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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스사노오노미코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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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타카마가하라노쿠니에도 봄이 찾아왔다.
 이제 사방의 산을 둘러보아도 눈이 남은 봉우리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소와 말이 뛰노는 초원은 희미한 녹색을 한가득 펼쳐 놓고, 그 자락을 따라 흐르는 아메노야스카와의 물빛도 어느 틈엔가 사람 좋은 따스함을 머금게 되었다. 하물며 그 강 아래에 위치한 마을에는 제비가 돌아왔는가 하면 여자들이 머리 위에 병을 얹고서 물을 뜨러 가는 우물 옆 참죽나무도 하얀 꽃잎을 젖은 돌 위로 살랑살랑 흩날리고 있었다――
 그런 나른한 봄날 오후, 아메노야스카와의 강가엔 수많은 젊은이가 모여 여념도 없이 힘겨루기에 심취하고 있었다.
 당초 그들은 제각기의 손에 활과 화살을 들고 머리 위 하늘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들의 화살비 속에선 현이 울리는 용맹한 소리가 바람처럼 불었다 그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화살은 무수한 메뚜기처럼 햇빛에 화살깃을 빛내며 하늘에 걸린 노을 속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하얀 송골매 깃털을 단 화살만은 반드시 다른 화살보다 높이――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랐다. 그건 백과 흑의 격자무늬 시즈리를 입은 영모가 추한 한 젊은이가 두터운 백단목 활을 쥐고서 이따금 날리는 화살이었다.
 그런 하얀 깃털을 단 화살이 하늘로 오를 때마다 다른 젊은이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모아 그의 기량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 화살이 항상 그들보다 높게 난다는 걸 알자 그들은 서서히 그의 화살에 냉담한 태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그들 중 누군가가 그에게는 도무지 미치지 않지만 꽤나 높은 곳까지 날리자 되려 그쪽을 칭찬하곤 했다.
 그럼에도 용모가 추한 젊은이는 쾌활하게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다른 젊은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활을 쏘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가루처럼 날아가던 화살비도 서서히 수가 적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는 그가 쏘는 하얀 깃털 화살만이 마치 낮에 보이는 유성처럼 단 한 줄기 하늘을 향해 뻗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도 활을 관두고 의기양양히 다른 젊은이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주위에선 그런 만족을 함께 할만한 단 한 명의 젊은이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때는 이미 모두 강가의 물 안에 모여 아름다운 아마노야스카와의 흐름을 뛰어넘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며 같은 강을 넘더라도 더 폭이 넓은 곳을 넘으려 했다. 때때로 불운한 젊은이는 날카로운 칼처럼 햇살을 반사하는 강 안으로 굴러떨어져 눈부신 물보라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반대쪽 강가에, 마치 계곡을 뛰어넘는 사슴처럼 하늘하늘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제까지 서있던 강가를 돌아보며 웃고 떠들곤 했다.
 용모가 추한 젊은이는 이 새로운 놀이를 보고는 곧장 활과 화살을 모래 위로 던지고는 가볍게 강의 흐름을 뛰어넘었다. 그곳은 그들이 뛴 곳보다 가장 폭이 넓은 곳이었다. 하지만 다른 젊인들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의 뒤에 뛴――그보다도 폭이 좁은 곳을 그보다 편하게 뛰어넘은 키가 크고 잘 생긴 젊은이 쪽이 더 인기인 듯했다. 그 젊은이는 그와 같은 격자무늬 시즈리를 입고 있었지만 목에 찬 곡옥이나 팔에 찬 팔찌는 누가 한 것보다 정교한 물건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조금 부러운 듯한 눈초리로 그 젊은이를 보았으나, 이윽고 그들 옆을 벗어나, 햇볕이 뜨거운 길을 홀로 걸어 하류로 향했다.
 


 강 하류를 향해 걷기 시작한 그는 이윽고 누구 하나 뛰어넘은 적 없는 서른 척 쯤 되는 폭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줄기가 이제까지의 기세를 잃으며 양쪽 자락의 돌과 모래에 서서히 고이는 곳이었다. 그는 한동안 수면을 보고 있었으나 불쑥 두세 걸음 물러나더니 마치 투석기서 발사된 돌처럼 기세 좋게 뛰어넘었다. 하지만 이번엔 살짝 미치지 못해서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며 거꾸로 강안에 빠져 버렸다.
 그가 빠진 곳은 다른 젊은이가 있는 곳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실수는 곧장 그들의 눈에도 들어갔다. 그들 중 한 명은 이를 보더니 "꼴좋다"는 양 배를 부여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또 동시에 어떤 이는 역시나 야유를 날리면서도 이전보단 훨씬 동정이 섞인 목소리를 보내곤 했다. 그런 호의를 품은 사람들 중에는 그 정교한 곡옥이나 팔찌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젊은이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그가 실패했기에 세간의 일반적인 약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그에게 어느 정도의 친밀함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다음 순간에는 다시 이전의 침묵으로――적의를 품은 침묵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강에 떨어진 그가 젖은 생쥐 같은 꼴로 반대편 강가로 기어오르더니 집념 깊게 다시 한 번 그 넓은 폭의 강줄기 위를 뛰어넘으려 했기 때문이다. 아니, 뛰어넘으려고만 한 게 아니다. 그는 발을 움츠리며 하얀색 물 위로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어려움 없이 뛰어넘어 냈다. 그러곤 반대쪽 강가에서 구름과 같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털썩 커다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건 그들의 웃음을 사기에 마땅할 정도로 너무나도 장엄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들 사이에선 갈채도 환호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손발의 모래를 털고는 젖은 몸을 일으켜 젊은이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강을 뛰어넘는 것도 질렸는지 또 무언가 새로운 힘겨루기 소재를 찾기 위해 재밌다는 양 웃으며 강의 상류로 서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용모가 추한 젊은이는 쾌활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보다 잃을 리도 없었다. 왜냐면 그들의 불쾌함은 아직 그에겐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점에서 정말로 축복받은 인간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런 축복이 갖은 강자 특유의 낙인인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동료 젊은이들이 강상류로 향하는 걸 보자, 그는 여전히 물방울을 떨어트리며 따스한 봄 햇살을 가리며 모래 위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젊은이들은 강가에 산재한 바위를 들어올리는 놀이를 시작했다. 바위는 산처럼 큰 것도 양처럼 작은 것도 태양빛 아래서 수도 없이 구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되도록 커다란 바위를 들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손에 담기는 바위 이외엔 그들 중에서도 특히 힘이 듬직한 대여섯 명의 젊은이가 아니고선 쉽사리 모래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이 힘겨루기는 자연스레 그들 대여섯 명이 독점하는 놀이로 바뀌어 버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바위를 가볍게 들어올리고 던지곤 했다. 특히 적과 백의 삼각 모양의 시즈리 소매를 걷어붙인 온 얼굴이 수염투성이인 키가 작고 자라목인 젊은이는 아무도 들지 못하는 바위를 자유롭게 움직여냈다. 주위에 있던 젊은이들은 그의 비범한 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또한 그런 찬사에 보답하기 위해 서서히 커다란 바위로 힘을 시험하려 했다.
 그 용모가 추한 젊은이는 마침 이 대여섯 명의 힘겨루기 중에 도착했다.
 


 용모가 추한 젊은이는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한동안 대여섯 명이 힘겨루기를 하는 걸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힘을 쓰고 싶어 못 참았던 걸까. 자신도 물로 젖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폭이 넓은 어깨를 우뚝 솟은 채 마치 동굴서 나오는 곰처럼 어슬렁어슬렁 젊은이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 누구도 들어올리지 못한 바위 하나를 앉자마자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바위를 어깨 위까지 얹어 보였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에겐 냉담했다. 단지 개중에서도 방금 전부터 줄곧 절찬을 받던 키가 작고 자라목인 젊은이만은 쉽지 않은 경쟁자가 나타난 걸 알았는지 질투 섞인 곁눈질로 그를 보곤 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짊어 맨 바위를 어깨 위에서 한 번 흔들더니 사람이 없는 곳의 모래 위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거북목 젊은이는 마치 굶주린 호랑이처럼 맹렬히 몸을 날려 바위를 향해 달려들더니 순식간에 안아 올려선 그에게 지지 않고 쉽사리 어깨보다 높은 곳까지 올려 보였다.
 그건 이 두 사람의 완력이 힘자랑 중인 다른 젊은이보다 몇 단계는 뛰어나단 걸 말해주는 증거였다. 그러자 이제까지 두려움도 없이 힘겨루기를 하던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흥이 깨진 표정을 마주하며 주위에 있던 구경꾼 사이에 낄 수밖에 없었다. 반면 남은 둘은 본래 그리 적의를 품던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 없이 날샌 호랑이와 같은 기세로 누구 하나가 항복할 때까지 자웅을 겨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형세를 본 수많은 젊은이들은 거북목 젊은이가 들어올린 바위를 던지는 동시에 한 층 더 열심히 술렁이며 이번에는 흠뻑 젖은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 승부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건――그를 향해선 역시 호의를 가지지 않은 건 그들의 짓궂은 눈초리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유유히 손에 침을 뱉으며 아까보다 한 층 더 큰 바위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두 손으로 바위를 붙들고서 한동안 호흡을 가다듬었으나 이윽고 힘을 한껏 넣고는 단숨에 배까지 들어올렸다. 마지막으로 그 손의 위치를 바꾸며 서서히 어깨까지 올려 훌륭히 짊어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엔 던지지 않고서 눈으로 자라목 젊은이를 부르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 들어보게"하고 말을 걸었다.
 자라목 젊은이는 몇 걸음을 두고서 이따금 수염을 씹으면서 비웃듯이 그를 바라보았으나
 "좋아"하고 한 마디로 대답하고는 척척 그의 옆으로 다가가 곧장 그 바위를 작은 산과 같은 어깨에 짊어내 보였다. 그러곤 두세 걸음 걷고서 한 번 눈 위까지 들어올리고는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바위는 엄청난 땅울림을 일으키며 구경꾼 젊은이들 근처에 떨어졌고, 은가루와 같은 모래먼지를 일으켰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또 이전처럼 술렁였다. 하지만 더욱 승부를 내기 위함일까. 자라목 젊은이는 그 목소리가 미처 그치기도 전에 전보다 더 큰 바위를 물가 모래서 안아 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런 힘겨루기를 몇 번이나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 모두 피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이나 손발에는 방울 같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입고 있는 시즈리는 색도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모래 먼지를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둘은 숨을 헐떡이면서 필사적으로 바위를 들어올렸고 마지막 승부가 갈릴 때까지 간단히 멈추지 않을 분위기였다.
 그들을 둘러싼 젊은이들의 관심은 두 사람의 피로가 심해질수록 더욱 강해지는 듯했다. 그런 면에서 이 젊은이들도 투계나 투견처럼 잔혹하며 냉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라목 젊은이에게 특별한 호의를 품지 않았다. 승부를 향한 관심이 그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흥분시켰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두 힘꾼에게 고루고루 성원을, 예로부터 무수한 닭, 무수한 개, 무수한 인간이 대단한 의미도 없이 귀한 피를 흘리게 한――숙명적으로 갖은 광기를 낳은 성원을 보냈다.
 물론 이 성원은 두 젊은이에게도 작용했다. 그들은 출혈된 네 눈동자 속에서 무서운 증오를 느꼈다. 특히 키가 작고 자라목인 젊은이는 그 증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던지는 바위는 단지 우연이라곤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용모가 추한 젊은이의 발밑 근처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런 위험에도 전혀 아랑곳 않는 듯했다. 혹은 아랑곳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승패에 마음을 빼앗긴 걸지도 몰랐다.
 그는 지금도 상대가 던진 바위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용기를 고무하여 물가에 누워 있던 소처럼 큰 바위를 일으켰다. 바위는 비스듬하게 물줄기를 갈라 졸졸 흐르는 봄강에 천 년 동안 쌓인 이끼를 씻어냈다. 이 커다란 바위를 들어내는 건 타카마가하라 제일의 힘꾼 타지카라오노미코토마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두 손으로 바위를 안고는 한쪽 무릎을 땅에 얹은 채로 혼신의 힘을 쥐어짜 내어 바위를 묻은 모래 안에서 들어올려냈다.
 그 인간 이상의 힘은 주위 젊은이들이 성원을 줄 여유마저 뺏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서 천근의 바위를 안은 채로 모래에 한 쪽 무릎을 꿇은 그의 모습을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온 힘을 다한 것만은 그 손발서 떨어지는 끝없는 땀만 봐도 명백했다. 그런 게 한동안 이어진 후, 목소리를 죽이던 젊은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지 그 술렁임은 이전처럼 기세 좋은 성원의 외침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그들 입에서 새어 나온 경탄의 신음이었다. 왜냐면 이때 그는 바위 아래에 어깨를 넣고서 이제까지 굽히고 있던 한쪽 무릎을 조금씩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바위는 그가 몸을 일으킬 때마다 조금씩 또 조금씩 천천히 모래를 벗어났다. 그리고 다시 그들 사이서 일종의 술렁임이 생길 즘, 그는 이미 바위를 어깨로 받치며 난잡해진 머리를 이마서 나부끼며 자못 대지를 가르고 나온 츠치이카즈치 신처럼 강가에 누운 갖은 바위 안에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다섯


