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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미인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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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사람 많은 헤이츄 중에서도 궁에서 일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소녀를 훔쳐보지 마라.

우지슈이모노가타리

어째서인지 이 사람과 만나서는 안 된다고 헤맬 때마다 시종 앓게 된다.

그렇게 고민할 정도로 죽고 싶어진다.

콘자큐모노가타리

미인이란 건 이러한 일이다.

짓킨쇼

 

     하나 화상

 

 태평 시대에 걸맞은 우아하게 빛나는 에보시 아래서는 아래가 부풀어 오른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다. 그 통통하게 살찐 뺨에 선명한 붉은기가 감도는 게 비단 연지는 아니었다. 남자에게선 보기 드문 젖살이 자연스레 핏기를 드리우고 있었다. 수염은 기품 있게 코 아래에――그보다는 옅은 입술 좌우에 마치 옅은 묵을 바른 것처럼 희미하게만 남아 있다. 하지만 반질거리는 구레나룻 위에는 안개 하나 없는 하늘색마저 희미하게 푸른 기운을 비추고 있다. 그게 조개껍질과 같은 따스한 색을 하고 있는 건 희미한 빛반사 때문이리라. 눈동자는 남들보다 가늘지만 그 안에는 끝없는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다. 그 눈동자 안쪽에는 언제라도 피어 있는 벚가지가 떠올라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맑고 밝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주시하게 되면 그곳에 행복만이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이는 먼 무언가에 황당함을 품은 웃음이다. 또 동시에 가까운 모든 것에 경멸을 품은 무언가다. 목은 얼굴에 비하면 오히려 가련하다 해도 좋다. 그 목에는 하얀 한삼이 희미하게 향을 품은 배추 색 스이칸 소매와 함께 얇은 선을 그리고 있다. 얼굴 뒤에서 빛나고 있는 건 학 자수를 박은 키쵸일까? 아니면 느긋한 산중턱에 여송을 그린 장자일까? 어찌 됐든 탁한 은색 같은 옅은 흰색 빛이 펼쳐지고 있다……

 이게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내 앞에 떠오른 '하늘이 내린 미인' 타히라노 사다부미의 얼굴이다. 타하라노 요시카제의 세 아이 중 차남으로 태어났기에 헤이츄란 이름으로 불렸다는 나의 Don Juan의 얼굴이다.

 

     둘 벚꽃

 

 헤이츄는 기둥에 기댄 채로 막연히 벚꽃을 바라보고 있다. 툇마루에 가깝게 이른 벚꽃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듯하다. 붉은 기가 살짝 가신 꽃에는 이른 오후의 햇살이 서로 교차한 가지 너머서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헤이츄의 눈은 벚꽃을 보아도 헤이츄의 마음은 벚꽃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아까부터 막연히 지쥬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지쥬를 본 건――"

 헤이츄는 생각을 이어갔다.

 "처음으로 지쥬를 본 건――그게 언제였지? 그래그래, 이나리모데에 나가던 참이었으니 하츠우마날 아침이로군. 그 여자가 차에 타려 했지. 내가 그 옆을 지나갔고――그런 일이었어. 부채로 가린 탓에 얼굴은 조금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홍매와 연두색 위에 자색 우치기를 덮고 있었지 ――그 모습은 뭐라 말할 수 없었어. 더군다나 가마에 들어가던 순간이니 한 손으로 하카마를 잡은 채로 허리를 굽히고 있었지――그 모습 또한 참을 수 없었어. 본원 대신의 저택에는 여인도 많이 있으나 그만한 여자는 한 명도 없는데 말이야. 그런 사람이라면 헤이츄가 반했다 해도――"

 헤이츄는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 반한 게 맞나? 반했다면 반한 거 같기도 하고 반하지 않았다면 반하지――대개 이런 건 생각할수록 알 수 없게 되나 뭐 대강 반한 거라 보면 되겠지. 물론 나인 이상 아무리 지쥬에게 반했다 해도 눈앞까지 어두워진 건 아니야. 언젠가 노리자네 녀석과 지쥬의 이야기를 하고 있더니 아쉽게도 머리숱이 옅다고 말했었지. 그런 건 척 봐도 알 수 있었어. 노리자네란 남자는 히치리키 연주는 좀 잘하나 호색 이야기가 나올 때면――뭐 그 녀석은 그 녀석인가.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지쥬 하나이니 말이야――헌데 욕심을 조금 부리자면 얼굴이 지나치게 쓸쓸한 구석이 있군. 쓸쓸한 게 전부라면 어딘가 낡은 그림 같은 품위도 느껴지나 쓸쓸한 주제에 박정해 보이며 묘하게 침착한 구석이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직하지 못해. 여자가 그런 얼굴을 하면 의외로 사람을 먹기 마련이지. 그런 데다 색도 하얗지는 않아. 검다고는 못해도 호박색 정도는 되겠군. 또 그 여자는 어느 때 봐도 파도치는 듯 흔들리는 기색이 있어. 그건 분명 어떤 여자도 흉내 낼 수 없는 모습이겠지……"

