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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사이고 타카모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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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나보다 두세 해 전에 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혼마 씨의 이야기다. 혼마 씨가 흥미로운 유신사 논문 두어 개의 저자라는 건 알고 있는 사람도 많으리라. 나는 작년 겨울 카마쿠라로 이사하기 대략 일주일 전에 혼마 씨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가 우연히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 내용은 아직도 내 머리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이야기를 쓰는 걸로 새소설 편집자에게 줄 내 기고를 완성시키려 한다. 물론 이는 "혼마 씨의 사이고 타카모리"라 해서 친구나 지인 사이에선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이 이야기도 어떤 사회에는 의외로 알려져 있을지 모른다.
 혼마 씨는 이 이야기를 할 때에 "진위 판단은 각자 자유롭게 하세요"하고 말했다. 혼마 씨마저 주장하지 않으니 나는 물론 주장할 필요가 없다. 하물며 독자는 단지 오래된 신문 기사를 읽는 것처럼 막연히 행을 쫓아 읽어주면 된다.

       ―――――――――――――――――――――――――

 이래저래 칠팔 년 쯤 되었을까. 마침 3월 하순으로 슬슬 키요미즈의 벚꽃이 필 법한――그러면서도 아직 진눈깨비 섞인 비가 내리는 어느 지독히 추운 밤의 일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혼마 씨는 오후 아홉 시 몇 분에 교토서 출발하는 급행 상행 열차 식당에서 백포도주 컵을 앞에 둔 채로 멍하니 기후켄 경계에 가까워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유리 창문을 통해 밖을 보자 한없이 어둡기만 하다. 이따금 작은 불빛이 흐르듯이 지나가지만 그것도 먼 집의 조명인지 기차 굴뚝에서 나오는 불똥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단지 창문만을 두드리는 얼음 맺힌 빗소리만이 번거로운 차바퀴 소리에 단조로운 울림을 교차시키고 있다.
 혼마 씨는 일주일 전부터 봄방학을 이용해 유신 전후의 자료를 연구할 겸 홀로 교토에 놀러 왔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조사하고 싶은 것도 늘었고 가보고 싶은 곳도 여럿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와중에 어느 틈엔가 방학도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새 학기 강의도 머지않아 시작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리 미야코오도리나 호즈가와쿠다리에 미련이 있더라도 마냥 히가시야마를 바라보며 날을 보내는 건 내키지 않았다. 혼마 씨는 마음을 굳게 먹고 비가 오는데도 짐을 꾸리고는 타와라야 현관에서 인력거를 불러 교복 차림의 바지런한 모습을 시치죠 정류장까지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열차에 올라타니 2등 객차 안은 꼼짝도 못할 정도로 북적였다. 직원이 마음을 써주어 겨우 앉을 만한 자리를 발견하긴 했으나 그래서야 잠들 수도 없다. 그렇다고 침대칸에 가자니 물론 매진되어 있다. 혼마 씨는 한동안 허리가 두툼한 주정뱅이 육군 장교와 자면서 이를 가는 어딘가의 영분인 사이에 앉아 되도록 어깨를 움츠리며 청년 다운 끝없는 공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가운데 서서히 공상할 거리도 끊기고 만다. 또 양옆의 압박도 서서히 참을 수 없게 되었다 한다. 그렇게 혼마 씨는 도리 없이 자리서 일어나 의자 위에 모자를 두고서 한 칸 앞에 연결된 식당차로 피난했다.