 무거운 바위를 짊어 맨 그는 두 걸음 세 걸음 비틀거리며 강 안에서 걸어가더니 필사적으로 앙 다문 이빨 사이로 거의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로 "잘 들어, 건네줄 거야"하고 상대를 불렀다.
 자라목 젊은이는 머뭇거렸다. 적어도 한순간은 장엄 그 자체인 듯한 그의 모습에 일종의 위압감을 느낀 듯했다. 하지만 곧 절망적인 용기를 쥐어짜 내어
 "그래"하고 도전적으로 대답하고는 꿋꿋이 두 팔을 벌리며 그 큰 바위를 짊어매려 했다.
 바위는 곧 그의 어깨서 자라목 젊은이의 어깨로 옮겨 갔다. 그건 마치 커다란 구름이 밀려가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와 동시에 또 구름 봉우리가 뻗는 것처럼 각박했다. 자라목 젊은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늑대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서서히 내려오는 바위를 듬직한 어깨로 받치려 했다. 하지만 바위가 상대의 어깨서 그의 어깨로 온전히 옮겨졌을 때, 그의 몸은 찰나의 순간 큰 바람 속의 깃대처럼 흔들렸다. 그러더니 곧 그의 얼굴 절반을 가득 메운 수염을 제외하고 서서히 색을 잃어갔다. 그렇게 그 새파랗게 질린 이마서 발밑의 눈부신 모래 위로 땀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어깨 위 바위가 방금 전과 반대로 조금씩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온 힘을 다해 두 손으로 바위를 받치며 마지막까지 악투를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바위는 여전히 운명처럼 내려왔다. 그의 몸은 굽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목도 아래를 향하게 되었다. 지금의 그는 아무리 보아도 바위 밑에서 몸부림치는 게와 다를 바 없었다.
 주위에 모인 젊은이들은 생각지 못한 일에 정신을 팔려 멍하니 이 비극을 지켜보았다. 또 그들의 손으로는 저 커다란 바위 아래서 그를 구해낼 수 없었다. 아니, 저 용모가 추한 젊은이마저 이제는 방금 들어올린 바위를 상대의 등에서 빼낼 수 있을지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도 한동안은 공포와 경악을 차례로 추한 얼굴에 드러내며 단지 망연자실한 눈초리로 상대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자라목 젊은이는 기어코 등부터 바위에 깔려 무너지듯이 모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 박자에 그의 입에선 비명인지 신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괴로운 목소리 하나가 터져 나왔다. 용모가 추한 젊은이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불쑥 악몽에서 깬 것처럼 맹렬히 몸을 상대를 깔아뭉갠 바위를 반대편으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손도 짚기 전에, 자라목 젊은이는 모래 위로 기울어지며 바위에 뭉개지는 뼛소리와 함께 눈에서도 입에서도 엄청난 양의 선명한 피를 터트렸다. 그게 이 젊은 힘꾼의 애처로운 마지막이었다.
 용모가 추한 젊은이는 멍하니 손을 맞잡은 채로 태양빛 속에 쓰러진 상대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답을 찾기라도 하듯이 주위 젊은이들에게 머뭇머뭇 괴로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고개를 숙여 묵념한 채 누구 하나 그의 추한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여섯


 그 후로 타카마가하라의 젊은이들은 용모가 추한 젊은이를 냉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그의 비범한 완력에 노골적인 질투를 드러냈다. 또 다른 일부는 충견처럼 맹목적으로 그를 숭배했다. 더욱이 다른 일부는 그의 야성과 순박함에 냉혹한 비웃음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몇 명의 젊은이들은 진심으로 그에게 심취했다. 하지만 적이나 아군이나 그에게 위압감의 일종을 느끼기 시작한 건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용모가 추한 젊은이 또한 그런 감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비참하게 죽은 그 자라목 젊은이의 기억은 아직도 그의 마음 밑바닥에 큰 상흔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의 이런 기억은 그들의 호의와 반감 앞에서 당혹과 닮은 감각을 느끼게 했다. 특히 그를 존경하는 일부 젊은이를 대할 때에는 거의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는 수치심마저 느끼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그의 아군들의 눈초리는 한 층 더 큰 호의를 품는 듯했다. 또 동시에 그의 적은 한 층 더 큰 반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는 되도록 사람을 피했다. 마을을 둘러싼 자연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자연은 그를 상냥하게 대했다. 숲은 나무를 흔들며 고독에 괴로워하는 그의 귀에 듣기 좋은 산비둘기의 목소리를 전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늪도 무성한 갈대와 함께 그의 적적함을 위로하는 것처럼 따스함을 살짝 머금은 봄구름을 조용히 반사시키고 있었다. 나무 사이에 핀 가시금작화, 양치, 얼룩조릿대 안에서 날아오르는 꿩, 그리고 깊은 계곡물의 빛을 난반사하는 은어 무리――그는 온갖 곳에서 주위 젊은이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안식과 평화를 찾아냈다. 자연 속에 애증의 차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게 평등하게 햇살과 미풍 속에서 행복을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하지만 그는 인간이었다.
 그가 이따금 계곡의 돌 위에서 물을 스치며 오가는 바위 제비를 바라보거나 혹은 협곡 아래서 꿀에 취해 날지도 못하는 등에의 날개 소리를 듣고 있을 때면 무어라 말로 못할 외로움이 불쑥 그를 덮치곤 했다. 그는 그 외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그게 몇 년인가 전,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슬픔과 닮아 있는 듯했다. 당시의 그는 어디를 가도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 할 어머니가 없단 사실을 느끼면 반드시 낙막한 공허에 압도되곤 했다. 지금 느끼는 외로움이 그 슬픔에 비해 더 큰 거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한탄하는 것보다는 더 크고 거대하게만 느껴졌다. 때문에 그는 산의 봄 속에서 새나 짐승처럼 헤매며 행복과 함께 알 수 없는 불행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런 외로움에 괴로울 때면 종종 산 중턱에 가지를 뻗은 높은 떡갈나무 가지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골짜기의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골짜기선 항상 그의 마을이 아메노야스카와의 강가 근처서 바둑돌처럼 지붕을 늘어놓고 있었다. 또 그 지붕 위로 음식을 만드는 연기가 몇 개인가 올라오는 모습도 보였다. 그는 두터운 가지에 앉은 채로 오랫동안 마을 하늘서 오고 가는 바람을 맞았다. 바람은 떡갈나무의 잔가지를 흔들며 이따금 가지 끝의 싹에서 풍기는 냄새를 햇살 속에 나부끼게 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바람이 귓가에 흘려 들어올 때마다 이런 속삭임을 듣는 것만 같았다.
 "스사노오야, 무얼 찾고 있느냐. 네가 찾는 건 이 산에 없다. 물론 저 마을에도 없지. 나와 함께 가자. 나와 함께 가자. 무얼 망설이느냐. 스사노오야……"
 

일곱


 하지만 스사노오는 바람과 함께 헤매어 걷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무엇이 고독한 그를 타카마가하라노쿠니에 붙들어 놓고 있었는가――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으면 반드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건 이 용모가 추한 젊은이에게도 남몰래 사랑하는 마을 소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야만인이 그런 소녀를 사랑하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이 소녀와 만난 건 역시 산 중턱 떡갈나무의 가지에 홀로 올라가 있었을 때였다. 그는 그날도 멍하니 눈앞에서 하얗게 흐르는 아메노야스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떡갈나무 가지 아래서 생각지도 못한 밝은 여자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 목소리는 머치 얼음 위에 돌멩이를 던지는 것처럼 그의 적적한 백일몽을 깨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잠을 방해한 사람에게 화가 난 걸 느끼며 떡갈나무 아래의 공터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선 나무 위에 그가 있단 것도 알지 못한 건지, 어떤 세 여자가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시종 웃고 떠들고 있었다.
 하나같이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있는 걸 보면 꽃이나 나무, 두릅 등을 캐러 온 소녀들인 듯했다. 스사노오는 여자들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비천한 집의 소녀가 아니란 점은 그들이 어깨에 걸친 아름다운 히레만 보아도 명백했다. 세 사람은 약한 바람에 히레를 나부끼며 어린 풀 위에서 힘겹게 나는 산비둘기 한 마리를 뒤쫓고 있었다. 비둘기는 여자들의 손과 손 사이를 누비며 한껏 아픈 날개를 퍼덕였으나 지상으로부터 삼 척 이상은 날지 못하는 듯했다.
 스사노오는 높은 떡갈나무 위에서 한동안 이 소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들 중 한 여성이 들고 있던 대나무 바구니도 내던진 채 위태롭게 비둘기를 잡으려 했다. 비둘기는 또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부드러운 깃털을 눈처럼 가루가루 주위에 흩뿌렸다. 그는 그걸 보자마자 이제까지 앉아 있던 두터운 가지를 쥐고는 공중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한 번 몸을 튕겨 떡갈나무의 뿌리 위로 기세 좋게 착지했다. 하지만 그 박자에 발이 미끄러져 놀란 세 사람 사이로 거창하게 구르고 말았다.
 여자들은 잠시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보았으나 이윽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곧장 벌떡 일어선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담담한 척 여자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비둘기는 그 사이서 깃털을 날리며 나무가 무성한 수풀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웃음을 그친 여자들 중 한 명은 경멸하듯이 그렇게 말하며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선 미처 죽이지 못한 우스꽝스러움이 남아 있는 듯했다.
 "저기 있었어. 저 떡갈나무 위에."
 스사노오는 팔짱을 낀 채로 역시나 담담히 대답했다.
 

여덟


 그의 대답을 들은 여자들은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하여 웃음을 터트렸다. 스사노오는 그게 화가 나는 동시에 또 어딘가 기쁜 것만 같았다. 그는 추한 얼굴을 찌푸리며 그들을 겁주듯이 한 층 불쾌하단 눈초리를 보냈다.
 "뭐가 웃긴데?"
 하지만 그의 위협도 세 사람에겐 효과가 없는 듯했다. 그들은 한참을 웃고는 비로소 그를 마주했다. 이번에는 다른 한 사람이 살짝 부끄럽다는 양 아름다운 히레를 만지작거리며
 "그럼 왜 내려왔는데?"하고 물었다.
 "비둘기를 구해주려 했지."
 "우리도 구해주려는 거였는데."
 세 번째 소녀는 옆에서 웃으면서 기운차게 끼어들었다.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는 나이인 듯했다. 하지만 두 친구에 비해 용모도 가장 아름다울뿐더러 분위기 또한 굉장히 발랄했다. 방금 전 바구니를 버리면서 위태롭게 비둘기를 잡으려 한 소녀도 이 발랄한 소녀임이 분명했다. 그런 그녀와 눈을 마주한 그는 이유도 모른 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그녀 앞에서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다. 
 "거짓말 마."
 그는 한껏 난폭한 대답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 아니란 건 다른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거 같기도 했다.
 "어머,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정말로 구해주려던 거였는데."
 그녀가 그를 나무라자 그가 당황한 모습을 재밌다는 양 바라보던 두 여자도 단숨에 아기새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진짜거든."
 "왜 거짓말이라 생각하는데?"
 "너만 비둘기를 귀여워하는 게 아냐."
 그는 한동안 답하는 것도 잊은 채로 마치 벌집이 박살 난 꿀벌처럼 세 방향서 덮쳐 오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감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용기를 쥐어짜 내서는 팔짱을 풀고서 당장이라도 세 사람을 내리칠 기세를 보이며 번개처럼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거짓말이 아니라면 썩 꺼져버려. 안 가면――"
 여자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는지 황급히 그의 옆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금세 다시 큰소리로 웃더니 마침 발밑에 핀 쑥부쟁이의 꽃을 따고는 일제히 그를 향해 던졌다. 옅은 보라색의 쑥부쟁이 꽃은 스사노오의 온몸에 그 가루를 떨구었다. 그는 그 냄새 좋은 빗속에서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하지만 곧 방금 막 화를 냈던 걸 떠올리고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는 이 장난기 많은 여자들을 향해 두 걸음 세 걸음 맹렬히 돌진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세 사람은 재빠르게 숲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는 멍하니 멈춰 서서는 서서히 멀어지는 히레의 색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주위의 풀 위에서 드문드문 상냥한 꽃을 피우고 있는 쑥부쟁이를 보았다. 그러자 어째서일까. 입술에 자연스레 옅은 웃음이 드리웠다. 그는 그 자리에 털썩 드러누워서는 싹을 틔운 가지 너머에 자리한 맑은 봄하늘을 바라보았다. 숲 밖에서는 아직도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사라져서는 풀과 나무의 번영을 품은 밝은 침묵만이 남았다……
 몇 분인가 지난 후, 날개를 다친 비둘기가 머뭇머뭇 돌아왔다. 잡초 위에 누운 그는 이미 조용히 잠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한 그의 얼굴에는 가지서 내려오는 햇살과 함께 작은 그림자가 여전히 묻어 있었다. 비둘기는 쑥부쟁이 꽃을 밟으며 슬쩍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잠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작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치 그 웃음의 의미를 생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홉


