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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희작삼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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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텐포 2년 9월의 어떤 오전이었다. 칸다도포쵸에 자리한 욕탕 마츠노유는 여전히 아침부터 손님으로 붐볐다. 시키테이 산바가 몇 년 전에 출판한 소설 속에 '신기, 석교, 사랑, 무상, 모든 게 뒤섞인 우키요 욕탕'이라 표현한 광경은 지금도 별다를 바 없었다. 욕탕 안에서 우타자이몬을 노래하는 콧소리, 나오면서 수건을 짜고 있는 쵼마게혼다, 문신이 그려진 등을 씻겨주는 둥근턱의 오오이쵸, 아까부터 얼굴을 씻고 있는 요시베얏코, 수조 앞에 자세를 낮추고서 끝없이 물을 끼얹고 있는 중머리, 대나무 대야와 금붕어 자기로 여념 없이 놀고 있는 아부하치톤보――좁은 물줄기에는 그런 수많은 사람이 하나같이 젖은 몸을 매끈하게 빛내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연기와 하늘에서 드리우는 아침 햇살 빛 속에서 모호히 움직이고 있다. 그 소란이 또 장난이 아니다. 일단 물을 쓰는 소리나 통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대화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린다. 마지막으로 이따금 계산대서 박자목 소리가 울린다. 그러하니 욕탕 출입구 안팎은 마치 전장처럼 시끄럽다. 그때 노렌을 넘어 상인 하나가 들어온다. 구걸꾼이 온다. 물론 손님 출입도 있다. 그런 혼잡함 속에서――

 얌전히 구석으로 다가가 그런 혼잡함 속에서 조용히 때를 미는 예순 즈음의 노인 하나가 있었다. 나이는 예순을 넘었으리라. 귀 주변의 머리가 볼품없이 누렇게 뜬 데다가 눈도 살짝 좋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마르긴 했으나 골격은 확실하며 오히려 단단해도 좋을 체격으로 피부가 축 늘어진 손이나 발에도 어딘가 노년에 저항하는 저력이 남아 있다. 이는 얼굴도 마찬가지라서 턱이 툭 튀어나온 뺨 근처나 살짝 큰 입 근처에 왕성한 동물적 정신이 무서운 빛을 드러내고 있는 건 장년일 시절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노인은 정성스레 상반신의 때를 벗겨내고는 물도 끼얹지 않고 하반신을 씻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은 때밀이가 몇 번이나 위를 문질러도 기름기 빠지고 주름진 피부서는 때라 할 정도의 때도 나오지 않았다. 그게 불쑥 가을에 걸맞은 쓸쓸함을 불러일으킨 거겠지. 노인은 두 발을 씻고선 불쑥 힘이 빠진 것처럼 손을 멈춰버렸다. 그리고 탁한 대얏물에 선명히 드리운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는 붉은 감이 기와지붕 한구석에서 보이며 이따금 햇살을 드리우는 가지들이 무성했다.

 이때 노인의 마음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지만 그 '죽음'은 과거에 그를 위협한 것과 같은 어떤 무시무시함도 품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 통 안의 하늘처럼 조용하고 사랑스러우며 안정된 정적과 같은 기운이었다. 모든 고생서 벗어나 그 '죽음' 속에서 잠들 수 있다면――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꿈도 꾸지 않은 채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자신은 생활에 지쳤을 뿐이 아니다. 몇 십 년 동안 끊이지 않은 창작의 고통에도 지쳐 있었다……

 노인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선 역시 번잡한 담소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수증기 안에서 번잡하게 움직이고 있다. 욕탕 입구 안의 우타자이몬에도 메리야스야 요시코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여기서는 물론 지금 그의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운 유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선생님. 이런 데서 뵙네요. 설마 쿄쿠테이 선생께서 아침 목욕을 나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는걸요."

 노인은 불쑥 들린 목소리에 놀랐다. 목소리를 쫓아가니 그의 옆에는 혈색이 좋고 덩치 좋은 호소이쵸가 대야를 앞에 두고 젖은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로 기운 좋게 웃고 있었다. 욕탕서 나와 마지막으로 몸을 씻으려던 참이었나 보다.

 "여전히 기분 좋아 보이네."

 바킨 타키자와 사키치는 웃으면서 살짝 비꼬듯이 답했다.

 

     둘

 

 "감사합니다. 보통 좋은 게 아니네요. 그러고 보니 선생님, 팔견전이 나왔더군요. 참 재밌었습니다."

 호소이쵸는 어깨에 걸친 수건을 통 안에 넣으면서 한 층 더 신이 난 모습을 보였다.

 "후나무시가 맹인 아내로 코분고를 죽이려 한다. 그러다 잡혀 고문 당하는 끝에 소스케에게 도움을 받는다. 이 흐름이 참으로 좋더군요. 그리고 그게 또 소스케와 코분고가 다시 만나는 계기가 되지 않습니까. 불초 오우미야 헤이키치, 비록 허튼 장사치지만 독서에는 밝은 편입니다. 선생님의 팔견전은 정말 흠잡을 구석이 없어요. 대단합니다."

 바킨은 말없이 다시 발을 씻었다. 그도 물론 자기 책의 애독자에게 상당한 호의를 품어 왔다. 하지만 그 호의 때문에 상대의 평가가 달라지는 법은 조금도 없었다. 이는 총명한 그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반대로 그 평가가 그의 호의에 영향을 주는 일 또한 거의 없다. 그러니 그는 때때로 경멸과 호의를 한 인물에게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 오우미야 헤이키치가 바로 그런 애독자 중 한 명이었다.

 "그만한 걸 쓰셨으니 보통 고생이 아니셨을 테지요. 일단은 선생님이 미래 일본의 나관중이 되려나요――아니, 이거 참 결례되는 말을 했군요."

 헤이키치는 또다시 큰 목소리로 웃었다. 그 목소리에 놀란 거겠지. 옆에서 목욕물을 끼얹던 몸집이 작고 까무잡잡한 애꾸눈 코이쵸가 고개를 돌려 헤이키치와 바킨을 번갈아 보더니 묘한 얼굴로 침을 뱉었다.

 "귀공은 여전히 홋쿠에 빠져 있는가?"

 바킨은 교모하게 화제를 틀었다. 하지만 이게 꼭 애꾸눈의 표정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시력은 행복하게도(?) 그게 또렷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물어봐 주시니 기쁜걸요. 요전 번엔 못하는 만큼 신나서 오늘도 운자, 내일도 운자하고 겁먹는 법도 없이 곳곳을 갸웃거렸는데, 요즘 들어선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헌데 선생께서는 어떠십니까? 우타나 홋쿠는 좋아하십니까?"