 식당차 안은 한산하여 손님은 겨우 한 명 있었다. 혼마 씨는 그 사람과 가장 먼 테이블로 가서 백포도주를 한 잔 주문했다. 사실 술은 마시고 싶지 않았다. 단지 잠이 올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무뚝뚝한 웨이터가 호박 같은 술잔을 그의 앞에 두고 간 후로도 잠시 입에만 대고는 곧장 M・C・C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는 자그마한 푸른 원을 겹치며 밝은 전등불 속에 유유히 올랐다. 혼마 씨는 테이블 아래서 길게 다리를 뻗으며 그제야 숨이 편히 쉬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몸은 좀 편해졌어도 기분은 묘하게 침울하다. 어쩐지 이렇게 앉아 있으니 유리 창문 바깥의 어둠이 불쑥 안으로 들어올 것만도 같았다. 혹은 하얀 식탁보 위에 품위 있게 줄지은 접시나 컵이 기차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단숨에 밀려들 것만 같았다. 그런 게 심한 빗소리와 함께 마음을 서서히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을 때, 혼마 씨는 겁이라도 먹은 듯이 고개를 들고는 저도 모르게 식당차 안을 둘러보았다. 거울을 담은 찬장, 움직이면서 빛나는 몇 개의 전등, 풍성귀꽃이 꽂힌 유리 꽃병――그러한 게 하나같이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내며 웅성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번잡하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혼마 씨의 주의를 끈 건 반대편 테이블서 팔꿈치를 얹고서 위스키로 보이는 잔을 홀짝이는 단 한 명뿐인 손님이었다.
 손님은 머리가 반쯤 하얗게 물든 노신사로 혈색 좋은 두 뺨에는 조금 서양인처럼 띄엄띄엄 자리한 구레나룻을 갖추고 있다. 뾰족한 코 끝에 철테 코안경도 하고 있어 특히 그런 느낌을 주었다. 입고 있는 건 검은 정장이나 멀리서 얼핏 본 바로도 결코 좋은 양복은 아닌 듯했다――그런 노신사가 혼마 씨와 동시에 고개를 들더니 어쩌다가 눈이 맞았다. 혼마 씨는 그때 속으로 "어라"하고 작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왜냐하면 혼마 씨께는 그 노신사의 얼굴이 어디선가 한 번 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얼굴을 본 건지 사진으로 본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 적 있는 건 분명했다. 때문에 혼마 씨는 황급히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점검했다.
 그러자 아직 그 점검이 끝나기도 전에 노신사가 자리서 일어나더니 차의 흔들림에 저항하며 큰 걸음으로 혼마 씨 앞으로 왔다. 그리고 그 테이블 반대편에 사양 없이 앉더니 장년의 목소리를 내며 "실례 좀 합시다"하고 말했다.
 혼마 씨는 영문을 몰랐으나 연장자 앞인 만큼 의미 없는 웃음을 지으며 의젓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저를 아시나요? 모른다고요? 모를 수도 있죠. 대학생인가 보죠? 심지어 문과대학이고요. 저도 학생과 비슷한 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동업조합의 일원일지도 모르죠. 전공이 어떻게 되시나요?"
 "사학과입니다."
 "하하, 사학. 학생도 닥터 존슨이 경멸하는 사람 중 하나군요. 존슨이 말하기를 역사학자는 almanac-maker에 지나지 않는다니까요."
 노신사는 그렇게 말하고 목을 뒤로 젖히며 크게 웃었다. 이미 많이 취기가 돈 것일 테지. 혼마 씨는 답도 하지 않고 그저 싱글싱글 웃으며 그동안 상대를 주의 깊게 살폈다. 노신사는 낮은 목깃에 검은 넥타이를 차고 곳곳이 마모된 조끼 가슴에 두터운 시계 은사슬을 거창하게 내걸고 있다. 하지만 복장이 이렇게 허름한 건 결코 빈곤해서 그런 게 아닌 듯하다. 그 증거로 목깃에도 셔츠 소매에도 새로운 하얀색을 차갑고 둔탁한 색을 내비치고 있다. 아마 학자 계급에 속하여 외견에 신경을 쓰지 않는 걸 테지.
 "almanac-maker. 정말 그렇죠. 아뇨, 제가 생각하기엔 그마저도 의문이네요.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보다 학생이 연구하려는 방향은 어떻게 되지요?"
 "유신사입니다."
 "그럼 졸업 논문 소재도 그 범위 안에 있겠군요."
