소리를 한동안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탄바 선생님만큼은 입을 다무는 것만으로는 죄송함과 당황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던 거겠지. "그 모자가 낡아가지고" 그렇게 말하려던 혀를 살짝 내밀고는 재빠르게 운동모를 쓰고는 불쑥 방향을 바꾸어 "하나――"하고 크게 소리치며 조끼 하나 입은 두툼한 몸을 철봉으로 던졌다. 그리고 거꾸로 매달려 두 발을 먼 공중으로 뻗으며 "둘――"하고 다시 외쳤을 적에는 이미 푸른 하늘을 선명히 가르며 쉽사리 그 위에 올라가 있었다. 탄바 선생님의 이런 우스꽝스러운 회피 행동이 우리를 실소하게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순간 목소리를 삼켰던 기계 체조장의 학생들은 철봉 위 탄바 선생님을 올려다 보면서 마치 야구 응원이라도 하듯이 와하고 환성을 터트리며 손뼉을 쳤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주위와 마찬가지로 갈채한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갈채하는 사이 나는 철봉 위 탄바 선생님을 반쯤 본능적으로 미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리 선생님께 동정을 했단 건 아니다. 그 증거로 그때의 내가 탄바 선생님께 보낸 박수는 동시에 모리 선생님께 우리의 악의를 보여준다는 간접 목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 머리를 해부하면 그때 내 심리는 도덕상으로 탄바 선생님을 모독하는 동시에 학력상으론 모리 선생님 또한 함께 모독했다는 걸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혹은 그 모리 선생님을 향한 모독은 탄바 선생님의 "그 모자가 낡아 가지고"에 의해 한 층 더 뒷받침이 되고 뻔뻔함이 덧붙여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나는 갈채하면서 우뚝 선 어깨너머로 분연히 교사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모리 선생님께서 태연히, 마치 태양빛을 찾아다니는 겨울 파리처럼 가만히 돌계단 위에 자리한 채 1학년의 순박한 장난을 여념 없이 홀로 바라보고 있다. 그 보울러 햇과 보라색 넥타이――당시 비웃어야 마땅할 대상으로 담긴 이 광경도 이제 와서는 되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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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선생님이 취임 당일 복장과 학력으로 자극한 우리의 멸시는 탄바 선생님의 그 실책(?) 이후로 이윽고 반 전체로 퍼지게 되었다. 그렇게 또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어느 아침의 일이다. 그날은 전날부터 눈이 계속 내려 창밖에 자리한 우천시 체조장 지붕 따위는 벽돌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 가득 매워졌으나 그럼에도 교실 안에는 난로가 새빨갛게 석탄불을 태워주고 있었다. 또 창문에 쌓이는 눈마저 옅은 파란색의 반사빛을 드리울 새도 없이 녹아버렸다. 그 난로 앞에 의자를 놓은 모리 선생님은 여느 때처럼 갈라지는 목소리를 짜내며 초이스 리더 안의 샘 오브 라이프를 열심히 가르치셨으나 물론 귀 기울이는 학생은 누구 하나 없었다. 없는 건 고사하고 내 옆자리의 유도 선수 따위는 책 아래에 무협 세계를 펼친 채 아까부터 오시카와 슌로의 모험 소설을 읽고 있다.
그로부터 이래저래 이삼십 분 가량 지났을까. 모리 선생님은 불쑥 의자서 일어나시더니 마침 지금 가르치고 있는 롱펠로의 시를 통해 인생이란 문제를 꺼내셨다. 어떤 요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논의라기 보단 선생님의 생활을 중심으로 한 감상에 가까웠지 싶다. 그건 선생님이 마치 날개 바진 새처럼 끝없이 두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웅변하는 내용 중에
"제군은 아직 인생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요? 알고 싶다 해서 알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만큼 제군은 행복합니다. 제 나이쯤 되면 인생이 뭔지 압니다. 알지만 괴로운 일이 많아요. 정말로요. 괴로운 일이 많지요. 제게는 아이가 둘 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야 하지요. 학교에 보내면――어어――보내면――학비? 그래요, 학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괴로운 일이 많아요……" 그런 불평 같은 걸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들 상대로 생활난을 호소하는――혹은 호소할 생각은 없더라도 호소하는 선생님의 심리 같은 걸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보다도 호소했단 사실 그 자체의 우스운 측면만 본 우리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동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쿡쿡 웃기 시작했다. 단지 그게 평소의 큰 웃음으로 변하지 않은 건 선생님의 볼품없는 복장과 갈라지는 목소리와 함께 웅변하는 얼굴이 그야말로 생활난 그 자체인 것만 같아 어느 정도의 동정을 유도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의 웃음이 더 이상 커지지 않은 대신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자리에 있던 유도 선수가 대뜸 무협 세계를 넣어두더니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일어섰다. 그렇게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선생님, 저희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출석했습니다. 그러니 영어를 가르쳐주신다면 교실에 들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더 말씀하시겠다면 저는 이제 체조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 학생은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무서운 기세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이때의 모리 선생님만큼 신비한 표정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선생님은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난로 옆에 서서 일이 분 가량 사나운 학생의 얼굴을 단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가축 같은 눈동자 안에 그 무언가를 애원하는 표정이 잠시 번뜩이는가 싶더니 불쑥 보라색 넥타이에 손을 주고는 벗겨진 머리를 두어 번 숙이셨다.
