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는 십 년 가량 지난 일이다만 어느 해 봄, 나는 실천윤리학 강의를 의뢰 받아 이래저래 일주일 가량 기후켄 아래의 오오가키마치에 머물게 되었다. 본래 지방 유지란 사람의 두터운 민폐에 질색을 하던 나는 나를 초청해준 어떤 교육가 단체에 미리 편지를 보내 환대니 환영식이니 또 명소 안내니 갖은 강연에 부속되는 모든 쓸데없는 시간 때우기를 거절하고 싶다는 요지를 희망해두었다. 그 일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풍평이 이 지방에도 전해졌는지 내가 도착하자 그 단체의 회장인 오오가키마치장의 알선으로 모든 게 내 바람처럼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숙소도 평범한 여관을 피해 재산가 N 씨의 마을 안 별장이란 한적한 거처를 마련해주셨다.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건 그렇게 머물게 된 별장서 내가 우연히 접하게 된 비참한 일의 전말이다.
그 거처가 자리한 곳은 코로쿠죠에 가까운 쿠루와마치서도 가장 속세와 먼 구획이었다. 특히 내가 자고 일어난 서원 구조의 팔 첩방은 햇빛이 안 드는 게 좀 안타까워도 쇼지후스마가 기분 좋은 쓸쓸함을 머금은 참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공간이었다. 내 신세를 봐준 별장지기 부부는 별 일이 없는 한 항상 물러나 있었으니 이 어두컴컴한 팔첩 방은 대개 한산하여 인기척 하나 없었다. 그야말로 방 구석에 놓여 있는 수수발 위에 가지를 뻗은 목련이 이따금 하얀 꽃을 떨구는 것마저 또렷이 들리는 듯한 조용함이었다. 매일 오전만 강연을 맡은 나는 오후와 밤을 이 방에서 단지 태평히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동시에 참고서와 갈아입을 옷을 넣은 가방 이외에 무엇 하나 없는 나 자신을 쓸쓸하게 여기는 일도 몇 번인가 있었다.
물론 오후는 이따금 찾아 오는 방문객 덕에 그리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이욱고 대나무통을 받침으로 된 고풍스러운 램프에 불이 들어오면 인간미가 넘치던 세계가 곧장 그 작은 불빛을 받는 나의 주위만으로 쪼그라들었다. 심지어 내게는 그 주위마저 결코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내 뒤에 있는 거실에는 꽃도 꽂히지 않은 청동 꽃병 하나가 위세 좋게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괴상한 양류관음이 그려진 족자가 그을러진 금란 안에서 몽롱히 묵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읽던 책에서 고개를 들고 그 낡은 불화를 돌아보면 반드시 불이 들어오지도 않은 향냄새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만큼 방 안에는 절을 방불케 하는 한적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자주 일찍 잠에 들었다. 하지만 잠자리엔 들어도 간단히 잠이 오지 않았다. 창문 밖에서는 거리감을 알 수 없는 밤새 우는소리가 나를 놀라게 했다. 그 목소리는 이 거처 위에 있는 텐슈카쿠를 방불케 했다. 낮이 되면 텐슈카쿠는 항상 무성한 소나무 사이서 삼 층의 하얀벽을 드리우며 뒤집힌 지붕의 하늘에 까마귀를 흩뿌리고 있다――나는 언젠가 꾸벅꾸벅 옅은 잠에 잠긴 채로 그럼에도 아직 배 밑바닥에는 물처럼 차가운 봄 추위가 감도는 걸 의식했다.
그러던 어느 밤――그건 예정된 강연 일자가 곧 끝나려던 시기였다. 나는 여느 때처럼 램프 앞에 앉아 막연히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대뜸 거실의 후스마가 꺼림칙할 정도로 조용히 열렸다. 그렇게 열린 걸 알아차렸을 때 무의식적으로 별장지기를 예상하던 나는 미리 써둔 메모의 투함을 부탁하려고 별 생각 없이 그쪽을 보았다. 그러나 후스마 옆 어둠에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마흔 쯤 되는 남자 하나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순간 경악――좀 더 정확히는 미신적 공포에 가까운 일종의 감정에 겁을 먹었다. 실제로 그 남자는 희미한 램프 빛을 받아 묘하게 유령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그렇게 충격 받기에 마땅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는 옛날식으로 두 팔뚝을 높게 들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생각보다 젊은 목소리로 거의 기계적으로 이런 인사를 했다.
