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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캇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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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이는 어떤 정신병원 환자――제23호가 누구에게나 떠드는 이야기다. 그는 벌써 서른을 넘었으리라. 하지만 얼핏 보기엔 참으로 젊어 보이는 미치광이다. 그가 반생 동안 겪은 경험은――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는 단지 가만히 두 무릎을 안은 채 이따금 창밖을 바라보며(철창이 자리한 창문 밖에는 갈라진 잎마저 보이지 않는 떡갈나무 한 그루가 눈발에 어두워진 하늘에 가지를 뻗고 있었다.) 원장 S 박사나 나를 상대로 길게 이 이야기를 떠들어 갔다. 물론 몸짓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를테면 그는 "놀랐다"고 말할 때엔 갑자기 그 얼굴을 돌리곤 했다……
 나는 이런 그의 이야기를 꽤나 정확하게 옮겼다. 만약 누군가가 내 필기만으로 부족하다 느낀다면 도쿄 시외 XX마을의 S 정신병원을 찾아보라.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제23호는 먼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방석이 없는 의자를 가리킬 테지. 그리고 우울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이 이야기를 되풀이하리라. 마지막으로――나는 이 이야기가 끝났을 때 그가 지은 얼굴색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바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누구에게나 이렇게 소리치리라――"나가라! 이 악당! 네놈도 어리석고 질투 깊고, 외설적이며, 뻔뻔하고, 자아도취에 빠졌으며 잔혹하고 제멋대로인 동물이구나. 나가라! 이 악당 자식!"
 

하나


 3년 전 여름의 일입니다. 저는 여느 사람처럼 백팩을 짊어지고 그 카미코치의 온천 여관서 호타카야마에 오르려 했습니다. 호타카야마에 오르는 건 아시다시피 아즈사카와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합니다. 저는 이전에 호타카야마는 물론이고 야리가타케에도 오른 적이 있으니 아침 안개가 내려온 아즈사가와의 계곡을 안내자도 두지 않고 올랐습니다. 아침 안개가 내린 아즈사가와의 계곡을――하지만 그 안개는 한사코 개일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되려 깊어져만 갔지요. 저는 한 시간 가량 걸은 후, 한 번은 카미코치의 온천여관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카미코치에 돌아가더라도 안개가 개이는 걸 기다려야 합니다. 또 안개는 시시각각 깊어져만 갈뿐입니다. "에잇, 차라리 올라버려"――그런 생각에 저는 아즈사가와를 벗어나지 않도록 얼룩조릿대를 가로 질러 갔습니다.
 하지만 제 시야를 메우는 건 역시나 깊은 안개뿐입니다. 물론 이따금 안개 안에서 두터운 느티나무나 전나무 가지가 푸른 잎을 드리운 걸 못 본 건 아닙니다. 또 방목된 말이나 소도 대뜸 제 앞에 얼굴을 내밀었지요. 하지만 그런 건 보인가 싶으면 곧 자욱한 안갯속으로 숨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는 사이 다리도 저리기 시작하고 배도 고파졌죠――더군다나 안개에 젖은 등산복이나 이불도 어지간한 무게가 아닙니다. 저는 끝끝내 고집을 꺾고 바위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아즈사가와 계곡을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물가의 바위에 걸터앉아 일단 배를 채우기로 했습니다. 콘비프 캔을 따고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붙이는 등――그러는 사이 이래저래 십 분은 지났을 테지요. 그동안에 한없이 짓궂던 안개도 어느 틈엔가 따스하게 개어 있었습니다. 저는 빵을 베어 물며 잠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봅니다. 시삭은 벌써 한 시 이십 분 가량. 하지만 그보다도 놀라운 건 어딘가 꺼림칙한 얼굴 하나고 둥근 손목시계 유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단 점입니다. 저는 놀라서 돌아봤죠. 그러자――제가 캇파를 본 건 이대까 처음이었습니다. 제 뒤에 자리한 바이 위에 그림과 같은 캇파 한 마리가 한 손엔 자작나무 줄기를 들고 한 손은 눈 위에 얹은 채 신기하다는 양 저를 내려다 보고 있었지요.
 저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캇파도 역시 놀랐는지 눈 위의 손마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는 벌떡 일어나서 바이 위의 캇파를 향해 달려 들었습니다. 또 동시에 캇파도 도망치기 시작했죠. 아니, 아마 도망친 거라 생각합니다. 실은 훌쩍 몸을 피하더니 곧장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거죠. 저는 더더욱 놀라서 얼룩조릿대 안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자 캇파는 몸을 낮춘 채로 2, 3 미터 떨어진 곳에서 저를 돌아보고 있지 뭡니까. 그건 신기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의외였던 건 캇파의 몸이 가진 색이었습니다. 바위 위에서 저를 보던 캇파는 회색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이 녹색으로 변해 있었죠. 저는 "젠장!"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다시 한 번 캇파를 향해 달려 들었습니다. 그야 물론 캇파는 도망쳤죠. 저는 그로부터 삼십 분 가량 얼룩조릿대를 가르고 바위를 뛰어 넘으며 무작정 캇파를 쫓았습니다.
 캇파도 발이 빨라서 결코 원숭이 따위에게 밀리는 법이 없습니다. 저는 무작정 쫓는 사이에 몇 번이나 그 모습을 놓쳤지요. 그뿐 아니라 발이 미끄러져 구른 일도 곧장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꺼운 가지를 뻗은  커다란 상수리나무 한 그루 아래에 이르자 다행히도 방목된 소 한 마리가 캇파의 길을 막고 있었죠. 심지어 그건 뿔이 두텁고 눈이 충혈된 숫소였습니다. 캇파는 이 숫소를 보더니 무어라 비명을 지르며 한 층 더 높은 얼룩조릿대 안으로 공중제비하듯이 뛰어 들었습니다. 저는――저도 '잡았다'하고 생각했으니 대뜸 그 뒤를 쫓았지요. 그러자 그곳엔 제가 모르는 구멍이라도 뚫려 있었던 걸 테지요. 저는 미끄러운 캇파의 등에 겨우 손가락 끝이 닿는가 싶었더니 곧장 깊은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이런 위기일발의 상황에도 전혀 엉뚱한 걸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앗'하고 생각하는 박자에 그 카미코치의 온천 여관 옆에 '캇파 다리'란 다리가 있는 걸 떠올렸습니다. 그리고――그 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저는 그저 눈앞에 번개와 비슷한 걸 느끼고 어느 틈엔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겨우 정신이 들고 보니 저는 대자로 뻗은 채로 수많은 캇파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분 아니라 두터운 부리 위에 코안경을 걸친 캇파 한 마리가 제 옆에 무릎 꿇은 채로 제 가슴에 청진기를 얹고 있었죠. 그 캇파는 제가 눈을 뜬 걸 보고 제게 '조용히하라'는 손짓을 하고는 뒤에 있는 다른 캇파에게 Quax, quax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캇파 두 마리가 들것을 갖고 걸어왔죠. 저는 그 들것에 얹힌 채 수많은 캇파 무리 사이를 지났습니다. 제 양옆으로 펼쳐진 거리는 긴자 거리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느티나무 뒤로 자리한 여러 가게가 천막을 펼쳐 놓았고, 또 가로수를 둔 길서는 자동차가 몇 대나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저를 실은 들것은 골목으로 도는가 싶더니 어떤 집 안으로 향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그 코안경을 찬 캇파의 집――척이라는 의사의 집이었지요. 척은 저를 침대 위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투명한 물약 한 잔을 주었지요. 저는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척의 행동을 따랐습니다. 실제로 꿈쩍도 하지 못할 정도로 온몸이 아팠으니까요.
 척은 하루에 두세 번은 반드시 저를 진찰해주었습니다. 또 사흘에 한 번은 저를 처음 발견한 캇파――백이라는 어부도 찾아왔습니다. 캇파는 우리 인간이 캇파를 아는 것보다 훨씬 인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 인간이 캇파를 포박하는 일보다 캇파가 인간을 포박하는 일이 많기 때문일 테죠. 포박이란 말은 제쳐두어도 우리 인간은 저 말고도 이따금 캇파 나라로 오곤 했답니다. 그뿐 아니라 평생을 캇파 나라서 산 사람도 적지 않았다지요. 왜 그러냐고 한 번 물어 보세요. 우리는 단지 캇파가 아니고 인간이란 특권만으로 일하지 않고 먹고 있으니까요. 실제로 백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젊은 도로인부는 우연히 이 나라에 온 후에 암컷 캇파를 아내로 들여 죽을 때까지 살았다지요. 물론 그 암컷 캇파는 이 나라의 제일의 미인이었던 이상 남편인 도로인부를 꾀했다기도 묘하기 짝이 없지요.
 저는 일주일 가량 지난 후, 이 나라의 법률에 따라 '특별 보호 주민'으로서 척의 옆집서 살게 되었습니다. 작지만 정말 산뜻한 집이었죠. 물론 이 나라 문명은 우리 인간 나라의 문명――적어도 일본 문명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거리에 접한 객간 구석에는 작은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고 또 벽에는 그림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단지 중요한 집을 시작으로 테이블이나 의자가 캇파의 키에 맞춰져 있어 아이 방에 놓인 듯한 것만은 불편했지요.
 저녁이 되면 저는 항상 그 방에 척이나 백을 들여 캇파의 말을 배웠습니다. 아니, 둘뿐일까요. 특별 보호 주민이었던 제게는 모두가 호기심을 지녔습니다. 매일 혈압을 재로 일부러 척을 부르는 게일이란 유리 회사 사장도 역시 제 방을 찾곤 했지요. 하지만 첫 보름 동안 가장 친하게 지낸 건 역시 백이란 어부였습니다.
 어느 뜨뜻한 날의 저녁이었습니다. 저는 방 테이블 안에서 어부 백과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백은 무슨 생각인지 불쑥 입을 다물더니 커다란 눈을 한 층 더 크게 뜨고 저를 보았습니다. 저는 물론 묘하지 싶어 "Quax, Bag, quo quel, quan?"하고 말했습니다. 이건 일본어로 번역하면 "이봐, 백 왜 그래?"하는 뜻이죠. 하지만 백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날름 혀를 내밀고는 마치 개구리가 뛰는 것처럼 달려들 기미를 보였습니다. 저는 더욱 꺼림칙해져 가만히 의자서 일어나 한달음에 문으로 뛰었습니다. 그때 마침 다행히도 의사 척이 찾아왔지요.
 "백, 뭐 하는 거야?"
 척은 코안경을 쓴 채로 백을 노려다 보았습니다. 그러자 백은 겁을 먹었는지 몇 번이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척에게 사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죄송해서 어쩌죠. 실은 나리가 무서워하는 게 재밌어서 그만 장난을 쳐버렸네요. 나리께서도 용서해주십쇼."
 


