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오렌이 혼죠 요코아미에 오게 된 건 메이지 28년 초겨울의 일이었다.
측실은 오쿠라바시의 강에 접한 극히 비좁은 집이었다. 단지 정원에서 강 쪽을 보면 이제는 료고쿠 정차장이 된 오쿠라다케 일대의 수풀이나 숲이 짧은 비가 곧잘 내리는 하늘을 뒤덮고 있었으니 거리 한가운데 답지 않은 한적한 풍경만은 한없이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또 그런 만큼 남편이 없는 밤에는 적적함을 느끼는 일도 곧잘 있었다.
"할멈, 저건 무슨 소리일까?"
"이거요? 이건 해오라기 소리입니다."
오렌은 눈이 안 좋은 고용인 할머니와 램프 불을 지키면서 꺼림칙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남편 마키노는 곧잘 오렌을 찾아왔다. 낮에도 관청을 찾는 길에 육군 일등 주계 군복을 입은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물론 해가 지고 나서도 우마야바시 너머에 자리한 본가서 빠져나오는 일이 적지 않았다. 마키노는 아내는 물론이요 슬하에 두 남매를 두고 있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 마루마게로 머리를 묶어 올린 오렌은 거의 매일 밤마다 긴 화로를 둔 채로 마키노의 술상대를 했다. 두 사람의 술상 위엔 대개 깔끔하고 작은 접시에 대개 카라스미나 고노와다가 놓였다.
그럴 때면 오렌의 머리에는 과거의 생활이 또렷이 떠오르곤 했다. 그녀는 그 북적이는 집이나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먼 지방으로 흘려 온 자신의 처지가 한 층 더 마음에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또 이전보다 살이 많이 붙은 마키노의 몸이 불쑥 묘한 혐오감을 불태우기도 했다.
마키노는 시종 유쾌하다는 양 홀짝홀짝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무언가 농담을 하고선 오렌의 얼굴을 들여다보곤 대뜸 큰소리로 웃는 게 이 남자의 술버릇 중 하나였다.
"어때, 오렌. 도쿄도 마냥 나쁘진 않지?"
오렌은 그런 말을 듣고도 대개는 작게 웃은 채로 술잔이 비지 않는 것만 신경 썼다.
관청서 일하는 마키노는 자고 가는 일이 드물었다. 머리맡에 둔 시곗바늘이 12시에 가까워진 걸 보면 그는 곧장 메리야스 셔츠에 두터운 팔을 넣기 시작했다. 오렌은 단정치 못하게 무릎으로 서서는 항상 멍하니 바쁘게 귀가 준비를 하는 마키노에게 우울한 시선을 보냈다.
"하오리 좀 줘봐."
마키노는 한밤중의 램프 빛에 기름진 얼굴을 드리우며 성가시다는 듯이 말할 때도 있었다.
그를 보낸 오렌은 여느 때처럼 피곤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동시에 다시 혼자 남은 게 조금 슬프기도 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강 하나를 둔 수풀이나 숲은 쓸쓸한 울림만을 낼 뿐이었다. 오렌은 술 냄새 나는 밤옷 소매에 차가운 뺨을 묻으면서 가만히 그 울림을 들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눈에는 어느샌가 눈물이 한가득 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무거운 눈꺼풀이――그 자체로 악몽만 같은 눈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마음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둘
"그 상처는 어쩐 일이에요?"
조용히 비가 내리는 어느 밤 일이었다. 오렌은 마키노의 잔을 채우며 그의 오른뺨을 보았다. 그곳에는 푸른 수염자국 안에 커다란 흉이 져있었다.
"이거? 아내가 긁은 거야."
마키노는 농담인가 싶을 정도로 장난스러운 얼굴색과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싫어라. 또 왜 그런 일을 하셨대요?"
"왜고 어딨어. 늘 하는 질투지. 나마저 이 꼴이니 네가 한 번 만나봐라. 바로 목을 물어버릴걸? 무슨 만주 똥개마냥."
오렌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일 아니야. 여기 있는 거 알려지는 날에는 내일이라도 들이닥칠지 몰라."
마키노의 말에는 의외로 진지한 기색도 섞여 있었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해야죠."
"호오, 이거 또 배짱 한 번 좋은데."
"배짱 좋은 게 아니에요. 저희 고향 사람은――"
오렌은 깊은 생각에 잠기듯이 긴 화로의 재에 눈을
"저희 고향 사람들은 모두 체념이 빠르거든요."
"그럼 오렌은 질투 안 한다고?"
마키노의 눈에는 잠시 교활한 표정이 드리웠다.
"우리 고향 사람들은 다들 질투해. 특히 나 같은 경우엔――"
그때 할머니가 안주상을 들고 나타났다.
그날 밤, 마키노는 오랜만에 자고 가기로 했다.
비는 그들이 방에 들어선 후로 진눈깨비가 되었다. 오렌은 마키노가 잠든 후에도 왜인지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의 색이 바랜 눈동자 밑에서는 본 적 없는 마키노의 아내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동정은 물론이요 증오도 질투도 느끼지 않았다. 단지 그 상상에 따라는 건 약간의 호기심뿐이었다. 어떤 부부 싸움을 한 걸까――오렌은 창밖의 수풀이나 숲이 진눈깨비에 술렁이는 걸 신경 쓰면서 곰곰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럼에도 두 시간가량 듣고 있자니 겨우 잠이 들기 시작했다――오렌은 수많은 손님과 함께 어두컴컴한 선실에 타고 있었다. 둥근 창으로 밖을 보니 거듭된 검은 파도 너머서 달인지 태양인지 모를 묘한 붉은빛이 나는 구 하나가 있었다. 다른 승객은 어째서인지 다들 그림자 속에 앉은 채로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오렌은 서서히 이 침묵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가 그의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돌아봤다. 그러자 뒤에선 헤어진 남자가 슬픈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내려보고 있다………
"김 씨."
오렌은 자신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마키노는 역시나 그녀 옆에서 조용한 호흡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등을 돌린 탓에 정말로 잠에 든 건지는 오렌도 알 수가 없었다.
