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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사쿠사 공원 ――어떤 시나리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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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쿠사 니오몬 안에 걸린 불이 들어오지 않은 대제등. 제등은 서서히 위로 올라 난잡한 상점가를 드러나게 한다. 하지만 대제등 아랫부분만은 남는다. 문 앞에 나는 무수한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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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미나리몬에서 세로로 본 상점가. 정면에선 저 멀리 니오몬이 보인다. 나무는 모두 시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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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점가 한 쪽. 외투를 입은 남자 하나. 열두어 살 먹은 소년과 함께 어슬렁어슬렁 상점가를 걷는다. 소년은 아버지의 손을 놓고 이따금 장난감 가게 앞에 멈춘다. 아버지는 물론 소년을 혼낸다. 하지만 이따금 아버지 스스로도 소년이 있는 걸 잊고 모자 가게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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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아버지의 상반신. 아버지는 촌뜨기 같다. 정돈되지 않은 긴 수염을 가진 남자. 소년은 귀엽다기 보다도 되려 가련한 얼굴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의 뒤에는 난잡한 상점가. 그들은 이쪽으로 걸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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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듬하게 본 어떤 장난감 가게. 소년은 가게 앞에 선 채로 줄을 오르내리는 장난감 원숭이를 바라본다. 장난감 가게 안에선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소년의 모습은 무릎 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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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을 오르내리는 원숭이. 원숭이는 연미복을 입고서 실크햇을 비스듬하게 스고 있다. 이 줄이나 원숭이의 뒤편은 깊은 어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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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난감 가게가 자리한 상점가의 한켠. 원숭이를 보던 소년은 불쑥 아버지가 없단 걸 깨닫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해 그쪽으로 연신 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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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 단 역시나 무릎 위까지. 소년은 이 남자의 뒤를 쫓아 외투 소맷자락을 잡는다. 놀라서 돌아 본 남자의 얼굴은 아쉽게도 촌뜨기 같은 아버지가 아니다. 깔끔하게 턱수염을 손질한 도시 사람 같은 신사이다. 소년의 얼굴에 오가는 실망이나 당혹스러운 표정. 신사는 소년을 남긴 채로 더나간다. 소년은 카미나리몬을 뒤에 둔 채 멍하니 홀로 서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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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 번 아버지로 보이는 뒷모습. 하지만 이번에는 상반신. 소년은 남자의 뒤를 쫓아 머뭇머뭇 고개를 든다. 두 사람의 반대편에는 니오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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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앞을 본 얼굴. 그는 마스크로 입을 감춘, 인간보다도 동물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다. 무언가 악의가 느껴지는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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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점가의 한켠. 소년은 남자를 보내며 먼 곳을 바라보듯 서있다. 어디를 보아도 아버지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년은 조금 생각한 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한다. 나란히 서양옷을 입은 두 소녀가 그를 돌아 본 것도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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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경 가게의 쇼윈도. 근시 안경, 원시 안경, 쌍안경, 확대경, 현미경, 방진안경 등이 줄지은 가운데, 서양 인형의 목 하나가 안경을 쓴 채 작게 웃고 있다. 그 창 앞에 선 소년의 뒷모습. 다만 뒤편에서 비스듬하게 본 상반신. 인형의 목은 저절로 인간의 목으로 바뀐다. 그뿐 아니라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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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경을 사서 돌아가세요. 아버지를 찾으려면 안경을 써야지요."
 "나는 눈 안 나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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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듬하게 본 조화 가게의 쇼윈도. 조화는 모두 대나무 바구니니 자기 화분 안에 꽃피우고 있다. 개중에서도 가잔 큰 건 왼쪽에 핀 참나리꽃. 쇼윈도의 유리는 소년의 상반신을 비추기 시작한다. 마치 유령처럼 희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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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윈도의 유리 너머로 조화를 가로막는 소년의 상반신. 소년은 유리 위에 손을 얹는다. 숨이 닿는 탓인지 얼굴만이 살짝 흐릿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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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윈도 안의 참나리 꽃. 단지 뒤편은 어둡다. 참나리 꽃 아래에 놓인 봉우리도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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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아름다움을 보세요."
 "넌 조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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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퉁이서 본 담배가게 쇼윈도. 담배캔, 담배곽, 파이프 등이 줄지은 가운데 비스듬하게 표찰 하나가 걸려 있다. 표찰에 적힌 글은――"담배 연기는 천국의 문입니다." 천천히 파이프에서 올라오는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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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가 충만한 쇼윈도의 정면. 소년은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단지 역시나 무릎 위까지. 연기 속에 희미하게 성 세 개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성은 Three Castles의 상표를 입체화한 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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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성 중 하나. 성문에는 병졸 하나가 총을 든 채 자리하고 있다. 또 격자문 너머에는 종려나무 몇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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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의 문 위. 그곳에는 어느 틈엔가 이런 문자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 문에 들어오는 자 영웅이 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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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오는 소년의 모습. 앞의 담배가게 쇼윈도는 비스듬하게 소년의 뒤에 서있다. 