 저는 이 이야기를 이어가기 앞서 캇파를 좀 더 설명해둬야겠습니다. 캇파는 아직까지도 실존하는지 의문시 되는 동물이죠. 하지만 저 자신이 그들 사이서 산 이상 더 의심할 여지가 없을 터입니다. 그럼 또 어떤 동물인가. 머리에 잛은 털이 있는 건 물론이요 손발에 갈퀴가 있는 것도 "수호고략水虎考略"에 나오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키도 고작해야 일 미터가 될까 말까할 정도겠죠. 체중은 의사 척의 말에 따르면 20 파운드부터 30 파운드까지――드물게 오십 파운드 정도 되는 큰 캇파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머리 한 가운데에는 타원형 접시가 놓여 있고 또 그 접시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딱딱해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나이를 먹은 백의 접시는 젊은 척의 접시에 비하면 촉감이 다르지요. 하지만 가장 신기한 건 캇파의 피부색일 겁니다. 캇파는 우리 인간처럼 일정한 피부색을 지니지 않습니다. 듣자하니 주위 색과 같은 색으로 바뀐다나요――이를 테면 풀속에 있을 때엔 풀처럼 녹색으로 바뀌고 바위 위에 있을 때엔 바위처럼 회색으로 변합니다. 이는 물론 캇파만 아니라 카멜레온도 그렇죠. 혹은 캇파는 피부조직 위에 카멜레온에 가까운 무언가를 지닌 걸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발견했을 때 사이고쿠의 캇파는 녹색이고 토호쿠의 캇파는 붉다는 민속학상의 기록을 떠올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백을 뒤쫓을 적에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게 된 것도 떠올렸죠. 심지어 캇파는 피부 아래에 어지간히 두꺼운 지방을 지녔는지 이 지하 나라의 온도는 비교적 낮음에도 불구하고(평균 화씨 50도 전후입니다.) 옷이란 걸 알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어떤 캇파든 안경을 쓰거나 담배 상자를 들고 다니거나 주머니를 차고 다닐 겁니다. 하지만 캇파는 캥거루처럼 배에 주머니가 있으니까요. 그런 걸 넣는 게 딱히 불편하지 않습니다. 단지 제가 이상했던 건 허리춤 주변까지 덮지 않는단 겁니다. 저는 어느 날 왜 그런 습관이 있냐 백에게 물었지요. 그러자 백은 한사코 껄껄껄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나는 그쪽이 가리고 다니는 게 이상한데"하고 대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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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천천히 캇파가 쓰는 일상 언어를 익혔습니다. 따라서 캇파의 풍속이나 습관도 스며들게 되었지요. 개중에서도 가장 신기했던 건 캇파는 우리 인간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걸 우습게 여깁니다. 또 동시에 우리 인간이 우습게 여기는 걸 진지하게 생각하죠――뒤죽박죽인 겁니다. 이를테면 우리 인간은 정의나 도덕을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캇파는 그런 말을 들으면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트립니다. 즉 그들의 해학 개념은 우리 해학 개념과 기준부터 다른 셈입니다. 저는 어느 날 의사 척과 산아제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척은 입을 크게 벌리며 코안경이 떨어질 정도로 웃더군요. 저는 물론 화가 나서 뭐가 우습냐고 물었습니다. 척의 대답은 대개 이랬다고 기억합니다. 자세한 부분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요. 그럴만한 게 그 시절의 저는 아직 캇파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부모님의 형편만 생각하는데 우습지 않나요? 너무나도 제멋대로잖아요."
 대신 우리 인간 입장에서 보면 캇파의 출산만큼 우스운 것도 없습니다. 실제로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의 아내가 출산하는 걸 보러 가게 됐습니다. 캇파도 출산할 때는 우리 인간과 다를 바가 없죠. 역시나 의사나 산파의 도움을 받아 출산합니다. 하지만 출산할 적에 아버지가 전화라도 하듯이 어머니의 생식기에 입을 얹고는 "이 세계에 태어날지 잘 생각하고 대답하거라"하고 큰 목소리로 묻습니다. 백 또한 무릎을 꿇고서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이렇게 물었죠.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소독용 물약으로 가글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조금 기분이 상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정신병을 물려받는 것만으로도 고생이니까요. 그런 데다 저는 캇파란 존재를 잘못됐다 믿고 있습니다."
 백은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멎쩍다는 양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하지만 옆에 참석해 있던 산파는 곧장 아내분의 생식기에 두터운 유리관을 꽂고 무언가 액체를 주사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분은 안도한 것처럼 큰 한숨을 내쉬었지요. 또 동시에 이제까지 컸던 배는 수소 가스를 뺀 풍선처럼 작아졌습니다.
 이런 대답을 할 정도이니 어린 캇파는 태어나자마자 걷고 말할 줄 알지요. 척의 이야기론 출산 26일만에 신의 유무를 두고 강연한 아이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아이는 두 달도 안 되어 죽었다지만요.
 출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제가 이 나라에 와서 세 달째에 우연히 마을 구석서 발견한 커다란 포스터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 커다란 포스터 아래에는 나팔을 부는 캇파나 검을 가진 캇파 등이 열둘에서 열세 마리 가량 그려져 있었습니다. 또 위에는 캇파가 쓰는 시계 태엽과 닮은 나선 문자가 한 가득 적혀 있었죠. 이 나선 문자를 번역하면 대개 아래와 같은 뜻이 됩니다. 이도 혹은 자세한 부분은 다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저로선 저와 함께 걸은 랩이란 캇파 학생이 큰목소리로 읽어준 말을 하나하나 노트에 기록했습니다.

유전적 의용대를 모집한다!!!
건전한 남녀 캇파여!!!
나쁜 유전자를 박멸하기 위해
불건전한 남녀 캇파와 결혼하하라!!!

 저는 물론 그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랩에게 이야기해주었지요. 그러자 랩뿐일까요. 포스터 근처에 있던 캇파들은 하나 같이 깔깔 웃었습니다.
 "그런 일이 없어요? 당신 이야기에 따르면 당신들도 역시 우리처럼 하고 있지 싶은데요. 당신은 부잣집 아들이 여종에게 반하거나 부잣집 아가씨가 운전수에게 반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모두 무의식적으로 나쁜 유전자를 박멸하기 위함입니다. 애당초 당신이 이야기한 당신들 인간 의용대보다도――철도 하나를 뺏기 위해 서로를 죽이려 드는 의용대 말이죠――그런 의용대에 비하면 우리 의용대는 숭고하다 싶은데요."
 랩은 진지하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터운 배만은 시종 파도치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웃기는 고사하고 황급히 어떤 캇파를 붙잡으려 했죠. 그 캇파는 제가 방심한 틈을 노려 제 만년필을 훔치려 했던 겁니다. 하지만 피부가 매끈한 캇파는 쉽게 잡을 수 없습니다. 그 캇파도 훌쩍 빠져나가자마자 황급히 뜀박질했습니다. 마치 모기처럼 야윈 몸을 휘청이면서요.
 

다섯


 저는 이 랩이란 캇파에게도 백만큼이나 신세를 졌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건 톡이란 캇파를 소개 받은 일이죠. 톡은 캇파 시인입니다. 시인이 머리를 길게 기르는 건 우리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는 이따금 심심풀이로 톡의 집에 놀러갔습니다. 톡은 항상 좁은 방에 고산식물 화분을 늘어 놓고 시를 쓰거나 담배를 태우는 등 참으로 느긋하게 지냈습니다. 또 그 방구석에는 암컷 캇파 한 마리가(톡은 자유 연애자로 아내를 두지 않았습니다.) 뜨개질 따위를 하고 있었죠. 톡은 제 얼굴을 보곤 항상 작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물론 캇파가 작게 웃는 일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닙니다. 저도 당초엔 되려 꺼림칙하게만 느꼈죠.)
 "아, 잘 왔어. 뭐, 그 의자에라도 앉게나."
 톡은 곧잘 캇파의 생활이니 캇파의 예술이니 하는 걸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톡이 믿는 바에 따르면 여타 캇파의 생활만큼 바보 같은 것도 없다나요. 부모자식, 부부, 형제 같은 건 서로를 괴롭히는 걸 유일한 즐거움 삼아 함께 산다고 생각하더군요. 특히 가족 제도란 건 정말 어처구니없기 짝이 없답니다. 한 번은 창밖을 가리키고는 "얼마나 바보 같은지 보게나!"하고 토해내듯 말했습니다. 창밖 거리서는 아직 젊은 캇파 한 마리가 부모로 보이는 캇파를 시작으로 일곱여덟 마리의 암컷수컷 캇파를 목 주위에 주렁주렁 단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걷고 있었죠. 하지만 저는 젊은 캇파의 희생 정신에 감탄하여서 되려 그 기특함을 칭찬하였습니다.
 "흥, 자네는 이 나라서도 시민이 될 자격을 갖고 있군. ……그나저나 자네는 사회주의자인가?"
 저는 물론 qua(이는 캇파가 쓰는 말로 "그렇다"는 뜻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범부를 위해 천재 하나를 희생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단 뜻이로군."
 "그럼 자네는 무슨 주의자이지? 누가 톡의 신조는 무정부주의라 말했는데……"
 "나 말인가? 나는 초인(직역하면 초캇파죠)주의일세."
 톡은 당당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톡은 예술서도 독특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죠. 톡이 믿는 바에 따르면 예술은 무엇에도 지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죠. 따라서 예술가란 무엇보다 먼저 선악을 초월한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게 꼭 톡 한 마리만의 의견은 아닙니다. 톡의 동료 시인들은 대개 같은 의견을 지닌 모양이죠. 실제로 톡과 함께 이따금 초인 클럽에 놀러 가곤 했습니다. 초인 클럽에 모인 건 시인, 소설가, 희곡가, 비평가, 화가, 음악가, 조각가, 예술상의 아마추어 등이 있었죠. 하지만 하나 같이 초인입니다. 그들은 전등불이 밝은 살롱서 항상 쾌활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뿐 아니라 이따금 그들의 초인적 면모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조각가는 커다란 큰 양치식물 화분 사이에 젊은 캇파를 붙들고 종일 남색을 즐겼습니다. 또 어떤 암컷 소설가는 테이블 위에 올라서서 압생트 예순 잔을 마셨습니다. 물론 이는 예순여섯 번째 잔을 마실 적에 테이블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바로 죽어버렸습니다만.
 저는 어느 이쁜 달이 뜬 밤, 팔짱을 낀 시인 톡과 초인 클럽서 돌아왔습니다. 톡은 여느 때 이상으로 침울해하여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불빛이 감도는 작은 창문 앞을 지났습니다. 창문 너머서는 부부로 보이는 수컷암컷 캇파 두 마리가 세 마리 아이 캇파와 함께 저녁 만찬을 즐기고 있었죠. 그러자 톡은 한숨을 내쉬며 대뜸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초인적 연애가라 생각하는데 저런 가정 모습을 보면 역시 부러움을 느낀다네."
 "하지만 그건 모순 아닌가?"
 하지만 톡은 달빛 아래서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작은 창문 너머를――평화로운 다섯 마리 캇파들의 만찬 테이블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대답했지요.
 "저기 있는 계란 후라이는 연애보다 위생적이니 말이야."
 