 혼마 씨는 어쩐지 구두시험이라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상대의 입술에는 어쩐지 사람을 몰아붙이는 구석이 있어서 그게 결국 자신을 말도 안 되는 곳으로 보내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희미하게 들었던 것이다. 때문에 혼마 씨는 막 떠올리기라도 했다는 양 백포도주잔을 들어 올리고는 일부러 간단히 "세이난 전쟁을 주제로 삼아 볼까 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신사는 자신도 불쑥 입이 심심해졌는지 몸을 뒤로 반쯤 빼더니 소리 지르는 듯한 목소리로 "이봐, 위스키 한 잔"하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걸 기다리는 법도 없이 혼마 씨를 보더니 코안경 뒤에 일종의 비웃음을 드리우며 이런 말을 했다.
 "세이난 전쟁인가요. 그거 재밌지요. 저도 숙부가 그때 반군에 가담해서 토벌 당했으니까요. 그런 연유로 조금 사실을 살펴 본 적이 있지요. 학생은 어떤 사료를 따라 연구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전쟁에는 꽤나 잘못된 정보가 많고 심지어 그 잘못된 정보가 사료로 통하고 있지요. 그러니 어지간히 신중히 사료 취사를 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못한 오류를 범할 수도 있어요. 학생도 먼저 그걸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혼마 씨는 상대의 태도나 말투 탓에 이 충고를 감사히 받아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러니 백포도주를 홀짝이면서 "네 뭐"하고 지극히 애매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노신사는 조금도 대답에 주의를 주지 않았다. 웨이터가 가져온 위스키로 목을 살짝 축이고는 주머니서 도자기 파이프를 꺼내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물론 조심해도 쉽지 않을지 모르죠. 이런 말은 실례일지 몰라도 그만큼 그 전쟁 사료에는 괴상한 게 많으니까요."
 "그런가요?"
 노신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성냥으로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서양인의 분위기를 두른 얼굴이 아래에서 붉은 빋을 받으니 짙은 연개가 옅은 수염을 스쳐 이집트의 향을 풍겼다. 혼마 씨는 그걸 보자 어째서인지 이 노신사가 얄밉게 느껴졌다. 취한 건 물론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적당한 거짓말을 떠들게 둬놓고 가만히 받들기만 하는 건 교복의 금단추한테 면목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그만큼 경계할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선생님께서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왜라뇨? 이유는 없어도 사실이 있지요. 저는 그저 세이난 전쟁의 사료를 하나하나 면밀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많은 오류를 발견했어요. 그뿐입니다. 하지만 그뿐이라도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야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지요. 그럼 발견하신 사실이란 걸 듣고 싶군요. 제게도 큰 도움이 될 거 같으니까요."
 노신사는 파이프를 문 채로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묘하게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눈 앞으로 몇 명의 여행객이 머무르는 정차장이 어둠과 빗속에서 희미한 밝기로 스쳐 지나간다. 혼마 씨는 상대의 얼굴색을 살피면서 꼴좋다 하고 중얼거리고 싶어졌다.
 "정치적 문제만 없었다면 저도 기꺼이 이야기할 텐데――만에 하나 비밀이 새어나간 게 야마가타공에게라도 알려져 버리면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노신사는 생각 끝에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코안경의 위치를 바꾸어 혼마 씨의 얼굴을 살피 듯 바라본다. 그 안에 떠오른 모독의 표정이 그 눈에 담긴 걸 테지. 남은 위스키를 기세 좋게 비우고는 불쑥 수염투성이 얼굴을 들이밀며 혼마 씨의 귓가에 술 냄새 섞인 숨결로 거의 물어 뜯기라도 하듯이 속삭였다.
 "만약 학생이 말하지 않겠다 약속하면 그중 하나를 말해드려도 좋습니다."