 그날 이후 그의 마음속에선 이따금 그 쾌활한 소녀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앞서도 말한 것처럼 이런 사실을 인정하는 걸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하물며 주위 젊은이들에겐 단 한 마디도 사정을 밝히지 못 했다. 하물며 연애하고는 거리가 먼 야만적인 생활을 보낸 스사노오였던 만큼, 주위 젊은이들 또한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 하였다.
 그는 여전히 사람을 피해 산간의 자연과 더 친하게 지내곤 했다. 때로는 하룻밤 내내 숲 안쪽을 서성이며 모험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커다란 곰이나 멧돼지를 해치우기도 했다. 또 한 번은 결코 봄을 알지 못하는 봉우리를 넘어 돌사이서 사는 독수리를 죽이러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그 비범한 힘을 다 써야 마땅할 버거운 강적을 만나보지 못했다. 산 너머 동굴에서 사는 날래고 거사든 난쟁이들마저 그와 만날 때마다 반드시 한 명씩은 시체가 되곤 했다. 그는 이따금 그 시체서 뺏은 무기나 화살을 꽂은 새와 동물을 들고서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그의 무용은 온 마을 안에 더 많은 적과 아군을 만들어 갔다. 또 그들은 기회만 생기면 공공연히 으르렁거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이런 분쟁을 내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그의 뜻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삐걱이곤 했다. 그런 다툼 안에는 무언가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힘마저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적과 아군의 반목에 불쾌함을 품으면서도, 저도 모르는 사이 그 반목 속으로 서서히 끌려가고 말았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맑은 봄의 저녁, 그는 활을 든 채 마을 뒤에 펼쳐진 언덕에서 홀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방금 전 놓친 수사슴 한 마리의 선명한 뒷모습이 미련스럽게 떠올랐다. 하지만 언덕이 살짝 평평해져 느릅나무의 어린잎 아래서 저녁노을을 받는 마을의 지붕이 한눈에 보일쯤까지 이르자, 네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한 젊은이를 상대로 무언가 언쟁을 펼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이 언덕에서 소와 말을 기르는 자들이란 건 그들 주변서 풀을 먹고 있는 가축의 모습만 봐도 명백했다. 특히 네다섯 명과 언쟁 중인 한 젊은이는 그를 숭배하는 젊은이들 중에서 거의 시종마냥 그를 모셨기에 되려 그의 반감을 산 적 있는 남자임에 분명했다.
 그들의 모습을 본 그는 곧장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꺼림칙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들의 말다툼을 가만 보고 지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그는 먼저 얼굴이 익숙한 젊은이에게
 "무슨 일이야?"하고 물었다.
 그 남자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마치 백만 아군이라도 만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상대 젊은이들의 부조리를 거침없이 토해냈다. 그 말을 듣자 하니 그들은 그 남자를 미워한 나머지 그가 기르는 소와 말을 다치게 하고 괴롭혔다고 한다. 그는 그런 불평을 호소하는 동안에도 이따금 상대를 노려다 보며 
 "도망치지 마. 금방 갚아줄 테니까"하고 스사노오의 힘을 빌린 난폭한 말을 늘어놓곤 했다.
 


 스사노오는 그런 불평을 흘려들으며 상대 젊은이들을 향해 야만적인 그와 어울리지 않게 조정을 해주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 그의 숭배자는 말로도 울분을 털어내지 못했는지 대뜸 가까이에 있던 젊은이에게 달려들고는 그 뺨을 때렸다. 얻어맞은 젊은이는 비틀거리면서 곧장 상대를 붙잡았다.
 "그만해. 야, 그만하라고 했잖아."
 스사노오는 그렇게 화를 내며 두 사람을 억지로 떼어냈다. 그러나 얻어맞은 그에게 팔을 잡히자 충혈된 눈을 희번덕거리며 이번에는 그를 향해 매달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숭배자는 허리에 찬 채찍을 휘둘러 마치 미치광이처럼 역시나 말싸움 상대였던 젊은이들에게 달려들었다. 젊은이들도 마냥 얻어맞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곧장 둘로 갈라져 한 쪽은 남자는 그 남자를 둘러쌌고 한 쪽은 생각지 못한 일에 당황한 스사노오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이렇게 된 이상은 스사노오도 싸움에 낄 수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상대의 주먹이 그의 머리를 향해 뻗었을 때, 그는 옳고 그름도 잊을 정도로 배 안쪽에서 올라오는 성질을 느꼈다.
 곧 그들은 서로 뒤엉키며 때리고 맞고 했다. 주위서 풀을 먹던 소나 말도 이 소란에 놀라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의 주인들은 주먹을 휘두르는데 정신이 팔려 한동안은 누구도 가축의 행방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스사노오와 싸운 자는 손이 부러지고 발이 꺾이는 등 점점 기세가 꺾였다. 그리고는 끝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개를 잃고 언덕을 뛰쳐 내려갔다.

 상대를 쫓아낸 스사노오는 이번에는 그의 숭배자가 그들에게 미련을 품은 걸 말려야만 했다.
 "그만해라, 그만해. 도망치는 녀석은 도망치게 두는 게 나아."

 젊은이는 겨우 그의 손을 벗어나 풀 위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가 지독히 얻어맞았다는 건 한가득 부풀어 오른 그의 얼굴이 명백히 말해주고 있었다. 스사노오는 그의 얼굴을 보자 불쾌한 속내에서 불쑥 우스움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어디 다치진 않았고?"
 "아뇨, 다치면 또 어때요. 오늘이야말로 저 녀석들에게 한 방 먹여줬으니까――그보다 형님이야말로 다치진 않으셨어요?"
 "그래, 혹 하나 생긴 게 다야."
 스사노오는 그런 한 마디에 속 안의 응어리를 토해내며 옆에 있던 느릅나무뿌리에 걸터앉았다. 그의 눈앞엔 마을의 지붕이 언덕 중턱에 드리우는 저녁노을 속에서 붉게 떠올라 있었다. 스사노오에겐 그 경치가 이상하리만치 평화롭게 보였다. 또 그만큼 방금 전 격투가 마치 꿈처럼만 느껴지기도 했다.
 "혹은 아프신가요?"
 "그리 아프진 않은걸."
 "쌀을 씹으면 덜 아프다나요."
 "그런가. 그거 좋은 이야기를 들었군."
 

열하나


 딱 이런 싸움처럼 스사노오는 내키지 않음에도 서서히 어떤 젊은이들을 적대시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하물며 마을 젊은이 중 삼 분지 이나 되는 숫자였다. 그 젊은이들은 스사노오의 아군이 스사노오를 수령으로 여기는 것처럼 오모이카네노미코토나 타지카라오노미코토 같은 연장자에게 경의를 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작 그에게 대단한 적의를 품지 않는 듯했다. 
 특히 오모이카네노미코토는 되려 그의 야만적인 성질에 호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 언덕 위 싸움서 이삼 일이 지난 어느 오후, 그가 여느 때처럼 홀로 산속의 오래된 연못에서 물고기를 낚고 있을 때였다. 오모이카네노미코토가 마침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 또한 스사노오처럼 혼자였다. 그리고 조금의 거리감도 없이 그와 함께 썩은 나무 줄기 위에 앉더니 생각 이상으로 마음을 터놓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모이카네노미코토는 백발 노인이었으나 마을 제일의 학자이며 또 마을 제일의 시인이란 명성도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을 여자들 중엔 그를 비범한 주술사로 여기는 사람도 존재했다. 이는 그가 한가할 때면 산과 계곡을 헤매며 약초 따위를 찾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사노오 또한 옴모이카네미코토에게 반감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낚싯줄을 뻗은 채로 기꺼이 그의 말벗이 되었다. 두 사람은 제법 오랫동안 오래된 연못에 맞닿은 버드나무 가지의 은빛 꽃 아래서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 당신의 힘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오모이카네노미코토는 그런 말을 하며 한쪽 뺨에 웃음을 머금었다.
 "전부 말뿐입니다."
 "그거면 어떤가요. 모든 일에는 말이 붙기 마련이죠. 그런 평가는 시작이요 보람이기도 하니까요."
 스사노오는 그 답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럴까요. 그럼 주위가 높게 사주지 않는다면 제가 아무리 힘이 세도――"
 "그야 힘이 세지 않은 게 되겠지요."
 "하지만 사금은 남이 퍼올리지 않아도 사금이지 않습니까."
 "글쎄요, 사람이 퍼올렸기에 사금이란 걸 알 수 있지 않았나요?"
 "그럼 사람이 평범한 모래를 사금인 줄 알고 퍼올리면――"
 "평범한 모래라도 사금이 되겠지요."
 스사노오는 어쩐지 오모이카네노미코토에게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상대를 보아도 주름투성이인 미코토의 눈꼬리에는 옅은 웃음만 담겨 있을 뿐이라 나쁜 사람의 기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야 사금이 되더라도 대단할 게 없을 거 같군요."
 "그야 대단할 게 없지요. 그 이상 생각하는 건 사고방식이 잘못된 겁니다."
 오모이카네노미코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로 시시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어디서 따온 듯한 머위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열둘


 스사노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모이카네노미코토가 그의 비범한 힘과 이어지는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은 힘겨루기를 위해 당신과 바위를 들어 올리다 죽은 남자가 있었다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스사노오는 비난이라도 받는 듯한 심정에 저도 모르게 옅은 햇살이 드는 옛된 연못 위로 시선을 피했다. 연못 물은 주위에 싹튼 봄나무를 희미하고 밝게 또 깊이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오모이카네노미코토는 아랑곳 않고 이따금 머위 냄새를 맡으며
 "안타까우면서도 멍청한 일이지요. 저로선 애당초 경쟁 자체가 논외입니다. 설령 경쟁을 하더라도 이기지 못할 승부에 나서는 건 논외지요. 하물며 목숨까지 버리는 건 정말로 어리석음의 극치 아니겠어요?"
 "하지만 저는 마음이 불편해지곤 합니다."
 "설마요. 당신이 죽인 것도 아닌데요. 힘겨루기를 즐긴 다른 젊은이들이 죽인 겁니다."
 "하지만 저는 되려 그들에게 미움을 산 모양입니다."
 "그야 미움을 받을만하지요. 대신 만약 당신이 죽고 당신의 상대가 이겼다면 그 사람들은 분명 그 상대를 미워했을 겁니다."
 "세상이란 게 그런 건가요?"
 그때 미코토는 대답하는 대신 "끌리는군요"하고 주의를 줬다.
 스사노오는 곧장 실을 들어 올렸다. 실 끝에는 산천어 한 마리가 매달려 발랄히 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물고기는 사람보다 행복하지요."
 미코토는 그가 대나무 가지로 산천어 이마를 꿰뚫는 걸 보고는 또 히죽히죽 웃으며 그에겐 거의 통하지 않을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바늘을 두려워하는 동안 물고기는 거침없이 바늘을 물어 순식간에 쉽게 가지요. 저는 물고기가 부럽습니다."
 그는 묵묵히 다시 한 번 연못 위로 실을 던졌다. 하지만 이윽고 당혹스러운 눈초리로 미코토를 보며
 "선생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군요"하고 말했다.
 미코토는 그런 말을 듣고는 생각보다 진지한 분위기로 하얀 턱수염을 비틀며
 "모르는 게 좋지요. 이해하면 당신도 저처럼 아무것도 못하게 될 테니까요."
 "어째서지요?"
 그는 모르겠다 말한 직후에 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오모이카네노미코토의 말은 진지한 건지 농담인지 구분 가지 않으면서도 꿀인지 독인지는 몰라도 신기하리만치 마음을 끄는 게 깃들어 있는 듯했다.
 "바늘을 물 수 있는 건 물고기뿐이죠. 하지만 저도 젊었을 적엔――"
 오모이카네노미코토의 주름투성이 얼굴에는 순간 이제까지 없었던 쓸쓸함이 드리워 있었다
 "하지만 저도 젊었을 적엔 여러 꿈을 꾸곤 했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조용히 봄나무를 담고 있는 연못 위를 바라보았다. 연못 위에선 비취가색 물총세가 이따금 물을 스치며 물수제비 하듯이 날아갔다.
 

열셋


 그동안에도 그 쾌활한 소녀의 모습은 끝없이 스사노오의 마음을 점거했다. 특히 이따금 마을 내외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하면 언덕의 떡갈나무 아래서 그녀와 만났을 때처럼 이유도 없이 얼굴이 붉어지거나 가슴이 뛰고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그를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아침 그는 산으로 가는 도중 마침 마을 외각에 놓인 우물 앞을 지나고 있자니, 그 소녀가 다른 서너 명의 소녀와 함께 물독에 물을 기르고 있었다. 우물 위에선 흰동백의 꽃이 아직 띄엄띄엄 남아 있었고 끝없이 흘러넘치는 물줄기는 그 꽃과 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자그마한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소녀는 몸을 숙이면서 이끼가 무성한 우물서 넘치는 물을 도기 물독에 담고 있었으나 다른 여자들은 이미 물을 다 떴는지 다들 독을 머리에 얹고서 끝없이 오가는 제비 무리 사이로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하지만 그가 근처에 이르자, 그녀는 기품 있게 몸을 일으키고는 한가득 채워진 물독을 무겁다는 양 한 손에 든 채 힐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달리 입가에 사람 좋은 웃음을 품어 보였다.
 그는 여느 때처럼 당혹스러워하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소녀는 물독을 머리에 얹으며 눈으로 인사에 답하고는 다른 여자들을 쫓아 역시나 못을 흩뿌리는 듯한 제비 속을 걸었다. 그는 소녀와 엇갈리듯이 우물로 걸어가 커다란 손바닥에 뜬 물로 두 입, 세 입 목을 적셨다. 적시면서 그녀의 눈초리나 입술의 웃음을 떠올리며 무언가 기쁘면서도 부끄러운 심정에 얼굴을 붉혔다. 또 동시에 자신을 비웃는 듯한 기분도 들곤 했다.
 그러는 사이 여자들은 산들바람에 히레를 나부끼면서 머리 위 도자기 독에 상쾌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서서히 우물에서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들은 곧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개중에 어떤 자는 발도 멈추지 않은 채로 스사노오를 돌아보더니 비웃는 듯한 웃음을 보내기도 했다.
 다행히 우물의 물을 마시던 그는 그 시선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자니 묘하게 겸연쩍어져 마시고 싶지도 않은 물을 괜히 한 번 더 퍼올려 마셨다. 그러자 높게 솟은 우물 물에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웠다. 스사노오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분수 넘어 흰동백 아래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채찍을 든 젊은이 하나와 눈이 맞았다. 그건 얼마 전 언덕의 싸움에 그까지 말려들게 한 숭배자였다.
 "안녕하세요."
 젊은이는 밝게 웃어 보이며 그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
 그는 이 젊은이마저 자신의 당황한 모습을 봤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열넷