여섯


 실제로 캇파의 연애는 우리 인간의 연애와 꽤나 경우가 다릅니다. 암컷 캇파는 마음에 든 수컷 캇파를 발견하면 사로잡는데 어떤 수단도 거리끼지 않지요. 가장 정직한 암컷 캇파는 수컷 캇파의 뒤를 쫓습니다. 저는 실제로 미치광이처럼 수컷 캇파를 쫓던 암컷 캇파를 보았지요. 아뇨, 그뿐일까요. 젊은 암컷 캇파는 물론이요 그 캇파의 부모님이나 형제까지 함께 쫓아갑니다. 수컷 캇파는 비참하지요. 그도 그럴 게 한참 도망치는 걸로 모자라 운 좋게 잡히지 않더라도 두세 달 뒤면 잠자리에 끌려가고 마니까요. 저는 어느 날 집에서 톡의 시집을 읽고 있었죠. 그러더니 그 랩이란 학생이 제게 달려오지 뭡니까. 랩은 우리 집으로 굴러 들어와 바닥에 드러눕더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큰일이야! 끝내 안겨지고 말았어!"
 저는 곧장 시집을 던지고 문을 잠궜습니다. 하지만 열쇠구멍으로 들여다보니 노란 분말을 얼굴에 칠한 키 작은 암컷 캇파 한 마리가 아직 문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랩은 그날 이후로 몇 주 동안 제 방에서 잤죠. 그뿐 아니라 랩의 부리는 어느 틈엔가 썩어 떨어져 버렸습니다.
 물론 또 때로는 암컷 캇파를 열심히 쫓는 수컷 캇파가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쫓을 수밖에 없도록 암컷 캇파가 꾸미는 거지요. 저는 역시나 미치광이처럼 암컷 캇파를 쫓는 수컷 캇파를 발견했습니다. 암컷 캇파는 도망치는 사이에도 일부러 멈추거나 네 발로 기곤 했습니다. 더군다나 좋은 타이밍을 엿봐서는 마치 실망이라도 했다는 양 쉽게 잡히고 말죠. 제가 발견한 수컷 캇파는 암캇 캇파를 안더니 한동안 그곳에 누워 있었습니다. 하지만 겨우 일어난 걸 보니 실망이라 해야 할까, 혹은 후회라 해야 할까 어찌 되었든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낫습니다. 이것도 제가 발견한 작은 수컷 암컷 한 마리 이야기인데, 그 녀석도 마찬가지로 암컷 캇파를 쫓아다녔죠. 암컷 캇파는 역시나 유혹적 도주를 했습니다. 그러자 길 반대편서 커다란 수컷 캇파 한 마리가 콧김을 내뿜으며 걷지 뭡니까. 암컷 캇파는 모종의 박자로 그 수컷 캇파를 보고는 "살려주세요! 저 캇파가 저를 죽이려 해요!"하고 긴박한 목소리를 내질렀죠. 물론 커다란 캇파는 작은 캇파를 붙잡아 거리 한복판에 쓰러트렸습니다. 작은 캇파는 갈퀴 달린 손으로 두세 번 허공을 휘저으며 기어코 죽어버렸습니다. 그때 암컷 캇파는 히죽히죽 웃으며 커다란 캇파의 목덜미에 매달려 버렸습니다.
 제가 알던 수컷 캇파는 모두 짜기라도 한 것처럼 암컷 캇파에게 쫓겼습니다. 물론 처자식을 지닌 백도 쫓겼지요. 그뿐 아니라 두세 번은 잡혔습니다. 단지 맥이란 철학자만은(그 톡이란 시인 옆에 사는 캇파입니다.) 한 번도 잡힌 적이 없습니다. 이건 무엇보다 맥만큼 추한 캇파가 없었기 때문일 테죠. 또 하나는 맥만은 별로 거리에 나서지 않고 항상 집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이따금 이 맥의 집에도 찾았습니다. 맥은 항상 어두컴컴한 방에 일곱빛 유리 랜턴을 빛내며 다리가 높은 책상에 앉아 두터운 책만 읽었습니다. 저는 어느 날 맥과 캇파의 연애를 논했지요.
 "왜 정부는 암컷 캇파가 수컷 캇파를 쫓는 걸 좀 더 엄중히 단속하지 않는 건가요?"
 "가장 큰 이유는 관사 안에 암컷 캇파가 적다는 점이죠. 암컷 캇파는 수컷 캇파보다 질투심이 강하니까, 암컷 캇파 관사만 심으면 수컷 캇파는 지금보다 덜 쫓기며 살 수 있겠죠. 하지만 그 효력도 크지는 않을 겁니다. 왜 그런지 아시나요? 관사끼리도 암컷 캇파가 수컷 캇파를 쫓을 테니까요."
 "그럼 당신처럼 사는 게 가장 행복하겠군요."
 그러자 맥은 의자에서 일어나 제 양손을 쥔 채로 한숨과 함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야 우리 캇파가 아니니 이해를 못하실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저희는 그 무서운 암컷 캇파에게 쫓기고 싶은 생각도 들곤 합니다."
 

일곱


 저는 또 시인 톡과 이따금 음악회를 찾곤 했지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게 세 번째로 들으러 간 음악회입니다. 물론 회장 분위기는 일본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역시나 점점 높아지는 관객석에 암컷수컷 캇파가 삼사백 마리 가량이 앉죠. 하나 같이 팜플렛을 손에 든 채로 일사불란히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 번째 음악회 때엔 톡이나 톡의 암컷 캇파 이외에도 철학자 맥과 함께 가장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첼로 독주가 끝나고 묘하게 눈이 가는 캇파 한 마리가 적당히 악보를 들고서 단상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 캇파는 팜플렛에 적힌 명성 높은 클래백이란 작고가입니다. 팜플렛에 적힌――아니, 팜플렛을 볼 것도 없습니다. 클래백은 톡이 소속한 초인 클럽 회원이니 저도 얼굴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Lied――Craback"(이 나라 팜플렛도 대개 독일어로 적혀 있었습니다.)
 클래백은 성대한 박수를 받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고는 역시나 대충 자작 리드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톡의 말에 따르면 클래백은 이 나라가 낳은 음악가 중에서도 전무후무한 천재라 합니다. 저는 클래백의 음악은 물론이요 취미로 쓰는 서정시에도 관심이 있었으니 커다란 활만 같은 피아노 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톡이나 맥 또한 황홀해한 건 제 이상이었을 테지요. 하지만 그 아름다운(적어도 캇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암컷 캇파만은 팜플렛을 쥔 채로 이따금 자못 짜증난다는 양 긴 혀를 날름거렸습니다. 맥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 십 년 전에 클래백을 잡다 실패하여 아직도 이 음악가를 원수로 보기 때문이라 합니다.
 클래백은 온몸에 열정을 담아 싸우듯이 피아노를 두들겼습니다. 그러자 대뜸 회장 안에서 번개 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연주정지"란 목소리가 울립니다. 저는 이 목소리에 움찔해서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잘못볼 수도 없습니다. 가장 뒷자리에 위치한 키만 큰 순사지요. 순사는 제가 돌아봤을 때, 유유히 자세를 낮춘 채로 다시 한 번 앞전번보다 큰 목소리로 "연주정지"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대혼란입니다. "경관의 횡포다!", "클래백, 쳐라! 연주해!", "병신!", "씨발!", "빠져 있어!", "지지 마라!"――그런 소란 속에서 의자는 쓰러지고 팜플렛은 날아다니고 더군다나 누가 던졌는지 사이더 빈병이나 돌멩이, 먹다 만 오이마저 떨어지지 뭡니까. 저는 너무 놀라 톡에게 그 이유를 물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톡도 흥분하였는지 의자 위에 벌떡 일어나서 "클래백, 쳐라! 연주해!"하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톡의 암컷 캇파도 어느 틈엔가 전의를 잊었는지 "경관의 횡포다"하고 소리치는 건 톡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는 도리 없이 맥을 향해 "어떻게 된 거예요?"하고 묻기로 했죠.

 "이거요? 이건 이 나라선 자주 있는 일입니다. 본래 그림이나 문예 같은 건……"
 맥은 무언가가 날아올 때마다 살짝 자세를 낮추며 여전히 조용히 설명했다.
 "본래 그림이나 문예는 누가 봐도 뭘 표현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니까요. 이 나라선 결코 발매 금지나 전시 금지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대신 연주를 금지하죠. 그렇지 않나요? 음악이란 아무리 풍속을 흐트러놓는 곡이라도 귀가 없는 캇파는 알 수 없으니까요."
 "그럼 저 순사는 귀가 있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의문이네요. 아마 지금 선율을 듣는 사이에 아내와 같이 잘 때의 심장 고동이라도 떠올린 걸 테죠."
 그러는 동안에도 소란은 커져만 갈 뿐입니다. 클래백은 피아노를 마주한 채 담담히 우리를 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담담하더라도 온갖 게 날아오는 건 피할 수밖에 없지요. 요컨대 2, 3초마다 모처럼의 태도도 달라지는 셈입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대부분은 대음악가의 위엄을 고수하며 가는 눈을 굉장히 빛냈습니다. 저는――저도 물론 위험을 피하기 위해 톡을 방패로 삼았지요. 하지만 역시나 호기심은 이기지 못하고 열심히 맥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검열은 너무 난폭한 일 아닙니까?"
 "뭘요, 어떤 나라의 검열보다 되려 진보된 정도이죠. 이를테면 XX를 보시지요.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마침 그렇게 말하던 참입니다. 맥은 아쉽게도 정수리에 빈병이 떨어져 quack(이건 단순한 감탄사입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는 기어코 정신을 잃고 말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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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저는 유리 회사 사장 게일에게 신비한 호의를 지녔습니다. 게일은 자본가 중의 자본가지요. 아마 이 나라의 캇파 중에서도 게일 만큼 커다란 배를 가진 캇파는 한 마리도 없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만여지를 닮은 아내나 오외와 닮은 아이를 좌우로 둔 채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거의 행복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따금 재판관 펩이나 척을 따라 게일가의 만찬에 참석하곤 했죠. 또 게일의 소개장을 들고 게일이나 게일의 친구와 조금 관계가 있는 여러 공장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여러 공장 중에서도 제가 놀란 건 서적 제조 회사 공장이었습니다. 저는 젊은 캇파 기술사의 공방 안으로 들어가 수력전기로 움직이는 커다란 기계를 보았을 때, 새삼스럽게 캇파 나라의 진보된 기계 공업에 감탄했습니다. 듣자 하니 그곳에선 일 년에 칠백만 부의 책을 만든다고 하지요. 하지만 제가 놀란 건 책의 부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만한 책을 만드는데 조금도 수고가 들지 않는 점입니다. 그도 그럴 게 이 나라서 책을 만들려면 기계의 누두형 입구에 종이와 잉크와 회색 분말만 넣으면 충분하니까요. 그러한 원료는 기계 안으로 들어가면 거의 오 분도 걸리지 않아 국판, 사육판, 국반판 같은 무수한 책이 나오게 됩니다. 저는 폭포처럼 떨어지는 책을 바라보며 몸을 살짝 돌린 캇파 기술사에게 그 회색 분말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기술사는 검게 빛나는 기계 앞에 서서 별 거 아니라는 양 대답했습니다.
 "이거요? 이건 나귀의 뇌수입니다. 네, 한 번 건조하여 분말로 만든 거죠. 시가는 1톤에 2, 3전 할까요."
 물론 이런 공업상의 기적은 서적 제조 회사에만 일어난 게 아닙니다. 그림 제조 회사서도 음악 제조 회사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났죠. 또 게일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나라선 한 달에 평균 칠팔백 종의 기계가 새로 제작되어 뭐든지 사람손을 거치지 않고 척척 대량생산이 이뤄진다 합니다. 따라서 또 직공이 해고 되는 것도 사오만 마리나 된다지요. 그런 주제에 이 나라선 매일 아침 신문을 읽어도 단 한 번도 차업이란 글자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게 묘해서 어느 날 펩이나 척과 게일가 만찬에 초대받은 기회에 왜냐고 물어 봤지요.
 "그거야 모두 먹어버리니까요."
 식후 담배를 문 게일은 참으로 적당히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먹어버린다'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러자 코안경을 찬 척이 제가 의아해하는 걸 느꼈는지 옆에서 끼어들어 설명해주었습니다.
 "직공을 전부 죽여서 고기를 식료로 쓰는 거지요. 여기 놓인 신문을 보세요. 이번 달은 마침 육만사천칠백육십 구 마리의 직공이 해고되었으니 그만큼 고기 가격도 떨어졌잖아요."
 "직공이 묵묵히 죽어주나요?"
 "그야 소란을 떨어봐도 도리가 없지요. 직공 도살법이 있으니까요."
 이건 소귀나무 화분 뒤에서 씁쓸한 표정을 지은 펩의 말입니다. 저는 물론 불쾌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게일은 물론이고 펩이나 척도 당연하다 여기는 듯했죠. 실제로 척은 웃으면서 비웃듯이 제게 말했지요
 "요컨대 아사하거나 자살하는 번거로움을 국가가 줄여주는 거죠. 유해가스를 살짝 뿌리는 정도니 별로 고통스럽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고기를 먹는 건……"
 "농담 마시죠. 맥이 들으면 아마 대폭소할 겁니다. 그쪽 나라서도 제4계급 소녀들은 매춘부가 되지 않나요? 직공 고기를 먹는 거에 분노하는 건 감상주의지요."
 이런 문답을 듣던 게일은 가까운 테이블 위에 있던 샌드위치 접시를 권하며 쾌활히 말했습니다.
 "어때요? 하나 드시겠습니까? 이것도 직공 고기지만요."
 저는 물론 질색을 했습니다. 아니, 그뿐일까요. 펩이나 척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게일가의 손님방을 뛰쳐나왔습니다. 그건 마침 집들 위로 별도 보이지 않는 흐린 밤이었죠. 저는 그 어둠 속에서 제가 사는 방으로 돌아가며 끝없이 구토를 했습니다. 밤눈으로도 하얗게 흐르는 게 보이는 구토를요.
 