 헤이츄는 하카마 무릎을 세우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만개한 꽃잎 사이로 옅은 푸른색을 드리우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요전부터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대답 하나 없는 건 지나치게 고집 센 거 아닌가? 내가 편지를 보낸 여자는 대개 세 번이면 답을 보내기 마련이지. 이따금 완고한 여자가 있어도 다섯 번이나 보낸 적은 없어. 루겐인가 하는 스님의 딸은 우타 하나로 손아귀에 넣었지. 그것도 내가 지은 우타도 아냐. 누구였더라, 그래그래――요시스케가 만든 우타였던가. 요시스케는 그 우타를 아무리 보내도 상대도 못 받았다는데 같은 우타라도 내가 보내면――물론 그 지쥬는 내가 써도 답을 보내주지 않으니 자랑거리는 아닐지 모르겠군. 어찌 됐든 내 편지에는 반드시 답이 오기 마련이야. 답이 오면 만나게 되지. 만나면 소란이 벌어지고, 소란이 벌어지면――또 그게 코를 찌르고 말지. 대개 그런 식이야. 하지만 지쥬에겐 한 달하고도 보름 동안 못해도 스무 통은 보냈지만 도통 답이 오지 않고 있어. 나의 솜씨 좋은 문체라도 무한히 뽑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니 슬슬 뒤 내용도 쓰기 어렵군. 하지만 오늘 보낸 편지 안에는 '하다못해 보기라도 했단 말이라도 적어주오'란 편지를 보냈으니 이번에야말로 답이 오겠지. 오지 않으려나? 만약 오늘도 오지 않는다면――아아, 아아, 나도 어느 틈엔가 이렇게 자세를 낮출 정도로 기개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나. 듣자 하니 부라쿠인의 늙은 여우는 여자로 변모할 수 있다는데 그런 여우에게 홀리면 분명 이런 기분이 들고 말 테지. 같은 여우라도 나라사카의 여우는 미카카에 있다는 나무로 변모할 수 있다지. 사가의 여우는 달구지로 변모할 수 있다 하고. 카야가하의 여우는 어린 소녀로 변모할 수 있고, 모모조노의 여우는 연못으로 변모――여우 따위가 다 무슨 상관이냐. 어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헤이츄는 하늘을 올려다 본 채로 하품을 눌러 죽였다. 꽃으로 매워진 지붕에선 기울어진 햇살 속에서 이따금 하얀 무언가가 나부껴 왔다. 어디선가 비둘기도 우는 듯하다.

 "어찌 됐든 그 여자에겐 분명한 근성이 있군. 설령 만나지는 않더라도 한 번 말만 나누면 손에 넣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하물며 하룻밤 만나기라도 하면――그 셋츠도 코츄죠도 아직 나를 알기 전까진 남자를 싫어한다 했었지. 하지만 내 손에 걸리니 그렇게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고. 지쥬 또한 돌부처도 아니니 기분 좋아지기 마련이지. 하지만 그 여자는 여차할 때가 되더라도 코츄죠처럼 부끄러워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또 셋츠처럼 묘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지도 않을 거야. 분명 입가에 소매를 얹고서 눈으로만 웃으며――"

 "나리."

 "밤이니 촛불 같은 게 드리워 있겠지. 그 불빛이 그 여자 머리에――"

 "나리."

 헤이츄는 살짝 당황한 듯이 에보시 쓴 머리를 뒤로 돌렸다. 어느 틈엔가 아이 하나가 몸을 낮춘 채로 편지 한 통을 내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내 웃음을 꾹 눌러 죽이고 있었나 보다.

 "편지냐?"

 "네, 지쥬 님께서――"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주인 앞에서 물러났다.

 "지쥬가? 진짜일까?"

