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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떤 원수 갚는 이야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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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히고의 호소카와 가문의 가종 중에 타오카 진다유란 사무라이가 있었다. 이는 이전엔 휴가의 이토 가문에 소속된 로닌이었으나 당시 호소카와 가문의 반카시라였던 나이토 산자에몬의 추천을 받아 백오십 석에 호소카와 가문에 오게 되었다. 。

 헌데 칸분 7년 봄, 가종의 무예 시합이 있었을 때 그는 창술을 활용해 상대하게 된 사무라이를 여섯 명까지 쓰러트렸다. 그 시압에는 엣츄노 카미츠나토시 또한 늙은 사무라이 일동과 함께 임했는데 진다유의 창술이 너무나 훌륭하여 더욱이 검술 시합도 요청하려 했다. 진다이는 죽도를 들고 또 세 명의 사무라이를 때려눕혔다. 네 번째는 가종의 젊은 사무라이 중 신카게류 검술을 가르치는 세누마 효에가 상대가 되었다. 진다유는 지도역의 면목을 생각해 효에에게 승리를 양보하려 했다. 하지만 승리를 양보하려는 게 드러나도록 시원하게 당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효에는 진다유와 승부하며 그런 마음을 자각하자 불쑥 상대가 미워졌다. 때문에 진다유가 일부러 수세에 돌아섰을 때 분연히 찌르기를 넣었다. 진다유는 목을 강하게 찔려 크게 뒤로 뻗어비로 말았다. 그 모습은 참으로 볼품 없었다. 츠나토시는 그의 창술을 칭찬했으면서도 이 승부가 난 후에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서 그에게 치하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

 진다유가 패한 모습은 곧 뒷담화의 표적이 되었다. '진다유는 전장에 나가 창자루가 부러지면 어떻게 할 셈인가. 불쌍하게도 검술은 죽도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지 않은가'――그런 소문이 누구랄 것도 없이 곧 온 가종 사이에 퍼진 것이었다. 그에는 물론 같은 사무라이들의 질투나 부러움 또한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를 추천한 나이토 산자에몬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츠나토시의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는 진다유를 불러 '그렇게 볼품 없이 패해선 내 눈이 잘못된 걸로 취급 받는다. 다시 한 번 삼본 승부를 가르거나 나나 나리를 위한 사죄의 명목으로 배를 갈라줘야겠다"하고 폭언을 토해냈습니다. 진다유도 무사로서 그런 소문을 흘려 들을 수 없었다. 그는 곧장 산자에몬의 뜻을 받아 들여 다시 한 번 지도역 세마누 효에와 삼본승부를 하고 싶단 탄원서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츠나토시 앞에서 다시 시합을 하게 되었다. 첫 시합에선 진다유가 효에의 손목을 받아갔다. 두 번째엔 효에가 진다유의 얼굴을 받아갔다. 하지만 세 번째 시합에선 진다유가 또 효에의 손목을 받아갔다. 츠나토시는 진다유를 칭찬하기 위해 오십석의 증강을 명했다. 효에는 부풀어 오른 팔을 쓰다듬으며 머뭇머뭇 츠나토시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사나흘 지난 어느 비오는 밤. 카노 헤이타로란 가종 사무라이가 사이간지의 바깥 울타리서 암습을 당했다. 헤이타로는 지행 이백 석을 받으며 산수와 글을 읽을 수 있는 노인이었는데, 평소의 행실상으로 누구에게 미움 받을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날 세마누 효에가 도망친 게 알려짐과 동시에 비로소 그 실행범이 밝혀졌다. 진다유와 헤이타로는 연배는 달라도 차림과 체격이 꽤나 닮아 있었다. 그런 데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문장을 하고 있었다. 효에는 먼저 동행한 동료가 비오는 밤길에 드리운 조명빛에 문장을 보았고, 또 어깨에 우산을 걸친 헤이타로의 모습을 잘못보고 우습게도 이 노인과 진다유를 착각해 죽인 꼴이었다.

 헤이타로는 당시 열입골 살 먹은 모토메란 적자가 있었다. 모토메는 곧장 허가를 받아 에고시 키사부로란 가종과 함께 당시 무사의 습관대로 원수 갚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진다유는 헤티아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벗지 못했던 걸까. 그 또한 모토메를 지켜주고 싶단 이유로 떠나겠단 말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모토메와 맹우의 계약을 맺었다. 츠사키 사콘이란 사무라이 또한 마찬가지로 돕겠단 뜻을 보였다. 츠네토시는 기특하다며 진다유의 요청은 허가했으나 사콘의 말은 들어주지 않았다.