아홉


 하지만 유리 회사 사장 게일은 사람 좋은 캇파임은 분명합니다. 저는 이따금 게일과 함께 게일이 속한 클럽에 가서 유쾌한 밤을 보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클럽이 톡이 속한 초인 클럽보다 훨씬 마음 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게일의 이야기는 철학자 맥의 이야기 같은 깊이는 없더라도 제게 새로운 세계를――넓은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게일은 언제나 순금 수저로 커피 찻잔을 저으며 쾌활하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느 안개가 깊은 밤, 저는 겨울 장미를 꽂은 꽃병을 주위에 둔 채 게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분명 방 전체는 물론이요 의자나 테이블에도 하얀 바탕 위에 얇은 금테두리를 두른 분리파풍 방으로 기억합니다. 게일은 평소보다 의기양양히 모시를 지은 채로 마치 그쯤 천하를 얻은 Quorax당 내각 이야기 등을 했습니다. Quorax는 의미 없는 감탄사니까 "아이고" 정도로 번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캇파 모두의 이익"을 표어로 삼는 정당이었죠.

 "Quorax당을 지배하는 자는 명성 높은 정치가 롯페지요. '정직함은 최고의 외교이다'라고 비스마르크가 말했던가요. 하지만 롯페는 내정에서도 정직함을 가장 높게 생각했죠……"

 "하지만 롯페의 연설은……"
 "뭐, 끝까지 들어보세요. 그 연설은 확실히 모조리 거짓말이었죠. 하지만 거짓말이란 걸 누구나 알고 있으니 필시 정직함과 다를 바가 없지요. 그런 걸 전부 거짓말이라 하는 건 당신들만의 편견입니다. 우리 캇파가 당신들처럼……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나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롯페입니다. 롯페는 Quorax당을 지배하고 있죠. 또 그 롯페를 지배하는 건 Pou-Fou 신문의 '이 푸・후'란 역시나 의미 없는 감탄사입니다. 굳이 번역을 하자면 '응' 정도 될까요.) 사장 퀴퀴입니다. 하지만 퀴키도 자신의 주인은 아니지요. 퀴퀴를 지배하는 건 당신 앞에 있는 게일이니까요."

 "하지만――이건 실례일지 모르는데 Pou-Fou 신문은 노동자의 편을 드는 신문이잖습니까. 그 사장인 퀴퀴가 당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건……"

 "Pou-Fou 신문은 물론 노동자편이지요. 하지만 기배를 지배하는 건 퀴퀴입니다. 심지어 퀴퀴는 이 게일의 후원을 받고 있고요."

 게일은 여전히 미소지으며 순금 수저를 가지고 놀았죠. 저는 이런 게일을 보자 게일 자신이 밉기보다도 Pou-Fou 신문의 기자들에게 동정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게일은 제 무언서 이런 동정을 느꼈는지 배를 크게 부풀리며 말했습니다.

 "무얼, Pou-Fou 신문 기자들도 전부 노동자의 편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캇파란 누구의 편을 들기 전에 먼저 자기자신의 편을 드니까요……하지만 더욱 성가신 건 게일 본인마저 타인의 지배를 받는단 점입니다. 당신은 그게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제 아내지요. 아름다운 게일 부인 말입니다."