 헤이츄는 거의 머뭇머뭇 푸른잎의 편지를 열어보았다.

 "노리자네나 요시스케의 장난 아닌가? 그 녀석들은 하나같이 이런 걸 좋아하는 한가한 녀석들이니 말이야――아니, 이건 지쥬의 편지로군. 지쥬의 편지임은 분명하나――이 편지는 대체 뭐지?"

 헤이츄는 편지를 집어던졌다. 편지에는 "하다못해 보기라도 했단 말이라도 적어주오" 말의 대답이라는 양 "보기라도 했단" 문장만이――심지어 헤이츄가 보낸 편지에서 잘라내어 붙여져 있었다.

 "아아, 아아, 하늘이 내린 미인이라는 나도 이렇게나 바보 취급받으니 의미가 없군. 그건 그렇고 지쥬도 참 미운 여자 아닌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두고 보라지……"

 헤이츄는 무릎을 안은 채로 멍하니 벚나무 가지를 올려다봤다. 푸른 잎이 나부끼는 위에선 바람에 날린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다……

 

     셋 비 오는 밤

 

 그로부터 세 달이 지났다. 장마가 이어지던 어느 밤, 헤이츄는 홀로 지쥬의 방에 숨어들었다. 비는 밤하늘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엄청난 울림을 내고 있다. 길은 진흙탕을 넘어 강물 그 자체가 흐르는 듯했다. 이런 밤에 일부러 찾으면 아무리 차가운 지쥬라도 애처롭게 여길 게 분명하다――그렇게 생각한 헤이츄는 방입구를 살피고는 은을 쓴 부채 소리를 내면서 안내를 구하듯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열대여섯 쯤 되는 소녀 시종이 곧장 모습을 드러냈다. 마른 얼굴에 하얀 가루를 뿌린 졸려 보이는 소녀 시종이었다. 헤이츄는 얼굴을 가까이하며 작은 목소리로 지쥬를 불러달라 부탁했다.

 한 번 안으로 들어간 소녀 시종은 입구로 돌아와선 역시나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다들 잠들면 만나신다 하니까요."

 헤이츄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그리고 소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지쥬의 옆방에 앉았다.

 "역시 나는 똑똑해."

 소녀가 어디론가 물러난 후, 헤이츄는 홀로 히죽히죽거렸다.

 "아무리 지쥬라도 이번에는 마음이 꺾인 듯하군. 여자란 본디 애처로움을 느끼기 쉬우니 말이야. 여기서 친절함만 보여주면 금세 내 손에 떨어지겠지. 이런 걸 모르니 요시스케나 노리자네는 도무지――잠깐만. 하지만 오늘 밤 만날 수 있단 건 너무 이야기가 잘 풀리는 듯한데――"

 헤이츄는 슬슬 불안해졌다.

 "하지만 만날 생각이 없다면 만나겠단 소리도 하지 않겠지. 그럼 내가 삐뚤게 보고 있는 건가? 하기사 육십 통 가량의 편지를 보내도 대답 하나 받지 못했으니 삐뚤어질 만도 하지. 하지만 삐뚤어진 게 아니라면――잘 생각해 보면 삐뚤게 보는 거 같기도 하군.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도 이제까진 돌아 보지도 않던 지쥬가――하지만 상대가 나니까 말이야. 헤이츄가 상대라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풀린 걸지도 몰라."

 헤이츄는 옷가짐을 고치면서 주위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선 어둠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서 단지 빗소리만이 전나무 지붕만을 두드리고 있었다.

 "삐뚤어졌다 싶으면 삐뚤어진 듯하고 삐뚤어지지 않다고――아니, 삐뚤어진 거라 생각하면 삐뚤어진 게 아닌 거 같고, 삐뚤어진 게 아니다 싶으면 의외로 삐뚤어진 거 같기도 하군. 운이란 건 대개 우스꽝스러운 것이니 말이야. 그렇게 보니 삐뚤어진 게 아닌 거 같군. 그럼 지금도 그 여자가――오, 이제 다들 자기 시작하는 모양이로군."