소년은 잠시 돌아 본 후, 다시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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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린 종만 보이는 종루 내부. 당목은 누군가의 손에 줄로 묶여 천천히 종을 울리고 있다. 한 번, 두 번, 세 번――종루 외엔 소나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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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듬하게 본 사격 가게. 과녁 뒤에는 담배곽을 쌓아놓고 앞에는 점토 인형이 줄지어 있다. 인형 중 하나는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가진 서양 여자였다. 소년은 머뭇머뭇 가게 안으로 들어가 공기총 하나를 들고 무분별하게 과녁을 노린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의 모습은 무릎 위까지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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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인 여자 인형. 인형은 조용히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고 만다. 그렇게 인형에 명중하는 코르크 탄환. 인형은 물론 기울어 쓰러진다. 인형의 뒤편 또한 어둠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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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격 가게. 소년은 또 공기총을 들고 이번에는 열심히 과녁을 노린다. 세 발, 네 발, 다섯 발――하지만 과녁은 하나도 떨어지지 않는다. 소년은 마지못해 동전을 내고 가게 밖으로 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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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단지 어두운 가운데 사각형의 무언가가 보일 뿐. 그러던 가운데 사각형의 무언가는 불쑥 불이 들어오더니 위아래로 이런 문자를 띄운다――위로 "공원 6구" 아래에 "야경소초". 위에 건 검은 테두리에 흰색 글자이고, 아래 건 검은 테두리에 붉은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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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 뒤편의 상부. 불이 들어온 창문 하나가 보인다. 똑바로 물받이를 내린 벽에는 여러 포스터가 벗겨진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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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 뒤편의 하부. 소년은 그곳에 자리하여 한동안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또 높은 창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창문서는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듬직한 불테리어 한 마리가 소년의 발밑을 지나간다. 소년의 냄새를 맡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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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극장 뒤편의 상부. 불이 들어온 창문에는 댄서 하나가 나타나 냉담히 길거리를 바라본다. 이 모습은 물론 역광 때문에 얼굴은 또렷이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소년과 닮은 가련한 얼굴을 드러내고 만다. 댄서는 조용히 창을 열고 작은 꽃다발을 아래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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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거리에 선 소년의 발밑. 작은 꽃다발 하나가 떨어진다. 소년의 손이 그걸 줍는다. 꽃다발은 길거리에서 벗어나자마자 가시 다발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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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게시판. 게시판은 "북쪽 바람, 맑음"이란 자가 분필로 적혀 있다. 하지만 그게 희미해져 "남쪽 바람 강함, 비가 내릴 듯함"하는 글자로 바뀌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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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듬하게 본 표찰집 노점. 천막 아래에 줄지은 견본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니노미야 타카노리, 와타나베 카잔, 콘도 이사미, 치카마츠 몬자에몬 같은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런 이름도 어느 틈엔가 흔해 빠진 이름으로 바뀌고 만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표찰 너머에 희미하게 떠오른 호박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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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 너머에 줄지은 몇 채의 영화관. 연못에는 물론 전등의 그림자가 수없이 드리워 있다. 연못 왼쪽에 선 소년의 상반신. 소년의 모자는 눈 깜짝할 새에 바람에 날려 연못에 바지고 만다. 소년은 이래저래 허둥지둥거린 후, 이쪽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거의 절망에 가까운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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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쇼윈도. 설탕탑, 화과자, 밀짚 파이프를 넣은 탄산수컵 너머에 몇몇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다. 소년은 이 쇼윈도 앞을 지나다 창 왼쪽에 발을 멈추고 만다. 소년의 모습은 무릎 위까지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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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외부.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 둘이 유리창 안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망토를 입은 아이를 안고 있다. 그러는 사이 카페는 저 혼자 돌아 주방 뒤를 드러낸다. 주방 뒤에는 굴뚝 하나. 그곳에는 노동자 둘이 삽을 움직이고 있다. 등불 하나 겨우 킨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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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블 앞의 어린이용 의자 위에서 상반신을 보이는 방금 전 아이. 아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젓고 손을 들어 올린다. 아이 뒤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 어느 틈엔가 장미꽃이 하나씩 조용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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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듬하게 보이는 자동계산기. 계산기 앞에는 손 두 개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물론 여자 손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열리는 서랍. 서랍 안에는 돈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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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의 쇼윈도. 소년의 모습도 달라지지 않았다. 잠시 후, 소년은 천천히 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이쪽으로 걸어온다. 얼굴만 남았을 때, 잠깐 멈춰 서 무언가를 본다. 조금 놀란 것에 가까운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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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파 속에 선 경매 상인. 그는 펼쳐 놓은 비단 속에 서서 오비 하나를 흔들며 열심히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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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손에 쥔 오비 중 하나. 오비는 전후좌우로 흔들며 끝자락을 두세 척 가량 드러낸다. 오비의 모양은 확대한 눈송이. 눈송이는 서서히 돌면서 오비 밖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42
 