 "아니, 나는 그런 건 도무지 잘 하지 못해서 말야. 물론 한때 해본 적은 있었지."

 "겸손이 과하십니다."

 "아니, 정말로 성미가 맞지 않아. 이제는 거의 곁눈질만 하는 수준이지."

 바킨은 '성미에 맞지 않다'는 말에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자신이 우타나 홋쿠를 못 만드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 방면의 이해도도 결코 낮지 않단 자신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종류의 예술에 일종의 경멸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타도 홋쿠도 자신의 전부를 담기엔 너무나도 짧은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교묘히 읊는 건 가능해도 한 구와 한 수에 표현된 건 정서이든 서경이든 그의 작품 중 몇 줄인가를 채우는 자격 밖에 얻지 못했다. 그에게 그런 예술은 이류 예술이었다.

 

     셋

 

 그가 '성미에 안 맞는다'는 말에 담은 힘 뒤에는 가벼운 경멸이 숨어져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우미야 헤이키치에겐 그런 의미가 전혀 통하지 않은 듯했다.

 "하하, 역시 그런 거려나요. 제 비좁은 식견으론 선생님 같은 대가라면 뭐든지 자유롭게 지으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이거 참, 하늘이 둘을 주진 않는단 말도 이런 걸 뜻하나 봅니다."

 헤이키치는 짜낸 수건으로 피부가 붉어질 정도로 벅벅 몸을 긁으면서 살짝 조심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바킨은 그가 겸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게 무엇보다도 불만이었다. 그런데다 헤이키치의 조심스러운 말투가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수건을 손잡이에 걸고선 몸을 반쯤 일으키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선 이렇게 기염을 토했다.

 "물론 어지간한 우타요미나 시인 정도는 간다 보지마는."

 하지만 이렇게 말하자 그는 불쑥 자신의 아이 같은 자존심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자신은 방금 전 헤이키치가 최상급의 말을 써 팔견전을 칭찬했을 때에도 그리 기쁘다 느끼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지금은 그 반대로 자신이 우타나 홋쿠를 짓지 못하는 인간으로 보이는 게 불만스러운 건 분명히 모순된 일이다. 곧장 이런 자성을 한 그는 마치 내면의 붉은 얼굴을 감추듯이 황급히 물을 몸에 뿌렸다.

 "그럼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걸작을 쓰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렇게 보면 선생님께선 우타도 홋쿠도 지을 줄 아시니 이를 간파한 제 눈썰미도 대단하다 봐야겠지요. 이거야, 완전히 자화자찬이 되어버렸습니다."

 헤이키치는 또 큰 소리로 웃었다. 방금 전 애꾸눈은 이미 옆에 있지 않았다. 침도 바킨이 끼얹은 물에 쓸려 나가버렸다. 하지만 바킨은 아까보다 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버렸군. 나도 탕에나 들어가야겠어."

 묘하게 겸연쩍어진 바킨은 자신을 향한 일종의 짜증을 느끼며 그런 인사와 함께 기어코 이 사람 좋은 애독자 앞에서 물러나기 위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헤이키치는 그가 내뿜은 기염 탓에 애독자인 자신마저 어깨폭이 넓어진 것처럼 느낀 모양이었다.

 "그럼 근 시일 내에 선생님께 우타나 홋쿠를 부탁드리고 싶군요. 괜찮으실까요?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럼 저도 이만 실례하지요. 바쁘시겠지만 길 가다 보면 말 좀 걸어주세요. 저도 또 찾아뵙겠습니다."

 헤이키치는 뒤쫓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수건을 씻으면서 욕탕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바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집에 돌아가서 곡정 선생을 만난 걸 아내에게 어떻게 말해줄지 생각에 잠겼다.

 

     넷

 

 욕탕 입구 너머는 저녁처럼 어두컴컴했다. 더군다나 습기가 안개보다도 짙게 깔려 있다. 눈이 안 좋은 바킨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를 힘겹게 밀어내며 간신히 욕탕 구석을 찾아 거기에 주름투성이 몸을 담았다.

 물 온도는 살짝 뜨거운 정도였다. 그는 그 뜨거운 물이 손가락 끝에 스며드는 걸 느끼면서 긴 호흡을 하며 천천히 욕탕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둠 속에 떠오른 머리 숫자는 일고여덟 개쯤 될까. 하나같이 대화를 나누거나 우타를 부르는 와중에 피부 기름을 녹인 매끈한 탕 수면이 입구서 드리우는 탁한 빛을 반사하며 지루하다는 양 둥실둥실 일렁이고 있다. 거기에 속이 갑갑해지는 '욕탕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예로부터 바킨의 공상에는 로맨틱한 경향이 있었다. 그는 이 욕탕 수증기 안에 그가 그리려는 소설 속 경치 하나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곳에는 차양을 단 무거운 배 하나가 있었다. 차양 바깥의 바다는 해가 짐과 함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배를 두드리는 파도 소리가 마치 기름을 흔드는 것처럼 무겁고 답답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와 함게 차양을 펄럭이게 하는 건 아마 박쥐의 날개 소리리라. 선원 한 명은 그게 마음에 걸리는지 뱃전에서 고개를 내밀어 본다. 안개 내린 바다 위에는 붉은 초승달만이 음침히 하늘에 걸려 있다. 그러자……

 그의 공상은 거기서 불쑥 박살이 나버렸다. 같은 욕탕 안에서 누군가가 그의 책을 평가하는 게 불쑥 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는 목소리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마치 그에게 들려주는 듯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바킨은 일단 욕탕서 나오려 했으나 관두고 가만히 그 평가에 귀를 기울였다.

 "쿄쿠테이 선생이니 저작당 주인이니 거창한 소리를 늘어놓지만 바킨 따위가 쓰는 건 모두 불쏘시개입니다. 무엇보다 팔견전부터 그래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수호전을 베껴 온 거 아니겠습니까. 뭐, 그걸 관대하게 봐주더라도 좋은 이야기랄 게 없어요. 애당초 당에서 온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 일단 그걸 읽는 것부터가 고생이지요. 헌데 막상 읽어보면 그걸 또 고스란히 가져온 꼴이니 이거야 원, 황당해서 화도 안 나지 뭡니까."

 바킨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험담을 하는 남자를 찾았다. 수증기 탓에 또렷이는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아까 옆에 있던 애꾸눈인 듯했다. 그럼 이 남자는 아까 헤이키치가 팔견전을 칭찬한 것에 속이 뒤집혀 일부러 바킨을 욕하고 있는 것이리라.