 헤이츄는 귀를 기울였다. 듣고 보니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 속에서 방에 모여 있던 여자들이 하나둘 돌아가는 듯하다. 사람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지금이 딱 참을 때로군. 얼마 안 있으면 나는 아무 어려움도 없이 묵혀뒀던 울분을 풀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배 밑바닥에는 아직 안심하지 못하는 나 자신도 있군. 그래그래, 이게 좋지. 만나지 못한다 생각하면 신기하리만치 만날 수 있어. 하지만 이 우스운 운이란 녀석은 그런 내 계산까지 꿰뚫어보고 있을지 모르겠군. 그럼 만날 수 있다 생각할까? 그것도 참 타산적이니 역시 내 생각처럼은――아아, 가슴이 아프군. 차라리 지쥬와 무관한 생각을 해볼까. 방도 많이 조용해졌으니 말이야. 빗소리만이 들리는군. 그럼 눈을 감고 비 생각이라도 해보자. 봄비, 장마, 가을비……가을비란 말이 있나? 가을비, 겨울비, 빗물, 우산, 기우제, 우룡, 비개구리, 비피하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헤이츄의 귀를 놀라게 했다. 아니, 놀라기만 했을까. 그 소리를 들은 헤이츄의 얼굴에는 불쑥 부처의 방문을 맞이한 신앙심 깊은 스님보다도 더 큰 환희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왜냐면 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잠금을 푸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기 때문이다.

 헤이츄는 문을 당겨 보았다. 문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쉽사리 옆으로 밀렸다. 그 너머에선 신비할 정도로 화롯불 향이 강했다. 어둠은 그곳에도 펼쳐져 있었다. 헤이츄는 조용히 문을 닫고는 무릎을 질질 끌고 손을 더듬으며 안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 요염한 어둠 속에선 천장의 빗소리 말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손이 닿는가 싶으면 옷걸이나 거울이었다. 헤이츄는 어쩐지 가슴이 뛰는 것만 같았다.

 "없나? 있으면 뭐라고 말 좀 하지."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헤이츄의 손은 우연히도 부드러운 여자 손에 닿았다. 그렇게 조금씩 찾아가니 비단인 듯한 옷소매에 닿았다. 그 옷 아래의 유방에 닿았다. 둥근 뺨이나 턱에도 닿았다. 얼음보다도 차가운 머릿결에 닿았다――헤이츄는 기어코 어둠 속에서 홀로 누워 있는 사랑스러운 지쥬를 찾아냈다.

 이는 꿈도 환상도 아니다. 지쥬는 헤이츄의 코 끝에 옷 하나만을 둔 채 흐트러진 모습으로 누워 있다. 그는 그곳에 이르자마자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분명 어떤 소시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 거 같다. 아니면 몇 년 전에 등불 그림자로 본 어떤 그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이제까지 차갑다고만 생각했는데 앞으로는 부처보다도 네게 목숨을 바치마."

 헤이츄는 지쥬를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혀는 윗턱에 끌어당긴 채 목소리 다운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지쥬의 머리 냄새나 묘하게 따스한 피부 냄새가 거침없이 그를 감쌌다――그러더니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지쥬의 숨이 닿았다.

 한순간――그 한순간이 지나버리면 그들은 반드시 애욕의 폭풍에 휘감겨 빗소리도, 모닥불 냄새도, 대신들도, 어린 시종도 잊어버렸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아슬아슬한 찰나에 지쥬는 몸을 일으키곤 헤이츄의 얼굴에 얼굴을 가져가며 부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주시지요. 아직 저쪽 문에 막을 치지 않았으니 그것만 내리고 오겠습니다."

 헤이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쥬는 두 사람의 옷 위에 향이 좋은 온기를 남긴 채로 자리서 일어났다.

 "봄비, 지쥬, 아미타불, 비 피하기, 빗물, 지쥬, 지쥬……"

 헤이츄는 눈을 뜨고서 스스로도 판단이 서지 않는 여러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막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우룡, 향로, 밤비 내려 옥으로 가득 찬 어둠은 꿈에 비할 바가 없으니――왜 안 오지? 막은 내린 거 같다만――"

 헤이츄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 하지만 주위엔 아까와 마찬가지로 모닥불 향이 묻어난 어둠만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다. 지쥬는 어디로 갔는지 옷 스치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설마――아니, 어쩌면――"

 헤이츄는 몸을 일으켜 다시 손을 더듬으며 반대쪽 문에 이르렀다. 그러자 문은 방 밖에서 엄중히 잠겨 있었다. 그 위로 귀를 얹어 봐도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빗속에서 모든 방이 조용해져 있었다.