 메리야스 가게의 노점. 셔츠나 바지를 건 아래에 할머니 한 사람이 히터불을 쬐고 있다. 할머니의 앞에도 속옷. 털옷도 섞여 있다. 히터불 옆에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이따금 앞발을 핥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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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터 옆에 앉은 검은 고양이. 왼쪽에는 소년의 하반신도 보인다. 검은 고양이도 처음엔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긴 페스 모자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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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야, 스웨터 하나 사려무나."
 "나는 모자 하나 살 돈도 없는 걸."

          45

 메리야스 노점을 뒤로 한 지친 소년의 상반신. 소년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시 이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46

 희미하게 별이 빛나는 저녁 하늘. 거기에 큰 얼굴 하나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얼굴은 소년의 아버지인 듯하다. 애정은 담겨 있지만 무언가 무한히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 얼굴도 곧 안개처럼 어딘가로 사라지고 만다.

          47

 세로로 본 길거리. 소년은 이족에 등을 보인 채로 길거리를 걷는다. 길거리는 인파가 많지 않다. 소년의 뒤로 걸어오는 남자. 이 남자는 잠깐 돌아보아 마스크를 쓴 얼굴을 보여준다. 소년은 한 번도 뒤를 보지 않는다.

          48

 비스듬하게 본 격자문 집의 외부. 문 앞에는 인력거 세 대가 뒤로 정차되어 잇다. 인파는 역시 많지 않다. 츠노카쿠시를 쓴 신부가 한 명. 몇몇 사람과 함께 격자문을 지나 조용히 앞 인력거에 오른다. 인력거는 세 대 모두에 사람을 태우고는 신부를 앞에 둔 채 달린다. 그 뒤에서 소년의 뒷모습. 격자문 앞에 선 사람들은 물론 소년에게 눈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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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YZ 회사 특제품, 미아, 문예적 영화."하고 적힌 직사각형의 판. 이 또한 이 판을 전후로 한 샌드위치 맨으로 바뀌고 만다. 샌드위치 맨은 나이를 먹었지만 어딘가 상점가를 걷던 도시 사람 같은 신사와 닮아 있다. 뒤에는 앞보다도 인파가 많다. 여러 가게가 줄지은 길거리. 소년은 그곳을 지나 샌드위치 맨이 나눠주는 광고 하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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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로로 본 이전 길거리. 송엽 지방이를 한 전상군인 한 명이 천천히 걸어온다. 전상군인은 어느 틈엔가 타조로 바뀌어 있다. 하지만 잠시 걷는 사이에 다시 전상군인이 되고 만다. 골목 옆에는 포스터 한 장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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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둘러라. 서둘러라. 언제 죽을지 모른다."