 하지만 젊은이는 별 신경 쓰지 않는 기미로 우물 위로 뻗은 흰동백 꽃을 따면서
 "혹은 좀 나으셨나요?"
 "그래, 진작 나았지."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쌀은 써보셨고요?"
 "썼지. 생각보다 잘 들더라."
 젊은이는 딴 꽃을 우물 안에 던지고는 불쑥 히죽히죽 웃으며
 "그럼 또 하나 좋은 걸 가르쳐드릴까요."
 "좋은 거라니?"
 그가 수상쩍다는 양 되묻자 젊은이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웃음을 뺨에 머금은 채로
 "목에 하고 계신 곡옥을 하나 주실 수 있을까요?"하고 말했다.
 "곡옥을 달라고? 못 줄 건 없지만 받아서 어쩌려고?"
 "뭐, 잠자코 줘보세요. 나쁜 일은 안 할 테니까요."
 "싫어. 어떻게 할 건지 듣기 전에는 못 준다."
 스사노오는 슬슬 갑갑함을 느끼며 퉁명스럽게 젊은이의 청을 내쳤다. 그러자 상대는 교활하게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그럼 말해드리죠. 지금 막 여기에 물을 뜨러 온 열다섯 때쯤 되는 소녀를 좋아하시죠?"
 그는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의 미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심 적잖은 당황에 당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좋아하시잖아요. 오모이카네노미코토의 조카를."
 "그런가. 그 아이는 오모이카네노미코토의 조카였나."
 그는 살짝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젊은이는 개선가라도 부르듯이 웃었다.
 "거 보세요. 숨겨도 금방 들통나지 않습니까."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발밑의 돌을 바라보았다. 물보라를 맞은 돌 사이에는 띄엄띄엄 양치 잎이 싹터 있었다.
 "그러니 제게 곡옥 하나를 줘보시라는 겁니다. 좋아하신다면 좋아하도록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젊은이는 채찍을 만지작거리며 거침없이 그를 추궁했다. 그의 기억에는 2, 3일 전 오모이카네노미코토와 이야기한 그 오랜 연못의 버들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만약 그 소녀가 미코토의 조카라면――그는 발밑의 돌에서 눈을 떼더니 역시나 얼굴을 찌푸린 채로
 "그 곡옥으로 어떻게 한다는 거지?"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안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희망의 빛이 또렷이 깃들어 있었다.
 

열다섯


 젊은이의 대답은 적당했다.
 "뭐, 곡옥을 그 아이에게 줘서 당신의 마음을 전하는 거지요."

 스사노오는 조금 주저됐다. 이 남자의 혀놀림에 놀아나는 건 어쩐지 불쾌했다. 하지만 혼자서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호소할만한 용기도 없었다. 젊은이는 그의 추한 얼굴에 주저의 색이 깃든 걸 보고는 일부러 차갑게 말을 이었다.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둘은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스나노오는 이윽고 목에 건 곡옥 안에서 아름다운 벽옥을 뽑아 말없이 그 젊은이에게 주었다. 그건 그가 무엇보다 소중히 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젊은이는 그 벽옥에 욕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내며
 "이건 훌륭한 곡옥이로군요. 이렇게 좋은 벽옥은 쉽게 보지 못할 겁니다."
 "이 나라 물건이 아니다. 바다 건너편에 있는 옥장인이 일주일 내내 밤낮으로 갈고닦았다는 곡옥이지."
 그는 화가 난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젊은이에게 빙글 등을 돌려 큰 걸음으로 우물을 벗어났다. 하지만 젊은이는 곡옥을 손바닥 위에 얹은 채로 황급히 그 뒤를 쫓아왔다.
 "좀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반드시 이삼 중에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래, 서두를 건 없지만."
 두 사람은 시즈리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끝없이 오가는 제비 속을 걸어 산으로 향했다. 뒤에선 젊은이가 던진 동백꽃이 솟구치는 우물 물 위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흐르지도 않은 채 떠있었다.
 그날 저녁, 젊은이는 이전 번 사달이 있었던 언덕의 느릅나무뿌리에 앉아 스사노오에게 받은 곡옥을 얹은 손바닥을 바라보며 그 소녀에게 전할 수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다른 젊은이 하나가 반죽 피리를 허리에 찬 채 훌쩍 산을 내려왔다. 마을 젊은이 중에서도 가장 정교한 곡옥이나 팔찌 소유자로 알려진 키가 크고 아름다운 젊은이였다. 그는 옆을 지나다 무슨 생각인지 불쑥 걸음을 멈추고는 뿌리에 앉은 젊은이에게 "야"하고 말을 걸었다. 젊은이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세련된 젊은이가 그가 숭배하는 스사노오의 적 중 한 명이란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참으로 무뚝뚝하게
 "왜 그러시죠"하고 대답했다.
 "그 곡옥 좀 보여줘 봐."
 젊은이는 떨떠름하단 얼굴로 벽옥을 상대에게 건넸다.
 "네 거야?"
 "아뇨, 스사노오노미코토의 곡옥입니다."
 이번에는 상대 젊은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남자가 항상 자랑이라도 하듯이 차고 다니는 곡옥이네. 뭐, 이거 말곤 돌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었지만."
 젊은이는 독설을 하면서 한동안 그 벽옥을 만지작거렸으나 자신도 그 느릅나무뿌리에 걸터앉아서는
 "어때? 물건은 말하기 나름이라잖아. 네가 손 좀 써서 이 벽옥을 내게 팔아주지 않겠어?"하고 대담한 소리를 꺼냈다.
 

열여섯


 소를 기르는 젊은이는 싫다고 대답하는 대신에 뺨을 부풀린 채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자 상대는 곁눈질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대신 사례를 할게. 검을 원하면 검을 주고 옥을 원하면 옥을 주지――"
 "안 됩니다. 그 곡옥은 스사노오노미코토가 어떤 사람에게 주라며 제게 맡기신 물건이니까요."
 "흐음, 누구한테 주라고? 누구란 게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상대는 호기심이 동했는지 불쑥 파고들었다.
 "여자든 남자든 뭐 어때요."
 젊은이는 괜한 말을 했다 후회하면서 성가시다는 양 답을 피했다. 하지만 상대는 화가 난 기미도 없이 되려 살짝 꺼림칙할 정도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야 아무래도 좋지. 아무래도 좋지만 그 사람에게 줄 물건이라면 네가 다른 곡옥을 가지고 가도 별문제 없지 않겠어?"
 젊은이는 또 입을 다물고 풀 위로 눈을 돌렸다.
 "물론 조금은 성가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정도 일이 있어도 검이든 옥이든 갑옷이든 내지는 또 말 한 마리든 네가 가지는 게――"
 "하지만 만약 그분이 받지 않는다 하면 저는 이 곡옥을 스사노오노미코토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받지 않는다 하면?"

 상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상냥한 말투로
 "만약 상대가 여자였다면 그야 스사노오의 곡옥 따위는 받지 않겠지. 더군다나 이런 벽옥은 젊은 여자한텐 안 어울려. 그러니 되려 이거 대신 좀 더 화려한 걸 가져가면 의외로 금방 받을지도 모르지."

 젊은이는 상대의 말도 일리가 있는 듯했다. 실제로 제아무리 고귀한 물건이라도 마을의 젊은 여자가 이런 색의 옥을 좋아할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야――"
 상대는 입술을 핥으며 더더욱 그럴싸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말야, 스사노오도 설령 옥이 다른 옥이라도 받아 주는 게 되돌려주는 것보다 기뻐하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옥을 바꾸는 게 오히려 스사노오를 위한 일이지. 스사노오를 위한 일이면서 네가 검이든 말이든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대체 누가 불행해지겠어?"
 젊은이의 마음속에는 양날검이나 수정을 깎아낸 곡옥이나 듬직한 회색 말 같은 게 또렷이 떠올랐다. 그는 유혹을 떨쳐내듯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두세 번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을 뜨자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있었다.
 "어때? 이래도 싫어? 싫다면――뭐, 아무 말 않고 우리 집에 와봐. 검도 갑옷도 네게 맞는 게 있을 테니까. 마굿간엔 말도 대여섯 마리는 되지."
 상대는 끝까지 매끄러운 혀를 놀리며 가볍게 느릅나무 위에서 일어났다. 젊은이는 역시나 말없이 끝이 없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걷기 시작하자 그 또한 그 뒤에서 무거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이 언덕 아래로 사라졌을 때, 또 다른 젊은이 하나가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다. 저녁노을의 빛은 옅어진지 오래며 주위에는 이미 아지랑이마저 감돌았으나 그 젊은이가 스사노오라는 건 얼핏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오늘 사냥한 듯한 산새 두세 마리를 어깨에 걸친 채로 유유히 느릅나무까지 내려와서는 한동안 지친 발을 멈추고 어두워지는 마을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홀로 입술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사노오는 그 쾌활한 소녀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렸다.
 

열일곱


 스사노오는 매일 같이 젊은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젊은이는 쉽사리 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고의인지 우연인지 그 후로 얼굴도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젊은이의 계획이 실패한 거 아닐까 싶었다. 때문에 자신과 만나는 게 부끄러운 건가 싶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그 쾌활한 소녀에게 다가갈 기회가 없었던 거뿐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따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이른 아침, 그는 그 소녀와 이전과 같은 우물 앞에서 단 한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소녀는 여느 때처럼 물독을 머리 위에 얹으며 네다섯 명의 마을 소녀와 함께 흰동백 아래를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본 그녀는 불쑥 입술을 일그러트리더니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촉촉한 눈에 깃든 채로 화가 난 듯이 가장 앞에 서서 그의 옆을 지나갔다. 그는 여느 때처럼 얼굴을 붉혔으나 그날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불쾌함까지 맛보았다. "내가 멍청했군. 저 소녀는 설령 다시 태어나도 내 아내가 될 법한 여자가 아니야"――그런 절망에 가까운 심정도 한동안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소를 기르는 젊은이가 아니란 대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건 사람 좋은 그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는 그 후로 모든 걸 이 미지의 답에 걸고서 두 번 다시 괴로운 기억을 하지 않기 위해 당분간 그 우물에 다가가지 말자고 홀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저녁, 아메노야스카와의 강가를 걷고 있자니 그 젊은이가 말을 씻기고 있는 걸 보았다. 젊은이는 척 보아도 그와 만난 게 겸연쩍은 듯한 눈치였다. 동시에 그 또한 말을 꺼내기 어려워 한동안 저녁노을을 받는 사철쑥 안에 자리한 채 맨질맨질 물을 끼얹고 있는 검은 말의 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서서히 묘하게 괴로워지기 시작했기에, 일단 화제를 트기 위해 눈앞의 말을 가리키며
 "좋은 말이로군. 누구 말이지?"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자 젊은이는 의외로 의기양양한 눈초리를 짓더니
 "제 겁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래. 그건――"
 그는 감탄사를 삼키고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젊은이는 모르는 체할 수 없었는지
 "저번에 맡은 곡옥 말입니다만――"하고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그래, 건네줬나?"
 그의 눈동자는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품었다. 젊은이는 그와 눈을 마주하자 황급히 시선을 피하면서 괜히 말이 발버둥 치는 데 화내며
 "네, 줬지요."
 "그래? 그럼 나도 안심이군."
 "그런데――"
 "그런데?"
 "당장은 대답할 수 없다는군요."
 "뭐, 서두를 거 없어."
 그는 기운차게 답하고는 더 이상 젊은이에겐 볼일이 없다는 양 저녁 아지랑이가 감도는 봄의 강가를 걷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까지 없었던 행복이 파도치고 있었다. 사철쑥도, 하늘도, 그 하늘서 홀로 지저귀는 종달새마저도 그는 마음에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든 채 걸으며 자칫 아지랑이 사이로 사라질 법한 종달새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종달새야. 너는 내가 부러운 듯하구나. 부럽지 않다고? 거짓말 말라지. 그럼 왜 그렇게나 지저귀느냐. 종달새야, 야, 종달새야. 대답하거라, 종달새야……"
 

열여덟


 스사노오는 그로부터 대여섯 날 동안 행복 그 자체인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쯤부터 누가 만든 건지도 모를 노래가 마을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건 추한 산갈가마귀가 아름다운 백조에게 사랑을 품어 온갖 새들한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들은 스사노오는 이제까지 드리우던 행복의 태양 아래에 구름이 낀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약간의 불안을 느끼면서도 아직 행복한 꿈에서 깨지 않았다. 이미 아름다운 백조는 추한 산갈가마귀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온갖 새는 어리석은 그를 비웃는 게 아니라 되려 행복해진 그를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있다――그는 그렇게 믿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거 같았다.
 때문에 그는 그 후로도 단지 같은 대답을 듣고 싶단 이유로 소를 기르는 젊은이를 만날 때마다
 "그 곡옥은 확실히 건네준 거겠지"하고 가볍게 확인을 받을 뿐이었다. 젊은이는 역시나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네, 확실히 건넸지요. 하지만 아직 대답은――"하고 애매하게 말을 흐릴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건넸다는 말에 만족하여 더 이상 캐묻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사나흘 쯤 지난 어느 밤, 그가 산에서 잠든 새라도 잡으려 달빛을 따라 마을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피리를 불면서 옅은 아지랑이 핀 거리를 유유히 걸어왔다. 야만스러운 그는 어릴 적부터 노래나 음악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털머위 냄새가 나는 봄날의 달밤에 휘감긴 채 서서히 다가오는 피리 소리를 듣는 건 그마저도 살짝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그와 피리 부는 남자는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상대는 스사노오가 코앞까지 와도 여전히 피리 부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길을 양보하면서 하늘 한가운데 걸린 달빛을 통해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 휘황찬란한 곡옥, 그리고 입에 얹은 대나무 피리――상대는 키가 크고 세련된 젊은이가 분명했다. 그는 물론 이 젊은이가 자신의 야성을 경멸하는 적 중 하나란 걸 알았다. 때문에 당초엔 어깨를 꼿꼿이 세운 채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간 그 순간, 무언가가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끌었다. 상대의 가슴 위에 그의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그 벽옥이 흐림 한 점 없는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지 않던가.
 "기다려."
 그는 곧장 팔을 뻗어 젊은이의 소매를 붙잡았다.
 "뭐 하는데."
 젊은이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면서 온 힘을 쥐어짜 내 소매를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백만 마력이라도 되는 듯한 스사노오의 손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떨쳐낼 수 없었다.
 

