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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보은기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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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카와 진나이의 이야기

 

 저는 진나이라고 합니다. 성은――글쎄요, 세간에선 이전부터 아마카와마카오의 옛지명 진나이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아마카와 진나이――선생님께서도 이 이름은 아시나요? 아뇨, 놀랄 건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아시는 것처럼 이름 높은 도둑이니까요. 하지만 오늘 밤 찾아 온 건 훔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만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선생께선 일본에 있는 바테렌신부 중에서도 높은 도덕을 지닌 분이라 들었습니다. 해서 보면 도둑 소리 듣는 녀석과 잠깐이라도 함께 있는 게 불쾌하실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도 생각만큼 도둑질만 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쥬라쿠다이에 불린 루손 스케자에몬의 고용인 중 한 명도 진나이라 이름을 밝혔지요. 또 리큐코지가 중용하던 '붉은머리'라 불리는 물병도 그걸 준 렌가시의 본명이 진나이였다지요. 하물며 2, 3년 전에 아마카와 일기란 책을 쓴 오오무라의 통명도 진나이지 않았습니까? 그 외에 산죠가와라의 싸움서 카피탄 '마루도나도'를 구한 허무승도, 사카이의 묘코쿠지 문앞에서 남만약을 팔던 상인도 ……그런 자들도 이름을 밝혀내면 진나이였을 게 분명합니다. 아뇨, 그보다 중요한 건 작년 이 '산 후란시스코'의 절에 어머니 '마리야'의 손톱을 담은 황금 사리탑을 모신 것도 역시 진나이란 신도였을 터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밤에는 그런 걸 하나하나 설명할 새가 없군요. 단지 아마카와 진나이는 세상의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믿어주시지요. 그런가요? 그럼 되도록 짧게 재 용무를 말해드리죠. 저는 어떤 남자의 혼 때문에 '미사'를 부탁하러 왔습니다. 아뇨, 제 혈육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제 칼날에 피를 적신 자도 아니지요. 이름인가요? 이름은――글쎄요, 그걸 밝혀도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어떤 남자의 혼을 위해――혹은 '포우로'라는 일본인을 위해 명복을 빌어주고 싶습니다. 안 되나요?――하기사 아마카와 진나이에게 이런 걸 부탁 받아서야 간단히 받아 들일 수 없겠지요. 그럼 일단 사정만이라도 들어주시지요. 하지만 그에는 생사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그 가슴의 십자가를 걸고서 약속을 지켜주실 수 있나요? 아뇨――결례는 용서해주시지요.(웃음) 바테렌인 선생님을 의심하는 건 도적인 제게는 주제 넘는 일일 테지요. 하지만 이 약속을 지켜주시지 않으면 (대뜸 진지하게) '인헤루노'의 맹화에 불타지 않더라도 현세의 벌이 내려질 터입니다.

 벌써 2년 쯤 된 이야기인데 마침 어느 초겨울 한밤중이었습니다. 저는 탁발승 행세를 한 채 교토 거리를 어슬렁이고 있었지요. 교토 거리를 어슬렁거린 게 그날 밤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래저래 닷새 가량은 초경만 지나면 반드시 사람 눈에 안 띄도록 가만히 집들을 살펴보곤 했으니까요. 물론 무얼 위한 일이었는지 일일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특히 그때는 잠시 마리절에 다닐 때기도 했으니 돈 쓸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야 거리에선 인파가 끊긴지 오래였습니다. 하지만 별만이 빛나는 하늘에선 바람 소리가 술렁이고 있었지요. 저는 어두운 지붕 아래를 따라 오가와도리를 내려 오다 문득 사거리 하나 꺾는 곳에서 커다란 저택이 있는 걸 보았습니다. 이는 교토서도 이름이 알려진 호죠 야야소에몬의 집이었지요. 똑같이 바다 건너는 일을 하더라도 호죠는 카도쿠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순 없겠지요. 하지만 어찌 됐든 샤무로타이나 루손필리핀에 배 한두 척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부자임은 분명하겠지요. 제가 꼭 이 집을 찾아 어슬렁거리던 건 아닙니다만 마침 한 바탕 벌 수 있겠지 싶었습니다. 더군다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밤은 깊고 바람도 강했지요――제가 장사를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길가의 빗물통 뒤에 삿갓이나 지팡이를 숨기고서 곧장 담을 넘었습니다.