셋
마키노도 오렌에게 남자가 있었단 사실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한편으로 그런 일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하물며 남자 쪽에서도 마키노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동시에 딱하고 거리를 두었으니 그가 질투하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오렌의 머릿속에는 늘 남자가 자리해 있었다. 그건 그리움보단 좀 더 잔혹한 감정이었다. 왜 남자가 대뜸 그녀를 찾지 않게 되었나――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오렌은 몇 번이나 변하기 쉬운 세상 남심서 원인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남자가 오게 되지 않은 전후의 사정을 생각하면 마냥 그렇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자에게 무언가 도리 없는 사정이 있었다 한들 그것도 알리지 않은 채 헤어지기엔 두 사람 사이는 너무나도 격별했을 터이다. 그럼 남자에게 생각지 못한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오렌은 그런 상상을 무서워하는 한편으로 바라기도 했다………
남자가 나온 꿈을 꾼 이삼일 후, 오렌은 욕탕에 다녀오는 길에 문득 '사람 찾는 현상도인'이란 깃발이 걸려 있는 집을 보았다. 그 깃발은 산목을 물들이는 대신 붉은 원형을 그려 눈에 익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렌은 그 앞을 지나면서 불쑥 남자가 지금 어쩌고 있는지 이 현상도인이란 사람에게 점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안내를 받아 이른 곳은 햇살이 잘 드는 방이었다. 그런 데다 주인의 취향인지 중국 책장이나 난꽃, 화분 등 다도가스러운 장식이 되어 있는 것도 마음이 편해지는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현상도인은 머리를 민 유복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하지만 금니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도통 도인답지 않는 품격 떨어지는 모습도 갖추고 있었다. 오렌은 이 노인에게 작년에 자취를 감춘 한 친척의 행방을 점쳐달라 부탁했다.
그러자 노인은 방구석에서 자단 책상을 꺼내 두 사람 사이에 두었다. 그리고 그 책상 위에 공손히 청자 향로나 금란 주머니를 늘어놓았다.
"그 친척은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오렌은 남자의 나이를 대답했다.
"하하, 아직 젊군요. 젊을 때엔 실수가 잦은 법이죠. 저 같은 노인이 되어선――"
현상도인은 오렌을 빤히 보고는 두세 번 껄껄 웃었다.
"태어나신 해도 아십니까? 아뇨, 됐습니다. 토끼해로군요."
노인은 금란 주머니서 동전 세 개를 꺼냈다. 동전은 제각기 한 장씩 붉은 천으로 싸여 있었다.
"제 점은 투전이라 하지요. 투전은 옛날 한나라의 경방이 처음 점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점이란 건 삼변이란 게 있고 또 그 안에 십팔 변이란 게 있어 길흉을 보는 게 쉽지 않지요. 그런데 이 투전의 장점은……"
그러는 사이 밝은 방 안에선 노인이 피운 향의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넷
도인은 붉은 천을 풀고서 향로 연기에 한 장씩 동전을 얹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벽에 걸린 족자 앞에 정중히 둥근 머리를 숙였다. 족자는 코나파가 그린 듯한 복희, 문왕, 주공, 공자 사대 성인의 그림이었다.
"유황 상제, 우주의 신성, 이 향냄새를 맡으신다면 부디 강림하소서――상황이 시급하오니 모르는 바 있으면 신령에게 물으소서. 부디 이 자를 어여삐 여겨 재빨리 길흉을 봐주소서."
그런 문구가 끝난 도인은 자단 책상 위로 세 장의 동전을 뿌렸다. 한 장은 문자가, 다른 두 장은 그림 쪽이 나왔다. 도인은 곧장 붓을 꺼내 종이에 그 순서를 적어내렸다.
동전을 던져 음양을 본다――그런 게 여섯 반가량 이어졌다. 오렌은 그 동전의 순서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어디 보자."
투전이 끝난 후, 노인은 종이를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건 뇌수해란 점궤로군요. 생각처럼 안 되는 모양입니다――"
오렌은 머뭇머뭇 세 장의 동전서 눈을 떼고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일단 그 친척이란 분하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겠군요."
현상 도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동전을 한 장씩 천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그럼 살아는 있는 건가요?"
오렌은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꼈다. "역시 그렇구나"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어"하는 생각도 같이 들어 그만 목소리로 드러나고 말았다.
"생사 여부는 판별하기 어렵지만――어찌 됐든 못 만나다고만 아시지요."
"왜 못 만나는 건가요?"
오렌이 밀어붙이자 도인은 금란 주머니를 닫으면서 기름진 턱 주변에 비웃음 섞인 표정을 드리웠다.
"상전벽해란 말도 있잖습니까. 이 도쿄가 숲이나 밀림이 되면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르지요――어찌 됐든 점궤는 그렇다는 겁니다."
오렌은 찾았을 때보다도 더욱 마음이 무거워져 높은 점값을 내고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오렌은 긴 화로 앞에서 멍하니 턱을 괸 채로 철판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현상도인의 점궤는 결국 어떤 해석도 주지 않은 것과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그녀가 조용히 품고 있던 희망――까지는 못 가도 바람만은 분명한 혹시 모른단 생각을 적극적으로 부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남자는 도인이 은근히 풍긴 것처럼 죽기라도 한 걸까? 그러고 보면 오렌이 살던 마을도 당시엔 꽤 뒤숭숭했다. 남자는 여느 때처럼 오렌을 찾던 도중에 잘못된 걸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잊기라도 한 것처럼 대뜸 오지 않게 되는 건――오렌은 백분을 바른 한 쪽 뺨에 숯불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느 틈엔가 숯 집게를 만지작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김, 김, 김――"
재 위에는 그런 문자가 몇 번이나 오고 갔다.
다섯
"김, 김, 김."
오렌이 그렇게 계속 써내리고 있자니 부엌에 있던 고용부 노파가 대뜸 자그마한 비명을 질렀다. 이 집은 말이 부엌이자 문을 열면 바로 방과 이어져 있었다.
"뭐야? 할멈."
"새댁, 보시지요. 정말로 이게 뭔지――"
오렌은 부엌으로 나가 봤다.
아궁이가 시야를 가린 마룻방에선 장자에 비친 램프 빛만이 조용한 어둠을 이루고 있었다. 노파는 그 어둠 속에서 허리를 굽힌 채로 무언가 하얀 짐승을 안아 올리는 참이었다.
"고양이?"
"아뇨, 개입니다."
두 팔을 가슴 앞에 모은 오렌은 가만히 그 개를 들여다보았다. 개는 노파한테 안긴 채로 생기 넘치는 눈동자를 굴리며 시종 코로 울고 있었다.
"오늘 아침쯤에 쓰레기장에서 울고 있던 개입니다――왜 들어온 걸까요."
"할멈은 들어오는 것도 몰랐어?"
"네, 아까부터 여기서 그릇을 씻고 있었으니까요――사람이 눈이 안 좋으면 이래서 큰일입니다."