 이번에는 혼마 씨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 녀석은 미치광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렇게나 몰아 붙여 놓고 그 사실이란 걸 듣지 않는 게 아쉬운 듯한 기분도 들었다. 또 거기에 이만한 겁박에 놀아나 뒷걸음질 칠 자신이 아니라는 어린애 같은 승부욕도 어느 정도 작동했으리라. 혼마 씨는 짧아진 M・C・C를 재떨이 안으로 던지며 목을 쭉 뻗고 이렇게 딱 잘라 말했다.
 "그럼 말하지 않을 테니 그 사실이란 걸 듣고 싶습니다."
 "좋아요."
 노신사는 다시 한 번 짙은 연기를 피우면서 작은 눈으로 혼마 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제까지 몰랐는데 이는 미치광이의 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간의 평범한 눈하고도 달랐다. 총명한, 그러면서도 상냥하여 시종 무언가에 웃어 보이는 듯한 밝은 눈이다. 혼마 씨는 가만히 상대와 마주하며 그 눈과 상대의 언동 사이에 있는 신비한 모순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론 노신사는 조금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푸른 담배 연기가 코안경에 감돌다 사라지자 그 연기의 행방을 지켜보기라도 하듯이 조용히 혼마 씨께서 시선을 떼고는 먼 공간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살짝 뒤로 젖히더니 혼잣말처럼 이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자잘한 사실 차이를 꼽아서는 끝이 없죠. 그러니 가장 큰 오류를 말해보겠습니다. 그건 사이고 타카모리가 시로야마 전투에서 죽지 않았단 사실입니다."
 그걸 들은 혼마 씨는 그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걸 감추기 위해 새로운 M・C・C에 불을 붙이며 구태여 진지한 목소리로 "그런가요"하고 맞장구를 쳤다. 이제 다음 내용은 들을 것도 없다. 갖은 정확한 사료가 인정한 사이고 타카모리의 전사를 무작정 오류 중 하나로 꼽고 있다――그것만으로도 이 노인이 말하는 소위 사실이란 것도 대략 정체가 보인다. 확실히 이건 미치광이도 무엇도 아니다. 단지 요시츠네와 징기스칸을 동일인물 취급하거나 히데요시를 귀족의 사생아 취급하는 순박한 시골 노인 중 한 명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혼마 씨는 우스움과 화남, 그리고 일종의 실망을 동시에 느끼면서 되도록 빨리 문답을 마치려 결심했다.
 "그뿐일까요. 그때 시로야마서 죽은 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이고 타카모리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노신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되려 화가 난 얼굴로 혼마 씨를 보았다. 혼마 씨가 이에도 "아 네"하고 맥없는 대답을 한 건 물론이다. 그러자 상대는 비웃는 듯한 웃음을 입꼬리에 머금으며 이번에는 조용한 말투로 과장스럽게 물었다.
 "학생은 제 말을 믿지 않지요? 아니, 변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지 않는 거 알아요. 하지만――하지만 말이죠. 왜 학생께서는 사이고 타카모리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는 걸 의심하십니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관심을 느끼셔 사실을 살피신 듯합니다. 그러니 이런 말은 아마 제가 해드릴 필요도 없겠지요. 하지만 여쭈셨으니 제가 알고 있는 것만 해볼까 합니다."
 혼마 씨는 상대의 묘하게 침착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일도양단으로 어서 이 희극을 끝내고 싶어 어름스럽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서론을 두고서 빠른 목소리로 시로야마전 사망설을 논했다. 내가 그걸 여기에 자세히 적을 필요는 없다. 단지 혼마 씨의 논설이 여느 때처럼 인용이 정확하고 논리가 철저한 결정적인 내용이었단 것만 적으면 충분하다. 하지만 도자기 파이프를 문 채로 연기를 내뿜으며 그 논설에 귀를 기울이던 노신사는 이렇다 질색하는 분위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철테 코안경 뒤에서는 여전히 자그마한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을 품은 채로 아이러니컬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 눈은 묘하게 혼마 씨의 논리를 둔하게 만들었다.