"밤중에 많이 바쁘실 텐데 이렇게 방해하게 되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단지 선생님께 잠시 부탁드리고 싶은 바가 있어서 실례를 무릎쓰고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
그제야 첫 충격서 회복한 나는 그 남자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 처음으로 침착히 상대를 관찰했다. 그는 이마가 넓고 뺨이 말랐으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이 바쁘게 움직이는 품위 있는 반백의 인물이었다. 몬츠키 차림까지는 아니더라도 볼성 사납지 않은 하오리를 잎고 심지어 무릎 근처에는 부채를 갖추고 있었다. 단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신경을 자극한 건 그의 왼손 손가락이 하나 부족하단 사실이었다. 그걸 안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그 손에서 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시죠?"
나는 읽던 책을 덮으며 무뚝뚝하게 이렇게 물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이 갑작스러운 방문이 의외인 동시에 화가 났다. 또 동시에 별장지기가 손님이 올 거라곤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게 의아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내 냉담한 말에도 주저하는 법 없이 다시 한 번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는 여전히 낭독이라도 하는 듯한 투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나카무라 겐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매일처럼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있지요. 물론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기억하지 못하실 걸 압니다. 부디 이를 인연 삼아서 앞으로 지도를 받고 싶습니다."
나는 그제야 남자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 하지만 밤중 독서의 정취를 깬 사실은 여전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제 강연에 질의라도 있으신 건가요?"
이렇게 물은 나는 내심 "질의라면 내일 강연장에서 듣지요"하는 형편 좋은 격퇴 문구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역시나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무릎 위에 시선을 떨구며
"아뇨, 질의는 아닙니다. 아닙니다만 실은 제 주위서 벌어진 일에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건 즉 지금으로부터 대략 스무 해 전, 저는 어떤 생각지도 못한 일을 만나 그 결과 저 스스로도 나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하니 선생님 같은 윤리학계의 대가의 말씀을 들으면 자연히 분별도 갈 거 같아서 오늘 밤 이렇게 찾아 온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지루하시더라도 제 이야기를 잠시 들어주실 수는 없을까요?"
나는 답을 주저했다. 확실히 전문을 따지면 윤리학자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나는 그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곧장 당장의 문제에 적용한 해결을 줄만큼 융통성 좋은 두뇌를 소유자라 자아도취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그도 내가 주저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이제까지 무릎 위에 숙이고 있던 시선을 들고는 반쯤 애원하듯이 머뭇머뭇 내 얼굴색을 살피며 이전보다 살짝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은근히 이렇게 말을 이었다.
"아뇨, 물론 선생님께서 억지로 판단을 내리실 건 없으십니다. 단지 제가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줄곧 고민하던 문제이니 하다못해 그 괴로움만이라도 들어 주셔서 조금이라도 제 마음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말까지 하니 나는 의리로라도 이 처음 보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또 동시에 불길한 예감과 막연한 일종의 책임감 따위가 무겁게 내 마음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러한 불안함을 떨치고 싶은 심정으로 일부러 가벼운 태도를 꾸며서 희미한 램프 너머에 상대를 부르며
"그럼 일단 듣기라도 해볼까요. 물론 듣는다 해서 무어라 참고가 될만한 의견을 해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뇨 단지 듣기만 해주셔도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일입니다."