 "헤이츄, 헤이츄, 너는 이제 하늘이 내린 미인 따위가 아니구나――"

 헤이츄는 문에 기댄 채로 마음을 놓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네 용모도 다 떨어졌구나. 네 재능도 이제는 원래 같지 못해. 너는 노리자네네 요시스케보다 더 못난 녀석이 되어버렸어……"

 

     넷 미인문답

 

 이는 헤이츄의 두 친구――요시스케와 노리자네가 나눈 어떤 잡담의 한 구절이다.

요시스케 "아무리 헤이츄라도 그 지쥬란 여자에겐 못 이기나 보군."

노리자네 "그런 모양이야."

요시스케 "꼴 좋지. 그 녀석은 나랏님 안주인 아니면 어떤 여자에게라도 손을 대는 남자니 말이야. 조금은 반성했으면 좋으련만."

노리자네 "흐음, 자네도 공자의 제자였나?"

요시스케 "공자의 가르침 따위 내 알 바 아니지. 하지만 얼마나 많은 여자가 헤이츄 때문에 울었는지 잘 알고 있잖나. 한 마디 덧붙이면 얼마나 많은 지아비들이 괴로워했는지, 얼마나 많은 부모가 화를 냈는지, 얼마나 많은 시종들이 원망했는지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민폐투성이 남자는 거창하게 꾸지람을 받아 봐야 해. 자네는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노리자네 "그렇지만은 않은걸. 확실히 헤이츄는 세간에 민폐를 끼치고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게 어디 헤이츄 혼자 짊어져야 하는 죄인가?"

요시스케 "그럼 또 누가 진단 말인가?"

노리자네 "그야 여자가 져야지."

요시스케 "여자가 지는 건 불쌍하지 않나."

노리자네 "헤이츄가 지는 건 안 불쌍하고?"

요시스케 "그야 헤이츄가 꼬시지 않았나."

노리자네 "남자가 전장에서 칼부림을 하는 동안에도 여자는 자는 사람의 목밖에 자르지 못하네. 허나 결국은 같은 살인죄지 않은가."

요시스케 "엉뚱한 말로 헤이츄 편들기 하는군. 허나 이것만은 확실하지 않나. 우리는 세간을 괴롭히지 않지만 헤이츄는 세간을 괴롭히지."

노리자네 "그것도 또 모를 일이지. 애당초 우리 인간은 어떤 인과인지는 몰라도 시시각각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네. 헤이츄는 단지 우리보다 조금 더 세간을 괴롭힐 뿐이지. 그 점이야 그런 천재에겐 도리 없는 운명이지만 말이야."

요시스케 "웃기는 소리 말게나. 헤이츄가 천재라면 이 연못의 미꾸라지도 용이 될 수 있을 테지."

노리자네 "헤이츄는 천재가 맞아. 그 남자의 얼굴을 잘 보게나. 그 남자의 목소리를 잘 듣게나. 그 남자의 편지를 읽어 보게나. 만약 자네가 여자이고 그 남자와 하룻밤 만났다 생각해 보게나. 그 남자는 구카이나 오노노 미치카제처럼 어머니 뱃속을 벗어날 때부터 비범한 능력을 받고 태어났어. 그게 천재가 아니라면 천하에 어떤 사람이 천재이겠나. 그 점에서 우리 두 사람도 도무지 헤이츄의 적이 못 되지."

요시스케 "허나, 허나 천재는 자네 말처럼 죄만 가득하지 않나? 이를테면 미치카제의 붓놀림을 보면 그 미묘한 필력에 이끌리고 쿠카이의 경독을 읽으면――"

노리자네 "나는 천재가 비단 죄만 만든다곤 생각하지 않네. 죄도 만드는 거지."

요시스케 "그럼 헤이츄는 천재가 아니잖나. 그 녀석은 죄만 만드니 말이야."

노리자네 "그건 우리는 알지 못하지. 가나도 제대로 못 쓰는 자에겐 미치카제의 붓질도 지루할 뿐이잖나? 신앙심이 없다면 쿠카이의 독경보다 꼭두각시의 우타 쪽이 재밌을지 모르지. 천재의 공덕을 알기 위해선 우리에게도 상당한 자격이 필요하네."

