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오전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많이 다셨던 대학 도서관도,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사람으로 가득 메워졌다.
책상에 마주 앉은 건 대부분 대학생이었으나 개중에는 하카마나 정장을 입은 연배 지긋한 사람도 둘셋 정도 섞여 있는 듯했다. 그렇게 규칙적인 인파로 채워진 넓은 공간 너머서는 벽에 걸어둔 시계 아래로 어두컴컴한 서고 입구가 보였다. 또 그 입구 양쪽에는 올려다봐야 하는 커다란 책장이 낡은 책등을 줄지으며 마치 학문을 지키는 요새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한 인파가 있음에도 도서관 안은 조용했다. 아니, 오히려 그만한 인간이 있어야 비로소 느낄 수 있을 법한 일종의 침묵이 지배하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종이에 펜을 놀리는 소리, 그리고 가끔 들리는 기침 소리――그런 소리마저 이 침묵에 압박되어 공기 파동이 아직 천장에 닿기도 전에 그대로 도중에 사라지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슌스케는 그런 도서관의 창가 자리에 앉아 아까부터 가는 활자 위에 열심히 눈을 주고 있었다. 그는 까무잡잡하고 튼실한 체격을 갖춘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가 문과 대학 학생이란 건 교복 소매에 자리한 L자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높은 창이 있고 그 창밖에는 울창한 모밀잣밤나무 잎이 희미하게 하늘색을 드리우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에 가려져 봄녘의 포근한 햇살도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다. 또 대부분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책 위에 몽롱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책 위에는 색연필의 붉은 선이 몇 개나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게 시간을 옮겨가면서 서서히 다음 페이지로 옮겨 갔다……
열두시 반, 한 시, 한 시 이십 분――서고 위 시곗바늘은 쉼 없이 움직여 갔다. 그렇게 이래저래 두 시가 되었을 시각, 도서관 현관 근처, 목록이 놓여 있는 곳에 코쿠라 하카마에 쿠로모멘의 몬츠키를 걸치고 각모를 쓴 학생 하나가 무뚝뚝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품에서 삐져나온 노트에 적힌 이름을 보면 역시나 문과대 학생이며 오오이 아츠오란 남자인 듯했다.
그는 한동안 현관에 자리한 채 단지 주변의 책상을 바라보는 듯했으나 이윽고 반대편 창문으로 들어오는 옅은 햇살 속에서 여념 없이 책을 뒤지는 슌스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 의자 뒤로 다가가 "야"하고 작게 말을 걸었다. 슌스케는 놀라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으나 곧 까무잡잡한 뺨에 웃음을 짓고는 "왔어?"하고 간단히 인사했다. 그러자 오오이도 모자를 누르며 살짝 턱으로 인사를 받고는 묘하게 기름기가 낀 거창한 태도로
"아침에 이쿠분도에서 노무라를 봤는데 너한테 말 좀 전해달라네. 별일 없으면 세 시까지 '하치노키' 2층으로 와달래."
둘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슌스케는 그렇게 말하며 작은 금시계를 꺼내 보았다. 그러자 오오이는 주머니서 손을 꺼내 푸른 수염자국이 드리운 턱을 쓰다듬으며 그 시계를 보더니
"좋은 거 들고 다니네. 게다가 여자 거 같은데?"
"이거? 이거 어머니 유품이야."
슌스케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적당히 시계를 주머니에 넣으며 천천히 듬직한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퍼져 있던 색연필이나 나이프를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오오이는 슌스케가 읽던 책을 들어 올려 적당한 부분을 펼쳐 보이며
"흠, Marius the Epicurean라."하고 냉소하듯이 웃었으나 이윽고 하품을 눌려 죽이며
"슌스케 디 에피큐리언의 근황은 어때?"
"아니, 생각처럼 안 돼서 곤란한 참이야."
"너무 겸손 떨지 마라. 여자용 금시계를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 나보단 훨씬 나으니까."
오오이는 책을 내려놓곤 다시 두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다리를 떨기 시작했으나 그 사이 슌스케가 투를 입자 불쑥 떠올랐다는 양
"아 맞다, 너 혹시 '시로' 동인 음악회 티켓 강매 당했냐?"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시로城'란 네다섯 명의 문과대 학생이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며 요즘 들어 발행하기 시작한 동인잡지의 이름이었다. 그 사람들이 주최하는 음악회가 곧 츠키지의 세이요켄에서 열린다는 건 법문과 게시판에 실린 광고로 슌스케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니, 다행히 아직이네."
