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시로다스키 부대
메이지 37년 11월 26일의 미명이었다. 제x사단 제x연대 시로다스키 부대는 쇼쥬잔의 보충 포대를 탈취하기 위해 93 고지인 북쪽 기슭에서 출발했다.
길은 산그늘을 따르며 오늘만 특별히 사열측면 진형을 따 행군했다. 풀도 얼마 없는 으슥한 길에서 총신을 줄지은 한 부대의 병사가 하얀 어깨띠시로다스키만을 희미하게 빛내며 조용히 걷는 모습은 비장한 광경임에 분명했다. 실제로 지휘관 M대위는 이 부대의 선두에 섰을 때부터 다른 사람처럼 말수를 줄인 채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의외로 평소의 기운을 잃지 않았다. 그건 무엇보다 야마토다마시의 힘이었으며, 둘째로는 술의 힘이기도 했다.
한동안 행군을 거듭한 후, 부대는 돌이 많은 산기슭에서 바람이 강하게 부는 강가로 나왔다.
"야, 뒤를 좀 봐봐."
종이집을 했었다는 타구치 일등졸은 같은 중대에서 선발된 목공이었다는 호리오 일등졸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여기를 향해 경례하고 있어."
호리오 일종병은 돌아보았다. 확실히 그 말을 듣고 보니 검게 올라 온 고지 위에선 총대장을 시작으로 한 몇몇 장교들이 살짝 붉어진 하늘을 뒤로한 채 사지로 향하는 부대의 사관과 병졸들을 향해 마지막 경례를 보내고 있었다.
"어때? 대단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 시로다스키 부대에 들어 온 것도 참 명예로운 일이야."
"명예롭긴 무슨?"
호리오 일등졸은 씁쓸하다는 양 어깨 위 총을 흔들었다.
"우리는 다 죽으러 가는 거라고. 그렇게 보면 저건 ×××××××××××××× 하는 꼴이지. 이런 싸구려 같은 죽음이 어디 있어?"
"그렇진 않지. 그렇게 말하면 ××× 미안하잖아."
"멍청한 자식! 미안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술이라도 한 합 사고 싶어도 경례만으론 팔지도 않는다고."
타구치 일등졸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술만 마시면 삐뚤어진 소리만 하는 상대의 버릇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리오 일등졸은 집요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건 경례로 살 수는 없어. ××××× 하라느니, ××××× 하라느니, 이래저래 불평 거리를 붙이려 들잖아. 하지만 그런 건 죄 거짓말이야. 형제, 그렇게 생각 안 해?"
호리오 일등졸이 그렇게 물은 건 역시나 같은 부대에 있던 초등학교 교사였다는 얌전한 에기 상등병이었다. 하지만 그 얌전한 상등병이 이때만은 어떻게 된 건지 당장이라도 달려 들 것만 같은 험악함을 보였다. 그렇게 술기를 머금은 상대의 얼굴을 향해 악랄한 답을 토해냈다.
"바보 자식! 죽는 게 우리 역할 아냐?"
그때 시로다스키 부대는 강가 위에 있었다. 그곳에는 진흙으로 만든 중국인의 민가가 예닐곱 척 가량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그 집들의 지붕 위에는 석유색 벽을 갖춘 차가운 적갈색의 쇼쥬잔이 눈앞에 들이 닥친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부대는 이 마을을 벗어나선 사열측면 진형을 풀었다. 그뿐 아니라 하나 같이 무장한 채로 몇몇 교통로를 포복하며 천천히 적진으로 향했다.
물론 에기 상등병도 그 안에서 네 발로 기고 있었다. "술을 한 합 사고 싶어도 경례만으론 팔지도 않는다고"――그런 호리오 일등졸의 말은 여전히 그의 배 밑바닥에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말수가 적은 그는 가만히 그 생각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만큼 전우란 말은 마치 상처에라도 닿은 듯한 불쾌한 슬픔을 주었다. 그는 얼어 붙은 교통로를 동물처럼 기면서 전쟁이나 죽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론 조금의 광명도 얻을 수 없었다. 죽음은 ×××××더라도 결국은 저주해 마땅할 괴물이었다. 전쟁은――그는 전쟁이 죄악이란 생각이 거의 들지 않았다. 죄악은 전쟁에 비하면 개인의 정서에 뿌리내린 만큼 ×××××××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는――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각 사단에서 선발된 이천 명 남짓의 시로다스키 부대는 그 위대한 ×××서도 싫어도 죽어야만 했다……
"왔다, 왔어. 당신은 어느 연대 소속이야?"
에기 상등병은 주위를 보았다. 부대는 어느 틈엔가 쇼쥬잔 산기슭의 집합 지점에 도착한 듯했다. 그곳에는 이미 카키 옷에 낡은 하얀 어깨띠를 두른 각 사단의 병사가 모여 있었다――그에게 말을 건 것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 병사는 돌에 걸터 앉아 희미하게 흘러 들어 온 아침 햇살에 한쪽 뺨의 여드름을 내놓고 있었다.
