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떤 바보의 일생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8. 19.
728x90
반응형
SMALL
 나는 이 원고의 발표 여부나 발표 시기, 기관 모두 너한테 일임할 생각이야.
 너는 이 원고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을 알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발표하더라도 인덱스를 붙이지 않길 바라.
 나는 지금 가장 불행한 행복 속에서 살고 있어.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후회는 하고 있지 않아. 단지 나 같은 나쁜 남편, 나쁜 아들, 나쁜 부모를 가진 자들에게 유감을 느기고 있어. 그럼 잘 있어. 나는 이 원고 속에선 적어도 의식적으론 자기 변호를 하지 않을 셈이야.
 마지막으로 내가 이 원고를 네게 맡긴 건 아마 네가 누구보다도 나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야.(도시 사람이란 나의 껍질을 벗겨낸다면) 부디 이 원고 속에서 내 바보 같음을 비웃어줘.
   쇼와 2년 6월 20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쿠메 마사오

     하나 시대

 어떤 서점의 2층이었다. 20살의 그는 책장에 걸린 서양풍 사다리를 올라 새로운 책을 찾고 있었다. 모파상, 보들레르, 스트린드베리, 입센, 쇼, 톨스토이……
 그러는 사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열심히 책등을 읽어 갔다. 그곳에 줄지은 건 책이라기 보다도 되려 세기말 자체였다. 니체, 베를렌, 공쿠르 형제, 도스토옙스키, 하웁트만, 플로베르……
 그는 어둠과 싸우며 그들의 이름을 세어갔다. 하지만 책은 저절로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기어코 끈기를 잃고 서양풍 사다리서 내리려 했다. 그러자 홀로 달린 전등 하나가 마침 그의 머리 위에서 대뜸 빛을 내뿜었다. 그는 사다리 위에 머무른 채로 책 사이서 움직이는 점원이나 손님을 내려다 보았다. 그들은 묘하게 작았다. 그뿐 아니라 참으로 초라했다.
 "인생은 한 줄의 보들레르에도 미치지 못 한다."
 그는 잠시간 사다리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둘  어머니

 미치광이들은 하나 같이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 넓은 방은 그 탓에 한 층 더 우울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오르간 앞에서 열심히 찬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또 동시에 그들 중 한 명은 방 중앙에 서서 춤춘다기 보다도 발재간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혈색 좋은 의사와 함께 그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도 십 년 전에는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조금도――그는 실제로 그들의 냄새서 어머니의 냄새를 느꼈다.
 "그럼 갈까?"
 의사는 그의 앞에 서서 복도를 따라 어떤 방으로 향했다. 그 방 구석에는 알콜을 채운 커다란 유리 항아리 안에 뇌수가 몇 개인가 담겨 있었다. 그는 어떤 뇌수 위에서 작은 하얀 무언가를 보았다. 그건 마치 계란의 흰자를 살짝 떨어트린 것에 가까웠다. 그는 서서 의사와 이야기하며 다시 한 번 그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 뇌수를 가지고 있던 남자는 XX 전등 회사의 기사였어. 항상 자신을 검게 빛나는 커다란 다이나몬드로 여겼지."
 그는 의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빈병 파편을 심은 벽돌 울타리 이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띄엄띄엄 옅은 이끼를 하얗게 빛내고 있었다.

     셋 집

 그는 어떤 교외의 2층 방에서 눈을 떴다. 지반이 느슨한 탓에 묘하게 기울어진 2층이었다.
 그의 큰어머니는 이 2층서 이따금 그와 다투었다. 이따금 그의 양부모가 중재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백모에게 누구보다도 큰 사랑을 느꼈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의 큰어머니는 그가 스물일 적에 벌써 예순에 가까웠다.
 그는 어떤 교외의 2층서 몇 번이나 서로를 사랑하는 건 서로의 괴롭게 하는 게 아닌지 생각했다. 그 동안에도 무언가 꺼림칙한 2층의 기울어짐을 느끼며.

     넷 도쿄

 스미다가와는 어두웠다. 그는 달리는 소형 기선의 창문 너머로 섬의 벚꽃을 바라보았다. 꽃이 핀 벚꽃도 그의 눈에는 누더기처럼 우울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 벚꽃에――에도 이후로 자리 잡은 섬의 벚꽃에 그는 어느 틈엔가 자기자신을 겹쳐 보았다.