 게일은 큰 목소리로 웃었습니다.
 "그건 행복한 일일 테죠."
 "어찌 됐든 저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당신 앞이니까――갓파가 아닌 당신 앞이니까 마음 편히 떠들 수 있는 거죠."
 "그럼 Quorax 내각은 게일 부인이 지배하는 셈이군요."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죠……하지만 칠 년 전 전쟁은 확실히 어떤 암컷 캇파 때문에 시작된 게 분명할 겁니다."
 "전쟁이요? 이 나라에도 전쟁이 있습니까?"
 "있고 말고요. 미래에도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옆나라가 있는 한……"
 저는 이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캇파 나라도 국가적으로 고립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게일의 설명에 따르면 캇파는 항상 수달을 가상적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수달은 캇파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군비를 갖추고 있다 하지요. 저는 이 수달을 상대로 한 캇파의 전쟁 이야기에 적잖은 관심을 느꼈습니다.(그도 그럴 것이 캇파가 수달을 적으로 삼는다는 건 "수호고략"의 저자는 물론이요 "산도민요집"의 저자 야나기타 쿠니오 씨마저 알지 못한 새로운 사실이니까요.)
 "그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물론 두 나라 모두 상대를 방심하지 않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건 어느 쪽도 마찬가지로 상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그때 이 나라에 있던 수달 한 마리가 어떤 캇파 부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암컷 캇파는 남편을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게 남편은 한량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생명 보험을 들어둔 게 유혹을 더했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그 부부를 아시나요?"
 "그렇죠――아니, 수컷 캇파만 알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이 캇파를 나쁜 사람처럼 말하지만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나쁜 사람보다도 되려 암컷 캇파에 잡히는 걸 두려워한 피해망상이 심한 미치광이였습니다……하여튼 이 암컷 캇파는 남편의 찻잔에 청산가리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손님 수달이 마셔버린 거지요. 수달은 물론 죽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전쟁이 벌어졌나요?"
 "그렇죠. 아쉽게도 그 수달은 훈장 소유주였으니까요."
 "전쟁은 누가 이겼습니까?"
 "그야 이 나라가 이겼죠. 삼십육만구천오백 마리의 캇파들은 전쟁 속에서 기특하게도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적국에 비하면 대단한 피해는 아니죠. 이 나라에 존재하는 모피란 모피는 모두 수달 모피입니다. 저도 그 전쟁 때엔 유리를 제조하는 것 이외에도 석탄 찌꺼기 따위를 전장으로 보냈죠."
 "석탄 찌꺼기를 어떻게 쓰는 거죠?"
 "그야 식량이죠. 우리 캇파는 배가 고파지면 뭐든 먹어버리니까요."
 "그건――부디 화내지 말아주세요. 전장에 있는 캇파들은……우리나라였으면 추문이 됐을 텐데요."
 "이 나라서도 추문임이 분명하죠.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말하면 누구도 추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철학자 맥도 말할 겁니다. '그대의 죄는 그대 스스로 말하라. 악은 저절로 소멸하리라'……심지어 저는 이익 이외에 애국심으로도 불타고 있었으니까요."
 마침 그때 들어 온 게 이 클럽의 직원이었습니다. 직원은 게일에게 인사하고는 좋은 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댁 옆집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불이요!"
 게일은 놀라 일어났습니다. 저도 물론 일어섰지요. 하지만 직원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진화되었습니다."
 게일은 직원을 보내며 울상과 웃음이 섞인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그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느 틈엔가 이 유리 사장을 미워한단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게일은 지금 대자본가가 아닌 단순한 캇파로서 서있었습니다. 저는 꽃병에 꽂힌 겨울 장미를 뽑아 게일에게 건넸습니다.
 "불은 꺼졌어도 아내분은 꽤나 놀라셨겠죠. 자, 이거 가지고 돌아가세요."
 "감사합니다."
 게일은 제 손을 쥐었습니다. 그리고 불쑥 히죽 웃더니 제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옆집은 제 가작이라서요. 화재보험금만 뺏긴답니다."
 저는 이때 본 게일의 웃음을――경멸할 수 없을뿐더러 증오할 수도 없는 게일의 웃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그래? 오늘따라 우울해 보이는데."
 그 화재가 있던 다음날입니다. 저는 담배를 문 채로 제 손님방 의자에 앉은 학생 랩에게 물었습니다. 랩은 오른다리 위에 왼다리를 얹은 채로 썩은 부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멍하니 마루 위만 보고 있었습니다.
 "랩 군, 왜 그러고 있어"하고 물으니
 "아니, 뭐 대단한 건 아닌데――"
 랩은 겨우 고개를 들고 슬픈 콧소리를 냈습니다.
 "저는 오늘 창밖을 보면서 '어라, 벌레 쫓는 제비꽃에 꽃이 폈네'하고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죠. 그러자 제 여동생이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더니 '그래, 나는 벌레 쫓는용 제비꽃이다'하고 화를 내지 뭐예요? 게다가 어머니는 항상 동생편만 드니까 역시 제게 뭐라 하시죠."
 "동생은 왜 벌레 쫓는 제비꽃 이야기를 싫어하는 거야?"
 "글쎄요, 아마 수컷 캇파를 잡는단 이야기로 들린 거겠죠. 그때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은 숙모도 싸움에 끼어들어서 아주 대소동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항상 취해 있는 아버지는 그 싸움을 듣고는 누구 하나 차별 없이 주먹을 날리셨죠. 그것만으로도 정리가 안 될 때에 제 남동생은 어머니 지갑을 훔치더니 키네마인지 뭔지를 보러 갔습니다. 저는……정말로 저는……"
 랩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서 아무 말도 않고 울었습니다. 저는 물론 동정했습니다. 또 동시에 가족 제도를 향한 시인 톡의 경멸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랩의 어깨를 두드리며 열심히 위로했습니다.
 "어디서나 그런 일은 있어. 기운내."
 "하지만……하지만 부리라도 썩지 않았다면……"
 "그건 포기할 수밖에 없지. 자, 톡 군의 집이라도 가자."
 "톡 씨는 저를 경멸해요. 저는 톡 씨처럼 대담히 가족을 버리지 못하니까요."
 "그럼 백 군의 집으로 갈까."
 저는 그 음악회 이후로 클래백하고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음악가의 집으로 랩을 데리고 가기로 했죠. 클래백은 톡에 비하면 훨씬 사치스럽게 삽니다. 그건 자본가 게일가처럼 산다는 건 아니지요. 단지 여러 골동품을――타나그라 인형이나 페르시아 도자기를 방 한가득 늘어 놓은 가운데 터키풍 의자를 두고 클래백 본인의 초상화를 걸어두어 항상 그 아래서 아이들과 놀곤 하지요. 하지만 오늘은 어떻게 된 건지 팔짱을 낀 채로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발밑에는 종이쪼가리가 한 가득 흩뿌려져 있었죠. 랩도 시인 톡과 마찬가지로 이따금 클래백을 만날 터입니다. 하지만 그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오늘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말없이 방구석에 앉았습니다.
 "왜 그러나? 클래백 군."
 저는 대음악가에게 거의 인사 대신에 그렇게 물었습니다.
 "왜가 어딨겠냐? 등신 같은 비평가 같으니라고! 내 서정시는 톡의 서정시와 비할 바가 못 된다는군."
 "하지만 자네는 음악가지 않나……"
 "그게 전부라면 참을 수 있지. 나는 록에 비하면 음악가로서의 가치가 없다잖아?"
 록이란 이따금 클래백과 비교되는 음악가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초인 클럽 회원이 아닌 이상 저는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이 없죠. 물론 부리가 위로 솟은 지독히 독특한 얼굴만은 사진을 접하곤 했습니다.
 "록도 천재임은 분명해. 하지만 록의 음악은 자네 음악에 넘치는 근대적 정열을 품고 있지 않지."
 "자네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아무렴."
 그러자 클래백은 일어나자마자 타나그라 인형을 붙들더니 대뜸 마루 위로 던졌습니다. 랩은 어지간히 놀랐는지 무어라 소리를 지르곤 달아나 버렸죠. 하지만 클래백은 랩이나 제게 "놀라지 마라"는 손짓을 하더니 이번엔 차갑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자네도 속된 귀를 가졌기 때문일세. 나는 록을 두려워하고 있어……"
 "자네가? 겸손도 적당치 하게나."
 "누가 겸손하게 군다는 거야? 애당초 자네들에게 그런 기미를 보일 바에야 비평가들 앞에서 했을 걸세. 나는――클래백은 천재지. 그 점에선 록을 두려워하지 않아."
 "그럼 무얼 두려워하나?"
 "무언가 정체 모를 걸――말하자면 록을 지배하는 별을."
 "잘 와닿지 않는군."
 "그럼 이렇게 말하면 알겠나? 록은 내 영향을 받지 않아. 하지만 나는 어느 틈엔가 록의 영향을 받고 말지."
 "그건 자네가 감수성이……"
 "들어보게나. 감수성의 문제가 아냐. 록은 항상 마음 편히 녀석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하지만 나는 초조하네. 그건 록이 보기엔 어쩌면 한 발짝 차이일지도 몰라. 하지만 내게는 십 마일이나 다른 걸세."
 "하지만 선생님의 영웅곡은……"
 클래백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는 원망스럽다는 양 랩을 노려다 보았습니다.
 "닥치게나. 자네 따위가 뭘 아나? 나는 록을 알고 있어. 록에게 고개를 숙이는 개자식들보다 록을 더 잘 안단 말이야."
 "좀 진정하게나."
 "만약 진정할 수 있다면……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네――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는 나를――클래백을 비웃기 위해 록을 내 앞에 세운 거야. 철학자 맥은 이런 모든 걸 알고 있지. 항상 그 유리 랜턴 아래서 낡은 책만 읽는 주제에 말이야."
 "무슨 말인가?"
 "얼마 전 맥이 쓴 '바보의 말'을 한 번 읽어 보게나――"
 클래백은 내게 책 한 권을 건넸죠――던졌다고 하는 게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팔짱을 낀 채로 내치듯이 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네."
 저는 시무룩해진 랩과 함께 다시 한 번 거리로 나왔습니다. 인파가 많은 거리는 여전히 느티나무 뒤로 여러 가게를 줄지어 놓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아무 말 없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 마침 길을 지나던 게 긴 머리를 한 시인 톡이었습니다. 톡은 우리 얼굴을 보고는 배의 주머니서 손수건을 꺼내 몇 번이나 이마를 닦았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걸. 간만에 클래백을 찾으려던 참인데……"
 저는 이 예술가끼리 싸우는 건 피하는 게 좋겠지 싶어 클래백이 얼마나 불쾌한지 완곡히 톡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래? 그럼 관두는 게 좋겠네. 클래백은 신경쇠약이니 말이야……나도 요 이삼 주 잠들지 못해 곤란한 참이야."
 "그럼 우리랑 산책이라도 하지 그래?"
 "아니, 오늘은 그만둬야겠어. 아이고!"
 톡은 그렇게 외치더니 제 팔을 꽉 붙들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틈엔가 온몸으로 식은땀을 흘렸지요.
 "왜 그래?"
 "왜 그러세요?"
 "아니, 저 자동차 창문 안에서 녹색 원숭이가 한 마리 고개를 내밀어서 말이야."
 저는 조금 걱정이 되어 의사 척에게 진찰받으라 권했습니다. 하지만 톡은 아무리 설득해도 들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뭔가 의심스럽다는 양 우리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런 말마저 했죠.
 "나는 절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야. 그것만은 잊지 말아줘――그럼 잘 있게나. 척 따위는 질색이야."
 우리는 멍하니 앉은 채로 톡의 뒷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는――아니, '우리'는 아니군요. 학생 랩은 어느 틈엔가 거리 한 가운데서 다리를 벌리더니 대뜸 자동차나 거리를 고간 사이로 들여다보지 뭡니까. 저는 이 캇파도 미쳤나 싶어 놀라서 랩을 일으켰습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하지만 랩은 눈을 문지르며 의외로 침착하게 대답을 하더군요.
 "아뇨, 너무 우울해서요. 거꾸로 세상을 보면 뭐가 다를까 싶었죠. 하지만 똑같네요."
 

열하나


 이는 철학자 맥이 쓴 '바보의 말'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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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는 언제나 자신 이외의 모든 이를 바보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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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는 건 자연이 우리를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않기 때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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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똑똑한 생활은 한 시대의 습관을 경멸하면서 심지어 그 습관을 조금도 깨지 않으려 생활하는 걸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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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가장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건 우리가 가지지 않은 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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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우상을 박살나는데 이의를 품지 않는다. 동시에 또 누구도 우상이 되는데 이의를 품지 않는다. 하지만 우상의 자리에 마음 편히 앉을 수 있는 건 물론 신의 축복을 받은 자――바보거나 악당이거나 영웅이거나 한다.(클래백은 이 페이지 위에 손톱자국을 남겨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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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사상은 삼천 년 전에 다 나온 걸지 모른다. 우리는 단지 헌 장작에 새로운 불을 주고 있을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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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특색은 항상 우리 자신의 의식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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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은 고통을 동반하고 평화는 권태를 동반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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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변호하는 일은 타인을 변호하는 것보다 어렵다. 의심하는 자는 변호사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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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지, 애욕, 의혹――갖은 죄는 삼천 년 이후로 이 셋에서 출발한다. 또 동시에 갖은 덕 또한 이 셋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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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적 소망을 줄이는 게 꼭 평화를 가져다 주진 않는다. 우리는 평화를 얻기 위해선 정신적 욕망도 줄여야만 한다.(클래백은 이 종이 위에도 손톱자국을 남겨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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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인간보다 불행하다. 인간은 캇파만큼 진화하지 않았다.(저는 이 페이지를 읽고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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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내는 건 해낼 수 있단 뜻이고 해낼 수 있다는 건 해낸단 뜻이다. 필경 우리의 생활은 이런 순환 논리서 벗어날 수 없다――즉 시종 불합리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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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들레르는 백치가 된 후로 그의 인생관을 단 한 마디로――여음 한 마디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 자신을 말해주는 게 꼭 이런 것만 있지는 않다. 되려 그의 천재에――그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시적 천재를 신뢰하였기 때문에 위장의 한 마디를 잊고 말았다.(클래백은 이 페이지에도 손톱자국을 남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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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이성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한다. 이성을 신으로 삼은 볼테르가 행복히 평생을 마친 건 즉 인간이 캇파보다 진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열둘

 

 어느 쌀쌀한 오후입니다. 저는 "바보의 말"을 읽는데 질려서 철학자 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그 한적한 마을 외각서 파리처럼 마른 캇파 한 마리가 멍하니 벽에 기대어 있더군요. 심지어 그건 언젠가 제 만년필을 훔친 캇파였습니다. 저는 잘 됐다는 생각에 마침 길을 지나던 듬직한 순사를 불렀습니다.
 "잠시 저 캇파를 조사해주세요. 저 캇파는 한 달 전에 제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순사는 오른손의 봉을 들고(이 나라 순사는 검 대신에 청각채 봉을 들고 다녔습니다) "거기 너"하고 그 캇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저는 어쩌면 캇파가 도망칠지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캇파는 의외로 침착하게 순사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팔짱을 낀 채로 참으로 담담히 제 얼굴이나 순사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순사는 화내는 법 없이 배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그룩."
 "직업은?"
 "불과 2, 3일 전까진 우편배달부를 했었죠."
 "좋아. 이 사람이 말하길 자네가 이 사람의 만년필을 훔쳤다는데?"
 "네, 한 달 전 쯤에 훔쳤죠."
 "뭐하려고?"
 "아이들 장난감 삼으려고요."
 "아이들은?"
 순사는 처음으로 상대 캇파에게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일주일 전에 죽었습니다."
 "사망증명서는 가지고 있나?"
 마른 캇파는 배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순사는 그 종이를 보더니 불쑥 히죽히죽 웃으며 상대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저는 황당하여 순사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러는 사이 마른 캇파는 무언가 중얼거리며 저희 뒤로 가더군요. 저는 그제야 마음을 다잡고 순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캇파를 그냥 보내죠?"
 "저 캇파는 무죄니까요."
 "하지만 제 만년필을 훔쳤는데……"
 "아이의 장난감으로 주기 위한 거라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죽었고요. 만약 제가 이상하지 싶으면 형법 천이백팔십오 조를 찾아보세요."
 순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저는 도리가 없어서 "형법 천이백팔십오 조"를 입안에서 반복하며 맥의 집으로 서둘렀습니다. 철학자 맥은 손님을 좋아합니다. 실제로 오늘도 어두컴컴한 방에 재판관 펩이나 의사 척, 유리 회사 사장 게일 등이 모여 일곱 빛의 랜턴 아래서 담배 연기를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죠. 재판관 펩이 와있는 건 무엇보다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의사에 앉자마자 형법 천이백팔십오 조를 조사하는 대신에 바로 펩에게 물어보았죠.
 "펩 군, 굉장히 실례인 건 알지만 이 나라서는 죄인을 처벌하지 않나요?"
 펩은 금색으로 된 담배 연기를 유유히 내뿜으며 정말 지루하다는 양 대답했습니다.
 "벌하지요. 사형마저 이뤄지는데요."
 "하지만 제가 한 달 전에……"
 저는 상세한 이야기를 한 후, 그 형법 천이백팔십오 조를 물었습니다.
 "흠, 그건 이런 법이죠――'어떠한 범죄라 해도 해당 범죄를 저지른 사정이 소실된 후엔 범죄자를 처형할 수 없다'. 요컨대 당신의 경우엔 그 캇파가 과거엔 부모였지만 이제는 부모가 아니니 범죄도 자연스레 소멸한 겁니다."
 "그건 불합리하군요." 

