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레인 코트
나는 어떤 지인의 결혼 피로연에 참가하기 위해 피서지에서 나왔다. 가방을 든 채로 토카이도의 어떤 정차장을 향해 자동차를 몰았다. 자동차가 달리는 길의 양쪽은 소나무로 우거져 있었다. 상행 열차에 늦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자동차에는 나 이외에 어떤 이발 가게 주인도 함께 타고 있었다. 그는 대추처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짧은 턱수염의 소유주였다. 나는 시간을 신경 쓰면서 이따금 그와 대화를 했다.
"별 일이 다 있네요. XX 씨의 집에는 대낮에도 유령이 나온다는 건가요."
"대낮에도요."
나는 겨울의 서쪽 햇살을 받는 소나 무산을 바라보며 적당히 말을 맞추었다.
"다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나오지 않는다는군요. 가장 많은 건 비가 오는 날이라나요."
"비가 오는 날에 젖으러 오는 거 아닐까요?"
"농담도……그나저나 레인 코트를 입은 유령이랍니다."
자동차가 나팔을 불며 어떤 정차장에 도착했다. 나는 어떤 이발점 주인과 헤어져 정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상행열차는 역시 2, 3분 전에 출발한 참이었다. 대기실 의자에는 레인 코트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멍하니 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방금 들은 유령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작게 쓴웃음만 지었을 뿐, 다음 열차를 기다리기 위해 정차장 앞의 카페에 들어가기로 했다.
카페란 이름이 어울리긴 하나 싶은 카페였다. 나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코코아 한 잔을 주문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기름종이는 하얀 바탕에 얇은 푸른선이 거친 격자로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구석가에는 살짝 더러운 캔버스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살짝 냄새가 독한 코코아를 마시며 인기척 없는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먼지 쌓인 카페벽에는 '오야코동'이니 '커틀렛'이니 하는 메뉴표가 몇 장이나 붙어 있었다.
"계란, 오물렛."
그런 그런 메뉴표에서 토카이도선에 가까운 시골을 느꼈다. 밀밭이나 양상추밭 사이서 전기 기관차가 달리는 시골을……
다음 상행 열차를 탈 쯤에는 벌써 해가 져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이등객차를 탔다. 하지만 그때는 모종의 사정으로 삼등에 타려 했다.
기차 안은 붐볐다. 심지어 내 앞뒤에 자리한 건 오이소인지 어디인지로 소풍을 가는 듯한 초등학교 여학생들이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런 여학생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전부 쾌활했다. 그뿐 아니라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사진사 아저씨, 러브 신이 뭐예요?"
내 앞에 있는 '사진사 아저씨' 또한 소풍을 따라가는 듯했다. 사진사 아저씨는 차로 목을 축시고 있었다. 하지만 열네다섯 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 중 한 명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나는 불쑥 그녀의 코에 축농증이 있다는 걸 느끼고 무언가 흐뭇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내 옆에 있던 열두세 살 먹은 듯한 여학생 중 하나는 젊은 여교사의 무릎 위에 앉아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두르고 또 한 손으로는 그녀의 뺨을 문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틈틈이 이따금 여교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귀여운걸, 선생님은. 귀여운 눈을 하고 있어."
그들은 내게 여학생보다도 한 명의 여자란 느낌을 주었다. 사과를 껍질째 먹거나 카라멜 종이를 벗기는 걸 빼면……하지만 나이가 되어 보이는 여학생 하나는 내 옆을 지나며 누군가의 밟을 밟았는지 "죄송해요"하고 말했다. 그녀만은 주위보다 어른스러운 만큼 되려 내게는 여학생처럼 보였다. 나는 담배를 문 채로 이런 모순을 느낀 나 스스로를 냉소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틈엔가 전등이 들어온 기차는 어떤 교외 정차장에 도착했다. 나는 찬바람이 부는 플랫폼에 내려 한 번 다리를 건너 간선전철이 오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 우연히 어떤 회사의 T군을 만났다. 우리는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불경기 같은 화제를 나누었다. T 군은 물론 나보다도 이런 문제에 정통했다. 하지만 듬직한 그의 손가락에는 불경기와 인연이 먼 듯한 터키옥 반지가 있었다.
"그럴싸한 걸 하고 있네."
"이거? 하얼빈에 장사하러 간 친구가 나한테 판 거야. 그 녀석도 지금 곤란할 거야. 코퍼러티브하고 거래를 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우리가 탄 간선전철은 다행히도 기차만큼 북적이지 않았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여러 이야기를 했다. T 군은 요번 봄에 파리의 근무처서 도쿄로 돌아온 참이었다. 따라서 우리 사이에는 파리 이야기도 쉽게 나왔다. 카요 부인의 이야기, 게 요리 이야기, 바깥 놀이 중인 어떤 전하의 이야기……
"프랑스라고 딱히 곤란한 나라는 아냐. 애당초 프랑스인들이 세금 내는 걸 좋아하지 않은 국민이니까 내각이 항상 힘들어서 그렇지……"
"프랑은 대폭락했잖아."
"그야 신문만 읽으면 그렇지. 근데 반대로 생각해봐. 신문지 위의 일본은 맨날 대지진에 대홍수잖아."
그러자 레인 코트를 입은 남자 하나가 우리 반대편에 앉았다. 나는 조금 꺼림칙해져 방금 들은 유령 이야기를 T 군에게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T 군은 그 전에 지팡이 자루를 빙글 왼쪽으로 틀고는 얼굴만 앞에 둔 채로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기 여자 하나 보이지? 회색 모피 숄을 한 여자……"
"서양식 머리로 묶은 저 여자 말야?"
"그래, 보자기 안은 여자. 저 사람 여름엔 카루이자와에 있었어. 조금 세련된 양장을 하고서 말야.
하지만 그녀는 누가 보아도 볼품없는 행색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T 군과 이야기하면서 가만히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어딘가 미간에 미치광이 같은 기색을 지닌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보따리 안에서는 표범을 닮은 해면이 삐져나와 있었다.
"카루이자와에 있을 때는 젊은 미국인하고 춤추고 있었는데. 모던……어쩌고 하는 건가."
레인 코트를 입은 남자는 내가 T 군과 헤어질 때엔 어느 틈엔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간선 전철의 어떤 정류장에서 내려 역시나 가방을 걸친 채로 어떤 호텔로 걸어갔다. 길거리 양옆에는 커다란 빌딩들이 서있었다. 나는 그 길을 걷는 동안 문득 소나무 숲을 떠올렸다. 그뿐 아니라 내 시야 속에서 묘한 걸 발견해냈다. 묘한 걸?――그건 끊임없이 돌아가는 반투명한 톱니바퀴였다. 나는 전에도 몇 번인가 이런 경험을 했었다. 톱니바퀴는 서서히 숫자를 늘려가 내 시야를 반쯤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잠시 후에는 사라지는 대신에 이번에는 두통을 느끼기 시작한다――항상 있는 일이었다. 안과 의사는 이 착각(?) 때문에 번번이 내게 담배를 줄일 걸 명했다. 하지만 이런 톱니바퀴는 내가 담배에 친하지 않았던 스무 살 이전에도 보였었다. 나는 또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에 왼쪽 시력을 확인하기 위해 오른눈을 감아 보았다. 왼눈은 확실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른 눈꺼풀 뒤에는 톱니바퀴가 수없이 돌고 있었다. 나는 오른 빌딩이 서서히 사라져 버리는 걸 보면서 빠르게 거리를 걸어갔다.
호텔 현관에 들어설 때는 톱니바퀴도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두통은 여전했다. 나는 외투나 모자를 맡기는 김에 방을 하나 빌리기로 했다. 그렇게 어떤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돈 이야기를 했다.