          52

 길거리의 구석에 세워져 있는 우체통. 우체통은 어느 틈엔가 투명해져 무수한 편지가 겹쳐진 원통형의 내부를 드러낸다. 하지만 서서히 이전 같은 단순한 우체통으로 변해간다. 우체통 뒤에는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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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듬하게 본 게이샤 거리. 방을 나온 게이샤가 둘. 신등이 들어온 격자문을 나와 조용히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어느 쪽도 표정을 보이지 않는다. 두 게이샤가 지나간 후,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소년의 모습. 소년은 조금 돌아본다. 전보다도 더 쓸쓸해진 표정. 소년은 서서히 작아진다. 그 너머에 서있던 키가 작은 성대모사꾼 한 명이 역시 이쪽으로 걸어온다. 그가 앞까지 걸어 나온 걸 보면 어딘가 소년과 닮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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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철사 주위에 걸려 있는 가발. 그 가발 속에는 "월자가 들어간 앞머리"라 적혀 있다. 이러한 가발은 어느 틈엔가 이발소 봉으로 바뀌고 만다. 봉 뒤에는 어둠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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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발소 외부. 커다란 유리 너머에는 남녀 몇 명이 움직이고 있다. 소년은 그곳을 지나다 잠깐 내부를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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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를 깎는 남자의 옆얼굴. 이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철사에 걸린 몇 개의 가발로 바뀌고 만다. 가발 안에 걸린 표찰이 하나. 이번에는 "꼭지"라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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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세션풍의 병원. 소년은 다가가 돌계단을 오른다. 하지만 문안에 들어가나 싶었더니 곧장 다시 계단을 내려온다. 소년이 왼쪽으로 간 후, 병원이 조용히 이쪽으로 다가와 기어코 현관만 남는다. 그 유리창을 밀고 나온 간호사 한 명. 간호사는 현관에 선 채로 무언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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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릎 위에 놓인 간호사의 두 손. 앞에 놓인 왼손에는 결혼반지 하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반지는 저절로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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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짝 하늘을 남긴 콘크리트 울타리. 이 또한 저절로 투명해져 격자 안에 무리 지은 몇 마리 원숭이를 보여준다. 또 울타리 전체는 꼭두각시 인형의 무대로 바뀌고 만다. 무대는 서양식 실내. 그곳에 서양 인형 하나가 머뭇머뭇 주위를 살피고 있다. 복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이 방에 숨어든 도둑인 듯했다. 방의 구석에는 금고 하나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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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고를 여는 서양 인형. 단 이 인형의 손발에 매달린 얇은 실도 몇 개는 또렷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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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듬하게 보인 콘크리트 울타리. 울타리는 이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곳을 지나는 소년의 그림자. 그 뒤에서 이번에는 등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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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비스듬하게 내려 본 길거리. 길거리 위에는 낙엽 한 장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거기에 내려오는 전보다도 큰 낙엽 한 장. 마지막으로 잡지 광고로 보이는 종이 한 장도 날아온다. 종이는 아쉽게도 찢어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또렷이 보이는 "생활, 정월호"이라는 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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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상록수 아래에 놓인 벤치. 나무 너머로 보이는 건 이전 연못의 일부. 소년은 그곳에 걸어 가 실망한 것처럼 앉는다. 그러고는 눈물을 닦기 시작한다. 그러자 앞서 본 등이 역시나 홀로 벤치에 앉는다.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상록수. 소년은 문득 등을 바라본다. 하지만 등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품에서 군고구마를 꺼내 먹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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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고구마를 먹는 등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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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의 앞에 놓인 벤치. 등은 역시나 군고구마를 먹고 있다. 소년은 겨우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어딘가로 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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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스듬하게 위에서 내려다 본 벤치. 판을 투과한 벤치 위에는 동전 지갑 하나가 남아 있다. 그러자 누군가의 손이 동전 지갑을 가져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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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 앞 벤치. 단지 이번에는 비스듬하다. 벤치 위에는 등이 홀로 동전 지갑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어느 틈엔가 등의 좌우에 몇 명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윽고 벤치 위에선 등만 보이게 된다. 심지어 모두 나란히 지갑 안을 바라보고 있다. 서로 무언가 이야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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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관의 쇼윈도. 남녀 사진 몇 장이 제각기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남녀의 얼굴도 어느 틈엔가 노인으로 바뀌고 만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단 한 장. 플록 코트에 훈장을 건 턱수염이 자란 노인의 반신만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얼굴도 어느 틈엔가 앞서 나온 등의 얼굴로 바뀐다.

          69

 옆에서본 관음당. 소년은 그 아래를 걷는다. 관음당 위에는 초승달 하나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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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당 정면의 일부. 단 문은 열리기 시작하고 있다. 그 앞에서 예배하는 몇몇 사람들. 소년은 그곳에 걸어가 등을 모인 채로 관음당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대뜸 이족을 보고는 비스듬하게 걸어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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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비스듬하게 내려다 본 커다란 직사각형의 분수대. 국자 몇 개가 올라와 있는 물에 등불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워 있다. 거기에 다시 드리우는 초췌한 소년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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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다란 석등롱 하부. 소년은 그곳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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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등롱 하부의 뒤편. 남자 하나가 자리한 채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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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의 상반신. 물론 얼굴만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다. 하지만 조용히 돌아본다 싶었더니 마스크를 싼 이전 번 남자이다. 그뿐 아니라 그 얼굴도 곧 소년의 아버지로 변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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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등롱 상부. 석등롱은 기둥을 남긴 채로 저절로 불이 되어 불타고 만다. 불이 약해진 후 거기에 피기 시작하는 국화꽃 한 송이. 국화는 석등롱의 머리 부분보다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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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등롱 하부. 소년은 여전하다. 거기에 모자를 깊게 써 눈을 가린 순사 한 명이 걸어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소년은 놀라서 일어나고 순사와 무언가 이야기한다. 그리고 순사에게 손을 끌려 조용히 어딘가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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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등롱 하부의 뒤편. 이제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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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오문의 대제등. 대제등은 서서히 위로 오르고 이전처럼 상점가를 둘러본다. 단지 대제등의 하부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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