 "불합리라뇨? 부모였던 캇파도 부모인 캇파와 동일시하는 걸 불합리하다 여길 겁니다. 그렇지, 일본 법률에선 동일시하던가요? 우리에겐 그게 참 우스운 일입니다. 후후후후후후."

 펩은 담배를 던지고는 옅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때 끼어든 게 법률과 거리가 먼 척이었죠. 척은 코안경을 다시 쓰며 제게 물었습니다.

 "일본에도 사형이 있나요?"
 "있지요. 일본에선 교수형을 합니다."
 저는 차가운 펩에게 조금 반감을 느껴 그 기회에 비꼬아주었지요.
 "이 나라의 사형은 일본보다 문명적이겠죠?"」
 "그야 물론 문명적이죠."
 펩은 역시 침착했습니다.
 "이 나라선 교수형 따위 하지 않습니다. 가끔 전기를 쓰긴 하죠. 하지만 대개는 전기도 쓰지 않습니다. 단지 그 죄명을 말해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 캇파가 죽나요?"
 "죽고 말고요. 우리 캇파의 신경 작용은 당신들보다 미묘하니까요."
 "그건 사형만이 아니지요. 살인에도 이런 수법을 쓰곤 합니다――"
 사장 게일은 유리빛 아래서 얼굴을 보라색으로 물들이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제가 요전 번에도 사회주의자에게 '네놈은 도둑이다'하고 말해주니 그 자리서 심장마비를 일으키더군요."
 "그건 은근히 많은 모양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변호사도 똑같이 죽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말한 캇파――철학자 맥을 돌아봤습니다. 맥은 역시나 평소처럼 삐뚤어진 웃음을 지은 채로 누구도 보지 않고 말했지요.
 "그 캇파는 누군가에게 개구리 소리를 들어서――물론 당신도 아실 테지만 이 나라서 개구리란 건 사람이 아니란 뜻이니까요――나는 개구리인가? 아닌가? 하고 매일 생각하는 사이에 기어코 죽어버렸지요."
 "그건 즉 자살이겠군요."
 "물론 그 캇파를 개구리라 말한 사람은 죽일 생각이었지만요. 당신이 보기엔 역시 그것도 자살이겠죠……"
 마침 맥이 그렇게 말했을 때입니다. 대뜸 그 방 벽 너머서――분명 시인 톡의 집에서 날카로운 권총 소리 한 발이 공기를 뒤집 듯이 울려 퍼졌습니다.
 

열셋


 우리는 톡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톡은 오른손에 권총을 쥐고 머리 접시서 피를 흘린 채로 고산 식물 화분 안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또 그 옆에선 암컷 캇파 한 마리가 톡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큰 소리로 울고 있었죠. 저는 암컷 캇파를 안아 올리며(저는 미끌미끌하는 캇파의 피부를 만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어떻게 된 일이에요?"하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단지 뭔가 쓰는구나 싶었더니 갑자기 권총으로 머리를 쐈어요. 아아, 저는 어쩌면 좋죠? qur-r-r-r-r, qur-r-r-r-r"(이는 캇파의 울음소리입니다.)
 "톡 군은 제멋대로니 말이야."
 유리 회사 사장 게일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재판관 펩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펩은 아무 말도 않고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자세를 낮추어 톡의 상처를 살피던 척은 참으로 의사 다운 태도로 우리 다섯 명에게 선언했습니다.(실은 한 명과 네 마리지만요.)
 "글렀습니다. 톡 군은 본래 위병을 앓고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우울해지기 쉬웠지요."
 "뭐를 쓰고 있었다는데요."
 철학자 맥은 변명하듯이 혼잣말을 하면서 책상 위 종이를 들어 올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목을 뻗어(물론 저는 예외입니다) 폭이 넓은 맥의 어깨너머로 종이 한 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제 떠나리라. 사바계와 먼 계곡으로.
 바위는 단단하고 산속의 물은 맑고
 약초 꽃이 피는 계곡으로."

 맥은 우리를 돌아보며 작은 쓴웃음과 함께 말했습니다.
 "이건 괴테의 '미뇽의 노래' 표절이군요. 그럼 톡 군이 자살한 건 시인으로서 지쳤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때 우연찮게 자동차를 타고 도착한 건 음악가 클래백이었습니다. 클래백은 이런 광경을 보고는 한동안 문 앞에 서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으로 오고는 화내듯이 맥에게 물었습니다.
 "그게 톡의 유언장인가요?"
 "아뇨, 마지막으로 쓴 시입니다."
 "시요?"
 역시나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는 맥은 머리가 거꾸로 솟은 클래백에게 톡의 시를 건넸습니다. 클래백은 주위에 눈도 주지 않고 열심히 그 시를 읽었지요. 심지어 맥의 말에는 거의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톡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제 떠나리라……저도 언제 죽을지 모르겠군요……사바계와 먼 계곡으로……"
 "하지만 당신은 톡 군과 친구였지 않습니까?"
 "친구요? 톡은 항상 고독했습니다……사바계와 먼 계곡으로……단지 톡은 불행히도……바위는 단단하고……"
 "불행히도?"
 "산속의 물은 맑고……여러분은 행복한 거죠……바위는 단단하고……"
 나는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암컷 캇파에게 동정을 느껴 가만히 그 어깨를 안아주어 방 구석의 의자에 눕혔습니다. 그곳에선 두세 살 먹은 캇파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었죠. 저는 암컷 캇파 대신에 아이 캇파를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틈엔가 제 눈에도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습니다. 제가 캇파 나라에 살게 되어 눈물을 흘린 건 이때 한 번뿐이었죠.
 "그나저나 이런 제멋대로인 캇파의 가족은 불쌍하군요."
 "뒷일은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재판관 펩은 여전히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자본가 게일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우리를 놀래킨 건 음악가 클래백의 큰 목소리였습니다. 클래백은 시를 쥔 채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습니다.
 "그래! 멋진 장송곡이 만들어졌어."
 클래백은 가는 눈을 빛내며 가만히 맥의 손을 쥐고는 갑자기 문으로 뛰쳐갔습니다. 물론 그때엔 인근 캇파가 수도 없이 톡의 집 문앞에 모여 신기하다는 양 집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죠. 하지만 클래백은 그런 캇파들을 좌우로 밀어붙이며 훌쩍 자동차로 튀어 올랐습니다. 또 동시에 자동차는 폭음을 내며 어디론가 가버렸죠.
 "자자, 들여다 보지 마세요."
 재판관 펩은 순사를 대신해 수많은 캇파를 밀어낸 후, 톡의 집문을 잠궈버렸습니다. 그탓인지 방안은 불쑥 조용해진 듯했습니다. 저희는 그런 정적 속에서――고산식물의 꽃이 뿜는 냄새에 섞인 톡의 피냄새 속에서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상담했죠. 하지만 그 철학자 맥만은 톡의 시체를 바라보며 멍하니 무언가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는 맥의 어깨를 두드리며 "무슨 생각하시나요?"하고 물었습니다.
 "캇파의 생활을 생각하고 있죠."
 "캇파의 생활이 어쨌다고요?"
 "우리 캇파가 캇파의 생활을 다 해내기 위해서는……"
 맥은 조금 부끄럽다는 양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습니다.
 "어찌 됐든 우리 캇파 이외의 누군가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열넷