 모토메는 진다유 키사부로 두 사람과 함께 아버지 헤이타로의 칠일장을 마치고는 벚꽃이 떨어진 쿠마모토 성아랫마을을 뒤로 했다.

 

하나

 

 츠자키 사콘은 도움 요청을 거절 당하자 이삼일 간 집에 틀어 박혔다. 모토메와 주고 받은 청원문의 내용을 다시 훑는 게 그에게는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건 아끼는 친구 모토메를 진다유 단 한 명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원수 갚는 일행이 쿠마모토 성 아랫마을을 벗어난 밤, 기어코 그는 부모에게 말 한 마디 없이 한 통의 편지만을 집에 두고서 그들의 뒤를 쫓기 위해 집을 뛰쳐 나왔다.

 그는 국경을 벗어나자 곧장 일행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일행은 그때 어느 산밑의 가게서 쉬고 잇었다. 사콘은 먼저 진다유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몇 번이고 동행을 애원했다. 진다유는 당초 어렵다는 양 '그대의 무도로는 힘든 길이 될 거다"하고 쉽사리 받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뜻을 꺾고 모토메의 얼굴을 살피면서 키사부로가 묵인하는 걸 보고 사콘의 동행을 승낙했다. 아직 앞머리가 남아 있으며 여자처럼 무력한 모토메는 사콘도 일행에 넣어주고 싶단 기색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사콘은 기쁜 나머지 눈에 눈물을 머금고 키사부로에게마저 몇 번이고 인사를 거듭했다.

 네 일행은 효에의 조카가 아사노 가문의 여종으로 있단 사실을 알고 먼저 모지가세키의 세토를 지나 츄고쿠카이도란 먼 길을 걸어 히로시마의 성아랫마을까지 갔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원수의 위치를 찾는 사이, 가종 사무라이의 집에 출입하는 여봉재인의 말을 통해 효에가 한 번 히로시마에 온 후, 조카가 있다는 걸 알았는지 요슈의 마츠야마로 몰래 떠났다고 한다. 때문에 일행은 곧장 이요부네편을 통해 칸분 칠 년의 한여름에 마츠야마의 성 아랫마을로 들어왔다.

 마츠야마로 온 일행은 매일 삿갓을 깊게 눌러 쓴 채 적의 행방을 찾으며 걸었다. 하지만 효에도 보통 조심스러운 게 아닌지 간단히 거처를 드러내진 않았다. 한 번 사콘이 효에로 보이는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여 이래저래 떠보았으나 결국 아무 인연 없는 타인이란 게 밝혀졌다. 그러는 사이 가을 바람이 강해져 성 아랫마을에 자리한 여관 거리의 창문 이외엔 강을 덮은 마름 아래에서 서서히 물색이 퍼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일행의 마음에도 점점 초조함이 드리웠다. 특히 사콘은 찾는 걸 서둘러 거의 밤낮을 거리지 않고 마츠야마의 안팎을 걸어 다녔다. 원수를 갚는 첫 공격은 자신이 하고 싶다. 만에 하나 진다유에게 뒤쳐졌다간 주군과 부모를 버리고 일행에 참가한 자신의 무사로서의 면목이 서지 않는다――그는 마음 속으로 그런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마츠야마에 와서 두 달이 지난 후, 사콘은 그 보람이 있었는지 어느 날 성 아랫마을에 가까운 해안가에서 가마를 끈 두 젊은이가 어부들을 재촉하며 배를 띄우는 걸 만났다. 이윽고 배 준비가 되었는지 가마 안 사무라이가 밖으로 나왔다. 사무라이는 곧장 삿갓을 썼으나 힐끔 본 영모는 틀림 없는 효에였다. 사콘은 순간 주저했다. 여기에 모토메가 없는 건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효에를 치지 않으면 또 어딘가로 떠나버리리라. 심지어 해로를 쓴다는 건 행방을 찾는 것도 불가능할 게 분명하다. 여기선 자기 혼자서라도 이름을 밝히며 쳐야 한다――사콘은 곧장 그런 결심을 하고서 준비할 새도 아깝다는 양 삿갓을 버리자마자 '세누마 효에, 카노 모토메의 형, 츠사키 사콘이 네놈을 친다"하고 외치며 검을 뽑고 달려 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삿갓을 쓴 채로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사콘을 보더니 '멍청한 놈, 사람을 잘못 보지 말거라'하고 일갈했다. 사콘은 저도 모르게 주저했다. 그 순간 사무라이의 손이 칼자루에 얹어지나 싶더니 두터운 검이 크게 사콘을 베었다. 사콘은 주저 앉으면서 눈가 깊게 눌러 쓴 삿갓 아래서 처음으로 세누마 효에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사콘을 잃은 세 사무라이는 그로부터 이래저래 이 년 동안, 원수 효에의 행방을 찾아 고키나이부터 호카이토를 구석구석 살폈다. 하지만 효에의 소식은 도무지 다시 들을 수 없었다.