 세간의 소문을 들어 보시지요. 아마카와 진나이는 인술을 쓴다――그렇게들 말하지요. 하지만 선생께선 속세 사람과 달리 믿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인술도 쓰지 않을뿐더러 악마의 도움도 받지 않습니다. 단지 아마카와에 있던 시절, 보르토가르포르투갈배 의사한테 궁극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걸 활용하면 커다란 자물쇠를 풀거나 무거운 빗장을 푸는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웃음) 이제까지 없었던 도둑질―일본이란 미개척지는 그마저도 십자가나 대포의 전래와 동시에 서양에서 배워 온 거지요.

 저는 순식간에 호죠 가문의 집안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복도에 이르자 놀랍게도 이 밤에도 불이 켜져 있는 걸로 모자라 말소리가 들리는 방까지 있지 않습니다. 주위 상황을 보아하니 다과방이 분명했습니다. '초겨울 차라'――저는 그렇게 쓴웃음 지으면서 조용히 다가갔습니다. 실제로 그때는 사람 목소리가 나는데도 일이 방해된다는 것보다 풍류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이 집안 주인이나 손님이 어떤 걸 즐기는가?――하는 생각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후스마 밖으로 몸을 대자마자 제 귀에 들리는 건 아궁이 끓는 소리였습니다. 그런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의외로 누군가가 말을 하더니 눈물을 흘리지 뭡니까. 누군가――보다 정확히는 단숨에 여자란 것마저 알 수 있었습니다. 큰집안의 다과방에서, 한밤중의 여자 울음 소리가 나다니. 분명 평범한 일은 아닐 테지요. 저는 숨을 죽인 채로 다행히 작게 열려 있던 후스마 틈새로 다과방 안을 들여다 봤습니다.

 행등 빛을 받고 있는 코시키인 듯한 토코노마의 족자, 꽃병에 담긴 상국――방 안에선 당연하다는 듯이 쓸쓸한 정취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토코노마의 앞――마침 제 정면에 앉은 노인은 집주인 야소에몬일 테지요. 얇은 카라쿠사 하오리를 입고서 가만히 팔짱을 낀 채로 곁눈질하며 아궁이 끓는 소리를 듣는 듯했습니다. 야소에몬의 아랫 자리에는 깔끔하게 머리를 올린 늙은 여성 하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옆얼굴을 보인 채로 이따금 눈물을 닦고 있었지요.

 "생활 궁핍할 게 없더라도 고생마저 없는 건 아니구나"――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연스레 작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작은 웃음을――말은 그렇게 해도 호죠 가문이나 부부한테 악의가 있던 건 아닙니다. 저처럼 40년 동안 악명만 짊어지고 있는 입장에선 타인의――특히 행복해보이는 타인의 불행은 자연스레 웃음이 지어지는 존재였습으니까요.(잔혹한 표정) 그때도 저는 부부의 한탄이 가부키라도 보는 듯이 기뻤습니다.(비꼬는 듯한 웃음) 하지만 이는 저 혼자만의 이야기도 아닐 테지요. 누구나 좋아하는 소시를 꼽자면 비극에 국한되기 마련이라니까요.

 야소에몬은 잠시 후, 탄식하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운다고 별 수 있겠나. 나는 내일이라도 가게 사람들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네."

 그때 거친 바람이 다과방을 흔들었습니다. 그에 목소리가 섞인 걸 테죠. 야소에몬의 아내가 하는 말은 알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두꺼운 눈썹, 뾰족한 광대, 특히 날카롭고 긴 눈초리――이는 보면 볼 수록 어디서 한 번 본 얼굴처럼만 느껴졌습니다.

 "주 '에스 키리스토' 님. 부디 우리 부부의 마음에 당신의 힘을 내려주소서……"

 야소에몬은 눈을 감은 채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여자 또한 남편처럼 천제의 가호를 구하는 듯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야소에몬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또 초겨울 바람이 불 때, 제 마음에 떠오른 건 20년 전의 기억입니다. 저는 이 기억 속에서 야소에몬의 모습을 또렷이 보았습니다.

 그 20년 전 기억이란 건――아니, 그걸 말할 필요는 없을 테지요. 단지 짧게 사실만 꼽자면 제가 아마카와에 건너가 있을 적, 어떤 일본 선장한테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엔 서로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로 헤어졌는데 제가 지금 본 야소에몬은 그때의 선장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그 우연에 놀라면서 역시나 이 노인의 얼굴을 지켜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위세 있는 어깨나 손가락 두터운 손에선 아직도 산호나, 파도, 백단 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야소에몬은 긴 기도를 마치고는 조용히 아내를 향해 말했습니다.

