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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소설의 희곡화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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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장사에 관한 법률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이를테면 어떤 잡지사에 약 몇 장의 단편을 하나 건네 약 몇 엔을 받았다 치자. 그때 그 돈은 소설만 판 돈인가 혹은 소설이 쓰인 약 몇 장의 원고용지가 팔린 돈인가. 법률은 무엇 하나 규정하고 있지 않다. 이게 우리의 원고라면 모를까 나츠메 선생님의 원고쯤 되면 당연히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가장 곤란한 건 어떤 종류의 저작권 침해이다.
 이를 테면 얼마 전 키쿠치 칸은 소설 "기민진베이"를 세 막의 희곡으로 고쳐 썼다. 그런 걸 키쿠치 본인이 하지 않고 내가 희곡으로 고쳐 썼다고 치자. 그 경우 나는 의리 상, 혹은 관습 상 일단 키쿠치의 허가를 받은 후 희곡으로 바꿔 쓸 게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그 원고료 내지는 상영료의 몇 할을 키쿠치에게도 나눠주리라. 하지만 만에 하나 허가를 받지 않고 원고료 및 상영료를 착복하더라도 나는 벌을 받거나 감옥에 가지 않는다. 아니, 일본 법률 속 그런 저작권 침해에 관한 명문이 존재하는 이상 내일 또한 어제처럼 태연히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을 법 하다.
 그나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저작권 침해를 당하면 적어도 키쿠치는 포기할 수 있다. 적어도 절교장만 내놓으면 대부분은 해결될 법하다. 하지만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 군자가 재빠르게 해치웠을 때에도 역시나 잠자리에서 누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면――물론 키쿠치는 강제 집행을 해서라도 법정서 권리를 다툴지 모른다. 하지만 공소를 해본들 패소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건 아무리 봐도 불합리한 처사이다.
 물론 이건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영국 또한 마찬가지다. 적어도 Shaw의 Admirable Bashville를 시작으로 한 서적 형태가 된 천구백십삼 년 경은 비슷했을 터이다.(이건 쇼가 자신의 소설 Cashel Byron's Profession를 희곡으로 다시 쓴 것이다. 쇼는 물론 이 희곡의 서문에 이러한 저작권 침해에 관한 부족한 법률을 논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법률 지식이 희박한 나는 영원히 이런 일을 알아차리지 못 했을지 모른다. 혹은 또 천구백십 년 쯤에 스스로 깨달았을지 모른다.)
 이러한 부족한 법률에 대응하는 법은 키쿠치 칸이 그러했던 것처럼, 혹은 또 쇼가 그러했던 것처럼 희곡이 될 소설이 있을 경우에 작가 스스로가 희곡으로 다시 쓰는 일이다. 하지만 희곡을 쓰지 않는 작가는(이를테면 나 같은 경우) 다시 쓰는 게 쉽지 않다. 그러면 이런 한 무리의 작가는 마치 난세의 백상처럼 떠돌이 무사의 강도 짓에도 조용히 따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건 다이쇼의 성대에 어울리지 않는 뒤숭숭한 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 외에 법규대전을 훑어보면 저작권의 소재 같은 건 굉장히 애매하기 짝이 없다. 어찌 되었든 글 장사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법률의 은혜를 받지 못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또 생각해 볼 일은 작가 본인이 소설을 희곡으로 바꿔써도 되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키쿠치는 "기민진베이"를 소설에서 희곡으로 다시 썼다. 하지만 "기민진베이"를 소설 형식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또 희곡 형식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건 키쿠치가 미리 생각할, 혹은 생각해야 할 일이다. 그런 걸 먼저 소설로 쓰고 나중에 희곡으로 쓰는 건 어제 먹은 회를 누타로 만든 것과 같은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적어도 누타로 만들어야 할 생선을 회로 만든 것과 같은 불명확함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그런 생각도 해봄직 하다.
 하지만 같은 소재를 두 번 쓰면 안 될 이유도 없다. 아니, 소설에서 희곡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소설에서 소설도 될 수 있을 터이다. 이를테면 쿠메 마사오는 단 한 번의 실연을 무수한 소설로 쓰지 않았나?(이건 쿠메를 비웃는 게 아니다. 무수히 실연한 주제에 단 하나의 소설도 쓰지 못 하는 신시대 청년에 비하면 쿠메는 굉장히 대단하다 봐야 한다.) 하물며 소설에서 희곡으로 만드는 건 부끄러운 일도 무엇도 아닐 터이다. 물론 어느 한 쪽이 대성하는 일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동일 작가에게 걸작이 있는가 하면 범작도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게 분명하다. 그건 소설로 만들었을 경우와 다른 견지에 서서 희곡으로 다시 썼을 경우에만 국한될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좋게 봐줘도 불명확하단 비난만은 피할 수 없으리라――이 말은 얼핏 그럴싸하다. 확실히 희곡으로 한 결과 소설보다도 뛰어나다면 과거의 불명확성을 나무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곡으로 만들면 걸작이 될 것을 희곡으로 바꾸지 않고 둔다면 현재의 불명확성은 과거의 불명확성보다도 한 층 더 비난받아야 할 터이다. 또 희곡으로 만든 결과, 소설보다도 효과가 부족하다 해도 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도 감상할 경우를 생각하면 뭉뚱그려 비난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이를테면 스트랫퍼드의 아이를 위해 이야기를 쓴다면, 셰익스피어는 조금의 효과를 덜어내서라도 "템페스트"를 이야기로 다시 쓸 것이다. 하물며 앞에도 적은 것처럼 어떤 종류의 저작권 침해만은 법률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 그럼 희곡을 쓸 수 있는 작가는 희곡화할 수 있는 소설을 가지고 있는 이상, 재빨리 희곡으로 다시 쓰는 것도 당연한 조치 아닐까?
 물론 과거의 불명확성도 옳지 못 하다. 조금의 효과를 덜어내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다면――'그대들 중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들라'이다. 나는 단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쓴웃음을 지어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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