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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천한 자의 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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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 아래에 새로운 게 없다는 건 옛사람이 설파한 말이다. 하지만 꼭 태양 아래에만 새로운 게 없는 건 아니다. 
 천문학자의 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 자리가 내뿜는 빛은 우리 지구에 도달하는데 3만 6천 년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헤라클래스 자리라고 영원히 빛날 수는 없다. 언젠가 한 번은 식은 재처럼 아름다운 빛을 잃고 만다. 그뿐 아니라 죽음은 어디에 가도 항상 삶을 낳고 있다. 빛을 잃은 헤라클레스 자리도 끝없는 하늘을 떠도는 사이에 형편 좋은 기회를 얻으면 한 무리의 별구름으로 변화하리라. 그러면 또 새로운 별은 계속하여 그곳에 태어나는 셈이다.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태양도 한 점의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의 지구는 더하다. 하지만 먼 우주의 끝, 은하의 옆에서 일어나는 일도 사실은 이 진흙더미 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 생사는 운동의 법칙 아래에서 끝 없이 순환하고 있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천상에 산재한 무수한 별에도 조금의 동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니, 깜빡이는 별의 빛 또한 우리에게 같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이 점에서도 시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노래했다.

 모래만 같은 밤별 속 우리 향해 빛난 별 하나

 하지만 별 또한 우리처럼 윤회한다는 건――지루할 일은 없다는 뜻이리라.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굽었다면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명성 높은 파스칼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연인이란 건 꼭 실상만을 보지는 않는다. 아니, 우리의 자기 기만은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가장 완벽히 기능한다.
 안토니 또한 이런 사례에서 벗어나지 못 할 테니,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굽었다면 어떻게든 보지 않으려 했으리라. 또 봐야만 할 경우에도 그 단점을 보충할만한 다른 장점을 찾으리라. 천하의 만인에게 사랑받은 우리의 연인이다. 그만큼 무수한 장점을 가진 여성이 또 있으랴. 안토니도 분명 우리와 마찬가지로 클레오파트라의 눈이나 입술에서 남아 돌 정도의 대가를 찾아내리라. 하물며 "그녀의 마음"이란!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은 고금동서를 구분 않고 질릴 정도로 멋진 마음의 소유주였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복장이나 그녀의 재산, 혹은 그녀의 사회적 지위――그마저도 장점이 될 수밖에 없다.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이전에 어떤 명사의 사랑을 받았단 사실 내지 주위의 평가마저 장점 중 하나로 들어갈지 모른다. 심지어 그 클레오파트라는 화려함과 신비로 충만한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이지 않은가? 형향이 올라오는 가운데 왕관의 진주를 빛내며 연꽃을 가지고 논다면, 조금 굽어진 코 따위가 누구의 눈에 들어가랴. 안토니의 눈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우리의 자기 기만이 꼭 사랑에만 국한되지는 않다. 우리는 약간의 차이만 빼면 대부분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여러 실상을 덧칠하고 있다. 이를테면 치과의 간판마저도, 그게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건 간판의 존재 자체라기보다도 간판이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 나아가서는 우리의 치통이지 않은가? 물론 우리의 치통 따위는 세계의 역사와 무관하리라. 하지만 이런 자기 기만은 민심을 알고 싶어 하는 정치가에게도, 적의 상황을 알고 싶어 하는 군인에게도, 혹은 재산 상황을 알고 싶어 하는 사업가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나는 이런 걸 정정하는 이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또 동시에 만인을 통치하는 "우연"의 존재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갖은 열정은 이성의 존재를 잊기 쉽다. "우연"은 말하자면 신의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기 기만은 세계의 역사를 좌우하는 가장 영원한 힘일지 모른다.
 요컨대 이천 년 가량의 역사는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의존하지 않는다. 되려 지상에 만연한 우리의 우매함에 의존하고 있다. 웃어줘야 할――하지만 장엄한 우리의 우매함에 의존하고 있다.

   수양

 도덕은 편의의 이명이다. '좌측통행'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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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이 주는 은혜는 시간과 노력의 절약이다. 도덕이 주는 손해는 완전한 양심의 마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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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작정 도덕에 반대하는 건 경제관념이 희박하단 뜻이다. 무작정 도덕에 굴하는 건 겁쟁이거나 나태하단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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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지배하는 도덕은 자본주의에 침식된 봉건 시대의 도덕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손해 이외에 어떤 은혜도 받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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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자는 도덕을 유린하리라. 약자는 또 도덕에게 애무 받으리라. 도덕의 박해를 받는 건 항상 강약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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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이란 언제나 낡은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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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은 우리의 콧수염처럼 나이에 따라 생기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양심을 얻는 데에도 약간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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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 구 할 가량은 평생 양심을 지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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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비극은 어리기에, 혹은 아직 훈련이 부족하기에, 아직 양심을 얻기 전에, 파렴치한의 비난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희극은 어리기에, 혹은 아직 훈련이 부족하기에, 파렴치한의 비난을 받은 후에 겨우 양심을 갖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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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이란 엄숙한 취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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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은 도덕을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덕은 이제까지 양심의 양자도 만들지 않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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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도 갖은 취미처럼 병적인 애호자를 지니고 있다. 그런 애호자는 십중팔구, 총명한 귀족이나 부호이다.

   호오

 나는 오래된 술을 좋아하듯이 오래된 쾌락설을 사랑한다.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건 선도 악도 아니다. 단지 우리의 호오이다. 혹은 우리의 쾌감과 불쾌감이다. 나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럼 왜 우리는 왜 물에 빠진 아이를 보면 극한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물에 뛰어드는가? 구하는 게 유쾌하기 때문이다. 그럼 물에 들어가는 불쾌감을 피하고 유아를 구하는 쾌감을 취하는 건 어떤 척도를 따르는가? 보다 큰 쾌감을 고르는 것이다. 하지만 육체적 쾌감이나 불쾌감과 정신적 쾌감 및 불쾌감은 동일한 척도를 따르지 않을 터이다. 아니, 이 두 개의 쾌감과 불쾌감이 온전히 뒤섞이지 않는 건 아니다. 되려 함수와 담수처럼 하나로 합쳐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정신적 교양을 받지 않는 교토와 오사카 신사는 자라 국물을 마신 후, 장어와 채소를 먹는 것마저 더할 나위 없는 쾌락으로 치지 않는가? 또 물이나 추위에도 육체적 향락이 존재하는 건 한겨울 수영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 말이 믿기지 않는 사람은 마조히즘을 생각하면 좋다. 그 원망스러운 마조히즘은 이런 육체적 쾌감과 불쾌감의 외견 상 도착에 상습적 경향을 더한 것이다. 내가 믿기에, 어쩌면 기둥 위 수행을 기뻐하고, 또 불속의 순교를 사랑한 기독교 성인들의 대다수는 마조히즘에 걸려 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의 행위를 정하는 건 고대 그리스인이 말한 것처럼 호오 이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생의 연못에서 최대의 맛을 떠내야만 한다. '위선자처럼 슬픈 표정을 짓지 말지어다.'[각주:1] 예수마저 이미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현명한 사람이란 필시 가시밭길이라도 장미꽃을 피우기 마련이다.

   미천한 자의 기도

 저는 이 멋들어진 옷을 입고 이 뒤집어진 농담을 바치며 이 태평을 즐길 수 있다면 부족할 게 없는 미천한 자입니다. 부디 제 바람을 이뤄주시지요.
 부디 한 톨 쌀도 남지 않을 만큼 가난하게 해주시지요. 또 곰발바닥마저 질릴 정도로 부유하게도 해주시지요.
 부디 뽕나무 잎을 따는 농부마저 싫어하게 해주시지요. 또 후궁의 미인마저 사랑하게 해주시지요.
 부디 콩과 보리마저 말하지 못 할 정도로 어리석게 해주시지요. 부디 구름마저 읽을 정도로 총명하게 해주시지요.
 특히 부디 용맹한 영웅으로 해주시지요. 저는 실제로 이따금 어려운 산봉우리의 정점을 오르고, 넘기 어려운 바다의 파도를 건너는――말하자면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런 꿈을 볼 때만큼 두려울 때가 없습니다. 저는 용과 싸우듯이 이 꿈과 싸우는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부디 영웅이 되지 않도록――영웅의 뜻이 생기지 않도록 힘없는 저를 지켜주시지요.
 저는 이 봄술에 취해 이 금루의 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기뻐하면 부족할 게 없는 미천한 자입니다.

   신비주의

 신비주의는 문명 때문에 쇠퇴하는 게 아니다. 되려 문명은 신비주의에 장족의 진보를 이뤄내게 했다.
 옛사람은 우리 인간의 선조가 아담이라 믿었다. 그 말은 즉 창세기를 믿었다는 말이다. 현대인은 이미 중학생마저 원숭이임을 믿고 있다. 그 말은 즉 다윈의 저서를 믿는다는 말이다. 즉 서적을 믿는 건 옛사람이나 현대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런 데다가 옛사람은 적어도 창세기를 훑어보았다. 현대인은 소수 전문가 말고는 다윈의 저서도 읽지 않는 주제에 당연하다는 양 그 설을 믿고 있다. 원숭이를 선조로 삼는 건 여호와의 숨결이 닿은 흙――아담을 믿는 것보다도 광채를 품은 신념이 아니다. 심지어 현대인은 모두 그런 신념에 안주하고 있다.
 이건 진화론만이 아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마저 정말로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이다. 대다수는 언젠가 배운 것처럼 둥글다고 마냥 믿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 둥그냐고 묻는다면 위로는 총리대신부터 아래로는 월급쟁이까지 제대로 설명 못 할 게 분명하다.
 또 예를 하나 들자면 현대인은 옛사람과 달리 누구도 유령이 실재함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유령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이따금 전해진다. 그럼 왜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는가? 유령을 본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미신에 사로잡혔는가? 유령 따위를 보기 때문이다. 이런 현대인의 논법은 물론 소위 순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더욱 깊이 들어간 문제는 완전히 신념 위에 성립해 있다. 우리는 이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이성을 초월한 무언가에만 귀를 기울인다. 무언가에――나는 '무언가'라 말하기 이전에 걸맞은 이름마저 발견할 수 없었다. 만약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장미나 생선, 초 같은 상징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우리의 모자라도 좋다. 우리는 날개 깃털 달린 모자를 쓰지 않고 소프트햇이나 중절을 쓰듯이, 선조가 원숭이란 걸 믿고 유령이 실존하지 않는 걸 믿고 지구가 둥근 걸 믿는다. 만약 거짓말이다 싶은 사람은 일본이 아인슈타인 박사 혹은 그 상대성이론을 환영한 일을 생각하면 된다. 그건 신비주의의 축제다. 이해할 수 없는 장엄한 의식이다. 무얼 위해 열광했는지는 '카이조샤'의 야마모토 씨마저 알 수 없다.
 그럼 위대한 신비주의자란 스베덴보리나 뵈메가 아니다. 실은 우리 문명의 백성이다. 동시에 우리의 신념도 장식용 창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신념을 지배하는 건 항상 포착하기 어려운 유행이다. 혹은 신의와 닮은 호오이다. 실제로 서시나 용양군의 선조 또한 역시 원숭이였음을 생각하면 조금의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자유의지와 숙명과

 숙명을 믿는다면 죄악이란 게 존재하지 않을 터이니 처벌의 의미도 사라지리라. 그러면 죄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관대해질 게 분명하다. 또 동시에 자유의지를 믿는다면 책임이란 개념이 생길 터이니 양심의 마비를 면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우리 스스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엄숙해질 게 분명하다. 그럼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가?
 나는 엄연히 말해두고 싶다. 반은 자유의지를 믿고 반은 숙명을 믿어야 한다. 혹은 반은 자유의지를 의심하고 반은 숙명을 의심해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우리의 어깨에 내려진 무거운 숙명에 따라 우리의 아내를 들이지 않았나? 또 동시에 우리는 우리에게 머리 위에 내려진 축복받은 자유의지를 따라 반드시 아내의 주문대로 하오리나 오비를 사주지 않는가?
 자유의지와 숙명만이 아니다. 신과 악마, 아름다움과 추함, 용맹함과, 두려움, 이성과 신앙――그 외에도 갖은 천칭의 양면에는 이러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옛사람은 이러한 태도를 중용이라 불렀다. 중용이란 영어의 good sense이다. 내가 믿기에 굿 센스를 가지지 않는 한 어떠한 행복도 얻을 수 없다. 만약 그럼에도 얻게 된다면 더운 여름에 석탄을 붓거나 추운 겨울에 부채질하는 오기의 행복뿐이러라.