 "이제는 어떤 일도 하늘의 뜻에 달렸다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그럼 물이 끓은 거 같으니 차라도 한 잔 마시겠나."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올라오는 눈물을 삼키는 듯이 기어 들어가는 듯한 대답을 했습니다.

 "네――그럼에도 아직 아쉬운 건――"

 "자, 그런 걸 불평이라 하는 걸세. 호죠마루가 침몰한 것도 은을 전부 잃은 것도――"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하다못해 아들인 야사부로만이라도 무사했다면……"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죠 가문의 불운에 유쾌함을 느낀 게 아닙니다. '과거의 은혜를 갚을 때가 왔다"――그런 생각이 기뻤던 거지요. 제게도, 이 도둑 아마카와 진나이에게도 훌륭히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유쾌함은――아뇨, 이 유쾌함을 아는 사람은 저 말고는 없을 테지요. (비꼬듯이) 세간의 착한 사람들은 참 불쌍합니다. 어떤 나쁜 짓도 안 하는 대신 선행이 얼마나 기쁜지――그런 것도 잘 알지 못하니까요.

 "무얼, 그런 글러 먹은 녀석은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야소에몬은 씁쓸하다는 양 행등 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 녀석이 써버린 돈이라도 있다면 이번에도 급한불만은 껐을지 모르지. 그런 걸 생각하면 의절한 건………"

 야소에몬은 그렇게 말하곤 놀라서 저를 바라봤습니다. 놀랄만도 하지요. 저는 그때 말도 없이 후스마를 열었으니까요――심지어 당시 제 모습을 생각해보시지요. 스님 차림을 한 데다 삿갓은 벗은 대신에 남만두건을 차고 있었으니까요.

 "누구냐, 네놈은."

 야소에몬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곧장 몸을 일으켰습니다.

 "아뇨, 놀라실 거 없습니다. 저는 아마카와 진나이라 합니다――자, 진정하시지요. 아마카와 진나이는 도둑입니다만 오늘 갑작스레 찾아뵌 건 다른 용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건을 벗으면서 야소에몬 앞에

 그 후의 일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추측하실 수 있겠지요. 저는 호죠 가문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사흘 이내에 육천 관의 돈을 조달하여 은혜를 갚겠다는 약속을 맺은 거지요――이런, 문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군요. 그럼 오늘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밤에 다시 한 번 찾아 뵙지요. 저 커다란 십자가에 내리는 별빛은 아마카와의 하늘에선 빛나도 일본 하늘에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는 저렇게 일본에서는 모습을 숨기고 싶다고 오늘밤 '미사'를 올리러 온 '포우로'의 혼 때문이라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네? 제가 도망칠 길 말인가요?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이 높은 천장으로도 저 큰 난로로도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으니까요. 그럼 부디 은인 '포우로'의 혼을 위해 다른 사람께는 아무 말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호죠 야소에몬의 이야기

 

 바테렌 님, 부디 제 참회를 들어주시지요. 아시겠지만 요즘 세상에 악명 높은 아마카와 진나이란 도둑이 있습니다. 네고로데라의 탑에 살던 것도 셋쇼 칸바쿠의 검들을 훔친 것도, 또 먼 바다 밖에선 루손의 태수를 공격한 것도 모두 그 남자의 짓이라 들었습니다. 그런 녀석이 기어코 잡힌 데다가 한 번은 모도리바시 옆에 효수됐단 것도 들으셨을지 모르겠군요. 저는 그 아마카와 진나이에게 적지 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또 은혜를 받은 만큼 이제는 무어라 말할 도리 없는 슬픈 꼴을 마주하고 말았군요. 부디 그 이야기를 상세히 들으시고 죄인 호죠 야소에몬에게도 천제의 자애를 기도해주시지요.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쯤 된 어떤 겨울의 일입니다. 줄곧 바다가 거칠어서 호죠마루가 침몰하질 않나 빌려 준 돈을 못 받질 않나――이래저래 겹치고 겹친 탓에 호죠 가문은 뿔뿔히 흩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장사치에겐 거래처나 있지 친구라 부를 게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희 가업은 얕은 물 위로 올라간 큰배처럼 거꾸로 뒤집여 나락에 떨어질 일만 남은 셈이지요. 그러던 어느 밤――지금도 그날 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초겨울 바람이 심하게 불던 밤이었는데, 저희 부부는 앞서 말한 사정 탓에 밤이 새는 것도 모른 채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뜸 찾아온 게 스님 모습에 남만두건을 찬 그 아마카와 진나이였지요. 저는 물론 놀라기도 했고 화도 났습니다. 하지만 진나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남자는 역시나 도둑으로서 저희 집에 들어왔습니다만 다과방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걸로 모자라 대화 소리도 들렸다지 뭡니까. 해서 후스마 너머로 들여다 보니 바로 저 호죠 야소에몬이 진나이의 목숨을 구해준 적 있는 20년 전 은인이었다나요?