"확실히 이건 제 잘못이군요. 제가 잘못했으니 사과하겠습니다. 확실히 제군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출석하셨지요. 그런 제군에게 영어를 가르치지 않은 건 제 잘못입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사과하겠습니다. 네, 사과하지요." 그렇게 울기라도 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그런 와중에 난로에서 드리운 비스듬한 붉은 빛을 받아 웃옷의 어깨나 허리의 찢어진 부분이 한층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가 하면 선생님의 벗겨진 머리도 숙일 때마다 훌륭히 적동색 광택을 둘러서 더더욱 타조알처럼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안타까운 광경도 당시의 내게는 장난스레 선생님의 하등한 교사 근성을 폭로한 걸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모리 선생님은 학생의 비위를 맞춰서까지 실직의 위험을 피하려 하고 있다. 그러니 선생님이 교사 노릇을 하는 건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이지 비단 교육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희미하게나마 그런 비평을 한 나도 이제는 복장이나 학력을 향한 멸시만 아니라 인격에 대한 멸시마저 느끼며 초이스 리더 위에 턱을 괸 채로 불타는 난로 앞에 서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화형 되고 있는 선생님을 향해 몇 번이나 건방진 웃음 소리를 내뱉었다. 물론 이는 나 하나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선생님을 몰아붙인 유도 선수는 선생님이 새파랗게 질려 사죄하자 살짝 나를 보더니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곧장 책 아래에 있던 오시카와 슌로의 모험 소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쉬는 시간 나팔이 울 때까지 우리 모리 선생님은 평소 이상으로 더 머뭇거리며 애처로운 롱펠로를 무작정 해석하셨다. "Life is real, life is earnest.인생은 실재한다. 인생은 정직하다."――그 핏기가 가신 둥근 얼굴에 땀을 흠뻑 머금으며 끝없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애원하면서 목에 걸리는 듯한 갈라진 목소리로 읽어낸 말은 오늘날에도 내 귀 밑바닥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 갈라진 목소리 속에 깃든 수백만 명의 비참한 인간의 목소리는 당시 우리의 고막을 자극하기엔 너무나 심각했다. 그렇기에 그 시간 동안 권태에 권태를 거듭한 우리 안에는 거리낌 없는 하품 소리를 낸 학생마저 나 이외에도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모리 선생님은 난로 앞에 몸을 작게 세운 채 창문 유리를 스치며 날리는 눈에도 전혀 아랑곳 않으시고 머리 안의 태엽이 잠시 풀린 것만 같은 기세로 끝없이 책을 휘저으시며 필사적으로 외치고 계셨다.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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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당이니 한 학기의 고용 기간이 지나 다시 모리 선생님을 뵐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기뻐할지언정 결코 아쉬워하지 않았다. 아니, 기뻐할 생각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선생님의 퇴임에 냉담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나 따위는 그로부터 칠팔 년,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어른이 되어감과 동시에 그런 선생님의 존재마저 거의 잊었을 정도로 어떠한 애착도 품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한 해 가을――좀 더 정확히는 해가 지면 이따금 짙은 안개가 깔리는 십이 월의 초순쯤에 가로수인 버들이나 버즘 따위가 노란 잎을 흔들던 어느 비가 갠 날의 밤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칸다의 헌책방을 끈기 좋게 돌아 유럽 전쟁이 시작된 후로 수가 급감한 독일책을 한두 권 구한 끝에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이는 늦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외투 소매로 가로막으며 문득 나카니시야를 지나다 어째서인지 밝은 목소리와 따스한 음료가 그리워져 주변에 있던 카페에 별생각 없이 들어갔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카페 안은 비좁고 한산하여 손님 그림자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줄지은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설탕 항아리의 도금만이 차갑게 전등 빛을 반사하고 있다. 