나카무라 겐도라 자신의 이름을 밝힌 인물은 손가락이 하나 부족한 손에 부채를 들어 올리고는 이따금 가만히 고개를 들어 내 뒤편의 양류관음을 훔쳐보면서 역시나 억양이 빈곤한 음침한 분위기로 띄엄띄엄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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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이십사 년의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십사 년이라 하면 그 노비 대지진이 있었던 해로 그 후로 오오가키도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요.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가 두 개가 있어서 하나는 번주가 세운 거고 하나는 마을에서 세운 걸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저는 번주가 지은 K 초등학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삼 년 전에 현의 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장의 신용도 상당했기에 나이치고는 꽤나 많은 십오 엔이라는 봉급을 받았습니다. 요즘에야 십오 엔 월급 가지곤 연명도 쉽지 않겠지만 스무 해나 된 일이니 충분하다고는 못해도 생활에는 부족함이 없었지요. 저는 동료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될 정도였습니다.
가족은 하늘에도 땅에도 아내 하나로 결혼하여 겨우 두 해밖에 되지 않았을 적이었습니다. 아내는 교장의 먼 친척으로 어릴 적에 부모님과 헤어진 후로 제게 올 때까지 줄곧 교장 부부가 딸처럼 돌봐준 여자였지요. 이름은 사요小夜라 하였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정말로 순박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반면에 또 말이 너무나 적고 어딘가 존재감이 부족한 쓸쓸한 천성을 지녔습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주 닮은 부부라서 설령 이렇다 밝힐 만큼 화사한 즐거움은 없습니다만 마음 편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지진으로――잊을 수도 없습니다. 시 월 이십팔 일, 대략 오전 일곱 시 가량이었을까요. 제가 우물가에서 양치를 하고 있을 때 아내는 주방서 그릇을 옮기고 있었죠――그 위로 집이 무너졌습니다. 그게 고작해야 일이 분의 일로 마치 큰 바람처럼 땅이 울리나 싶더니 곧장 집이 기울기 시작해 그 후엔 기와가 날아다니는 것만 보일뿐이었습니다. 저는 소리 한 번 지를 새 없이 느닷없이 떨어진 처마에 깔려 한동안 무아몽중히 온방향서 다가오는 대지진의 파도에 흔들렸습니다만 겨우 그 처마 아래서 모래 연기 안으로 기어 나와 보니 제 눈앞에 있는 건 우리 집 지붕이었고 심지어 기와 사이에 풀이 솟은 게 땅 위에 일그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제 심정을 놀랐다 해야 할까요 황당했다 해야 할까요. 마치 정신이라도 놓은 듯한 기분으로 주저 앉아서는 마치 폭풍우 부는 바다처럼 온곳에 지붕을 떨군 집들을 보고 땅울림소리, 대들보가 무너지는 소리,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 벽이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수천 명이 도망치는 목소리인지 소리인지 구분 못할 울림이 주위를 들볶는 걸 멍하니 듣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로, 이윽고 처마 아래서 움직이는 걸 발견하고는 곧장 뛰쳐 나가 나쁜 꿈에서 깨기라도 한 듯한 의미 없는 큰소리를 지르며 당장 그곳으로 달려 갔습니다. 처마 아래에는 아내 사요가 하반신을 대들보에 눌려 괴로운 신음을 내고 있었지요.
저는 아내의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아내의 어깨를 밀어 일으키려 했지요. 하지만 누르는 대들보는 벌레가 기는 정도로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는 당황하여 처마 판을 한 장 한 장 떼어냈습니다. 떼어내면서 몇 번이나 아내에게 "정신 좀 차려봐"하고 소리쳤습니다. 아내에게? 아니 혹은 나 자신을 격려하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요는 "아파"하고 말했습니다. "어떻게든 해줘요"하고도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어라 할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처럼 얼굴색을 바꾸고 필사적으로 대들보를 밀어내려 했으니까 저는 그때 아내의 두 손이 손톱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로 물들어 떨면서 대들보를 밀어내던 게 지금도 숱한 괴로운 기억 속에 함께 남아 있습니다.