 확실히 그렇게 듣고 보니 이래저래 20년 쯤 되었을까요. 제가 아직 아마카와를 오가는 '후스타' 선의 선장을 하고 있을 적에 정박하는 동안 수염도 제대로 나지 않은 일본인 하나를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야기하긴 술을 마셔 시작된 싸움 끝에 당나라 사람 하나를 죽여서 쫓기고 있다나요. 그 사람이 오늘날 그 아마카와 진나이라는 유명한 도둑이 된 걸 테지요. 저는 진나이의 말도 사실인 걸 알았으니 집안 사람들이 잠든 걸 다행이라 생각하며 먼저 그 뜻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진나이를 말하길 자기 힘이 닿는 일이라면 20년 전 일의 보은 삼아 호죠 가문의 위기를 구해주고 싶다고 합니다. 당장 필요한 돈이 얼마냐고도 물었지요. 저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도둑한테 돈을 조달 받는다――그게 우스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아마카와 진나이라도 그런 돈이 있다면 일부러 우리 집에 도둑질을 하러 올 리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금액을 이야기하자 진나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오늘밤 중엔 어려워도 사흘만 기다리면 구할 수 있다고 그 말을 받아 들였지 뭡니까. 하지만 필요한 게 무려 육천 관에 이르는 큰돈이니까요. 제대로 조달할 수 있을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아뇨, 제가 보기엔 주사위 눈을 믿는 것보다도 훨씬 믿음직하지 못했지요.

 그날 밤, 진나이는 저희 집에서 느긋하게 차를 홀짝이고선 초겨울 바람 속을 뚫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이 되어도 약속한 돈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되어도 마찬가지였죠. 사흘째엔――이 날은 눈이 내렸는데 역시 밤이 되어도 소식 하나 없습니다. 저는 앞서 진나이의 약속은 기대도 안 했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가게 사람도 쓰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 걸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또 실제로 사흘째 밤에는 눈은 행등을 향해 있어도 귀는 눈 밟는 소리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헌데 삼경 쯤 지나니 대뜸 다과방 밖 정원에서 무언가 사람이 내는 듯한 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제 머리에 스친 건 물론 진나이였습니다. 혹여 누군가 진나이의 흔적을 찾아 온 건 아닐까――저는 곧장 그런 생각이 들어 정원을 향해 장자를 열자마자 행등불을 들여 보였습니다. 눈이 깊은 다과방 앞에선 대명죽 아래서 어떤 사람 둘이 서로를 붙들고 있었지요――그런가 하니 다른 한 사람은 달려 드는 상대를 내치더니 정원수 뒤로 숨듯이 울타리 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눈이 무너지는 소리, 울타리를 기어 오르는 소리――그 후로 조용해진 건 어딘가 울타리 밖으로 무사히 떨어졌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내쳐진 쪽은 딱히 뒤도 쫓지 않고 몸에 쌓인 눈을 털면서 조용히 제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접니다, 아마카와 진나이."

 저는 황당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진나이의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진나이는 오늘도 남만두건에 승려복을 입고 있었죠.

 "이거 참, 소란을 피웠군요. 싸우는 소리에 누가 깨지 않으면 다행이련만."

 진나이는 안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작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무얼, 제가 숨어 들어오니 누가 이 마루 아래로 기어 들어가려지 뭡니까. 그래서 한 번 잡아 얼굴이라도 보려 했는데 결국 놓치고 말았군요."

 저는 아까처럼 진나이를 잡으러 온 사람일 수 있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진나이는 녹봉 먹는 사람일 리 만무하고 되려 도둑이라 하더군요. 도둑이 도둑을 잡으려 했다――이만큼 별난 일이 또 있을까요. 이번에는 진나이보다 제 얼굴에 자연스레 쓴웃음이 드리웠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찌 되었든 돈을 구했는지를 듣기 전에는 제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자 진나이는 말도 필요 없이 제 마음을 읽은 걸 테죠. 유유히 복대를 풀면서 난로 앞에 주머니를 늘어 놓았습니다.

 "걱정 놓으시지요. 육천 관 구할 방법은 찾았으니까요――실은 어제 대부분을 모았습니다만 아직 이백 관 정도 부족하니 오늘 밤은 그걸 가져왔습니다. 부디 이 주머니를 받아 주시지요. 또 어제까지 모은 돈은 두 부부께서 모르는 새에 이 다과방 마루 아래에 숨겨두었습니다. 아마 오늘밤 도둑도 그 돈냄새를 맡고 온 걸 테지요."