 "애당초 바킨은 붓필의 끝으로만 쓰는 사람이지요. 배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테라코야의 서생이라도 말할 법한 사서오경의 해석이 전부일 겁니다. 허니 요즘 세상 이야기는 알지도 못하지요. 옛날이야기 아니면 못쓰는 것부터가 그 증거 아니겠습니까? 오소메 히사마츠를 쓰지 못하니 그야 가을 칠초도 알지 못하지요. 바킨 어르신의 흉내를 내면 이 정도는 금세 알 법 하지요."

 어느 한 쪽이 우월 의식을 가진 이상 증오의 감정은 생기고 싶어도 생기지 않는다. 바킨 또한 상대 말투가 거슬리면서도 묘하게 상대를 미워할 순 없었다. 대신 자신의 경멸을 겉으로 드러내고 싶단 욕망이 있었다. 그걸 실행으로 옮기지 않은 건 아마 나이가 막아줬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잇큐나 산바는 대단하지요. 그런 걸 쓸 때면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 드러나니까요. 결코 잔재주나 적당한 학문을 짜 맞춰 만든 게 아니지요. 그게 삿갓 쓴 운둔자하고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바킨의 경험에 따르면 자기 책의 악평을 듣는 건 단순히 불쾌할 뿐 아니라 위험도 결코 적지 않다. 이는 그 악평을 인정하기 위한 욕기가 필요하단 뜻이 아니라, 이를 부인하기 위해 앞으로의 창작적 동기에 반동적인 무언가를 더해버린단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불순한 동기서 출발한 결과, 자칫하면 기형적인 예술을 창조할 우려가 있단 뜻이었다. 시류에 던지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작가라면 또 모를까, 조금이라도 기백이 있는 작가라면 이런 위험에 빠지기 쉽다. 때문에 바킨은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자기 책에 대한 악평은 되도록 읽지 않으려 다짐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론 그 악평을 읽어보고 싶단 유혹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욕탕서 이런 험담을 듣게 된 것도 반쯤은 그런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그는 아직도 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그리고 성질 섞인 애꾸눈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기세 좋게 욕탕 입구서 나섰다. 밖에는 습기 사이로 창문 너머의 하늘이 보였고, 그 하늘에는 따스한 햇살을 받는 감이 보였다. 바킨은 욕조 앞으로 와서 조용히 몸을 씻었다.

 "하여간에 바킨은 별 볼 일 없습니다. 일본의 나관중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요."

 하지만 애꾸눈은 여전히 바킨이 있다 생각한 건지 태연히 맹렬한 악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애꾸눈인 탓에 그가 나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걸지 모르겠다.

 

     다섯

 

 하지만 욕탕을 나온 바킨의 기분은 침울해져 있었다. 애꾸눈의 독설은 적어도 이만한 범위서는 예상한 성공을 이룬 셈이다. 그는 맑은 가을이 찾아 온 에도 거리를 걸으면서 욕탕 안에서 들은 악평을 하나하나 자신의 비평안에 올려 면밀히 검토했다. 그리고 그게 어떤 점에서 생각해 봐도 돌아 볼 가치 없이 어리석은 논리란 사실을 즉석에서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흐트러진 그의 기분은 쉽사리 침착함을 되찾지 못했다.

 그는 불쾌한 눈초리로 양쪽 거리의 집을 바라보았다. 집안사람들은 그의 기분과 별개로 제각기 그 생계에 임하고 있다. 그러니 "만국명잎'이라 적힌 감색 노렌, '혼츠게'라 적힌 노란 빗 모양의 간판, '바구니'라 적힌 안등, '복서'라 써진 깃발――같은 게 무의미한 일렬을 만들어 단지 난잡하게 그의 눈앞을 지나쳤다.

 "나는 왜 나를 경멸하는 악평에 이렇게 번뇌하는 거냐."

 바킨은 또다시 생각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나를 불쾌하는 건 그 애꾸눈이 내게 악의를 가지고 있단 사실이지. 남이 자신에게 가진 악의와 마주하는 건 그 이유가 어떤들 그것만으로 불쾌해지니 그건 도리가 없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약한 마음을 부끄러워했다. 실제로 그처럼 안하무인 한 태도로 나서는 사람이 적은 것처럼, 그처럼 타인의 악의에 민감한 인간 또한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 행위 상에선 정반대로 보이는 두 결과가 사실은 같은 원인――같은 신경 작용서 오고 있단 사실도 그는 물론 진작에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불쾌하는 건 또 있지. 그건 내가 그 애꾸눈과 대항하는 듯한 위치에 놓였단 점이야. 나는 옛날부터 그런 위치에 몸을 두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 도박을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고."

 여기까지 분석한 그의 머리는 더욱이 한 발 나아가는 동시에 생각지도 못한 기분 변화를 일으켰다. 그건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불쑥 일그러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나를 그런 위치에 둔 상대가 그 애꾸눈이란 것도 나를 불쾌하게 만들고 있지. 만약 그게 조금이라도 더 멀쩡한 녀석이었다면 나는 이 불쾌한 반발뿐인 반항심을 일으켰을 게 분명해. 그 애꾸눈이 상대로선 아무리 나라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지."

 바킨은 쓴웃음 지으면서 높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하늘에선 명랑한 솔개의 목소리가 햇살과 함게 비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침울해진 기분이 서서히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애꾸눈이 아무리 악평을 하더라도 그건 고작해야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정도이지. 아무리 솔개가 울어본들 해가 걸음을 멈추지는 않는다. 내 팔견전은 반드시 완성되겠지. 그게 일본이 고금서 찾아볼 수 없는 대전기를 가지는 날이야."

 그는 회복된 자신감을 위로하면서 집으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에 조용히 발을 들였다.

 

     여섯

 

 집에 돌아와 보니 어두컴컴한 현관 신발장 위에 익숙한 무늬의 셋타가 올려져 있었다. 그걸 본 바킨은 곧장 그 손님의 밋밋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시간을 써야 하는 민폐를 씁쓸하게 여기기도 했다.

 "오늘도 아침은 날리는 꼴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집으로 올라가니 황급히 맞이한 하녀 스기가 몸을 낮춘 채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이즈미야 씨께서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젖은 수건을 스기에게 건넸다. 하지만 바로 서재로 가고 싶진 않았다.

 "오햐쿠는."

 "절에 기도 올리러 가셨습니다."

 "오미치도 같이 갔나?"

 "네, 도련님도 같이 가셨습니다."

 "아들 놈은."

 "야마모토 님께 가셨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집을 비운 듯했다. 그는 약간 실망에 가까운 걸 맛보았다. 그리고 도리 없이 현관 옆에 놓인 서재 문을 열었다.