 칸분 9년 가을, 일행은 내려온 기러기와 함께 처음으로 에도땅을 밟았다. 온갖 나라 사람이 다 모이는 에도인 만큼 원수의 단서를 찾기에도 적합해 보였다. 때문에 그들은 먼저 칸다의 뒷골목에 임시 숙소를 잡고서 진다유는 수상한 노래를 부르며 힘을 겨루는 로닌 행색을 하였고 모토메는 짐상자를 짊어맨 채 각지를 떠도는 상인 행색을 했으며, 키사부로는 하타모토 노세소에몬의 조리토리로 들어갔다.

 모토메는 진다유와 별개로 매일 부내를 떠돌았다. 경험이 많은 진다유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끈기 좋게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먼발치서 살폈다. 하지만 나이 어린 모토메의 심정은 삿갓으로 야윈 얼굴을 가리며 가을날이 된 니혼바시를 둘러볼 때에도 결국 그들의 원수 갚기는 헛수고로 끝나버릴 듯한 울적함에 잠기기 쉬웠다.

 그러는 사이 바람이 점점 찬기운을 머금자 모토메는 감기 탓에 이따금 열을 머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오한에 떠는 몸을 끌면서도 역시나 매일 같이 짐을 지고 상인 행색을 거두지 않았다. 진다유는 키사부로의 얼굴을 보면 반드시 모토메의 기특함을 칭찬하여 주인을 아끼는 젊은 사무라이의 눈에 눈물을 머금게 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도 병에 걸려도 조용히 요양하지 못하는 진다유의 쓸쓸함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윽고 칸분 10년의 봄이 되었다. 모토메는 그 쯤부터 남들 모르게 요시하라를 오가게 되었다. 상대는 이즈미야의 카에데라 하는 소위 산챠지로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을 떠나 진심으로 모토메를 위해 헌신했다. 모토메 또한 카에데를 찾을 때만큼은 막연한 심정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시부야의 콘오 자쿠라의 평판이 욕탕 2층을 북적이게 할 쯤, 그는 카에데의 진심을 느껴 기어코 원수 갚기 중이라는 이야기를 밝혔다. 그러자 생각지도 않게 그녀의 입에서 효에로 보이는 사무라이가 마츠에 반의 사무라이와 함께 한달 쯤 전에 이즈미야에 놀러 왔단 걸 알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사무라이를 상대했던 카에데는 얼굴부터 차림새까지 꽤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이삼 일 중에 에도를 떠나 칸슈 마츠에에 가려한다는 것도 들은 듯했다. 모토메는 물론 기뻐했다. 하지만 다시 원수 갚는 여행에 이르는 과정에서 카에데와 당분간――혹은 영원히 헤어져야 한단 걸 생각하니 모토메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그는 그날 그녀를 상대로 어울리지도 않는 주정을 부렸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곧장 엄청난 양의 피를 토했다.

 모토메는 다음 날부터 자리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원수의 행방을 알았단 사실은 진다유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진다유는 밖을 나가는 한편으로 철저히 모토메를 간병했다. 하지만 어느 날 후키야쵸의 연극방 등을 배회하다 저녁 쯤 숙소로 돌아오자 모토메는 유서를 입에 문 채로 불이 붙은 등불 안에서 배에 칼을 꽂은 채로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다. 진다유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그 유서를 펼쳐 보았다. 유서에는 적의 소식과 자살한 이유가 적혀 있었다. '내가 유약하고 병이 많아 원수 갚기의 뜻을 이루기 어렵단 걸 알고서……"――이게 그 내용이었다. 하지만 피로 젖은 유서 안에는 또 한 통의 편지가 감겨 있었다. 진다유는 그 편지를 훑고는 천천히 등불로 다가가 편지를 불태웠다. 불은 종이를 활활 태워 진다유의 씁쓸한 얼굴을 비추었다.