 저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도둑에게 돈을 받는――그건 바테렌 님께 묻지 않더라도 선한 일은 아닐 테지요. 하지만 구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던 때엔 선악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이제와 생각해보면 허투루 안 받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 돈을 받지 않으면 저는 물론이요 우리 집안이 길거리에 내던져지고 맙니다. 부디 이 심정에 최소한의 연민을 주시지요. 저는 어느 틈엔가 진나이 앞에서 공손히 두 손을 짚은 채로 아무 말도 못한 채 울고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2년 동안 진나이의 소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어코 뿔뿔히 흩어지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는 건 모두 진나이 덕이니까요. 언제라도 그 남자의 행복을 위해 남 모르게 어머니 '마리야' 님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요즘 들어 길거리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카와 진나이가 잡힌 데다가 모도리바시에 목이 내걸렸다지 뭡니까? 저는 놀랐습니다. 남 모르게 눈물도 흘렸지요. 하지만 쌓아 온 죄가 돌아왔다 생각하면 이도 도리 없는 일일 테지요. 아뇨, 오히려 이 긴 세월 동안 어떤 천벌을 받지 않은 게 신비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보은을 위해 뒤에서나마 명복을 빌어주고 싶다――그렇게 생각했으니 저는 오늘 누구도 옆에 두지 않고 홀로 모도리바시에 그 효수를 보러 갔습니다.

 모도리바시에 올라가 보니 효수된 목 앞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죄를 기록한 푯말과 목을 지키는 사람――그건 여느 때와 같습니다. 하지만 푸른 대나무 위에 얹힌 목은――아아, 저 피로 물든 무시무시한 목은 어떻게 된 걸까요? 저는 소란스러운 인파 속에서 새파랗게 질린 목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이 목은 그 남자 목이 아닙니다. 아마카와 진나이의 목이 아닙니다. 이 두터운 눈썹, 툭 튀어나온 뺨, 미간의 칼자국――무엇 하나 진나이와 닮지 않았습니다. 하지만――저는 갑작스레 햇빛도, 제 주위 사람도, 나무 위에 얹힌 목도 모두 어딘가 먼곳으로 떠내려 갔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놀람을 느꼈습니다. 이 목은 진나이가 아닙니다. 제 목입니다. 이십 년도 전의 저――마침 진나이의 목숨을 구한 그 시절의 저입니다. "야사부로!"――만약 혀가 움직였다면 저는 그렇게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는 건 고사하고 저는 온몸에 열이라도 오른 것처럼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사부로! 저는 단지 환상처럼 아들의 효수를 보았습니다. 목은 하늘을 올려다 본 채로 반쯤 뜬 눈꺼풀 아래서 가만히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아들이 모종의 실수로 진나이로 오인 받은 걸까요? 하지만 재판을 받았다면 그런 실수가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아니면 아마카와 진나이가 제 아들이었던 걸까요? 우리 집에 온 스님은 진나이의 이름을 빌린 다른 누군가였던 걸까요? 아뇨, 그럴 리도 없습니다. 사흘이란 시간 중 단 하루도 어기지 않고 육천 관의 돈을 구해올 수 있는 게 이 넓은 일본 중에서 아마카와 진나이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저는 꿈에서 깬 것처럼 가만히 목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보라빛으로 뜬 묘하게 느슨한 입가가 웃음에 가까운 무언가를 희미하게 남기고 있지 뭡니까.

 효수된 목에 웃음이 남아 있다――바테렌 께선 그런 말을 들으면 비웃으실지 모르겠군요. 저마저 이를 깨달았을 때엔 잘못본 건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봐도 그 갈라진 입술에는 분명 작은 웃음으로 보이는 빛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저는 이 신비한 웃음을 오랫 동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제 얼굴에도 역시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웃음이 떠오르는 동시에 눈에선 자연스레 뜨거운 눈물도 묻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주시지요――"

 그 웃음은 무언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불효를 용서해주시지요. 저는 2년 전 눈오는 밤, 집에서 쫓겨난 걸 사죄하기 위해 몰래 집에 숨어들었습니다. 낮에는 가게 사람들 눈에 드는 것마저 부끄러워 일부러 밤이 오는 걸 기다렸다 아버지의 침실 문을 두드려 찾아뵈려 했습니다. 하지만 문득 다른 방 장자에 불이 들어와 있는 걸 보고 머뭇머뭇 그곳을 향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대뜸 뒤에서 말도 없이 저를 붙들지 뭡니까."