 열어보니 그곳엔 색이 하얗고 얼굴이 빛나는 어딘가 묘하게 얌전 떠는 남자가 얇은 은담뱃대를 입에 문 채 조용히 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의 서재에는 돌그림을 붙인 병풍과 토코노마에 건 홍옆황국 족자 이외엔 장식 다운 장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벽을 따라서는 오십 개 남짓의 나무상자가 단지 낡은 오동색을 쓸쓸히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장자 종이도 붙인 지 일 년은 족히 되었으리라. 잘라 붙인 하얀 종이 위로는 가을 햇살을 받은 거친 파초의 커다란 그림자가 비스듬하게 드리우고 있다. 그런 만큼 이 손님의 헐렁한 옷차림은 주위와 따로 노는 듯했다.

 "선생님, 잘 오셨습니다."

 손님은 문이 열리는 동시에 부드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은 당시 팔견전에 이어 세상의 높은 평가를 받은 금병매의 판권을 받은 이즈미야 이치베이란 책장수였다.

 "오래 기다렸나? 오늘 아침은 어쩌다 아침 목욕을 해서 말야."

 바킨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평소처럼 예의 바르게 자리에 앉았다.

 "하하, 아침 목욕을. 그런가요."

 이치베이는 크게 감복한 목소리를 냈다. 이 남자처럼 어떤 자그마한 일에나 간단히 감탄하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짓는 인간은 극히 드물다. 바킨은 천천히 담배를 태우며 여느 때처럼 볼일이 뭔지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감탄하는 이치베이의 성향을 특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은요. 원고를 받으러 왔지요."

 이치베이는 담뱃대를 손가락 끝에서 빙글 돌려보며 여자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남자는 참 신비한 성격을 지녔다. 외면의 행위와 내면의 심리가 대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일치하지 않는 건 고사하고 늘 정반대로 드러났다. 그러니 그는 확고한 뜻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그에 반비례하는 참으로 상냥한 목소리를 내곤 했다.

 그 말을 들은 바킨은 다시 한번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줄 원고가 어디 있겠나."

 "하하, 뭐라도 상관없으니까요."

 "뭐랄 게 없어. 올해는 독본을 대부분 승낙한지라 합권 쪽은 도무지 손을 대지 못했으니까."

 "그런가요? 바쁘시군요."

 그렇게 말한 이치베이는 담뱃대 재를 터는 걸 신호 삼아 이제까지 한 이야기는 완전히 잊은 얼굴을 하고서 대뜸 네즈미코조 지로다유의 이야기를 꺼냈다.

 

     일곱

 

 네즈미코조 지로다유는 올해 5월 상순에 잡혀 8월 중순에 감옥신세를 진 평판 높은 대도이다. 그 녀석이 다이묘 저택에 숨어들어 훔친 돈을 궁핍한 백성에게 나눴단 점에서 당시엔 의적이란 묘한 이름이 어디서든 이 도둑의 대명사로 쓰이며 떠받들 여졌다.

 "그럴 법도 하지요. 훔친 다이묘 저택이 일흔여섯 곳, 훔친 돈이 삼천백팔십삼 량 이 푼이라니 놀랄 수밖에요. 도둑이지만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바킨은 저도 모르게 호기심이 동했다. 이치베이가 하는 이런 이야기의 뒤편에는 늘 작가에게 소재를 준다는 자아도취가 숨어 있다. 그 자아도취는 물론 곧잘 바킨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쾌하게 만들면서도 역시 호기심은 들었다. 예술가로서의 천성을 다량으로 가지고 있던 그는 특히 이런 점에서 유혹에 빠지기 쉬웠던 것이리라.

 "흠,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 나도 여러모로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걸."

 "요컨대 도적 중의 도적이라 해야겠지요. 이전에는 아라오 타지마노카미 님의 오토모시인가로 일했다는 모양입니다. 저택 내부를 잘 아는 건 그 덕이겠지요.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이 말하기는 통통하고 애 교가 있는 남자이며 당시에는 감색 에치고치지미의 카타비라에 아래엔 시로네리의 히토에를 입었다는데, 선생님이 쓰신 작품 중에도 그런 등장인물이 있었지요."

 바킨은 적당히 대답하면서 또 담배를 빨았다. 하지만 이치베이는 그 정도로 놀랄 남자가 아니었다.

 "어떠신가요. 그렇다고 금병매 쪽에 이 지로다유를 가지고 가서 집필을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야 저도 바쁘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제 얼굴 좀 보고 받아 주시죠."

 네즈미코조는 다시 한번 원고 재촉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상투 수단에 익숙한 바킨은 여전히 승낙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그는 전보다 한 층 더 불쾌해졌다. 이는 잠깐이라도 이치베이의 꾐에 넘어가 호기심을 동한 자신이 바보 같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어색하게 담배를 태우면서 이런 논리를 꺼냈다.

 "애당초 억지로 써본들 제대로 된 게 나오나. 그래서야 팔리지도 않을 테니 자네도 재미없겠지. 그렇게 보면 여기선 내 억지를 받아주는 게 결국 서로를 위한 일 아니겠나?"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한 번 분발해 주셔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치베이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이는 바킨이 이즈미야의 눈초리를 형용한 말이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띄엄띄엄 코로 뿜었다.

 "도무지 못 쓰겠군. 쓰고 싶어도 새가 없으니 도리가 없어."

 "이거 참, 곤란해지는군요."

 그렇게 말한 이치베이는 대뜸 당시의 작가 동료들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 얇은 은담뱃대를 가는 입술 사이에 얹으면서.

 

     여덟

 

 "타네히코의 새로운 책이 또 나온다는군요. 하나같이 우울미를 찬봉하는 애처로운 내용이겠죠. 그런 책은 타네히코 아니고선 못 쓰는 게 있는 모양이니까요."

 이치베이는 무슨 생각인지 모든 작가에게서 경칭을 생략하는 습관이 있다. 바킨은 그걸 들을 때마다 자신 또한 어디선간 '바킨이'하는 소리를 들으리라 여겼다. 작가를 자기 가게의 직원이라 생각하는 이 경박한 남자의 입에 허투루 올라가면서까지 원고를 써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불쾌함이 더욱 심해졌을 때에는 그런 생각과 함께 성을 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오늘도 그는 타네히코란 이름을 듣고선 안 그래도 일그러져 있던 얼굴을 더욱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치베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저희도 슌스이를 낼까 합니다. 선생께선 싫어하시겠지만 속물에겐 역시 그런 게 잘 어울리지요."

 "하하, 그런가?"

