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중국 상하이의 어느 마을입니다. 낮임에도 어두컴컴한 어떤 집 2층에 인상 나쁜 인도 할머니 한 사람이 상인으로 보이는 한 미국인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실은 이번에도 할머님께 점을 부탁하러 왔는데요――"
미국인은 그렇게 말하며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점인가요? 점은 당분간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할머니는 비웃기라도 하듯이 상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요즘엔 모처럼 봐줘도 제대로 사례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져서요."
"그야 물론 사례는 해야죠."
미국인은 아끼는 기색 없이 삼백 달러의 수표 한 장을 할머니 앞에 던져줬습니다.
"일단 이것만 드리죠. 만약 할머니 점이 맞으면 그때는 따로 사례를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삼백 달러 수표를 보자 갑자기 붙임성이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잔뜩 받으면 되려 죄송해지는데요――그럼 뭘 봐드리면 될까요?"
"제가 봐줬으면 하는 건――"
미국인은 담배를 분 채로 교활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언제 전쟁할지를 봐줬으면 합니다. 그거만 알면 우리 상인은 곧장 큰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럼 내일 오시지요. 그전까지 봐두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문제없게――"
인도인 할머니는 의기양양히 가슴을 폈습니다.
"제 점은 50년 동안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습니다. 저는 아그니의 신께서 직접 말을 들으니까요."
미국인이 돌아가자 할머니는 옆방 앞으로 가서,
"에렌, 에렌"하고 불렀습니다.
그 목소리에 반응해 나온 건 아름다운 중국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무슨 고생이라도 있는지 아랫볼이 마치 밀랍 같은 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뭘 꾸물꾸물거리는 거냐? 정말이지, 너만큼 뻔뻔한 여자도 없어. 또 부엌에서 잠이나 자고 있었겠지?"
에렌은 아무리 혼나도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잘 들어라. 오늘 밤엔 오랜만에 아그니의 신께 말을 들을 거야. 알아두어."
여자는 슬픈 눈초리로 새까만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오늘밤이요?"
"오늘밤 열두 시. 알겠니? 잊지 말거라."
인도 할머니는 겁박하듯 손가락을 들었습니다.
"또 요전 번처럼 나만 성가시게 굴면 이번에야말로 네 목숨은 없을 줄 알거라. 너 같은 건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인형의 목을 죄는 것보다――"
그렇게 말하던 할머니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에이 어느 틈엔가 마침 빛이 들던 창가 유리창을 통해 쓸쓸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뭘 보는 거냐?"
에렌은 끝끝내 색을 잃고는 다시 한 번 할머니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래그래. 아직도 나를 바보 취급하는 걸 보니 네가 아직 아픈 꼴을 못 봤구나?"
할머니는 눈에 분노를 품고서 옆에 놓여 있던 빗자루를 들어 올렸습니다.
마침 그때입니다. 누가 밖에 왔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들렸습니다.
둘
그날의 같은 시각. 이 집 밖을 거닐던 젊은 일본인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층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중국인 여자아이를 보고는 잠시 넋을 잃은 것처럼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그때 나이를 먹은 중국인 인력거꾼이 지나갔습니다.
"이, 이봐. 저 2층에 누가 사는지 아나?"
일본인은 그 인력거꾼에게 대뜸 그렇게 물었습니다. 중국인은 인력거를 끄는 봉을 쥔 채로 높은 2층을 올려다봅니다만 "저기 말입니까? 저기는 무슨 인도인 할머니가 살고 계시죠."하고 꺼림칙하게 대답하고는 곧장 길을 가려 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기다려봐. 그럼 그 할머니는 저기서 뭘 팔지?"
"점을 본다네요. 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마법마저 쓴답니다. 그래도 뭐, 목숨이 아까우면 저 할머니 근처는 안 가는 게 좋습니다."
중국인 인력거꾼이 가고 난 후, 일본인은 팔짱을 끼고 무언가 생각해 잠깁니다. 그러나 이윽고 결심이 되었는지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대뜸 할머니의 매도 소리에 뒤섞인 중국인 여자아이의 우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일본인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두세 단씩 어두컴컴한 사다리를 달려 올랐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방 문을 있는 힘껏 두드립니다.
문은 금방 열렸습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인도 할머니 혼자 서있을 뿐으로, 중국인 여자아이는 옆방에 숨기라도 했는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할머니는 의심스럽다는 양 뚫어져라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점술가 아닌가?"
일본인은 팔짱을 낀 채로 할머니의 얼굴을 노려보았습니다.
"그렇지요."
"그럼 내 볼 일 따위 물어볼 필요도 없지 않나? 나도 네게 점을 보러 왔다."
"무엇을 봐드릴까요?"