열아홉


 "너 이 자식, 그걸 누구한테 받았지?"
 스사노오는 상대의 목을 조이면서 물어뜯듯이 물었다.
 "이거 놔. 이 자식이, 뭐 하는 거야. 놓으라니까."
 "자백하기 전에는 못 놓지."
 "안 놓으면――"
 젊은이는 소매를 붙잡힌 채로 피리를 들어 올려 상대에게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스사노오는 손의 힘을 풀 것도 없이 놀고 있던 다른 손을 써서 어려움 없이 그 피리를 비틀어 버리고 말았다.
 "자, 자백해라. 자백하지 않으면 다음엔 네 목을 졸라 죽이겠다."
 실제로 스사노오의 마음속에선 분노가 날뛰고 있었다.
 "이 곡옥은――내가――내가 말하고 바꾼 거야."
 "거짓말 마라. 이건 내가――"
 "그 소녀에게" 어째서인지 스사노오는 혀가 굳어 그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상대의 얼굴에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다시 한 번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 마라."
 "이거 놔. 너야말로――젠장, 목이 조이잖아――그렇게나 놓는다고 말한 주제에, 너야말로 거짓말하고 있잖아."
 "증거는 있나, 네가 그 곡옥과 말을 바꿨다는 증거 말이야."
 그러자 젊은이는 여전히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그 녀석한테 물어보면 되잖아"하고 토해내는 듯한 한 마디를 했다. "그 녀석"이 소를 기르는 젊은이라는 건 분노에 미친 스사노오라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좋다. 그럼 그 녀석한테 물어보지."
 스사노오는 뜻을 굳히고는 대뜸 상대를 질질 끌며 그 소를 기르는 젊은이가 홀로 살고 있는 작은 집으로, 여기서 그리 말지 않은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그동안에도 번번히 소매를 잡은 스사노오의 손을 떨쳐내려 용을 썼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강철처럼 상대를 붙들어서 때리고 두들겨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봄의 달이 떠있었다. 거리서도 털머위 냄새가 달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스사노오의 마음속에는 마치 거센 폭풍이 부는 듯한 하늘에서 분노와 질투의 번개가 솟구치는 의혹의 구름을 가르며 끝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를 속인 건 그 소녀일까. 아니면 소를 기르는 젊은이일까. 아니면 이 젊은이가 교활한 수단을 써서 소녀에게서 곡옥을 뺏은 걸까……
 그는 젊은이를 질질 끌며 작은 집에 이르렀다. 다행히 이 작은 집의 주인은 아직 잠들지 않았는지, 희미한 등불 하나가 현관 아래에 걸린 발 사이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소매를 붙잡힌 젊은이는 이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그의 손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마지막 노력에 성공했다. 그런가 하면 시기에 걸맞지 않은 바람이 젊은이의 얼굴을 밀어내며 발마저 공중에 띄어두니 주위가 희미하게 어두워져 불똥 하나가 사방으로 튀는 것처럼도 느껴졌다――현관에 이르는 동시에 달빛을 막아내던 발 안으로 던져진 것이었다. 작은 강아지를 던지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스물


 집 안에선 소를 기르는 젊은이가 토기에 붙인 등불 아래서 짚신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문가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기척을 느꼈을 때, 바쁘던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순간, 집의 발이 밤바람을 크게 들이는가 싶더니, 대뜸 젊은이 하나가 흐트러진 발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일으키며 반쯤 찢겨 나간 발 밖에 당황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시선 너머에선 온몸으로 등불 빛을 받은 스사노오가 온 얼굴에 분노를 드리운 채 작은 산처럼 문을 막고 있었다. 젊은이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죽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리고는 한동안 좁은 집을 두리번두리번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스사노오는 거칠게 젊은이 앞에 이르러서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봐. 분명 그 소녀에게 내 곡옥을 건넸다고 하지 않았나?"하고 원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젊은이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왜 이 남자의 목에 걸려 있지?"
 스사노오는 그 아름다운 젊은이를 향해 불타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잃은 건지 죽어버렸는지 눈을 감은 채 발 안에 쓰러져 있었다.
 "건넸다는 건 거짓말이었나?"
 "아뇨, 거짓말이라니요. 건넸습니다. 정말로 건넸습니다."
 소를 기르는 젊은이는 처음으로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건넸습니다――건넸습니다만 실은 그 벽옥 대신에 산호의――그 옥을……"
 "왜 그런 짓을 했지?"
 스사노오의 목소리는 마치 번개처럼 젊은이의 말을 한 마디씩 박살 냈다. 그는 기어코 띄엄띄엄 아름다운 젊은이가 권한 것처럼 벽옥과 산호를 바꾸고 보답으로 검은 말을 받은 것까지 남김없이 자백하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이, 스사노오의 마음속에는 서서히 울고 싶고 소리치고 싶은 갑갑한 수치와 분노가 큰 바람처럼 몰려왔다.
 "그럼 그 옥은 건넸나?"
 "건넸습니다. 건넸습니다만――"
 젊은이는 주저했다.
 "건넸습니다만――그 소녀는――그런 소녀지 않습니까――백조가 산갈가마귀 따위에게―― 실례되는 말이지만――받지 않는다고――"
 젊은이는 끝가지 말을 잇지 못하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걷어 차여 쓰러진 다음 순간에는 커다란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그 박자에 등불이 쓰러지고 마루에 쌓인 짚에 불이 옮겨붙었다. 그 불에 정강이가 타버린 소를 기르는 젊은이는 비명을 꽥 지르며 벌떡 일어나더니 무작정 몸을 기며 뒤편으로 도망쳤다.
 분노에 미친 스사노오는 마치 다친 멧돼지처럼 맹렬히 그 뒤를 쫓아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 들려 한 그 순간, 이번에는 발밑에 쓰러져 있던 아름다운 젊은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이 또한 미친 듯이 검을 뽑고서 불 안에 한 쪽 무릎을 꿇은 채로 대뜸 스사노오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물하나


 그 검의 빛을 본 스사노오의 마음속에선 불쑥,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피를 동경하는 야성이 눈을 떴다. 그는 재빨리 바닥을 튕겨내 상대의 무기를 뛰어넘고는 곧장 허리춤의 검을 뽑곤 성난 황소와 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내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상대를 베었다. 소용돌이치는 연기 속, 두 사람의 검은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눈을 따갑게 찌르는 듯한 불똥을 튀겼다.
 하지만 아름다운 젊은이는 그의 적이 되지 못했다. 스사노오가 넓은 검을 휘두를 때면 이 젊은이는 용서 없이 사지에 몰려갔다. 아니, 스사노오는 몇 합을 나누는 사이 거의 단숨에 상대의 머리를 쪼갤 수 있는 곳까지 육박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독 하나가 그의 머리를 향해 기세 좋게 날아왔다. 하지만 운 좋게 빗나가 그의 발밑에 떨어지는 동시에 조각조각 박살 나버렸다. 그는 검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노기를 품은 눈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뒤편 거적문 앞에 방금 전 그에게 등을 보인 소를 기르는 젊은이가, 아름다운 젊은이를 구하기 위한 건지 충혈된 눈을 하고서 커다란 통 하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황소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젊은이가 통을 던지기 전에 검에 혼신의 힘을 담아 아름다운 젊은이의 정수리를 내려찍으려 했다. 하지만 커다란 통은 이미 불이 붙은 하늘서 바람을 가르며 쿵하고 그의 머리에 맞았다. 아무리 스사노오라도 눈이 돌아간 걸까. 큰 바람을 맞은 깃발처럼 비틀비틀거리더니 옆으로 넘어지려 했다. 그 사이 아름다운 젊은이는 몸을 홱 뒤집어서는――불이 옮겨붙은 발을 벗어던지며 한 손에 검을 든 채 조용한 봄밤으로 일사불란 도망쳐 갔다.
 스사노오는 이를 앙 다문 채 발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눈을 떠보니 불과 연기로 가득 찬 집 안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망쳤구나. 그런다고 놓칠 줄 아나?"
 그는 머리와 옷을 태운 채 현관의 발을 떨쳐내고는 비틀비틀 집 밖으로 나왔다. 거리를 비추던 달빛에 지붕을 태우고 올라오는 불빛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한낮처럼 밝아졌다. 또 그 밝은 거리에는 제각기 집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몇 명이나 쭉 줄지어 있었다. 그뿐일까. 사람들은 검을 든 그를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렁이며 "스사노오다, 스사노오야"하는 목소리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목소리를 받으며 한동안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하물며 그 외엔 달리 분별도 가지 않을 정도로 살기를 머금은 그의 마음속에선 미쳐버릴 거 같은 혼란이 서서히 강해지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거리의 인파는 더욱 많아졌다. 그와 동시에 소란스러운 목소리도 어느 틈엔가 증오를 머금으며 험악함을 두르기 시작했다.
 "방화범을 죽여라."
 "도둑을 죽여라."
 "스사노오를 죽여라."
 

스물둘


 이때, 마을 뒤편에 자리한 언덕 위 느릅나무 아래에는 수염이 긴 한 노인이 유유히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단지 부엉이 울음만을 마치 산 그 자체의 숨소리 삼은 조용한 봄밤은, 털머위꽃 향기를 감싼 부드러운 아지랑이로 하늘서 띄엄띄엄 떠오른 별빛을 이따금 희미하게 가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눈앞의 마을에서 생각지도 못한 연기가 하늘로 뻗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연기 속에서 튀는 불똥을 보면서도 여전히 무릎을 안은 채로 느긋이 노래를 부르며 놀란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치 벌집이라도 부순 것처럼 술렁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뿐 아니라 그 소리는 점점 커져서 이윽고 전쟁이라도 벌어졌나 싶을 정도로 격렬한 고함마저 머금기 시작했다. 아무리 노인이라도 조금 의외였는지, 하얀 눈썹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귀에 두 손을 얹고서 심상치 않은 마을의 소동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거 참, 검끼리 부딪히는 소리마저 들리는구나."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동안은 몸을 꼿꼿이 편 채로 끝없이 금가루를 날리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마을에서 도망친 듯한 예닐곱 명의 남녀가 숨을 헐떡이며 언덕을 올라왔다. 개들 중엔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는지 상투도 틀지 않은 아이나 자다 일어나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피부를 드러낸 소녀, 활보다 더 허리가 굽어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노파마저 섞여 있었다. 언덕 위로 오른 그들은 서로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발을 멈추더니 밤하늘을 태우는 불을 돌아 보았다. 이윽고 느릅나무 아래에 서있던 노인을 발견한 누군가가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 빈약한 무리는 "오모이카네노미코토, 오모이카네노미코토"하고 노인을 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동시에 밤눈에도 아름다워 보이는 소녀 하나가 "백부님"하고 부르며 자신을 돌아 본 노인을 향해 아기새처럼 달려갔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냐."
 다시 눈살을 찌푸린 오모이카네노미코토는 자신에게 기대는 소녀를 한 팔에 품은 채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무슨 일인지 스사노오가 대뜸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답한 건 그 쾌활한 소녀가 아닌 눈과 코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한 노파였다.
 "뭐, 스사노오노가 난동을 부려?"
 "네, 해서 수많은 젊은이가 스사노오를 붙들려 했지요. 그런데 이번엔 또 평소에 스사노오를 따르는 젊은이들이 가만 있지 않았으니, 기어코 저런 대소동이 시작되어버린 거지요."
 오모이카네미코토는 생각에 잠긴 눈초리로 마을 위로 오르는 연기와 자신의 가슴에 기댄 소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달빛을 받은 탓일까. 옆머리가 흐트러진 소녀의 뺨은 투명하게 비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불을 다룰 때는 조심해야 한다――스사노오만이 아니야. 불을 다룰 땐 조심해야 해――"
 오모이카네노미코토는 주름투성이인 얼굴에 쓴웃음을 짓고는 한 층 더 넓어진 화마를 바라보며 말없이 떨고 있는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물셋