그게 정말 긴 시간이었습니다――그러는 사이 정신을 차려보니 어디서 몽롱한 검은 연기가 지풍을 건너 제 얼굴을 향해 불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연기 너머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 금가루 같은 불똥이 띄엄띄엄 하늘로 올랐습니다. 저는 미치광이처럼 아내에게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무작정 아내의 몸을 대들보 아래서 끌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아내의 하반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또 불어 오는 연기를 받고 처마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매달리듯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뭐를? 그렇게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물으시겠죠. 하지만 저도 무어라 말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단지 저는 그때 아내가 피로 물든 손으로 제 팔을 붙들고 "여보"하고 한 마디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갖은 표정이 사라진 눈만 크게 떠진 꺼림칙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연기만 아니라 불똥을 두른 불기운이 눈도 흐릿해질 정도로 저를 덮쳤습니다. 저는 이제 글렀다 생각했지요. 아내는 산 채로 불에 타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산 채로? 저는 피로 물든 아내의 손을 잡은 채로 또 무어라 소리쳤습니다. 아내 또한 거듭 "여보"하고 한 마디 했죠. 저는 그때 들은 "여보" 속에서 무수한 뜻과 무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산 채로? 산 채로? 저는 세 번 무어라 소리쳤습니다. 그건 "죽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또 한 편으로 "나도 죽을 거야"하고 말한 것처럼도 기억합니다. 하지만 무어라 말했는지 알 수 없는 사이에 저는 손에 닿는 대로 떨어진 처마를 들어 올려 아내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 후의 일은 선생님의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홀로 살아남았지요. 거의 온 마을을 불태운 불과 연기에 쫓겨 작은 산처럼 길을 막은 갖은 집들의 잔해 사이를 지나 겨우 목숨을 건진 셈입니다. 다행인지 혹은 불행인지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그날 밤, 아직 타고 있는 불빛이 드리운 어두컴컴한 하늘을 바라보며 동료 하나둘과 함께 역시나 무너진 학교 밖의 간이 대피소에서 막 지은 주먹밥을 쥐었을 때에 한참 눈물이 흐른 건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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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겐도는 한동안 말을 끊더니 겁먹은 눈을 바닥으로 깔았다. 대뜸 이런 이야기를 들은 나도 넓은 방의 봄추위가 목덜미까지 올라온 것만 같아 "그런가요"하고 말할 기운마저 들지 않았다.
방안에선 단지 램프가 기름을 빨아들이는 소리만 들렸다. 또 책상 위에 올려둔 내 회중시계가 시간을 새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가 하니 또 그 가운데 양류관음이 움직이나 싶을 정도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겁먹은 눈을 들고 초연히 앉아 있는 상대의 모습을 보았다. 숨을 쉰 건 그였을까. 혹은 나였을까――하지만 그런 의문이 풀리기 전에 나카무라 겐도는 역시나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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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만 저는 아내의 마지막을 슬퍼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교장을 시작으로 한 동료들의 친절한 동정을 듣고서 사람들 앞임에도 불구하고 눈물마저 흘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지진 속에서 아내를 죽였단 사실만큼은 묘하게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산 채로 타죽는 것보단 낫겠지 싶어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이 정도 일을 말해본들 제가 꼭 감옥에 보내지는 것도 아닐 테지요. 