   어린아이

 군인은 어린아이에 가깝다. 영웅 같은 행동을 기뻐하고, 소위 영광을 좋아하는 건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기계적 훈련을 존귀하게 여기고 동물적 용기를 중시하는 것 또한 초등학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살육에 감흥을 느끼지 않는 것은 더더욱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어린아이와 닮은 건 나팔이나 군가가 고무하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묻지 않고 태연히 적과 마주하는 점이다.
 때문에 군인이 자랑스러워하는 건 반드시 어린아이의 장난감과 닮아 있다. 히오도시 갑옷이나 투구뿔 투구 같은 건 성인의 취미에 해당하지 않는다. 훈장도――나는 실제로 의문이다. 왜 군인은 술에 취하지 않았음에도 훈장을 걸고 걸을 수 있는 거지?

   무기

 정의는 무기와 닮아 있다. 무기는 돈만 내면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살 수 있으리라. 정의도 명분만 갖추면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살 수 있다. 예로부터 "정의의 적"이란 이름은 포탄처럼 던져졌다. 하지만 잘 수사修辭[각주:2]하지 않으면 어느 쪽이 진짜 "정의의 적"인지 잘 판별이 가지 않는다.

 일본인 노동자는 단순히 일본인으로 태어났기에 파나마에서 퇴거를 명 받았다. 이건 정의에 반하는 일이다. 미국은 신문지가 말하는 것처럼 "정의의 적"이라 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인 노동자 또한 단순히 중국인으로 태어났기에 센쥬에서 퇴거를 명 받았다. 이 또한 정의에 반하는 일이다. 일본인은 신문지가 말하는 것처럼――아니, 일본은 이천년 이래 항상 "정의의 편"이다. 정의는 아직 일본의 이해와 한 번도 모순되지 않은 모양이다.
 무기 자체는 두려워할 게 없다. 무서워해야 할 건 무인의 기술이다. 정의 자체도 무서워할 건 없다. 무서워해야 할 건 선동가의 웅변이다. 측천무후는 사람을 돌보지 않고 냉철히 정의를 유린했다. 하지만 이경업의 난을 겪고 낙빈왕의 격문을 읽을 때에는 색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일부토말건 육척고안재"[각주:3]란 두 구는 천성의 데마고그를 지니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명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를 돌이켜 볼 때마다 유슈칸을 떠올릴 수박에 없다. 과거의 복도에는 어둠 속에 정의가 진열되어 있다. 청룡도와 닮은 건 유교가 가르친 정의이리라. 기사의 창과 닮은 건 기독교가 가르치는 정의이리라. 이곳에 두터운 곤봉이 있다. 이건 사회주의자의 정의이리라. 이곳에 밧줄이 달린 장검이 있다. 이건 국가주의자의 정의이리라. 나는 그런 무기를 보며 많은 싸움을 상상하며 절로 가슴이 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무기 하나를 쥐고 싶다 생각한 기억이 없다. 

   현왕

 17세기 프랑스의 이야기다. 어느 날 Duc de Bourgogne이 Abbe Choisy에게 이렇게 물었다. 샤를 6세는 미치광이였다. 그 뜻을 완곡히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라면 단지 이렇게 말합니다. 샤를 6세는 미치광이였다고." 아베는 이 답을 평생의 모험 중 하나로 다루며 훗날까지 자랑했다고 한다. 
 17세기 프랑스는 이런 이야기가 남아 있을 정도로 현왕의 정신이 풍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20세기 일본도 현왕의 정신으로 풍부한 건 당시의 프랑스에 밀리지 않을 듯하다. 정말로――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기 짝이 없다.

   창작

 예술가는 항상 의식적으로 그의 작품을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작품 자체를 보면 작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一반쯤 예술가의 의식을 초월한 신비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一반? 혹은 태반이라 해도 좋다.
 우리는 묘하게 남이 물을 때보다 스스로 말할 때에 더 많은 걸 이야기하게 된다. 우리의 혼은 저절로 작품을 드러내는 걸 비할 수 없다. 일도일례한 옛사람의 마음가짐이란 이 무의식의 경지를 두려워 했음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창작은 항상 모험이다. 결국엔 인력을 다 한 후 천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

少時学語苦難円 唯道工夫半未全

소시학어고난문 유도공부반말전

(젊을 적엔 시가 잘 써지지 않는 게 공부가 부족한 탓인 줄 알았다)
到老始知非力取 三分人事七分天

도노시지비력취 삼분인사칠분천 

(나이를 먹고 나서야 창작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안 되는 걸 알았다. 사람이 3이요 하늘이 7이다.)

 조익의 "논지" 속 칠절은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리라. 예술은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 우리도 돈을 원하지 않았다면, 혹은 명성을 바라지 않았다면, 마지막으로 거의 병적인 창작열에 괴로워하지 않았다면 이런 꺼림칙한 예술하고 싸울 용기는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

   감상

 예술의 감상은 예술가 본인과 감상가의 협력이다. 말하자면 감상가는 하나의 작품을 과제로 스스로의 창작을 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시대에나 명성을 잃지 않는 작품은 반드시 여러 감상을 가능케하는 특색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감상을 가능케 한다는 말은 아나톨 프랑스처럼 어딘가 애매하게 만들어져 어떤 해석을 붙여도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되려 루산의 봉우리처럼 여러 위치에서 감상할 수 있는 다면성을 갖추고 있단 뜻이다.

   고전

 고전 작가의 행복한 점은 바로 그들이 죽었다는 점이다.

   또

 우리의――혹은 제군의 행복한 점 또한 그들이 죽었다는 점이다.

   환멸한 예술가

 어떤 한 무리의 예술가는 환멸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들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양심이란 걸 믿지 않는다. 단지 과거의 고행자처럼 무하유의 사막을 집으로 삼고 있다. 그 점은 확실히 유감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름다운 신기루는 사막의 하늘에만 만들어진다. 갖은 세상 일에 환멸한 그들 또한 대부분의 예술에는 환멸하지 않는다. 아니, 예술이라고만 하면 일반인은 알지 못 하는 금색의 꿈이 공중에 출현하는 것이다. 그들 또한 의외로 행복한 순간을 지니는 법이다.


   고백

 스스로를 완벽히 고백하는 건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다. 또 동시에 스스로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
 루소는 고백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적나라한 루소 본인은 참회록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메리메는 고백을 싫어한 사람이다. 하지만 '콜롱바'는 간단해 보이는 말 뒤편에서 자신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소위 고백 문학과 다른 문학의 경계선은 거의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인생
    ――이시쿠로 테이이치 군에게――


 만약 수영을 배우지 못 한 자에게 헤엄치라 명하면 모두가 불가능하다 생각하리라. 또 만약 런닝을 배우지 않는 사람에게 뛰라고 명령하면 역시 부조리하다 생각할 테지. 하지만 우리는 날 적부터 이런 바보 같은 명령을 짊어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어머니의 배 안에 있을 때 인생의 길을 배웠던가? 심지어 배 안을 벗어나자마자 무작정 커다란 경기장과 닮은 인생 안에 던져졌다. 물론 수영을 배우지 않은 자는 만족스레 헤엄칠 리도 없다. 마찬가지로 런닝을 배우지 못 한 자는 대부분 남들보다 뒤처지리라. 그러면 우리 또한 상처 하나 없이 인생의 경기장을 나올 수는 없을 터이다.
 세상 사람들은 입을 모을지도 모른다. "앞사람의 발자취를 보라. 그것이 너희를 가르쳐준다"하고. 하지만 백 명의 수영선수와 천 명의 런너를 본다 한들 곧장 수영을 배우거나 런닝에 익숙해질 리도 없다. 그뿐일까. 그 수영 선수는 모두 물을 마셨으며, 또 런너는 누구 하나 할 거 없이 경기장의 흙으로 뒤덮여 있다. 보라. 세계의 명선수마저 대부분은 의기양양한 미소 뒤에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고 있지 않은가?
 인생인 광인이 주최한 올림픽과 닮아 있다. 우리는 인생과 싸우며 인생과 싸우는 걸 배워야 한다. 이런 바보 같은 게임에 분노를 금하지 못 하는 자는 어서 경기장 밖으로 떠나면 된다. 자살도 그 편법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인생의 경기장에 머무르고 싶은 사람은 만신창이가 되는 걸 두려워 않고 싸워야만 한다.


   또

 인생은 성냥 한 상자와 닮아 있다. 중대히 다루는 건 바보 같다. 중대히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또

 인생은 빠진 페이지가 많은 서적과 닮아 있다.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일부를 이루고 있다.

   어떤 자경단원의 말

 자, 자경 부서로 가자. 오늘 밤은 별도 나뭇가지 사이로 은은한 빛을 내뿜는군. 바람도 선선히 부는 모양이야. 자 이 등나무로 된 긴 의자에 누워 이 마닐라 하나에 불을 붙이고 밤임에도 마음 편히 경계하는 거야. 만약 목이 마르면 수통 속 위스키를 기울이면 돼. 다행히 아직 주머니에는 초콜릿바도 남아 있지.
 들어 봐, 높은 나뭇가지에 밤새가 술렁이고 있잖아. 새는 이번 대지진에도 곤란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의식주 편의를 잃어 갖은 고통을 맛보고 있어. 아니, 의식주뿐일까? 한 잔의 시트론도 마시지 못 해 적잖이 불편해하고 있지. 인간이란 두 다리 동물은 참 한심한 동물 같지 않아? 우리는 운명을 잃는 순간 그야말로 풍전등화처럼 별 볼 일 없는 목숨을 지켜야 해. 보라고. 새는 벌써 조용히 잠들어 있다. 깃털 이불이나 베개도 알지 못 하는 새는!
 새는 이미 조용히 잠들어 있어. 꿈도 우리보다 평안하겠지. 새는 지금만을 살고 있어. 하지만 우리 인간은 과거나 미래에도 살아야만 하지. 그 말은 회환이나 우울함의 고통도 맛봐야 한다는 거야. 특히 이번 대지진은 우리의 미래 위에 얼마나 쓸쓸한 암흑을 던졌을까. 도쿄를 불태운 우리는 오늘의 굶주림에 괴로워하면서 내일의 주림에도 괴로워하고 있어. 새는 다행히 이 고통을 알지 못 하지. 아니, 새에만 국한된 일일까. 삼세의 고통을 아는 건 우리 인간뿐이야.
 코이즈미 야쿠모는 인간보다도 나비가 되고 싶다 했다더군. 나비――라 하니 말인데 저 개미를 봐봐. 만약 행복하다는 게 고통이 적은 것만을 말한다면 개미도 우리보다는 행복하겠지. 하지만 우리 인간은 개미가 알지 못 하는 쾌락도 알고 있어. 개미는 파산이나 실연 때문에 자살하는 병은 없을지 몰라.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즐거운 희망은 가지고 있을까?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달빛이 희미하게 드는 낙양의 옛수도에 이태백의 시 한 줄 알지 못 하는 무수한 개미 무리를 안타까워했음을!
 하지만 쇼펜하우어는――뭐 철학 이야기는 하지 말까. 아무튼 우리는 저 개미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지. 만약 그것만이라도 확실하다면 인간 같은 모든 감정은 한 층 더 소중히 해야 해. 자연은 단지 냉철히 우리의 고통을 바라보지.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해야 해. 하물며 살육을 기뻐하는 건――물론 상대를 목 졸라 죽이는 건 논의에서 이기는 것보다 간단하긴 하지.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해야 해. 쇼펜하우어의 염세관이 우리에게 준 교훈도 그런 게 아니겠어?
 벌써 열두 시가 넘은 모양이군. 별도 여전히 머리 위에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어. 자, 자네는 위스키를 기울이게나. 나는 긴의자에 누운 채로 초콜릿바라도 먹을 테니까.