할머니는 더더욱 의심스럽다는 양 일본인을 살폈습니다.
"내 주인 아가씨가 작년 봄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걸 봐줬으면 하는데――"
일본인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넣어 말했습니다.
"내 주인은 홍콩의 일본 영사다. 아가씨의 이름은 타에코라 하지. 나는 엔도라는 서생인데――어떤가? 아가씨는 어디 계시지?"
엔도는 이렇게 말하며 웃옷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한 정의 권총을 꺼냈습니다.
"이 근처에는 없나? 홍콩 경찰서를 조사해보니 아가씨를 납치한 게 일본인이라는 모양인데――숨기면 좋은 꼴을 못 볼 거야."
하지만 인도인 할머니는 조금도 겁을 먹은 기색이 없습니다. 하물며 입가에는 되려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작은 웃음마저 띄우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그런 아가씨는 얼굴도 못 보았는데?"
"거짓말 마라. 지금 저 창밖으로 보인 건 분명 타에코 아가씨셨어."
엔도는 한 손에 피스톨을 쥔 채로 다른 한 손으로 옆방 문을 가리켰습니다.
"그럼에도 고집을 부리겠다면 저기 있는 중국인을 데리고 오지."
"저 아이는 내 양자라네."
할머니는 역시나 비웃듯이 히죽히죽 홀로 웃을 뿐입니다.
"양자인지 아닌지는 한 번 보면 알 일이지. 네놈이 데려오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가겠다."
엔도가 옆방으로 가려 하자 인도 할머니는 바로 그 문을 가로막았습니다.
"여긴 우리 집이야. 누군지도 모르는 댁을 안에 들이란 말인가?"
"물러나라. 물러나지 않으면 쏴 죽일 거야."
엔도는 피스톨을 들어 올렸습니다. 아니, 들어 올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박자에 할머니가 까마귀처럼 운다 싶더니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피스톨을 손에서 떨어트렸습니다. 성을 내던 엔도도 그 일에는 혼이 쏙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잠시 이상하다는 양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만 곧 용기를 되찾고는.
"마법사년"하고 비하하며 호랑이처럼 할머니를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도 지지 않았습니다. 몸을 훽 돌리더니 빗자루를 들고 붙잡으려 드는 엔도의 머리를 향해 마루 위 쓰레기를 뿌렸습니다. 그러자 그 쓰레기가 모두 불꽃이 되어 엔도의 눈과 입과 얼굴을 불태웠습니다.
엔도는 기어코 참지 못 하고 불꽃의 선풍에 뒤쫓기며 구르듯이 바깥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셋
그날 밤, 12시에 가까운 시각. 엔도는 홀로 할머니의 집 앞에 앉아 2층의 유리창에 비친 그림자를 분하다는 양 바라보았습니다.
"모처럼 아가씨의 위치를 알아냈는데 데리고 오지 못 하는 게 아쉬운걸. 아예 경찰에 가봐야 하나? 아냐아냐, 중국 경찰이 물러 터진 건 홍콩에서 이미 질릴 정도로 겪었어. 만에 하나 이번에도 놓치면 또 찾는 것도 고생이야. 하지만 그 마법사에겐 권총마저 도움이 안 되고――"
엔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대뜸 2층 창문에 종이가 하늘하늘 떨어집니다.
"웬 종이지――혹시 아가씨의 편지인가?"
그렇게 중얼거린 엔도는 그 종이를 주워 품에 숨겨두었던 손전등을 꺼내, 둥근 빛에 비쳐보았습니다. 확실히 종이 위에는 타에코가 쓴 게 분명한 약한 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엔도 씨. 이 집의 할머니는 무서운 마법사입니다. 이따금 밤중에 제 몸에 '아그니'라는 인도의 신을 빙의시킵니다. 저는 그 신이 빙의돼 있는 동안 죽은 것처럼 의식을 잃습니다.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몰라도 할머니가 말하기를, '아그니'의 신이 제 입을 빌려 여러 예언을 해준다고 합니다. 오늘밤도 12시에 할머니가 또 '아그니'의 신을 빙의시킵니다. 평소에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이 멀어지는데, 오늘밤은 그렇게 되기 전에 일부러 마법에 걸린 흉내를 낼 겁니다. 그렇게 저를 아버님께 돌려주라고 '아그니'의 신이 할머니께 명하듯이 말할 생각입니다. 할머니는 무엇보다도 '아그니'의 신을 무서워하니, 그걸 들으면 저를 돌려 보낼 거라 생각합니다. 부디 내일 아침에 다시 한 번 할머니께 와주세요. 이 계략 외에는 할머니의 손에서 도망칠 방법은 없습니다. 부탁드려요."