노파는 물 빠지는 문을 열어 어두운 밖으로 강아지를 버리려 했다.
"기다려봐. 나도 한 번 안아보고――"
"그런 말씀 마세요. 옷이라도 더러워지면 어쩝니까."
오렌은 노파가 말리는 것도 들지 않고 두 손으로 그 개를 안았다. 개는 그녀의 품 안에서 덜덜 몸을 떨었다. 그게 순간 그녀의 마음을 과거로 데려갔다. 오렌은 그 북적이는 집에 있었을 때, 손님 없는 밤이면 같이 자는 하얀 강아지를 길렀었다.
"불쌍하게도――우리가 기를까?"
노파는 묘한 눈초리를 보냈다.
"할멈, 기르자. 할멈한테 돌보라고 안 할 테니까――"
오렌은 개를 방에 내려놓고는 순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벌써 강아지 먹이라도 찾을 셈인지 부엌 선반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다음 날부터 붉은 목줄을 한 개가 방의 다다미 위에 자리하게 되었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노파는 물론 이 변화를 기뻐하지 않았다. 특히 정원으로 나간 강아지가 흙 발로 올라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달리할 일이 없는 오렌은 마치 제 아이처럼 강아지를 귀여워했다. 밥 먹을 때에도 반드시 옆에 두었다. 밤이면 또 잠옷을 입은 그녀 옆에서 곤히 잠든 개를 보는 게 말 그대로 매일 밤의 일과가 되었다.
"그때부터 저는 정말 싫었어요. 그 어두컴컴한 램프 빛서 그 하얀 강아지가 새댁의 자는 얼굴을 빤히 바라본 적도 있었으니――"
노파는 이래저래 일 년 후, 내 친구인 K란 의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여섯
그 강아지로 골치를 썩는 건 고용인 노파 하나만이 아니었다. 마키노도 강아지가 다다미 위에 누워 있는 걸 봤을 때엔 불쾌하다는 양 두터운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이건?――야 개새끼야, 저리 안 가?"
육군 주계 군복을 입은 마키노는 험악하게 강아지를 걷어찼다. 강아지는 그가 방에 들어오면 하얀 등 털을 거꾸로 세운 채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개다 좋다지만 어이가 없네."
반주 상이 나온 후로도 마키노는 성가시단 눈초리로 개를 바라보았다.
"전에 요만한 녀석을 기르지 않았나?"
"네, 그것도 하얀 개였죠."
"그러고 보니 네가 그 개랑 헤어지기 싫다고 싫다고 해서 꽤 고생했었지."
오렌은 무릎에 앉은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배나 기차 여행을 하는데 개를 데리고 가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는 오렌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하고도 헤어진 지금, 그 하얀 개를 남긴 채로 알지도 못하는 다른 지방으로 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섭섭했다. 때문에 막상 출발하는 전날 밤, 그녀는 개를 안아 올려선 그 코에 뺨을 문지르면서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그 개는 제법 똑똑했는데 이 녀석은 영 바보인 모양이네. 무엇보다 인상이――인상은 아닌가. 견상이――견상이 너무 평범해."
벌써 취기가 돈 마키노는 당초의 불쾌함도 잊은 것처럼 회 한 점을 개에게 던져줬다.
"어머, 그 개랑 꽤 닮지 않았나요? 다른 건 코색 하나뿐인데."
"뭐, 코색이 달라? 또 묘한 구석이 다르네."
"이 개는 코가 검잖아요. 그 개는 코가 붉었어요."
마키노의 잔을 채워주는 전에 기른 개코가 눈앞에 또렷이 보이는 듯했다. 그건 시종 침으로 젖은, 마치 젖먹이 아이를 가진 새댁의 유방처럼 다갈색의 점이 있는 코였다.
"흐음, 듣고 보니 코가 붉은 게 개로서는 미인상일지도 모르겠군."
"미남이죠, 그 개는. 이 녀석은 검으니까 추남이고요."
"남자였나, 둘 다. 이 집에 오는 남자는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이거 조금 수상한데?"
마키노는 오렌의 손을 쿡쿡 찌르면서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마키노의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개는 그들이 방에 들어가자 후스마 하나 너머서 몇 번이나 슬픈 소리를 냈다. 심지어는 끝내 그 후스마에 앞발 손톱을 세웠다. 마키노는 심야 램프의 등불에 묘한 쓴웃음을 드리우며 기어코 오렌에게 말했다.
"야, 저거 좀 열어줘라."
하지만 그녀가 문을 열자 개는 의외로 느긋하게 두 사람의 베개맡으로 왔다. 그리곤 하얀 그림자처럼 배를 척 깔더니 가만히 둘을 바라보았다.
오렌은 그 눈초리가 어쩐지 사람의 것처럼만 느껴졌다.
일곱
그로부터 이삼일 지난 어느 밤, 오렌은 집을 빠져나온 마키노와 함께 근처의 무대를 보러 갔다.
마술, 검무, 환등, 다이카구라――그런 것만 상연하는 무대는 꿈쩍도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기다린 후 겨우 무대하고는 거리가 먼 곳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둘이 그 자리에 앉았을 때, 주위 손님은 마치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마루마게로 묶은 오렌의 모습에 신기하단 시선을 보냈다. 오렌은 그게 기쁘기도 하면서 또 왜인지 쓸쓸하기도 했다.
무대서는 공중에 매단 밝은 램프 아래서 하얀 머리띠를 한 남자가 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카구야에선 낭랑히 '담습 하는 천만 병사의 연기'하는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렸다. 오렌은 그 검무는 물론이요 낭독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마키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재밌다는 양 바라보았다.
검무 다음은 환등이었다. 무대에 내려진 막 위에는 청일전쟁의 광경이 드리웠다 사라지곤 했다. 커다란 물기둥을 뿜으며 '테이엔'이 침몰하는 모습도 있었다. 적의 갓난아기를 품은 히구치 대위가 돌격을 지휘하는 모습도 있었다. 수많은 관객은 그 그림 속에 이따금 일장기가 드리우면 반드시 성대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개중에는 '제국 만세'하고 대듬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실전에 임해본 마키노는 그런 녀석들과 무관하게 단지 히죽히죽 웃기만 할 뿐이었다.
"전쟁이 딱 저렇기만 하면 편하고 좋을 테지만――"
그는 영구 전투의 그림을 보며 이번에는 주위에도 돌리듯이 오렌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오렌은 여전히 막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건 물론 환등을 거의 보지 못한 그녀로선 어떤 그림이든 재미있기 때문이렸다. 하지만 그 외에도 화면 속 경치는――눈이 쌓인 성루 지붕이나 마른 버들에 묶인 말이나 변발을 한 중국 병사의 모습은 특히 그녀를 뒤흔들기 충분할 이유를 지니고 있었다.