   지상낙원

 지상낙원의 광경은 자주 시가서도 읊어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쉽게도 아직 그런 시인의 지상낙원에 살고 싶지는 않다. 기독교의 지상낙원은 필시 지루한 파노라마이다. 황노 학자의 지상낙원은 즉 삭막한 중국요리점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근대의 유토피아 따위는――윌리엄 제임스가 전율한 건 누구나 기억하고 있으리라.
 내가 꿈꾸는 지상낙원은 그런 천연 온실이 아니다. 또 동시에 학교를 겸한 식량이나 의류 배급소도 아니다. 단지 이곳에 살면 부모는 아이가 성인이 됨과 동시에 반드시 숨을 거둔다. 또 남녀 형제는 설령 악인으로 태어날지언정 바보로 태어나지 않아 결과적으로 조금도 폐를 끼치지 않는다. 그리고 여자는 아내가 되자마자 가축의 혼이 깃들어 순종 그 자체로 변모한다. 또 아이는 남녀를 구분하고 부모의 의지나 감정대로 하루에 몇 번이든 귀와 입과 다리와 눈이 몇 번이든 멀 수 있다. 또 친구 갑은 친구 을보다 가난해지지 않고 동시에 친구 을은 친구 갑보다 부자가 되지 않으며 서로 상대를 칭찬하며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준다. 또――대강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이런 게 꼭 나 하나만의 지상낙원인 건 아니다. 동시에 천하에 충만한 선남선녀의 지상낙원이다. 단지 옛 시인이나 학자는 그 금색의 명상 속에서 이런 광경을 꿈꾸지 않았다. 꿈꾸지 않은 건 별로 신기하지도 않다. 이런 광경은 꿈꾸는 것마저 너무나 진실된 행복으로 넘치기 때문이다.
 추기 내 조카는 렘브란트의 초상화를 사는 걸 꿈꾸고 있다. 하지만 용돈으로 10엔을 받는 건 꿈꾸지 않는다. 이 또한 10엔의 용돈은 너무나 진실된 행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폭력

 인생은 항상 복잡하다. 복잡한 인생을 간단하게 하는 건 폭력 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왕왕 석기 시대의 뇌골수 밖에 가지지 않은 문명인은 논쟁보다도 살인을 사랑한다.
 하지만 권력 또한 필경 특허를 얻은 폭력이다. 우리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도 폭력은 항상 필요한 걸지 모른다. 혹은 필요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인간다움"

 나는 불행히도 "인간다움"에 예배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 아니 때때로 "인간다움"에 경멸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또 언제나 "인간다움"에 사랑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랑을?――혹은 사랑보다도 연민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인간다움"에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인생은 도무지 살기 어려운 정신 병원으로 변할 거 같다. Swift가 끝내 발광한 것도 당연한 결과라 밖에 할 수 없다.
 스위프트는 발광하기 조금 전에 끝자락만 마른 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저 나무와 아주 닮았다. 머리부터 먼저 가는 거야."하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떠올릴 때마다 전율을 느끼고는 한다. 나는 스위프트만큼 머리가 좋은 한 시대의 귀재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조금 행복을 느끼고 있다.

   밤나무잎

 완벽히 행복해지는 건 백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어떤 낙천주의자라도 시종 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니 만약 진짜로 낙천주의자란 존재가 허용된다면 그건 단지 어떠한 행복에 절망했음을 말한다.
 "집에 있으면 그릇에 담아 먹을 밥도 여행 도중엔 밤나무 잎에 올려 먹네."하는 말은 여행의 정취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항상 '바라는 것' 대신에 '있는 것'과 타협한다. 학자는 밤나무 잎에 다양한 미명을 부여하리라. 하지만 무작정 손에 따보면 밤나무잎은 항상 밤나무잎이다.
 밤나무잎을 밤나무잎이라 하는 건 밤나무잎이 그릇이라 주장하는 것보다도 존경할만하다. 하지만 밤나무잎이 밤나무잎이라 비웃으며 떠나는 것보다 지루하리라. 적어도 평생 동일한 걸 반복함에 거리낌이 없는 건 우스운 동시에 부도덕한 일이다. 실제로 위대한 염세주의자는 떨떠름한 표정만 짓는 게 아니다. 불치병에 걸린 레오파르디마저 때로는 파란 장미의 꽃에 쓸쓸한 웃음을 짓고는 했다……
 추기 부도덕이란 과도의 이명이다.

   부처

 고타마 싯다르타는 몰래 왕성을 나와 6년 동안 고행을 했다. 6년 동안 고행한 이유는 물론 호화로운 왕성 생활을 보냈던 탓이리라. 그 증거로 나자렛 목공의 아이는 사십 일의 단식 밖에 하지 않았다.

   또

 싯다르타는 찬다카에게 재갈을 물려 조용히 왕성을 뒤로했다. 하지만 그의 사변[각주:4]벽은 그를 종종 우수에 잠기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 왕성을 몰래 나선 후 숨을 돌린 건 과연 장래의 석가모니인가 혹은 그의 아내인 야쇼다라인가. 쉽게는 단정 지을 수 없을지 모른다.


   또

 싯다르타는 6년의 고행 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전설은 물질의 정신을 얼마나 지배하느냐를 말해주고 있다. 그는 먼저 물로 몸을 씻는다. 그리고 유미를 먹는다. 마지막으로 난타라바라 전해지는 목우 소녀와 이야기한다.

   정치적 천재

 예로부터 정치적 천재란 민중의 뜻을 스스로의 뜻으로 삼는 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리라. 되려 정치적 천재란 스스로의 뜻을 민중의 뜻으로 만드는 자를 말한다. 적어도 민중의 뜻인 것처럼 믿게 하는 자를 말한다. 때문에 정치적 천재는 배우적 천재를 동반한다. 나폴레옹은 "장엄과 해학의 차이는 겨우 한 걸음 뿐이다"하고 말했다. 이 말은 제왕의 말이라기보다는 명배우의 말에 걸맞을 거 같다.

   또

 민중은 대의를 믿는다. 하지만 정치적 천재는 항상 대의 자체에는 한 푼의 돈도 두지 않는다. 단지 민중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대의의 가면을 마련해야만 한다. 하지만 한 번 사용한 대의의 가면은 영구히 멋을 수 없다. 만약 억지로 벗으려 든다면 어떠한 정치적 천재도 비명횡사할 수밖에 없다. 즉 제왕도 왕관을 위해 스스로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정치적 천재의 비극은 희극도 겸하고 만다. 이를테면 과거 닌나지의 법사가 솥을 뒤집어 스고 춤췄다는 "도연초"의 희극도 겸하고 만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말은 모파상의 소설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죽음보다 강한 게 비단 사랑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티푸스 환자가 비스킷을 하나 먹어 삶을 마치는 건 식욕 또한 죽음보다 강하단 증거이다. 식욕 이외에도 열거해 보자면 애국심, 종교적 감격, 인도적 정신, 사리사욕, 명예심, 범죄적 본능――죽음보다도 강한 건 수없이 많을 게 분명하다. 즉 갖은 정열은 죽음보다도 강할 터이리라.(물론 죽음을 향한 정열은 에외이다.) 또 사랑이 그런 것 중에서도 특히 죽음보다 강한지는 함부로 단언할 수 없는 듯하다. 얼핏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라 보이는 경우마저 실은 우리를 지배하는 건 프랑스인의 소위 보바리즘[각주:5]이다. 우리 스스로를 전기 속 연인처럼 공상하는 보바리 부인과 같은 감상주의다.

   지옥

 인생은 지옥보다도 지옥 같다. 지옥이 주는 괴로움이란 일정한 법칙을 깨는 법이 없다. 이를테면 근귀도의 괴로움이란 눈앞의 밥을 먹으려 하면 밥 위에 불이 붙는 식이다. 하지만 인생이 주는 괴로움이란 불행히도 그만큼 단순치 않다. 눈앞의 밥을 먹으려 하면 불이 붙는 동시에 의외로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단히 먹은 후마저 위염에 걸리는 일도 있는 동시에 의외로 간단히 소화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무법칙의 세계에 순응하는 건 도무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약 지옥에 떨어진다면 나는 필경 순식간에 근귀도의 밥도 긁어모으리라. 하물며 바늘산이나 피연못 따위는 2, 3년 거기에 살아 익숙해지면 별로 대단한 고통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터이다.

   추문

 대중은 추문을 사랑한다. 햐쿠렌 사건, 아리지마 사건, 무샤노코지 사건――대중은 이러한 사건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을 찾아내리라. 그럼 왜 대중은 추문을――특히 세간에 이름이 알려진 타인의 추문을 사랑하는 걸까? 구르몽은 이렇게 답했다――
"숨겨진 자기의 추문 또한 당연하다는 듯이 보여주니까."
 구르몽의 답은 정확하다. 하지만 꼭 그게 전부지는 않다. 추문마저 일으킬 수 없는 속세 사람들은 갖은 명사의 추문 속에서 그들의 약함을 변호하기 좋은 무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동시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우월을 세우는 적당한 반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는 햐쿠렌 여사만큼 미인이지 않다. 하지만 햐쿠렌 여사보다도 정숙하다." "나는 아리지마 씨처럼 재능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리지마 씨보다 세간을 알고 있다." "나는 무샤노코지 씨만큼……"――대중은 이렇게 말한 후 돼지처럼 행복하게 잠들리라.

   또

 천재의 일면은 분명히 추문을 일으킬만한 재능이다.

   여론

 여론은 항상 사형私刑이며, 사형은 항상 오락이다. 설령 피스톨 대신 신문 기사를 사용하더라도.


   또

 여론이 존재할만한 이유는 단지 여론을 유린하는 흥미를 주기 때문이다.

   적의

 적의는 추위와 같다. 적절히 느낄 때에는 상쾌하며, 또 건강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다.

   유토피아

 완벽한 유토피아가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는 대개 아래와 같다――인간성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완벽한 유토피아가 만들어질 리는 없다. 인간성 자체를 바꾼다면 완벽한 유토피아였던 것도 곧 완벽하지 못 한 것처럼 느껴지고 만다.

   위험 사상

 위험 사상이란 상식을 실행에 옮기려는 사상이다.

   

 예술적 기질을 가진 청년이 "인간의 악"을 발견하는 건 누구보다도 뒤쳐지기 마련이다.