"제X연대야."
"빵 연대네."
에기 상등병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 농담에 답하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이 보병 진지 위에는 피아의 포탄이 엄청난 울림을 내고 있었다. 눈앞에 자리한 쇼쥬잔의 중턱에도 해군의 대포가 노란 연기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연기가 오르는 틈틈이 옅은 자색 빛이 뻗은 것도 낮인 만큼 더욱 비장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천 명의 시로다스키 부대는 이런 포격 사이에서 기회를 엿보며 역시나 평소의 기운을 잃지 않았다. 또 공포에 굴하지 않기 위해서는 되도록 기운 차게 행동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되는 대로 쏘는구만."
호리오 일등졸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 박자에 긴 울음이 다시 한 번 머리 위 공기를 찢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목을 숙이면서 일어날 모래를 막기 위함인지 손수건으로 코를 감사고 있던 타구치 일등졸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건 28cm야."
타구치 일등졸은 웃어 보였다. 그리고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가만히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었다. 그건 그가 출정을 나설 때 자주 다니던 게이샤에게 받아 온 자수 손수건이었다.
"소리가 달라. 28cm는――"
타구치 일등졸은 그렇게 말하고는 풀어져 있던 자세를 고쳤다. 동시에 주위에 자리한 수많은 병사들도 소리 없는 호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군 사령관 N 장군이 몇 명의 부하를 끌고서 엄숙히 걸어 온 탓이었다.
"다들 소란 떨지 말고."
장군은 진지를 둘러보며 살짝 녹슨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좁은 장소에선 경례도 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는 몇 연대의 시로다스키 부대지?"
타구치 일등졸은 장군의 눈이 자신의 얼굴을 향한 걸 느꼈다. 그 눈은 그를 처녀처럼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네, 제x보병연대입니다."
"그런가. 잘 해주게."
장군은 그의 손을 쥐었다. 그러곤 호리오 일등졸에게 살짝 시선을 돌리더니 역시나 오른손을 뻗으면서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자네도 잘 해주게."
그 말을 들은 호리오 일등졸은 온몸의 근육이 굳어진 것처럼 직립부동 자세를 취했다. 넓은 어깨, 커다란 손, 뺨이 높은 불그스름한 얼굴――그런 그의 특징은 적어도 노장군에겐 제국 군인의 모범이라 해도 좋을 좋은 인상을 준 듯했다. 장군은 그곳에 선 채로 열심히 말을 이어갔다.
"지금 쏘고 있는 포대가 있지? 오늘밤 너희는 저 포대를 우리 걸로 만든다. 그럼 예비 부대는 너희의 뒤를 따라 이 주변의 포대를 모두 장악하는 거지. 어찌 됐든 저 포대를 향해 열심히 뛰어 들어가야만 해――"
그런 장군의 목소리에는 어느 틈엔가 살짝 희곡적인 감격이 섞이기 시작했다.
"알겠나? 결코 도중에 멈춰 사격 따위 하면 안 된다네. 온몸을 포탄이라 여기며 대뜸 뛰어 드는 거야. 부탁하지. 부디 잘 해주게."
장군은 '잘 해주게'의 의미를 전달하듯이 호리오 일등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갔다.
"기쁘지 않은걸――"
호이로 일등졸은 장군이 지나간 자리를 교활하게 바라보며 타구치 일등졸을 향해 눈초리를 보냈다.
"하기사 저런 영감탱이가 손 같은 걸 잡아봐야."
타구치 일등졸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서일까. 그걸 본 호리오 일등졸의 마음엔 무언가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쓴웃음이 밉기도 했다. 그때 에기 상등병이 대뜸 옆에서 끼어들었다.
"기분이 어때? 악수로 ××××하는 건?"
"남 흉내 내면 쓰나."
이번에는 호리오 일등졸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당한다 생각하니 화가 나잖아. 나는 버려 버리고 싶어."
에기 상등병이 그렇게 말하자 타구치 일등졸도 끼어들었다.
"그래, 모두 나라를 위해 버리는 몸이지."
"나는 뭘 위한 건지는 몰라도 마냥 버려줄 생각이야. ×××××××라도 받는다 생각해봐. 뭐든지 가지고 가란 생각이 들지 않겠어?"
에기 상등병의 미간 사이에는 어두운 흥분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 그런 심정이야. 강도는 돈만 벌 수 있으면 ××××××× 같은 소리는 안 하지. 하지만 우리는 어찌 됐든 죽을 몸이야. ××××××××××××××××××××× 거라고. 어차피 죽어야만 한다면 깔끔하게 ××× 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런 말을 하는 사이 아직도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호리오 일등졸의 눈안에는 이 온후한 전후를 향한 경멸의 빛이 담기기 시작했다. "뭐, 목숨을 버릴 정도면?"――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리고 오늘 밤은 뒤처지지 않고 장군의 악수로 보답을 받았기에 육탄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여덟 시 몇 분 가량. 수류탄에 맞은 에기 상등병은 온몸을 검게 태운 채로 쇼쥬잔 중턱에 쓰러졌다. 그러자 시로타스키를 찬 병사 하나가 무언가를 소리치며 철조망 안을 달려왔다. 그는 전우의 시체를 보고는 그 가슴에 한 쪽 발을 얹더니 갑자기 큰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큰 목소리로――실제로 그 큰 목소리는 격한 적과 아군의 총포 속에서도 꺼림칙한 반향을 일으켰다.