 바킨의 기억 속엔 언젠가 본 슌스이의 얼굴이 추하게 과장되어 떠올랐다. "나는 작가가 아냐. 손님의 바람에 따라 겉보기에 그럴싸한 걸 제공하는 심부름꾼일 뿐이지"――슌스이가 그렇게 자칭한단 소문은 바킨도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러니 그는 물론 이 작가 답지 않은 작가를 진심으로 경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치베이가 경칭 없이 부르는 걸 듣자 여전히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속된 걸 쓰는 데에는 달필이니까요. 게다가 건필로 유명하고요."

 이치베이는 그렇게 말하며 바킨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또 금세 입에 물고 있던 은담뱃대를 보았다. 그 잠깐의 표정에는 아마 하등 한 무언가가 있었다. 적어도 바킨은 그렇게 느꼈다.

 "그만한 내용을 쓰는데 붓을 술술 움직이는 데다 두세 화치를 쓰는 정도라면 종이 앞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지요. 헌데 선생께선 역시 빠른 편이신가요?"

 바킨은 불쾌함을 느끼는 동시에 위협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붓 속도를 슌스이나 타네히코와 비교되는 건 자존심이 강한 그로선 물론 흐뭇한 일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붓이 느린 편이었다. 그는 그게 자신의 무능력을 뒷받침해 주는 듯해서 안타까워지는 일도 곧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게 자신의 예술적 양심을 확인하는 척도로서 존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단지 그걸 일반인의 잣대에 맡기는 건 그가 어떤 심정을 하고 있든 결코 용납 못할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눈을 토코노마에 놓인 홍엽황국을 바라보며 뱉어내듯 말했다.

 "때와 상황에 따라 다르지. 이른 때가 있는가 하면 늦는 때도 있으니까."

 "하하, 때와 상황에 따라서. 그런가요."

 이치베이는 세 번째 감탄을 했다. 하지만 이게 감탄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 감탄이란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는 그 후에 곧장 또 말을 꺼냈다.

 "그럼 방금 말씀드린 원고 쪽을 승낙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슌스이도……"

 "나와 타메나가 씨는 다르지."

 바킨은 성이 나면 아랫입술을 왼쪽으로 비트는 버릇이 있었다. 이때, 아랫입술은 무서운 기세로 왼쪽으로 비틀렸다.

 "여하간 난 사양하겠네――스기, 스기야. 이즈미야 씨의 신발을 고쳐놓으련."

 

     아홉

 

 이즈미야 이치베이를 돌려보낸 바킨은 홀로 엔가와 기둥에 기대어 좁은 정원 경치를 바라보며 아직도 잦아들지 않는 성을 억지로 누르는데 애를 썼다.

 햇살을 잔뜩 받은 정원에선 잎이 갈라진 파초나 대머리가 된 오동이 향나무나 대나무의 녹색과 함께 몇 평인가의 가을을 따스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런 정원수 옆에 놓인 부용은 이제 꽃도 듬성듬성 달려 있을 뿐이나, 그 반대편 울타리 밖으로 심은 목서는 아직 그 달콤한 향이 가실 줄 몰랐다. 그때 여느 때처럼 솔개가 우는소리가 푸른 하늘 너머에서 피리 부는 소리처럼 내려왔다.

 그는 이런 자연과 대조적인 세상의 하등함을 새삼스레 재인식했다. 하등한 세계에 사는 인간의 불행은 그 하등함에 휘둘려 자신 또한 하등한 언동을 취하게 만드는 데 있다. 실제로 자신은 지금 이즈미야 이치베이를 쫓아냈다. 쫓아낸다는 건 조금도 수준 높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상대의 하등함을 마주하여 자신 또한 하등하게 대처하는 걸 강요받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런 의미에선 이치베이와 동등하게 자신을 추잡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요컨대 자신은 그만큼 추락한 셈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는 이와 비슷한 일을 가까운 과거에서도 발견했다. 그건 작년 봄, 그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는 편지를 보낸 소슈쿠 치키카미신덴 산다는 나가시마 마사베이란 남자였다. 편지에 따르면 그 남자는 스물한 살에 귀머거리가 된 이후로 스물네 살인 지금까지 문필로 천하에 이름을 알리고 싶단 결심으로 저작에 힘써왔다 한다. 팔견전이나 순도기 애독자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물며 이런 시골에선 수행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러니 당신 밑에 식객으로 둬줄 수 없는가. 또 자신은 여섯 권의 원고를 가지고 있다. 이것도 당신의 첨삭을 받아 마땅한 서점을 통해 출판하고 싶다――대개 그런 논지였다. 그쪽의 요구는 물론 바킨에겐 껄끄러운 이야기 투성이었다. 하지만 귀가 멀었던 사실이 나쁜 눈으로 고생하는 그로서는 꽤나 동정이 가기도 했다. 모처럼 편지를 준 건 고마우나 받아줄 수 없단 그의 대답은 그로선 외려 한없이 신중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신에는 처음부터 끝가지 맹렬한 비난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자신은 당신의 팔견전이나 순도기 같은 길고 볼품없는 책을 끈기 좋게 읽어줬는데 당신은 고작 여섯 권의 책을 훑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래서야 당신의 저열한 인격이 들통나는 것 아닌가――편지는 그런 불평으로 시작되어 선배로서 후배를 식객으로 두지 않는 건 인색한 일이라는 공격으로 이어졌다. 바킨은 화가 나서 곧장 답을 적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책이 당신과 같은 경박한 사람한테 읽히는 건 평생의 수치란 내용을 적었다. 그 후로 이렇다 할 소식은 듣지 못했으나 그는 지금도 책을 쓰고 있을까. 그리고 그게 언젠가 온 일본 사람한테 읽히는 걸 꿈꾸고 있을까…………

 바킨은 그 기억 속에서 나가시마 마사베이란 남자를 향한 한심함과 자신을 향한 한심함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또 그를 말로 다 못할 쓸쓸함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햇살은 무심히도 목서 향을 풍겨오고 있다. 파초나 오동도 조용히 잎을 움직이는 법이 없다. 솔개 목소리마저 이전처럼 밝기만 하다. 이 자연과 그 인간――10분 후, 하녀 스기가 점심 준비가 됐다는 걸 알리러 올 때까지, 그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멍하니 엔가와 기둥이 기대어 있었다.

 

     열

 

 홀로 쓸쓸하게 점심을 먹은 바킨은 겨우 서재로 돌아와선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 불쾌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오랜만에 수호전을 펼쳐 봤다. 우연히도 표자두 임충이 눈보라 부는 밤에 산신묘에서 벌초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용이 펼쳐졌다. 그는 그 희곡적 광경에서 평소의 감흥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간 이어지자 되려 묘하게 불안해졌다.