   니노미야 타카노리

 나는 초등학교 독본 중에서 니노미야 카타노리의 소년 시절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가난했던 타카노리는 낮에는 농작 일을 돕고 밤에는 짚신을 만드는 등 어른처럼 일하면서 기특하게 독학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건 갖은 입지담처럼――요컨대 갖은 통속 소설처럼 감격을 주기 쉬운 이야기다. 실제로 미처 열다섯이 되지 않았던 나는 타카노리의 의지에 감격하는 동시에 타카노리만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불행 중 하나로 여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입지담은 타카노리에게 명성을 주는 대신에 당연히 타카노리의 두 부모님께는 불명에를 주는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타카노리의 교육에 조금의 편의도 주지 못 했다. 아니, 되려 방해만 했을 정도이다. 이건 부모라는 책임상 명백히 부끄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님이나 교사는 순수하게도 이 사실을 잊고 있다. 타카노리의 부모님은 주정뱅이든 도박꾼이든 좋다 이거다. 문제는 단지 타카노리다. 어떤 고난에도 독학을 접지 않았던 타카노리다. 우리 소년은 타카노리처럼 용맹한 뜻을 길러야 한다.
 나는 그들의 이기주의에 감탄에 가까운 걸 느끼고 있다. 옳거니, 그들에겐 타카노리처럼 하인을 겸하는 소년은 형편 좋은 아들일지 모른다. 그뿐이랴. 후년에 명성을 얻어 부모의 이름을 크게 남기는 것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형편 좋은 일이다. 하지만 미처 열다섯이 되지 않았던 나는 타카노리의 의지에 감격하는 동시에 타카노리리처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불행 중 하나로 여기기까지 했다. 마치 사슬에 묶인 노예가 좀 더 두꺼운 사슬을 바라기라도 하듯이.

   노예

 노예 폐지란 단지 노에란 자의식을 폐지하는 걸 말한다. 우리 사회는 노예 없이는 하루도 안전을 지킬 수 없다. 실제로 그 플라톤의 공화국마저 노예의 존재가 예상되는 건 우연이 아니리라.

   또

 폭군을 폭군이라 부르는 건 위험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폭군 이외에 노예를 노예라 부르는 것 역시 굉장히 위험하다.

   비극

 비극이란 부끄러운 일을 스스로 구태여 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만인에게 공통된 비극으로는 배설 행위가 있다.

   강자

 강자란 적을 두려워 않고 대신 친구를 두려워한다. 일격에 적을 쓰러트리는 것에는 어떤 통증도 느끼지 않는 대신, 저도 모르게 의식치 않고 친구를 다치게 하는 건 어린 소녀와 닮은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다.
 약자란 친구를 두려워하는 것 대신 적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때문에 곳곳에서 가상의 적만 발견하고는 한다.

   S・M의 지혜

 이건 친구 S・M이 내게 해준 말이다.
 변증법의 공적――결국 모든 것도 바보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소녀――어디까지고 맑고 차가운 얕은 물.
 조기교육――흠, 그거도 괜찮지. 아직 유치원에 있을 때에 지혜의 슬픔을 아는 것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까.
 추억――지평선이 먼 풍경화. 제대로 마무리도 되어 있다.
 여자――메리 스톱스 부인에 따르면 여자는 적어도 2주에 한 번 남편에게 욕정할 정도의 정조를 지녔다는군. 
 어릴적――어릴적의 우울이란 전우주에 대한 교만이다.
 고난이 그대를 옥으로 만든다――고난이 사람을 옥으로 만든다면 일상 생활서 사려 깊은 남자는 도무지 옥이 되지 못 할 터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미지의 세계를 조금 남겨둘 것.

   사교

 갖은 사교는 자연스레 허위를 필요로 한다. 만약 조금의 거짓도 가하지 않고 우리의 친구와 지인에게 우리의 진심을 토하면 고대의 관포지교라 할지라도 파탄할 수밖에 없으리라. 관포지교는 제쳐두더라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우리의 친밀한 친구나 지인에게 증오 혹은 경멸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증오도 이해 앞에서는 칼을 거둘 게 분명하다. 또 경멸은 태연히 거짓을 토하게 한다. 때문에 우리의 친구나 지기와 더욱 친밀히 교류하기 위해서는 서로 이해와 경멸을 완벽히 갖춰야 한다. 물론 그건 누구에게나 꽤나 어려운 조건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진작에 예의로 가득 찬 신사이며, 세계도 진작에 황금시대의 평화를 이루었으리라.

   사사로운 일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사사로운 일을 사랑해야만 한다. 구름의 빛, 대나무 잎끼리 스치는 소리,  참새 무리의 울음소리, 행인의 얼굴――갖은 일상의 사사로운 일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감미로움을 느껴야만 한다.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하지만 사사로운 일을 사랑하는 자는 사사로운 일로 고통받아야 한다. 정원 앞 오래된 연못에 뛰어든 개구리는 백 년의 근심을 깬 것이리라. 하지만 연못에서 뛰쳐나온 개구리는 백 년의 근심을 준 걸지도 모른다. 아니, 파초의 일생은 향락의 일생인 동시에 누구의 눈에도 고통의 일생이다. 우리도 미묘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역시 미묘하게 괴로워해야만 한다.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사사로운 일에 괴로워해야 한다. 구름의 빛, 대나무 잎끼리 스치는 소리, 참새 무리의 울음소리, 행인의 얼굴――갖은 일상의 사사로운 일 속에서 지옥에 떨어진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한다.

   

 갖은 신의 속성 중 제일 동정심이 드는 건 신은 자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우리는 신을 매도하는 무수한 이유를 발견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일본인은 매도할 만큼 전능의 신을 믿지 않는다.

   민중

 민중은 온건한 보수주의자이다. 제도, 사상, 예술, 종교――무엇이든 민중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전시대의 낡은색을 둘러야만 한다. 소위 민중예술가가 민중에게 사랑받지 못 하는 건 비단 그들만의 죄는 아니다

   또

 민중의 어리석음을 발견하는 게 꼭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민중이란 걸 발견하는 건 자랑스러워하기 마땅한 일이다.

   또

 옛사람은 민중을 어리석게 하는 게 다스림의 길이라 가르쳤다. 마치 더 어리석을 수 있다는 양――혹은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라도 할 수 있다는 양.

   첸호프의 말

 첸호프는 수기 속에서 남녀 차별을 논했다――"여자는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여자에 따르게 되고, 남자는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여자에게서 멀어진다."
 하지만 첸호프는 남녀 모두 나이를 먹으면서 저절로 이성과 교섭하지 않게 된다는 걸 말할 뿐이다. 이건 세 살 아동이라도 진작에 알고 있는 일이라 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남녀 차별보다도 되려 남녀 무차별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한다.

   복장

 적어도 여인의 복장은 여인 본인의 일부이다. 케이키치가 유혹에 빠지지 않은 건 물론 도의에 따른 것이리라. 하지만 그를 유혹한 여인은 케이키치의 아내의 옷을 빌려 입었다. 만약 빌려 입지 않았다면 케이키치도 괘나 쉽사리 유혹에 넘어갔을지 모른다.
 각주 키쿠치 칸 씨의 "유혹 당하는 케이키치"를 보라.

   처녀 숭배

 우리는 처녀를 아내로 들이기 위해 아내 선택에 얼마나 많은 해학적 실수를 거듭했던가. 슬슬 처녀 숭배에 등을 돌려도 좋을 때이다.

   또

 처녀 숭배란 처녀란 사실을 안 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즉 솔직한 감정보다도 영세한 지식에 무게를 두는 행위다. 때문에 처녀 숭배자는 연애 상의 현학자[각주:6]라 해야 한다. 갖은 처녀 숭배자가 엄숙히 구는 것도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또

 물론 처녀스러움을 숭배하는 건 처녀 숭배 이외의 것이다. 이 두 개를 동의어로 취급하는 건 여자의 배우적 재능을 너무나도 경시하는 것이다.

   예법

 어떤 여학생이 내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대체 키스할 때는 눈을 감아야 하나요? 떠나 하나요?"

 여학교 과제에 연애 예법이 없는 건 나도 이 여학생과 마찬가지로 정말로 유감이지 싶다.

   가이바라 에키켄

 나는 역시 초등학교 시절에 가이바라 에키켄의 이야기를 배웠다. 에키켄은 과거에 승합선 안에서 한 서생과 자리를 함께 했다. 서생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줄곧 고금의 학예를 논했다. 하지만 에키켄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귀만 기울였다. 그러는 사이 배가 정박했다. 배 손님은 헤어지면서 이름을 밝히는 게 예의였다. 서생은 그제야 에키켄을 알아보고 이 뛰어난 철학자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방금 전의 무례를 사죄했다――이런 이야기를 배웠다.
 당시의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겸손의 미덕을 발견했다. 적어도 발견하려 노력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행히도 조금의 교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가 지금의 내게도 조금의 관심을 주는 건 대략 아래와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 시종 아무 말 없었던 에키켄의 경멸이란 얼마나 신랄했던가!
 둘 서생이 부끄러워하는 걸 기뻐한 손님들의 갈채는 얼마나 속되고 악한가!
 셋 에키켄을 알지 못 하는 신시대의 정신은 어린 소생의 방론 속에서도 얼마나 발랄히 고동 했을까!

   어떤 변호

 어떤 신시대 평론가는 "이집[각주:7]한다"는 말 뜻에 "문 앞에 거미줄을 치다"란 성어를 사용했다. "문 앞에 거미줄을 친다"는 성어는 중국인이 만든 것이다. 그런 걸 일본인이 쓰는데 꼭 중국인의 용법을 담습 할 이유는 없다. 만약 통용만 된다면 이를테면 "그녀의 웃음은 문 앞에 거미줄을 치는 듯했다"하고 형용해도 될 터이다.
 만약 통용만 된다면――만사는 이 신비한 "통용" 위에 걸려 있다. 이를테면 "사소설"도 그렇지 않은가? Ich-Roman이란 말은 일인칭을 쓴 소설이다. 반드시 그 "사사로울 사"가 작가 본인이라 정해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일본의 "사"소설은 항상 그 "사"라는 게 작가 본인인 소설을 말한다. 아니, 때로는 작가 본인의 경험담으로 여겨진 끝에 3인칭을 쓰고 있는 소설마저 "사"소설이라 불리는 듯하다. 물론 이건 독일인의――혹은 모든 서양인의 용법을 무시한 새로운 용법이다. 하지만 전능한 "통용"은 이 용법에 생명을 주었다. "문 앞에 거미줄을 친다"는 성어도 언젠가는 이처럼 의외의 용법을 낳을지 모른다.
 그럼 어떤 평론가가 딱히 학식이 부족했던 건 아니다. 단지 시류 바깥에서 새로운 용법을 추구하는 게 조금 빨랐을 뿐이다. 그 평론가가 야유를 받은 건――어찌 됐든 갖은 선지자들은 항상 짧은 목숨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제한

 천재도 제각기 넘기 어려운 어떤 제한에 구속되어 있다. 그 제한을 발견하는 건 다소의 쓸쓸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 되려 친근함을 준다. 마치 대나무는 대나무이며 덩굴은 덩굴인 걸 알게 된 것처럼.

   화성

 화성에서 주민의 유무를 묻는 건 우리의 오감에 느껴지는 주민의 유무를 묻는 일이다. 하지만 생명이 반드시 우리의 오감에 느껴지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만약 화성의 주민이 우리의 오감을 초월한 존재를 지니고 있다면, 그들 중 한 무리는 오늘 밤도 겉옷을 흔드는 가을바람과 함께 긴자에 와있을지 모른다.

   Blanqui의 꿈

 우주 크기는 무한하다. 하지만 우주를 만드는 건 육십몇 개의 원소이다. 이러한 원소의 결합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필시 유한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럼 그러한 원소가 무한한 우주를 만든다는 건 갖은 결합을 시도하는 것 이외에, 또 갖은 결합을 무한히 반복해야만 한다. 그럼 우리가 서식하는 지구도――그러한 결합 중 하나인 지구도 태양계의 한 혹성에 한정되지 않고 무한히 존재할 터이다. 이 지구상의 나폴레옹은 마렝고 전투에서 대승을 이루었다. 하지만 먼 허공을 넘은 다른 지구상의 나폴레옹은 같은 마렝고 전투에서 대패했을지 모른다……
 이건 예순일곱의 블랑키가 꿈꾼 우주관이다. 의논의 여지는 물을 게 못 된다. 단지 블랑키는 감옥 안에서 이런 꿈을 글로 옮길 때 갖은 혁명에 절망했다. 이 사실만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스며 드는 쓸쓸함을 갖추고 있다. 꿈은 이미 지상에서 벗어났다. 우리 또한 위로를 찾이 몇 만 마일 위의 하늘 위로――우주의 밤에 건 제2의 지구에 눈부신 꿈을 옮겨야만 한다.