"만세! 일본 만세! 악마항복, 온적퇴산, 제x연대 만세! 만세! 만만세!"
그는 한 손으로 총을 휘두르며 눈앞의 어둠을 찢었다. 수류탄이 터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연이어 절규했다. 그 빛 너머로 보면 이는 두부 총상 탓에 돌격 중에 발광한 듯한 호리오 일등졸이었다.
둘 간첩
메이지 38년 3월 5일 오전, 당시 젠쇼슈에 주둔해 있던 A기병 여단의 참모는 어두컴컴한 사령부의 한 방에서 두 중국인을 심문하고 있었다. 간첩을 찾기 위해 임시로 이 여단에 참가한 제x연대의 보초 중 한 명에게 잡힌 두 사람이었다.
이 천장이 낮은 중국 가옥 안에선 아궁이 불이 오늘도 따스한 온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쓸쓸한 전쟁의 공기는 길에 닿는 박차 소리에나 탁자 위에 벗은 외투 색에나 온갖 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붉은 벽지가 붙은 먼지 냄새 풍기는 하얀 벽 위에 머리를 묶은 게이샤의 사진이 압정으로 고정되어 있는 건 우스운 한편으로 비참하기도 했다.
그곳에는 여단 참모 이외에도 부관 하나와 통역 하나가 두 중국인을 둘러싸고 있다. 중국인은 통역의 질문을 받아 참으로 명확히 대답했다. 그뿐 아니라 살짝 늙은이 같은 얼굴에 짧은 수염이 있는 남자는 통역이 아직 묻지 않은 것마저 나서서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답이 명확하면 명확할 수록 참모의 마음에는 그들을 간첩으로 만들고 싶단 반감에 가까운 걸 부여되곤 했다.
"이봐, 보병!"
여단참모는 콧소리를 섞어 이 중국인을 잡아 와 입구에서 대기하던 보초를 불렀다. 보병――이는 시로다스키 부대에 참가했던 타구치 일등졸이었다――그는 문의 卍자 격자를 뒤로한 채 게이샤 사진에 눈을 주고 있었으나 참모의 목소리에 놀라서는 한껏 목소리를 높여 답했다.
"네!"
"이 녀석들을 잡은 게 너지? 잡을 때엔 뭐라고 하든?"
사람 좋은 타구치 일등졸은 낭독적으로 대답했다.
"제가 보초로 서있던 건 이 마을의 울타리 북쪽, 펑텐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그 중국인은 두 사람 모두 펑텐 쪽에서 걸어왔습니다. 그러자 나무 위의 중대장님이――"
"뭐? 나무 위 중대장?"
참모는 살짝 눈을 껌뻑였다.
"네, 중대장님은 주위 확인을 위해 나무 위에 계셨습니다――그 중대장님이 나무 위에서 제게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잡으려 하니 저쪽 남자가――네, 그 수염 없는 남자입니다. 그 남자가 갑자기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네, 그게 전부입니다."
"좋아."
여단 참모는 혈색이 잘 돌고 퉁퉁한 얼굴에 약간의 실망을 품은 채로 통역에게 질문의 뜻을 전했다. 통역은 지루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간첩이 아니라면 왜 도망쳤는가?"
"그야 도망칠만 하지요. 일본 병사가 갑자기 달려 드는데요."
또 한 명의 중국인――아편 중독에 걸린 듯한 아연색 피부를 한 남자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하지만 너희가 지나 온 건 지금도 전장으로 활용되는 거리 아닌가? 양민이라면 볼일도 없이――"
중국어가 가능한 부관은 혈색 안 좋은 중국인의 얼굴을 향해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아뇨, 볼일은 있었습니다. 지금도 말한 것처럼 저희는 새로운 민간인 주둔지에 지폐를 바꾸러 나온 거지요. 보세요. 여기에 지폐가 있지 않습니까?"
수염이 있는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장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참모는 살짝 콧소리를 냈다. 그는 부관이 주저하는 게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지폐를 바꿔? 목숨 걸고?"
부관은 지지 않고 냉소를 지었다.
"어찌 됐든 벗겨보지."
참모의 말이 통역되자 그들은 역시나 조금도 주저 없이 바로 알몸이 되어 보였다.
"아직 복대가 남지 않았나? 그것도 벗도록."
통역은 복대를 받아 들면서 목면에 남은 체온을 불결하게 느꼈다. 복대 안에는 3촌 쯤 되는 두터운 바늘이 들어 있었다. 여단 참모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통해 몇 번이나 그 침을 조사했다. 하지만 평평한 머리에 매화 모양이 그려진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이건 뭐지?"