엔도는 편지를 읽고는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습니다. 시계는 열두 시 오 분 전입니다.
"슬슬 때가 되었군. 상대는 그런 마법사고 아가씨는 아직 어린아이야.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으면――"
엔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마법이 시작된 것이겠죠. 이제까지 밝았던 2층 창문이 불쑥 어두워집니다. 그와 동시에 이상한 향이 마을의 바닥에도 스며 들 정도로 어디선가 조용히 풍겨왔습니다.
넷
그때, 인도인 할머니는 램프가 꺼진 이층 방 책상에 마법 서적을 펼쳐 놓으며 주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향로의 불빛 덕에 어두운 와중에도 서적의 문자만은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습니다.
할머니 앞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에렌이――아니, 중국 차림을 한 타에코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까 창문으로 떨어트린 편지는 무사히 엔도 씨의 손에 들어갔을까?――그렇게 생각한 타에코는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색이 혹여라도 할머니의 눈에 들어가면 이 무서운 마법사의 집에서 도망치는 계락 또한 금세 들통나고 말겠지요. 때문에 타에코는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미리 계획한 대로 아그니의 신이 빙의 된 것처럼 보일 때가 다가오는 걸 기다렸습니다.
할머니는 주문을 외우고는 타에코의 주위를 돌며 여러 손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은 앞에 선 채로 두 손을 좌우로 들어 올리고, 또 한 번은 마치 눈이라도 가리듯이 타에코의 이마 위에 손을 얹고는 합니다. 만약 누가 방밖에서 할머니의 모습을 본다면, 창백한 향로의 불빛 속에서 커다란 박쥐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테지요.
그러는 사이 타에코는 여느 때처럼 점점 잠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들어 버리면 모처럼 세운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 겁니다. 하물며 두 번 다시는 아버지께 돌아가지 못 하겠지요.
"일본의 수많은 신이시여, 부디 제가 잠들지 않도록 지켜봐 주세요. 대신 다시 한 번, 설령 한 번이라도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면 당장 죽어도 괜찮습니다. 일본의 수많은 신이시여, 부디 할머니를 속일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세요."
타에코는 속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잠기운은 점점 강해지고 맙니다. 동시에 타에코의 귀에 마치 동라라도 울리는 듯한 정체 모를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그니의 신이 하늘에서 내려 올 때면 항상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이래서야 아무리 참아도 잠들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눈앞의 향로의 불이나 인도인 할머니의 모습마저 꺼림칙한 꿈이 희박해지는 것처럼 조금씩 사라져 갑니다.
"아그니의 신이시여, 아그니의 신이시여. 부디 제 부탁을 들어 주세요."
이윽고 마법사가 마루 위에 엎드린 채로 갈라진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타이코는 의자에 앉은 채로 거의 생사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푹 잠들어 있엇습니다.
다섯
타에코는 물론이고 할머니도 마법을 쓰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 하리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방 밖에서 열쇠 구멍 너머로 훔쳐보는 남자 한 명이 있었습니다. 과연 누구였을까요?――말할 것도 없이 서생 엔도였습니다.
타에코의 편지를 본 엔도는 잠시 길거리에 서서 동이 트는 걸 기다릴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안전을 생각하니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결국 도둑처럼 집에 몰래 숨어들어 2층 현관까지 와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훔쳐본다 해도 작은 열쇠 구멍입니다. 창백한 향로 불빛을 받으며 죽은 사람처럼 잠든 타에코의 얼굴이 겨우 정면에 보일 뿐입니다. 그 외엔 책상도 마법 서적도 마루에 엎드린 할머니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갈라진 할머니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들렸습니다.
"아그니의 신이시여, 아그니의 신이시여. 부디 제 말을 들어주시옵소서."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앉아 있던 타에코가 역시나 눈을 감은 채로 대뜸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도무지 타에코 같은 소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친 남자의 목소리입니다.
"아니, 나는 네 바람 따위 들어주지 않는다. 너는 내가 한 말을 듣지 않고 항상 나쁜 짓만을 해왔지. 나는 오늘부로 너를 버릴 생각이다. 아니, 그걸로 부족하니 나쁜 짓에 따른 벌을 주려고 한다."
할머니는 황당했겠지요. 잠시 아무 대답도 못 하더니 신음하는 소리만 냅니다. 하지만 타에코는 할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엄숙히 말을 이었습니다.
"너는 불쌍한 아버지에게서 이 여자를 훔쳐 왔다. 만약 목숨이 아깝다면 내일도 부족하다. 지금 이 밤 동안에 어서 이 여자를 돌려놓거라."