   범재

 범재의 작품은 대작일지라도 반드시 창문 없는 방과 닮아 있다. 인생의 전망은 조금도 살리지 못 한다.

   기지

 기지란 산단논법이 결여된 사상이며,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사상'이란 사상이 결여된 삼단논법이다.

   또

 기지에 대한 혐오는 인류의 고생에 뿌리내려 있다.

   정치가

 정치가가 우리 아마추어보다 뛰어난 건 분별없는 사실적 지식뿐이다. 필경 아무개 당의 아무개 수령은 어떤 모자를 쓰고 있는가, 그런 말과 별 차이 없는 지식뿐이다.

   또

 소위 "이발소 정치가[각주:8]"라는 건 이런 지식이 없는 정치가이다. 만약 그 식견을 논한다면 꼭 정치가에게 밀리는 건 아니다. 또 이해를 초월한 정열을 품고 있는 건 어떤 정치가보다도 숭고하다.

   사실

 하지만 분별없는 사실적 지식이란 항상 민중의 사랑을 받는다. 그들이 가장 알고 싶은 건 사랑이 무엇인지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사생아였는가? 이다.

   무사수행

 나는 이제까지 무사수행이란 사방의 검객과 맞서 무계를 갈고닦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실은 자기만큼 강한 사람은 천하에 없다는 걸 발견하기 위함이었다.――미야모토 무사시전 독후.

   위고

 프랑스 전토를 뒤덮는 한 쪽의 빵. 심지어 아무리 생각해도 버터는 듬뿍 발라져 있지 않다.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갖은 희화로 충만해 있다. 물론 그 희화의 대부분은 악마마저 우울하게 만들 게 분명하다.

   플로베르

 플로베르는 내게 아름다운 지루함도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모파상

 모파상은 얼음과 닮아 있다. 물론 때로는 얼음사탕하고도 닮아 있다.

   

 포는 스핑크스를 만들기 전에 해부학을 연구했다. 포가 후대를 뒤흔든 비밀은 이 연구에 숨겨져 있다.

   모리 오가이

 필경 오가이 선생님은 군복에 검을 찬 그리스인이시다.

   어떤 자본가의 논리

 "예술가가 예술을 파는 것도 내가 게 통조림을 파는 것과 크게 다를 리가 없다. 하지만 예술가는 예술이 천하의 보석인 것처럼 여긴다. 그런 예술가의 흉내를 내보자면 나 또한  한 캔 60전의 게 통조림을 자랑해야 한다. 불초 행년 61세,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예술가 같은 멍청한 자아도취를 일으킨 적이 없다."

   비평학
    ――사사키 모사쿠 군에게――

 어느 날이 좋은 오전이다. 박사로 변한 Mephistopheles는 어떤 대학의 강단에서 비평학 강의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이 비평학은 Kant의 Kritik 같은 게 아니다. 단지 어떻게 소설이나 희곡을 평가하느냐는 학문이다.
 "여러분, 지난주에 한 강의는 이해하셨을 테니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반긍정논법'을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반긍정논법'이 무엇이냐, 이건 말 그대로 어떠한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절반만 긍정하는 논법입니다. 하지만 '절반'이란 말은 '더 나쁜 절반'이어야 합니다. '더 좋은 절반'을 긍정하는 건 이 논법에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벚꽃에 이 논법을 이용해보지요. 벚꽃의 '좋은 절반'이란 색이나 형태의 아름다움입니다. 하지만 이 논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좋은 절반'보다도 '나쁜 절반'――즉 벚꽃의 냄새를 긍정해야 합니다. 요컨대 '냄새는 확실히 존재한다. 하지만 필시 그거뿐이다'하고 단정지어버리는 겁니다. 또 만약 '나쁜 절반' 대신 '좋은 절반'을 긍정한다면 어떤 파탄을 낳을까요? '색이나 형태는 정말로 아름답다. 하지만 필시 그거뿐이다.'――이래서는 벚꽃을 폄하하는 게 되지 못 합니다.
 "물론 비평학이란 학문이 어떻게 어떤 소설이나 희곡을 폄하하는지를 말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건 새삼스레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럼 이 '좋은 절반'이나 '나쁜 절반'은 무엇을 기준으로 구별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따금 말해 드린 가치론에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가치는 예로부터 믿어 온 것처럼 작품 그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거지요. 그러면 '좋은 절반'이나 '나쁜 절반'은 우리 마음을 기준으로――혹은 한 시대의 민중이 무언가를 사랑하는지를 기준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민중은 일본풍의 풀과 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즉 일본풍의 풀과 꽃은 나쁜 거지요. 또 오늘날의 민중은 브라질 커피를 사랑합니다. 즉 브라질 커피는 좋은 게 분명합니다. 어떤 작품이 가진 예술적 가치의 '좋은 절반'이나 '나쁜 절반'은 물론 이런 사례처럼 구분해야 합니다."
 "이런 기준을 쓰지 않고 아름다움, 진실됨, 선 따위 같은 다른 기준을 추구하는 건 가장 우스운 시대착오입니다. 여러분은 색이 바란 밀짚모자처럼 구시대를 버려야 합니다. 선악은 호오를 초월하지 않습니다. 호오란 즉 선악입니다. 애증은 즉 선악입니다――이건 '반긍정논법'에 국한되지 않고 비평학에 뜻을 둔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되는 법칙입니다.
 "자, '반긍정논법'은 이해하셨을까요. 마지막으로 주의해드리고 싶은 건 '그뿐이다'란 말입니다. 이 '그뿐이다'란 말은 반드시 써야 합니다. 애당초 '그뿐이다'라고 말하는 이상, '그' 즉 '나쁜 절반'을 긍정하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외의 걸 부정하는 것도 분명하지요. 즉 '그뿐이다'란 말은 하나를 띄우고 하나를 누르는 정취로 가득한 셈입니다. 더욱이 미묘한 건 '그' 예술적 가치마저' 은근히 부정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부정한다 한들 왜 부정하는지는 설명도 무엇도 없습니다. 단지 표현하는 법 없이 부정하지요――이건 이 '그뿐이다'라는 말의 가장 현저한 특색입니다. 이렇듯 긍정하여 부정하는 게 그야말로 '그뿐이다'의 의의일 테죠."
 "이 '반긍정논법'은 '전부정논법' 혹은 '나무에 기대어 물고기를 찾는 논법'보다도 믿음을 얻기 쉬울 테지요. '전부정논법' 혹은 '나무에 기대어 물고기를 찾는 논법'은 지난주에 강의 내용이었죠? 복습해 보자면 어떠한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그 예술적 가치에 기대어 전부 부정하는 논법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비극의 예술적 가치를 부정하는데 비참하다, 불쾌하다, 우울하다 같은 비난을 가하는 논법입니다. 또 이러한 비난을 되려 이용해 행복, 유쾌, 경쾌함이나 교묘함 등이 빠져 있다 매도해도 괜찮습니다. 또 '나무에 기대어 물고기를 찾는 논법'이란 통쾌하기 짝이 없는 대신에 때로는 편파의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긍정논법'은 일단 작품의 예술적가치는 반쯤 인정하고 있으니 간단하 공평하단 비호를 얻을 수 있지요.
 "그럼 과제로 사사키 모사쿠 씨의 신작 '봄의 외투'를 내줄 테니 다음 주까지 '반긍정논법'을 통해 사사키 씨의 작품을 비평해주세요.(이때 젊은 학생 한 명이 "선생님, '전부정논법'은 안 되는 건가요?"하고 질문한다) 아뇨, '전부정논법'을 스는 건 당분간은 조심해야 합니다. 사사키 시는 명성을 가진 신진작가니까요. 역시 '반긍정논법' 정도가 적당하다 봅니다……"
    * * * * *
 일주일 후, 최고점을 받은 답안은 아래와 같았다.
 "정말 그럴싸하게 적긴 했다. 하지만 필시 그뿐이다."

   부모자식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는데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확실히 종마는 부모 때문에 양육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연의 이름 아래에 이러한 옛 습관을 변호하는 건 분명히 부모의 고집이다. 만약 자연의 이름 하에 어떠한 옛 습관도 변호할 수 있다면 우리는 먼저 미개 인종의 약탈 결혼을 변호해야만 한다.

   또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가장 이기심 없는 사랑이다. 하지만 이기심 없는 사랑이 꼭 아잉 양육에 적합한 건 아니다. 이 사랑하는 아이에게 주는 영향은――적어도 영향의 대부분은 폭군으로 만들거나 약자로 만드는 것이다.

   또

 인생의 비극의 첫 막은 부모가 되는 걸로 시작된다.

   또

 예로부터 많은 부모는 이런 말을 반복했으리라――"나는 분명 실패했다. 하지만 이 아이만큼은 성공시켜야 한다."

   가능

 우리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이건 우리 개인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아마 신도 바람대로 이 세계를 만든 건 아니리라.

   무어의 말

 조지 무어는 "나를 죽이는 자신의 비망록" 안에서 이런 말을 했다――"위대한 화가는 이름을 넣을 곳을 잘 알고 있다. 또 결코 같은 장소에 두 번 넣지는 않는다."
 물론 "결코 같은 장소에 두 번 이름을 넣지 않는 것"은 어떤 화가든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건 나무랄 필요가 없다. 내가 의외라 느낀 건 "위대한 화가는 이름을 넣을 곳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동양 화가는 이제까지 낙관의 장소를 경시하는 법이 없었다. 낙관 장소를 주의하란 말은 진부해졌다. 그런 걸 특필하는 무어를 생각하면 동서의 차이가 느껴진다.


   대작

 대작을 걸작과 혼동하는 건 확실히 감상 상의 물질주의이다. 대작은 벌이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벽화보다도 예순몇 살 먹은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

 내가 사랑하는 작품은――문예상의 작품은 필경 작가란 인간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인관을――두뇌와 심장과 관능을 한 사람치로 갖춘 인간을. 하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작가는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 있다.(물론 그때에는 위대한 결여에 감복하기도 한다.)

   "홍예관"을 보고

 남자가 여자를 사냥하는 게 아니다. 여자가 남자를 사냥하는 것이다――쇼는 "인간과 초인과" 안에서 이러한 사실을 희곡화했다. 하지만 이걸 희곡화한 건 꼭 쇼만이 아니다. 나는 메이 란팡의 "홍예관"을 보고 중국에도 이러한 사실을 주목한 희곡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뿐 아니라 "희고"는 "홍예관" 이외에도 여자가 남자를 사냥하는데 손오의 병기와 검격을 이용한 몇몇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동가산"의 여주인공 금련, "원문참자"의 여주인공 계영, "쌍철산"의 여주인공 금정 등은 모조리 이런 여걸이다. 더욱이 "마상록" 여주인공 예화를 보면 그냐가 사랑하는 소년 장군을 말 위에서 붙잡을 뿐 아니라, 아내로 삼기 싫다는 걸 억지로 결혼해버린다. 코테키 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나는 '사진사'를 제외한 모든 경극[각주:9]을 부정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경극은 적어도 굉장히 철학적이다. 철학자 코테키 씨는 이 가치 앞에 조금은 자신의 뇌정의 분노를 풀 수는 없는 걸까?

   경험

 경험에만 의지하는 건 소화력을 생각하지 않고 먹는 것에만 의지하는 행위다. 또 동시에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능력에만 의지하는 것 역시 식물을 생각지 않고 소화력에만 의지하는 행위이다.