무대가 끝이 난 건 열 시쯤이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장사가 끝난 가게만 이어진 인기척 없는 거리를 걸었다. 거리 위에는 반달이 서리 내린 각 집의 지붕에 차가운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마키노는 그 빛 속에 이따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방금 전 검무를 되새김질한 건지
"채찍 소리 묵묵히 밤강에 울려 퍼지니"하고 오랜 시를 읊고는 했다.
하지만 골목에 들어섰을 때, 오렌은 불쑥 겁을 먹은 것처럼 마키노의 외투 자락을 끌었다.
"깜짝이야, 왜 그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서 오렌을 돌아봤다.
"누가 부르는 거 같아요."
오렌은 그에게 기대면서 꺼림칙하단 표정을 지었다.
"부른다니?"
마키노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는 살짝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쓸쓸한 거리에는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거야. 부르긴 누가 불러."
"잘못 들은 걸까요."
"그런 환등을 봐서 그런가?"
여덟
무대를 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오렌은 칫솔을 입에 문 채로 얼굴을 씻으러 툇마루로 나갔다. 툇마루엔 여느 때처럼 물이 채워진 황동 대야가 하치마에 앞에 놓여 있었다.
겨울 속 정원은 쓸쓸했다. 정원 너머로 이어진 경치도 어두운 하늘을 비춘 강물과 함께 춥고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경치가 눈에 들어온 오렌은 이제까지 잊고 있던 어젯밤의 꿈을 떠올렸다.
그녀가 홀로 어두운 덤불숲을 걷는 꿈이었다. 그녀는 가는 길을 걸으면서 "드디어 내 바람이 이뤄졌어. 도쿄는 인기척 없는 숲으로 바뀐 거야. 이제 곧 김 씨하고도 만날 수 있을 게 분명해"――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걷는 사이 대포 소리나 소총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나무로 덮여진 하늘이 마치 불길이라도 비추는 듯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전쟁이야, 전쟁이야"――오렌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달리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도무지 달릴 수 없었다…………
오렌은 얼굴을 씻고는 손을 씻기 위해 옷을 벗었다. 그때 무언가 차가운 게 찰싹하고 그녀의 등에 닿았다.
"저리 가있어!"
오렌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요염한 눈초리로 뒤를 보았다. 그 시선 끝에선 강아지 하나가 꼬리를 흔들면서 검은 코를 핥고 있었다.
아홉
그로부터 이삼일 가량 지난날, 마키노는 평소보다 빠르게 타미야란 남자와 함께 오렌을 찾았다. 어떤 유명한 어용상인의 가게를 주도적으로 꾸려간다는 타미야는 오렌이 마키노의 신세를 지는데도 여러모로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묘하지 않아? 이렇게 마루마게로 묶고 있으면 도무지 옛날의 오렌으론 안 보인다 말이지."
타미야는 밝은 램프 빛에 옅은 마맛자국이 있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마주한 마키노의 잔을 채워줬다.
"안 그래, 마키노 씨? 이게 시마다로 묶거나 샤구마로 묶은 거였다면 이렇게 달라 보이진 않았을 거 같아. 왜, 예전 모습이 있으니까――"
"야야, 여기 할머님 눈은 좀 안 좋아도 귀는 아직 안 멀었다."
마키노는 그런 주의를 받고도 재밌다는 양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괜찮아. 듣는다고 알겠어?――오렌 씨, 그 시절을 생각하면 꼭 꿈만 같지 않아요?"
오렌은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로 무릎 위의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저도 마키노 씨께 부탁받아서 한 번은 받아들였지만 만에 하나 들켰다간 큰일이니까요. 무사히 고베에 올라올 때까지 걱정도 많았다니까요."
"흥, 그런 위험한 다리는 몇 번이나 건넜을 거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밀입국은 처음이었다고."
타미야는 잔을 기울이며 과장스럽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렌이 오늘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게 네 덕이긴 하지."
마키노는 두터운 팔을 뻗어서 타미야의 잔을 채워줬다.
"그렇게 말하면 황공하지만 그때는 곤란했다니까. 더군다나 타고 온 배가 마침 현해를 지날 때에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만나서 말이야――안 그래요, 오렌 씨?"
"네, 저는 배고 뭐고 다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오렌은 타미야의 잔을 따라주면서 겨우 대화를 쫓아갔다. 하지만 그 배가 가라앉았다면 차라리 지금보다 나았을지 모른다――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뭐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서로 만난 거지――근데 말야, 마키노 씨. 오렌 씨가 마루마게가 어울리는 걸 보니 또 반대로 예전처럼 되돌려 보고 싶지도 않아?"
"되돌리고 싶어도 방법이 없잖아?"
"없지만 말야――그러고 보니 옛날 옷은 하나도 안 가지고 왔나?"
"옷은 고사하고 비녀도 가져왔지. 아무리 내가 말려도 도무지 놓지를 않으니――"
마키노는 긴 화로 너머로 오렌의 얼굴을 보았다. 오렌은 그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철판이 젖는 것만을 봤다.
"그건 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걸――어때요, 오렌 씨. 그중 하나로 바꿔 입고 따라줄 수 없을까?"
"겸사겸사 너도 옛 친구 좀 떠올리고."
"글쎄, 그 옛 친구도 오렌 씨처럼 미인이면 떠올릴 보람도 있겠지먄――"
타미야는 마맛자국 있는 얼굴에 간지럽다는 웃음을 지으면서 스리이모를 젓가락으로 떴다……
타미야가 돌아간 그날 밤, 마키노는 아무것도 몰랐던 오렌에게 근 시일 내에 육군을 관두고 상인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역 허가만 내려오면 타미야를 부리는 명성 높은 어용상인이 금세 높은 봉급으로 고용해 줄 거다――그런 이야기였다.
"그럼 여기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 어디 넓은 집으로 이사 가지 않겠어?"
마키노는 자못 지친다는 양 화로 앞에 누운 채로 타미야가 선물로 가지고 온 마닐라 담배를 태웠다.
"이 집이면 충분하죠. 할멈하고 저랑 둘뿐인걸요."
오렌은 욕심 많은 강아지에게 잔반을 주는데 바빴다.
"이사하면 나도 같이 지내야지."
"아내분은 어쩌고요?"
"그 녀석? 그 녀석하고도 헤어질 거야."