 저는 맥의 그런 말 덕에 종교란 말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물론 물질주의자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종교를 고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하지만 그때는 톡의 죽음에 어떤 마음의 변화를 느낀 탓에 캇파의 종교는 어떤 걸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저는 곧장 학생 랩에게 이 문제를 물었습니다.
 "그야 기독교죠. 불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가장 세력을 가진 건 역시 근대교겠죠. 생활교라 해도 좋을까요."('생활교'란 번역어는 들어맞지 않을지 모릅니다. 원어는 Quemoocha입니다. cha는 영어 ism에 해당될 겁니다. quemoo의 원형 quemal의 번역은 단순히 '산다'보다도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성교하는 등'하는 의미죠.)
 "그럼 이 나라에도 교회나 사원이 있겠네?"
 "당연한 말씀 마세요. 근대교 대사원은 이 나라 최고의 대건축이죠. 한 번 보러 가시지 그래요?"
 어느 미적지근하고 흐린 오후, 저는 의기양양한 랩과 함께 대사원으로 향했습니다. 확실히 니콜라이 교회의 열 배는 되는 듯한 대건축이었지요. 그뿐 아니라 갖은 건축 양식을 하나로 조합한 대건축입니다. 저는 이 대사원 앞에 서서 높은 탑이나 둥근 지붕을 바라보았을 때, 무언가 꺼림칙함마저 느꼈지요. 마치 하늘을 향해 뻗은 무수한 촉수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관 앞에 선 채로(이 현관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작았을까요!) 한동안 이 건축보단 되려 괴물에 가까운 희대의 대사원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대사원의 내부 또한 넓었습니다. 코린토스 양식의 원기둥 안에는 참배객이 수없이 걷고 있었죠. 하지만 그들 또한 우리처럼 굉장히 작게 보였죠. 저희는 그 가운데서 허리가 굽은 한 캇파와 만났습니다. 그러자 랩은 이 캇파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정중히 말했습니다.
 "장로님, 건강해 보이시네요."
 상대 캇파도 인사를 하더니 역시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랩 씨 아닌가요? 랩 씨도 여전히――(잠시 말을 잇지 못한 건 랩의 부리가 썩은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겠죠.)――어찌 됐든 건강해 보이시네요. 하지만 오늘은 또……"
 "오늘은 이분을 따라 온 거예요. 아마 아시겠지만 이분은――"
 랩은 그렇게 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건 아마 랩이 이 사원을 곧잘 찾지 않는 번명도 되었을 테지요.
 "그런 의미서 이분의 안내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장로는 조용히 웃으시면서 제게 인사를 하시더니 조용히 정면의 제단을 가리키셨습니다.
 "안내라 해도 도움이 될만한 게 없군요. 저희 신도는 정면의 '생명의 나무'서 예배를 드립니다. '생명의 나무'는 보다시피 금색과 녹색 열매가 열리죠. 저 금색 과일을 '선과'라 하고 저 녹색 과일을 '악과'라합니다……"
 저는 그런 설명을 듣는 사이에 금세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모처럼 듣는 장로의 말도 낡은 비유처럼 들렸기 때문이죠. 저는 물론 열심히 듣는 척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대사원 내부를 보는 걸 잊지 않았죠.
 코린토스 양식의 기둥, 고딕 양식의 궁륭, 아라비아풍 체크 모양 바닥, 분리파풍 기도 테이블――그러한 것들이 이루는 조화는 묘하게 야만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눈길을 끈 건 무엇보다 양쪽 감실 안에 놓인 대리석 반신상이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상을 아는 것처럼만 느껴졌죠. 그것도 신기할 게 없습니다. 그 허리가 굽은 캇파는 '생명의 나무' 설명이 끝나자 이번에는 저나 랩과 함께 우측 감실 앞으로 가서 감실 안 반신상에 이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이건 우리의 성도 중 한 명――갖은 것에 반역한 성 스트린드베리입니다. 이 성도는 수없이 괴로워한 끝에 스베덴보리의 철학에 구원 받았다지요. 하지만 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 성자는 우리처럼 생활교를 믿었죠――보다 정확히는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 성자가 우리에게 남긴 '전설'이란 책을 읽어 보시지요. 이 성자도 자살미수자였음을 성자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금 우울해져 다음 감실을 보았습니다. 다음 감실에 자리한 반신상은 콧수염이 두터운 독일인이었죠.
 "이건 짜라투스라의 시인 니체입니다. 그 성자는 자신이 만든 초인에게 구원을 추구했죠. 하지만 역시나 구원받지 못하고 미치광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만약 미치광이가 되지 않았다면 성자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장로는 잠시 아무 말도 않더니 세 번째 감실 앞으로 안내했습니다.
 "세 번째에 자리한 건 톨스토이입니다. 이 성자는 누구보다 고행을 겪었지요. 본래 귀족이었기에 호기심이 많은 대중에게 괴로운 걸 보여주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이 성자는 사실상 믿을 수 없는 그리스도를 믿으려 노력했습니다. 아니, 믿고 있다고 공언한 적도 있다지요. 하지만 기어코 말년에는 비참한 거짓말쟁이였단 사실을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성도 또한 이따금 서재 서까래에 공포를 느낀 걸로 유명하죠. 하지만 성자 안에 들었을 정도이니 물론 자살하진 않았습니다."
 네 번째 감실 안의 반신상은 우리 일본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본인의 얼굴을 보고 그리움을 느꼈지요.
 "이 사람은 쿠니키타 돗포입니다. 깔려 죽은 인부의 마음을 또렷히 알고 있던 시인이지요. 하지만 당신에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겠군요. 그럼 다섯 번째 감실을 보시지요――"
 "이건 바그너 아닙니까?"
 "그렇죠. 국왕의 친구였던 혁명가죠. 성자 바그너는 말년엔 식전 기도마저 올렸습니다. 하지만 물론 기독교보다 생활교의 신자 중 한 명이었죠. 바그너가 남긴 편지에 따르면 사바고는 몇 번이나 이 성자를 죽음 앞에 몰아 붙였다고 합니다."
 저희는 이미 여섯 번째 감실 앞에 서있었죠.
 "이는 성자 스트린드베리의 친구입니다. 아이가 많은 아내 대신에 열셋 쯤 되는 여자를 아내로 들인 상인 출신의 프랑스 화가지요. 이 신자의 두꺼운 혈관 속엔 어부의 피가 흘렀습니다. 하지만 입술을 보세요. 멍자국이 남아 있지요. 일곱 번째 감실 안에 있는 건……지치신 모양이군요. 그럼 이리 오시지요."
 확실히 지쳐있던 저는 랩과 함께 장로를 따라 봄향기가 나는 복도를 따라 어떤 방에 이르렀습니다. 작은 방 구석에는 검은 비너스상 아래에 포도 한 줄기가 놓여 있었죠. 저는 아무 장식도 없는 중방을 생각한 만큼 조금 의외지 싶었습니다. 그러자 장로가 제 분위기서 그걸 느꼈는지 저희에게 의자를 권하기 전에 조금 안타깝다는 양 설명했습니다.
 "부디 저희 종교가 생활교임을 잊지 말아 주세요. 저희의 신――'생명의 나무'의 가르침은 '왕성히 살라'이니까요……랩 씨께선 이분께 저희 성서를 보여주셨나요?"
 "아뇨……실은 저도 거의 읽지 않아서요."
 랩은 머리의 접시를 긁적이며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장로는 여전히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럼 모르시겠지요. 저희 신은 하루만에 이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생명의 나무'는 나무이지만 못할 건 없지요.) 그뿐 아니라 암컷 캇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암컷 캇파는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수컷 캇파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신은 이 한탄을 애처로워해 암컷 캇파의 뇌수를 빨아 들여 수컷 캇파를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은 이 두 마리 캇파에게 '먹어라, 교합하라, 왕성히 살라'는 축복을 주었지요……"
 저는 장로의 말 속에서 시인 톡을 떠올렸습니다. 시인 톡은 불행히도 저와 같은 무신론자지요. 저는 캇파가 아니니 생활교를 모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캇파 나라서 태어난 톡은 물론 '생명의 나무'를 알았을 테죠. 저는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톡의 마지막을 애처로워하면서 장로의 말을 가로 막듯이 톡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 그 안타까운 시인 말이군요."
 장로는 제 이야기를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정하는 건 신앙과 환경과 우연뿐이죠.(물론 여러분은 그 외에 유전 따위도 뽑겠지만) 톡 씨는 불행히도 신앙을 가지 못한 거지요."
 "톡은 장로님을 부러워했을 겁니다. 아뇨, 저도 부러워하지요. 랩 군은 나이도 젊고……"
 "저도 부리만 멀쩡했다면 좀 더 낙천적이었을지 모르죠."
 장로는 그런 우리의 말을 듣고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심지어 그 눈동자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가만히 검은 비너스를 바라보았죠.
 "저도 사실은――이건 제 비밀이니 부디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저도 실은 저희의 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제 기도는――"
 마침 장로가 그렇게 말하던 때였습니다. 대뜸 방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암컷 캇파 한 마리가 대뜸 장로에게 뛰어 들었죠. 저희가 그 암컷 캇파를 붙잡은 건 물론입니다. 하지만 암컷 캇파는 순식간에 장로를 바닥에 내던져 버렸지요.
 "이 영감탱이가! 오늘도 또 내 지갑에서 술값을 훔쳐갔겠다!"
 십 분 가량 지난 후, 우리는 도망만 치지 않았지 장로 부부를 남겨둔 채로 대사원의 현관을 지났습니다.
 "저래서야 저 장로도 '생명의 나무'는 믿지 않겠군요."
 잠시 말없이 걸은 후, 랩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답하기 전에 저도 모르게 대사원을 돌아봤습니다. 대사원은 어두운 하늘에 높은 탑이나 둥근 지붕을 무수한 촉수처럼 뻗고 있습니다. 어쩐지 사막 하늘에 보이는 신기루와 같은 꺼림칙함을 두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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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그로부터 이래저래 일주일 뒤, 저는 의사 척에게 별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톡의 집에 유령이 나온다나요. 우리 시인 친구의 집도 암컷 캇파도 진작 어디론가 가버린 후론 사진사의 스튜디오로 바뀐지 오래였습니다.  척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스튜디오서 사진을 찍으면 손님 뒤에 톡의 모습도 몽롱히 비친다고 합니다. 물론 척은 물질주의자이기 때문에 사후 생명 따위를 믿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 이야기를 할 때도 악의 담긴 웃음을 지으며 "역시 유령도 물질적존재인 듯하군요"하고 주석을 붙일 정도였죠. 저도 척과 마찬가지로 유령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인 톡에겐 친근함을 느꼈기에 곧장 서점으로 향해 톡의 유령에 관한 기사나 톡의 유령 사진이 실린 신문과 잡지를 샀습니다. 확실히 그러한 사진을 보니 어딘가 톡으로 보이는 캇파 한 마리가 남녀노소 캇파 뒤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놀라게 한 건 톡의 유령 사진보다 톡의 유령을 다루는 기사――특히 톡의 유령에 관한 심령학회의 보고였습니다. 저는 꽤나 온전히 번역해왔으니 아래에 큰 줄기만 적어두겠습니다. 단 괄호 안의 내용은 제가 더한 주석입니다――

 시인 톡 군의 유령에 관한 보고(심령학협회 잡지 제팔천이백칠십사호 게재)
 우리 심령학회는 얼마 전 자살한 시인 톡 군의 구거처지이자 현재는 XX 사진사의 스튜디오인 □□가 제이백오십일호의 임시 조사회를 개최하였다. 자리한 회원은 아래와 같다.(존칭은 생략한다.)
 우리 열일곱 회원은 심령학회장 펙 씨와 함께 구 월 십칠 일 오전 열 시 삼십 분,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마담 홉 우니을 동반하여 해당 스튜디오의 한 방에 모였다. 홉 부인은 해당 스튜디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심령적 공기를 느껴 온몸이 경련되면서 여러 번의 구토를 하였다. 부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는 시인 톡 군이 담배를 강렬히 사랑한 결과, 그 심령적 공기에도 니코틴을 함유한 탓이라 한다.
 우리 회원은 홉 부인과 함께 원탁을 둘러 앉았다. 부인은 삼 분 십오 초 후, 지극히 극단적인 몽유 상태에 빠져 시인 톡 군의 심령을 빙의하였다. 우리 회원은 나이순에 따라 부인에게 빙의한 톡 군의 심령과 아래와 같은 문답을 개시했다.
 질문 그대는 어찌하여 유령으로 나타났는가?
 대답 사후의 명성을 알기 위함이다.
 질문 그대――혹은 심령 제군은 사후에도 명성을 추구하는가?
 대답 적어도 나보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만난 일본의 한 시인은 사후의 명성을 경멸했다.
 질문 그대는 그 시인의 이름을 아는가?
 대답 나는 불행히도 잊어버렸다. 단지 그가 즐겨 만든 열일곱 자 시의 첫 장을 기억할 뿐이다.
 질문 어떤 시인가?
 대답 "오랜 연못에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구나"
 질문 그대는 그 시를 걸작이라 생각하는가?
 대답 나쁜 작품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개구리'를 '캇파'로 바꾸면 좀 더 광채로 넘쳤으리라 본다.
 질문 허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 우리 캇파는 어떤 예술서도 통렬히 캇파를 원한다.
 회장 펙 씨는 이때 우리 열일곱 회원에게 이곳은 심령학협회의 임시 조사회지 합평회가 아님을 주의주었다.
 질문 심령의 생활은 어떠한가?
 대답 그대들의 생활과 다를 바가 없다.
 질문 허면 그대는 그대가 자살했음을 후회하는가?
 대답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심령적 생활에 질린다면 다시 한 번 권총을 들어 나를 살리리라.
 질문 살리는 건 간단한가?
 톡 군의 심령은 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이는 톡 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응보라 생각하리라.
 대답 자살하는 건 간단한가?
 질문 그대들의 생명은 영원한가?
 대답 우리의 생명에 관해 여러 설이 있어 믿기지 않는다. 다행히 우리 사이에도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조로 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음을 잊지 말라.
 질문 그대는 무얼 믿는가?
 대답 나는 항상 회의주의자이다.
 질문 하지만 그대는 적어도 심령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을 텐데?
 대답 그개들처럼 확신할 순 없다.
 질문 그대는 친구가 많은가?
 대답 나의 교우는 동서고금에 걸쳐 삼백 명이 넘는다. 그 이름을 꼽자면 클라이스트, 마인랜더, 바이닝거……
 질문 그대의 교우는 자살자뿐인가?
 대답 꼭 그렇지는 않다. 자살을 변호하는 몽테뉴는 나의 존경하는 친구 중 한 명이다. 단지 나는 자살하지 않은 염세주의자――쇼펜하우어하곤 교제하지 않는다.
 질문 쇼펜하우어는 잘 지내나?
 대답 그는 곧장 심령적 염세주의를 수립하여 자신을 살리는 것의 옳고 그름을 논하고 있다. 하지만 콜레라도 병균임을 알고 굉장히 안도하였다.
 우리 회원은 이어서 나폴레옹, 공자, 도스도옙스키, 다윈, 클레오파트라, 석가, 데모스테네스, 단테, 센노 리큐 등의 유령의 소식을 물었다. 하지만 톡 군은 불행히도 자세히 대답하지 않고 되려 톡 군 본인에 관한 수많은 가십을 물었다.
 질문 내 사후 명성은 어떠한가?
 대답 어떤 비평가는 "군소 시인 중 한 명"이라 말했다.
 질문 그는 내가 시집을 주지 않아 원한을 품었다. 내 전집은 출간 되었는가?
 대답 그대의 전집은 출간되었지만 매상은 좋지 않다.
 질문 내 전집은 삼백 년 후――즉 저작권이 사라진 후 만인이 구매하게 되리라. 내 아내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답 그녀는 사서 랙 군의 부인이 되었다.
 질문 그녀는 불행히도 랙이 의안인 걸 알지 못한다. 우리 아이는 어떤가?
 대답 국립 고아원에 있다 들었다.
 톡 군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더니 새로운 질문을 시작했다.
 질문 우리 집은 어떻게 되었는가?
 대답 아무개 사진사의 스튜디오가 되었다.
 질문 내 책상은 어떻게 되었는가?
 대답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질문 나는 내 책상 서랍에 한 뭉터기의 편지를――하지만 이는 다행히도 바쁜 그대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이제 나는 심령계에 천천히 스며들어 제군과 결별해야겠다. 잘 있어라, 나의 선량한 제군.
 홉 부인은 마지막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우리 열일곱 명의 회원은 이 문답이 진실임을 천상의 신에게 맹세하여 보증하겠다.(또 우리가 신뢰하는 홉 부인을 위한 보수는 과거에 부인이 여배우였을 적의 일당에 따라 지불하였다.)