슌스케는 솔직하게 대답하면서 책을 외투의 겨드랑이 아래에 두고는 세월감이 묻은 모자를 눌러 쓰며 오오이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오오이도 함께 걸으며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려
"그래? 나는 너도 진작 샀을 줄 알았지. 그럼 제발 이 한 장 좀 사줘. 내가 '시로'의 동인인 건 아니지만 후지사와가 팔아달라 부탁했거든. 실은 처분하기 곤란해서 말야."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슌스케는 산다 사지 않는다 답하기 전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쿠로이는 쿠로모멘의 몬츠키 소매서 '시로' 동인의 표식이 새겨진 세련된 티켓 두 장을 꺼내곤 마치 화투패처럼 들더니
"일등석이 3엔이고 이등석은 2엔. 자, 어느 쪽으로 할래? 일등? 이등?"
"둘 다 사양이네요."
"그건 안 되지. 금시계를 찬 너는 한 장은 꼭 사야 할 의무가 있거든."
두 사람은 그런 문답을 거듭하면서 사람으로 가득 찬 책상 사이를 지나 현관으로 나왔다. 마침 그때, 새빨간 터키모자를 쓴 대학생 하나가 금색 단추를 단 교복에 짧은 외투를 끌며 기세 좋게 밖에서 들어왔다. 그러다 아오이와 얼굴을 마주하자 여자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또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은근히
"안녕, 오오이."하고 말을 걸었다.
셋
"그래, 안녕."
오오이는 신발장 앞에 서서는 여전히 두터운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슌스케를 놓칠 수 없다 생각한 건지 수염 자국이 남은 푸른 턱으로 터키모자를 가리키고는
"둘은 처음 보지? 불문과의 후지사와 사토시야. '시로' 동인의 대장주고 요전 번엔 보들레르 시집이란 번역을 낸 애야――이쪽은 영문과 야스다 슌스케"하고 곧장 두 사람을 소개해버렸다.
그러니 슌스케도 도리 없이 애매한 웃음을 지으면서 모자를 벗고 조용히 인사했다. 하지만 후지사와는 슌스케의 익숙지 않은 태도와 달리 참으로 꼼꼼하게
"오오이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역시 창작을 하신다면서요? 재밌는 거 완성되면 '시로'에 실어 드릴 테니 사양 말고 말해주세요."
슌스케는 여전히 작게 웃으며 "아뇨"니 "네"니 적당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은근히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오오이가 터키모자에게 티켓을 보이더니
"마침 그 '시로'에게 충성을 다 하던 참이었거든"하며 자랑스레 말했다.
"아, 그래?"
후지사와는 꺼림칙할 정도로 애교 있는 눈동자로 슌스케와 티켓을 번갈아 보았으나 곧 오오이를 보더니
"그럼 일등 티켓 한 장을 드려――실례지만 티켓 걱정은 따로 안 하셔도 됩니다. 부디 들으러 와주세요."
슌스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몇 번이나 사양했다. 하지만 후지사와는 역시나 붙임성 좋게 웃으며 "민폐라도 부탁 좀 드립니다"하고 반복하며 쉽사리 티켓을 넣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 웃음 뒤에서는 만에 하나 거절할 경우에 느낄 듯할 불쾌함마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슌스케는 기어코 고집을 꺾고 마지못해 그 티켓을 받고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날 밤엔 시미즈 쇼이치 씨의 독창도 있으니까요. 부디 오오이하고 같이 와주세요――오오이는 시미즈 씨 알던가?"
후지사와는 만족스레 화사한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부드럽게 오오이에게 물었다.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묘한 얼굴로 두 사람의 문답을 듣던 오오이는 자못 황당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코로 큰 콧김을 내뿜고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그야 모르지, 나는 옛날부터 음악가랑 개는 멀리하며 살아왔으니까."
"그래그래, 너 개 아주 싫어했지. 괴테도 개를 싫어했다니 천재는 다 그런 걸지 몰라."
터키모자는 슌스케의 찬성을 바란 건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웃어 보였다. 하지만 슌스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마치 그 귀에 거슬리는 웃음이 안 들리는 체했으나 이윽고 세월감이 묻어난 모자챙에 손을 얹고는 두 사람의 얼굴을 균등히 바라보며
"난 그만 가봐야겠다. 다음에 보자"하고 던지듯이 인사를 하고선 재빨리 돌계단을 내려갔다.
