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의 살롱 한가운데서 테이블을 두고 묘한 남자와 마주하고 있다――
잠깐 기다려줬으면 한다. 배의 살롱이란 것도 사실은 별로 확실하지 않다. 방의 상황이나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는 점으로 그렇게 추정했을 뿐이지, 어쩌면 좀 더 평범한 장소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아니, 역시 배의 살롱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흔들릴 리가 없다. 나는 키노시타 모쿠타로 군이 아니니까 몇 센티로 흔들리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흔들리고는 있다. 거짓말 같다면 창밖의 수평선이 위아래로 출렁이는 걸 보면 된다. 하늘이 어두워 바다는 더할 나위 없는 청록색을 한없이 펼치고 있는데, 그와 잿빛 구름이 하나가 되는 장소가 창틀의 원형을 여러 현으로 잘라내고 있다. 그 안에 하늘과 같은 색을 한 게 하늘하늘 떠올라 있다. 아마 갈매기나 그 비스름한 것일 테지.
자, 내가 마주한 묘한 남자는 코끝에 도수가 높아 보이는 근시 안경을 걸치고 지루하다는 양 신문을 읽고 있다. 사각턱에 짙은 수염을 기른 어디서 본 듯한 남자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산발을 길게 기르고 있는 걸 보면 작가나 화가 같은 계급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입고 있는 갈색 양복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잠시 남자를 훔쳐보며 작은 잔에 담긴 달달한 서양주를 조금씩 홀짝였다. 나도 지루한 참이니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남자의 인상이 꽤나 무뚝뚝해 보이는 탓에 조금 주저되었다.
그러자 사각턱 선생께서는 다리를 쭉 뻗더니 하품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아, 지루하군."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근시 안경 아래로 내 얼굴을 힐끔 보고는 다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더더욱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살롱에선 우리 둘 이외에 아무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잠시 뒤, 이 묘한 남자는 다시 한 번 "아, 지루하군."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신문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는 멍하니 내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가 말했다.
"같이 한 잔 하실까요?"
"이거 고마운걸요." 남자는 술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야 통 지루해서요. 이래서야 도착할 때까지 지루해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동의했다.
"ZOILIA 땅을 밟으려면 아직 일주일 넘게 걸리겠지요. 저는 이제 배는 질색입니다."
"조일리아――요?"
"네, 조일리아 공화국 말입니다."
"조일리아란 나라도 있나요?"
"이거 놀랍군요. 조일리아를 모르시다니 의외인데요. 제가 행선지는 모릅니다만 이 배가 조일리아항에 기항하는 건 꽤나 오래된 관례인데요."
나는 당혹스러웠다. 생각해 보니 무얼 위해 이 배에 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조일리아란 이름은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가요?"
"그렇고말고요. 조일리아는 옛날부터 유명한 나라지요. 아시겠지만 호메로스에게 맹렬히 욕을 한 것 역시 이 나라의 학자입니다. 지금도 조일리아 수도에는 이 사람을 위한 으리으리한 송덕표가 세워져 있을 테지요."
나는 겉보기와 다른 사각턱의 박학다식함에 놀랐다.
"그럼 꽤나 오래된 나라겠군요."
"그럼 오래되었지요. 듣자 하니 신화에 따르면 처음에는 개구리만 살던 나라였답니다. 하지만 아테나가 그 개구리를 모두 사람으로 바꾸었다지요. 그러니 조일리아 사람의 목소리는 개구리와 닮았다는 사람도 있는데 썩 맞는 말 같지는 않군요. 기록에 등장하는 건 호메로스를 퇴치한 호걸이 가장 빨랐다는군요."
"그럼 지금도 상당한 문명국이겠군요?"
"아무렴요. 특히 수도에 위치한 조일리아 대학은 한 나라의 학자를 한데 모아놓은 점에서 세계의 어떤 대학에게도 지지 않겠지요. 실제로 얼마 전 교수들이 고안한 가치 측정기는 근대의 경이라는 소리마저 들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건 조일리아에서 발행하는 조일리아 일보의 말이지만요."
"가치 측정기라니요?"
"말 그대로 가치를 측정하는 기계지요. 주로 소설이나 그림의 가치를 측정하는데 사용하는 모양입니다."
"어떤 가치를 측정하지요?"
"주로 예술적 가치입니다. 물론 다른 가치도 측정할 수 있지만요. 조일리아에선 선조의 명예를 위해 MENSURA ZOILI라 이름 붙였다 합니다."
"그걸 보신 적이 있나요?"