아니요 되려 그 때문에 세간이 저를 한층 더 동정할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건지 말하려고 하면 목가에 무언가가 걸려서 혀를 움직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저는 그 원인이 제 겁 많은 심성에 뿌리내려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은 단순히 겁이 많다기 보다도 더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원인이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 원인은 재게 재혼 이야기가 찾아와 다시 한 번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려던 찰나까지는 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알았을 때 저는 두 번 다시 평범한 생활을 보낼 자격이 없는 애처로운 정신상의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재혼 이야기를 제게 꺼낸 건 사요의 부모격이었던 교장으로 순수히 저를 위해 한 말이란 건 저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실제로 그즘은 대지진을 지나 보내고 일 년 가량 지났을 시기며 교장이 이런 문제를 꺼내기 전에도 종종 같은 이야기를 꺼내 저를 떠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교장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상대란 게 의외로 선생님이 계신 이 N가의 둘째 딸로 당시 제가 학교 이외에도 이따금 과외를 해주던 사 학년 장남의 누나라지 뭡니까. 저는 물론 한 번 발을 뺐습니다. 애당초 교원인 저와 자산가 N가 사이엔 신분 차이도 꽤나 크고 가정 교사란 관계상 결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고 괜한 오해를 사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동시에 제가 내키지 않은 이유의 뒤편에는 다른 사람들은 날이 지날 수록 이전만큼 슬퍼하지 않더라도 제가 죽인 사요의 그림자가 혜성의 꼬리처럼 둘러져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교장님은 제 마음을 이해해주시면서도 제 또래의 사람이 앞으로 독신 생활을 계속하는 건 어렵다, 심지어 이번 혼담은 상대편의 바람이기도 했다, 교장이 나서서 중매를 하는 이상 악평이 돌 리가 없다, 또 평소 제가 바란 도쿄 유학도 결혼하면 크게 편의를 봐줄 수 있다――그런 말을 해가며 끈기 좋게 저를 설득했습니다. 듣고 보니 저도 허투루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상대가 미인으로 평판이 자자하고 또 부끄럽습니다만 N가의 자산에도 눈이 갔기에 교장이 거듭 권하자 어느 틈엔가 "생각해보죠"가 "언젠가 해라도 바뀌면"하고 점점 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뀐 메이지 이십육 년 초여름에는 가을이 되면 식을 올리자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정리된 후부터 저는 묘하게 우울해져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무얼 하더라도 옛날 같은 기운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 가더라도 교무실 책상에 기댄 채 멍하니 무어라 생각에 잠겨서 수업 개시를 알리는 판목 소리마저 놓치는 일이 번번이 있었습니다. 그런 주제에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가 하면 스스로도 분명히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머릿속 톱니바퀴가 탁 들어맞지 않는 듯한――심지어 그 들어맞지 않는 너머에는 내 자각을 초월한 비밀이 일렁이는 듯한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 가량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여름방학이 된 어느 저녁, 제가 산책 겸 혼간지베츠인 뒤편에 자리한 서점을 들여다 보니 그 시절 평판이 좋았던 풍속화보란 잡지가 대여섯 권 야창귀담이나 월경만화와 함께 석판 표지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게 앞에 자리해 아무 생각 없이 그 풍속화보를 한 권 손에 들어보니 표지에 집이 쓰러지거나 화재가 시작된 그림이 있고 거기에 두 줄로 "메이지 이십사 년 십일 월 삼십 일 발행, 시 월 이십팔 일 대지진 기록문"이라 크게 인쇄되었습니다. 그걸 읽었을 때 저는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제 귓가에선 누군가가 기쁘게 비웃으면서 "그거야, 그거"하고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저는 아직 불을 키지 않은 가게 앞의 옅은 빛 안에서 황급히 표지를 넘겨 보았습니다. 그러자 가장 먼저 한 집안의 늙은이와 젊은이가 떨어진 대들보에 깔려 죽은 그림이 나와 있었습니다. 또 땅이 둘로 갈라져 다리가 걸린 여자아이를 삼키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또――하나하나 세면 끝이 없는데 그때 그 풍속화보는 이 년 전의 대지진 광경을 다시 제 눈앞에 전개해준 것입니다. 나가라가와 철교가 추락한 그림, 오와리 방적 회사가 무너진 그림, 제3사단 병사 시체 발굴 당시의 그림, 아이치 병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그림――그런 참상의 그림이 차례로 그 꺼림칙한 당시의 기억 속에 저를 끌고 갔습니다. 저는 눈이 뜨거워졌습니다. 몸도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인지 환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감정은 용서 없이 제정신을 넘실거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의 그림이 제 눈앞에 펼쳐졌을 때――저는 지금도 그때의 놀란 심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건 떨어진 대들보에 허리가 깔린 한 여자가 비참하게도 몸부림치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대들보 옆에서는 검은 연기가 올라와 있고 붉은 불똥마저 휘날리고 있지 뭡니까. 