 마을의 전투는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소수는 다수의 적이 되지 못했다. 스사노오는 아군이 되어준 젊은이들과 함께 적의 손에 생포되었다. 평소부터 그에게 악의를 품고 있던 젊은이들은 공처럼 그를 똘똘 묶은 데다가 여러 난폭한 능욕을 가했다. 그는 얻어 맞고 걷어 차일 때마다 지상을 데굴데굴 구르며 소처럼 울부 짖었다.
 마을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규칙을 따라 그를 죽이고 소동의 죄를 갚게 하려 했다. 하지만 오모이카네노미코토나 타지카라오노미코토 두 권력가만은 간단히 찬동하지 않았다. 타지카라오노미코토는 스사노오의 죄를 미워하면서도 그의 비범한 힘에는 애석함을 느꼈다. 이는 또 동시에 오모이카네미코토가 그만한 젊은이를 쉽사리 죽이고 싶지 않은 이유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오모이카네노미코토는 그만 아니라 어떤 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극단적인 혐오를 품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죄를 정하기 위해 삼일 동안 의논을 거듭했다. 하지만 두 미코토는 도무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사형 대신에 추방을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를 마냥 풀어주어 외국의 넓은 천지를 자유롭게 거닐게 한단 말인가. 이는 그들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관대한 조치였다. 그들은 먼저 스사노오의 수염을 한 올도 빠짐없이 뽑아냈다. 또 그의 손발톱을 마치 조개라도 벗겨내는 듯이 거침없이 뽑아버렸다. 또 그의 밧줄을 풀고는 거의 손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사나운 사냥견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피로 범벅이 된 채 거의 기다시피 하며 마을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가 타카마가하라노쿠니를 둘러싼 산봉우리를 넘은 건 그로부터 이삼 일 가량 지난 흐린 오후의 일이었다. 그는 산 정상에 이르렀을 때 험악한 바위군 위에 올라 나고 자란 마을이 위치한 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는 하얀 안개 바다만이 평지를 희미하게 비출 뿐이었다. 그는 바위 위에서 아침노을이 오르는 하늘을 짊어진 채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계곡 사이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전처럼 그의 귀에 익숙한 속삭임을 보내왔다. "스사노오야. 너는 무얼 찾고 있느냐. 나와 함께 가자. 나와 함께 가자. 스사노오야……"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그러는 사이 아침 노을의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뚝뚝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거적때기 같은 한 장의 옷 말고는 아무것도 두르고 있지 않았다. 목걸이와 검은 생포 되었을 때 빼앗겼다. 비는 이 추방자 위에서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바람도 옆으로 거칠게 불어서는 비를 머금은 옷소매를 다리 위로 밀어내곤 했다. 그는 이를 앙 다물며 발밑만을 보며 걸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건 발밑에서 거듭되는 바위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두운 안개가 산이나 협곡을 붙들고 있었다. 안갯속에선 비바람 소리인지 계곡의 물소리인지가 원근감을 꼬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선 그보다 더 강렬하고 쓸쓸한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스물넷


 이윽고 발밑의 바위는 습한 이끼가 되었다. 이끼는 곧 깊은 양치 덩굴이 되었다. 또 키가 큰 얼룩조릿대로――스사노오는 어느 틈엔가 산 중턱을 차지한 밀림 속에 들어온 것이었다.
 밀림은 쉽사리 끝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바람도 여전히 멈출 줄 몰랐다. 하늘에선 전나무나 슬송나무 가지가 어두운 안개를 떨치며 꺼림칙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얼룩조릿대를 가르며 무작정 그 안을 가로질렀다. 얼룩조릿대는 그의 머리를 묻고 끝없이 젖은 잎을 날렸다. 마치 숲 전체가 그의 길을 막기 위해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쉼 없이 걸었다. 그의 마음속에선 여전히 갑갑하게 들어 춘 우울한 분노가 불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밀림은 무언가 난폭한 기쁨을 일깨우는 힘을 지닌 듯했다. 그는 풀이나 담쟁이를 힘껏 팔로 밀어내면서 이따금 큰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비바람에 답하곤 했다.
 낮이 조금 지났을 즘, 기어코 계곡 하나가 그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계곡의 물 너머엔 도려낸 듯한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물줄기를 따라 다시 한 번 얼룩조릿대를 갈랐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즘, 덩굴로 짠 다리 하나가 물안개를 일으키는 빗속에서 반대편 강가를 향해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부두를 둔 절벽에는 모닥불 연기가 나부끼는 동굴 몇 개가 보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다리를 건너 구멍 중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구멍 안에선 두 여자가 화롯불 앞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불빛을 받아 마치 색칠이라도 한 것처럼 붉어 보였다. 한 명은 원숭이 같은 노파였으나 한 명은 아직 젊어 보였다. 두 사람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동굴 안쪽으로 도망 치려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 이외에 남자가 없는 걸 보곤 맹렬히 동굴 안으로 돌진했다. 그리곤 먼저 어려울 것 없이 노파를 붙잡아 땅에 꽂아버렸다.
 젊은 여자는 벽에 걸린 작은 칼에 손을 뻗자마자 재빨리 그의 가슴을 찌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한 손을 휘둘러 그 칼을 떨궈버렸다. 여자는 더욱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집요하게 그를 공격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검 또한 바닥을 굴렀다. 그는 그 검을 줍고는 끝을 물어 어려움 없이 둘로 쪼개 버렸다. 그리곤 냉소를 품은 채로 맞서려 하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이미 도끼를 들고서 다시 한 번 그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검을 부러트리는 걸 보고는 곧장 도끼를 버리고 그의 자비에 호소라도 하는 것처럼 바닥 위에 몸을 낮추고 말았다.
 "배가 고프군. 식사 준비를 해라."
 그는 손에서 힘을 풀어 원숭이 같은 노파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리곤 화롯불 앞에 가서는 턱하니 앉았다. 두 여자는 그의 명령을 따라 묵묵히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스물다섯


 동굴 안은 넓었다. 벽에는 여러 무기가 걸려 있었다. 무기는 화롯불을 받아 하나같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바닥에는 사슴이나 곰 가죽이 몇 장이나 깔려 있었다. 그런 데다 무슨 냄새인지 희미하게 달달한 향이 따스한 공간 안에서 기분 좋게 떠다녔다.
 그러는 사이 식사 준비가 되었다. 야수 고기, 계곡 생선, 숲속의 열매, 말린 조개――그런 음식이 그릇이나 잔에 쌓인 채로 그의 앞에 놓였다. 젊은 여자는 병을 들고 그에게 술을 따르기 위해 화로 옆에 앉았다. 가까이에 앉아서 보니 색이 하얗고 머리가 풍부한, 귀여운 인상의 여자였다.
 그는 짐승처럼 먹고 마셨다. 그릇이나 잔은 서서히 하나도 남김없이 비워졌다. 여자는 잘 먹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이처럼 웃었다. 그에게 칼을 꽂으려 한 이전의 사나운 기색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자, 이걸로 배는 채웠구나. 이제 입을 옷을 한 장 다오."

 식사를 마친 그는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하품을 했다. 여자는 동굴 안쪽으로 가서 비단옷을 가져왔다. 그건 이제까지 그가 보지 못한 정밀한 모양이 새겨진 옷이었다. 그는 옷을 다 입고는 벽 위의 무기 중 두추대도 하나를 꺼내 왼쪽 허리춤에 찼다. 그러곤 또 화로 앞에 가서 다시 한 번 털썩 자리를 잡았다.
 "아직 볼일이 있으신가요."
 얼마 뒤, 여자가 다시 옆으로 와 주저하듯 물었다.
 "나는 이 동굴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려서――어쩌실 생각이신지요."
 "승부를 할 생각이다. 나는 여자를 겁줘 도둑질했단 소리는 듣고 싶지 않거든."
 여자는 얼굴에 들러붙는 머리를 올리며 또렷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기다리실 거 없습니다. 제가 이 동굴의 주인이니까요."
 의외였던 스사노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자는 한 명도 없나?"
 "한 명도 없지요."
 "이 근처 동굴에는."
 "제 동생들이 두세 명씩 살고 있습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두세 번 고개를 저었다. 불빛, 바닥의 가죽, 그리고 벽 위에 걸린 도와 검――그에겐 이 모든 게 괴상한 환상처럼만 느껴졌다. 특히 이 젊은 여자는 휘황찬란한 목주나 검을 차고 있는 만큼, 더욱 인간과 거리가 먼 야마히메처럼만 느껴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비바람을 헤맨 후 이렇게 위험할 게 없는 따듯한 동굴에 앉아 있는 건 확실히 마음이 편했다.
 "동생은 많나?"
 "열여섯 명 있습니다――할머니께서 알리러 갔으니 곧 뵈러 오겠지요."
 스사노오는 그제야 원숭이 같은 노파가 어느 틈엔가 모습을 감춘 걸 깨달았다.
 

스물여섯


 스사노오는 무릎을 안은 채로 동굴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여자는 화롯불 안에 새로운 장작을 넣으며
 "저기――이름을 여쭤도 될까요. 저는 오오케츠히메라 합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스사노오다."
 그가 이름을 밝히자, 오오케츠히메는 놀란 얼굴로 새삼스레 이 추한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스사노오의 이름은 그녀의 귀에도 전해진 듯했다.
 "그럼 이제까지 저 산 너머의 타카마가하라노쿠니에 계셨던 건가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카마가하라노쿠니는 좋은 곳이라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동시에, 잠시 잠잠해졌던 가슴속 불꽃이 다시 한 번 그의 눈 속에서 불타기 시작했다.
 "타카마가하라노쿠니 말이냐. 그곳은 쥐가 멧돼지보다 강한 곳이지."
 오오케츠히메는 작게 웃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이빨이 불빛을 받아 선명히 보였다.
 "여기는 어떤 곳이지?"
 그는 구태여 차갑게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서 그의 듬직한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며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미간 사이 주름에 짜증을 드리우며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했다. 오오케츠히메는 처음으로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촉촉한 요염함을 눈에 드리운 채
 "여기는――여기는 멧돼지가 쥐보다 강한 곳이지요"하고 대답했다.
 그때 희미하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노파를 선두로 열다섯 명의 젊은이가 비바람에 주눅 드는 기색도 없이 하나둘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뺨을 붉게 칠하고 흑발을 높은 데서 묶고 있었다. 여자들은 하나둘 오오케츠히메와 친근한 인사를 나누고는 당황한 그의 주변에 익숙하다는 양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목주의 색, 귀걸이의 빛, 그리고 옷이 스치는 소리――불빛 안에 그런 게 충만해진 탓일까, 불쑥 동굴 안이 좁아진 것만 같았다.
 열여섯 명의 여자는 곧장 그를 둘러싸고선 이런 산과 어울리지 않는 기운찬 술잔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당초 여자들이 권하는 술을 바보처럼 거침없이 비워 갔다. 하지만 취기가 돌기 시작하자 서서히 목소리가 커지고 웃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어떤 여자는 옥으로 장식된 코토를 연주했다. 또 어떤 여자는 잔을 멀리하고 요염한 사랑 노래를 불렀다. 동굴 안은 그들의 목소리를 반사시킬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밤이 되었다. 노파는 화로에 장작을 넣는 동시에 몇 개의 기름 촛대에 불을 붙였다. 낮처럼 밝은 빛을 받는 스사노오는 질척질척 취한 채로 전후좌우를 둘러싼 여자들에게 한껏 휘둘렸다. 열여섯 명의 남자는 이따금 그를 두고 겨루며 서로 교태를 부리곤 했다. 하지만 대개는 오오케츠히메가 동생들이 화내는 것도 아랑곳 않고 술에 취한 그를 독점하려 했다. 그는 비바람도, 산도, 혹은 또 타카마가하라노쿠니마저 잊고서 동굴을 채운 기름기 속에 완전히 녹아내려 있는 듯했다. 단지 그런 소동 와중에도 원숭이와 같은 노파만은 조용히 구석에 앉아서는 열여섯 명의 여자가 사람이 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추태를 부리는 광경에 비꼼 섞인 곁눈질을 보내기만 할 따름이었다.