     다섯 나

 그는 그의 선배와 함께 어떤 카페의 테이블에 마주하여 끊임 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는 별로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의 말에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반나절 내내 자동차를 탔어."
 "무슨 일 있으셨나요?"
 그의 선배는 턱을 괸 채로 지극히 적당히 대답했다.
 "아니, 그냥 타고 싶어서."
 그 말은 그가 모르는 세계에――신들에 가까운 '내가'의 세계에 그 자신을 해방했다. 그는 모종의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또 동시에 기쁨도 느꼈다.
 그 카페는 지극히 작았다. 하지만 빵신의 액자 아래에는 붉은 화분에 심어진 고무나무 한 그루가 두툼한 잎을 축 늘어트려 놓고 있었다.


     여섯 병

 그는 끊이지 않는 파도 바람 속에서 커다란 영어 사전을 펼쳐 손가락 끝으로 말을 찾았다.
 Talaria 날개 달린 신발 혹은 샌들.
 Tale 이야기.
 Talipot 동인도서 나는 야자. 나무는 오십 피트에서 백 피트에 이르며 잎은 나무, 우산, 모자 등에 사용된다. 칠십 년에 한 번 꽃이 핀다……
 그의 상상은 이 야자 꽃을 또렷히 그려냈다. 그러자 그는 목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 했던 가려움을 느껴 저도 모르게 사전 위로 가래를 토해냈다. 가래를?――하지만 그건 가래가 아니었다. 그는 짧은 생명을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야자꽃을 상상했다. 이 먼 바다 너머에 높게 자리한 야자 꽃을.

     일곱 그림

 그는 대뜸――그건 정말로 뜬금 없었다. 그는 어떤 서점 앞에 서서 고흐의 화집을 보는 사이 불쑥 그림이란 걸 깨달았다. 물론 그 고흐 화집은 사진판이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사진판 속에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자연을 느꼈다.
 그림을 향한 그러한 열정은 그의 시야를 새롭게 했다. 그는 언젠가 가지의 비틀어짐이나 부풀어 오른 여자의 뺨 따위를 끊임 없이 주의하게 되었다.
 또 어느 비 오는 가을날 저녁, 그는 어떤 교외의 철교 아래를 지났다.
 철교 너머의 둑 아래에는 짐마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엇다. 그는 그곳을 지나며 누군가가 전에 이 거리를 지난 걸 느꼈다. 누가?――그건 그 자신에게 새삼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스물세 살의 그의 마음 속에는 귀를 자른 네덜란드 사람 하나가 긴 파이프를 입에 문 채로 이 울창한 살풍경 위에서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여덟 불꽃

 그는 비에 젖은 채로 아스팔트 위를 걸엇다. 비는 꽤나 강했다. 그는 물방울로 가득 찬 거리서 고무제 외투의 냄새를 느꼈다.
 그러자 눈앞의 가공선 하나가 보라색 불꽃을 내뿜었다. 그는 묘하게 감동했다. 그의 웃옷 재킷은 그들의 동인 잡지에 발표할 그의 원고를 감추고 있었다. 그는 빗속을 걸으며 다시 한 번 뒤의 가공선을 올려다 보았다.
 가공선은 여전히 날카로운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는 인생을 되짚어 봐도 특별히 바라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 보라색 불꽃만큼은――굉장한 공중의 불꽃만큼은 목숨과 바꿔버리고 싶었다.

     아홉 시체

 시체는 모두 엄지에 쇠줄이 붙은 팻말을 걸고 있었다. 또 팻말은 이름이나 연령 따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는 허리를 숙인 채로 솜씨 좋게 메스를 움직이며 어떤 시체의 얼굴 가죽을 벗겨냈다. 가죽 아래에 펼쳐진 건 아름다운 노란색 지방이었다.
 그는 그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에게 어떤 단편을――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어떤 단편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부패한 살구 냄새와 비슷한 시체 냄세는 불쾌했다. 그의 친구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조용히 메스를 움직였다.
 "요즘은 시체도 부족해서 말야."
 그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어느 틈엔가 답을 마련해 놓았다――"나는 만약 시체가 부족하면 아무 악의도 없이 사람을 죽일까?" 물론 그 대답은 그의 마음속에만 있었다.