결혼 피로연의 만찬은 이미 시작된 듯했다. 나는 테이블 구석에 앉아 나이프나 포크를 움직였다. 정면의 신랑이나 신부를 시작으로 하얀 U자 테이블에 앉은 오십 명 언저리의 사람들은 물론 하나 같이 밝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밝은 전등 아래서도 점점 우울해지기만 했다. 나는 이 심정서 벗어나기 위해 옆에 있던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마치 사자처럼 하얀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나도 이름을 알고 있던 어떤 명송 높은 중국 학자였다. 따라서 우리의 이야기는 어느 틈엔가 고전으로 흐르게 되었다.
"기린이란 즉 일각수지요. 또 봉황도 피닉스라는 새의……"
이 명성 높은 중국 학자는 이런 내 이야기에도 관심을 가지는 듯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말하는 사이에 점점 병적인 파괴욕을 느껴 요순을 가공의 인물로 만든 건 물론이고 '춘추'의 저자도 훨씬 후대인 한 시대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중국 학자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조금도 내 얼굴을 보지 않고 거의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내 이야기를 끊어냈다.
"만약 요순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공자는 거짓말한 게 되죠. 성인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요."
나는 물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시 접시 위 고기에 나이프나 포크를 얹으려 했다. 그러자 작은 구더기 한 마리가 조용히 고기 테두리서 꿈틀이고 있었다. 구더기는 내 머릿속에 Worm이라는 영어를 떠오르게 했다. 그건 또 기린이나 봉황처럼 어떤 전설적 동물을 뜻하는 말이 분명했다. 나는 나이프나 포크를 두고 어느 틈엔가 내 잔에 샴페인이 따라지는 걸 바라보았다.
이윽고 만찬회가 끝난 후, 나는 앞서 잡은 내 방을 찾기 위해 인기척 없는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내게 호텔보다도 더 감옥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두통만은 어느 틈엔가 나아져 있었다.
내 방에는 가방은 물론이요 모자나 외투도 걸어두었다. 나는 벽에 걸친 외투서 내가 서있는 모습을 느껴 방 구석의 옷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거울 앞으로 가서 거울 너머로 내 얼굴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피부 아래의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구더기는 이런 내 기억에 똑바로 새겨져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로비로 나오자 끝 테두리가 노란 삼각 뚜껑이 달린 키가 큰 스탠드 전등이 유리문 하나를 선명히 비추고 있었다. 그 광경은 어쩐지 내 마음에 평화를 느끼게 했다. 나는 그 앞 의자에 앉아 여러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오 분을 채 앉아 있지 못했다. 레인 코트는 이번에도 내 옆에 놓인 긴의자 등받이에 축 걸쳐져 있었다.
"심지어 오늘은 날도 추운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복도로 돌아갔다. 복도 끝자락의 직원실에서도 직원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 내용은 내 귀를 스쳐 갔다. 무언가의 말에 All right하고 대답하는 영어였다. "올 라잇"?――나는 어느 틈엔가 이 대화의 뜻을 정확히 느끼려 했다. "올 라잇"? 올 라잇"? 대체 무엇이 올 라잇이지?
내 방은 물론 고요했다. 하지만 문을 여는 게 묘하게 꺼림칙했다. 나는 조금 주저한 후 마음을 먹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거울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도마뱀 가죽에 가까운 푸른 모로코가죽 안락의자였다. 나는 가방을 들어 원고용지를 꺼내 어떤 단편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잉크를 묻힌 펜은 한사코 움직일 줄 몰랐다. 그뿐 아니라 겨우 움직이는가 하면 같은 말만 거듭해 갔다. All right……All right……All right sir……All right……
그때 불쑥 침대 옆 전화가 울렸다. 나는 놀라서 일어나 수화기를 귀에 얹고 대답했다.
"누구시죠?"
"저예요, 저……"
상대는 우리 누나의 딸이었다.
"무슨 일 있니?"
"네, 그게 큰일이 벌어졌어요. 그러니까……큰일이 나서 작은어머니께도 전화드린 참이었어요."
"큰일이라니?"
"네, 큰일이요. 그러니 바로 와주세요. 바로요."
전화는 그렇게 끊겨 버렸다. 나는 수화기를 다시 돌려놓고 반사적으로 벨을 눌렀다. 하지만 내 손이 떨리는 건 나 스스로도 또렷이 의식하고 있었다. 직원은 금세 오지 않았다. 나는 짜증보다도 괴로움을 느껴 몇 번이나 벨을 눌렀다. 겨우 운명이 내게 가르쳐준 "올 라잇"이란 말을 이해하며.
우리 누나의 남편은 그날 오후 도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떤 시골에서 기차에 뛰어들어 죽었다. 심지어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레인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호텔 방에서 이전 단편을 이어가고 있다. 한밤중 복도에는 아무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문밖에서 날개 소리가 들리고는 했다. 어디서 새라도 기르는 건지 모르겠다.
둘 복수
나는 호텔방서 오전 여덟 시쯤에 눈을 떴다. 하지만 침대에서 내리려 하니 이상하게도 슬리퍼가 한 짝밖에 없었다. 그건 요 일이 년 동안 항상 내게 공포나 불안을 주는 현상이었다. 그뿐 아니라 샌들을 한 짝만 신은 그리스 신화 속 왕자가 떠오르게 하는 현상이었다. 나는 벨로 직원을 불러 슬리퍼 한 쪽을 찾아 달라 부탁했다. 직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좁은 방안을 살폈다.
"여기 화장실 안에 있었네요."
"왜 또 그런 곳에 있었을까요?"
"모르죠. 쥐가 옮겼을 수도 있고요."
나는 직원이 떠난 후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를 마시고 쓰던 소설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응회암을 사각으로 둘러싼 창문은 눈 덮인 정원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펜을 쉴 때마다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봉오리를 가진 서향 아래서 도심의 매연에 더럽혀져 있었다. 그 또한 무언가 내 마음에 아픔을 주는 광경이었다. 나는 담배를 태우며 펜을 멈춘 채로 여러 생각에 잠겼다. 아내, 아이들, 특히 누나의 남편을……
누나의 남편은 자살하기 전에는 방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집이 타기 전에 집 가격에 두 배는 되는 화재 보험에 가입했다. 심지어 위증죄를 저지른 탓에 집행유예 중이었다. 하지만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그가 자살한 사실보다도 내가 도쿄로 돌아갈 때마다 반드시 불을 목격하는 흉조 쪽이었다. 한 번은 기차 안에서 산을 태우는 불을 보았다. 또 한 번은 자동차 안에서(그때는 처자식도 같이 있었다) 토키와바시 주변의 불을 보았다. 그러한 흉조는 그의 집이 타기 전에도 내게 화재의 예감을 전해주었다.
"올해엔 집에서 불이 날지도 모르겠어."
"무슨 불길한 소리를……그래도 불이 나면 큰일이죠. 보험도 제대로 들지 않았고……"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집은 타지 않았다――나는 그런 망상을 간신히 밀어내고 다시 한 번 펜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펜은 도무지 한 줄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기어코 책상 앞에서 벗어나 침대 위를 구르며 톨스토이의 Polikouchka를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허영심이나 병적 경향이나 명예심이 뒤섞인 복잡한 성격의 소유주였다. 심지어 그의 일생의 비극과 희극은 조금만 수정을 가하면 내 일생의 캐리커처였다. 특히 그의 비극과 희극 속에서 운명의 냉소를 느끼는 건 서서히 나를 꺼림칙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침대 위에서 뛰쳐 일어나 커튼이 걸린 방 한구석에 있는 힘껏 책을 던졌다.
