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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110

상매성모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마쿠사 하라죠. 올라오는 화염. 날아오는 화살과 탄환. 겹겹이 쌓인 남녀의 시체. 그런 가운데 손에 부상을 입은 한 노인. 노인은 돌담 위에 건 마리아의 초상을 보며 소리 높여 "할렐루야"하고 외웠다. 또 한 발의 탄환. 노인은 곧 엎드려 두 번 다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백의의 성모는 돌담 위에서 묵묵히 그 모습을 내려보고 있다. 엄숙히, 유유히. 백의의 성모? 아니, 나는 알고 있다. 그건 백의의 성모가 아니다. 확연히 단순한 여인이다. 한 떨기 장미를 사랑하는 단순한 서양 여인이다. 잘 보아라. 그 여인의 밑에는 이런 금색의 서양 문자마저 적혀 있다. 빌헬름 담배 상회,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21. 3. 31.
쿠게누마 잡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는 쿠게누마의 숙소 2층에 누워 있었다. 또 머리맡에는 아내와 큰어머니가 앉아 정원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오늘은 비가 내릴 거야"하고 말했다. 아내와 큰어머니를 믿어주지 않았다. 특히 아내는 "이런 날씨에요?"하고 말했다. 하지만 2분도 지나지 않아 보기 드문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나는 인기척 없는 소나무 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내 앞에는 하얀 개가 한 마리. 꼬리를 흔들며 걸었다. 나는 그 개의 불알을 보고 옅은 붉은색에 쌀쌀함을 느꼈다. 길모퉁이가 나오자 개가 불쑥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분명히 빙긋 웃었다. × 나는 거리의 모래 속에 비개구리 한 마리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때 저 녀석은 자동차가 오면 어쩔 셈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은 자동차는 한 대.. 2021. 3. 30.
소세키 공방의 겨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는 어린 W군과 옛친구 M에게 안내를 받으며 오랜만에 선생님의 서재를 찾았다. 서재를 다시 세운 이후로 볕이 잘 들지 않게 되었다. 또 중국에서 사온 다섯 학이 그려진 융단도 어느 틈엔가 색이 바래버렸다. 또 본래 경사로 된 당지가 놓여 있던 토코노마는 선생님의 사진이 놓인 불단으로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다를 바가 없다. 서양 서적이 놓인 서재가 있다. '무현금' 액자가 있다. 선생님이 매일 원고를 쓰시던 작은 자단 책상도 있다. 벽돌 난로도 있다. 병풍도 있다. 엔가와 쪽에는 파초도 있다. 파초의 잎 뒤에선 커다란 꽃마저 썩어 있엇다. 동으로 된 도장도 있다. 세토의 각로도 있다. 천장에는 쥐가 갉아먹은 구멍도……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천장은 안 바꾼.. 2021. 3. 29.
소세키 공방의 가을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밤의 추위가 매섭게 스며드는 오르막 거리를 오르자 낡은 판잣집 문 앞에 이른다. 문에는 전등이 들어 와 있지만 기둥에 걸린 명패는 거의 존재 여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문을 넘자 모래와 돌이 깔린 길이 나온다. 또 그 돌과 모래 위에는 정원수의 낙엽이 난잡하게 떨어져 있다. 모래와 낙옆을 밟고 현관으로 향하니 역시나 낡은 격자문 이외에는 벽이라고 할 게 못 됐다. 하나 같이 덩굴에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안내를 구하려면 먼저 마른 덩굴 잎을 치우며 벨 버튼을 찾아야만 한다. 그렇게 겨우 벨을 누르면 불이 들어와 있는 문이 열리고 머리를 묶은 여종 하나가 바로 격자문의 잠금쇠를 풀어준다. 현관 동쪽으로는 복도가 있고 그 복도 난간 밖에는 겨울을 모르는 목적색이 정원을 한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 2021. 3. 28.
또렷한 형태를 취하기 위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카무라 씨. 저는 지금 여느 때처럼 미처 거절하지 못 한 원고를 끙끙 앓으며 쓰고 있기에 당신께서 주신 문제에 응할 만큼 머리를 정리할 여유가 없습니다. 때문에 당신이 보내신 편지를 읽다만 책 사이에 꽂아두었다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대답해야 할 문제의 성질을 굉장히 막연히만 느끼고 있습니다. 단지 당신의 문제가 '어떤 요구에 따라 소설을 쓰는가'였던 건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요구를 편의상 직접적인 요구라 해두겠습니다. 그럼 저는 지극히 평범하게 '쓰고 싶으니 쓴다'고 대답합니다. 그건 결코 겸손도 아니고, 되는대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실제로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소설도 온전히 쓰고 싶기에 쓰고 있습니다. 원고료를 위해 쓰는 게 아닌 것처럼, 천하의 창생을 위해 쓰는 것도 .. 2021. 3. 27.
연애와 결혼애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매결혼으로 충분합니다. 중매결혼과 자유결혼의 득실이란 결국 두 종류의 결혼 양식이 결혼 후의 생활에서 어떠한 행복을 이끌어내고, 어떠한 불행을 가져오는 지로 귀결된다. 하지만 결혼 생활의 행복이란 과연 무슨 뜻이랴. 그것도 생각해야 한다. 굵고 짧게 즐길 것인가. 가늘고 길게 즐길 것인가. 또는 부부간에 충돌이 있는 생활인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또 연애라는 게, 옛날 사람들이 생각할만한 청초고결한 연애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에도 나는 회의를 품고 있다. 실제로 그런 생활이 존재할 수 있는지는 별개로 치부하더라도,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굵고 길면서 평화롭게 즐길 수 있는 부부 생활을 이상이자 행복으로 생각한다면, 총명한 남녀에게는 자유 결혼이 적합하며 그렇지 않은 남녀에게는 중매결혼이.. 2021.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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