     열 선생님

 그는 큰 떡갈나무 아래서 선생님의 책을 읽었다. 떡갈나무는 가을햇살 속에서 잎 한 장 움직이지 않았다. 어딘가 먼 공중에 유리 접시를 건 천칭 하나가 딱 평균을 유지하고 있다――그는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그런 광경을 느꼈다……


     열하나 여명

 밤은 서서히 밝아졌다. 그는 언젠가 어떤 거리의 넓은 시장을 둘러보았다. 시장에 무리진 사람들이나 수레는 하나 같이 장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조용히 시장 안을 걸었다. 그러자 마른 검은개 한 마리가 대뜸 그에게 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 개마저 사랑했다.
 시장의 정중앙에는 버즘나무 하나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는 그 뿌리에 서서 가지 너머로 높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머리 위 하늘에선 별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그건 그가 스물다섯일 적――선생님과 만나 세 달째가 된 날이었다.

     열둘 군항

 잠수정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그는 전후좌우를 둘러싼 기계 안에 걸터 앉아 작은 안경을 들여다 보았다. 또 그 안경에 비치는 건 밝은 군항의 광경이었다. "저기에 '콩고'가 보이지요?"
 어떤 해군 장교가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사각 렌즈 위로 작은 군함을 바라보며 어째서인지 네덜란드 미나리를 떠올렸다. 1인분에 30전인 비프 스테이크 위에서도 희미하게 향을 내뿜던 네덜란드 미나리를.


     열셋 선생님의 죽음

 그는 빗속에서 새로운 정차장을 걸었다.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정차장 너머에는 철도 인부 서너명이 일제히 곡괭이를 휘두르며 무언가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의 바람은 인부의 노래나 그의 감정을 밀어냈다. 그는 담배에 불도 붙이지 않은 채로 기쁨에 가까운 괴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선생님 위독'이란 전보를 외투 주머니에 눌러 넣은 채로……
 그때 반대편 소나무산의 그림자서 오전 여섯 시 상행 열차 한 대가 옅은 연기를 나부끼며 용솟음 치듯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넷 결혼

 그는 결혼한 다음날에 "오자마자 그렇게 낭비하면 곤란하지"하고 그의 아내에게 잔소리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잔소리라기 보다는 큰어머니가 그의 입을 빌린 잔소리였다. 그의 아내는 그는 물론이요 그의 큰어머니께도 사과를 했다. 그를 위해 사온 노란 수선화 화분을 앞에 둔 채로……

     열다섯 그들

 그들은 평화롭게 생활했다. 커다란 파초 잎 아래에서――그들의 집은 도쿄에서 기차로도 한 시간을 고스란히 써야 하는 어떤 해안가 마을에 있었으니까.

     열여섯 베개

 그는 장미잎 향이 나는 회의주의를 베개 삼아 아나톨 프랑스의 책을 읽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그 베개 속에도 반신반마가 자리한 건 알지 못했다.

     열일곱 나비

 마름 냄새로 가득한 바람 안에서 나비 한 마리가 반짝였다. 그는 아주 잠시 건조한 자신의 입 위에 나비 날개가 닿은 걸 느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그의 입술 위에 문질러진 날개 가루만큼은 몇 년 후에도 아직 반짝이고 있었다.

     열여덟 달

 그는 어느 호텔 계단 도중서 우연히 그녀와 만났다. 그녀의 얼굴은 낮에도 달빛 속에 자리한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를 보내주며(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었다.) 이제까지 몰랐던 쓸쓸함을 느꼈다……