 편지는 모토메가 올해 봄, 카에데와 2세의 약속을 나눈 연문이었다.

 

 

 칸분 10년 여름, 진다유는 키사부로와 함께 운슈 마츠에의 성 아랫마을로 들어갔다. 당초 오오하시 위에 서서 신지 호수의 하늘에 무리지은 구름을 바라봤을 때, 두 사람의 마음에는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한 비장한 감격이 찾아왔다. 생각해 보면 일행은 고향 쿠카모토를 뒤로하여 벌써 네 번째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쿄바시 외각의 여관을 잡고는 다음 날부터 여느 때처럼 적의 거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슬슬 가을 초입이 될 쯤에 마츠다이라 가문의 사무라이에게 후텐류 지도를 하고 있는 온치 코자에몬이란 사무라이의 저택에 효에로 추정되는 사무라이가 있다는 게 밝혀졌다. 두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바람이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아니, 이룰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특히 진다유는 그 사실을 안 날부터 이따금 머리에서 견딜 수 없는 분노와 기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효에는 이미 헤이타로 한 명만의 원수가 아닌 사콘의 원수이면서 모토메의 원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요 삼 년 동안 그에게 수많은 고난을 맛보게 한 자신의 원수기도 했다――진다유는 그렇게 생각하자 평소에 침착함에도 어울리지 않게 당장이라도 온치의 저택을 찾아 승부를 내고 싶단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온치는 산인에 이름을 떨친 검객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수족이 되는 제자들의 수도 많았다. 때문에 진다유는 마음이 급해지는 와중에도 효에가 홀로 나오는 기회를 기다려야만 했다.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효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택 안에 틀어 박혀 있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여관 정원에는 뻘써 백일홍 꽃이 피었고 돌길 위로 떨어지는 태양빛도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괴로운 초조 속에서 삼 년 전에 죽은 사콘의 제삿날을 맞이했다. 키사부로는 그날 밤, 근처에 있는 쇼코인 문을 두드려 스님에게 제사를 부탁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사콘의 이름은 숨겨두었다. 그러자 절 본당에 의외로도 사콘과 헤이타로의 이름을 새긴 위패가 있었다. 키사부로는 제사가 끝나고 수도승에게 은근슬쩍 위패의 유래를 물었다. 그러자 더 의외인 건 쇼코인의 단가인 온치 코자에몬의 객식구가 한 달에 두 번 반드시 이곳을 찾는단 답이 돌아왔다. "오늘도 일찍부터 오셨지요"――수도승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그런 말까지 덧붙였다. 키사부로는 절문을 나오며 카노 부자나 사콘의 영령이 그들에게 도움을 준 듯한 든든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진다유는 키사부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운이 찾아 온 걸 축복함과 동시에 이제까지 효에의 참배를 눈치채지 못한 걸 원망스러워 했다. '여드레만 지나면 나리의 제삿날입니다. 제삿날에 원수를 갚는 것도 모종의 인과겠지요"――키사부로는 그렇게 이야기를 마쳤다. 그런 심정은 진다유에게도 있었다. 두 사람은 그 후로 등불을 둘러싼 채 밤이 가는 것도 모른 채 사콘이나 카노 부자의 추억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들의 제사를 지내는 효에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두 사람 모두 잊고 있었다.

 헤이타로의 제삿날은 하루씩 다가왔다. 두 사람은 칼을 갈며 조용히 그 날을 기다렸다. 이제 원수 갚기란 더 이상 성패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신경은 단지 그 날, 단지 그 시각에만 모여 있었다. 진다유는 바람을 이룬 후에 도망치는 길까지 생각해두었다.

 드디어 그날 아침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등불의 빛을 받으며 준비를 했다. 진다유는 창포가죽에 쿠로츠무기를 겹쳐 입고서 같은 크로츠무기 문장 아래에 얇은 가죽 다스키를 걸쳐 입었다. 검은 하세베 노리나가의 라이쿠니토시의 아키자시였다. 키사부로도 하오리는 입지 않았으나 두껍게 갖춰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식은 술잔을 나누면서 오늘까지의 계산을 마친 후 기세 좋게 여관 문을 뒤로 했다.