넷
두 사람과 헤어진 슌스케는 문득 지금 하숙집으로 이사한 걸 아직 대학 사무실에 전달하지 않은 걸 떠올렸다. 다시 금시계를 꺼내보니 약속한 세 시까지 이래저래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잠시 사무실에 들리기로 하고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꽂은 채로 법문과대학의 낡은 붉은 벽돌 건물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불쑥 우르르 쾅쾅 봄 번개가 울렸다. 고개를 들여다보니 하늘은 어느 틈엔가 잿통을 뒤섞은 듯한 색을 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선 습한 남풍이 폭이 넓은 모랫길을 향해 미지근하게 불어왔다. 슌스케는 "비오려나"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서두르는 기미 한 번 없이 책을 옆구리에 낀 채로 느긋한 걸음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자마자 다시 한번 번개가 울리더니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뺨에 닿았다. 이어서 또 하나, 이번에는 닿을 것도 없이 모자챙을 스치며 실보다도 가는 빛을 떨구었다. 그런가 하면 서서히 붉은 벽돌색이 차갑게 물들더니 정문 앞에서 이어지는 은행나무 아래로 오니 높은 가로수의 가지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추적추적 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빗속을 걷는 슌스케의 마음은 침울해졌다. 그는 후지사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오이의 얼굴도 떠올렸다. 또 그들이 대표하는 세간 또한 떠올렸다. 그의 눈에 비친 세간은 시종 실행에 옮기는 게 특색이었다. 혹은 먼저 실행에 옮기고는 믿는 게 특색이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성격과 오늘날까지 받은 교육에 휘둘려 믿는다는 소중한 기능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하물며 실행할 용기는 쉽사리 올라오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세간에 어깨를 나란히 하여 번잡한 생활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드는 게 불가능했다. 뒷짐 진 채 지켜본다――그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때문에 그는 넓은 세간서 뚝 떼여진 듯한 고독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오오이와 교제하면서 슌스케 디 에피큐리언 같은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물며 터키모자를 쓴 후지사와는……
그의 생각이 거기까지 표류했을 때, 슌스케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 올리자 그의 눈앞에는 제8번 교실의 고색창연한 현관이 안개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회반죽이 벗겨진 벽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그 현관의 돌계단 위에선 생각지도 못한 젊은 여성이 나 홀로 서있었다.
빗발의 강약은 어찌 됐든, 여자는 비가 그치는 걸 기다리는 듯이 조용히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마에 내려앉은 머릿결 아래서는 촉촉하고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눈은 하얀――보다 정확히는 창백한 얼굴색에 걸맞는 쌍꺼풀을 지니고 있었다. 옷은――검은 명주에 수선화 같은 꽃을 새긴 겉옷이 원만한 어깨부터 가슴에 걸쳐 적당히 걸쳐 있는 것 이외엔 슌스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는 슌스케가 고개를 드는 전후로 먼 하늘서 그를 향해 검은 눈동자를 옮겼다. 그와 눈이 맞았을 때, 여자의 시선은 한동안 멈추지도 또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감돌고만 있었다. 그는 그 찰나, 여자의 긴 속눈썹 뒤에서 그의 경험을 초월한, 알지 못할 감정 하나가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여자는 다시 고개를 들고서 반대편 강당의 지붕에 떨어지는 빗발을 바라보았다. 슌스케는 외투의 어깨를 으쓱이며 마치 여자가 안중에도 없다는 양 냉정히 그 앞을 지나갔다. 다시 한번 머리 위에서 구름을 뒤흔드는 봄 번개 소리를 들으면서.
다섯
비에 젖은 슌스케가 '하치노키' 2층으로 올라가자 노무라는 이미 커피잔을 앞에 둔 채 창밖 거리를 향해 지루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슌스케는 외투와 모자를 종업원에게 건네고는 기세 좋게 노무라의 테이블 앞에 가서 "기다렸어?"하고 물으며 굽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야 뭐 기다렸지."
거의 둔중하단 느낌을 줄 정도로 둥글게 살이 오른 노무라는 그 두터운 손가락 끝으로 오오시마의 소매를 바로잡으며 얇은 철테 안경 너머로 느긋이 슌스케의 얼굴을 보았다.
"뭐 마실래? 커피? 홍차?"
"아무거나――지금 번개 쳤지."
"그래, 친 것 같기도 하네."
"넌 여전히 느긋하구나. 또 인식의 근거는 어디 있는가 하는 문제를 번거롭게 생각하던 중이었지?"
슌스케는 금색 포장이 된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는 가볍게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노란 수선화 꽃병에 시선을 주었다. 그 순간, 왜인지는 몰라도 방금 전 건물 앞에서 본 여자의 눈동자가 생생히 떠올랐다.
"설마――개랑 놀고 있었어."
노무라는 아이처럼 웃으면서 의자를 살짝 뒤로 밀더니 발밑에서 자고 있던 검은 개를 테이블보 아래서 꺼냈다. 개는 털이 긴 귀를 흔들며 커다란 하품을 한 번 내쉬고는 그대로 옆으로 축 처져 슌스케의 신발 냄새를 맡았다. 슌스케는 담배 연기를 코로 내뿜으며 별생각 없이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요전 번에 쿠리하라 집에 있던 녀석을 받아왔어."