     열아홉 인공 날개

 그는 아나톨 프랑스에서 18세기 철학자로 옮겨갔다. 하지만 루소에겐 다가갈 수 없었다. 그건 어쩌면 그의 일면――정열에 휩싸이기 쉬운 일면이 루소와 가까운 탓일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다른 일면――차가운 이지에 축복 받은 일면에 가까운 '캉디드'의 철학자에 다가갔다.
 스물아홉이 된 그에게 인생은 더 이상 조금도 밝지 않았다. 하지만 볼테르는 그런 그에게 인공 날개를 공급했다.
 그는 이 인공 날개를 펼쳐 간단히 하늘로 올라갔다. 또 동시에 이지의 빛을 받은 인생의 기쁨이나 슬픔은 그의 눈 아래로 가라 앉았다. 그는 허름한 거리 위에 반어나 미소를 떨구며 가로 막을 것 없는 공중을 똑바로 날아 태양까지 올랐다. 마치 그런 인공 날개가 태양빛에 불타 기어코 바다에 빠져 죽은 과거의 그리스인을 잊은 것처럼……

     스물 족쇄

 그들 부부는 그의 양부모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건 그가 어떤 신문사에 입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란 종이에 적힌 한 장의 계약서를 힘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계약서를 돌이켜 보면 신문사는 어떤 의무도 지지 않은 채 그만 의무를 짊어지게 되어 있었다.


     스물하나 미치광이의 딸

 두 대의 인력거가 인기척 끊긴 어두운 시골길을 달렸다. 바다 바람은 그 길이 바다로 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주었다. 뒤에 자리한 인력거에 타고 있던 그는 그러한 랑데부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못 하는 일에 의아해하면서 자신을 여기로 이끈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건 결코 연애가 아니었다. 만약 연애가 아니라면――그는 이 답을 피하기 위해 "어찌 됐든 우리는 대등해"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앞의 인력거에 타고 있는 건 어떤 미치광이의 딸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동생은 질투 탓에 자살하였다.
 "이젠 도리가 없지."
 그는 이제 이 미치광이의 달에게――동물적 본능만 강한 그녀에게 증오심을 느꼈다.
 두 인력거는 그 사이에 물가 냄새가 나는 외각을 지났다. 조재껍질이 붙은 섶나무 울타리 안에는 돌탑이 몇 개나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그러한 돌탑 너머로 희미하게 빛난 바다를 바라보며 불쑥 그녀의 남편을――그녀의 마음을 잡지 못하는 그녀의 남편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스물둘 어떤 화가

 그건 어떤 잡지의 삽화였다. 한 마리 수컷 닭을 묵화로 그린 아주 개성적인 그림이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 화가를 물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이 화가가 그를 찾았다. 그의 일생 중에서도 특히 또렷한 사건이었다. 그는 이 화가 속에서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를 발견했다. 그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알지 못하던 그의 혼을 발견했다.
 어느 쌀쌀한 가을밤, 그는 수수서 그 화가를 떠올렸다. 키가 큰 수수는 거친 잎을 두른채로 부풀어 오른 흙위에 신경질적으로 얇은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건 물론 상처 입기 쉬운 그의 자화상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발견은 그를 우울하게 할뿐이었다.
 "이미 늦었어. 하지만 여차할 때는……"

     스물셋 그녀

 어떤 광장 앞은 어두웠다. 그는 살짝 열을 품은 몸으로 광장을 걸었다. 커다란 빌딩 몇 동인가가 희미하게 은색으로 물든 하늘에 창문 너머의 전등을 빛내고 있다.
 그는 도중에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오는 걸 기다렸다. 오 분 가량 지났을까.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더니 "지쳤다"하고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짝 밝은 광장을 걸었다. 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둘은 자동차를 탄 후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신은 후회 안 해?"하고 물었다. 그는 딱 잘라 "후회 안 해"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나는 후회 안 하는데"하고 말했다. 그 때에도 그녀의 얼굴은 달빛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스물넷 출산

 그는 후스마 쪽에 자리한 채로 하얀 수술복을 입은 산파가 갓난아기를 씻기는 걸 내려다 보았다. 갓난아기는 비누가 눈에 스며들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기를 반복했다. 그뿐 아니라 큰 목소리로 신음하기도 했다. 그는 무언가 쥐에 가까운 갓난아기의 냄새를 느끼며 그런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이 녀석도 무얼 위해 태어난 거지? 이런 사바고로 가득한 세계에――무얼 위해 이 녀석 또한 언젠가 나처럼 아버지가 될 운명을 짊어진 거지?"
 심지어 그건 그의 아내가 처음으로 출산한 남자아이였다.