"제가 쓰는 의료용 침입니다."
수염 있는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태연히 참모의 물음에 대답했다.
"겸사겸사 신발도 벗겨보지."
그들은 거의 무표정하게 숨겨야할 곳도 숨기지 않고 검사 결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지나 웃옷은 물론이요 신발이나 양말까지 조사해도 증거가 될만한 건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은 신발을 박살낼 수밖에 없다――그렇게 생각한 부관은 참모에게 그 요지를 이야기하려 했다.
그때 대뜸 옆방에서 군사령관을 선두로 군사령부의 막료나 여단장이 들어왔다. 장군은 부관이나 군참모와 회의하기 위해 여단장이 불러 온 것이었다.
"러시아의 밀정인가?"
장군은 그렇게 물으며 중국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들의 전라 모습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훗날 어떤 미국인이 이 유명한 장군의 눈에는 Monomania편집광 기질이 있다고 거침 없이 비평한 적이 있다――그 모노매니악한 눈동자의 색이 이럴 때엔 특히 꺼림칙한 빛을 두르곤 했다.
여단 참모는 장군에게 간단히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하지만 장군은 떠올랐다는 양 이따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제는 때려서라도 자백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참모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장군은 지도를 쥔 손으로 마루 위에 있던 중국 신발을 가리켰다.
"저 신발을 부숴보게."
신발은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그곳에 봉재되어 있던 네다섯 장의 지도와 비밀 서류가 하나둘 마루 위에 흩뿌려졌다. 두 중국인은 그걸 보자 얼굴이 창백해져 버렸다. 하지만 역시나 입을 다문 채로 완고히 벽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럴 줄 알았지."
장군은 여단장을 보면서 의기양양히 웃었다.
"그나저나 신발이라니 머리를 잘 썼군요――이봐, 저놈들에게 옷을 줘라――이런 간첩은 처음 봅니다."
"군 사령 각하의 혜안에는 감복했습니다."
여단부관은 여단장에게 간첩 증거품을 건네며 애교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마치 먼저 신발을 주목한 건 장군보다 자신이 먼저임을 망각한 것처럼.
"허나 전라로 벗긴 이상은 신발 말곤 다른 데도 없잖아?"
장군은 기분이 좋은 듯했다.
"나는 바로 신발일 줄 알았지."
"이 주변 주민은 곤란하군요. 우리가 여기에 왔을 때도 히노마루 깃발을 내건 주제에 안을 살펴보면 대부분은 러시아 깃발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여단장도 어쩐지 들뜬 듯했다.
"요컨대 간녕사지란 게지."
"그렇지요. 어디 써먹을 구석도 없습니다."
이런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여단 참모는 통역과 함께 두 중국인을 살폈다. 그러더니 불숙 타구치 일등졸에게 불쾌한 표정을 보이더니 토해내듯 명했다.
"이봐 보병! 이 간첩은 네가 잡은 거니 겸사겸사 네가 죽이고 와라."
이십 분 후, 마을 남쪽 길가에선 두 중국인이 변발을 묶은 채로 마른 버들 아래에 앉아 있었다.
타구치 일등졸은 총검을 차고는 먼저 변발을 끊었다. 그리고 총을 갖춘 채로 연하 남자의 뒤에 섰다. 하지만 그들을 죽이기 전에 죽인다는 말만은 해두고 싶었다.
"儞니이, 너――"
그렇게까지 말한 건 좋았지만 '죽인다'는 중국어를 알지 못했다.
"儞, 죽인다!"
두 중국인은 서로 말을 맞춘 것처럼 가만히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놀란 기미도 보이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몇 번이나 머리를 내리쳤다. "고향에 이별을 고하고 있다"――타구치 일등졸은 자세를 잡으며 그렇게 해석했다.
머리를 내려치는 게 끝나자 그들은 각오를 굳인 듯이 차갑게 고개를 뻗었다. 타구치 일등졸은 총을 뻗었다. 하지만 얌전한 두 사람을 보니 도무지 총검이 나가지 않았다.
"儞, 죽인다!"
그는 도리 없이 반복했다. 그러자 마을 쪽에서 말을 탄 기병 하나가 발굽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보병!"
기병은――다가온 걸 보니 조장이었다. 기병은 두 중국인을 보더니 발걸음을 늦추며 소리 높여 물었다.
"러시아 간첩인가? 간첩 맞지? 나도 하나 배게 해다오."
타구치 일등졸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얼, 둘 다 드리지요."
"그런가? 마음씨가 참 좋군."
기병은 가볍게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중국인의 뒤로 가서는 허리춤의 일본도를 뽑았다. 그때 또 마을 쪽에서 용맹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세 장교가 다가왔다. 기병은 그것도 아랑곳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검을 미처 내리기 전에 세 장교는 그들 옆을 유유히 지나갔다. 군사령관! 기병은 일등졸과 함게 말위의 장군을 올려다 보며 정확한 거수경례를 했다.