 

스물일곱


 밤은 서서히 깊어져 갔다. 텅 빈 접시나 병은 이따금 큰 소리를 내며 바닥 위를 굴렀다. 바닥 위에 깔려 있던 가죽도 상에서 끝없이 흐르는 술 탓에 어느 틈엔가 푹 젖어 버렸다. 열여섯 명의 여자들은 거의 구분도 가지 않았다. 그들 입에서 새어 나오는 건 의미 없는 웃음소리나 괴로운 숨소리뿐이었다.
 이윽고 노파는 자리서 일어나 밝은 등불 촛대를 하나씩 꺼트렸다. 그 후엔 검게 타오른 채 꺼지기 직전의 화롯불만이 남았다. 그 희미한 불빛은 열여섯 여자를 둘러싼 작은 언덕과 같은 그의 모습을 한사코 몽롱히 비추어 갔다……
 다음 날, 눈을 뜬 스사노오는 동굴 안쪽에 마련된 비단이나 가죽 침상 안에서 홀로 누워 있었다. 침상에는 깔개 대신에 복숭아꽃이 수북하게 깔려 있었다. 어제 동굴에서 진동을 하던 신비한 단내는 이 복숭아꽃의 냄새임에 분명했다. 그는 코를 벌렁거리며 한동안은 멍하니 바위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광기를 머금은 어젯밤의 기억이 꿈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또 동시요 묘한 불쾌함이 서서히 그의 마음을 덮쳤다.
 "빌어먹을."
 스사노오는 그렇게 신음하면서 기세 좋게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 박자에 복숭아꽃이 공중에 하늘하늘 날렸다.
 동굴 안에선 노파가 여념 없이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오케츠히메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신발을 신고 두추대도를 허리에 차고는 노파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은 채 큰 걸음으로 동굴 밖으로 향했다.
 불어오는 미풍은 그의 머리에 고인 숙취를 떨쳐주었다. 그는 크게 팔짱을 끼고서 계곡 너머서 살랑이는 상쾌한 밀림의 나뭇가지들을 보았다. 밀림 하늘에선 높은 산봉우리가 중턱에 걸린 안개 위에 거친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커다란 산봉우리는 이미 아침 햇살을 받고서 마치 그를 내려다보며 소리도 없이 지난밤의 추태를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이 산봉우리와 밀림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는 불쑥 구역질을 느낄 정도로 동굴 안 공기가 불쾌해졌다. 이제는 화롯불도 술도 내지는 침상의 복숭아꽃도 모조리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부패의 냄새로 충만한 것처럼만 느껴졌다. 특히 그 열여섯 명의 여자는 하나같이 시취를 숨기기 위해 교묘한 분장을 한 시체처럼만 느껴졌다. 그는 산봉우리 앞에서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쉬고는 초연히 고개를 숙인 채 동굴 앞에 걸려 있는 덩굴 다리를 건너려 했다.
 하지만 그때 밝은 웃음소리가 조용한 계곡에서 울리며 그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동굴 앞에 놓인 좁은 산길 너머서 어제보다 아름다운 오오케츠히메가 열다섯 명의 동생을 이끌고서 재빨리 그의 모습을 발견해 눈부신 비단 소매를 나부끼며 달려오던 참이었다.
 "스사노오노미코토, 스사노오노미코토."
 그들은 아기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입을 모아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거의 숙명적으로 모처럼 다리를 건널 뻔한 스사노오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그는 자신의 물러터짐에 놀라면서 어느 틈엔가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들이 다가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스물여덟


 그 후, 스사노오는 이 봄과 같은 동굴 안에서 열여섯 명의 여자와 방탕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한 달 가량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는 매일 술을 마시고 계곡의 생선을 잡으며 생활했다. 계곡 상류에는 폭포가 있고, 또 그 폭포 주위에는 일 년 내내 복숭아꽃이 피었다. 열여섯 명의 여자들은 매일 아침 이 폭포로 가서 복숭아꽃 냄새를 머금은 물에 몸을 씻었다. 그 또한 아직 아침 햇살이 들기도 전에 여자들과 함께 물을 끼얹기 위해 먼 상류까지 얼룩조릿대를 가르며 오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위대한 산들도 계곡을 둔 밀림도 서서히 그와 교류가 없는 죽은 자연으로 변해 갔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조용한 계곡 공기를 마셔도 조금의 감동마저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심적 변화가 마음에 걸리는 일도 없었다. 때문에 그는 술에 절여진 매일에 안주하며 환상과 같은 행복을 즐겼다.
 하지만 어느 밤, 꿈속의 그는 산위의 바위 위에 서서 다시 한 번 타카마가하라노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카마가하라노쿠니에는 햇살이 잘 들어와 아메노야스카와의 커다란 물이 잘 달궈진 검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강한 바람을 맞으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쑥 말로 다 못할 쓸쓸함이 가슴 한가득 올라오는 듯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소리 내며 울었다. 그 소리에 눈을 떴을 때, 그의 뺨에선 눈물 한 줄기가 차가운 자국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희미한 횃불을 받는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그와 같은 복숭아꽃 침상에선 술 냄새가 나는 오오케츠히메가 조용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는 물론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 눈을 주자, 그녀 또한 비록 눈썹과 눈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죽어 가는 노파와 별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공포와 혐오에 이를 꽉 깨물며 약한 온기가 감도는 침상을 벗어났다. 그리고 재빠르게 채비를 갖추고는 그 원숭이와 같은 노파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남 몰래 동굴 밖으로 나왔다.
 밖에선 어두운 밤 밑바닥에 계곡의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는 덩굴 다리를 건너자마자 짐승처럼 얼룩조릿대를 가르며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는 밀림의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별빛, 차가운 안개, 이끼 냄새, 부엉이의 눈――그는 그 모든 게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힘으로 흘러넘치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날이 밝을 때까지 걸었다. 밀림의 여명은 아름다웠다. 어두운 솔송이나 전나무로 가득 찬 하늘이 불타는 듯이 붉게 물들었을 때, 그는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며 그 동굴서 도망쳐 나온 자신의 행복을 축복했다.
 이윽고 태양이 숲의 바로 위에 떴다. 그는 가지 끝에 매달린 산비둘기를 바라보며 화살을 잊고 온 걸 후회했다. 하지만 배를 채울 수 있는 과일은 어디에나 잔뜩 있었다.
 저녁노을은 험악한 절벽 위에서 쓸쓸해하는 그를 발견했다. 숲은 그 절벽 아래서도 침엽수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는 바위에 걸터앉아 계곡으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어두컴컴한 동굴 벽에 걸려 있는 검이나 도끼를 떠올렸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산 너머서 열여섯 명의 여자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건 상상도 못할 정도로 괴상한 유혹을 머금은 환상이었다. 그는 빨려 드는 것처럼 어두워지는 바위와 숲을 바라보며 그 유혹을 떨쳐내는데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 동굴에서 겪은 화롯불의 추억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망처럼 조금씩 그의 마음을 조여 왔다.
 

스물아홉


 하루가 지나, 스사노오는 다시 그 동굴로 돌아왔다. 열일곱 명의 여자들은 그가 도망친 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도무지 무관심을 겉꾸민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애초부터 기이한 무감수성을 지닌 거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무감수성은 한동안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다시 한 달 가량 지나자, 되려 그 무감수성 덕에 전보다 더 편하게 한사코 깨지 않는 취기와 같은 기이한 행복에 잠길 수 있었다.
 다시 일 년 가량의 세월이 꿈처럼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들은 어디서 데려온 건지 모를 개 한 마리를 기르게 되었다. 개는 새까맣고 송아지는 될 것처럼 커다란 수컷이었다. 그들은, 특히 오오케츠히메는 이 개를 인간처럼 귀여워했다. 그도 처음엔 그들과 마찬가지로 접시의 생선이나 고기를 나눠주는 걸 꺼리지 않았다. 또 혹은 취중 장난으로 스모를 하기도 했다. 개는 이따금 앞발을 뻗어 술에 취한 그를 넘어트리곤 했다. 여자들은 그때마다 손뼉과 함께 밝게 웃으며 기개 없이 넘어진 그를 놀리곤 했다.
 그러나 개는 매일 같이 더 많은 사랑을 받아 갔다. 오오케츠히메는 기어코 식사 때마다 그와 같은 접시나 병을 개 앞에도 놓아주게 되었다. 한 번은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개를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느 때와 달리 아름다운 눈에 다른 색을 품고서 이기적인 그를 꾸지랐다. 그런 분노를 사면서까지 개를 혼쭐 내줄 용기는 스사노오에게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는 결국 도리 없이 개와 함께 고개를 먹고 술을 마셨다. 개는 그가 불쾌해하는 걸 안다는 양 항상 접시를 핥으며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진 참아낼 수 있었다. 어느 아침, 그는 여자들보다 한 발짝 늦게 폭포에 몸을 씻으러 갔다. 계절은 가을에 가까웠으나 폭포 주위의 복숭아는 여전히 계곡의 물안개 속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얼룩 조릿대를 가르며 복숭아 낙엽을 품은 물웅덩이로 내려가려 했다. 그때, 그는 별생각 없이 검은 짐승이 물을 끼얹고 있는 걸 보았다. ××××××××××××××××××××××××××××××. 그는 곧장 허리춤의 검을 뽑아 단숨에 개를 찌르려 했다. 하지만 여자들이 하나같이 개를 감싸는 통에 자유롭게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그 사이 개는 물을 질질 흘리며 폭포 밖으로 올라와 동굴 쪽으로 도망쳐버렸다.
 그 후론 매일 밤 술잔치가 벌어져도 열여섯 명은 스사노오가 아닌 개를 두고 다투었다. 그는 술에 취한 채로 동굴 안쪽에 몸을 틀고 하룻밤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의 마음은 개를 향한 불타는 듯한 질투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질투가 얼마나 얄팍한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밤, 그가 아직 동굴 안에서 우는 얼굴을 두 손에 담고 있자니, 불쑥 누군가가 들어와 두 손으로 그를 안으며 요염한 말을 속삭여주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고는 희미한 등불을 통해 가만히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와 동시에 성이 난 목소리를 지르며 대뜸 상대를 밀쳐냈다. 상대는 어려울 것도 없이 바닥에 쓰러져 괴로운 신음을 내쉬었다――허리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원숭이 같은 노파의 목소리였다.
 

서른


 노파를 집어던진 스사노오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찌푸린 채 호랑이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의 마음에선 순간 질투와 분노, 굴욕이 서로 뒤엉킨 채 소용돌이치게 되었다. 그의 눈앞에서 개와 놀고 있는 열여섯 명의 여자들을 보자마자 두추대도를 뽑고선 정신을 잃은 채로 여자들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개는 곧장 몸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그의 검을 피했다. 또 동시에 여자들은 흥분한 그를 말리기 위해 좌로우로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팔을 휘둘러 미쳐 날뛰는 개를 다시 한 번 찌르려 했다.
 하지만 검은 개를 대신해 그의 무기를 뺏으려 한 오오케츠히메의 가슴에 꽂혔다. 그녀는 괴로운 신음을 내며 천천히 바닥 위로 쓰러졌다. 그걸 본 여자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 도망치기 시작했다. 촛대가 쓰러지는 소리, 개가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접시나 잔이 가루가 되어 박살 나는 소리――이제까지 웃음으로 가득하던 동굴 안도 이제는 마치 폭풍과 같은 혼란의 밑바닥에 던져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처럼 잠시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칼을 버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더니 갑갑한 신음을 내쉬며 현에서 멀어진 화살보다 빠르게 동굴 밖으로 달려갔다.
 하늘에 걸린 달이 꺼림칙할 정도로 희미한 부른 빛을 내뿜었다. 숲의 나무들도 그 하늘에 어두운 가지를 뻗어 조용히 계곡을 봉쇄한 채 무어라 흉악한 일이라도 벌어지는 걸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은 채 달렸다. 얼룩조릿대는 안개를 가르며 마치 그를 메우는 것처럼 끝없이 파도를 일으켰다. 이따금 밤새가 날개에 옅은 빛을 두른 채로 바람도 불지 않는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날이 밝았을 때, 그는 커다란 호수 기슭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호수는 어두운 하늘 아래서 마치 판자의 일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파문 하나 일으키지 않았다. 조금 진정된 그에겐 주위에 우뚝선 산들의 갑갑한 여름 녹색이 거의 영원히 치유될지 모르는 우울처럼 보였다. 그는 얼룩조릿대를 가르며 마른 모래 위에 섰다. 그리고 그곳에 자리를 잡아 앉고는 쓸쓸한 수면만을 바라보았다. 먼 호수에서는 제 모습이 이중으로 겹쳐 떠올라 있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엔 불쑥 슬픔이 솟아올랐다. 그는 타카마가하라노쿠니에 있을 때, 무수한 젊은이를 적으로 돌렸다. 그런데 지금은 고작 개 한 마리가 그의 모든 숙적이었다――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오랫동안 큰 목소리로 울었다.
 그러는 사이 하늘의 색이 달라졌다. 주위를 감싼 산 위의 하늘에 두세 번 날카로운 번개가 내리쳤다. 이어서 쿵쿵 번개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그는 눈물을 멈추지 않으며 가만히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비를 머금은 바람이 얼룩조릿대를 크게 덮쳤다. 그와 동시에 호수가 어두컴컴해지더니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번개가 울렸다. 그러는 사이 주위 산이 연기를 피우더니 어디랄 것도 없이 나무가 울리며 한 층 더 어두워졌던 호수가 서서히 하얗게 물들어 갔다. 그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하늘이 기울어져 폭포와 같은 큰비가 거세게 내리쳤다.
 