노무라는 종업원이 내주는 커피를 슌스케 쪽에게 밀며 또 뚱뚱한 손가락 끝으로 옷소매를 건들더니
"그 집은 요즘 들어 온 집안이 톨스토이풍이더라고. 이 녀석 이름도 거창하게 피에르야. 나는 이 녀석보다 안드레이란 개를 더 가지고 싶었는데 내가 피에르니까 피에르를 데려가라나. 결국 이 녀석을 받아 오게 된 셈이지."
슌스케는 커피잔에 입술을 얹으며 짓궂은 웃음을 짓고는 놀리는 듯한 눈초리로 노무라를 보았다.
"뭐 피에르로 만족해야지. 대신 피에르면 나아가서는 운 좋게 나타샤랑 결혼할지도 모르잖아?"
노무라도 이에는 당황했는지 한동안 얼굴을 붉혔으나 그러나 목소리만은 느긋하게
"나는 피에르가 아냐. 그렇다고 물론 안드레이도 아니지만――"
"아니지만 어찌 됐든 하츠코 여사가 나타샤란 건 인정하겠지."
"글쎄 뭐 말괄량이란 점만은 인정 못할 것도 없지만――"
"기왕 하는 거 다 인정해버려――그러고 보니 하츠코 여사는 '전쟁과 평화'에 필적할 법한 장편 소설을 쓰고 있다잖아. 어때 잘 완성될 거 같아?"
슌스케는 그제야 칼날을 넣으며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 안에 던지고는 살짝 비꼬듯이 물었다.
여섯
"사실 오늘도 그 장편 소설 때문에 너를 부른 거야."
노무라는 철테 안경을 벗고는 손수건으로 알을 닦으면서
"아무래도 하츠코 씨는 새로운 '여자의 일생'을 쓸 생각인 모양이야. 뭐 Une Vieà la TolstoÏ 같은 거겠지. 그리고 그 여주인공이 여러 기이한 운명에 놀아난 결과가――"
"그래서?"
슌스케는 코를 노란 수선화 화분에 가져가며 별로 내키지 않다는 양 물었다. 하지만 노무라는 가는 안경테를 귀 뒤에 얹고는 여전히 침착한 분위기로
"마지막엔 어딘가의 정신병원에서 목숨을 잃는다나 봐. 그래서 그 정신병원 속 생활을 묘사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하츠코는 그런 데에 가본 적이 없다나. 그래서 이번에 다른 사람 소개를 받아 어디 좋은 정신병원 없나 찾고 있다는데――"
슌스케는 또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반쯤 비꼬는 듯한 표정을 드리운 눈으로 다시 한번 "그래서?"하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니 네가 닛타 씨를 소개해 줬으면 하는데――닛타 씨 맞지? 그 물질주의자 의학사 말야."
"그래――그럼 일단 편지를 써서 시간이 되나 물어볼게. 아마 별 어려울 거 없이 받아 줄 거야."
"그래. 그래주면 정말 고맙고. 하츠코 씨도 물론 크게 기뻐할 거야."
노무라는 만족스레 웃고는 두세 번 오시마의 소매를 바로잡으며
"요즘엔 완전히 그 '여자의 일생'에 푹 빠져 있거든. 같이 다니는 친한 애하고도 그 이야기만 하나 봐."
슌스케는 말없이 이집트 담배의 연기를 내뿜으며 창밖의 거리를 보았다. 아직도 안개비가 내리는 거리선 가는 은행 가로수가 살짝 싹을 뻗고 있고 거북이 등껍질과 닮은 박쥐우산이 몇 개나 그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광경은 왜인지 아주 잠깐 본 그 여자의 눈을 떠오르게 했다……
"너 '시로' 동인 음악회엔 갈 거야?"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 후, 노무라는 문득 떠올랐다는 양 물었다. 그와 동시에 슌스케는 자신의 마음이 요 몇 분 동안 거의 백지처럼 하얗게 물들어 있었단 걸 깨달았다.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차가워진 커피를 비우고는 곧장 이전과 같은 기운을 되찾아서
"가보려고. 너는?"
"오늘 아침 이쿠분도에서 오오이한테 전언을 부탁할 때 몇 장 사달라 하지 뭐야. 기어코 일등 티켓을 네 장이나 받아 버렸어."
"네 장이면 힘 좀 썼네."
"뭐 어차피 세 장은 쿠리하라에서 사줄 테니까――이 녀석, 피에르."
이제까지 슌스케 발밑에서 잠들어 있던 검은개가 불쑥 몸을 일으키더니 계단 위를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개의 분위기에 놀란 노무라와 슌스케는 노란 수선 화분을 두고 서로 마주 보며 동시에 그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선 마침 터키모자를 쓴 후지사와가 검은 중절모를 쓴 대학생과 함게 비에 젖은 외투를 종업원의 손에 맡기고 있었다.