"뒤져버려!"
그러자 커다란 쥐 한 마리가 커튼 아래서 나와 화장실을 향해 비스듬하게 마루 위를 달렸다. 나는 한달음에 화장실로 가서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하지만 하얀 탭 뒤에서도 쥐 같은 건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불쑥 꺼림칙해져 황급히 슬리퍼를 신발로 바꿔 신고 인기척 없는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오늘도 여전히 감옥처럼 우울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주방에 와있었다. 주방은 의외로 밝았다. 하지만 한 쪽에 줄지은 아궁이는 하나같이 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곳을 지나며 하얀 모자를 쓴 요리사들이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보는 걸 느꼈다. 동시에 또 내가 떨어진 지옥을 느꼈다. '신이시여, 나를 벌해다오. 화내지 말지어다. 나는 아마 사라질 테니"――이런 기도 또한 그 순간에는 내 입술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호텔 밖으로 나와 푸른 하늘에 비친 눈 녹은 길을 걸어 누나의 집으로 향했다. 길 옆에 놓인 공원의 나무는 모두 가지나 잎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하나같이 우리 인간처럼 앞과 뒤를 지니고 있었다. 그 또한 내게는 불쾌함보다도 공포에 가까운 걸 옮겨주었다. 나는 단테의 지옥에 자리한 나무가 된 혼을 떠올리고 빌딩만 이어진 전철길 너머를 걸으려 했다. 하지만 그곳 또한 잠시도 무사히 걸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길에 죄송한데요……"
그건 금단추 유니폼을 입은 스물두세 살 먹은 청년이었다. 나는 말없이 청년을 바라보아 그의 코 옆에 검정 사마귀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모자를 벗은 채로 머뭇머뭇 내게 물었다.
"혹시 A 씨 되시나요?"
"맞습니다."
"맞군요. 그런 거 같아서……"
"무슨 볼일이시죠?"
"아뇨, 그저 뵈어서 인사를 했을 뿐입니다. 저도 선생님의 애독자라서……"
나는 그때는 이미 모자를 눌러쓰고 그를 뒤로한 채 걷고 있었다. 선생님, A 선생님――이제는 내가 가장 불쾌해하는 말이었다. 나는 갖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믿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모종의 기회로 나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나는 그 말에서 나를 비웃는 무언가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하지만 내 물질주의는 신경 주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불과 두세 달 전에도 어떤 작은 동인잡지에 이런 말을 발표했다――"나는 예술적 양심을 시작으로 어떠한 양심도 지니지 않았다. 내가 가진 건 신경뿐이다"……
누나는 세 아이들과 함께 골목 안쪽의 판잣집으로 피난해 있었다. 갈색 종이를 붙인 판잣집 안은 바깥보다도 추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화로에 손을 뻗은 채로 여러 이야기를 했다. 체격이 듬직했던 누나의 남편은 남들보다 마르고 얇은 나를 본능적으로 경멸했다. 그뿐 아니라 내 작품을 부도덕적이라 공언하였다. 나는 항상 차갑게 그를 내려다 본 채로 한 번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누나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 또한 나와 같은 지옥에 떨어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침대차 안에서 유령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되도록 돈 이야기만 하려 노력했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 전부 팔아버리려고."
"그건 그렇지. 타자기 같은 건 돈 좀 될 거야."
"그렇지. 그림도 있고."
"아예 N 씨(누나의 남편) 초상화도 팔아버릴까? 하지만 저건……"
나는 판잣집 벽에 걸린 액자 없는 한 장의 콩테 그림을 보고는 농담도 쉽사리 할 수 없겠다 느꼈다. 기차에 치어 죽은 그는 얼굴마저 고기 파편이 되었고 콧수염만이 간신히 남은 게 고작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꺼림칙함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초상화는 하나 같이 완벽히 그려져는 있지만 어째서인지 콧수염만은 희미했다. 나는 빛의 각도 때문인가 싶어 콩테 그림을 여러 위치서 둘러보았다.
"뭐 하니?"
"아무것도 아냐……그냥 저 초상화가 입 근처만……"
누나는 조금 돌아보면서 모른다는 양 말했다.
"머리만 묘하게 희미하지?"
내가 본 건 환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환각이 아니라면――나는 점심을 얻어 먹기 전에 누나의 집을 뒤로하기로 했다.
"그래, 그렇게 해."
"내일이라도 또 올게……오늘은 아오야마까지 가거든."
"거기? 또 몸이 안 좋아?"
"약만 먹고 있지. 수면약만으로도 큰일이야. 베로날, 노네랄, 트리오날, 누말……"
삼십 분 가량 지난 후, 나는 어떤 빌딩으로 들어가 승강기(리프트)를 타고 3층으로 올랐다. 그렇게 어떤 레스토랑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유리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곳에는 '정기 휴일'이라 적힌 검은 팻말도 걸려 있었다. 나는 불쾌해져서 유리문 너머의 테이블 위에 사과나 바나나가 쌓인 걸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거리로 나왔다. 그러자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쾌활하게 대화하면서 이 빌딩에 들어가는 박자에 내 어깨를 스쳤다. 그들 중 한 명은 그 박자에 "짜증나네"하고 말했다.
나는 거리에 멈춰 선 채로 택시가 지나는 걸 기다렸다. 택시는 간단히 지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따금 지나간 건 반드시 노란 차였다.(이 노란 택시는 어째서인지 내게 항상 교통사고의 귀찮음을 선사했다.) 그러던 사이 나는 그런 흉조가 없는 녹색 차를 발견해 아오야마의 기지에 가까운 정신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짜증나네――tantalizing――Tantalus――Inferno……"
탄탈로스는 유리 너머로 과일을 바라본 나 자신이었다. 나는 두 번이나 내 눈앞에 떠오른 단테의 지옥을 저주하면서 가만히 운전수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또 갖은 게 거짓임을 느꼈다. 정치, 사업, 에술, 과학――내게는 하나같이 이 두려운 인생을 가리기 위해 여러 색을 한데 섞어 만든 에나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숨이 괴로워지는 걸 느껴 택시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심장을 조이는 느낌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녹색 택시는 진구마에를 달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떤 정신병원으로 굽어지는 골목이 하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만은 나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전철 선로를 따라 몇 번이나 택시를 왕복한 후에 기어코 포기하여 내리기로 했다.
나는 겨우 그 골목을 발견하여 질척거리는 길을 걸었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길을 잘못 들어 아오야마의 장례식장 앞에 이르고 말았다. 십 년 전 나츠메 선생님의 고별식 이후로 단 한 번도 문 앞을 지나 본 적 없는 건물이었다. 십 년 전의 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평화로웠다. 나는 모래가 깔린 문을 바라보며 "소세키 공방"의 파초를 떠올리면서 무언가 내 인생도 일단락되었음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분 아니라 십 년째 되는 날에 이 묘지 앞에 나를 데리고 온 무언가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정신 병원을 뒤로한 후, 나는 다시 자동차에 올라타 이전 호텔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호텔 현관에 내리자 레인 코트를 입은 남자가 한 직원과 싸우고 있었다. 직원과?――아니, 그건 직원이 아니었다. 녹색 옷을 입은 자동차 수리기사였다. 나는 호텔에 들어가는 게 어쩐지 불길해져 걸음을 돌려 거리로 나왔다.