 절에 갔단 가족들이 아직도 오지 않았다. 집안은 한산하다. 그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수호전을 앞에 둔 채 맛없는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평소 머릿속에 품고 있던 어떤 의문을 떠올렸다.

 그건 도덕가로서의 그와 예술가로서의 그 사이서 항상 얽혀 있는 의문이었다. 그는 이전부터 '선왕지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소설은 스스로 공언한 것처럼 그야말로 '선왕지도'의 예술적 표현이다. 그러니 그 점에 모순은 없다. 하지만 그 '선왕지도'가 예술에 주는 가치와 그의 심정이 예술에 주는 가치 사이에는 의외로 큰 간격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도덕가가 전자를 긍정함과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예술가는 당연히 후저를 긍정했다. 물론 이 모순을 빠져나오는 안이한 타협적 사상도 없지는 않다. 실제로 그는 대중을 향해 이 애매모호한 조화설을 배후 삼아 그의 예술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를 감추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중은 속일 수 있어도 스스로는 속이지 못했다. 그는 게사쿠의 가치를 부정하여 '권선징악의 껍질'이라 칭하면서 늘 자신 속에서 뒤섞여 있는 예술적 감흥과 조우하면 곧장 불안을 느꼈다――수호전의 한 구절이 그의 기분에 예상치 못한 결과를 준 데에는 사실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사상적으로 겁이 많았던 바킨은 말없이 담배를 태우며 제 생각을 집을 비운 가족들을 향해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는 수호전이 놓여 있다. 불안은 이를 중심으로 간단히 머리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때 오랜만에 카잔 와타나베 노보루가 찾아왔다. 하카마하오리에 자색 목욕 보자기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걸 보면 아마 빌려 간 책을 되돌려주러 온 듯했다.

 바킨은 일부러 현관까지 나가 이 친구를 기꺼이 맞이했다.

 "오늘은 빌린 책을 돌려줄 겸 뵙고 싶어서 찾아뵙습니다."

 서재에 들어선 카잔은 그렇게 말했다. 잘 보니 목욕 보자기 이외에도 종이로 감은 생견 같은 것도 쥐고 있었다.

 "시간이 되신다면 좀 봐주시겠습니까?"

 "그래, 한 번 보죠."

 카잔은 흥분과 닮은 어떤 감정을 숨기듯이 살짝 과장스럽게 웃으며 종잇 속 생견을 펼쳐 보였다. 그림은 적막한 나무를 원근에 이리저리 배치하고 그 안에 손뼉을 치며 담소하는 두 남자를 세워두고 있었다. 수풀에 퍼진 노란 잎과 나뭇가지 끝자락에 무리진 까마귀――화면 어디를 봐도 쓸쓸한 가을 기척이 감돌고 있었다

 이 담백한 한산습득도로 향한 바킨은 눈은 서서히 맑은 물기를 머금으며 빛나기 시작했다.

 "매번 그렇지만 훌륭한 완성도로군요. 왕마힐이 떠오릅니다. 식수이명경일소오하, 행답이공림일낙옆성이란 거지요."

 

     열하나

 

 "어제 그린 것인데 마음에 들길래 노인께서만 괜찮으시면 선물 드릴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카잔은 수염 자국이 있는 푸른 턱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레 말했다.

 "그야 마음에 든다 해도 이제까지 그린 것 중에 그렇단 뜻이지만――이거 참,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생각처럼은 그려지지 않는 법이군요."

 "감사하기만 한 걸요. 늘 받기만 해서 죄송합니다만."

 바킨은 그림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인사를 했다. 이때, 문득 그의 마음속에 미완성인 채인 자신의 작품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카잔은 카잔 대로 자신의 그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다.

 "저는 옛사람의 그림을 볼 때마다 왜 이렇게 그려지지 않는 건지 고민부터 듭니다. 나무든 돌이든 사람이든 하나같이 나무가 되고, 돌이 되고 인물이 되지요. 심지어 그 안에 옛 화가의 심정이 유유히 녹아내려 있습니다. 그것만은 정말 대단하지요. 저 같은 건 그런 것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도 못 됩니다."

 "옛사람은 후생가외란 말도 썼지요."

 바킨은 카잔이 자기 그림만 생각하는 걸 부러운 심정으로 바라보며 어느 틈엔가 이런 해학을 입에 올렸다.

 "그야 젊음만큼 무서운 것도 없지요. 그러니 저희는 단지 옛사람과 젊은이 사이에 껴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떠밀리기만 할 따름입니다. 물론 이는 저희만의 이야기도 아니지요. 옛사람도 그랬을 거고, 젊은이들도 그럴 거고요."

 "나아가지 않으면 금세 밀려 넘어지고 마니까요. 그럼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려는 노력이 중요한 거겠지요."

 "그렇지요. 그게 제일 중요하지요."

 주인과 손님은 자신의 말에 이끌려 한동안 입을 닫았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가을의 조용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팔견전은 잘 풀리시죠?"

 카잔은 이윽고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잘 풀리긴요. 이 또한 옛사람에겐 못 미칠 듯합니다."

 "노인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하군요."

 "곤란함으로 따지자면 누구보다 제가 곤란하지요. 하지만 이걸로 갈 수 있을 때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요즘 들어 팔견전하고 같이 죽을 각오를 했지요."

 바킨은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듯이 쓴웃음 지었다.

 "고작해야 게사쿠라 해도 마음처럼 안 될 때가 많으니까요."

 "그건 제 그림도 마찬가지지요. 어차피 하는 이상은 저도 갈 수 있을 때까진 가고 싶단 심정입니다."

 "서로 죽을 각오군요."

 두 사람은 소리 내서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 안에선 두 사람 밖에 알지 못하는 쓸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와 동시에 또 주인과 손님은 이 쓸쓸함에서 강한 흥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그림은 참 부럽군요. 주위의 꾸지람을 받지 않는 점이 정말 좋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바킨이 화제를 돌렸다.

 

     열둘

 

 "그야 받진 않습니다만――노인이 쓰신 것도 그럴 걱정은 없잖습니까."

 "없기는요,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바킨은 아라타메나누시의 도서 검열이 글러 먹었다는 예시로 자작 소설의 한 구절 중 관리가 뇌물을 받는 내용이 있어 개작을 요구받은 사실을 꼽았다. 그리고 그에 이런 비평을 덧붙였다.