마키노의 말투나 얼굴색을 보니 이 생각지 못한 말도 마냥 농담은 아닌 듯했다.
"너무 죄를 늘리진 마세요."
"무슨 상관이야. 다 자업자득이지. 누가 보면 나만 잘못한 줄 알겠네."
마키노는 험악한 눈초리를 지으면서 더더욱 담배를 태웠다. 오렌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동안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열
"그 하얀 강아지가 병든 건――그래그래, 타미야 나리가 찾아온 날의 하루 뒤였지요."
오렌이 부리던 노파는 내 친구 K 의사한테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마 식중독 같은 거였을 겁니다. 처음엔 화로 앞에서 가만히 잠만 잘뿐이었는데 그러는 사이 이따금 다다미를 더럽혔습니다. 새댁은 마치 제 자식처럼 귀여워하던 강아지니 우유를 주고 약을 입에 물려주는 등 많이 챙겨줬습니다. 그건 이상할 게 없지요. 없습니다만 불쾌하지 뭔가요. 개의 병이 심해질수록 점점 새댁이 개에게 말을 거는 빈도가 많아졌으니까요."
"그야 말을 건다 한들 새댁이 강아지를 상대로 주구장창 혼잣말을 하는 셈이지요. 근데 밤늦게 그런 목소리를 들어 보세요. 어쩐지 강아지도 인간처럼 말을 알아들을 거 같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한 번은 바람이 휑휑 불던 날에 심부름 갔다 다녀오니――그 심부름이란 것도 근처 점집에 개의 변 상태를 봐달라 간 거지만요――심부름 갔다 돌아오니 장자가 덜컹이는 방에서 새댁의 목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나리라도 오신 걸까 싶어 장자 틈새로 들여다보니 역시 새댁 한 사람뿐이었지요. 더군다나 바람에 불어온 눈이 햇살 앞에서 나부끼니 무릎에 강아지를 얹은 새댁의 모습이 시종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지 뭡니까. 이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그런 꺼림칙한 일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그런 마당이니 개가 죽었을 때엔 그야 새댁에겐 미안해도 내심 많이 안심했지요. 물론 그게 기뻤던 건 강아지가 실수를 할 때마다 치워야 했던 저만이 아닙니다. 나리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액땜이라도 했다는 양 히죽히죽 웃었지요. 강아지요? 강아지는 듣자 하니 새댁은 물론이요 저도 아직 깨기 전에 거울 앞에 쓰러진 채 하얀 구토를 한 채 죽어 있었지요. 느긋이 화로 앞에 자리를 잡은 후로 보름이나 됐을까요……"
마침 약시장이 선 날, 오렌은 커다란 거울 앞에서 숨이 끊어진 강아지를 보았다. 강아지는 노파가 말한 것처럼 하얀 구토를 입에 문 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는 오렌도 한참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이전 개는 생이별했지만 이번 강아지하곤 사별할 수 있었다. 어쩌면 타고날 때부터 개하곤 인연이 아니었을지 모른다――그런 심정이 그녀의 마음에 절망적인 정적을 드리울 뿐이었다.
오렌은 그 앞에 앉아 망연히 강아지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울적한 눈초리로 차가운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은 다다미에 쓰러진 강아지를 오렌과 함께 담고 있었다. 그 강아지의 그림자를 가만히 보던 오렌은 현기증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대뜸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작은 오열을 토했다.
거울 속 강아지 시체는 어느 틈엔가 검은 코끝이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열하나
오렌의 집에 찾아온 신년은 쓸쓸했다. 문 앞에 대나무를 세우고 방에 호라이를 꾸며도 오렌은 홀로 화로 앞에서 지루하게 턱을 괸 채로 장자로 들어오는 햇살이 얄팍해지는 데에만 울적한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강아지가 죽은 이후로 안 그래도 침울하던 오렌의 마음은 발작적인 우울에 휩싸이기 쉬워졌다. 오렌은 강아지는 물론이요 아직도 알 수 없는 남자의 거처나 심지어는 얼굴도 모르는 마키노의 아내마저 고민거리로 여겼다. 또 그와 동시에 그쯤부터 이따금 보고 있는 묘한 환각도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한 번은 방에 들어와 겨우 잠에 들었더니 대뜸 무언가에 억눌린 것처럼 잠옷 소매가 무거워졌다. 강아지는 아직 살아 있을 적에 그녀의 이불 위로 눕곤 했다――마침 그와 비슷한 부드러운 무게감이었다. 오렌은 곧장 베개맡에서 살짝 고개만 들어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불의 격자 모양이 램프 빛에 떠오른 것 이외엔 아무것도 자리해 있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오렌이 거울 앞에서 머리를 고치고 있자니 거울에 비친 그녀의 뒤로 하얀 무언가가 지나갔다. 오렌은 아랑곳 않고 윤기 넘치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그 하얀 물체는 이전과 반대 방향으로 다시 지나갔다. 오렌은 빗을 든 채로 기어코 돌아보고 말았다. 하지만 밝은 방 안에선 생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잘못 본 걸까――그렇게 생각하면서 거울을 보자 잠시 뒤 하얀 물체가 다시 한번 그녀의 뒤를 지나갔다……
또 한 번은 긴 화로 앞에 오렌이 홀로 앉아 있으니 먼 바깥 길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문에 놓인 대나무 잎이 술렁이는 소리에 섞여 단 한 번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도쿄에 온 이후로도 내내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의 목소리임에 분명했다. 오렌은 숨을 죽이듯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봤다. 그때 또 거리서 그리운 남자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그런가 하면 어느 틈엔가 바람에 뒤섞인 개 울음소리로 바뀌어 갔다……
또 한 번은 눈을 뜨자 옆에 있을 리 없는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좁은 이마와 긴 눈썹――전부가 어두운 램프 빛 속에서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왼쪽 눈 끝에 점이 있는가――그런 것마저 비교해 봐도 역시 남자임에 분명했다. 오렌은 신기함보다 기쁨에 가슴이 뛰면서 그대로 남자의 목덜미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잠에서 깬 남자가 시끄럽다는 양 무언가 중얼거린 목소리는 의외로 마키노의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렌은 그 찰나에 술 냄새나는 마키노의 목덜미에 두 손을 매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물며 현실 세계서도 오렌의 마음을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직 소나무도 푸름을 되찾기도 전에, 말로만 듣던 마키노의 아내가 대뜸 찾아온 것이었다.