내가 긴자 거리로 나왔을 적에는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나는 양족에 줄지은 가게나 어지러운 인파 속에서 더욱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죄를 모른다는 듯한 사람들의 가벼운 걸음걸이가 불쾌했다. 나는 저녁노을에 전등 빛이 뒤섞인 거리 속에서 한사코 북쪽을 향해 걸었다. 그러는 사이 내 눈을 끈 건 잡지 따위가 쌓인 서점이었다. 나는 서점 안으로 들어가 멍하니 몇 개의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라는 책 하나를 훑었다. 노란 표지의 '그리스 신회'는 아이들을 위한 책인 듯했다. 하지만 우연히 읽은 한 문 장은 곧장 나를 때려눕혔다.
"가장 대단한 제우스 신도 복수의 신에게는 이길 수 없습니다……"
나는 서점 가게를 뒤로한 채 인파 속을 걸었다. 언젠가 굽어버린 내 등 뒤에서 끊임없이 나를 노리는 복수의 신을 느끼며……
셋 밤
나는 마루젠 2층 책장에서 스트린드베르그의 '전설'을 찾아내 두세 페이지 가량을 읽었다. 책은 내 경험과 큰 차이 없는 내용을 적어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노란 표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전설'을 책장에 돌려 놓고 거의 손이 닿는 대로 두꺼운 책을 하나 꺼내 보았다. 하지만 이 책 또한 삽화 한 장에 우리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누코를 가진 톱니바퀴만 줄지어 있었다.(그건 어떤 독일인이 모은 정신병자의 그림집이었다.) 나는 어느 틈엔가 우울함 속에서 반항적 정신이 드는 걸 느끼고 이판사판이 된 도박꾼처럼 여러 책을 펼쳐 보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어느 책도 문장이나 삽화 속에 다소의 바늘을 숨기고 있었다. 어느 책도?――나는 몇 번이나 읽은 "보바리 부인"을 들었을 때마저 필경 나 또한 중산 계층의 무슈 보발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꼈다……
해질녘에 가까운 마루젠 2층에는 나 이외의 손님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전등 속에서 책장 사이를 방황했다. 그렇게 '종교'란 푯말이 걸린 책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녹색 표지를 한 책 한 권을 훑었다. 이 책은 목차의 제몇장인가에 "무시무시한 네 가지 적――의혹, 공포, 교만, 관능적 욕망'이란 말을 줄지어 놓고 있었다. 나는 이런 단어를 보자마자 한 층 더 반항적 정신이 드는 걸 느꼈다. 그렇게 적이라 불린 것도 적어도 내게는 감수성이나 이지의 이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통적 정신 또한 근대적 정신처럼 나를 불행하게 한다는 사실이 기어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책을 손에 든 채로 문득 언젠가 펜 네임으로 썼던 "쥬료요시"란 말을 떠올렸다. 그건 한단의 걸음을 배우지 않는 사이에 수릉의 걸음을 잊어 사행포복으로 귀향했다는 '한비자' 속의 청년이었다. 오늘날의 나는 누구의 눈에나 "쥬료요시"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던 나 또한 이 펜네임을 이용한 건――나는 커다란 책장 뒤에 망상을 밀어 넣고 마침 앞에 있던 포스터 관람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포스터 중 한 장에선 성 조지로 보이는 기사가 날개를 가진 용을 홀로 찔러 죽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 기사는 투구 아래에 내 적 중 한 사람에 가까운 얼굴을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또 '한비자' 속에 나오는 용 사냥 기술 이야기를 떠올려 관람실을 통하지 않고 폭이 넓은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밤이 된 니혼바시 거리를 걸으며 용사냥이란 말을 계속 생각했다. 그 또한 내가 가진 벼루의 이름임이 분명했다. 이 벼루를 내게 준 건 어떤 젊은 사업가였다. 그는 여러 사업에 실패한 끝에 기어코 작년 말에 파산해버렸다. 나는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수한 빛 속에서 이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를――따라서 나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를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낮에는 맑았던 하늘도 이제는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불쑥 무언가가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걸 느껴 전철 선로 너머에 자리한 어떤 카페에 피난하려 했다.
그건 분명한 '피난'이었다. 나는 이 카페의 장미색 벽에서 무언가 평화에 가까운 걸 느끼고 가장 안쪽 테이블 앞에 겨우 편안히 엉덩이를 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나 이외엔 두세 명의 손님 밖에 없었다. 나는 한 잔의 코코아를 마시며 평소처럼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는 장미색 벽에 희미하게 푸른 연기를 오르게 했다. 이 상냥한 색의 조화도 역시나 유쾌했다. 하지만 나는 잠시 후, 내 왼쪽 벽에 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보고 다시 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내가 아직 학생일 적, 지리 노트 마지막에 "세인트 헬레나, 작은 섬"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우연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폴레옹 자신마저 겁을 먹게 한 건 분명했다……
나는 나폴레옹을 바라보며 내 작품을 생각했다. 그러자 먼저 기억에 떠오르는 건 '미천한 자의 말'에 적은 아포리즘이었다. (특히 '인생은 지옥보다도 더 지옥 같다'하는 말이었다.) 또 "지옥변"의 주인공――요시히데라는 화가의 운명이었다. 또……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그런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이곳에 피난한지 채 오 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카페는 짧은 시간 동안 꽤나 용모가 달라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를 불쾌하게 한 건 마호가니와 엇비슷한 의자나 테이블이 주위의 장미색 벽과 조금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단 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괴로움에 빠지는 걸 두려워해 은화 한 장을 던지고는 서둘러 카페를 뒤로하려 했다.
"죄송한데 이십 전은 주셔야 하는데요……"
내가 던진 건 동화였다.
나는 굴욕을 느끼며 홀로 거리를 걷는 사이 문득 먼 소나무 숲 안에 자리한 우리 집을 떠올렸다. 그건 어떤 교외에 위치한 우리 양부모의 집이 아닌 단지 나를 중심으로 한 가족을 위해 빌린 집이었다. 나는 이래저래 십 년 전에도 그런 집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사정 때문에 경솔하게도 부모와 동거하게 되었다. 동시에 또 노예로, 폭군으로, 힘없는 이기주의자로 변모했다……
호텔로 돌아온 건 이래저래 열 시 가량이 되었을 즘이었다. 긴 길을 걸어온 나는 방에 돌아갈 힘을 잃어 커다란 통나무로 불을 붙인 화로 앞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계획 중이던 장편을 생각했다. 스이코부터 메이지까지 각 시대의 백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대략 서른 개 가량의 단편을 시대순으로 엮은 장편이었다. 나는 불똥이 올라 오는 걸 보면서 문득 미야기 앞에 자리한 어떤 동상을 떠올렸다. 이 동상은 갑주를 입고 충성심 그 자체인 것처럼 높게 말위에 올라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적이었던 건――
"우와!"
나는 또 먼 과거에서 가까운 현대로 미끄러졌다. 다행히 그곳에서 만난 건 어떤 선배 조각가였다. 그는 여전히 비로드옷을 입고 짧은 샨앙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나는 의자서 일어나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이건 내 습관이 아닌 파리나 베를린에서 반생을 보낸 그의 습관을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상하게도 파충류 피부처럼 습했다.
"여기서 머무시나요?"
"네……"
"집필 때문에?"
"네, 집필도 하고 있지요."
그는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감정에 가까운 표정을 느꼈다.
"아니면 제 방에서 이야기하실까요?"
나는 도전적으로 이야기했다. (용기는 부족한 주제에 곧잘 도전적 태도를 취하는 건 내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그러자 그는 작게 웃으며 "어느 방에 묵고 계시죠?"하고 되물었다.
우리는 친구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용히 이야기하는 외국인 사이를 지나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 방을 보더니 거울을 뒤로하여 앉았다. 그렇게 여러 이야기를 했다. 여러?――대부분은 여자 이야기였다. 나는 죄를 범했기에 지옥에 떨어진 사람 중 한 명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악덕의 이야기는 나를 더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일시적 청교도가 되어 그러한 여자를 비웃었다.