엔도는 열쇠 구멍에 눈을 얹은 채로 할머니의 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놀라기라도 했는지 생각과 달리 지독한 웃음소리를 내며 대뜸 타에코의 앞에 섰습니다.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나는 아직 너한테 속을만큼 늙지 않았어. 어서 너를 아버지에게 돌려놓아라――경찰도 아니고 아그니의 신이 그런 말을 할 거 같으냐?"
할머니는 어디서 꺼낸 건지 눈을 감은 타에코의 얼굴을 향해 나이프 한 자루를 들이밀었습니다.
"자, 솔직하게 말하거라. 네가 불손하게도 아그니의 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거지?"
아까부터 보던 엔도도 타에코가 정말로 자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엔도는 혹여 계락이 들통난 건가 싶어 가슴이 뛰었습니다. 하지만 타에코는 여전히 눈꺼풀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비웃 듯이 답하였습니다.
"너도 죽을 때가 다 되었구나. 네게는 내 목소리가 인간의 목소리로 들리더냐. 내 목소리는 낮더라도 천상에 불타는 불꽃의 목소리다. 너는 그걸 알지 못 하느냐. 알지 못 한다면 멋대로 하거라. 나는 단지 네게 묻고 있다. 이 여자를 당장이라도 돌려놓을 거냐, 아니면 내 말을 무시할 거냐――"
할머니는 조금 주저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곧 용기를 되찾고는 한 손에 나이프를 쥐고, 한 손에 타에코의 멱살을 쥐고 손 옆으로 끌고 옵니다.
"이 멍청한 계집애. 아직도 허세를 부리는구나. 좋다, 좋아. 그럼 약속대로 단 번에 목숨을 끊어주마."
할머니는 나이프를 들어 올렸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타에코가 죽고 맙니다. 엔도는 곧장 몸을 일으켜 잠긴 문을 억지로 열려 했습니다. 하지만 문은 간단히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밀고 두드려도 손바닥 피부만 벗겨질 뿐이었습니다.
여섯
그러는 동안 방 안에서는 누군가의 고함이 대뜸 어둠 속에 울렸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마루 위로 쓰러지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엔도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타에코의 이름을 외치며 온몸의 힘을 어깨에 담아 몇 번이나 문에 부딪혔습니다.
판이 갈라지는 소리. 자물쇠가 박살 나는 소리――문은 끝내 박살이 났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방 안에는 아직도 향로의 창백한 불이 일렁일 뿐으로, 인기척도 없이 조용했습니다.
엔도는 그 빛에 의지하여 머뭇머뭇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건 역시나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는 타에코였습니다. 그 모습은 어째서인지 머리 뒤에서 후광이라도 비추는 듯한 엄숙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가씨, 아가씨."
엔도는 의자에 다가가 타에코의 귓가에 입을 얹고 열심히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타에코는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가씨, 정신 좀 차려보세요. 엔도입니다."
타에코는 겨우 꿈에서 깬 것처럼 희미하게 눈을 떴습니다.
"엔도 씨?"
"네, 엔도 맞습니다. 이제 괜찮으니 안심하세요. 자, 어서 도망치죠."
타에코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이 약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계락은 실패했어요. 제가 그만 잠들어 버려서――참아주세요."
"계락이 들통난 건 아가씨 탓이 아닙니다. 아가씨는 저와 약속한 대로 아그니의 신이 빙의된 흉내를 내지 않으셨습니까?――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자, 어서 도망치죠."
엔도는 성가시다는 양 타에코를 안아 올렸습니다.
"어머, 말도 안 돼. 저는 잠들었는걸요.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요."
타에코는 엔도의 가슴에 기대며 중얼거리 듯이 말했습니다.
"계락은 실패했어요. 저는 도망칠 수 없어요."
"그럴 리가요. 저와 함께 가시죠. 이번에 실수하면 큰일입니다."
"그치만 할머니가 있잖아요?"
"할머니?"
엔도는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아까처럼 마법 서적이 펼쳐져 있습니다――그 아래에 쓰러져 있는 건 그 인도인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어찌 된 일인지 자기 가슴에 자기 나이프를 꽂은 채로 피웅덩이 속에 죽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떻게 된 거죠?"
'죽었어요."
타에코는 엔도를 올려다보며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렸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할머니는 엔도 씨가――당신이 죽여버린 건가요?"
엔도는 할머니의 시체에서 눈을 떼고 타에코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오늘 밤의 계락이 실패한 게――하지만 그 때문에 할머니도 죽었을뿐더러 타에코도 무사히 되찾은 게――운명의 힘이 가진 신비함을 엔도가 깨달은 게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저 할머니를 죽인 건 오늘 밤 여기로 온 아그니의 신이지요."
엔도는 타에코를 품은 채로 엄숙히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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