열둘
마키노의 아내는 하필이면 노파가 심부름을 나갔을 때 찾아왔다. 안내를 구하는 목소리에 놀란 오렌은 도리 없이 힘없는 몸을 일으켜 어두컴컴한 현관으로 나섰다. 그러자 북쪽으로 난 격자문 사이로 현관문의 장식이 보인다――그 사이에선 안경을 쓰고 어깨에 약간 허름한 보자기를 걸친 채 여성이 어두운 얼굴색을 한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자리해 있었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오렌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상대의 정체를 직감했다. 그리고 이 뿌리 힘없는 마루마게에 코몬 하오리를 입은 어딘가 존재감이 옅은 여자 얼굴에 가만히 시선을 주었다.
"저는――"
여자는 잠깐 주저한 후, 역시나 고개를 숙인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마키노의 아내, 타키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오렌이 어물거렸다.
"그런가요, 저는――"
"아뇨,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남편이 늘 신세 지는 듯하니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여자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비꼬는 듯한 기색은 신기하리만치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오렌은 되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인사말을 찾기 어려웠다.
"새해 벽두부터 죄송하지만 사실 오늘은 부탁이 있어서 왔는데――"
"어떤 건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직 방심하지 않은 오렌은 그 '부탁'이란 것도 뭔지 알 거 같았다. 그와 동시에 그걸 꺼낼 경우 답해야 할 불평도 적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마키노의 아내가 조용히 꺼내기 시작한 말을 듣자, 자신의 예상이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아뇨, 부탁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지만――실은 가까운 시일에 온 도쿄가 숲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부디 마키노와 같이 저도 이 집에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이란 건 그것뿐입니다.
상대는 천천히 그런 말을 했다. 마치 자신의 말이 얼마나 미치광이 같은지 전혀 알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렌은 황당한 나머지 역광을 받은 이 음침한 여자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가요? 들여주실 수 있나요?"
오렌은 혀가 굳은 것처럼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느 틈엔가 고개를 든 상대는 가늘고 차가운 눈을 번쩍 뜬 채로 안경 너머의 오렌을 바라보고 있다――오렌은 그 모습에서 모든 게 한순간의 악몽만 같은 꺼림칙한 심정을 느껴야만 했다.
"저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습니다만 만에 하나 길거리에 내앉게 되면 두 아이가 불쌍하잖아요. 부디 성가시더라도 당신 댁에 들여주시지요."
마키노의 아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허름한 보자기에 얼굴을 감추면서 대뜸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오렌도 불쑥 슬퍼졌다. 드디어 김 씨와 만날 수 있다. 기쁘다, 기쁘다――오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봄옷의 무릎 위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몇 분인가 지난 후, 오렌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상대는 이미 돌아간 걸까. 어두컴컴한 북향 현관에는 아무도 자리해 있지 않았다.
열셋
나나쿠사날 밤, 마키노가 오렌의 집에 찾아왔다. 오렌은 곧장 그의 아내가 찾아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마키노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채로 마닐라 담배만 태웠다.
"아내분 분명 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
어느 틈엔가 흥분한 오렌은 눈썹에 짜증을 담아 찌푸리면서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빨리 어떻게 안 하면 돌이키지 못할 거라고요."
"뭐, 그때 생각하자고."
마키노는 담배 연기 속에서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내를 걱정하느니 네 몸이나 먼저 신경 써. 어째 요즘 들어 언제 와도 영 얼굴색이 안 좋아."
"저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좋잖아요――"
"좋을 게 어디 있어."
오렌은 어두워진 얼굴로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불쑥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들더니
"부탁이니까 아내분을 버리지 말아주세요."하고 말했다.
마키노는 당황한 건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당신――"
오렌은 눈물을 감추듯이 소매에 턱을 묻었다.
"아내분은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거예요. 그걸 생각해 주지 않으면 너무 박정한 거잖아요. 우리 고향서도 여자란――"
"그래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았어.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담배를 빠는 것도 잊은 마키노는 아이를 달래듯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이 기운이 안 좋아서 그래――그래그래, 요전 번에는 또 개가 죽었지. 그래서 너도 마음이 무거운 거야. 가까운 시일 내에 어디 좋은 곳 찾으면 이사 가지 않겠어? 그리고 밝게 사는 거야――걱정 마, 이제 열흘만 있으면 하는 일도 때려칠 거고――"
오렌은 마키노가 아무리 위로해도 그 밤 내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나리도 새댁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K에게 여러 질문을 받았을 때, 노파는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병은 그때도 이미 꽤나 도져 있었으니까요. 나리를 비롯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실제로 본가의 새댁이 불쑥 요코아미로 찾아왔을 때도, 제가 심부름에서 돌아와보니 우리 새댁은 현관 앞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으니까요――그런 걸 본가 새댁은 안경 너머로 노려만 보면서 올라 오려 하지도 않았고 정중하게 꾸민 비꼼만 늘어놓았지요."
"안주인이 욕을 듣는데 뒤에서 듣는 저라고 기분이 좋을 리나 있을까요. 하지만 제가 나서면 일이 더 복잡해집니다――왜냐면 저도 사오 년 전에는 본가를 모시던 입장이었으니까요. 본가 새댁이 보는 순간 되려 짜증을 부채질하는 꼴만 될 테지요. 그래서야 곤란하니 저는 본가 새댁이 욕지거리를 한끝에 돌아갈 때까진 현관 후스마 뒤에서 얼굴조차 내미지 않았습니다."
"헌데 새댁은 제 얼굴을 보자마자 '할멈, 본처가 왔어. 나를 보고 비꼼 한 마디 없네. 정말 좋은 사람인가 봐'하고 말씀하시지 뭡니까? 그런가 하면 웃으면서 '듣자 하니 머지않아 온 도쿄가 숲이 된대. 불쌍한 사람, 좀 미쳤나 봐'하는 말까지 하지 뭡니까……"
열넷
하지만 2월이 되고 혼죠 마츠이쵸에 자리한 넓은 2층 집으로 이사한 후로도 오렌의 우울은 걷힐 일이 없었다. 그녀는 노파하고도 마땅히 대화하지 않은 채 방 안에서 철판 타는 소리만 들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이사한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은 어느 밤, 또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온 타미야가 대뜸 오렌의 집을 찾았다. 마침 한 잔 마시기 시작한 마키노는 이 술친구의 얼굴을 보고는 곧장 술병을 기울여줬다. 타미야는 그 술을 받기 전에 셔츠가 보이는 품에서 붉은 통조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오렌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이거 선물입니다, 오렌 부인. 부인께 드리는 거예요."
"이게 뭔데요?"
마키노는 오렌이 인사하는 사이 그 통조림을 들어 보였다.