"S코 씨의 입술을 보시죠. 그건 몇 사람하고나 키스한 탓에……"
나는 불쑥 입을 다물고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침 귀 뒤에 노란 고약을 붙이고 있었다.
"몇 사람하고나 키스한 탓에?"
"그런 사람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그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가 내심으론 내 비밀을 알기 위해 끝없이 나를 주의하는 걸 느꼈다. 하지만 역시 우리의 이야기는 여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미워하기보다도 나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며 더욱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겨우 그가 돌아 간 후, 나는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암야행로"를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의 정신적 투쟁은 하나 같이 내게 통렬했다. 나는 이 주인공에 비하면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느끼고 어느 틈엔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또 동시에 눈물은 어느새인가 내 심정에 평화를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길지는 않았다. 내 오른눈에는 다시 한 번 반투명한 톱니바퀴가 보이고 있었다. 톱니바퀴는 역시나 돌아가면서 서서히 그 수를 늘려 갔다. 나는 두통이 시작하는 게 두려워 머리맡에 책을 둔 채로 0.8 그램의 베로날을 먹고 일단 푹 자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 어떤 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또 남녀 아이들이 몇 명이나 헤엄치거나 잠수하고 있었다. 나는 이 풀 뒤편의 소나무 숲을 걸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뒤에서 "여보"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작게 몸을 돌리고 풀 앞에 선 아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또 큰 후회를 느꼈다.
"여보, 수건은?"
"필요 없어. 아이들 잘 보고."
나는 다시 걸었다. 하지만 내가 걷는 건 어느 틈엔가 플랫폼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골 정류장으로 보이며 긴 나무 울타리가 있는 플랫폼이었다. 그곳에는 또 H라는 대학생이나 나이 먹은 여자도 자리해 있었다. 그들은 내 얼굴을 보고는 내 앞으로 다가와 하나둘 내게 말을 걸었다.
"큰불이었죠."
"나도 겨우 도망쳤어."
나는 이 나이 먹은 여자를 어디서 본 것만 같았다. 그뿐 아니라 그녀와 이야기하며 어떤 유쾌한 흥분을 느꼈다. 그때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조용히 플랫폼으로 들어왔다. 나는 홀로 기차를 타고 양쪽에 하얀천을 건 침대 사이를 걸었다. 그러자 침대 위에 미라에 가까운 나체의 여자 하나가 나를 보며 누워 있었다. 그건 나의 복수의 신――어떤 미치광이의 딸임이 분명했다……
나는 눈이 뜨자마자 저도 모르게 침대에서 뛰쳐 내려왔다. 내 방은 여전히 전등불로 밝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날개 소리나 쥐소리도 들렸다.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고 난로 앞으로 서둘렀다. 그렇게 의자에 앉은 채로 불을 바라보았다. 그때 하얀옷을 입은 직원이 홀로 모닥불에 나무를 넣으러 걸어왔다.
"몇 시 죠?"
"세 시 반 쯤 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대편 로비의 구석에선 미국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홀로 책을 읽고 있었다. 여자가 입고 있는 건 멀리서 보아도 녹색 드레스임이 분명했다. 나는 무언가 구원받은 걸 느끼고 가만히 밤이 끝나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오랜 병고에 고민한 끝에 조용히 죽기를 기다리는 노인처럼……
넷 아직?
나는 호텔 방에서 겨우 이전 단편을 마무리하고 어떤 잡지에 보내기로 했다. 물론 내 원고료는 일주일치 호텔비에도 마땅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일을 마무리한 것에 만족하여 무언가 정신적 강장제를 찾기 위해 긴자의 어떤 서점으로 외출하기로 했다.
겨울 햇살이 닿는 아스팔트 위에는 종이 쪼가리가 몇 개나 뿌려져 있었다. 그러한 종이는 빛의 각도 때문인지 하나같이 장미꽃과 똑닮아 있었다. 나는 모종의 호의를 느껴서 서점에 들어갔다. 그곳도 평소보다 깔끔했다. 단지 안경을 쓴 소녀 한 명이 점원과 대화하는 게 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나는 거리에 떨어진 종이짝 장미꽃을 떠올리며 "아나톨 프랑스 대화집"이나 "메리메 서간집"을 사기로 했다.
나는 두 권의 책을 품고 어떤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장 안쪽 테이블에 앉아 커피가 오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 내 반대편에는 부모 자식으로 보이는 남녀 둘이 앉아 있었다. 그 아들은 나보다도 젊었지만 거의 나와 똑닮아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연인 사이처럼 얼굴을 가까이한 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는 사이 적어도 아들은 성적으로 어머니께 위안을 주는 걸 의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내게도 익숙한 친화력의 한 사례임이 분명했다. 동시에 또 현대를 지옥으로 하는 어떤 의지의 한 사례임에도 분명했다. 하지만――나는 또 괴로움에 빠지는 게 두려워 마침 커피가 온 틈에 '메리메 서간집'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이 서간집 속에서도 그의 소설처럼 날카로운 격언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한 격언은 내 마음을 어느 틈엔가 철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이렇게 영향받기 쉬운 것도 내 약점 중 하나였다.) 나는 한 잔의 커피를 비운 후, "뭐라도 오라지"하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카페를 뒤로했다.
나는 거리를 걸으며 여러 쇼윈도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액자 가게의 쇼윈도는 베토벤의 초상화를 걸고 있었다. 머리가 거꾸로 솟은 천재 그 자체의 초상화였다. 나는 이 베토벤을 우스꽝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우연찮게 고등학교 이후로 어울린 친구를 만났다. 이 응용화학 대학교수는 큼지막한 중절 가방을 안 고 한 쪽눈으로 새빨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눈이 왜 그래?"
"이거? 그냥 결막염이야."
나는 문득 14, 15년 이후로 항상 친화력을 느낄 때마다 내 눈도 그의 눈처럼 결막염을 일으킨 걸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우리의 친구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어떤 카페에 나를 데리고 갔다.
"오랜만이네. 슈 슌스이의 건비식 이후로 처음인가?"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대리석 테이블 너머로 내게 물었다.
"그러게. 슈 슌……"
나는 어째서인지 슈 슌스이를 정확히 발음할 수 없었다. 일본어였던 만큼 나를 조금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K라는 소설가를, 그가 산 불독을, 리웨이사이트라는 독가스를……
"너는 조금도 쓰지 않는구나. '점귀부'는 읽었는데……그건 네 자서전이야?"
"응, 내 자서전이야."
"그건 좀 병적이었지. 몸은 좀 괜찮아?"
"여전히 약만 먹고 있지."
"나도 요즘 들어 불면증이라서 말야."
"나도?――왜 나'도'야?"
"너도 불면증 아냐? 불면증은 지독하더라……"
그는 왼쪽만 충혈된 눈에 미소에 가까운 걸 띄우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불면증"의 증의 발음을 정확히 할 수 없는 걸 느꼈다.
"미치광이 아들인데 당연하지."
나는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종잇짝은 이따금 우리 인간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단발 여자 하나가 지나갔다. 그녀는 멀리서 보기엔 아름다웠다. 하지만 눈앞까지 오니 잔주름 위에 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임신 중인 듯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넓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동안 걷고 있는 동안 항문의 아픔을 느꼈다. 그건 나로선 좌욕 외엔 어쩔 수 없는 아픔이었다.
"좌욕――베토벤 역시 좌욕을 했었지……"
좌욕에 쓰는 유황의 냄새는 곧 내 코를 덮쳤다. 물론 길거리서는 유황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종잇짝 장미를 떠올리면서 되도록 제대로 걸으려 노력했다.