 "아라타메누시가 저희를 꾸지랄 수록 꼬리가 나오는 게 참 웃기지 않나요? 자신들이 뇌물을 받으니 뇌물에 대한 내용이 있으면 불쾌해하며 개작을 요구하죠. 또 자신들의 추잡한 마음이 드러나기 쉬우니까 남녀의 정사가 적혀 있으면 어떤 책이니 금세 회음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주제에 자신들의 도덕심이 작가보다 높은 줄 아니 옆에서 보면 우습기만 하지요. 말하자면 원숭이가 거울을 보며 이빨을 드러내는 꼴 아닙니까? 스스로 자신의 하등함에 화를 내고 있으니까요."

 카잔은 바키의 비유가 너무 열심인 나머지 그만 실소하면서

 "그거 참 맞는 말이군요. 허나 개작된다 한들 그게 노인의 수치가 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라타메나누시가 무슨 말을 하든 훌륭한 저서라면 온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겠지요."

 "그렇다 해도 영 횡포가 지나칠 때가 많으니까요. 그렇지, 한 번은 지옥의 옷과 밥을 보내는 걸 썼는데 역시나 대여섯 줄을 지워야 했습니다."

 바킨은 스스로 그렇게 말하면서 카잔과 함께 쿡쿡 웃었다.

 "하지만 앞으로 50년이나 100년만 지나도 아라타메나누시는 사라지고 팔견전만 남을 겁니다."

 "팔견전이 남든 남지 않든 의외로 아라타메나누시 쪽은 한사코 남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려나요? 저는 좀 생각이 다른데."

 "중요한 건 아라타메나누시가 아니지요. 아라타메나누시가 없더라도 그런 인종은 세상 속에서 끊이지가 않는 법입니다. 분서갱유가 과거에만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으니까요."

 "노인께선 요즘 들어 갑갑한 이야기만 하시는군요."

 "제가 갑갑한가요. 아라타메나누시 같은 게 당당히 활보하는 세상 속이 갑갑한 거지요."

 "허면 더더욱 열심히 일해야지요."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결국 또 죽을 각오 이야기가 되는군요."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웃지 않았다. 웃지만 않았을까. 바킨은 살짝 굳은 얼굴로 카잔을 보았다. 카잔의 농담 같은 말에는 그만큼 묘한 날카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는 살아남는 분별을 할 줄 알아야지요.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바킨이 이렇게 말했다. 카잔의 정치상 의견을 알고 있는 그로선 문득 일종의 불안을 느낀 것이겠지. 하지만 카잔은 작게 웃고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열셋

 

 카잔이 돌아간 후, 바킨은 또 남은 흥분을 힘으로 삼아 팔견전 원고를 쓰기 위해 평소처럼 책상 앞에 앉았다. 내용을 이어가기 전에 어제 쓴 부분을 다시 한번 읽는 게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좁은 행간 사이에 붉은 줄을 넣은 몇 장인가의 원고를 조심스레 또 천천히 읽었다.

 그러자 왜인지 써진 내용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불순한 잡음이 숨어 있어 그게 전체의 조화를 깨고 있다. 그는 당초 그게 자신이 예민해진 탓이라 해석했다.

 "지금 내 심정이 문제인 거야. 써진 건 문제없이 써져 있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번 읽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 건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노인의 것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큰 동요를 느꼈다.

 "이 전 건 어떻지?"「

 그는 그전에 쓴 부분을 훑었다. 그러자 이 또한 조잡한 문구만이 마냥 펼쳐져 있는 듯했다. 그는 다시 한 편을 거슬러 올랐다. 그리고 또 그 앞 내용을 읽었다.

 하지만 치졸한 포석과 난잡한 문장은 끝없이 눈앞에 펼쳐져 온다. 그곳에는 어떤 영상도 떠오르게 하지 않는 서경이 있었다. 어떤 감격도 품지 못한 대사가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논리도 따르지 못하는 논변이 있었다. 그가 며칠이나 써가며 적어 올린 몇 회치 원고는 다시 돌이켜 보면 하나같이 불필요한 글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쑥 가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건 처음부터 다시 쓸 수밖에 없겠어."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소리치며 원망스럽다는 양 원고를 내던지더니 한쪽 팔꿈치를 세운 채 뒹굴 옆으로 누웠다. 그럼에도 아직 마음이 가는지 눈은 책상 위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그는 이 책상 위에서 궁장월을 쓰고 남가몽을 쓰고 또 지금은 팔견전을 쓴다. 이 위에 놓인 벼루, 문진, 두꺼비 모양의 주전자, 사자와 모란이 그려진 청자 연병, 그리고 란을 그린 맹종의 대나무 붓꽂이――그런 모든 문구는 모두 꽤 오래전부터 그가 가진 창작의 괴로움에 녹아내려 있었다. 그런 물건을 보고 있자면 그는 저절로 지금의 실패가 그가 해온 평생의 고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한――자신의 실력이 근본부터 의심스러워지는 듯한 불쾌한 불안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까까지 당대에 비할 바 없는 대작을 쓸 생각이었지. 하지만 어쩌면 그마저도 남들만큼 자아도취해 있는 것뿐일지 몰라."

 이런 불안은 그에게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막막한 고독함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일본과 중국의 천재 앞에서 늘 겸손해지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또 그만큼 동시대의 수많은 작가들에겐 오만함과 동시에 한없이 불손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결국 자신 또한 그들과 같은 능력의 소유자임을, 그리고 더욱이 불쾌해 마땅해한 동류란 걸 어찌 쉽게 인정할 수 있으랴. 심지어 그의 강대한 '자아'는 '깨달음'과 '체념'을 피하는데 너무나도 큰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책상 앞에 누운 채로 배가 침몰하는 걸 보는 난파선 선장 같은 눈초리로 실패한 원고를 바라보며 조용히 절망의 위력과 싸워 갔다. 만약 이때, 그의 뒤에 위치한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리지 않았다면, 또 '할아버지 다녀왔어요'하는 목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손이 그의 목에 안기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이 우울함 기분 속에 한사코 묶여 있었으리라. 하지만 손자 타로는 문을 열자마자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대담함과 솔직함으로 대뜸 바킨의 무릎 위로 기세 좋게 올라탔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그래, 일찍 왔구나."

 이 말과 함께, 팔견전 저자의 주름투성이 얼굴에는 마치 다른 사람 같은 기쁜 빛이 담겼다.

 

     열넷

 

 안방에서 아내 오햐쿠의 높은 목소리나 소심한 며느리 오미치의 목소리가 북적이며 들려왔다. 이따금 두터운 남자 목소리가 섞이는 걸 보면 아들 소하쿠도 같이 귀가한 듯하다. 타로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매달리면서 그에 귀를 기울이듯 일부러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깥공기를 받은 뺨이 붉어져 작은 콧구멍 주변이 숨을 쉴 때마다 움직이고 있다.