 "아버지, 그 후 일은 아버지도 잘 아시겠지요. 저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기에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마자 상대를 밀어내고 울타리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눈 덕에 볼 수 있었던 상대 모습은 참 기이하게도 스님의 행색을 하고 있었지요. 때문에 누가 쫓아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선 다시 한 번 그 다과방으로 대담히 숨어 들었습니다. 저는 방 장자 너머로 모든 대화를 들었습니다."

 "아버지, 호죠 가문을 구한 진나이는 우리 가문의 은인입니다. 저는 진나이가 위험해지면 설령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를 갚겠다 결심했습니다. 또 이 보은이란 집에서 쫓겨난 유랑자인 저 아니면 불가능하겠지요. 저는 요 2년 동안 그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그 기회가 왔습니다. 부디 불효의 죄를 용서해주시지요. 저는 글러먹게 살았지만 집안의 큰빚만은 갚았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효도입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울고 웃으면서 아들의 기특함을 칭찬해주었습니다. 바테렌께선 모르시겠지만 아들 야사부로도 저와 마찬가지로 데우스의 가르침에 귀의한 몸이며 한 때는 '포우로'란 이름마저 받았었지요. 하지만――하지만 아들놈은 참 운이 없었습니다. 아뇨, 비단 아들놈만일까요. 저도 그 아마카와 진나이에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이런 한탄조차 하지 못했겠지요. 아무리 미련이지 싶어도 이것만은 떨쳐낼 수 없습니다. 집안을 지킨 게 옳은 건지, 아들을 지켰던 게 옳은 건지――(불쑥 씁쓸하다는 양) 부디 저를 구원해주시지요. 저는 이대로 살아가면 은인 아마카와 진나이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오랫동안 흐느낀다)

 

     '포우로' 야사부로의 이야기

 

 아아, 어머니 '마리야' 님! 저는 이제 오늘 밤의 어둠이 걷히면 목이 떨어질 겁니다. 제 목은 땅에 떨어져도 제 혼은 작은새처럼 당신 곁으로 날아가겠지요. 아뇨, 나쁜 짓만 해온 저는 '하라이소천국'의 장엄함을 보는 대신 무서운 '인헤루노지옥'의 맹화에 거꾸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만족스럽니다. 이렇게나 기쁜 건 이십 년 인생 중 처음이니까요.

 저는 호죠 야사부로라 합니다. 하지만 효수된 제 목은 아마카와 진나이라 불리겠지요. 제가 그 아마카와 진나이라――이만큼 유쾌한 일이 또 있을까요? 아마카와 진나이――어떠십니까? 멋진 이름 아닌가요? 저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어두컴컴한 감옥 안마저 천상의 장미나 백합 꽃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잊을 수도 없는 2년 전 겨울, 마침 큰눈이 내리던 밤이었습니다. 저는 도박 자금이 필요해서 본가로 숨어 들었지요. 그런데 아직 방 장자에 불빛이 들어와 있길래 거기를 가만히 들여다 보니 갑자기 누가 말도 걸지 않은 채 제 옷소매를 잡았습니다. 떨쳐내도 다시 들러 붙었죠――상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힘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두세 번 뒤엉키는 사이에 다과방 장자가 열린다 싶더니 정원에 불빛을 드리웁니다. 행등을 든 건 틀림 없는 아버지 야소에몬이었지요. 저는 열심히 잡힌 멱살을 떨쳐내면서 울타리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도망친 후 저는 그 울타리 뒤로 숨은 채로 거리 앞뒤를 둘러봤습니다. 눈 덕에 보이는 거리서는 이따금 눈연기가 오르는 것 말고는 움직이는 거 하나 없었지요. 상대도 포기했는지 더는 쫓아오지 않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뭐였던 걸까요? 소란 틈바구니 속에서 보기엔 분명 스님인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완력을 생각하면――특히 싸움 기술에도 능한 걸 보면 평범한 스님은 아니겠지요. 무엇보다 이런 눈내리는 밤 중에 찾아오는 스님이라니――그것부터 이상하지 않나요? 저는 한동안 생각에 잠긴 후 설령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다과방으로 숨어 들 결심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 지났을 쯤입니다. 그 수상한 스님은 마침 눈을 그친 틈을 타 오가와도리를 내려왔지요. 그게 아마카와 진나이였습니다. 사무라이, 렌가시, 쵸닌, 허무승――어떤 모습도 될 수 있다는 교토에서 제일 명성 높은 도둑 말입니다. 저는 뒤로 숨어 진나이 뒤를 쫓았습니다. 그때만큼 묘하게 기뻤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겁니다. 아마카와 진나이! 아마카와 진나이! 저는 꿈속에서도 그 남자의 모습을 연모했습니다. 셋쇼 칸바쿠의 검을 훔친 진나이입니다. 샤무로야의 산호수를 받아간 것도 진나이입니다. 비젠 재상의 침향을 베어낸 것도 카피탄 '페레이라'의 시계를 뺏은 것도, 하룻밤에 다섯 개의 광을 부순 것도 여덟 명의 미카와자무라이를 베어낸 것도――그 외에도 후세에 전해질 법한 희대의 나쁜 짓을 벌인 건 늘 아마카와 진나이였습니다. 그 진나이는 지금 제 앞에서 삿갓을 기울인 채 희미하게 밝아오는 눈길을 걷고 있습니다――이런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는 더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저는 죠곤지 뒤로 와선 일사불란히 진나이 뒤를 좇았습니다. 이곳은 집 한 채 없이 흙울타리만 이어진 곳으로 설령 낮이라도 사람눈 피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진나이는 저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심지어 지팡이를 짚더니 제 말을 기다리듯이 한 마디도 안 하지 뭡니까. 저는 실제로 머뭇머뭇 진나이 앞에서 자세를 낮추었습니다. 하지만 그 침착한 얼굴을 보니 목소리 하나 생각처럼 나오지 않더군요.