한 시간가량이 지난 후, 나는 내 방에 틀어박힌 채로 창문 앞 책상에 앉아 새로운 소설에 임했다. 펜은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로 척척 원고용지 위를 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두세 시간 후에는 누군가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누른 것처럼 멈춰버렸다. 나는 도리 없이 책상 앞에서 벗어나 방 안을 돌았다. 내 과대망상은 이럴 때에 가장 현저했다. 나는 야만적인 환희 속에서 내게는 부모님도 없을뿐더러 처자식도 없고 단지 나의 펜에서 흐르는 목숨만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네다섯 분 후 전화 앞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전화는 몇 번 대답을 해도 단지 애매모호한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몰이라고 말한 게 분명했다. 나는 기어코 전화를 벗어나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몰이란 말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몰――Mole……"
몰은 두더지를 뜻하는 영어였다. 이 연상도 내게는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두세 초 후, Mole을 la mort 로 바꾸었다. 라 몰은――죽음을 뜻하는 프랑스어는 바로 나를 불안하겠다. 죽음은 누나의 남편에게 닥친 것처럼 내게도 닥쳐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불안 속에서도 무언가 우스운 걸 느꼈다. 그뿐 아니라 어느 틈엔가 작게 웃고 있었다. 왜 이렇게 우스운 걸까?――그건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서 내 그림자와 제대로 마주했다. 내 그림자도 물론 웃고 있었다. 나는 이 그림자를 바라보는 사이에 두 번째 나를 떠올렸다. 두 번째 나――독일인이 말하는 소위 Doppel gaenger은 다행히도 나 자신에게 보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 영화배우가 된 K 군의 부인은 두 번째 나를 제국 극장 복도서 보았다. (나는 불쑥 K 군의 부인에게 "저번에는 인사도 못 해서요"하는 말을 들어 당혹스러워한 걸 기억하고 있다.) 그로부터 이미 고인이 된 어떤 외다리 번역가 또한 역시나 긴자의 어떤 담배가게서 두 번째 나를 보았다. 죽음은 혹은 나보다도 두 번째 나에게 와있는 걸지도 몰랐다. 만약 또 나에게 왔더라도――나는 거울을 등진 채 창문 앞 책상으로 돌아갔다.
사각 응회암으로 둘러싸인 창문은 마른풀이나 연못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 정원을 바라보며 먼 소나무 숲 안에서 태언 몇 권의 노트나 미완성 희곡을 떠올렸다. 그렇게 펜을 들어서는 다시 한 번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섯 붉은빛
햇살은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두더지처럼 커튼을 내리고 낮에도 전등을 킨 채로 요전 번 소설만 이어갔다. 그러다 지치면 텐의 영국 문학사를 펼쳐 시인들의 평생을 훑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행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거인들마저도――일대 학자였던 벤 존슨마저 자신의 엄지손가락 위에서 로마와 카르타고 군세가 싸움을 시작하는 걸 바라볼 정도로 신경적 피로에 빠져 있었다. 나는 이런 그들의 불행에서 잔혹한 악의로 충만한 환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풍이 강했던 어느 밤(그건 내게는 좋은 징조였다), 나는 지하실을 지나 거리로 빠져나와 어떤 노인을 찾기로 했다. 그는 어떤 성경 회사서 잡일을 하면서 회사 다락방에서 홀로 기도나 독서에 정진 중이었다. 우리는 화로에 손을 뻗으며 벽에 걸린 십자가 아래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우리 어머니는 발광했는가? 왜 우리 아버지의 사업은 실패했는가? 또 나는 왜 벌을 받았는가?――그러한 비밀을 아는 그는 묘하게 엄숙한 미소를 짓더니 한사코 나를 상대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이따금 해주는 짧은 말에 인생의 캐리커처를 그리기도 했다. 나는 이 다락방의 은거인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 또한 친화력에 움직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 정원수 가게 딸은 기량도 좋고 기질도 좋고――제게 잘 해줍니다."
"몇 살이죠?"
"올해로 열여덟입니다."
그건 그에게는 부성에 가까울지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 안에서 정열을 느꼈다. 그분 아니라 그가 권한 사과는 어느 틈엔가 노란 껍질 위에 일각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나는 나뭇결이나 커피 잔의 균열에서 이따금 신화적 동물을 발견했다.) 일각수는 기린임이 분명했다. 나는 적의를 가진 어떤 비평가가 나를 "910년대의 기린"이라 부른 걸 떠올려 이 십자가 걸린 다락방도 안전지대가 아니란 걸 느꼈다.
"요즘은 어떠신가요?"
"여전히 신경만 날카롭게 서있죠."
"그건 약으로도 안 되지요. 신도가 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만약 저라도 될 수 있다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단지 신을 믿고 신의 자식인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을 믿기만 하면……"
"악마는 믿을 수 있는데 말이죠……"
"그럼 왜 신을 믿지 않지요? 그림자를 믿는데 빛도 믿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빛이 없는 어둠도 있지요."
"빛이 없는 어둠이요?"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또한 나처럼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이 있는 이상 빛도 있다고 믿었다. 우리의 논리 중 다른 점은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넘을 수 없는 도랑임이 분명했다……
"빛은 반드시 있지요. 그 증거로 기적이 있으니까요……기적은 지금도 이따금 일어나고는 합니다."
"그건 악마가 행하는 기적도……"
"왜 또 악마 이야기를 하십니까?"
나는 요 한두 해 동안 나 자신이 경험한 걸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처자식에게 전해 나 또한 어머니처럼 정신병원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건 뭐죠?"
이 듬직한 노인은 오래된 책장을 돌아보아 무언가 목양신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입니다. '죄와 벌'은 읽어 보셨나요?"
나는 물론 십 년 전에도 네다섯 권의 도스토옙스키와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우연히(?) 그가 말한 '죄와 벌'이란 말에 감동하여 그 책을 빌려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전등불이 들어 온 인파가 많은 거리는 내게 불쾌하게 다가왔다. 특히 지인과 우연찮게 만나는 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되도록 어두운 거리를 골라 도둑처럼 걸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후 어느 틈엔가 배에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통증을 잡을 수 있는 건 한 잔의 위스키뿐이었다. 나는 어떤 바를 발견해 그 문을 밀어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좁은 바 안에는 담배 연기로 자욱한 가운데 예술가로 보이는 청년들이 몇 명이나 무리 지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한가운데에는 미미카쿠시로 머리를 묶은 여자 하나가 열심히 만돌린을 치고 있었다. 나는 곧장 당혹스러워져 문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내 그림자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심지어 나를 비추는 건 꺼림칙한 붉은빛이었다. 나는 거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내 그림자는 전처럼 좌우로 끊임없이 움직였다. 나는 두려워 않고 돌아보아 겨우 바 지붕에 색유리 랜턴이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랜턴은 심한 바람 때문에 천천히 공중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다음으로 들어 간 건 어떤 지하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그곳 바 앞에 서서 위스키 한 잔을 주문했다.