     스물다섯 스트린드베리

 그는 방 입구에 서서 석류꽃이 핀 달빛 속서 중국인 몇 명이 마작을 치는 걸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안으로 돌아와 낮은 램프 아래서 "치인의 고백"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페이지도 읽지 않은 사이에 어느 틈엔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스트린드베리 또한 정부였던 백작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그와 큰 차이 없는 거짓말을 적었다……

     스물여섯 고대

 색이 벗겨진 부처나 천인, 말이나, 연꽃 등은 거의 그를 압도했다. 그는 그런 걸 올려다 보며 갖은 걸 잊었다. 미치광이의 딸의 손에서 벗어난 자신의 행운마저……

     스물일곱 스파르타식 훈련

 그는 그의 친구와 어떤 뒷골목을 걸었다. 그때 천막을 씌운 인력거 한 대가 똑바로 다가왔다. 심지어 그 위에 올라 타 있는 건 어젯밤에 본 그녀였다. 그녀의 얼굴은 이런 낮에도 달빛 속에 있는 것처럼 빛나는 듯했다. 물론 두 사람은 그의 친구 앞에서 인사 한 번 나누지 않았다.
 "미인이네요."
 그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길 너머에 자리한 봄산을 바라본 채로 조금도 주저치 않고 대답했다.彼
 "네, 꽤나 미인이군요."

     스물여덟 살인

 시골길은 햇빛 속에서 소똥냄새를 풍겼다. 그는 땀을 닦으며 원만한 언덕길을 올랐다. 길 양옆에서 다 자란 보리가 향기로운 냄새를 내뿜고 있다.
 "죽여라, 죽여……"
 그는 어느 틈엔가 입안에서 그런 말을 반복하게 되었다. 누구를?――그건 그도 알지 못했다. 그는 참으로 비굴해 보이는 정수리가 빈 남자를 떠올렸다.
 그러자 노란 보리 너머서 로마 가톨릭교의 가람이 어느 틈엔가 둥근 지붕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물아홉 형태

 그건 철로 된 술병이었다. 그는 이 가는 실이 달린 술병에게서 어느 틈엔가 '형태'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있었다.

     서른 비

 그는 커다란 침대 위에서 그녀와 여러 이야기를 했다. 침실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주란 꽃은 빗속에서 어느 틈엔가 썩어 버린 듯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달빛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 대화하는데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배로 누운 채로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녀와 함께 산지도 칠 년째가 된 걸 떠올렸다.
 "나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 대답은 스스로를 바라봐 온 스스로에게도 의외였다.
 "나는 아직도 사랑하고 있지."

     서른하나 대지진

 그건 어딘가 뜨거운 살구향에 가까웠다. 그는 불탄 거리를 걸으며 희미하게 이 냄새를 느꼈고 뜨거운 하늘에 썩어버린 시취도 의외로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시체가 쌓인 연못 앞에 쌓인 연못 앞에 서보니 "산비"라는 말도 결코 감각적 과장이 아닌 걸 발견했다. 특히 그를 움직인 건 열두어 살 먹은 아이의 시체였다. 그는 그 시체를 바라보며 무언가 부러움에 가까운 걸 느꼈다. '신들에게 사랑 받는 자는 요절한다'――그런 말도 떠올렸다. 그의 누나나 이복동생은 집이 불타버렸다. 하지만 그의 매형은 외증죄로 집행 유예중이었다……
 "전부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는 불탄 흔적 앞에 가만히 선 채로 뼈저리게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른둘 싸움

 그는 그의 이복동생과 서로를 붙들어가며 싸웠다. 그의 동생은 그 때문에 압박을 받는 게 분명했다. 동시에 그 또한 그의 동생 때문에 자유를 잃은 게 분명했다. 그의 친척은 그의 동생에게 "그를 보고 배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그에게 족쇄를 채우는 꼴이나 다름 없었다. 서로 뒤엉키던 두 사람은 기어코 복도 너머로 굴러 갔다. 복도 너머의 정원에는 백일홍 한 송이가――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비를 기다리는 하늘 아래에 붉게 빛나는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서른셋 영웅

 그는 언젠가 볼테르의 집 창문에서 높은 산을 올려다 보고 있다. 빙하가 걸친 산 위에는 흰머리독수리의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키가 작은 러시아인 한 사람이 집요하게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볼테르의 집도 밤이 된 후, 그는 밝은 램프 아래서 이러한 경향시를 쓰고는 했다. 그 산길을 오른 러시아인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누구보다도 십계를 지킨 너는
누구보다도 십계를 깬 너다.