일곱
일주일 뒤, 슌스케는 츠키지에 자리한 세이요칸에서 개최되는 '시로' 동인 음악회에 갔다. 음악회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시인 오후 여섯 시가 되었음에도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회장 옆방에는 이미 많은 청중이 모여서 전등불도 흐릿할 정도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개중에는 대학의 서양인 교사도 한둘 정도는 와있는 듯했다. 슌스케는 커다란 고무나무 화분이 놓인 방구석에 자리한 채로 딱히 개최를 기다리는 법도 없이 멍하니 주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자 보기 드물게 교복 차림을 한 오오이 아츠오가 여전히 거창한 태도로 그의 옆에 걸어왔다. 두 사람은 작게 인사를 나누었다.
"노무라는 아직 안 왔어?"
슌스케가 그렇게 묻자 오오이는 팔짱을 낀 채로 허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서
"아직인가 보네――안 오는 게 나아. 나도 후지사와한테 끌려와서 이래저래 한 시간 가량 기다리고 있는걸."
슌스케는 비웃듯이 웃었다.
"네가 가끔 교복 입고 있을 때면 좋은 일이 없더라."
"이거? 이건 후지사와 교복이야. 말하기를 자기 교복을 빌려 달라나. 그럼 자기는 그걸 구실로 아버지 턱시도 입고 올 수 있으니까――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이걸 입고 듣고 싶지 않은 음악회 같은 거에 참석한 셈이지."
오오이는 주위를 아랑곳 않고 그런 소리를 떠들며 다시 한번 방안을 빙글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저기 있는 건 누구고 여기 있는 건 누구라며 세간에 이름을 알린 작가나 화가를 하나하나 슌스케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그런 명사들의 추문을 재밌다는 양 이야기해 주었다.
"저 몬츠키 입은 사람 있지? 어떤 변호사의 아내랑 불륜을 저지르고는 그걸 바탕으로 쓴 소설을 남편인 변호사한테 보낼 정도로 배짱 좋은 사람이야. 그 옆의 보헤미안 넥타이 찬 사람은 아예 시를 쓰는 것보다 여종에 손대는 게 본직이라 해도 좋을 정도지."
슌스케는 그런 추문에 관심을 갖기엔 소위 닐 아드미라리한 사람이었다. 하물며 그때는 그런 예술가의 추문도 내키지 않았다. 때문에 오오이가 잠시 숨을 돌리는 틈에 티켓과 맞바꿔 받은 팸플릿을 펼치면서 오늘 밤 연주되는 음악 쪽으로 화제를 틀었다. 하지만 오오이는 그런 반면에 전혀 무감각한 모양인지 화분의 고무 잎을 손톱으로 뜯으며
"후지사와의 말에 따르면 그 시미즈 쇼이치란 남자도 독창가라기 보단 화려한 색마에 가깝다나 봐"하고 또 이야기를 사회생활의 어두운 면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때 마침 개최를 알리는 벨이 울려 회장과 그 경계의 문이 열렸다. 또 기다리다 못한 청중들이 마치 썰물 빠지듯이 우르르 그 문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슌스케도 오오이와 함께 그 흐름을 따라 서서히 회장 쪽으로 밀려갔으나, 도중에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저도 모르게 놀라 마음속으로 "앗"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여덟
슌스케는 회장 의사에 앉은 뒤에도 방금 전 감정에서 회복하지 못한 걸 느꼈다. 그의 마음은 어느 틈엔가 신비한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환희인지 고통인지 분멸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었다. 그는 이 심적 동요에 몸을 맡기고 싶단 욕망마저 느꼈다. 또 동시에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때문에 그는 적어도 지금 이상의 동요를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되도록 무대에만 집중하려 했다.
금병풍을 두른 무대에는 먼저 프록코트를 입은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이마로 내려오는 머리를 위로 올리며 쓰다듬는 듯이 부드러운 슈만을 노래했다. 그건 Ich Kann's nicht fassen, nicht glauben로 시작하는 샤미소의 리드였다. 슌스케는 그 달달한 노랫소리 속에서 무언가 불건전한 향기가 발산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 향기가 그의 술렁이는 마음을 한 층 더 뒤흔드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때문에 겨우 독창이 끝나고 기운 찬 박수 세례가 들렸을 때, 그는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마치 도움을 청하듯이 옆자리의 오오이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오오이는 팜플렛을 둥글게 말아 마치 망원경처럼 눈에 얹으며 무대 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슈만의 독창가를 들여다 보면서
"확실히 시미즈란 남자는 색마의 인상을 갖추고 있군"하고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슌스케는 그제야 무대 위 중년 남성이 시미즈 쇼이치란 걸 깨달았다. 그렇게 다시 무대에 눈을 주니 이번엔 스소모요를 입은 아가씨가 성대한 박수 갈채를 받으며 바이올린을 안고 조용히 무대에 오르고 있는 참이었다. 인형처럼 귀여운 아가씨였으나 바이올린 실력은 유감스럽게도 실수 한 번 없이 곡을 시작해 마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슌스케는 시미즈 쇼이치의 슈만만한 달콤한 자극을 받지 않은 덕에 기분 좋게 차이코프스키의 신비한 세계에 안주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하지만 오오이는 역시 지루함을 어쩔 수 없었는지 뒤통수를 등받이에 얹고서 이따금 조심성 없이 콧김을 내뿜곤 했다. 그러다 불쑥 떠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야, 노무라 온 거 알아?"