나는 마치 누군가에게 속은 듯한 쓸쓸한 기분을 맛보며 벽에 걸린 거울 앞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주문을 들으러 온 직원에게 커피를 부탁하고는 담배를 떠올려 성냥을 몇 번이나 스친 끝에 겨우 그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이 내 테이블 위에 나타났다. 그럼에도 한 번 식은 마음은 바깥에 내린 안개처럼 간단히 맑아지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 헌책방서 산 책은 글자가 자그마한 철학 서적이니 모처럼의 명문도 여기서는 한 페이지를 읽는 것마저 고통이다. 그렇기에 나는 도리 없이 의자 등에 머리를 기댄 채 브라질 커피와 담배를 번갈아 쓰며 곧 눈앞의 거울 안에 막연히 미적지근한 시선을 보냈다
거울 안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을 시작으로 건너편 벽, 하얗게 칠해진 문, 벽에 걸린 음악회 광고 따위가 무대의 일부서도 볼 수 있도록 똑바로 차갑게 비치고 있다. 아니, 그 이외에도 대리석의 테이블이 보였다. 커다란 침엽수 화분도 보였다. 천장에서 내려온 전등도 보였다. 커다란 도자기 가스난로도 보였다. 그 난로 앞을 둘러싸고 무어라 이야기하는 서너 명의 직원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이렇게 내가 거울 속 물건을 순서대로 점검하여 난로 앞에 모인 직원들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는 그들에게 둘러싸인 채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손님의 모습에 놀랐다. 그게 이제까지 내 눈에 들지 않았던 건 아마 주위 직원 탓에 무의식적으로 카페의 요리사 따위로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때 내가 놀란 건 없는 줄 알았던 손님이 있었던 탓만은 아니다. 거울 안에 담긴 손님의 모습이 내게 옆얼굴 밖에 보여주고 있지 않음에도 그 타조알 같은 벗겨진 머리나, 고색창연한 모닝 코트나, 마지막으로 그 영원한 보라색 넥타이나 내가 아는 그 모리 선생님이란 걸 한눈에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님을 보는 동시에 선생과 나 사이의 칠팔 년의 세월을 곧장 떠올렸다. 초이스 리더를 배우던 중학교 반장과 지금 여기서 조용히 코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나――내게 그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걸 밀어내는 '시간'의 흐름도 이미 시대를 초월한 이 모리 선생님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걸까. 지금 이 밤의 카페서 직원과 테이블을 두고 앉은 선생님은 그 옛날, 서쪽 햇살도 들지 않는 교실서 영어를 가르치시던 모리 선생님과 다를 바가 없었다. 벗겨진 머리도 달라지지 않았다. 보라색 넥타이도 여전히 하고 계셨다. 그 갈라진 목소리도――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지금도 그 갈라진 목소리를 써서 직원들에게 바쁘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만 웃음을 지으며 가라앉은 기분도 잊은 채로 가만히 선생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 여기에 있는 형용사가 이 명사를 지배하는 거지. 알겠나? 나폴레옹이란 건 사람 이름이잖아. 이를 명사라 하는 거지. 그리고 그 명사를 보면 바로 뒤에――이 바로 뒤에 있는 게 뭔지 알겠나? 자, 자네가 말해보게."
"관계――관계명사인가요."
직원 중 하나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관계명사? 관계명사란 건 없어. 관계――으음――관계대명사? 그래그래, 관계대명사야. 대명사니까 왜,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대신하는 셈이지. 대명사란 이름을 대신한다는 뜻이니까."
듣자하니 모리 선생님은 여기 카페 직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계신 듯하다. 그렇게 나는 의자를 옆으로 치워 다른 위치서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확실히 그 테이블 위에는 책 같은 게 하나 펼쳐져 있다. 모리 선생님은 그 페이지에 손가락을 세워가며 한사코 설명에 질리는 법이 없으셨다. 그런 점에서도 선생님은 여전하신 듯했다. 하지만 주위에 선 직원들은 그때 학생들과 반대로 다들 열심히 눈을 빛내며 빼곡히 모여서는 매끄럽지 못한 선생님의 설명을 얌전히 듣고 있다.