"러시아 간첩이로군."
장군의 눈에는 순간 편집증적인 빛이 감돌았다.
"베라! 베어!"
기병은 그 말을 듣자마자 검을 들고는 단숨에 젊은 중국인을 벴다. 중국인의 머리는 마치 날아가듯이 갈대 아래를 굴렀다. 피는 노란 흙에 커다란 점을 퍼트렸다.
"좋아, 훌륭하군."
장군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끌고 갔다.
기병은 장군을 보고는 피에 물든 검을 들어 올린 채로 다른 중국인 뒤에 섰다. 그 태도는 장군 이상으로 살육을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이 ×××라면 나도 죽일 수 있다"――타구치 일등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갈대 아래에 앉았다. 기병은 또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수염난 중국인은 묵묵히 고개를 뻗은 채로 눈썹 하나 꿈틀이지 않았다……
장군을 따른 군 참모 중 한 사람――호즈미 중좌는 안장 위에서 봄추위를 머금은 광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먼 갈대밭이나 길가에 구르는 비석도 중좌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리속에는 한때 애독한 스탕달의 말이 끝없이 떠올랐다.
"나는 훈장에 묻힌 사람을 보면 저만한 훈장을 얻으려면 얼마나 ××일만 했을까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문득 정신이 들어보니 그의 말은 장군의 말보다 뒤처져 있었다. 중좌는 가볍게 몸을 떨더니 곧장 말을 재촉했다. 마침 드리운 옅은 햇살에 어깨 장식의 금빛을 반사하면서.
셋 진안의 연극
메이지 38년 5월 4일 오후, 아키츠규호에 주둔해 있던 제x군 사령부에선 오전에 초혼제를 치른 후, 여흥을 위한 연예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회장은 중국 마을에 많은 노천 무대를 응용한 급조 무대 앞에 천막 텐트를 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돗자리 회장에는 정각도 되기 전부터 많은 병졸이 모였다. 이 칙칙한 카키 옷에 총검을 찬 병졸 무리는 관객이라 부르기에도 아이러니한 느낌을 줄 정도로 꼴사납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런만큼 또 그들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오른 건 한 층 더 가련한 것처럼만 느껴졌다.
장군을 비롯한 군사령부나 병참감부의 장교들은 외국의 종군 무관들과 함께 그 뒤에 자리한 살짝 높은 언덕에 의자를 쭉 늘어 놓고 있었다. 그곳은 참모 견장이니 부관의 어깨띠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일반 병졸의 관객석보다 훨씬 화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특히 외국의 종군 무관은 바보라 명성 높은 한 사람마저도 이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선 군사령관 이상의 효과를 주었다.
장군은 오늘도 기분이 좋았다. 부관 한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이따금 순번표를 펼쳐보고 있다――그 눈에도 시종 햇살과 같은 인품 좋은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한 시 정각이 되었다. 벚꽃이나 일출을 그린 솜씨 좋은 막 뒤에선 잘 울리지 않는 박자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진행을 맡은 소위의 손에 한 쪽을 열려 갔다.
무대는 일본의 실내였다. 그곳이 쌀가게란 건 한 구석에 쌓인 쌀포대만이 약한 암시를 주고 있었다. 그때 앞으로 나온 쌀가게 주인이 '오나베야, 오나베야'하며 손뼉을 치며 자신보다 키가 큰 하녀를 불렀다. 그러곤――이야기할 줄거리도 없을 정도의 즉흥극이 시작되었다.
무대가 우스꽝스러워질 때마다 돗자리 위 관객들은 몇 번이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 뒤에 자리한 장교들도 대부분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연극은 그 웃음과 겨루기라도 하듯이 더욱 우스꽝스러워졌다. 그리고 기어코 끝내는 훈도시 한 장만 덜렁 입은 주인이 붉은 목욕옷 하나 입은 하녀와 스모를 겨루게 되었다.
웃음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병참감부 대위에 이르러선 이 웃음을 억누르기 위해 거의 박수마저 칠 기세였다. 마침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거친 호령이 채찍질이라도 하듯이 터진 웃음 위로 울렸다.
"이 추태가 다 뭐냐? 막을 내려라! 막 내려!"
목소리의 주인은 장군이었다. 장군은 두터운 군도 자루에 장갑찬 두 손을 겹친 채로 엄숙히 무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막을 붙들고 있던 소위는 명령을 따라 황당해하는 배우들 앞에 황급히 막을 내렸다. 동시에 돗자리 위 관객도 자그마한 술렁임 이외엔 조용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외국 종군 무관들과 나란히 앉아 있던 호즈미 중좌는 이 침묵을 안타깝게 느꼈다. 물론 그의 얼굴에는 웃음도 드리워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관객이 느끼던 재미에 동정을 가질만한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국 무관들에게 전라 스모를 보여줘도 되는가?――몇 년이나 유럽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그는 그런 체면을 따질 정도론 외국인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프랑스 장교가 놀라서 호즈미 중좌를 돌아봤다.