이게 제 아내가 아니면 누구일까요. 아내의 마지막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저는 하마터면 풍속화보를 손에서 떨굴 뻔했습니다. 자칫하면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심지어 그 순간 저를 가장 두렵게 한 건 갑자기 붉은빛이 들어오고 화재를 연상시키는 연기 냄새가 코를 찌른 것입니다. 저는 억지로 마음을 억누르며 풍속화보를 아래에 두고 두리번두리번 가게 앞을 살폈습니다. 가게 앞에는 마침 어린 종업원이 램프에 불을 붙이고는 저녁의 어듬이 흘러 들어오는 거리에 아직 연기가 올라오는 성냥을 버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전보다 더욱 우울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까지 저를 겁주던 건 정체 모를 불안이었는데 이제는 어떤 의혹이 제 머릿속을 떠돌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를 책망한 것입니다. 그건 즉 제가 대지진 당시에 아내를 죽인 건 과연 도리 없는 일이었을까――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아내를 죽인 건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있어 죽인 게 아니었을까. 대지진은 단지 내게 그걸 위한 기회를 준 것에 지나지 않을까――그러한 의혹입니다. 저는 물론 이 의혹을 앞에 두고 몇 번인가 "아니야, 아냐"하고 답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서점 앞에서 제 귀에 "그거야 그거"하고 속삭인 무언가는 그때마다 또 저를 비웃으며 "그럼 너는 왜 아내를 죽인 걸 말하지 못했지?"하고 따져 묻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떠올리면 반드시 움찔하고 말았습니다. 아아, 저는 왜 아내를 죽여놓고 죽였다 말하지 못한 걸까요. 왜 오늘날까지 그만큼 무서운 경험을 하염없이 숨겼던 걸까요.
심지어 그때 제 기억에 선명히 살아 돌아 온 건 당시 제가 아내 사요를 내심 증오했다는 꺼림칙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잘 납득이 안 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내는 불행히도 육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이하 팔십이 행 생략)………그렇게 저는 그때까지는 희미하게나마 제 도덕 관념이 승리하였다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지진이란 흉변으로 모든 사회적 규약이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었을 때, 기어코 그와 함께 제 도덕적 관념에도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걸 테지요. 어째서 저의 이기심은 화마를 이기지 못한 걸까요. 저는 그제야 아내를 죽이기 위해 죽였다는 의혹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우울해진 건 되려 자연의 이치라 해도 좋을 테지요.
하지만 제게는 아직 "그때 아내를 죽이지 않았더라도 아내는 분명 불에 타죽었을 게 분명하다. 그럼 아내를 죽인 게 꼭 나의 죄악이 되지는 않을 터이다"하는 한 줄기 활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계절이 한여름에서 잔서로 바뀌어 새학기가 시작될 즘이었습니다. 저희 교원 일동이 교무실 테이블을 둘러싸 차를 마시며 별 볼 일 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자니 어떤 박자인지 화제가 또 그 이 년 전의 대지진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그때도 입을 꾹 다문 채 동료의 이야기를 흘려 들었습니다만 혼간지노 베츠인 지붕이 떨어진 이야기, 후나마치의 제방이 무너진 이야기, 타와라마치의 거리서 땅이 갈라진 이야기――그렇게 이야기가 돌았는데 이윽고 한 교원이 말하길 나카마치의 빈고야라는 술집의 여주인이 대들보에 깔려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그때 화재가 시작되어 대들보도 불타 부러져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지 뭡니까. 저는 그걸 들은 순간 곧장 눈앞이 어두워져 한동안 호흡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 듯했습니다. 또 실제로 그 동안엔 정신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을 테지요.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동료들은 제 얼굴색이 갑자기 바뀌더니 의자째로 넘어지려는 것에 놀라서 다들 제 주의에 모여 물을 주고 약을 먹이는 등 대소란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동료들에게 인사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머리를 그 두려운 의혹 덩어리로 한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역시 아내를 죽이기 위해 죽인 게 아닐까. 