나는 거울 속 광경을 잠시 바라보는 사이에 모리 선생님을 향한 온정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나도 저기 가서 선생님과 오랜만에 만남을 가질까. 하지만 선생님은 고작해야 한 학기란 짧은 시간 동안 교실에서만 얼굴을 마주한 나 같은 걸 기억하실 리도 없었다. 설령 기억하시더라도――나는 갑작스럽게 당시 우리가 선생님께 끼얹은 악의 품은 웃음 소리를 떠올리고는 결국 밝히지 않는 편이 선생님을 존경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고쳤다. 그렇게 커피가 다 떨어진 걸 기회 삼아 짧아진 담배를 버리며 가만히 테이블서 일어났다. 아무리 조용히 하려 애써도 역시 선생님의 주의를 끈 걸 테지. 내가 의자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선생님은 핏기가 가신 둥근 얼굴을. 칙칙한 목깃을, 보라색 넥타이를 한 번 내게 향하셨다. 가축 같은 선생님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거울 안에서 잠시 만난 게 바로 이때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눈에는 방금 전 내가 예상한 것처럼 옛지인과 만났다는 기색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그곳에서 빛나는 건 무언가를 항상 애원하는 듯한 애처로운 눈초리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직원의 계산서를 받고는 조용히 계산 입구의 카운터서 계산을 했다. 카운터에는 나도 얼굴을 익히 아는 머리를 깔끔하게 가른 직원이 지루하다는 양 앉아 있었다.
"저기서 영어 가르치시는 분 말야, 카페에서 부탁해서 가르치시는 거야?"
나는 돈을 내며 그렇게 물었다. 직원은 입구 거리를 바라본 채로 지루하다는 얼굴로 이런 답을 해주었다.
"부탁은요. 그런데도 매일 밤 오셔서 저렇게 가르쳐주셔요. 듣자 하니 연세가 되신 영어 교사시라는데 이젠 어디서도 고용을 해주지 않는다나요. 아마 시간이라도 때우시러 오시는 거겠죠. 커피 한 잔으로 하루 종일 앉아만 계시니 별로 고마운 분은 아니네요."
그걸 듣는 동시에 내 상상에는 곧장 모리 선생님의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를 애원하는 그 눈초리가 떠올랐다. 아아, 모리 선생님. 저는 지금 선생님을――선생님의 숭고한 인격을 처음으로 이해한 거 같습니다. 만약 타고난 교육가란 말이 있다면 선생님이 바로 그럴 테지. 선생님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란 공기 호흡과 마찬가지로 한 시도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억지로 막는다면 마치 수분을 잃은 식물처럼 선생님의 왕성한 활력도 곧장 수축되어 버리리라. 그러니 선생님은 매일 밤 영어를 가르친다는 흥미를 보고 일부러 홀로 이 카페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러 오신다. 물론 이 직원이 말하는 것처럼 한가한 일이라 봐도 되는 느긋한 성질은 아니다. 하물며 과거에 우리가 선생님의 성의를 의심하여 생활을 위한 일이라 비웃은 것도 이제 와서는 진심으로 얼굴을 붉혀야 하는 오해였다. 생각해 보면 이 시간 때우기도 그렇고 생활을 위한 일이란 말도 그렇고, 선생께서는 세간의 속되고 지독한 해석에 얼마나 괴로워하셨을까. 본래 그러한 괴로움 속에도 선생님은 끝없이 유유한 태도를 취하며 그 보라색 넥타이를 차고 보울러 햇을 쓰고서 돈키호테보다 용맹히 물러서지 않는 해석을 거듭해왔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눈 속에는 이따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을 향한――아마 선생님이 접하는 세계 전체를 향한――동정을 애원하는 눈빛이 안타깝게도 깃들어 있지 않았던가.
찰나 동안 그런 생각을 한 나는 울어야 좋을지 웃어야 좋을지 모를 감동에 억눌리며 외투 자락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재빨리 카페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뒤에서는 모리 선생님께서 밝고 차가운 전등불 아래서 손님이 없는 걸 틈 타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를 내가며 열심히 영어를 가르치고 계셨다.
"이름을 대신하니까 대명사. 대명사야,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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