서른하나


 이제 주위의 산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호수도 올라오는 수증기 속에 모습을 감추려 들었다. 단지 번개가 빛날 때마다 파도치는 수면이 순간 저 먼 곳까지 보였다. 또 다음 순간에는 번개 소리가 하늘을 찢는 것처럼 연이어 웅웅 폭발했다.
 스사노오는 흠뻑 젖은 채로 여전히 모래 위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머리 위 하늘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안에선 한껏 더러워진 자신을 향한 분개 이외엔 아무것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분개를 있는 그대로 풀어낼 힘마저―큰 나무뿌리에 머리를 박거나 호수 밑바닥에 몸을 던지는 등 단숨에 자신의 목숨을 끊을 마지막 힘마저 다 한지 오래였다. 그러니 그는 심신 모두 마치 박살 난 배처럼 허무하게 일렁이는 파도에 맞닿은 채로 새하얗게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조용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한 층 더 어두워졌다. 비바람도 힘을 더해 갔다. 그리고――대뜸 그의 눈앞 광경이 옅은 보라색이 되었다. 산이, 구름이, 호수가 모두 하늘에 반쯤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또 동시에 지축도 박살 낼 법한 낙뢰 소리가 귀를 찢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곧 다시 앞으로 쓰러졌다. 비는 쓰러진 그의 위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내리부었다. 하지만 그는 모래 안에서 반쯤 얼굴을 묻은 채로 몸을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인가 지난 후, 실신한 그는 천천히 모래 위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에는 조용한 호수가 기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는 아직 구름이 끼어 있었고, 단지 한 폭의 햇살만이 반대편 산 정상에 띠처럼 길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드리운 장소가 다른 곳보다 더 선명하게 노란색을 머금은 녹색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고개를 들고는 이 평화로운 자연을 바라보았다. 하늘도 나무들도 비 내린 뒤의 공기도, 그 모든 게 그에겐 과거에 꿈에서 본 듯한 풍경인 듯한 그리운 적막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내가 잊은 무언가가 저 산 사이에 숨겨져 있다"――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치 집어삼킬 거 같은 눈초리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먼 기억을 되짚어 봐도 간단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구름 그림자가 움직여 그를 감싼 한여름의 산에 태양빛이 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름다운 호수의 하늘을 밝혔다. 이때 그의 마음에는 이상한 전율이 전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숨을 삼키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거듭된 산 너머에서 이제까지 잊고 있던 자연의 말이 소리 없는 번개처럼 울렸다.
 그는 기쁨에 몸부림쳤다. 몸부림치면서 그 말의 위력 앞에 압도되었다. 그는 끝내 모래에 자세를 낮추고는 필사적으로 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자연은 거듭 말을 이어갔다. 그는 싫어도 그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호수는 햇살을 받아 빛나며 발랄히 그 말을 받아주었다. 그는――그 호숫가에서 자세를 낮추고 있는 자그마한 한 인간은 울고 웃었다. 하지만 산 안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는 그의 희비에도 아랑곳 않고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도처럼 끝없이 그의 위로 덮쳐 왔다.
 

서른둘


 스사노오는 호숫물을 받으며 온몸의 더러움을 씻어냈다. 또 절벽에 자리한 커다란 전나무 그늘로 가서 오랜만에 건강한 잠에 들었다. 하지만 꿈은 그동안에도 깊은 한여름 하늘 너머서 새 깃털 한 장이 떨어지는 것처럼 조용히 그의 위로 내려왔다――
 꿈속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갈라진 큰나무 하나가 그의 앞에서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때, 거한 하나가 어디서인가 나타났다. 얼굴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으나 몽롱한 금색을 빛내는 용의 목덜미 탓인지 자루에 용장식이 된 고려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단 사실만은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을 뽑은 거한은 그 검을 나무뿌리까지 깊게 꽂아냈다.

 스사노오는 그 비범한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누군가 그의 귀에
 "저 사람은 호노이카즈치노미코토다."하고 속삭여주었다. 거한은 조용히 손을 들어선 그에게 무언가 신호를 보냈다. 그는 그게 마치 이 고려검을 뽑아 보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불쑥 잠에서 깼다.
 그는 멍하니 몸을 일으켰다. 미풍을 받아 움직이는 전나무 가지에는 이미 별이 걸려 있었다. 주위서도 옅은 흰색의 호수 이외엔 얼룩조릿대의 술렁임이나 이끼의 냄새 따위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게 고작인 저녁이었다. 그는 방금 막 꾼 꿈을 떠올리면서 그런 주위에 울적한 시선을 보냈다.
 그때, 채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꿈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은 마른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는 생각할 새도 없이 그 마른 나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른 나무는 방금 전 낙뢰로 갈라진 게 분명했다. 그러니 뿌리에는 침엽이 가지와 함께 한껏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 침엽을 밟는 동시에 꿈이 꿈이 아니란 걸 알았다――마른 나무뿌리에는는 고려검 한 자루가 용장식이 된 자루를 위로 한 채 거의 코등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꽂혀 있는 것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자루를 잡고서 혼신의 힘을 담아 단숨에 그 검을 뽑아냈다. 검은 방금 막 간 것처럼 뿌리부터 끝까지 날카롭고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신들이 나를 지켜보주시는구나"――그렇게 생각하자 그의 마음에 새로운 용기가 솟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마른 나무 아래에 무릎을 꿇고서 기도를 올렸다.
 그 후, 그는 다시 전나무 그늘로 돌아와 검을 꼭 품은 채 다시 한 번 깊은 잠에 들었다. 그리고 삼일 밤낮을 죽은 듯이 잤다.
 잠에서 깬 스사노오는 다시 몸을 씻기 위해 호숫가로 다가갔다. 바람이 그친 호수는 작은 물결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그런 물은 물가에 선 그의 얼굴을 거울처럼 선명히 담아냈다. 그건 타카마가하라노쿠니에 있었을 때처럼 몸도 마음도 듬직한 추한 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 아래서는 이제까지 없었던 주름 하나가 요 일 년 간의 슬픔을 자국처럼 새겨놓고 있었다.
 

서른셋


 그 후로 그는 나 홀로 어떤 때는 바다를 또 어떤 때는 산을 넘으며 여러 나라를 헤매었다. 하지만 어떤 나라 어떤 마을도 그의 발걸음을 묶기에는 부족했다. 하나같이 이름만 다를지언정 그 안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은 타카마가하라노쿠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타카마가하라노쿠니에 미련이 없었던 그는 그 백성들에게 잠깐의 수고를 빌려주는 일은 있을지언정 백성의 일원이 되어 늙으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스사노오야, 너는 무얼 찾고 있느냐. 나와 함께 가자, 나와 함께 가자……"
 그는 바람이 속삭이는 걸 따라 그 호수를 뒤로한 후로 약 칠 년 동안 끝없는 표류를 계속해왔다. 그렇게 칠 년째 되는 여름, 그는 이즈모의 히노카와를 거슬러 올라가는 한 척의 돛단배 돛 아래서 갈대가 깊게 깔린 양 기슭을 바라보며 지루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갈대 너머로는 높은 소나무가 한가득 무리 지어 있었다. 이 소나무 가지가 서로 겨루며 뻗은 상공에선 여름 아지랑이가 피어 있는 울창한 산 정상들이 있었다. 또 그 정상 위 하늘에선 이따금 백로 세 마리가 눈부신 날개를 번쩍이며 비스듬하게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 백로의 그림자를 제외하면 강 주변 일대 어디를 보아도 사람을 위협하는 듯한 밝은 적막이 주위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배에 몸을 기댄 채 햇살을 받는 소나무 냄새를 가슴 한가득들이 마쉬며 오랫동안 돛단배를 바람에만 맡겨 두었다. 수많은 모험에 익숙해진 스사노오에겐 이 적막한 강줄기의 경치 또한 마치 타카마가하라노쿠니의 여덟 갈래 길처럼 어떤 자극도 주지 않는 평범한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저녁이 가까워졌을 즘, 강폭이 좁아짐과 동시에 양 기슭서도 갈대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마디가 많은 소나무 뿌리만이 물과 진흙이 섞이는 곳에서 황량이 뒤엉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오늘 밤 잘 곳을 생각하며 전보다 살짝 주의 깊게 양 기슭을 바라보았다. 소나무는 물 위까지 뻗은 가지를 강철처럼 서로 뒤엉켜 숲 안쪽의 신비한 세계를 집요하게 감춰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사슴이라도 물을 마시러 오는 탓인지 드문드문 열려 있는 곳에는 꺼림칙할 정도로 붉은 버섯이 어둠 속에 무리 지어 있는 경우도 보였다.
 서서히 저녁노을이이 다가왔다. 그때, 그는 저 너머의 물에 접한 바위 위에서 인간으로 보이는 그림자 하나가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물론 이 강가에선 여태껏 인기척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 모습을 발견했을 때에도 처음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고려검 자루에 손을 얹어 보았으나, 그 몸만은 아직 유유히 돛단배에 맡겨두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배는 물을 타고 서서히 그 바위에 가까워졌다. 그러자 바위 위에 있는 게 인간이란 게 확실해졌다. 그뿐 아니라 그 모습이 하얀 옷의 소매를 길게 끈 여자란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는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저도 모르게 돛단배 끝자락에 섰다. 배는 그동안에도 미풍을 받아 하늘을 수놓은 소나무 아래에서 시시각각 바위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서른넷


 배는 기어코 바위 앞에 이르렀다. 바위 위에선 역시나 소나무 가지가 길게 뻗어 있었다. 스사노오는 재빠르게 돛을 내리고는 그 소나무 가지를 한 손에 쥐고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또 동시에 배는 크게 흔들리면서 바위 구석의 이끼를 긁어내며 곧장 동작을 멈추었다.
 여자는 그가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바위 위에서 홀로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인기척에 놀란 걸까 불쑥 고래를 들고는 배 안의 그를 보더니 작게 비명을 지르며 반쯤 바위를 품고 있는 두터운 소나무 뒤에 숨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 한 손으로 바위를 붙든 채 "잠시만요"하고 말하자마자 뒤로 빠진 여자의 옷소매를 한 손으로 잡았다. 여자는 앞으로 쿵 넘어지더니 다시 한 번 짧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다시 몸을 일으키는 낌새도 없이 또 이전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는 닻줄을 소나무에 묶고는 가볍게 바위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걱정 마세요. 당신께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이런 곳에서 우는 게 의아해서 무슨 일인가 싶어 배를 멈춘 것뿐입니다"하고 말했다.
 여자는 겨우 고개를 들고서 물 위로 드리운 둔색 속에서 머뭇머뭇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 찰나, 이 여자가 꿈에서만 볼 수 있는, 이를테면 이 여름의 저녁노을처럼 어딘가 슬픈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길을 잘못 드셨나요? 아니면 나쁜 사람한테 납치라도 당하셨습니까?"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박자에 목덜미의 벽옥이 희미하게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 아이와 같은 동작을 보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에 웃음이 깃드는 걸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다음 순간, 서서히 부끄러운 색으로 얼굴을 물들이더니 눈물을 머금은 눈을 다시 한 번 무릎으로 떨구고 말았다.
 "그럼――그럼 무슨 일이십니까. 뭔가 어려운 일 있으면 사양 말고 말해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해드리죠."
 그가 부드럽게 위로하자 여자는 처음으로 용기를 얻은 것처럼, 그럼에도 이따금 말을 우물거리며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여자의 아버지는 이 강 상류의 마을을 이끄는 아시나츠치란 자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마을 남녀가 하나둘 역병으로 쓰러졌고, 아시나츠치는 곧장 무녀에게 명을 내려 신들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의외로 지금 여기에 있는 쿠시나다히메란 외동딸을 코시노오로치에게 산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한 달도 되지 않아 죽는단 신탁을 받았다. 그러자 아시나츠치는 도리 없이 마을 젊은이들과 함게 배를 끌고 먼 마을에서 이 바위 위까지 쿠시나다히메를 옮긴 후 그녀를 홀로 둔 채 돌아가버렸다 한다.

 

서른다섯


 쿠시나다히메의 이야기를 들은 스사노오는 목덜미를 돌리며 유쾌하다는 양 황혼 속 강을 둘러보았다.
 "그 코시노오로치란 게 어떤 괴물이죠?", "사람들이 말하기를 머리와 꼬리가 여덟 개 있고, 여덟 개의 계곡을 덮을 정도로 커다란 뱀이라 합니다."
 "그런가요.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요 몇 년 그런 괴물하곤 만나보지 못했으니까요. 이야기만 들었는데 힘을 쓸 생각이 드는군요."
 쿠시나다히메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태연한 그를 지켜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어느 틈에 오로치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당신은――"
 "오로치를 퇴치할 겁니다."
 그는 딱 잘라 대답하고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바위 위를 걸었다.
 "퇴치한다니요. 오로치는 방금 말한 것처럼 심상치 않은 신입니다――"
 "그런 모양이군요."
 "만에 하나 당신이 다칠지도 모르고――"
 "아무렴요."
 "어차피 저는 산제물이 되겠다 각오한 몸입니다. 설령 이대로――"
 "기다려 보세요."
 그는 걸음을 거듭하며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떨쳐내는 듯한 손짓을 취했다.
 "저는 당신을 오로치의 산제물로 삼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로치가 강하면――"
 "결국 똑같다는 말씀이신가요. 설령 똑같더라도 저는 역시 싸울 겁니다."
 쿠시나다히메는 또 얼굴을 붉히며 허리춤에 걸친 거울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말을 살짝 밀쳐냈다.
 "제가 오로치의 산제물이 되는 건 신들의 뜻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산제물이 되란 말이 없었다면 당신은 지금 이 시간에 나 홀로 이런 곳에 오진 않았겠죠. 그럼 신의 뜻이란 것도 당신을 오로치의 산제물로 올리는 게 아니라, 되려 당신을 본 제게 오로치의 목숨을 끊으라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쿠사나다히메의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한순간, 엄숙한 권위의 빛이 그의 추한 미간 사이에 드리운 것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무녀가 말하길――"
 쿠사나다히메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무녀란 신의 말을 전하는 자이지요. 신의 말속에 담긴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아닙니다."
 그때 불쑥 두 마리 사슴이 어두워진 소나무 아래서 옅은 흰색이 감도는 강 안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뛰어들었다. 그리고 뿔을 나란히 한 채 필사적으로 헤엄쳤다.
 "사슴이 당황한 걸 보면――설마 와버린 게 아닐까요. 그게――그 무서운 신이――"
 쿠사나다히메는 마치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스사노오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그렇지요. 드디어 왔나 봅니다. 신의 수수께끼를 풀 때가."
 그는 반대편 기슭에 눈을 주면서 천천히 고려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거센 비가 덮치는 듯한 소리가 반대편 기슭의 소나무 숲을 뒤흔들며 그 위로 희미한 별을 뿌린 산들의 하늘 위로 솟구쳤다.

(다이쇼 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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