 밖은 아직 인기척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삿갓으로 얼굴을 감추고 나란히 원수 갚는 장소로 정한 쇼코인 문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여관을 벗어나 어느 정도 걸으니 진다유는 불쑥 걸음을 멈추며 '잠깐만, 오늘 계산한 거 잔돈을 4몬 덜 받았잖아. 돌아가서 4몬을 받아야겠어."하고 말했다. 키사부로는 성가시다는 양 "고작해야 4몬 아닙니까. 돌아갈 일은 아니지요"하고 말했다. 한 시라도 빨리 코앞의 쇼코인까지 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다유는 듣지 않았다. "돈은 그야 아깝지 않지. 하지만 진다유 정도 되는 사무라이가 적을 눈앞에 두고 당황하여 여관비 계산을 실수해서야 후세에 남을 치욕 아니겠나. 그대는 먼저 가게나. 나는 여관으로 돌아가야겠어"――그는 그렇게 말하곤 홀로 여관으로 돌아갔다. 키사부로는 진다유의 각오에 감복하면서 그 말을 따라 홀로 원수 갚는 장소로 서둘렀다.

 하지만 머지 않아 진다유 또한 쇼코인 문앞에서 기다리던 키사부로와 합류했다. 그날은 얇은 구름이 하늘 위에 떠서 희미한 햇살을 드리우며 이따금 비도 내리곤 했다. 두 사람은 양쪽으로 갈라져 대추잎이 노랗게 물든 절의 외각을 배회하면서 효에의 참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래저래 정오 가까이가 되어도 효에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키사부로는 짜증이 나서 문지기에게 은근슬쩍 그의 참배 유무를 물었다. 하지만 문지기도 대답하길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직 찾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조급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가만히 절 밖에 서있었다. 그 동안에도 시간은 용서 없이 흘러서 이윽고 저녁 노을 색과 함께 대추 열매를 집어 먹는 까마귀 울음 소리만이 하늘에 허무하게 울리게 됐다. 키사부로는 마음이 급해져 진다유의 옆으로 다가와선 '차라리 온치의 저택으로 가볼까요"하고 속삭였다. 하지만 진다유는 고개를 저어 용납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절문 위 하늘에는 몰려 오는 차가운 구름 속에서 띄엄띄엄 별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진다유는 울타리에 기댄 채로 집요하게 효에를 기다렸다. 실제로 원수를 둔 효에의 상황을 생각하면 밤늦게 몰래 찾아와 참배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기어코 오후 여섯 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리고 오후 아홉 시를 알리는 두 사람은 이슬에 젖으면서도 절 옆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효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단원

 

 진다유 주종은 숙소를 바꾸고 다시 한 번 효에를 주시했다. 하지만 그후로 사오 일이 지나자 진다유는 불쑥 한밤 중에 심한 토악질을 했다. 키사부로는 걱정한 나머지 곧장 의사를 찾아 가려 했으나 당사자는 거사를 놓칠 우려 탓에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진다유는 몸져 누운 채로 약으로 버텼다. 하지만 토악질은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키사부로는 일단 진찰이라도 받아 보라며 간신히 진다유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때문에 일단 여관 주인에게 자주 왕래하는 의사를 불러 달라 했다. 주인은 곧장 사람을 보내 주변서 이름을 알린 마츠키 란타이란 의사를 불러왔다.

 란타이는 무카이 레이란의 밑에서 배운 신의라 명성 높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호걸 기질도 있어서 밤낮으로 술을 즐기며 금전을 멀리했다. "구름 위를 가는 것도 계곡을 가르는 것도 학의 역할일지니"――스스로 이렇게 노래할 정도로 그의 약을 청하는 자는 위로는 번 제일의 늙은 사무라이부터 아래론 연명도 어려운 거지까지 넓은 폭을 자랑했다.

 란타이는 진다유의 맥을 짚어 볼 것도 없이 적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이 명의가 준 약을 먹어도 진다유의 병은 낫지 않았다. 키사부로는 옆에서 간병하며 부처에게 진다유의 쾌유를 기원할 뿐이었다. 앓는 당사자도 밤의 이불맡에서 약을 달이는 냄새를 맡으며 오랫동안 품은 바람을 이루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바랐다.