"장군께서 중지를 명하셨습니다."
"왜요?"
"볼품 없으니까요――장군은 볼품 없는 걸 싫어하십니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 번 무대의 박자가 울렸다. 조용해졌던 병졸들도 그 소리에 기운을 되찾은 걸까. 여기저기서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호즈미 중좌도 숨을 돌리면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줄지은 장교들은 하나 같이 꽤나 기분이 상한 듯이무대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다――그런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역시나 군도에 손을 얹은 채로 막이 오른 무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막은 앞선 무대와 반대로 인정을 품은 옛 연극이었다. 무대에는 병풍 하나와 불이 들어온 등 몇 개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런 무대 위에서 광대가 높은 노인 하나가 목이 두터운 마을 사람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노인은 이따금 목소리를 높여 '젊은 나리'하고 상대 마을 사람을 불렀다. 그렇게――호즈미 중좌는 무대도 보지 않고 자신의 기억에 잠겨 있었다. 류세이좌의 이층 손잡이에는 열두 살 쯤 먹은 소년이 매달려 있다. 무대에는 벚꽃이 걸려 있다. 불빛이 많은 거리의 배경이 놓여 있다. 그런 가운데 이전의 단수라 불린 와코의 후와 반자에몬이 삿갓에 한 손을 얹은 채로 나타난다. 소년은 무대에 빠져든 채 거의 숨도 돌리지 않는다. 그에게도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만! 막을 내려라! 막! 막을 내려!"
장군의 목소리는 폭탄처럼 중좌의 추억을 부수었다. 중좌는 무대에 눈을 주었다. 무대에선 당황한 소위가 막과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병풍 위에 남녀의 오비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중좌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무대를 꾸미는 사람들도 일머리가 없군. 남녀의 스모마저 금지한 장군이 밤자리를 보면 가만히 있겠나?"――그런 생각을 하면서 호통 소리가 들린 자리를 보니 장군은 여전히 불쾌하다는 양 무대를 꾸민 일등주계와 무어라 문답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중좌의 귀는 입이 험한 미국 무관이 옆에 앉은 프랑스 무관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N 장군도 고생이 많지. 군사령관 겸 검역관을 하고 있는 꼴이니――"
세 번째 막이 시작된 건 그로부터 십 분 뒤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박목 소리가 들려도 병졸들은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들. 감시 받으며 연극을 봐야 하다니"――호즈미 중좌는 안타까워하듯이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카키색 무리를 둘러보았다.
세 번재 무대는 막 앞에 버드나무 두세 그루가 세워져 있었다. 어디서 패온 건지 생생한 진짜배기 버드나무였다. 그런 무대 위로 경부로 보이는 수염 투성이 남자가 젊은 순사를 괴롭히고 있었다. 호즈미 중좌는 순번표에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자 순번표에는 '권총 강도 시미즈 사다키치, 오오카와 바타의 체포극'이라 적혀 있었다.
젊은 순사는 경부가 떠나자 크게 하늘을 올려다 보며 독백으로 긴 한탄을 늘어 놓았다. 듣자하니 그 말은 오랫동안 권총 강도를 쫓았으나 체포하진 못 했단 내용이었다. 그러더니 그 그림자라도 찾은 건지 그는 상대에게 들키지 않게 큰강의 물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결심했다. 그렇게 뒤의 검은막 밖으로 포복을 시작했다. 그 모습은 아무리 관대하게 봐줘도 큰강에 들어갔다기보다는 모기장에 들어간다 해야 올바를 듯했다.
빈 무대에선 파도 소리인 듯한 큰북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한 맹인이 걸어왔다. 맹인은 지팡이질을 하면서 그대로 반대편으로 사라지려 한다――그 순간 막 밖에서 방금 전 순경이 뛰쳐나왔다. '권총 강도 녀석. 나는 시미즈 사다츠키, 경찰이다!"――그는 그렇게 외치더니 대뜸 맹인을 향해 달려 들었다. 맹인은 곧장 자세를 잡았다. 그러더니 눈을 번쩍 떴다. "아쉽게도 눈이 너무 작군"――중좌는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어른스럽지 못한 평가를 내렸다.
무대에서는 액션이 시작되었다. 권총 강도는 이름처럼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두 발, 세 발――권총은 연이어 불을 뿜었다. 하지만 순사는 용감하게도 가짜 맹인을 밧줄로 포박했다. 병졸들은 술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선 역시 목소리 하나 터져 나오지 않았다.
중좌는 장군을 보았다. 장군은 이번에도 열심히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보였다.
그때 무대 반대편에서 서장과 그 부하가 달려왔다. 하지만 가짜 맹인과 싸우다 총에 맞은 순사는 기어코 혼절하고 말았다. 서장은 곧장 응급처치를 했다. 그러는 사이 부하들은 재빨리 강도의 밧줄을 붙들었다. 그 후엔 서장과 순사의 애수가 시작되었다. 서장은 과거의 이름 날린 사무라이처럼 무언가 남길 말은 없냐 물었다. 순사는 고향에 어머니가 있다 말했다. 서장은 또 어머니는 걱정하지 마라, 그 외에 미련은 없는가 하고 물었다. 순사는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권총 강도를 잡아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다 말했다.