요시스케 "그거야 자네 말이 맞지만 헤이츄의 공적 따윈――"

노리자네 "헤이츄라고 다를 게 뭔가? 그런 미적 천재의 공덕은 여자만 아는 게지. 자네는 방금 전 얼마나 많은 여자가 헤이츄 탓에 울었는지 아냐고 물었지. 나는 반대로 이렇게 묻고 싶더군. 얼마나 많은 여자가 헤이츄 덕에 더할 나위 없는 환희를 맛봤겠나. 얼마나 많은 여자가 헤이츄 덕에 사는 보람을 느꼈겠나. 얼마나 많은 여자가 헤이츄 덕에 희생의 존귀함을 알았겠나, 얼마나 많은 여자가 헤이츄 덕에――"

요시스케 "아니, 그만하면 됐네. 자네의 논리를 가져다 붙이면 허수아비도 갑옷 무사가 되겠군."

노리자네 "자네처럼 질투가 깊어서야 갑옷무사도 허수아비가 될 걸세."

요시스케 "질투가 깊어? 흐음, 이건 의외로군."

노리자네 "자네는 헤이츄를 꾸지라는 것과 달리 문란한 여자를 꾸짖는 법은 없지 않은가. 설령 입으로는 꾸짖어도 진심으론 꾸짖지 않을 테지. 그건 서로 남자이니 어느 틈엔가 질투가 더해지기 때문일세. 우리는 조금이든 만약 헤이츄가 될 수 있다면 헤이츄가 되고 싶다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야심을 지니고 있지. 때문에 헤이츄는 그 어떤 모반인보다도 더 많은 원망을 받는 거지. 그렇게 보면 참 딱한 일이야."

요시스케 "그럼 자네도 헤이츄가 되고 싶나?"

노리자네 "나 말인가? 나는 별로 되고 싶지 않네. 그러니 내가 보는 헤이츄는 자네가 보는 헤이츄보다 공평하지. 헤이츄는 여자 하나가 생기면 금세 그 여자에게 질리고 마네. 그리고 다른 여자에게 우스울 정도로 푹 빠지고 말아. 그건 헤이츄의 마음에 늘 후잔의 신녀와 같은 인간을 초월한 미녀의 모습에 또렷이 떠올라 있기 때문이라네. 헤이츄는 늘 세상 여자에게서 그런 아름다움을 찾으려 들지. 실제로 반해 있을 때엔 그렇게 보이기도 해. 하지만 두세 번 만나면 이는 신기루처럼 박살 나고 말지. 때문에 그 녀석은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이리저리 몸을 옮겨가는 걸세. 심지어 속세에 그런 미인이 있을 리 없으니 결국 헤이츄의 평생은 불행하게 끝날 수밖에 없지. 그런 점에선 자네나 내가 훨씬 행복하다 할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헤이츄의 불행이란 천재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그건 헤이츄만이 아니야. 쿠카이나 오노노 미치카제 또한 그 녀석과 닮아 있을 테지. 어찌 됐든 행복해지려면 우리처럼 평범한 게 최고라네……"

 

     다섯 모든 게 아름다웠다 한탄하는 남자

 

 헤이츄는 지쥬의 방에 가까운 인기척 없는 복도에 홀로 쓸쓸히 자리해 있었다. 그 복도에 드리운 기름과 같은 햇살을 보면 오늘은 유달리 더운 듯했다. 하지만 정원 밖 하늘에선 녹색을 뽐내는 소나무가 조용히 청량함을 지키고 있다.

 "지쥬는 나를 상대해 주지 않는구나. 나도 이제 지쥬라면 질색이다――"

 헤이츄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로 멍하니 그런 생각에 잠긴다.

 "허나 아무리 질색하고 체념해도 지쥬의 모습이 환상처럼 눈앞에 떠오르지 않느냐. 나는 어느 비 오는 날 이후로 이 모습을 잊고 싶다는 일념으로 사방의 신들을 향해 기도를 올려 왔다. 허나 카모의 신사에 가면 거울 속에 지쥬의 모습이 떠오른다. 키요미즈데라 안에 들어가면 관세음보살의 모습마저 그대로 지쥬로 바뀌고 만다. 만약 이 모습이 영원히 내 마음속에서 가시지 않는다면 나는 분명 애타는 마음에 죽고 말겠지――"

 헤이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잊기 위해선――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겠구나. 뭐든지 좋으니 그 여자의 얄팍한 구석을 찾는 거야. 지쥬도 신은 아닐 테니 여러 부정한 모습도 있을 테지. 그걸 하나라도 발견하면 마치 여자로 변모한 여우가 꼬리를 들킨 것처럼 지쥬의 환상도 무너지고 말 거야. 내 목숨은 그 찰나에 겨우 내 것이 되겠지. 하지만 어디가 얄팍하고 어디가 부정한가. 그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지. 아아, 자애로운 관세음보살이여, 부디 그곳을 보여주소서. 지쥬가 강가의 여자 거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단 증거를……"

 헤이츄는 그렇게 생각하며 울적한 시선을 들었다.