 "저기, 할아버지는."

 붉은 밤색의 자그마한 몬츠키를 입은 타로는 대뜸 그런 말을 꺼냈다. 생각하려는 노력과 웃음을 참으려는 노력으로 보조개가 몇 번이나 사라졌다 나타난다――바킨은 그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듯했다.そ

 "매일 같이 잘."

 "응, 매일 같이 잘?"

 "공부하세요."

 바킨은 기어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웃음 속에서 곧장 말을 이어

 "그리고?"

 "그리고――어어――짜증내면 안 된대."

 "그래그래, 그게 전부니?"

 "아직 더 있어."

 타로는 그렇게 말하며 이토빈얏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자기 도한 웃음을 터트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얀 이를 드러내더니 자그마한 보조개를 드리우며 웃는다. 이를 보면 이 아이가 커서 세간 사람들처럼 애처로운 얼굴이 되리란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바킨은 행복에 젖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게 그의 마음을 더욱 간질었다.

 "또 뭐가 있니?"

 "또 말야. 많이 있어."

 "어떤 게."

 "어어――할아버지는 앞으로 좀 더 대단해질 거니까."

 "대단해질 거니까?"

 "그니까 잘 참아야 한대."

 "참고 있지." 바킨은 저도 모르게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좀 더, 좀 더 자알 참아야 한대."

 "누가 그런 말을 했니."

 "그건 말야."

 타로는 장난스레 그의 얼굴을 힐끔 봤다. 그리고 웃었다.

 "누구게?"

 "글쎄, 오늘 절에 갔으니까 스님한테 들었겠구나."

 "아니야."

 완고히 고개를 저은 타로는 바킨의 무릎에서 반쯤 허리를 접으며 턱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있잖아."

 "응."

 "아사쿠사의 관세음보살이 그렇게 말했어."

 이 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온 집안에 들릴 정도로 큰 기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바킨에게 잡히는 게 무섭다는 양 서둘러 그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할아버지하고 잘 놀았다는 듯 자그마한 손을 두들기며 구르듯이 안방 쪽으로 도망쳤다.

 바킨의 마음에 엄숙한 무언가가 빛난 찰나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의 입술에는 행복한 웃음이 드리웠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에는 어느 틈엔가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이 농담은 타로가 생각한 걸까. 혹은 어머니가 가르쳐 준 걸까. 이는 그가 물을 일이 아니었다. 이때, 이 손자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은 게 기적이지 않은가.

 "보살께서 말씀하셨구나. 공부해라, 짜증 내지 마라, 그리고 좀 더 잘 참아라."

 예순몇 살 먹은 늙은 예술가는 눈물 속에서 웃으며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열다섯

 

 그날 밤의 일이다.

 바킨은 어두컴컴한 조명불 아래서 팔견전 원고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집필 중엔 가족도 이 서재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용한 방 안에선 등불의 기름 소리만이 귀뚜라미 목소리와 함께 긴 밤의 적적함을 말해주고 있다.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희미한 빛 같은 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열 줄, 스무 줄 붓이 이어감에 따라 그 빛은 서서히 커져만 갔다. 경험을 통해 그 빛이 무엇인지 아는 바킨은 더욱 주의하며 붓을 옮겨 갔다. 신이 내려준 감흥은 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피우는 법을 모르고서야 한 번 불이 붙어도 금세 또 사라지고 만다……

 "초조해 마라, 그리고 되도록 깊게 생각해."

 바킨은 자칫하면 혼자 달려 나갈 듯한 붓을 진정시키며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이미 별을 박살 낸 방금 전 무언가가 강보다도 빠르게 흘러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게 시시각각 힘을 더하고 도리 없이 그를 떠밀고 만다.

 그의 귀는 어느 틈엔가 귀뚜라미 소리를 담지 않았다. 그의 눈도 조명의 희미한 빛을 조금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붓은 저절로 기세를 낳고 단숨에 종이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그는 인간의 입장에서 신과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로 거의 필사적으로 글을 이어갔다.

 머릿속 흐름은 마치 하늘에 뻗은 은하처럼 여기저기서 솟구쳐 왔다. 그는 그 무시무시한 기세를 두려워하면서, 만에 하나 자신의 육체 힘이 이를 버티지 못할 경우를 조심했다. 그리고 붓을 굳게 쥔 채로 몇 번이나 자신을 타일렀다.

 "끈기 좋게 써가거라. 지금 내가 쓰는 건 지금이 아니고선 못 쓸 내용일지 몰라."

 하지만 흐릿한 빛과 닮은 흐름은 조금도 그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되려 번잡한 비약 속에서 갖은 걸 집어삼키며 솟구치듯 그를 덮쳐 온다. 그는 이미 그 흐름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걸 잊은 채로 그 흐름의 방향에 맞춰 폭풍 같은 기세로 붓을 뻗었다.

 이때 그의 또렷한 눈동자에 담긴 건 이해관계도, 애증도 아니었다. 하물며 평판 따위에 휘둘리는 마음 따위 진작에 눈앞에서 떨쳐낸 지 오래였다. 존재하는 건 단지 신비한 기쁨뿐이었다. 혹은 황홀하고 비장한 감격이었다. 이 감격을 모르는 자가 어찌 게사쿠삼매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으리요. 어찌 게사쿠 작가의 엄숙한 혼을 이해할 수 있으리요. '인생'은 이 경지에 서야 비로소 갖은 잔상을 닦아낸 채 마치 새로 캔 광석처럼 작가의 앞에서 아름답게 빛나지 않는가……

 

      ×   ×   ×

 

 그동안에도 안방의 등불 아래선 아내 오햐쿠와 며느리 오미치가 마주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타로는 벌써 잠에 든 거겠지. 조금 떨어진 데에선 몸이 약한 소하쿠가 바쁘게 약을 먹고 있었다.

 "너희 아버지는 아직도 안 주무시네."

 이윽고 오햐쿠는 바늘에 머리 기름을 묻히면서 불만이라는 양 중얼거렸다.

 "분명 또 글 쓰시는데 푹 빠져 계시겠죠."

 오미치는 바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하여간 곤란한 사람이야. 돈도 제대로 안 되는데."

 오햐쿠는 이렇게 말하며 아들과 며느리를 보았다. 소하쿠는 못 들은 척하며 답하지 않았다. 오미치도 조용히 바늘을 옮겼다. 귀뚜라미는 여기서나 서재서나 다를 바 없이 가을을 울리고 있다.

(다이쇼 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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