――그렇게 조용해진 무대에 다시 한 번 장군의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령이 아닌 깊은 감개에 젖은 탄성이었다.
"대단한 녀석이야. 그래야 일본 남아라 할 수 있지."
호즈미 중좌는 다시 한 번 장군을 보았다. 그러자 햇살에 탄 장군의 뺨에는 눈물자국이 남아 있었다. "참 선한 장군님 납셨군."――중좌는 가벼운 경멸 속에서 밝은 선의를 느꼈다.
그렇게 막은 성대한 박수 갈채를 받으며 유유히 무대 앞에 내려왔다. 호즈미 중좌는 그 기회에 홀로 의자에서 일어나 회장 밖으로 향했다.
삼십 분 후, 중좌는 담배를 문 채로 역시나 같은 참모인 나카무라 소좌와 마을 외각의 공터를 걷고 있었다.
"제x사단의 여흥은 대성공이었지. N 각하께서 아주 좋아하시던데."
나카무라 소좌는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카이젤 수염의 끝자락을 배배 꼬고 있었다.
"제x사단의 여흥? 아, 그 권총 강도 말인가?"
"권총 강도만이 아니지. 각하는 그 후로 무대를 준비한 사람을 불러 즉흥으로 하나 더 하라 하셨거든. 이번에는 아카가키 겐조였어. 뭐라고 하던가 그건? 토쿠리노와카레인가?"
호즈미 중좌는 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넓은 들판을 바라보았다. 고량으로 푸릏게 물든 흙 위에는 희미한 태양빛이 드리워 있었다.
"그것도 대성공이어서――"
두 사람은 말을 이었다.
"각하는 오늘 밤에도 일곱 시부터 제x사단에게 사람을 모으게 한다더군."
"라쿠고라도 한다던가?"
"뭐, 코단이라나. 미토 코몬 메구리――"
호즈미 중좌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상대는 아랑곳 않고 기운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각하는 미토 코몬을 좋아한다더군. 나는 전국시대 군신 중엔 미토 코몬과 카토 키요마사에게 가장 큰 경의를 갖추고 있다네――그렇게 말씀하시더군."
호즈미 중좌는 대답하지 않고 머리 위 하늘을 올려다 봤다. 하늘에는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얇은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중좌는 숨을 돌렸다.
"만주에도 봄은 오는군."
"내지는 벌써 봄옷을 입고 있을 거야."
두 사람은 도쿄를 떠올렸다. 요리를 잘하는 아내도 떠올렸다. 초등학교에 갔을 아이를 생각했다. 그리고――조금 우울해졌다.
"저쪽에 살구가 피어 있는데."
호즈미 중좌는 기쁘다는 양 먼 울타리에 핀 붉은 꽃을 가리켰다. Ecoute-moi, Madeline………――중좌의 마음에는 어느 틈엔가 유고의 노래가 떠올라 있었다.
넷 아버지와 자식과
다이쇼 7년 10월의 어느 밤, 나카무라 소장――당시의 군참모 나카모라 소좌는 서양풍 응접실에서 불이 붙은 하바나를 문 채로 멍하니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20년 남짓의 느긋한 생활은 소장을 사랑스러운 노인으로 만들었다. 특히 오늘밤은 전통옷을 입은 덕인지 벗겨진 이마 언저리나 살이 오른 입 근처에선 한 층 더 좋은 사람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소장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불쑥 한숨을 내쉬었다.
벽은 어디를 보아도 서양 그림의 복제 사진판이 걸려 있었다. 그 중 어떤 건 창문에 기댄 쓸쓸한 소녀의 초상이었다. 또 어떤 건 상록수 사이로 태양이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건 모두 전등불을 받아 이 낡은 응접실에 묘하게 꺼림칙하며 엄숙한 분위기를 주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어째서인지 소장을 유쾌하게 만들지 않는 듯했다.
말없이 몇 분인가가 지났을 쯤, 대뜸 방밖에서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 와라."
그 목소리에 함께 방에 들어 온 건 대학 교복을 입은 청년 하나였다. 키가 큰 청년은 소장 앞에 서서는 거기 놓인 의자에 손을 얹으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찾으셨어요? 아버지."
"그래 뭐. 거기 앉거라."
청년은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뭔데 그래요."
소장은 대답하기 위해 청년의 가슴춤에 있는 금단추에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오늘은 뭐 하다 왔냐."
"오늘은 카와이의――아버지도 아시죠?――저랑 같은 문과 학생이요. 카와이의 추도식이 있어서 들렀다 지금 막 온 참이에요."
소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짙은 하바나 연기를 뱉었다. 그러고는 거창하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벽에 걸린 그림들 말야. 이건 네가 바꾼 거냐?"