   아킬레스

 그리스 영웅 아킬레스는 뒤꿈치만이 불사신이 아니었다――즉 아킬레스를 알기 위해서는 아킬레스의 뒤꿈치를 알아야 한다.

   예술가의 행복

 가장 행복한 예술가는 말년에 명성을 얻는 예술가이다. 쿠니키다 톳보도 그런 의미에서는 꼭 불행한 예술가라 할 수 없다.

   좋은 사람

 여자가 꼭 좋은 사람을 남편으로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남자는 항상 좋은 사람을 친구로 두고 싶어 한다.

   또

 좋은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천상의 신과 닮아 있다. 먼저 환희를 말하는 걸 좋아한다. 두 번째로 불평을 호소하는 걸 좋아한다. 셋째로――있어도 없어도 좋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꼭 어려운 게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는 대부분의 부모와 이 격언을 실행하고 있다.

   복숭아와 자두

 "도리불언 하자성혜(복숭아와 자두란 말하지 않아도 나무 아래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란 확실히 똑똑한 사람이 한 말이다. 단지 "말하지 않아도'는 아니다. 실은 "복숭아와 자두가 말하기를"이다.

   위대함

 민중은 인격이나 사업의 위대함에 농락 당하는 걸 사랑한다. 하지만 위대함에 직면하는 건 유사 이래로 사랑한 적이 없다.

   알림 

 

 "미천한 자의 말" 12월 호의 "사사키 모사쿠 군을 위해"는 사사키 군을 폄하하는 게 아닙니다. 사사키 군을 인정하지 않는 비평가를 비웃는 것입니다. 이런 걸 알리는 건 "분케이순슈"의 독자의 두뇌를 경멸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비평가는 사사키 군을 폄하하는 거라 착각하는 듯합니다. 또 이 비평가의 아류도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때문에 알립니다. 물론 이런 걸 알리는 건 제 생각이 아닙니다. 실은 선배 사토미 톤 군의 선동에 따른 결과입니다. 부디 이 광고에 분개하는 독자는 사토미 군을 비난해주세요. '미천한 자의 말'의 작가.

   추가 알림

 이전 알림 중 "사토미 군을 비난해주세요"라는 건 물론 제 농담입니다. 실제로는 비난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어떤 비평가로 대표되는 일단의 천재성에 감복한 나머지, 조금 신경질적이 된 모양입니다. '미천한 자의 말'의 작가.

   다시 알림

 이전 추가 알림 중 '어떤 비평가로 대표되는 일단의 천재성에 감복한 나머지'라는 건 물론 반의법입니다. '미천한 자의 말' 작가.

   예술

 그림의 힘은 300년 가고, 글의 힘은 500년이 가고, 문장의 힘에는 기한이 없다. 왕세정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둔황의 발굴품 등을 보면 글과 그림은 500년이 지난 후로도 여전히 그 힘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뿐 아니라 문장 또한 기한이 없는지는 의문이다. 관념도 시간의 지배력과 무관할 수는 없다. 우리의 선조는 '신'이란 말에 의관속대한 인물을 떠올렸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말에서 수염이 긴 서양인을 떠올리고 있다. 이건 곡 신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 어떤 일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해야 한다.

   또

 나는 언젠가 도슈샤이 샤라쿠의 얼굴화를 본 적이 있다. 그 그림 속 인물은 녹색의 광림파가 그려진 부채를 가슴가에서 펼치고 있었다. 그건 전체적인 색채 효과를 강하게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니 녹색이란 색이 바란 금색이었다. 내가 이 한 장의 샤라쿠에 아름다움을 느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샤라쿠가 의도한 아름다움과 다른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변화는 문장 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봐야 한다.

   또

 예술 또한 여자와 마찬가지다. 가장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는 한 시대의 정신적 분위기 혹은 유행으로 휘감아야 한다.

   또

 그뿐 아니라 예술은 공간적으로도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 한 국가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국민의 생활을 알아야 한다. 토젠지에서 양이지사의 습격을 받은 영국의 특명 공권 공사 사 루사포드 루코크는 일본인의 음악에서도 소음밖에 느끼지 못 했다. 그의 "일본에서보낸 3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우리는 언덕을 오르는 도중에 나이팅게일의 목소리와 닮은 꾀꼬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본인은 꾀꼬리에게 노래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놀랄 수밖에 없다. 본래 일본인은 음악을 직접 가르치는 행위를 알지 못 하니까."(제2권 제29장)

   천재

 천재란 우리와 한 걸음을 둔 자들을 말한다. 단지 이 한 걸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리의 절반을 구십구리로 하는 초숫자를 알아야 한다.

   또

 천재란 우리와 한 걸음을 둔 자들을 말한다. 같은 시대에는 도무지 이 한 걸음이 천 리임을 이해하지 못 한다. 후대는 또 이 천 리가 한 걸음인 사실에만 맹목적이다. 같은 시대는 그 때문에 천재를 죽였다. 후대는 그 때문에 천재의 앞에 향을 피우고 있다.


   또

 민중이 천재를 인정하는데 후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하지만 그 인정하는 방식은 굉장히 해학적이다.

   또

 천재의 비극이란 "자그마하고 기분 좋은 명성"을 주는 일이다.

   또

 예수 "내가 피리를 불어도 그대들은 춤추지 않았다."
 그들 "우리는 춤추었지만 그대가 보지 않았다."

   거짓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이익을 비호하지 않는 자에게 "깨끗한 한 표"를 주지 않는다. 이 "우리의 이익" 대신에 "세상의 이익"을 두는 건 모든 공화제도의 거짓이다. 이 거짓만은 소비에트 치하에서도 소멸하지 않는다 봐야 한다.

   또

 하나가 된 두 개념을 파내어 그 접점을 음미하면 제군은 얼마나 많은 거짓에 길러지고 있는가를 발견하리라. 갖은 성어는 이 때문에 항상 하나의 문제일 따름이다.

   또

 우리의 사회에 합리적 외관을 부여하는 건 사실 그 부조리함이――그 너무나도 지독한 부조리함이지 않을까?

   레닌

 내가 가장 놀란 건 레닌이 너무나 당연한 영웅이었다는 점이다.

   도박

 우연, 즉 신과 싸우는 건 항상 신비적 위엄으로 가득 차 있다. 도박꾼 또한 벗어나지 못 한다.

   또

 예나 지금이나 도박에 열중한 염세주의자가 없는 건 도박이 인생과 지독히 닮아 있음을 보여준다.

   또

 법률이 도박을 금지하는 건 도박에 따른 부의 분배를 나쁘게 보기 때문은 아니다. 실은 단지 그 경제적 딜레탕티즘을 나쁘게 보기 때문이다.

   호의주의

 호의주의도 하나의 신념 위에――의심한다는 건 의심하지 않는다는 신념 위에 세워진 것이다. 확실히 그건 모순일지 모른다. 하지만 회의주의는 동시에 조금도 신념 위에 성립하지 않는 철학이 있다는 걸 의심하는 것이다.

   정직

 만약 정직해진다면 우리는 곧 누구도 정직해질 수 없음을 찾아내리라. 때문에 우리는 정직해지는데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허위

 나는 어떤 거짓말쟁이를 알았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하지만 거짓말이 너무나 교묘했던 탓에 사실을 말할 때마저 거짓말로 여겨졌다. 그것만은 확실히 누구의 눈에나 그녀의 비극으로 비추었다.

   또

 나 또한 갖은 예술가처럼 되려 거짓말에 교묘했다. 항상 그녀에게는 한 발짝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작년의 거짓마저 오 분 전의 거짓말처럼 기억하였다.

   또

 나는 어떤 불행도 알고 있다. 때로는 거짓말에 의존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진실이 있음을.

   어떤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청년이 예술 탓에 타락할 걸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안심해도 좋다. 당신들 만큼 간단히 타락하지 않을 테니.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국민을 해치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안심해도 좋다. 예술은 적어도 당신들은 절대로 해쳐 놓을 수 없으니까. 이천 년을 이어진 예술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 하는 당신들을 해치는 건.

   인종忍從

 인종은 로맨틱한 비굴함이다.

   계획

 이루는 게 꼭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바라는 건 항상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이루기 부족한 걸 바라는 건.

   또

 그들의 크고 작음을 알려고 하는 자는 그들이 이루었기에 그들이 이루지 못 한 걸 보아야만 한다.

   병졸

 이상적 병졸이란 상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건 절대 평가하지 않는단 뜻이다. 즉 이상적 병졸은 먼저 이성을 잃어야 한다.

   또

 이상적 병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는 건 절대 책임을 지지 않는단 뜻이다. 즉 이상적 병졸은 먼저 무책임을 좋아해야 한다.

   군사교육

 군사교육이란 필경 단순한 군사 용어 지식을 주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지식이나 훈련은 꼭 군사 교육을 받은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해군 학교마저 기계학, 물리학, 응용화학, 어학 등은 물론이요 검도, 유도, 수영 등에도 제각기 전문가를 갖추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더 생각해 보면 군사 용어도 학술 용어와 달리 대부분 통속적 용어이다. 그럼 군사 교육이란 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사실상 없는 것의 이해득실은 물론 문제가 되지 않을 터이다.

   근검상무[각주:10]


 "근검상무"란 성어만큼이나 무의미한 것도 없다. 상무란 국제적 추이다. 실제로 혈강은 군비를 위해 거금을 쓰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근검상무란 말이 미치광이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면, "근검유탕" 또한 통용된다고 해야 한다.

   일본인

 우리 일본인이 이천 년 동안 왕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했다 생각하는 건 사루타히코도 화장을 했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그만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왜구

 왜구는 우리 일본인도 열강에 속할만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도둑질, 살육, 간음 등에서도 결코 "황금의 섬"을 찾으러 온 스페인 사람, 포르투갈 사람, 네덜란드 사람, 영국 사람에 밀리지 않았다.

   도연초

 나는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도연초를 좋아하시죠?" 하지만 불행히도 "도연초" 따위는 이제까지 애독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자백하면 "도연초"가 명성 높은 것도 내게는 거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학교 교과서에 편리하단 정도는 인정하더라도.

   징후

 사랑의 징후 중 하나는 그녀가 과거에 몇 명의 남자를 사랑했는가, 혹은 어떤 남자를 사랑했는가 생각하고 그 가공의 몇 명인가에게 막연한 질투를 느끼는 일이다.

   또

 또 사랑의 징후 중 하나는 그녀와 닮은 얼굴을 발견하는 일에 극도로 민감해지는 일이다.

   연애와 죽음과

 연애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건 진화론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 걸지 모른다. 거미나 벌은 교미를 마치면 곧장 수컷이 암컷을 위해 찔려 죽고 만다. 나는 이탈리아 배우들의 가극 "카르멘"을 보았을 때, 카르멘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기에 왕왕 그녀 이외의 여인을 그녀로 대신하고는 한다. 이런 꼴이 되는 게 꼭 그녀가 우리를 물렸을 때로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때로는 두려워하기에, 때로는 미적 요구 때문에 이 잔혹한 위안 상대로 한 여인을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

 결혼은 성욕을 조절하는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연애를 조절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 않다.

   또

 그는 20대에 결혼한 후, 한 번도 연애 관계에 빠지지 않았다. 대단한 욕구 조절이다!

   바쁨

 우리를 연애에서 구하는 건 이성보다도 되려 바쁨이다. 연애를 완전히 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간을 지녀야 한다. 베르테르, 로미오, 트리스탄――예로부터 전해지는 연인들을 생각해 보아도, 그들은 모두 한가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

 남자는 유사 이래 연애보다도 일을 중시했다. 만약 이 사실이 의심스럽다면 발자크의 편지를 읽어 보아라. 발자크는 한스카 백작 부인에게 "이 편지도 원고료로 환산하면 몇 프랑이 넘는다"고 써보냈다.