 "그렇군요. 어떤 가정상 말하면 학생의 설은 정확할 테지요."
 혼마 씨의 논리가 일단락 되자 노인은 유유히 이렇게 말했다.
 "그 가정이란 지금 학생이 꼽은 카지키 츠네키 시로야마 조사필기나 이치키 시로 일기 같은 글이 정확한 사실이란 가정이지요. 그러니 그러한 사료를 애초부터 인정하지 않는 제게는 모처럼 들은 학생의 뛰어난 논리라도 철두철미한 넌센스라고 밖에 할 수 없군요. 그야 학생은 그런 사료가 정확하단 걸 여러 방면에서 변호하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갖은 변호를 초월한 확실한 실증을 지녔습니다. 학생은 그게 무엇인 거 같나요."
 혼마 씨는 살짝 연기에 둘러싸인 채 대답을 주저했다.
 "그건 사이고 타카모리가 저와 함께 지금 이 기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신사는 거의 엄숙함에 가까운 분위기로 압박하듯이 말했다. 평상시부터 쉽게 술렁이지 않는 혼마 씨도 이 순간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성은 한 번 휘둘리더라도 이 정도 일로 권위를 실추하지는 않는다. 그만 M・C・C를 쥔 손을 입에서 놓은 혼마 씨는 또 그 연기를 천천히 마시며 괴상하다는 눈초리로 말없이 상대의 높은 코 주위를 바라보았다.
 "이런 사실에 비하면 학생의 사료는 어떻지요? 모든 게 오랜 종이 한 조각에 지나지 않을 테지요. 사이고 타카모리는 시로야마서 죽지 않았어요. 그 증거로 지금 이 상행 급행열차의 일등실에 타고 있으니까요. 이만큼 확실한 사실도 없을 테지요. 아니면 뭔가요? 역시 학생은 산 인간보다 종이에 써진 글자를 믿으실 건가요?"
 "글쎄요――살아 있다 해도 제가 눈으로 본 게 아니면 믿을 수가 없으니까요."
 "본 게 아니면?"
 노신사는 담담한 분위기로 혼마 씨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천천히 파이프재를 털었다.
 "그렇죠. 눈으로 봐야죠."

 혼마 씨는 다시 기세를 되찾아 일부러 차갑게 방금 전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노인에겐 이런 의문도 별로 중대한 효과를 주지 못한 듯하다. 그는 그걸 듣고는 여전히 오만한 태도를 갖추며 일부러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같은 기차에 타고 있지 않습니까. 학생이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볼 수 있지요. 물론 난슈 선생께서는 이미 잠드셨을지 몰라도 무얼, 요 바로 앞 일등실이니 설령 헛걸음하더라도 긴 시간은 아닐 테지요."
 노신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도자기 파이프를 주머니에 넣고는 눈으로 혼마 씨께 "오시죠"하는 신호를 보내고는 거창하게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혼마 씨도 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노신사 뒤를 따라 두 줄로 놓인 테이블 사이를 큰 걸음으로 걸었다. 그 뒤로는 단지 백포도주 컵이나 위스키 컵 따위가 하얀 식탁보 위에 희미한 반투명 그림자를 드리우며 열차를 덮치는 빗소리 안에서 쓸쓸하게 그림자를 떨뿐이었다.
 

      ―――――――――――――――――――――――――

 그로부터 십 분 가량 지난 후의 일이었다. 백포도주 컵과 위스키 컵은 다시 무뚝뚝한 웨이터 손으로 호박색 액체가 채워졌다. 아니, 그뿐일까. 코안경을 쓴 노신사와 대학 교복을 입은 혼마 씨가 두 컵을 둘러싼 채 또 이전처럼 앉아 있다. 그 건너편 테이블에는 방금 둘과 엇갈려 들어 온 키나가시 차림의 뚱뚱한 남자와 게이샤 여자가 새우튀김 같은 걸 먹고 있는 듯했다. 매끄러운 카미카타벤의 대화가 얽혀 가며 진행되는 동안 잘그락잘그락하는 포크 소리가 끝없이 귀에 들어왔다.