 "부디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호죠 야소에몬의 아들 야사부로라 합니다――"

 저는 얼굴을 붉히며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부탁이 있어 선생님의 뒤를 쫓았습니다만……"

 진나이는 단지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소심한 저로선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용기가 났으니 역시나 눈 안에 손을 짚은 채로 아버지에게 절연 당했다, 지금은 거친 사람들과 같이 지낸다, 오늘밤 아버지 댁에 도둑질하러 갔는데 생각지 않고 진나이와 뒤엉키게 되었다, 또 아버지와 진나이의 밀담을 빠짐 없이 들었다――그런 요점을 짧게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진나이는 여전히 묵묵히 입을 담은 채로 차갑게 저를 보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해버리고선 무릎을 앞으로 끌고 가 진나이의 얼굴을 들여다 봤습니다.

 "호죠 일가가 받은 은혜는 저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단 증거로 선생님의 부하가 되자 결심했습니다. 부디 저를 써주시지요. 저는 도둑질을 할 줄 압니다. 불을 붙이는 법도 압니다. 그 외에 어지간한 나쁜 짓이라면 남들 못지 않게 알고 있습니다――"

 진나이는 여전히 아무 말 없었습니다. 저는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열심히 논했습니다.

 "부디 저를 써주십시오. 저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교토, 후시미, 사카이, 오사카――저는 온갖 땅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루에 오십 리도 걸을 수 있습니다. 힘도 곡식 네 자루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립니다. 사람도 둘셋은 죽여봤습니다. 부디 저를 써주십시오. 저는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해내겠습니다. 후시미 성의 백공작도 훔쳐 오라면 훔쳐 오지요. '산 후란시스코' 절의 종루도 태우라면 태우겠습니다. 대신 가문의 아가씨도 납치해 오라면 납치해 올 수 있습니다. 남만 스님의 목을 떼오라면――"

 저는 그렇게 말하던 도중 대땀 눈속을 굴렀습니다.

 "멍청한 놈!"

 진나이는 일갈한 후 다시 걸으려 했습니다. 저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그 바짓자락에 매달렸습니다.

 "부디 저를 써주시지요. 저는 어떤 경우에도 선생님 옆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물이든 불이든 가리지 않겠습니다. 그 '에소포' 이야기에 나오는 사자왕마저 쥐의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 쥐가 되겠습니다. 저는――"

 "닥쳐라, 진나이는 네놈의 은혜 따위는 안 받는다."

 진나이는 저를 떨쳐내곤 다시 한 번 걷어찼습니다.

 "등신 같은 새끼! 효도는 못할 망정!"

 저는 두 번째 걷어 차였을 때 갑자기 억울함이 올라왔습니다.

 "그래!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주마!"

 하지만 진나이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눈길을 서둘렀습니다. 어느 틈엔가 드리우기 시작한 달빛에 삿갓을 빛내면서……그 후로 저는 2년 동안 진나이를 보지 못했습니다.(대뜸 웃는다) "진나이는 네놈의 은혜 따위 받지 않는다"……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내일이면 진나이 대신 죽게 되지요.