"알지."
슌스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눈은 금병풍 앞 아가씨서 떼지 않았다. 오오이는 상대의 대답이 내키지 않았는지 묘하게 악의 섞인 웃음을 지으며
"게다가 엄청난 미인을 둘이나 데려왔어"하고 확인하듯이 덧붙였다.
하지만 슌스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한 층 더 열심히 무대 위서 흘려 들어오는 바이올린의 조용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그 후 피아노 독주와 사부합창이 끝나고 삼십 분의 휴식 시간이 시작되었다. 슌스케는 오오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듬직한 몸을 의자서 일으키고는 고무 나무 화분이 자리한 회장 옆방에 노무라 일행을 찾으러 갔다. 하지만 홀로 남은 오오이는 여전히 거창하게 팔짱을 낀 채로 단지 고개를 앞을 푹 털고는 연추가 끝난 것도 모르는지 참으로 기분 좋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홉
옆방으로 와보니 확실히 노무라는 쿠리하라에서 온 소녀와 함께 커다란 난로 앞에 자리해 있었다. 혈색이 좋고 눈과 눈썹에서 활기로 넘치는 나이보다 자그마한 몸집의 하츠코는 슌스케를 보자마자 보조개를 만들며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노무라도 높은 금단추가 자리한 가슴을 슌스케에게 돌리며 도수가 강한 근시 안경 뒤에서 여느 때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는 의젓히 "안녕"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슌스케는 난로 위 거울을 등진 채 인도사라사 오비를 맨 하츠코와 커다란 몸을 교복으로 감싼 노무라가 서로 마주한 채 서있는 걸 보았을 때, 찰나 그들의 행복이 질투 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 지각해버렸네. 화장에 시간을 써서 말야."
슌스케와 두세 마디 잡담을 나눈 누무라는 대리석 난로에 손을 뻗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어머, 우리가 언제 시간을 썼다고 그래? 노무라야말로 나오는 게 늦어졌잖아?"
하츠코는 일부러 짙은 눈썹을 좁히면서 아양 떨듯이 노무라의 얼굴을 올려 보았으나 곧 그 시선을 슌스케 쪽으로 돌리고는
"지난 번엔 제가 묘한 부탁을 해서――민폐였던 건 아니죠?"
"아뇨,
슌스케는 하츠코에게 인사하면서도 역시나 노무라에게만 말하는 태도로
"어제 닛타한테 답이 왔는데 평일이라면 언제든지 기꺼이 안내하겠다네. 그러니 곧 편할 때에 찾아와달래."
"그래? 그거 고맙네――그래서? 하츠코 씨는 언제 가실 건데요?"
"언제라도.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는걸. 노무라 시간에 맞추면 돼."
"제가 정하라니――그럼 저도 따라가는 건가요. 그건 조금――"
노무라는 짧게 깎은 머리에 큰 손을 얹고서 어렵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하츠코는 눈으론 웃으면서 목소리만 토라진 기미로
"그치만 난 닛타 씨하고 처음 뵙는 건데. 누구 아는 사람이 같이 가야지."
"뭐, 야스다의 명함이 있으면 제대로 안내해줄 거예요."
두 사람이 그런 문답을 나누고 있자니 교세이 학교의 교복을 입은 열 살 가량 먹은 소년이 인파를 지나 기세 좋게 나타났다. 그리고 슌스케의 얼굴을 보더니 대뜸 직립부동 자세를 취하고는 애교 있는 거수 인사를 했다. 세 일행은 저도 모르게 웃어 보였다. 개중에서도 가장 크게 소리 내서 웃은 건 노무라였다.
"타미오도 왔구나."
슌스케는 두 손으로 소년의 어깨를 잡으며 놀리듯이 그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응, 다 같이 자동차 타고 왔어. 야스다 형은?"
"나는 전철로 왔지."
"짠돌이네, 전철 타고 오고. 가는 길엔 자동차 태워줄까?"
"그래, 태워주면 좋지."
그 동안에도 슌스케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누군가가 타미오의 뒤를 쫓아 다가오고 있는 걸 느꼈다.