   예의

 예전에 우리 집에 출입하던 남자 같은 여자 이발사는 딸 하나를 지녔었다. 나는 아직도 창백한 얼굴을 한 열두세 살쯤 먹은 딸을 기억하고 있다. 여자 이발사는 이 딸에게 예의를 가르치는데 열심이었다. 특히 베개 없이 누울 때마다 험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듣기로는 그 딸은 지진 전부터 게이샤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약간의 애처로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필시 게이샤가 된 후로도 엄격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베개만은 꼭 베고 누우려 하리라……

   자유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한다. 하지만 그건 외견뿐인 자유다. 실은 누구도 진심으론 조금도 자유를 바라지 않는다. 그 증거로 남의 목숨을 빼앗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무뢰한마저 금구무결[각주:11]의 국가를 위해 아무개를 죽인 거라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자유란 우리의 행위에 어떠한 구속이 없음을 말하며, 즉 신이니 도덕이니 혹은 사회적 습관이니 하는 연대 책임을 지는 걸 곱게 여기지 않는 걸 말한다.

   또

 자유는 산천의 공기와 닮아 있다. 어느 쪽도 약자는 견딜 수 없다.

   또

 진정으로 자유를 바라보는 건 신들의 얼굴을 보는 일이다.

   또

 자유주의, 자유연애, 자유무역――어떤 '자유'도 아쉽게도 잔 안에 대량의 물을 섞고 있다. 심지어 태반은 고인물을.

   언행일치

 언행일치의 미명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변호에 탁월해야 한다.

   방편

 한 사람을 속이지 못 하는 성현은 있어도 천하를 속이지 못 하는 성현은 없다. 부처의 소위 선교방편은 필경 정신상의 마키아벨리즘이다.

   예술지상주의자

 예로부터 열렬한 예술지상주의자는 대개 예술상의 거세자였다. 마치 열렬한 국가주의자는 대부분이 망국의 백성인 것처럼――우리는 누구라도 우리가 가지지 못 한 걸 바라기 마련이다.

   유물사관

 만약 어떠한 소설가도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입각한 인생을 묘사해야 한다면 동시에 어떤 시인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입각한 해달산천을 노래해야 한다. 하지만 "태양은 서쪽으로 지고"란 말 대신 "지구는 몇 번인가 회전했다"고 말하는 게 꼭 아름다울 리는 없을 터이다.

   중국

 반딧불이 유충은 달팽이를 먹을 때에 달팽이를 죽이지 않는다. 항상 새로운 살을 먹기 위해 달팽이를 마비시킬 뿐이다. 우리 일본 제국을 시작으로 열강이 중국을 대하는 태도는, 달팽이를 대하는 반딧불 유충과 다를 바가 없다.

   또

 오늘날 중국의 최대 비극은 무수한 국가적 낭만주의자 즉, '젊은 중국'을 위해 철과 같은 훈련을 받기에 마땅한 한 명의 무솔리니도 없다는 점이다.

   소설

 진짜 같은 소설이란 단순히 사건 발전에 우연성이 적기만 한 게 아니다. 아마 인생보다도 우연성이 적은 소설이다.

   문장

 문장 속 말은 사전 안에 있을 때보다도 아름다워야 한다.

   또

 그들은 모두 조규처럼 "문은 사람이다"하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하나 같이 "사람은 문이다"하고 생각하는 듯하다.

   여자

 여자는 정열에 휩싸이면 신기하게도 소녀 같은 얼굴을 한다. 물론 그 정열이란 건 파라솔에 대한 정열이라도 별 차이가 없다.

   세간지[각주:12]


 소화는 방화만큼 간단하지 않다. 이러한 세간지의 대표 소유자는 분명 "벨아미"의 주인공이리라. 그는 연인을 가질 때마저도 절연까지 생각했다.

   또

 단순히 세간에 대처하는 게 전부라면 정열의 부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도 되려 위험한 건 냉담함의 부족이다.

   항산

 직업이 없는 자가 동요한다는 건 이천 년 전의 이야기다. 오늘날엔 직업이 있는 자가 되려 동요한다는 듯하다.

   그들

 나는 사실 그들 부부가 사랑도 없이 서로를 부등켜 안고 산다는 사실에 경탄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된 건지 연인끼리 서로 안은 채 죽은 것에 경탄하고 있다.

   작가가 낳은 말

 "흔들고 있다", "고등유민[각주:13]", "노악가露悪家[각주:14]", "달이 떠오르는 것만큼[각주:15]" 같은 말이 문단에서 쓰이게 된 건 나쓰메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작가가 낳은 말은 나쓰메 선생님 이후로도 존재한다. 쿠메 마사오 군이 낳은 "작은 쓴웃음", "강기약기" 따위가 그렇겠지. 또 "등등등"이라고 쓰는 건 우노 코지 군이 낳은 말이다. 우리는 항상 의식적으로 감탄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식적으로 적대하고, 괴물로 보고, 개로 취급함에도 어느 틈엔가 감탄하고 있다. 어떤 작가를 매도하는 문장 속에도 그 작가가 만든 말이 나오는 게 꼭 우연은 아닐지 모른다.


   유아

 우리는 대체 왜 어린아이를 사랑하는가? 그 이유의一절반은 적어도 어린아이에게만큼은 속을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태연히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 아이를 대할 때나――혹은 개나 고양이를 대할 때뿐이다.

   이케노 타이가

"타이가가 어지간히 느긋한 사람으로 세상 물정에 밝지 않았던 건 교쿠란을 아내로 들였을 때 몸을 뒤섞는 법을 몰랐단 걸로 대강 알아볼 수 있다."

"타이가가 아내를 들였음에도 부부의 길을 알지 못 했단 이야기도 인간에서 벗어난 거 같아 재밌다고 하면 재밌지만, 상식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인용한 문장이 말해주듯이, 이런 전설을 믿는 사람은 예술가나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 사이에 아직도 남아 있다. 타이가는 교쿠란을 아내로 들일 때 몸을 섞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때문에 몸을 섞는 걸 몰랐다는 걸 믿는다면――그 사람은 필시 스스로의 격렬한 성욕을 너무 잘 아는 만큼,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리라.

   오규 소라이

 유고 소라이는 삶은 콩을 씹어 옛사람을 매도하는 걸 즐겼다고 한다. 나는 그가 삶은 콩을 씹은 게 근검절약을 위한 거라 믿었지만 옛사람을 매도하는 건 무얼 위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생각해 보면 현대인을 매도하는 것보다도 지장이 없기 때문이리라.

   어린 단풍

 어린 단풍은 줄기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가지 끝에 자란 싹이 신경처럼 흔들린다. 식물의 꺼림칙함이란!

   두꺼비

 가장 아름다운 석죽색은 필시 두꺼비의 혀 색이리라.

   까마귀

 나는 어느 눈이 그친 이른 저녁. 옆 옥상에 앉아 이는 새파란 까마귀를 본 적이 있다.

   작가

 글을 쓰는데 빠져서 안 되는 건 무엇보다도 창작적 열정이다. 또 창작적 열정을 불태우는데 빠져서 안 되는 건 무엇보다도 어느 정도의 건강이다. 스웨덴식 체조, 채식주의, 디아스타아제 따위를 경시하는 건 글을 쓰는데 걸맞지 않다.

   또

 글을 쓰려는 자는 아무리 도시 사람이라도 그 혼의 깊은 곳에 야만인 한 명을 두어야 한다.

   또

 글을 쓰려는 자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건 죄악이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자 위엔 어떠한 독창의 싹도 자라지 않는다.

   또

 지네 한 번 발로도 걸어 봐라.

 나비 흥, 한 번 날개로 날아봐라.


   또

 기운氣韻[각주:16]이란 작가의 뒤통수에 있다. 작가 스스로는 보지 못 한다. 또 만약 억지로 보려 하면 목뼈가 부러질 뿐이리라.


   또

 비평가 자네는 근면한 사람의 생활 밖에 쓰지 못 하나?

 작가  정말 무엇이든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나?


   또

 갖은 고대의 천재들은 우리 범인의 손이 닿지 않는 벽 위의 못에 모자를 걸어두고 있다. 물론 받침이 없는 건 아니었다.

   또

 그러한 받침대만은 어느 도구점에도 굴러다닌다.

   또

 갖은 작가의 한 면에는 목공장인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갖은 목공장인 또한 일면에 작가의 면목을 갖추고 있다.

   또

 뿐만 아니라 갖은 작가는 한 면에 가게를 열고 있다. 무얼, 나는 작품을 팔지 않는다고? 그야 그건 사줄 사람이 없을 때나 그렇지. 혹은 팔아도 되지 않을 때거나.

   또

 배우나 가수의 행복은 그들의 작품이 남지 않는 것이다――하는 생각도 해본다.


미천한 자의 말(유고)


   변호

 타인을 변호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변호하는 게 어려운 일이다. 의심하는 사람은 변호사를 보아라.

   여인

 건전한 이성이 명령한다.――"그대, 여인을 가까이하지 말지어다."
 하지만 건전한 본능은 정반대로 명령한다.――"그대, 여인을 피하지 말지어다."

   또

 여인은 우리 남자에게는 그야말로 인생 그 자체이다. 즉 호오의 근원이다.

   이성

 나는 볼테르를 경멸하고 있다. 만약 시종 이성에만 충실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만강[각주:17]의 저주를 내려야 한다. 하지만 세게의 절찬에 취한 Candide 작가의 행복함이란!

   자연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는 이유는――적어도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인간처럼 질투하거나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세술

 가장 현명한 처세술이란 사회 관습을 경멸하면서 사회 관습과 모순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여인숭배

 "영원히 여성인 걸" 숭배한 괴테는 확실히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Yahoo의 암컷을 경멸한 스위프트는 정신장애를 앓던 끝에 죽어갔다. 이건 여성의 저주일까? 혹은 이성의 저주일까?

   이성

 이성이 내게 가르쳐준 건 필경 이성의 무력함이다.

   운명

 운명은 우연보다도 필연이다. "운명은 성격 속에 있다"는 말은 결코 가볍게 생긴 말이 아니다.

   교수

 만약 의사의 용어를 빌리자면 가령 문예를 논하려면 임상적이어야 할 터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제가지 인생의 맥박을 짚은 적이 없다. 특히 그들 중 어떤 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문예에는 능통해도 그들을 낳은 조국 문에에는 능통하지 않다고 자칭하고 있다.

   지덕합일

 우리는 우리 스스로마저 알지 못 한다. 하물며 우리가 아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쉽지 않다. "지혜와 운명"을 쓴 마테를링크도 지혜나 운명을 알지 못 했다.

   예술

 가장 어려운 예술은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일이다. 물론 '자유로운'이란 말이 꼭 뻔뻔하게란 말은 아니다.

   자유사상가

 자유사상가의 약점은 자유사상가란 점이다. 그는 도무지 광신자처럼 맹렬히 싸울 수 없다.

   숙명

 숙명은 후회의 자식일지 모른다――혹은 후회는 운명의 자식일지 모른다.

   그의 행복

 그의 행복은 그 스스로의 무교양에 자리를 두고 있다. 또 동시에 그의 불행 또한――아아, 이 무슨 지루한 조절일까!

   소설가

 가장 좋은 소설가는 "세고[각주:18]에 능통한 시인'이다.

   

 갖은 말은 돈처럼 반드시 양면을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민감한"이란 말의 일면은 필경 "겁많은"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물질주의자의 신조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단지 신경을 믿을 뿐이다."

   바보

 바보는 항상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을 바보라 생각한다.

   처세 재능

 "증오"는 무엇보다 확실한 처세 재능 중 하나이다.