설령 대들보에 눌리더라도 만에 하나 살아날 걸 두려워해 때려 죽인 게 아닐까. 만약 그대로 죽이지 않고 두었다면 지금 들은 빈고야의 여자처럼 내 아내도 어떤 기회로 구사일생했을지 모를 일 아닐까. 나는 그런 걸 한심하게 기와로 때려 죽여버렸다――그렇게 생각했을 때 느낀 제 괴로움이란 전적으로 선생님의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괴로움 속에서 하다못해 N가와 나누던 혼담을 거절해서라도 어느 정도 마음을 깨끗이 해야지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려 하니 모처럼의 제 결심은 미련에 둔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게 곧 결혼식을 올리려는 차에 갑자기 이야기를 깨야 하는 것이니까요. 대지진 때에 제가 아내를 죽인 전말은 물론이요 이제까지 제가 괴로워하던 것도 밝혀야 할 터입니다. 소심한 저로서는 스스로를 채찍질해도 단행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몇 번이나 한심한 저 자신을 나무랐습니다. 하지만 그냥 나무라기만 할뿐이지 무어라 마땅할 조치를 취하지 않는 사이에 잔서는 다시 조한으로 옮겨가 소위 화촉식을 올릴 날도 눈앞으로 다가왔지 뭡니까.
저는 이미 누구하고도 쉽게 말을 나누지 않을 정도로 침울한 인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혼을 연기하는 게 어떻겠냐고 주의를 주던 동료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교장님께선 의사를 보고 오란 충고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제게는 그러한 친절한 말을 앞에 두고도 외견만이라도 건강을 겉꾸밀 기력마저 없었습니다. 또 그와 동시에 그런 사람들의 걱정을 이용해 병을 구실 삼아 결혼을 연기하는 것도 이제 와서는 낡아 빠진 수단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한편으론 N가의 주인이 제 우울병의 원인을 독신 생활의 영향으로 착각한 걸 테지요.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라고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날은 달라도 이 년 전 그 대지진이 있었던 시 월, 저는 드디어 N가의 저택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줄곧 이어진 마음고생에 초췌해져 있던 제가 신랑복을 입고 금병풍을 세운 대응접으로 안내받았을 때 저는 오늘날의 저를 얼마나 부끄러워 했던가요. 저는 스스로가 마치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큰 죄를 저지르는 악당인 것처럼만 느껴졌습니다. 아니, 느껴지기만 했을까요. 저는 실제로 살인 죄를 감추고 N가의 딸과 자산을 훔치려 꾸민 죄인입니다. 저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자리서 제가 아내를 죽인 모든 사정을 자백하고 싶었습니다――그런 생각이 마치 폭풍처럼 거칠게 제 머리서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때, 앉아 있는 제 앞에 꿈만 같은 시로하부타에의 양말이 나타났습니다. 이어서 희미하게 파도치는 하늘에 소나무와 학을 두른 스소모요가 보였습니다. 또 금란 오비, 하코세코의 은사슬, 시로에리를 따라 별갑 머리 장식이 무겁게 빛을 내는 타카시마다가 눈에 들어왔을 때 저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로 절체절명의 공포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바닥에 두고는 '저는 살인자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입니다'하고 필사적으로 소리 높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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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겐도는 이야기를 마치고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윽고 입가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 이후의 일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단지 하나 들어주셨으면 하는 건 저는 그날부로 미치광이의 이름을 받고 애처로운 여생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과연 제가 미치광이인가 아닌가. 그 판단은 전적으로 선생님께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설령 광인이더라도 저를 광인으로 만든 건 역시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잠든 괴물 탓 아닐까요. 그 괴물이 있는 한 오늘날 저를 광인이라 비웃는 사람들마저 내일은 또 저와 같은 광인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어떠하십니까."
램프는 여전히 나와 이 꺼림칙한 손님 사이서 차가운 불꽃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양류관음을 뒤로한 채로 상대의 손가락 하나가 없는 이유를 물어 볼 기력마저 잃어서 묵묵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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