"아뇨, 조일리아 일보의 삽화로 본 게 전부지요. 뭐 척 보기엔 평범한 계량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오르는 곳에 책이나 캔버스를 올리면 되는 거지요. 액자나 제본이 측정상 조금 방해가 되는 모양입니다만 그런 오차는 나중에 정정할 수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굉장히 편리하겠어요."
"편리하다 마다요. 소위 문명의 이기란 거지요." 사각턱은 주머니에서 아사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런 게 만들어지면 겉만 그럴싸한 작가나 화가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지요. 그럴 수밖에요. 가치의 크고 작음이 명백한 숫자로 드러나는 셈이니까요. 특히 조일리아 국민이 이 측정기를 세관에 둔 건 대단히 현명한 처사라 봅니다."
"세관에 두었다고요?"
"외국에서 수입되는 서적이나 책을 측정기로 확인하여 가치가 없으면 수입을 엄금하는 거지요. 요즘에는 일본,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스웨덴, 노르웨이에서 오는 작품을 모두 한 번쯤 걸어본다네요. 근데 일본 쪽은 영 성적이 좋지 않다나요. 제 눈에는 일본에도 좋은 작가나 화가가 많아 보이는데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살롱의 문이 열려 흑인 보이가 들어왔다. 남색 여름 제복을 입은 민첩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보이는 말없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신문 한 다발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문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사각턱은 아사히의 재를 털면서 신문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설형문자 같은 묘한 글자가 이어진 소위 조일리아 일보였다. 나는 이 이상한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남자의 박학다식함에 놀랐다.
"여전히 멘슬라 조일리의 이야기뿐이군요." 그는 신문을 읽으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여기에 저번 달에 일본에서 발매된 소설의 가치가 표로 정리되어 있군요. 측정기사의 정리까지 첨부된 채로요."
"쿠메란 남자는 있나요?"
나는 친구의 이야기가 궁금해져 물어보았다.
"쿠메요? '은화'란 소설이군요.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글렀어요. 애당초 창작의 동기가 인생의 하찮은 발견이니까요. 더군다나 벌써부터 어른인 체 구는 톤이 작품 전체를 저급하게 만든다고 적혀 있군요."
나는 불쾌해졌다.
"유감이로군요." 사각턱은 냉소했다. "당신의 '담뱃대'도 있어요."
"뭐라고 적혀 있지요."
"역시 비슷합니다. 상식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는군요."
"헤에."
"또 이렇게도 적혀 있습니다――이 작가는 벌써부터 작품을 남발한다……"
"거 참."
나는 불쾌한 걸 넘어 조금 바보 같아졌다.
"아니 뭐, 당신뿐일까요. 어떤 작가든 화가든 측정기에 오르면 다 이런 식입니다. 속여 넘길 수 없으니까요. 아무리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띄어본들 실제 가치가 측정되어버리니 도리가 없지요. 물론 동료들 간에 서로 띄어본들 역시 평가표의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요. 부디 열심히 실제로 가치가 오를 법한 걸 적어주시죠."
"하지만 그 측정기의 가치가 확실한지는 어떻게 아는 겁니까?"
"그야 걸작을 올려보면 알지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라도 올려보면 금세 최고 가치를 가리킬 테니까요."
"그게 전부인가요?"
"그게 전부지요."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각턱의 머리가 괴상한 논리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럼 조일리아의 예술가가 만든 작품도 역시 측정기에 오르는 건가요?"
"그건 조일리아의 법률로 금지되어 있지요."
"왜죠?"
"왜냐니요. 조일리아 국민이 찬성을 하지 않으니 도리가 있나요. 조일리아는 예로부터 공화국이었어요. Vox populi, vox Dei(백성의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를 말 그대로 떠받드는 나라지요."
사각턱은 이렇게 말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들의 작품을 측정기에 올리면 바늘이 최저 가치를 가리킬 거란 말도 돌지만요. 만약 그렇다면 그들도 딜레마일 겁니다. 측정기의 정확함을 부정하느냐, 자기 나라 작가들의 가치를 부정하느냐. 어느 쪽이든 내키지 않겠죠――물론 어디까지나 도는 이야기가 그렇단 겁니다만."
그러는 박자에 배가 크게 흔들렸다. 사각턱은 순식간에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러자 그 위로 테이블이 넘어졌다. 술병과 잔이 뒤집힌다. 신문이 떨어진다. 창밖의 수평선이 어딘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접시가 깨지는 소리.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 그리고 파도가 배 밑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충돌이다 충돌. 혹은 해저분화산의 폭발일까.
정신이 들어 보니 나는 서재의 안락의자에 앉아 St. John Ervine의 The Critics란 각본을 읽으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배인 줄 알았던 건 아마 의자가 흔들렸던 탓이리라.
사각턱은 쿠메였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거 같기도 하다. 이건 아직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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