 

열여섯


 저는 이런 기사를 읽은 후 서서히 이 나라에 있는 것도 우울해져 끝내 우리 인간 나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제가 떨어진 구멍은 보이지 않았죠. 그러는 사이 그 백이란 어부 캇파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나라 외각에선 어떤 나이 먹은 캇파 한 마리가 책을 읽고 피리를 불며 조용히 지낸다고 합니다. 제가 이 캇파를 찾아가 물으면 이 나라서 벗어날 방법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때문에 곧장 마을 외각으로 향했지요. 하지만 그곳에 가니 참으로 작은 집 안에 나이 먹은 캇파는 고사하고 머리 피도 마르지 않은 열둘이나 열셋 먹은 캇파 한 마리가 유유히 피리를 불고 있었습니다. 저는 물론 집을 잘못 찾은 줄 알았지요. 하지만 혹시 몰라 이름을 물으니 역시나 백이 가르쳐준 나이 먹은 캇파임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 같습니다만……"
 "아직 모르나? 나는 어떻게 된 운명인지 어머니 배서 나왔을 땐 백발머리를 하고 있었다네. 그런데 매해 젊어지더니 이제는 이런 어린아이가 되어버렸지. 허나 나이를 계산하면 태어나기 전을 육십이라 해도 이래저래 백십오육은 되었을 거야."
 저는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제 착각인지 소박한 의자나 테이블서는 무언가 맑은 행복 따위가 드리워 있는 것만 같았지요.
 "선생님께선 다른 캇파보다 행복하게 사시나 봅니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젊을 땐 늙은이였고 나이를 먹으니 젊어졌어. 따라서 늙은이보다는 욕심이 끝이 없고 젊은이처럼 색에 빠지는 일도 없지. 어찌 됐든 내 평생은 설령 행복하지 않더라도 평안했던 건 분명할 거야."
 "확실히 평안했을 거 같군요."
 "아니, 그게 전부였다면 평안하지 않았을 테지. 나는 몸도 튼튼했고 평생 먹고 살기에 충분한 재산도 지녔었네. 하지만 가장 행복했던 건 역시 태어났을 때 늙은이였단 사실 아닐까 싶어."
 저는 잠시 이 캇파와 자살한 톡의 이야기나 매일 의사를 부르는 게일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이 먹은 캇파는 제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다른 캇파처럼 사는 것에 별 집착을 가지지 않은 거군요?"
 나이 먹은 캇파는 제 얼굴을 보면서 조용히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도 다른 캇파처럼 이 세계에 태어날 거냐는 아버지의 질문을 받고 나서야 어머니의 배안에서 벗어났지."
 "하지만 저는 우연찮게 이 나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부디 이 나라서 나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 밖에 없네."
 "하나라뇨?"
 "그건 당신이 여기로 온 길이지."
 저는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어째서인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거 같았습니다.
 "아쉽게도 그 길이 보이지 않아서요."
 나이를 먹은 캇파는 생생한 눈길로 저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방 구석으로 가더니 천장에 걸려 있던 줄 하나를 당겼습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천장이 열렸지요. 그 둥근 천장 밖에는 소나무나 회화나무 가지가 너머로 푸른 하늘이 맑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니, 커다란 화살촉과 닮은 야리게타케의 봉우리도 우뚝 솟아 있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본 아이처럼 펄쩍 뛰어 오르며 기뻐했죠.
 "자, 절로 나가면 되네."
 나이를 먹은 캇파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 전 망을 가리켰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망이라 생각했던 건 실제론 망으로 된 사다리였던 겁니다.
 "그럼 저기로 나가겠습니다."
 "단지 미리 말해두는데 나가서 후회하지 말게나."
 "괜찮습니다.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자마자 망사다리를 기어 올랐습니다. 나이 먹은 캇파의 머리 접시를 내려다 보면서요.
 

열일곱


 저는 캇파 나라서 돌아 온 후, 한동안 인간 피부서 나는 냄새에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캇파는 우리 인간에 비하면 정말 청결하지요. 그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머리는 캇파만 보던 제게는 꺼림칙한 걸로만 보였습니다. 이건 어쩌면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눈이나 입은 어찌 됐든 이 코라는 게 묘하게 무서움을 유발합니다. 저는 물론 되도록 누구에게도 만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우리 인간에도 익숙해졌는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아 어디든지 나갈 수 있게 됐죠. 하지만 곤란한 건 무언가 대화를 할 때 실수로 캇파말을 쓴다는 점입니다.
 "내일은 집에 있나?"
 "Qua"
 "뭐라고?"
 "아니, 있단 뜻이야."
 대개 이런 느낌이었죠.
 하지만 캇파 나라서 돌아와 약 일 년 정도 지났을 쯤, 저는 어떤 사업 실패 탓에……(S박사는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 이야기 하지 마세요'하고 주의를 주었다. 박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간호사가 감당도 못할 정도로 난폭해진다고 한다.)
 그럼 그 이야기는 관두지요. 하지만 어떤 사업에 실패한 저는 다시 캇파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맞아요. '가고 싶다'가 아닙니다. '돌아가고 싶은' 거지요. 캇파 나라는 당시의 제겐 고향처럼만 느껴졌으니까요.
 저는 몰래 집을 빠져나와 츄오센 기차를 탔습니다. 그때 안타깝게도 순사에게 붙잡혀 기어코 병원 신세를 지고 있죠. 저는 이 병원에 들어왔을 당초부터 캇파 나라를 떠올렸습니다. 의사 척은 어쩌고 잇을까요? 철학자 맥도 여전히 일곱빛깔 유리 랜턴 아래서 뭔가 생각에 젖어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제 친구였던 부리가 썩은 학생 랩은――마침 오늘처럼 흐렸던 어느 오후입니다. 이런 추억에 젖어 있던 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죠. 그건 어느 틈에 들어 온 건지 백이란 어부 캇파 한 마리가 제 앞에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마음을 다 잡고서――울었는지 웃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백, 어떻게 온 거야?"
 "병문안 온 거죠. 듣자하니 아프시다면서요?"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라디오 뉴스로 알았죠."
 백은 의기양양히 웃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잘도 왔네?"
 "어려울 거나 있나요. 도쿄의 강이나 굴은 캇파에겐 길거리나 다름 없으니까요."
 저는 새삼 캇파도 개구리처럼 수륙양용인 걸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이 주변에 강은 없는데."
 "아뇨, 여기로 올라온 건 수도관을 통한 거죠. 그리고 잠깐 소화전을 열어서……"
 "소화전을 열어?"
 "나리께선 잊으셨습니까? 기계를 만질 줄 아는 캇파가 있단걸."
 그로부터 저는 이삼 일마다 여러 캇파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S 박사에 따르면 제 병은 조발성 치매라 하더군요. 하지만 그 의사 척은(이는 당신에게도 결례이겠지만.) 저는 조발성 치매 환자가 아닙니다. 조발성 치매 환자는 S 박사를 시작으로 당신들 본인이라 말하더군요. 의사 척도 올 정도이니 학생 랩이나 철학자 맥이 병문안 오는 건 물론입니다. 하지만 낮에는 어부 백 말고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특히 두세 마리가 같이 오는 건 밤――그것도 달이 뜬 밤뿐이죠. 저는 어제도 달빛 속에서 유리 회사 사장 게일이나 철학자 맥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음악가 클라백도 바이올린 연주 한 곡을 부탁해 들었지요. 왜, 저 책상 위에 검은 백합 꽃다발이 있잖습니까? 저것도 어젯밤 클래백이 선물로 두고 간 겁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책상 위엔 물론 꽃다발은 고사하고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도 철학자 맥이 일부러 가지고 와준 거죠. 한 번 첫 시를 읽어 보세요. 아뇨, 당신이 캇파 나라의 말을 알 리도 없죠. 그럼 대신 읽겠습니다. 이건 근래 출간된 톡의 전집 중 한 권입니다――
 (그는 낡은 전화번호부 한 권을 펼쳐 이런 시를 읽기 시작했다.)
 

――야자 꽃과 대나무 사이서
  석가께선 진작 잠드셨네

  길구석에 갈라진 무화과에 함께
  그리스도도 이미 죽은 듯하네

  하지만 우리는 쉬어야 한다네
  설령 무대 배경 앞에서도.

  (또 그 배경 뒤를 보면 이어 붙인 캔버스 뿐인가?)―― 


 하지만 저는 이 시인처럼 염세적이지 않습니다. 캇파들이 이따금 찾아 오는 한――아, 이걸 잊고 있었군요. 당신은 제 친구였던 재판관 펩을 기억하시지요? 그 캇파는 직장을 잃은 후 정말로 미쳐버렸습니다. 듣자하니 지금은 캇파 나라의 정신병원에 있다나요. 저도 S 박사가 허락만 해준다면 병문안을 가고 싶은데 말이죠…… 

(쇼와 2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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