   참회

 옛사람은 신 앞에서 참회했다. 지금은 사회의 앞에서 참회하고 있다. 그러면 바보나 악당을 빼면 무언가에 참회하지 않으면 괴로움에 버티지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하지만 어느 쪽의 참회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이다.

   "신생" 독후

 과연 "신생"은 있었던 걸까?

   톨스토이

 비리우코프의 톨스토이전을 읽으면 톨스토이의 '나의 고해'나 '나의 종교'가 거짓이었단 건 명백하다. 하지만 이런 거짓을 이야기해 온 톨스토이의 마음처럼 상처 입은 건 없다. 그의 거짓말은 남의 진실보다도 홍혈을 흘리고 있다.

   두 개의 비극

 스트린드베리의 평생의 비극은 "관람수의"였던 비극이다. 하지만 톨스토이의 평생의 비극은 불행히도 "관람수의"가 아니었다. 따라서 후자는 전자보다도 한층 더 비극적으로 끝난 셈이다.

   스트린드베리

 그는 모든 걸 알았다. 심지어 그가 알고 있는 걸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꺼냈다.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아니, 그 또한 우리처럼 조금의 타산은 있었으리라.

 

   또

 스트린드베리는 "전설" 속에서 죽음은 고통인가 아닌가 하는 실험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런 실험은 유희로 할 수 있는 게 되지 못 한다. 그 또한 "죽고 싶으면서도 죽지 못 한" 한 사람이다.

   어떤 이상주의자

 그는 스스로가 현실주의자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그 스스로는 필경 이상화된 자신이었다.

   공포

 우리에게 무기를 쥐게 하는 건 항상 적에 대한 공포이다. 심지어 대개는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적에 대한 공포이다.

   우리

 우리는 모두 우리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또 동시에 그들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누구도 솔직히 이런 사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연애

 연애는 단지 성욕에 시적 표현을 했을 분이다. 적어도 시적 표현을 주지 않은 성욕은 연애라 부를 수 없다.

   어떤 노련함

 그는 역시 노련했다. 추문이 생기지 않을 때가 아니면 연애마저 많이 하지 않았다.

   자살

 만인에게 공통된 유일한 감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도덕적으로 자살을 비판하는 게 꼭 우연은 아닐지 모른다.

   또

 몬티엔의 자살 변호는 많은 진리를 품고 있다. 자살하지 않는 사람은 않는 게 아니다. 자살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죽고 싶으면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말야.
 그럼 한 번 해보시지.

   혁명

 혁명 위에 혁명을 거듭하라. 그럼 우리는 오늘보다도 합리적으로 사바고[각주:19]를 겪게 될 테니.

   죽음

 마인랜더는 굉장히 정확히 죽음의 매력을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모종의 박자로 죽음의 매력을 느끼면 간단히 그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동심원을 돌 듯이 조금씩 죽음 앞으로 걸어 간다.

   "이로하" 노래[각주:20]


 우리의 생활에 빠져서는 안 되는 사상은 어쩌면 '이로하" 노래에 전부 담겨 있을지 모른다.

   운명

 유전, 환경, 우연――우리의 운명을 다스리는 건 필경 이 세 개이다. 스스로에게 기쁜 일은 기버해도 좋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입에 올리는 건 오지랖이다.

   비웃는 자

 타인을 비웃는 자는 또 동시에 타인에게 비웃음 당할 걸 두려워하고 있다.

   어떤 일본인의 말

 우리에게 스위스를 다오. 그러면 언론의 자유를 줄 테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의 대부분은 분명히 동물적이다.

   어떤 재능 있는 사람

 그는 악당이 될 수 있을지언정 바보는 될 수 없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몇 년인가 지나 보니 적어도 악당이 되지 못 한 건 물론이요 언제나 단지 바보 같을 뿐이었다.

   그리스인

 복수의 신을 제우스 위에 둔 그리스인이여. 너희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또

 하지만 이는 동시에 우리 인간의 진보가 얼마나 늦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성서

 한 사람의 지혜는 민족의 지혜에 미치지 않는다. 단지 조금 더 간결하다면……

   어떤 효자

 그는 그의 어머니께 효도했다. 물론 애무나 키스가 미망인이었던 그의 어머니를 성적으로 위로할 걸 알면서.

   어떤 악마주의자

 그는 악마주의 시인이었다. 하지만 물론 실생활 상에선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는 일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질색을 해버린 셈이다.

   어떤 자살자

 그는 사사로운 일로 자살하려 결심했다. 하지만 그 정도 일로 자살하는 건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 그는 권총을 손에 쥔 채로 태연히 이렇게 혼잣말했다――"나폴레옹이라도 벼룩한테 먹혔을 때는 간지럽다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어떤 좌경주의자

 그는 어떤 극좌보다도 좌익에 자리해 있었다. 따라서 극좌마저도 경멸했다.

   무의식

 우리의 성격상 특징은――적어도 가장 현저한 특색은 우리의 의식을 초월하고 있다.

   자랑

 우리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건 우리가 지니지 못 한 거뿐이다. 실제로――T는 독일어를 잘 했다. 하지만 그의 책상 위에는 항상 영어 책만 놓여 있었다.

   우상

 누구도 우상을 파괴하는데 이존은 지니고 있지 않다. 동시에 스스로를 우상으로 삼는 것에도 이존을 지니지 않는다.

   또

 하지만 태연히 우상이 되는 건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천운을 제외하더라도.

   천국의 백성

 천국의 백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위장이나 생식기를 지니지 않을 터이다.

   어떤 행복한 사람

 그는 누구보다도 단순했다.

   자기혐오

 가장 현저한 자기혐오의 징후는 갖은 것에서 거짓을 발견하는 일이다. 아니, 그뿐이랴. 거짓을 발견하는 일에 조금의 만족도 느끼지 못 하는 일이다.

   외견

 유사 이래의 최대의 겁쟁이야말로 최대의 용사로 보이리라.

   인간적인

 우리 인간의 특색은 신이 결코 저지르지 않을 과실을 점하는 점에 있다.

   

 벌받지 않는 것만큼 괴로운 벌은 없다. 다만 결코 벌받지 않는다고 신의 보증이라도 받으면 또 별개의 문제이다.

   

 도덕과 법률의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모험 행위――죄란 필시 이런 것이다. 따라서 어떤 죄든 전기적 색채를 두르기 마련이다.

   

 나는 양심을 지니고 있지 않다. 내가 가진 건 신경뿐이다.

   또

 나는 이따금 타인을 "죽어버렸으면"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심지어 그 타인 중에는 부모님마저 포함되어 있다.

   또

 나는 이따금 이렇게 생각했다――"내가 저 여자한테 반했을 때 저 여자도 나한테 반한 것처럼, 내가 저 여자를 싫어하게 됐을 때는 저 여자도 나를 싫어하게 되면 좋을 텐데."

   또

 나는 서른이 넘은 후 사랑을 느끼자마자 열심히 서정시를 만들고 깊이 들어가기 전에 물러났다. 하지만 이게 꼭 내가 도덕적으로 진보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뱃속의 주판을 두드릴 줄 알게 됐을 뿐이다.
 

   또

 나는 아무리 사랑한 여자라도 한 시간 이상 이야기하는 건 지루했다.

   또

 나는 이따금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문자로 할 때면 모를까 입으로 하는 거짓말은 항상 치졸하기 짝이 없었다.

   또

 나는 제삼자와 한 여성을 공유하는 일에 불평을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제삼자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사실을 알지 못 할 때에는 어쩐지 갑자기 그 여자에게 증오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나는 제삼자와 한 여성을 공유하는 일에 불평을 지니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제삼자가 전혀 모르는 사이거나 혹은 지극히 먼 사이거나 하는 조건이 필요하다.

   또

 나는 제삼자를 사랑하기 위해 남편의 눈을 피하는 여자에게도 역시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제삼자를 사랑하기 위해 아이를 돌보지 않는 여자에게는 충분한 증오를 느꼈다.

   또

 나를 감상적으로 만드는 건 단지 순수한 아이뿐이다.

   또

 나는 서른이 되기 전에 어떤 여자를 사랑했다. 그 여자는 어느 날 내게 말했다――"당신 아내한테 미안하네." 나는 딱히 내 아내에게 미안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말은 묘하게 내 마음에 스며 들었다. 나는 솔직히 이렇게 생각했다――"혹은 이 여자에게도 미안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이 여자에게만은 상냥한 마음을 느끼고 있다.

   또

 나는 금전에는 냉담했다. 물론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기에.

   또

 나는 부모님께는 효도했다. 부모님 모두 나이를 먹었기에.

   또

 나는 두세 친구들에게는 설령 진실은 말하지 않을지언정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에.

   인생

 혁명에 혁명을 거듭해도 우리 인간의 생활은 '선택된 소수'를 제외하면 언제나 암담할 터이다. 심지어 '선택된 소수'란 '바보와 악당과'의 이명에 지나지 않는다.

   민중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이태백도 치카마츠 몬자에몬도 사라지리라. 하지만 예술은 민중 속에 반드시 씨앗을 남긴다. 나는 다이쇼 12년에 "설령 옥은 깨지더라도 기와는 깨지지 않는다"는 말을 섰다. 그 확신은 오늘날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또

 휘두르는 해머의 리듬을 들어라. 그 리듬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쇼와 원년 1일)

   또

 나는 물론 실패하였다. 하지만 나를 만든 건 반드시 누군가를 만들어내리라. 한 그루의 나무가 갈라지는 건 극히 국소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무수한 씨앗을 품고 있는 넓은 지면이 존재하는 한.(동상)

   어느 밤의 감상

 잠은 죽음보다도 유쾌하다. 적어도 간단하단 건 분명하다.(쇼와 원년 2일)

  1. 마태복음 6장 16절 [본문으로]
  2. 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며서 보다 아름답고, 정연하게 하는 일 [본문으로]
  3. 무덤의 한 줌 흙도 마르지 않았는데 여섯 척 밖에 되지 않는 고아는 누구를 의지하랴. [본문으로]
  4. 경험에 의하지 않고 머리 속에서 이성에만 호소하여 생각함 [본문으로]
  5. 보바리즘.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파생된 단어로 소설의 주인공인 엠마가 보이는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정도 이상으로 생각하려는 특징정인 모습을 가르키는 단어이다. 오늘날 과대망상 혹은 자기환상등으로 그 뜻이 일반화되었다. [본문으로]
  6. 학식(學識)이 있음을 자랑하며 뽐내는 사람 [본문으로]
  7. 고슴도치의 털과 같이 많은 것이 한 곳에 모여든다는 뜻으로, 사물(事物)이 한꺼번에 많이 모임의 비유 [본문으로]
  8.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 주워 들은 것으로 정치를 논한다는 식의 멸칭. [본문으로]
  9. 중국의 전통 연극 [본문으로]
  10. 업무에 근실하고 검약을 존중하며 무용(武勇)을 숭상함. [본문으로]
  11. 조금도 흠이 없는 황금 항아리처럼 완전·견고하고 결점이 없는 일. [본문으로]
  12. 세속의 일을 아는 지혜. [본문으로]
  13. 고등 교육 기관을 졸업했음에도 돈이 부족하지 않아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 [본문으로]
  14. 일부러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는 사람 [본문으로]
  15. (달이 떠오르는 것만큼) 평범함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16. 문장(文章)이나 서화(書畫)의 아담(雅淡ㆍ雅澹)한 멋 [본문으로]
  17. 가슴 속에 가득 참 [본문으로]
  18. 세상(世上)의 풍속(風俗)이나 습관(習慣) 등(等)으로 인(因)한 이러저러한 일 [본문으로]
  19. 현세를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많은 고통. [본문으로]
  20. 이로하 노래는 모든 가나의 문자에서 ‘ん’을 제외한 모든 문자(일부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를 한 번 씩만 사용하여 만든 노래이다. 문자 학습용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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