누구보다도 민중을 사랑한 너는
누구보다도 민중을 경멸한 너다.

누구보다도 이상으로 불탄 너는
누구보다도 현실을 알던 너다.

너는 우리 동양이 낳은
풀초 냄새 나는 전기 기관차다―― 


     서른넷 색채

 서른 살의 그는 어느 틈엔가 한 공터를 사랑했다. 그곳에는 단지 이끼낀 벽돌이나 기와 파편이 구르고 있을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세잔느의 풍경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문득 칠팔 년 전 자신의 열정을 떠올렸다. 동시에 또 그가 칠팔 년 전에는 색채를 알지 못한 걸 발견했다.

     서른다섯 광대 인형

 그는 언제 죽어도 억울하지 않도록 열심히 생활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양부모님이나 큰어머니께 어쩌지 못하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사실은 그의 생활에 명암의 양면을 만들어냈다. 그는 어떤 옷가게서 광대 인형이 서있는 걸 보고 자신이 얼마나 광대 인형과 가까운지 생각해봤다. 하지만 의식 밖의 그는――말하자면 두 번째 그는 그런 심정을 어떤 단편 속에 담았다.

     서른여섯 권태

 그는 어떤 대학생과 참억새밭 안을 걸었다.
 "너희는 아직 생활욕이 활발하겠지?"
 "그렇죠. 선생님도……"
 "나는 아냐. 제작욕은 가지고 있지만."
 그건 진심이었다. 실제로 그는 어느 틈엔가 생활에 관심을 잃었다.
 "제작욕 또한 생활욕이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참억새밭은 어느 틈엔가 붉은 이삭 위에 분화산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이 분화산서 무언가 부러움에 가까운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도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서른일곱 뛰어난 사람

그는 그보다 재능이 뛰어나며 싸울 수 있는 여자와 만났다. 하지만 '뛰어난 사람' 같은 서정시를 만들어 이 위기를 간신히 벗어났다. 그건 마치 나무뿌리에 얼어 붙은 눈부신 눈처럼 안타까운 시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삿갓도
길에 떨어지지는 않는구나
내 이름을 어찌 아쉬어하랴
아쉬워 해야 할 건 네 이름일 텐데.


     서른여덟 보복

 나무순에 둘러싸인 어떤 호텔의 발코니였다. 그는 거기서 그림을 그리며 한 소년을 놀게 하였다. 칠 년 전에 절연한 미치광이의 딸의 외동 아들과.
 미치광이의 딸은 담배에 불을 붙여 그들이 노는 걸 바라보았다. 그는 무거운 심정으로 기차나 비행기를 그렸다. 소년은 다행히 그의 아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아저씨'라 부르는 건 그에겐 무엇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소년이 어딘가로 간 후, 미치광이의 딸은 담배를 피우며 아양 떨듯이 그에게 말했다.
 "저 아이, 당신과 닮은 거 같지 않아?"
 "닮지 않았어. 애초에……"
 "태교란 것도 있으니까."
 그는 말없이 눈을 돌렸다. 하지만 마음 속 밑바닥에는 그런 그녀를 목졸라 죽이고 싶다는 잔혹한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서른아홉 거울

 그는 어떤 카페 구석서 그의 친구와 이야기했다. 그의 친구는 구운 사과를 먹으며 얼마간의 추위를 이야기했다. 그는 그런 대화 속에서 불쑥 모순을 발견해냈다.
 "너 아직 독신이었구나."
 "아니, 다음 달에 결혼해."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카페 벽에 걸린 거울은 무수한 그를 비추고 있었다. 차갑게, 무언가를 겁박하듯이……