"그림 붙은 걸 보세요. 물개지요. 물개 고기 통조림입니다――부인께서 기운이 없으신 거 같으니 하나 드리겠습니다. 낳기 전에나 낳은 후에나 부인병엔 탁월하다나요――이건 친구한테 들은 효능인데, 그 녀석이 팔기 시작한 통조림이거든."
타미야는 입술을 핥으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오렌, 물개 고기 같은 걸 먹을 수 있겠어?"
오렌은 마키노의 말에 억지로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타미야는 손을 저으며 곧장 그 대답을 이어갔다.
"괜찮지, 괜찮고 말고――오렌 씨, 이 물개란 녀석은 수컷 한 마리에 암컷 백 마리가 모인답니다. 인간으로 따지면 마키노 씨 같은 경우지요. 그러고 보면 얼굴도 닮은 거 같네요.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마키노 씨다 생각하고――귀여운 마키노 씨다 생각하고 드셔주세요."
"얘가 뭔 소리래."
마키노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수컷 한 마리에――마키노 씨하고 닮았잖아."
타미야는 마맛자국 있는 얼굴에 한껏 웃음을 지어 보이곤 열심히 떠들기 시작했다.
"오늘 내 친구한테――이 통조림 파는 녀석한테 들었는데 물개란 녀석은 수컷끼리 모이면――그렇지, 물개 이야기할 때가 아니지. 오늘은 오렌 씨께 옛날 모습을 보여달라 하기로 했으니까. 어떤가요, 오렌 씨. 지금이야 오렌으로 불리지만 그건 세상을 속이기 위한 가명이지요. 여기선 한 번 토오와야로 가고 싶군요. 오렌 씨하곤――"
"야야, 수컷끼리 모이면 어떻게 되는데? 그쪽을 먼저 듣고 싶은데."
마키노는 성가시단 얼굴을 한 채 위험한 화제서 물개 이야기로 물꼬를 틀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가 바라는 형편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
"수컷끼리 모이면? 수컷끼리 모이면 크게 싸운다나. 그 대신 정정당당히 하지. 마키노 씨처럼 기습하지 않아. 아니, 이거 실례. 못할 말을 해버렸네. 킨칸반노 진쿠레였던가――오렌 씨, 하나 드리지요."
타미야는 얼굴색을 바꾼 마키노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으면서 오렌에게 말을 돌렸다. 하지만 오렌은 꺼림칙할 정도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손 한 번 내밀지 않았다.
열다섯
그날 밤 세 시쯤이 지나, 오렌은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2층 침실을 뒤로하여 어두운 계단을 내려선 손을 더듬으며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서랍에서 면도칼 상자를 꺼냈다.
"마키노, 빌어먹을 마키노."
오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상자 안의 물건을 꺼냈다. 그 박자에 면도칼 냄새가, 잘 갈린 철 냄새가 희미하게 그녀의 코를 스쳤다.
오렌의 마음에는 어느 틈엔가 광폭적인 야생이 감돌고 있었다. 이는 오렌이 몸을 팔기 전까지 험악한 계모와 다투며 저절로 몸에 익힌 야성이었다. 하얀 가루가 본래 피부를 감추듯이 요 몇 년의 생활이 감춰오던 야생이었다………
"마키노, 괴물 같은 자식. 두 번 다시 보나 봐라――"
오렌은 화려한 나가쥬반 소매에 면도칼 하나를 감춘 채 거울 앞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불쑥 어디선가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해, 그만."
오렌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하지만 목소리인 줄 알았던 건 어둠 속에서 초를 세는 시계의 진자 소리인 듯했다.
"그만해, 그만. 그만해."
하지만 계단을 오르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렌은 자리에 선 채 방까지 이어지는 어둠을 들여다봤다.
"누구죠?"
"나야, 나. 나."
목소리는 오렌과 사이좋은 친구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잇시?"
"그래, 나."
"오랜만인걸. 너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
"그만해, 그만."
목소리는 오렌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왜 네가 나를 막는 거야? 죽이면 또 어때?"
"그만해. 살아 있잖아. 살아 있다고."
"살아 있어? 누가?"
그때 긴 침묵이 있었다. 시계는 그 침묵 속에서도 쉬지 않고 진자를 흔들었다.
"누가 살아 있는데?"
한동안 무언이 이어진 후, 오렌이 그렇게 되묻자 목소리는 겨우 그녀의 귀에 그리운 이름을 속삭여줬다.
"김 씨――김 씨, 김 씨."
"그게 정말이야? 사실이라면 기쁘지만――"
오렌은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치만 김 씨가 살아 있다면 왜 나를 보러 오지 않는 거야?"
"와. 올 거야."
"온다니? 언제?"
"내일. 미로쿠지에 보러 올 거야. 미로쿠지에. 내일 밤."
"미로쿠지, 미로쿠지바시 맞지?"
"미로쿠지바시. 밤에 와. 올 거야."
그걸 끝으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가쥬반 하나 입은 오렌은 동트기 전 추위도 모른다는 양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열여섯
오렌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도 2층 침실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네 시쯤이 되어서야 겨우 방을 나서더니 평소보다 힘을 주어 화장을 했다. 그리고 연극이라도 보러 가는 것처럼 상하의 모두 가장 좋은 옷을 입었다.
"뭐 하느라고 그렇게 꾸며?"
그날따라 가게도 가지 않고 오렌의 집에서 뒹굴거리던 마키노가 풍속 화보를 펼친 채로 의아하다는 양 물었다.
"잠깐 갈 데가 있어서요――"
오렌은 거울 앞에서 침착히 오비를 묶었다.
"어딜 가길래."
"미로쿠지바시까지 가요."
"미로쿠지바시?"
마키노는 의아함보다도 불안이 앞서는 듯했다. 오렌은 그게 말로 못 할 유쾌함으로 다가왔다.
"미로쿠지바시에는 왜?"
"왜라고 할까――"
오렌은 힐끔 마키노의 얼굴에 모욕의 시선을 보내면서 조용히 오비도메를 꽂았다.
"걱정은 마세요. 몸 던지러 가는 건 아니니까――"
"헛소리는 하지 말고."
마키노는 다다미 위로 풍속 화보를 털썩 던지고선 불쾌하다는 양 혀를 찼다……
"이래저래 밤 일곱 시쯤 되었다나――"
이제까지의 사정을 이야기한 후, 내 친구 K 의사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오렌은 마키노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혼자서 집을 나섰지. 노파가 걱정돼서 같이 가겠다고 아무리 사정해도 당사자가 마치 아이처럼 혼자 안 가면 죽어버릴 거라 생떼를 부렸다니 도리가 없지. 물론 그렇다고 진짜 오렌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 마키노가 몰래몰래 뒤를 쫓았다나 봐."