 하지만 다행히 혼마 씨께는 조금도 그게 거슬리지 않았다. 왜냐면 혼마 씨의 머리에는 지금 보고 온 놀라운 광경이 한 가득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일등실의 갈색 의자와 같은 색의 커튼, 그리고 그 사이서 잠들고 있는 산만 같은 하얀 머리와 비대한 남자――아아, 그 당당한 모습에 난슈 선생의 풍골을 인정한 건 과연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걸까. 그곳의 전등은 어쩐지 여기보다 밝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 특징적인 눈이나 입은 옆으로 갈 필요도 없이 잘 보였다. 그리고 그건 분명 어릴 적부터 익숙히 본 사이고 타카모리의 얼굴이었다……
 "어떤가요. 이래도 학생은 시로야마전 사망설을 주장하실 건가요?"
 노신사는 붉어진 얼굴에 밝은 미소를 머금은 채 혼마 씨의 답을 재촉했다.
 "…………"
 혼마 씨는 당혹스러웠다. 자신은 어느 쪽을 믿으면 되는 걸까. 모두가 정확하다 인정하는 무수한 사료인가 혹은 지금 보고 온 우람한 노신사인가. 전자를 의심하는 게 자신의 머리를 의심하는 것이라면 후자를 의심하는 건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이다. 혼마 씨가 당혹스러워한 건 조금도 우연이라 할 수 없었다.
 "학생은 지금 난슈 선생님을 직접 보시고도 사료를 믿고 싶어 하시는군요."
 노신사는 위스키 잔을 들어 올리며 강의라도 하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애당초 학생이 믿고 싶어 하는 사료란 게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시지요. 시로야마 전사설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역사상 판단을 내리기 마땅할 정확한 사료란 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어떤 사실을 기록할 때는 스스로 디테일을 취사선택하면서 쓰기 마련이죠. 설령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사실이니 도리가 없지요. 이는 즉 그것만으로도 객관적 사실하고는 멀어진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니 얼핏 믿을만 한 듯 실제로는 믿을 게 못 되죠. 월터 롤리가 한 번 제시한 세계사를 폐하자는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셈이죠. 그건 학생도 알고 있지요? 실제로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마저 알지 못합니다."
 혼마 씨는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일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입을 다무는 사이에 노신사는 알고 있다고 단정 지은 모양이다.
 "또 시로야마전 사망설입니다만 그 기록도 의심해볼 여지는 많이 있습니다. 확실히 사이고 타카모리가 메이지 십구 년 구 월 이십사 일에 시로야마전에서 죽었다는 것만은 어떤 사료나 일치할 테죠. 하지만 그건 단지 사이고 타카모리라 여겨지는 사람이 죽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인간이 실제로 사이고 타카모리인지 어떤지는 또 이야기가 달라지죠. 하물며 그 목이나 목이 없는 시체를 발견했단 사실은 방금 학생이 말한 것처럼 이설도 결코 적지 않고요. 그점도 의심하면 의심할 수 있을 터입니다. 한편 그런 의심이 있는 차에 학생은 지금 이 기차 안에서 사이고 타카모리――이런 단정이 싫다면 적어도 사이고 타카모리와 지독히 닮은 인간과 만났죠. 그래도 학생은 사료를 더 믿을 수 있나요?"
 "하지만 말이죠, 사이고 타카모리의 시체는 분명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닮은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지요. 오른팔에 오래된 칼자국이 있단 사람도 하나만은 아닐 테죠. 학생은 적청이 농지고의 시체를 확인했단 이야기를 알고 계신가요?"
 혼마 씨는 이번엔 솔직히 모른다 자백했다. 실은 아까부터 상대의 묘한 논리와 여러 사실을 잘 안단 사실에 머리가 아파서 이 코안경 앞에 일종의 경의와 가까운 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노신사는 그 사이 주머니에서 또 도자기 파이프를 꺼내서 천천히 이집트 연기를 피웠다.