열
슌스케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하츠코의 옆에 동년배의 젊은 여자가 야청빛 바탕에 남색 줄무늬가 들어간 기모노 가슴을 아시데모요 오비로 묶고서 슬쩍 자리해 있었다. 그녀는 하츠코보다 몸집이 컸다. 또 동시에 이목구비는 귀여운 쌍커풀이 하츠코보다 쓸쓸히 자리해 있었다. 심지어 그 쌍커풀 아래 눈동자는 거의 우울하다 형용해도 좋을 촉촉한 빛마저 머금고 있었다. 방금 전 회장에 들어가기 전 우연히 뒤를 돌아 본 슌스케의 마음을 술렁이게 한 게 바로 이 쓸쓸하고 촉촉한 눈동자빛이었다. 그는 그 눈동자 주인과 인사를 나눈 지금, 다시 한 번 방금 전의 동요를 느끼고 말았다.
"타츠코는 야스다 씨랑 처음 보지?――얘는 타크초라 해요. 교토 여학교를 졸업했는데 얼마 전부터 간신히 도쿄말 하고 있어요."
하츠코는 익숙한 투로 슌스케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타츠코는 창백한 뺨 아래서 희미하게 혈색을 움직이며 묶은 머리를 정숙히 숙였다. 슌스케도 타미오의 어깨서 손을 때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다행히 그의 까무잡잡한 뺨이 여느 때와 달리 붉게 상기된 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러자 노무라도 옆에서 특히 유쾌한 목소리로
"타츠코 씨는 하츠코 씨의 사촌 동생이야. 이번에 미술 학교에 들어가게 돼서 이쪽으로 오게 됐거든. 그런데 하츠코 씨가 매일 같이 그 소설 이야기만 해서 몸이 못 견딘 거겠지. 요즘 들어 건강이 마음 같지 않네."
"어머, 너무해라."
하츠코와 타크초는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타츠코의 목소리는 하츠코의 목소리에 눌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슌스케는 처음 들은 타츠코의 목소리 안에서 상냥한 마음과 반대로 가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그의 마음을 강하게 했다.
"그림이면――역시 서양화를 그리시나요?"
상대의 목소리에 용기를 얻은 슌스케는 하츠코와 노무라가 서로 웃고 있는 사이 타츠코에게 그렇게 물었다. 타츠코는 시선을 비취 오비도메 위로 떨구고는
"네."하고 생각보다 딱 잘라 대답했다.
"그림은 꽤 잘 그려. 하츠코 씨의 소설과 대치하기에 충분할 정도야――그러니까 타츠코 씨, 제가 좋은 걸 가르쳐드리죠. 앞으로 하츠코 씨가 소설 이야기를 하시면 타츠코 씨도 그림 이야기를 막 해버리시는 거예요. 안 그러면 몸이 못 버틸 걸요."
슌스케는 웃음으로 노무라에게 답하며 다시 한 번 타츠코에게 물었다.
"정말 몸이 안 좋으세요?"
"네, 심장이 조금――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러자 아까부터 지루하단 얼굴로 일동의 얼굴을 바라보던 토미오가 아래서 슌스케의 손을 쭉쭉 잡아 당기더니
"타츠코 씨는 저기 계단만 올라도 숨을 헐떡여. 나는 두 계단씩 오를 수 있는데 말야."
슌스케는 타츠코와 얼굴을 마주하고 겨우 거리낌 없는 웃음을 나누었다.
열하나
타츠코는 창백한 뺨 한 쪽에 보조개를 드리운 채 조용히 타미오에게서 하츠코를 향해 시선을 돌리곤
"타미오는 얼마나 강한지 몰라요. 아까도 저 계단 손잡이를 잡고 미끌어져 내려가는 거 있죠. 제가 놀라서 떨어져 죽으면 어쩔 거냐고 물었더니――타미오가 뭐라는지 알아요? 자기는 아직 죽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는 거 있죠. 제가 정말 웃겨서――"
"확실히 꽤 철학적인 말인걸."
노무라는 또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웃었다.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어요――그래서 누나가 항상 말하지? 타미오는 바보라고."
방 안의 따듯함에 한 층 더 혈색이 좋아진 하츠코가 살짝 노려보는 흉내를 내면서 동생을 타이르니 타미오는 여전히 슌스케의 손을 잡은 채로
"나 바보 아니거든."
"그럼 똑똑해?"
이번에는 슌스케까지 끼어 들었다.
"아니, 똑똑하지도 않아."
"그럼 뭔데?"
타미오는 그렇게 말하는 노무라의 얼굴을 올려다 보면서 거의 우스꽝스러움에 가까운 진지함을 눈썹 사이에 드리우며
"중간 정도"하고 설파했다.
네 사람은 나란히 실소를 터트렸다.