 가을은 더더욱 깊어졌다. 키사부로는 란타이의 집에 약을 가지러 가는 도중 무리를 이룬 물새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았다. 그러자 그날, 그는 란타이의 집 현관에서 역시나 약을 받으러 온 한 말단 사무라이와 만났다. 그 자가 온치 코자에몬 저택 사람이란 건 란타이의 제자와 이야기하는 말로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말단 사무라이가 돌아간 후, 얼굴이 익숙한 란타이의 제자를 향해 "온치 경 같은 무예가 뛰어난 사람도 병에게는 못 이기나 봅니다"하고 말했다. "아뇨, 아픈 사람은 온치 님이 아닙니다. 저택을 오가는 손님분이시죠."――사람 좋은 듯한 제자는 무신경하게 대답했다.

 그 후로 키사부로는 약을 받으러 갈 때마다 은근히 효에의 상태를 떠보게 됐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듣자하니 효에는 헤이타로의 제삿날 쯤부터 진다유와 같은 적리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듯했다. 그렇게 보면 효에가 쇼코인에 그날만 유독 찾아오지 않은 것도 그 병 탓임이 분명했다. 진다유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한 층 더 괴로움을 견딜 수 없게 됐다. 만약 효에가 병사하면 아무리 원수를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효에가 살았다 한들 본인이 죽어버려선 역시나 오랜 고난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그는 끝내 베개를 씹으면서 자신의 쾌유를 바라는 동시에 원수 세누마 효에의 쾌유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명은 끝끝내 진다유를 몰아 붙였다. 그의 병은 더더욱 무거워져 란타이의 약을 받은지 열흘도 되지 않아 오늘내일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그런 고통 속에서도 집념 깊게 원수 갚기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키사부로는 신음 속에서 이따금 보살을 찾는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걸 들었다. 특히 어느 밤은 키사부로가 여느 때처럼 약을 권하니 진다유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키사부로"하고 약한 소리를 냈다. 그러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는 목숨이 아깝다"하고 말했다 키사부로는 바닥에 손을 짚은 채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 다음 날, 진다유는 갑작스레 키사부로에게 란타이를 데리고 오라 시켰다. 란타이는 그날도 술기운을 머금고서 그의 병상을 살폈다. "선생, 이렇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오. 진다유 평생의 굴욕이오"――그는 란타이의 얼굴을 보고는 침상 위에서 일어나 괴롭다는 양 말했다. "허나 숨이 붙어 있는 사이에 선생을 뵙고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소. 부디 들어줄 수 있겠소?" 란타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다유는 띄엄띄엄 그가 효에에게 갚아야 할 원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었으나 긴 이야기 속에서도 그 말이 흐트러지는 기미가 없었다. 란타유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윽고 이야기가 끝나자 진다유는 신음하면서 "이 이야기는 효에의 상태를 들었기 때문이오. 효에는 아직 살아 있소?"하고 물었다. 키사부로는 이미 울고 있었다. 란타이도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무릎을 밀면서 진다유의 귀에 입을 얹듯 하여 "걱정 마시지요. 효에 경의 임종은 오늘 아침 인시에 제가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하고 말했다. 진다유의 얼굴엔 미소가 드리웠다. 그와 동시에 마른 뺨에 차가운 눈물 자국이 보였다. "효에――효에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오"――진다유는 원망스럽단 양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란타이에게 인사를 하려는 건지 침상 위로 흐트러진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잃었다……

 칸분 10년 음력 10월 말, 키사부로는 홀로 란타이에게 인사를 남긴 채 고향 쿠마모토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가 짊어맨 보따리 안에는 모토메와 사콘, 진다유가 남긴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후일담

 

 칸분 11년 정월, 운슈 마츠에 쇼코인의 묘지에는 네 개의 석탑이 세워졌다. 석탑을 세운 사람은 알려지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석탑이 세워졌을 때, 두 스님이 홍매 가지를 들고서 이른 아침부터 쇼코인 문을 지났다.

 한 명은 성 아랫마을에서 명성 높은 마츠키 란타이가 분명했다. 또 다른 스님은 척 보아도 아픈 기색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늠름한 몸놀림에 어딘가 무사로 보이는 듯한 기미가 있었다. 두 사람은 묘지 앞에 홍매 가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새로운 네 개의 석탑에 순서대로 물을 주었다……

 훗날 오바쿠 에린의 연회에 당시의 아픈 스님과 닮은 늙은 스님 하나가 있었다. 이 역시 쥰카쿠란 승명 이외엔 알려진 게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다이쇼 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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