 "적청이 오십 리를 쫓아 다리에 들어갔을 때 적의 시체를 보니 안에 금룡옷을 입은 자가 있었죠. 다들 그게 지고라 말했습니다만 적청은 홀로 듣지 않았어요. '이게 거짓이 아님을 어떻게 아느냐. 설령 지고를 잃더라도 구태여 공을 줄 리가 있겠느냐.' 이는 도덕적으로 훌륭하기만 한 게 아니죠. 진리에 대한 태도에도 바람직하다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이난 전쟁 당시에 관군을 지위한 장군들은 이만큼 주도면밀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역사마저 '그럴지도 모른다'를 '그렇다'로 바뀌어버린 것이지요."
 기어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혼마 씨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이 같은 마지막 반박을 꾀했다.
 "그렇게닮은 사람이 정말 있을까요?"
 그러자 노신사는 어떻게 된 걸까. 불쑥 도자기 파이프를 입에서 떼고 담배 연기를 피우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목소리가 너무 컸던 탓인지 건너편 테이블에 있던 게이사가 일부러 돌아보며 괴이한 표정을 지은 채 둘을 보았다. 하지만 노신사는 간단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손으로 떨어지려는 코안경을 누르면서 한 손으로 불이 붙은 파이프를 들고 껄껄 웃고 있다. 혼마 씨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백포도주잔을 앞에 둔 채로 단지 망연히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야 왜 없겠나요." 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우 숨을 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생이 저기서 자고 있는 걸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남자는 그렇게나 사이고 타카모리와 닮아 있으니까요."
 "그럼 그건――그 사람은 누구죠?"
 "그 사람이야? 제 친구랍니다. 본직은 의사고 겸사겸사 난가를 그리는 남자지요."
 "사이고 타카모리는 아닌 거지요?"
 혼마 시는 진지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불쑥 얼굴을 붉혔다. 이제까지 자기가 맡은 해악적인 역할이 불쑥 새로운 빛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슬렸다면 죄송합니다. 학생과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학생 다운 정직한 생각을 지녔기에 조금 장난을 쳐보고 싶어져서요. 하지만 행동은 장난이라도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노신사는 주머니를 뒤져 명함 한 장을 혼마 씨에게 건넸다. 명함에는 어떤 직함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혼마 씨는 그걸 보고 처음으로 이 노신사의 얼굴을 어디서 보았는지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노신사는 혼마 씨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선생님하고 직접 뵐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여러 실례되는 말을 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뇨, 방금 전 시로야마전 사망설 같은 건 꽤나 걸작이었어요. 학생의 졸업 논문도 재밌게 만들어지겠죠. 저희 대학에도 올해에 한 명 유신사를 전공한 학생이 있습니다――자, 그러지 말고 한 잔 들지요."
 진눈깨비 섞인 비도 조금 그쳤는지 이젠 창문에서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여자를 데리고 온 손님이 일어선 뒤에는 유리 꽃병에 꽂은 꽃만이 식어내린 식당카 안에 희미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혼마 씨는 백포도주잔을 기세 좋게 비우고는 색이 묻어난 뺨을 누르면서 대뜸,
 "선생님은 회의적이시군요."하고 말했다."
 노신사는 코안경 뒤에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종 무언가에 미소를 보내는 듯한 맑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저는 회의주의의 제자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아니 그렇게 말하는 우리 자신마저도 알지 못하죠. 하물며 사이고 타카모리의 생사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역사를 쓰더라도 거짓 없는 역사를 쓰려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가장 그럴 법한 아름다운 역사만 쓸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이죠. 저는 젊을 적에 소설가가 되려 했습니다. 되면 역시나 그러한 소설을 썼을 테죠. 혹은 그편이 지금보다 좋았을지 모릅니다. 어찌 됐든 저는 회의적이면 된다고 봅니다.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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