"위스키를 찾으십니까? Black and White 밖에 없습니다만……"
나는 탄산수 안에 위스키를 넣고 조용히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내 옆에는 신문 기자로 보이는 서른 전후의 남자 둘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중이었다. 그분 아니라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온몸으로 그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건 정말로 전파처럼 내 몸을 타고 흘렀다. 그들은 확실히 내 이름을 알고 내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Bien……très mauvais……pourquoi ?……"
"Pourquoi ?……le diable est mort !……"
"Oui, oui……d'enfer……"
나는 은화 한 장을 던지고(그게 내가 가진 마지막 은화였다.) 이 지하실 밖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밤바람이 부는 거리는 배의 통증을 줄여주어 내 신경을 보강해주었다. 나는 라스콜니코프를 떠올리며 무엇이든 참회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나 이외에도――아니, 우리 가족 이외에도 비극을 만드는 게 분명했다. 그뿐 아니라 이 욕망마저 진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만약 나의 신경만 일반인처럼 튼튼했다면――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 어딘가로 가야만 했다. 마드리드로, 리우로, 사마르칸트로……
그러던 사이 어느 가게에 걸린 작고 하얀 간판이 불쑥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동차 타이어에 날개가 달린 상표가 그려진 간판이었다. 나는 이 상표에 인공 날개를 달고 난 고대 그리스인을 떠올렸다. 그는 공중에 날아 오른 끝에 태양빛에 날개가 불타 버렸고 끝내 바다에 빠져 익사해버렸다. 마드리드로, 리우로, 사마르칸트로――나는 그런 나의 꿈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또 동시에 복수의 신에게 쫓긴 오레스테스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운하를 따라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그러던 사이 어느 교외에 자리한 양부모의 집을 떠올렸다. 양부모는 물론 내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마 내 자식들도――하지만 나는 그곳에 돌아오면 스스로 나를 속박해버리는 어떤 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운하는 파도치는 물 위에 다루마부네 하나를 띄우고 있었다. 또 배 밑바닥에선 옅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몇몇 남녀 가족이 생활하는 게 분명했다. 역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미워하면서……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전투적 정신을 되살려 위스키의 취기를 느끼며 호텔로 돌아갔다.
다시 책상에 앉아 '메리메 서란집'을 읽었다. 그 책은 다시 어느 틈엔가 내게 생활력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말년의 메리메가 신교도가 된 걸 알자 가면 그림자에 담긴 메리메의 얼굴을 느꼈다. 그 또한 우리처럼 어둠 속을 걷는 한 사람이었다. 어둠 속을?――"암야행로"는 이런 내게는 무서운 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울함을 잊기 위해 "아나톨 프랑스 대화집"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근대의 목양신 또한 역시 십자가를 짊어매고 있었다……
한 시간가량 지난 후, 직원은 내게 한 다발의 우편물을 건네러 왔다. 그중 하나는 라히프치히의 출판사에서 내게 "근대 일본 여자"란 소논문을 쓰란 내용이었다. 왜 그들은 내게 이런 소논문을 쓰라는 걸까? 그뿐 아니라 이 영어 편지는 "우리는 마치 일본화처럼 흑백 이외에 색채가 없는 여자의 초상화라도 만족할 수 있다"는 내용의 추신을 달아두었다. 나는 이런 한 줄서 Black and White란 위스키의 이름을 떠올려 그 자리서 편지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또 이번에는 손이 닿는 대로 한 편지를 뜯어 노란 서란을 읽어 보았다. 이 편지를 쓴 건 내가 모르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두세 줄도 읽지 않는 사이에 "당신의 '지옥변'은……"이란 말이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세 번째 편지는 조카에게 온 것이었다.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리며 가족간의 문제를 읽어 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끝에 이르러 나를 때리고 있었다.
"가집 '적광'의 재판을 보내드리니……"
적광! 나는 모종의 냉소를 느껴 방 밖으로 피난하기로 했다. 복도서 인기척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겨우 로비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일단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는 어째서인지 에어쉽이었다.(나는 호텔에 정착한 후로 항상 스타만 피웠다.) 인공 날개는 다시 한 번 내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직원을 불러 스타 두 갑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직원이 하는 말이 스타는 품절 중이란다.
"에어쉽이라면 있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저은 채로 넓은 로비를 둘러보았다. 내 반대편에는 네다섯 명의 외국인이 테이블을 둘러싼 채 이야기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 하나――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그들과 이야기하며 이따금 나를 보는 듯했다.
"Mrs. Townshead……"
무언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내게 그렇게 속삭였다. 미세스 타운즈헤드란 이름은 물론 들어보지 못했다. 설령 그게 저 여자의 이름이더라도――나는 다시 의자서 일어나 발광하는 걸 두려워하며 내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방에 돌아가면 곧장 어떤 정신병원에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는 건 내게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수없이 고민한 끝에 이 공포를 풀어내기 위해 '죄와 벌'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연히 펼친 페이지는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한 구절이었다. 나는 책을 잘못 본 건가 하는 생각에 책표지를 보았다. "죄와 벌"――책은 "죄와 벌"이 분명했다. 나는 이 제본 실수에――또 제본이 잘못된 페이지를 연 사실에 운명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느껴 도리 없이 그곳을 읽기로 했다. 하지만 한 페이지도 읽지 않아 온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페이지는 악마에게 괴롭힘당하는 이반을 그리고 있었다. 이반을, 스트린드베리를, 모파상을, 혹은 이 방에 있는 나 자신을……
이런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단지 잠뿐이었다. 하지만 수면제는 어느 틈엔가 한 봉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도저히 잠에 들지 못하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두 장, 다섯 장, 일곱 장, 열 장――원고는 금세 만들어졌다. 나는 이 소설 세계를 초자연의 동물로 가득 채웠다. 그뿐 아니라 그 동물 중 한 마리에 나 자신의 초상화를 덧그렸다. 하지만 피로는 서서히 내 머리를 어둡게 만들었다. 나는 기어코 책상 앞을 벗어나 침대 위에 누웠다. 그로부터 사오십 분은 잔 듯했다. 하지만 또 누군가가 내 귀에 이런 말을 속삭이는 걸 느끼고 바로 눈을 떠 일어섰다.
"Le diable est mort"
응회암 창문 바깥은 어느 틈엔가 차갑게 밝아져 있었다. 나는 문앞에 서서 아무도 없는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바깥 공기 탓에 드문드문 흐려진 반대편 창문 유리 위에 작은 풍경이 드러나 있었다. 그건 노란 소나무 숲 너머에 바다가 자리한 풍경임이 분명했다. 나는 머뭇머뭇 창 앞으로 다가가 이 풍경을 만드는 게 실은 정원의 마른 잔디나 연못이란 걸 발견했다. 하지만 나의 환각은 어느 틈엔가 우리집에 대한 향수에 가까운 걸 불러 일으켰다.
나는 아홉 시가 되는 대로 어떤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돈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책상 위에 놓인 가방 안에 책이나 원고지를 밀어 넣으며.
여섯 비행기
나는 토카이도센의 어떤 정차장에서 그 안쪽의 어떤 피서지까지 자동차로 이동했다. 운전수는 어째서인지 이런 추위에 낡은 레인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나는 이런 우연이 꺼림칙하게 여겨져 어떻게든 그를 보지 않으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낮은 소나무가 자란 건너편서――아마 낡은 가도에 장례식 행렬이 지나는 걸 보았다. 하얀 제등이나 용등 따위는 섞여 있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금은으로 만든 조화 연꽃은 조용히 차상 앞뒤서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처자식이나 수면제의 힘을 빌어 이삼 일은 꽤나 평화롭게 지냈다. 우리집 2층은 소나무숲 위로 희미하게 바다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2층 책상에 앉아 비둘기 소리를 들으며 오전 동안만 일하기로 했다. 새는 비둘기나 까마귀 이외에 참새도 엔가와로 날아들어 오곤 했다. 그 또한 내게는 유쾌한 일이었다. "참새에 익숙해지다"――나는 펜을 든 채로 그런 말을 떠올렸다.