"그렇죠. 아직 말씀 안 드렸었네요. 오늘 아침에 바꿨어요.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안 든단 건 아니다. 안드는 건 아닌데 N 각하의 액자만은 걸어두고 싶구나."
"이 안에요?"
청년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 보였다.
"이 안에 걸면 안 되냐?"
"안 될 거야 없지만――좀 웃길 거 같아서요."
"초상화는 저기에도 있잖아."
소장은 난로위 벽을 가리켰다. 그 벽에는 오십몇 살 먹은 렘브란트가 액자 속에서 유유히 소장을 내려보고 있었다.
"저건 좀 다르죠. N 장군하고 동일시하지 말아주세요."
"그러냐? 그럼 별 수 없고."
소장은 간단히 단념했다. 하지만 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조용히 말했다.
"너는――그보다도 너희 또래 애들은 각하를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보고 말고 할 거나 있나요. 뭐, 높은 양반이죠."
청년은 늙은 아버지의 눈에서 저녁 반주의 췻기를 느꼈다.
"그야 높은 양반이지. 하지만 각하는 실로 연장자 다운 인품 좋은 성격을 지니셨어……"
소장은 거의 감상적으로 장군의 이야기를 몇 개 해주었다. 그건 러일전쟁 후, 소장이 나스노의 별장으로 장군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날, 별장으로 가보니 장군 부부는 마침 뒷산으로 산책을 나가 있다――별장 지기는 그렇게 말했다. 소장은 길을 아니 곧장 뒷산으로 향하려 했다. 그렇게 얼마 안갔을 쯤, 솜옷을 입은 장군이 부인과 함께 서있었다. 소장은 이 노부부와 함께 잠시 동안 서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장군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소장이 그렇게 물으니 장군은 불쑥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말이야, 아내가 지금 용무가 급하다길래 나를 따라 온 학생들이 마땅한 장소를 찾고 있네"――길가에 밤송이가 굴러다닐 쯤이었다.
소장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즐겁게 홀로 웃었다――그때 색이 바란 수풀 안에서 기세 좋은 중학생 네다섯 명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그들은 소장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장군 부부를 둘러싸더니 하나둘 그들이 부인을 위해 찾은 장소를 보고했다. 또 제각기 자신이 찾은 장소에 부인을 데려가려고 순수한 경쟁마저 시작했다. "그럼 당신이 뽑아주게"――장군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소장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건 듣기 좋은 이야기군요. 단지 서양인에겐 들려줄 수 없겠어요."
청년도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뭐 그런 느낌이야. 열두 살 먹은 중학생도 N 각하의 말이라면 삼촌 말처럼 따랐지. 각하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마냥 무사이기만 한 게 아냐."
소장은 즐겁게 이야기를 마치고는 다시 한 번 난로 위 렘브란트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도 인격자냐?"
"그럼요. 위대한 화가지요."
"N 각하는 어떨까."
청년의 얼굴엔 당혹의 색이 드리웠다.
"어떠냐고 물어도 곤란한데――뭐, 렘브란트 쪽이 N 장군보다는 저희와 가깝겠지요."
"각하가 너희와 다를 게 뭐야?"
"뭐라 하면 좋을까요?――뭐 이런 점이려나요? 예를 들어 오늘 추도식이 열린 카와이란 녀석 말이에요. 이 녀석도 자살했거든요. 하지만 자살하기 전에――"
청년은 진지한 얼굴로 아버지를 보았다.
"사진을 찍을 여유가 없었다네요."
이번에는 기분 좋은 소장의 눈에 살짝 당혹의 색이 감돌았다.
"사진이야 찍으면 될 일 아니냐. 마지막으로 기념한단 의미에서도――"
"누굴 위해서요?"
"누구랄 건 없지만――우리를 시작으로 N 각하의 마지막 얼굴은 봐두고 싶지 않니?"
"그건 N 소장을 떼고 생각해야 할 일 아닐까 싶네요. 저는 장군이 자살한 심정을 모르진 않아요. 하지만 사진을 찍은 건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설마 죽은 후에 그 사진이 어디 가게 앞에라도 걸린다니――"
소장은 거의 분개하여 청년의 말을 가로 막았다.
"그게 무슨 막말이냐. 각하께선 그런 속된 사람이 아냐. 철두철미하게 성실한 사람이지."
하지만 청년의 목소리나 얼굴은 침착하기 짝이 없었다.
"그야 속되진 않았겠죠. 성실했단 것도 상상은 갑니다. 하지만 우리로선 그 성실을 잘 모르겠어요. 우리보다 후대 사람들에겐 더더욱 통하지 않을 테고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시대 차이로구나."
소장은 겨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 뭐――"
청년은 그렇게 말하다 잠시 창문 밖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눈초리를 지었다.
"비가 오네요, 아버지."
"비?"
소장은 발을 뻗은 채로 다행이라는 양 화제를 바꾸었다.
"또 마르멜로가 떨어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다이쇼 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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