 "음, 저기 가는 건 지쥬의 시종 아이 아니더냐."

 그 똑똑한 여시종은 패랭이꽃이 겹쳐진 얇은 옷에 색이 짙은 하카마를 끌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붉은 종이부채 뒤로 무언가 상자를 숨기고 있다. 저건 분명 지쥬의 대변을 버리러 가는 걸 테지. 그 모습을 본 헤이츄의 마음속엔 불쑥 어떤 대담한 결심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헤이츄는 얼굴색을 바꾸더니 시종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상자를 뺏자마자 복도 건너편에 보이는 사람 없는 방에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여시종은 우는소리를 내면서 허둥지둥 그를 쫓아왔다. 하지만 그 방에 들어선 헤이츄는 문을 닫고서 재빠르게 잠궈버렸다.

 "그래, 이 안을 보면 확실하지. 백 년의 사랑도 순식간에 연기 하나 없이 사라지고 말 거야……"

 헤이츄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상자를 얇은 보자기에 얹었다. 상자에는 그린지 얼마 안 된 듯한 정교한 마키에가 장식되어 있었다.

 "이 안에 지쥬의 대변이 있구나. 동시에 내 목숨도 있지……"

 헤이츄는 그곳에 자리한 채로 가만히 아름다운 상자를 바라보았다. 방 밖에선 여시종의 우는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틈엔가 무거운 침묵에 삼켜지고 만다. 그 후엔 창문이나 문도 점점 연기처럼 사라지기 시작한다. 아니, 이제는 낮인지 밤인지도 헤이츄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눈앞에는 두견새가 그려진 상자 하나가 또렷이 공중에 떠올라 있다……

 "내 목숨을 건지는 것도 지쥬와 평생 헤어지는 것도 모두 이 상자에 걸려 있구나. 이 상자 뚜껑만 열면――아니, 그건 생각해 볼 일이구나. 지쥬를 잊는 게 좋은 건지 보람 없는 목숨줄을 늘리는 게 좋은 건지 나는 딱 잘라 대답할 수 없으니 말이야. 설령 타죽는다 해도 이 상자 뚜껑만은 열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헤이츄는 마른 뺨 위로 눈물 자국을 빛내면서 뒤늦게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 후, 불쑥 눈을 빛내고는 이번엔 마음속으로 이런 소리를 질렀다.

 "헤이츄! 헤이츄! 너는 왜 이리 똑 부러지지 못하느냐? 그 비 오는 밤을 잊은 거냐? 지쥬는 지금도 네 사랑을 비웃고 있을지 모른다. 살아라! 훌륭히 살아내라! 지쥬의 대변만 보면 너는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을……"

 헤이츄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기어코 뚜껑을 열었다. 상자에는 옅은 누런색 물이 반 정도 담겨서 짙은 누런색 물건이 두세 개 가량 밑에 잠겨 있다. 그러더니 마치 꿈처럼 정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지쥬의 대변일까? 아니, 킷쇼텐뇨라도 이런 대변을 볼 리가 없다. 헤이츄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장 위에 떠오른 작은 물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머리에도 닿을 정도로 몇 번이나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나 냄새는 변하지 않았다.

 "이건 어떠냐! 이 물에서도 냄새가 풍기는데――"

 헤이츄는 상자를 기울여 살짝 물을 마셔보았다. 물 역시 정향을 달인 깔끔한 즙이었다.

 "그럼 이것도 향목이란 말이냐?"

 헤이츄는 집어 올린 걸 씹어 보았다. 그러자 이빨 사이에 스며들 정도로 쓴맛이 섞인 단맛이 있었다. 그런데다 그의 입안에는 곧장 감귤꽃보다 시원한 미묘한 향으로 가득 찼다. 지쥬는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헤이츄의 계략을 깨기 위해 나무를 쓴 대변을 만든 것이다.

 "지쥬! 기어코 네가 나를 죽이는구나!"

 헤이츄는 이렇게 신음하며 상자를 떨구었다. 그리고 그 위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반쯤 죽은 그 눈동자 안에 금빛 후광을 두른 채로 그를 향해 웃고 있는 지쥬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이쇼 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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