     마흔 문답

 너는 왜 현대의 사회 제도를 공격하는가?
 자본주의가 낳은 악을 보고 있기에.
 악을? 나는 네가 선악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럼 네 생활은 어떠냐.
 ――그는 천사와 그런 문답을 했다. 물론 누구에게도 부끄러울 게 없는 실크햇을 쓴 천사와……

     마은하나 병

 그는 불면증에 사로잡혔다. 그뿐 아니라 체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몇몇 의사가 그의 병을 제각기 두세 개로 진단했다――위산과다, 위무력증, 건성늑막염, 신경쇄약, 만성결핵염, 뇌피로……
 하지만 그는 병의 근간을 알고 있었다. 그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그들을 두려워하는 심정이었다. 그들을――그를 경멸한 사회를!
 어느 눈으로 어두웠던 오후. 그는 어떤 카페 구석에서 불이 붙은 담배를 문 채로 측음기서 흘러 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건 그의 심정에 묘하게 스며드는 음악이었다. 그는 음악이 끝나는 걸 기다려 측음기 앞으로 걸어가 레코드에 붙은 상표를 보았다.
 Magic Flute――Mozart
 그는 곧장 이해했다. 십계를 깬 모짜르트는 역시 괴로워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설마 그처럼……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조용히 그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마은하나 신들의 웃음소리

 서른다섯 된 그는 봄볕이 드는 소나무숲을 걸었다. 이삼 년 전에 자신이 쓴 '신은 불행히도 우리처럼 자살하지 못한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마흔셋 밤

 밤이 물러난다. 거친 바다는 여명 속에서 끊임 없이 물거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그러한 하늘 아래서 그의 아내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그건 그들에겐 기쁨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괴로움이기도 했다. 세 아이는 그들과 함께 물가의 번개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는 한 아이를 안고 눈물을 참고 있는 듯했다.
 "저기 배가 보이지?"
 "네."
 "노 두 개가 부러진 배가."

     마흔넷 죽음

 그는 혼자 자고 있는 틈에 창문격자에 오비를 걸어 목을 매려 했다. 하지만 오비에 목을 넣자니 조금 죽음이 두려워졌다. 그건 꼭 죽는 찰나의 괴로움을 두려워한 건 아니었다. 그는 다음으로 회중시계를 들고 시험삼아 목을 죄어 죽는 걸 꾀해보았다. 그러자 조금 괴로운 후 그는 멍해지기 시작했다. 한 번 거기를 지나면 죽음에 이를 게 분명했다. 그는 시계침을 확인해 자신이 괴로워한 게 일 분 이십몇 초였던 걸 확인했다. 창문격자 바깥은 어두웠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거친 닭 울음소리도 들렸다.

     마흔다섯 Divan

 Divan은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에 새로운 힘을 주려 했다. 그건 그가 알지 못한 '동양적 괴테'였다. 그는 갖은 선악의 피안에 유유히 서있는 괴테를 보고 절망에 가까운 부러움을 느겼다. 시인 괴테는 그의 눈에는 시인 그리스도보다도 위대했다. 이 시인의 마음에는 아크로폴리스나 골고다 외에 아라비아의 장미마저 꽃피워 있었다. 만약 이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갈 약간의 힘이 남아 있었다면――그는 Divan안을 다 읽고 무서울 정도의 감동의 정적을 느낀 후, 생활적 환관으로 태어난 자신을 뼈저리게 경멸할 수박에 없었다.


     마흔여섯 거짓

 그의 누나의 남편의 자살은 그에게도 약간의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제 누나 일가까지 돌봐야 했다. 그에게 자신의 장래란 저녁처럼 어두컴컴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의 정신적 파산에 냉소 가까운 걸 느끼며(그는 자신의 악덕이나 약점을 하나도 남김 없이 알고 있었다) 여전히 여러 책을 읽었다. 하지만 루소의 참회록마저 영웅적 거짓으로 가득차 있었다. 특히 '신생'에 이르러서는――그는 '신생'의 주인공만큼 늙은 잔재주로 가득한 위선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수아 비용만큼은 그의 마음에 스며 들었다. 그는 몇 편인가의 시 속에서 '아름다운 목장'을 발견했다.
 교수형을 기다리는 비용의 모습은 그의 꿈속에도 나타나고는 했다. 그는 몇 번인가 비용처럼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환경이나 육체적 에너지는 그런 걸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쇄약해져 갔다. 마치 과거에 스위프트가 본 가지 끝자락처럼 마르기 시작한 나무처럼……