"그렇게 밖으로 나와보니 마침 미로쿠지바시 근처에 시장이 열려 있었다는군. 그러니 그 추운 날씨에도 길가가 인파로 곽 찼다나 봐. 오렌의 뒤를 밟기에는 아주 좋았지. 마키노가 바로 뒤를 걸으면서도 들키지 않은 건 필시 이 시장 덕이었을 거야."
"거리 양쪽에는 시장 줄이 쭉 펼쳐져 있었지. 그 칸텔라나 램프 빛에 사탕이니 솜사탕이니 간판이니 두부 가게의 붉은 양산이니 하는 게 좌로 우로 꽉 차있었던 거야. 하지만 오렌은 그런 것에 전혀 눈도 주지 않았어. 단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인파를 헤쳐나갈 뿐이었지. 마키노가 그 뒤를 따라붙는 게 꽤나 힘들었다니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야."
"그러는 사이 미로쿠지바시에 이르자 오렌은 역시나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주위를 둘러다 봤어. 그곳은 강가로 굽어진 곳에 나무 가게만이 이어져 있었지. 시장날이니 대단한 나무는 다 빠져 있었지만 소나무나 전나무 등이 인파도 드문 거리에 생생한 잎을 수놓고 있었지."
"도착한 건 좋은데 대체 뭘 하려는 거지?――마키노는 그렇게 의심하면서 한동안 다리 기둥 뒤에서 오렌의 상태를 지켜보았어. 하지만 오렌은 여전히 멍하니 선 채로 나무들만 바라보았지. 그러니 마키노는 오렌의 뒤로 몰래 다가가 봤어. 그러자 오렌은 기쁘다는 양 몇 번이나 이런 혼잣말을 중얼거리지 뭐겠어?――'숲이 됐구나, 드디어 도쿄가 숲이 됐어'………
열일곱
"그게 전부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K는 더욱이 말을 이어갔다.
"그때 눈같이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우연찮게 인파를 빠져나오더군. 오렌은 대뜸 두 손을 뻗어 그 하얀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나 봐. 그러고는 뭐라 말하는가 했더니 '너도 와준 거니? 여기까지 많이 멀었지? 도중에 산도 있고 커다란 바다도 있었으니 말야. 정말로 너랑 헤어진 이후로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단다. 너를 대신해 기른 개도 얼마 전에 죽어버렸고 말야"하고 꿈꾸는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강아지는 사람 품이 그리웠는지 울기는 고사하고 무는 법도 없었지. 단지 코만 벌렁거리면서 오렌의 손이나 뺨을 핥기만 했다는군."
"마키노도 더 이상 못 봐주겠다 싶었는지 기어코 고개를 내밀었지.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오렌은 김 씨가 올 때까지는 절대 집에 가지 않겠다잖아. 시장이 서있으니 그러는 사이 곧장 주위에 인파가 생겼지. 개중에는 '아이고, 저 여자가 단단히 미쳤구나'하고 소리를 내는 사람마저 있었어. 하지만 개를 좋아하는 오렌으로선 오랜만에 개를 안은 게 조금은 마음을 풀어준 모양이야. 한동안 답이 없는 문답을 거듭한 후에 일단 마키노의 말처럼 잠깐 집에 돌아가기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지. 하지만 막상 돌아가려 해도 구경꾼들이 쉽사리 비켜주지 않았어. 또 오렌은 미로쿠지바시 쪽으로 돌아가려 했지. 그런 걸 달래고 겁박하면서 마츠이쵸에 자리한 집까지 데려왔을 때엔 마키노의 외투 아래엔 땀으로 가득했다는군……"
오렌은 집에 이르자 하얀 강아지를 안은 채로 2층 침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방 안에 이 가련한 동물을 풀었다. 강아지는 작은 꼬리를 흔들며 기쁘다는 양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그건 이전에 기른 개가 오렌의 침상서 다다미 위로 뛰어다닌 것과 같은 걸음이었다.
"어머――"
방이 어두운 걸 떠올린 렌은 의아하다는 양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천장서는 불이 담긴 청보석등 하나가 그녀의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어머, 이쁘기도 해라. 꼭 옛날로 돌아간 거 같네."
오렌은 한동안 멍하니 반짝이는 등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윽고 그 빛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슬프다는 양 두세 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과거의 혜련이 아니야. 지금은 오렌이라는 일본인이지. 김 씨도 만나러 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김 씨만 와주신다면――"
불쑥 고개를 든 오렌은 다시 한번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이제 보니 강아지가 있던 곳에 중국인 하나가 사각 베개에 무릎을 얹은 채로 누워 유유히 아편을 태우고 있지 않던가! 좁은 이마와 긴 눈썹, 그리고 왼쪽 눈꼬리의 점――모두가 긴이 분명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오렌을 보고는 역시나 담뱃대를 문 채로 예전처럼 시원한 눈초리에 작은 웃음을 짓지 않는가?
"보라고, 도쿄가 숲투성이가 되었으니까."
그 말처럼 2층 난간 밖에는 이름 모를 나무가 가지를 뻗고서 자수 모양을 한 새가 몇 마리나 기분 좋게 울고 있었지――오렌은 하룻밤 내내 그리운 김의 옆에 앉아 그런 광경을 바라보았고………
"그 후로 하루 이틀 정도 지나 오렌――본명 맹혜련은 이 K 뇌병원의 환자가 되었지. 듣자 하니 청일전쟁 중에는 웨이하이웨이에 자리한 창관에서 손님을 받았다는데――뭐, 어떤 여자였냐고? 기다려봐. 여기 사진 있으니까."
K가 보인 오래된 사진 속에는 중국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하얀 개와 함께 쓸쓸히 찍혀 있었다.
"이 병원에 온 당시엔 누가 뭐라 해도 결코 중국옷을 벗지 않았어. 더군다나 그 개가 옆에 없으면 김 씨, 김 씨하고 소리를 지르잖아? 생각해 보면 마키노도 참 불쌍해. 혜련을 첩으로 삼았다 해도 제국 군인 신분인 사람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적국인을 본토에 들이려 했으니 남모르는 고생도 많았겠지――뭐, 김은 어떻게 된 거냐고? 참 속 편한 소리 하는군. 나는 개가 죽은 것마저 정말 병이 맞는지 의심하는 판인데."
(다이쇼 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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