 아아, 어머니 '마리야 님'! 저는 요 2년 동안 진나이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은혜를 갚고 싶어?――아뇨, 은혜보다도 원한을 갚고 싶었지요. 하지만 진나이는 어디 있는가? 무엇을 하는가?――누가 그걸 알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진나이는 어떤 남자인가?――그마저도 알지 못하는데요. 제가 만난 스님은 마흔 살 전후의 작은 몸집의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야나기마치의 복도에 있던 건 아직 서른도 안 된 붉은 얼굴에 수염 자란 로닌이라지 뭡니까? 가부키 무대를 술렁이게 했다는 허리 굽은 서양인, 묘코쿠지의 보석을 스쳤다는 앞머리 긴 젊은 사무라이――그게 모두 진나이라면 그 남자의 정체를 구분하는 건 사람 힘으로 가능한 게 아닐 터입니다. 하물며 저는 작년 말부터 피를 토하는 병에 걸려버렸지요.

 어떻게든 원한을 갚고 싶다――저는 매일 같이 야위면서도 그런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밤에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었지요. '마리야' 님! '마리야' 님! 이 책을 내려주신 건 분명 당신의 지혜일 테지요. 단지 제 몸을 버린다, 피를 토하는 병에 걸려 쇄약해진 뼈와 가죽뿐인 몸을 버린다――그만한 각오 하나로 제 바람이 이뤄집니다. 저는 그날 밤 기쁜 나머지 한사코 혼자 웃으면서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진나이를 대신해 목이 떨어진다. 진나이를 대신해 목이 떨어진다………"

 진나이를 대신해 목이 떨어진다――멋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저와 함께 진나이의 죄도 사라지고 말지요――진나이는 온 일본 어디서든 당당히 걸을 수 있습니다. 대신(다시 웃는다)――대신 저는 하룻밤만에 희대의 대도가 되는 겁니다. 루손 스케자에몬의 밑에서 일한 것도, 비젠 재상의 침향을 벤 것도, 리큐코지의 친구가 된 것도, 샤무로야의 산호수를 받아간 것도, 후지미 성의 금고를 부순 것도 여덟 명의 미카와자무라이를 베어낸 것도――진나이의 갖은 명성을 모조리 뺏어 오는 거지요.(한 번 더 웃다) 말하자면 진나이를 돕는 동시에 진나이의 이름을 죽이는 일입니다. 집안의 은혜를 갚는 동시에 제 원한도 갚는 일입니다――이만큼 유쾌한 보은이 어디 있을까요. 제가 그날 밤 기쁜 나머지 한사코 웃은 것도 당연합니다. 지금도――이 감옥 안에서도 웃음이 그치질 않는군요.

 저는 이 책략을 떠올린 후 다이리에 숨어 들었습니다. 아직 어둠이 깊지 않은 밤이었으니 발 너머로 불빛이 들어오거나 소나무 사이서 꽃만 보이거나――그런 것도 볼 수 있었지요. 하지만 긴 복도 지붕서 인기척 없는 정원으로 내려오니 곧장 네다섯 명의 사무라이한테 잡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저를 잡은 수염난 사무라이는 열심히 밧줄을 묶으면서 "오늘이야말로 진나이를 잡았구나"하고 중얼거리지 뭡니까? 그렇습니다. 아마카와 진나이 말고 누가 다이리에 숨어 들까요? 저는 그 말을 듣곤 필사적으로 몸부림 치는 사이에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습니다.

 "진나이는 네놈의 은혜 따위는 안 받는다."――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날이 밝으면 진나이 대신 죽게 되지요. 얼마나 기분 좋은 만남일까요. 저는 목이 잘린 채로 그 남자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나이는 분명 제 목에게서 소리 없는 웃음을 느끼겠지요. "어떠냐, 야사부로의 보은은?"――그 웃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더 이상 진나이가 아니다. 아마카와 진나이는 이 목이다. 천하에 명성 높은 일본 제일의 대도 진나이!"(웃는다) 아아, 저는 유쾌합니다. 이만한 유쾌함은 난생 처음입니다. 하지만 만약 아버지 야소에몬이 제 목을 보신다면――(괴롭다는 양) 용서해주시지요, 아버지! 피를 토하는 병에 걸린 저는 설령 목이 날아가지 않더라도 3년도 버티지 못합니다. 부디 불효를 용서해주시지요. 저는 글러먹게 살았지만 집안의 큰빚만은 갚을 수 있었으니까요………

 

(다이쇼 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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