     마흔일곱 불장난

 그녀는 눈부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아침햇살 속 얇은 얼음만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연애는 느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죽고 싶어 한다면서요?"
 "네――아뇨, 죽고 싶다기 보단 사는 거에 질려 버린 거죠."
 그들은 이런 문답을 하고는 함께 죽기로 약속했다.
 "플라토닉 수어사이드네요."
 "더블 플라토닉 수어사이드죠."
 그는 자신이 침착해진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마흔여덟 죽음

 그는 그녀와 죽지 않았다. 단지 아직도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것에 모종의 만족을 느겼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이따금 그와 이야기했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청산가리 병 하나를 건네며 "이게 있으면 서로 든든할 테죠"하고 말하고는 했다.
 그건 실제로 그의 마음을 튼튼하게 만든 게 분명했다. 그는 홀로 등의자에 앉아 모밀잣밤나무의 어린잎을 바라보며 이따금 죽음이 그에게 주는 평화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흔아홉 박제 백조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자서전을 써보려 했다. 하지만 의외로 쉽지 않았다. 그건 스스로의 자존심이나 회의주의나 이해타산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을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또 한 면으로는 '누구나 껍질을 벗겨보면 매한가지다'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와 진실과'하는 책 이름은 그에게는 갖은 자서전의 이름처럼도 느껴졌다. 그뿐 아니라 문에상의 작품에 모두가 움직이는 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작품이 호소할 수 있는 건 그와 가까운 평생을 보낸 그와 가까운 사람들 외에는 없다――그런 생각도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때문에 짧게 자신만의 '시와 진실과'를 써보려 했다.
 그는 '어떤 바보의 일생'을 다 쓴 후, 우연히 어떤 골동품점서 박제 백조를 발견했다. 백조는 목을 든 채 서있긴 했지만 누렇게 때낀 날개는 벌레에게 좀 먹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떠올리며 눈물이나 냉소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자신 앞에 놓인 건 단지 발광이나 자살뿐이었다. 그는 저녁의 길거리를 홀로 걸으며 천천히 자신을 죽이러 오는 운명을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쉰 포로

 그의 친구 한 명이 발광했다. 그는 이 친구에게 항상 친근함을 느꼈다. 그건 그가 이 친구의 고독을――경쾌한 가면 아래에 놓인 고독을 남들보다 더 잘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친구가 발광한 후, 두세 번 이 친구를 찾았다.
 "너나 나나 악귀에 붙들린 거겠지. 세기말의 악귀에 말야."
 이 친구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로부터 이삼 일이 지난 후에는 어떤 온천 여관으로 향하던 도중 장미꽃마저 먹었다고 한다. 그는 이 친구가 입원한 후, 언젠가 이 친구에게 선물한 테라코타의 반신상을 떠올렸다. 그건 이 친구가 사랑한 '검찰관' 작가의 반신상였다. 그는 고골 또한 광사한 걸 떠올리고 무언가 그들을 지배하는 힘 같은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완전히 지쳐버린 끝에 문득 라디게가 임종 때 남긴 말을 읽고 다시 한 번 신들의 웃음소리를 느꼈다. 그건 '신의 병졸이 나를 잡으러 온다'는 말이었다. 그는 그의 미신이나 그의 감상주의와 싸우려 했다. 하지만 어떠한 싸움도 육체적으로 불가능했다. '세기말의 악귀'는 실제로 그를 괴롭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신을 힘으로 삼은 중세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신을 믿는 건――신의 사랑을 믿는 건 도무지 불가능했다. 그 콕토마저 믿은 신을!

     쉰하나 패배

 그는 펜을 쥔 손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는 0.8ml의 베로날을 써 깨어난 후에는 단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또렷한 건 겨우 반 시간이나 한 시간이었다. 그는 단지 어두텀텀한 속에서 하루를 사는 생활을 하였다. 말하자면 칼날이 나간 얇은 검을 지팡이로 삼으며.

 

(쇼와 2년 6월, 유고)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