어느 미적지근하게 흐린 오후, 나는 어떤 잡화점에 잉크를 사러 갔다. 그러나 가게에 전시된 건흑갈색 잉크뿐이었다. 흑갈색 잉크는 어떤 잉크보다도 나를 불쾌하게 만들곤 했다. 나는 도리 없이 가게를 나서 인기척 없는 거리를 홀로 걸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근시로 보이는 마흔 전후의 외국인이 홀로 어깨를 높이 든 채 지나갔다. 그는 이 근방에 사는 피해망상자 스웨덴 인이었다. 심지어 그의 이름은 스트린드베르그였다. 나는 그와 엇갈리면서 육체적으로 무언가 자극을 받는 걸 느꼈다.
길은 고작해야 두세 정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한 거리를 걷는 동안에 절반만 검은 개가 네 번이나 내 옆을 지나갔다. 나는 골목으로 들어가며 블랙 앤 화이트란 위스키를 떠올렸다. 그뿐 아니라 방금 전 스트린드베르그의 타이 또한 흑과 백인 걸 떠올렸다. 나는 도무지 우연이라 치부할 수 없었다.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나는 머리만 걷는 것처럼 느껴져 거리에 멈춰 섰다. 길에는 철사 울타리 안에 희미하게 무지개색을 두른 유리그릇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그릇 밑바닥에는 날개로 보이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소나무 가지에 서있던 참새 몇 마리가 그 주위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릇 가까이에 이르니 다들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다시 공중으로 도망치 듯 올랐다……
나는 아내의 친정으로 가 정원의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정원 구석의 철망 안에는 하얀 레그혼종의 닭이 몇 마리나 조용히 걷고 있었다. 또 내 발밑에는 검은 개도 한 마리 누워 있었다. 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의문을 풀기 위해 초조해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내의 어머니나 동생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여기는 조용하네요."
"그야 도쿄보단 낫죠."
"여기도 시끄러울 일이 있어요?"
"사람 사는 곳인데요."
아내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실제로 이 피서지 또한 '사람 사는 곳'임이 분명했다. 나는 대략 1년 동안 이곳에 얼마나 많은 죄악과 비극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천천히 환자를 독살하려 한 환자. 양자부부의 집에 불을 지른 노파. 동생의 자산을 뺏으려 한 변호사――내게 그런 집을 보는 건 지옥 안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엔 미치광이가 하나 있다죠."
"H를 말하는 거죠? 미치광이가 아니랍니다. 바보가 됐을 뿐이에요."
"조발성 치매라던가요. 저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꺼림칙해요. 그 사람은 저번에도 무슨 생각인지 말머리 관세음 앞에서 인사를 하더군요."
"꺼림칙하다니……더 강해지셔야죠."
"형님은 저보다 강하지만――"
대충 수염을 기른 아내의 동생도 침상에서 일어나며 어느 틈엔가 머뭇머뭇 우리의 이야기에 참가했다.
"강함 속에 약한 구석도 있으니까요……"
"그건 곤란하네요."
나는 그렇게 말한 아내의 엄마를 보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동생도 작게 웃으며 먼 울타리 바깥의 소나무 숲을 보더니 모종의 황홀에 젖어 이야기를 이어갔다.(나는 이따금 이 젊고 병든 동생이 육체를 벗어낸 정신 그 자체로만 보였다.)
"묘하게 인간에서 벗어나 있나 싶으면 인간적 욕망도 제법 강하고……"
"착한 사람인가 싶으면 나쁜 사람이기도 하고."
"아니, 선악보다도 더 반대되는 게……"
"그럼 어른 속에 아이도 있는 거겠지."
"그것도 아냐. 말을 잘 못 하겠는데……전기의 양극하고 닮아 있으려나. 서로 반대되는 걸 같이 지니고 있어."
그때 우리를 놀래킨 건 격렬한 비행기 울림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나무 가지 끝에 닿지 않을 정도로 올라 간 비행기를 발견했다. 날개를 노란색으로 물들인 보기 드문 단엽기였다. 닭이나 개는 그 울림에 놀라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특히 개는 짖으면서 꼬리를 말고는 바깥 복도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비행기는 떨어지지 않으려나?"
"괜찮을 거야……형님은 비행기병이라고 알아?"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아니"라고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저었다.
"저런 비행기에 탄 사람은 높은 공기만 먹으니까 점점 땅의 공기를 견딜 수 없게 된대……"
아내의 집을 뒤로한 후, 나는 가지 하나 움직이지 않는 소나무 숲 안을 걸으며 천천히 우울해져 갔다. 왜 그 비행기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하필 내 머리 위를 지났을까? 또 그 호텔은 왜 많고 많은 담배 중 에어쉽만 팔았을까? 나는 여러 의문에 괴로워하며 인기척 없는 길을 골라 걸었다.
낮은 바다는 모래산 너머서 회색으로 흐려져 있었다. 또 모래산에는 그네 없는 그네 틀만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 그네 틀을 바라보며 곧 교수대를 떠올렸다. 실제로 그네 틀 위에는 까마귀 두세 마리가 뭉쳐 있었다. 까마귀는 모두 나를 보아도 날아오를 기척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정중앙에 자리해 있던 까마귀는 커다란 부리를 하늘로 뻗으며 울었다.
나는 잔디가 갈라진 모래 사장을 따라 별장이 많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골목 오른쪽에는 역시 높은 소나무 사이에 두 층 가량 되는 목조 서양 가옥이 세워져 있을 터였다.(내 친구는 이 집을 '봄이 있는 집'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집 앞을 지나자 그곳에는 콩크리트 받침 위에 버스 정류장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화재――나는 곧장 그렇게 생각하며 보지 않도록 하며 걸었다. 그러자 자전거에 탄 남자가 홀로 반대편에서 다가왔다. 그는 짙은 갈색의 사냥모를 쓰고 묘하게 가라앉은 눈을 뜬 채 핸들 위에 상반신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의 얼굴서 누나의 남편 얼굴을 느껴 그가 눈앞까지 오기 전에 옆골목으로 빠지려 했다. 하지만 옆골목 중앙에도 썩은 두더지 시체 하나가 배를 위로한 채 구르고 있었다.
무언가가 나를 노린단 사실이 걸음마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반투명한 톱니바퀴 또한 하나씩 내 시야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나는 끝끝내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음을 두려워하며 목을 똑바로 한 채 걸었다. 톱니바퀴는 수를 늘리면서 점점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또 동시에 오른 소나무 숲은 조용히 가지가 갈라져 마치 얇은 유리 세공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고동이 빨라지는 걸 느끼고 몇 번이나 길옆에 멈춰 서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뒤에서 떠미는 듯하여 멈춰 서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삼십 분 가량 지난 후, 나는 우리 집 2층에 누워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심한 두통을 참아야 했다. 그러자 내 눈꺼풀 뒤에 은색 깃털을 비늘처럼 덮은 날개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날개는 분명 망막 위로 또렷히 보였다. 나는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물론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은색 날개는 역시 어둠 속에 분명히 자리해 있었다. 나는 문득 요전 번에 탄 자동차의 라디에이터 뚜껑에도 날개가 달려 있음을 떠올렸다……
그때 누군가가 바쁘게 사다리를 오른다 싶더니 곧장 달려 내려갔다. 나는 그 누군가가 아내인 걸 알고 놀라서 몸을 일으켜서는 사다리 앞에 위치한 어두컴컴한 토코노마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아내는 몸을 웅크린 채로 숨을 헐떡이면서 끝없이 어깨를 떨고 있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내는 겨우 고개를 들고 억지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냥 어쩐지 당신이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건 내 일평생에서 가장 무서운 경험이었다――나는 이제 글을 이어 갈 힘을 지니지 못했다. 이런 심정 속에서 살아가는 건 말로 못할 고통이다. 누군가 내가 자는 사이에 가만히 목을 졸라 죽여 줄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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