"중간 정도가 좋지. 어른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알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거다. 특히 하츠코 씨는 마음에 새겨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타츠코 씨는 괜찮지만――"
그 웃음이 조용해졌을 때, 노무라는 넓은 가슴 위에 팔짱을 끼고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멋대로 말하라지. 오늘 따라 나만 괴롭히네?"
"그럼 나는 어때?"
슌스케는 농담처럼 노무라의 바로 앞에 섰다.
"너도 글렀어. 너는 중간 정도를 나서서 맡을 수 없는 남자야――아니, 너만이겠냐. 요즘 사람은 다 그래. 다 중간 정도론 만족할 수 없지. 그러니 에고이스트가 되지. 에고이스트가 된다는 건 타인만 불행하게 하는 게 아냐. 자기 스스로도 불행하게 만들지.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아."
"그래서 너는 중간이냐?"
"물론이지. 안 그러면 이렇게 태연할 수 없으니까."
슌스케는 불쌍하단 눈초리로 노무라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하지만 에고이스트가 된다는 건 자신만 불행하는 게 아냐 타인까지 불행하게 만들지, 라고 해야 맞지 않겠어? 그럼 아무리 중간이라도 세상 사람들이 에고이스트라면 불안할 거 아냐. 그러니 너처럼 태연해지려면 중간인 것 이상으로 에고이스트가 아닌 세상을――거기까진 안 가도 먼저 에고이스트가 아닌 네 주위를 믿어야만 하지."
"그야 믿고 있지. 하지만 내가 믿더라도――잠깐, 그럼 너는 남을 전혀 믿지 않는단 거야?"
슌스케는 역시나 작게 미소 지은 채 믿는다고도 믿지 않는다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크초와 타크초의 시선이 신기하다는 양 자신의 위로 향하고 있는 걸 의식하면서.
열둘
음악회가 끝난 후, 슌스케는 기어코 오오이와 후지사와에게 끌려 '시로' 동인의 차모임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는 물론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후지사와 이외의 동인에겐 조금 호기심이 끌리기도 했다. 하물며 티켓을 받은 의리가 있는 만큼 허투루 거절하는 것도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때문에 그는 도리 없이 오오이와 후지사와의 뒤를 따라 무대 옆방의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방안에는 이미 대여섯 명의 대학생이 프록 코트를 입은 시미즈 쇼이치와 함께 자그마한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다. 후지사와는 그런 학생들을 하나하나 슌스케에게 소개했다. 개중에는 콘도라는 독문과 학생과 하나부사라는 불문과 학생이 특히 슌스케의 주의를 끌었다. 콘도는 오오이보다 키가 작고 커다란 코안경을 찬 청년으로 '시로' 동인 중에선 제일 그림을 잘 안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언젠가 '제국문학'에 당당히 문전 평판을 쓴 적이 있어 슌스케도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또 하나부사는 일주일 전 '하키노키'에 후지사와와 함께 온 검은 중정모를 쓴 남자여서 영불독이 사 개국어 이외에도 그리스어나 라틴어도 알고 있다는 비범한 어학도로 알려져 있었다. 하물며 Hanabusa란 서명이 적힌 영불독이 및 그리스와 라틴의 책이 이따금 혼고도리의 헌책방에서 찾아 볼 수 있었기에 슌스케도 이름만은 잘 아는 청년이었다. 이 둘에 비하면 다른 '시로' 동인은 의외로 특색이 빈곤했다. 하지만 깔끔한 복장을 입고 가슴에 작은 빨간 장미 조화를 꽂아두고 있는 건 모두에게 공통된 측징이었다. 슌스케는 콘도 옆에 앉으며 이런 세련된 녀석들 사이에 섞여 있는 오오이 아츠오의 야만적인 모습을 우습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턱시도를 입은 후지사와는 여자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먼저 독창가 시미즈에게 인사했다.
"아뇨, 요즘 들어 목이 안 좋아서요――그보다 '시로'는 잘 팔리나요? 이제 수지는 맞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어차피 저희가 쓴 게 잘 팔릴 리도 없지요. 인도주의와 자연주의 말고는 예술이 없다 생각하는 세간이니까요."
"그런가요? 하지만 한사코 안 팔릴 수도 없지요. 곧 후지사와 군의 '보들레르 시집'이 날개 돋힌 듯이 팔리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시미즈는 뻔히 보이는 아첨을 하면서 종업원이 내온 홍차를 받고는 옆에 앉은 하나부사를 보며
"요전 번에 하나부사 군의 소설을 아주 재밌게 보았어요. 그건 어디서 소재를 따온 건가요?"
"그거요? 그건 게스타 로마노룸Gesta Romanorum에서 따온 거지요."
"흐음, 게스타 로마노룸이라."
시미즈가 잘 모르겠단 얼굴로 적당한 대답을 하고는 아까부터 작두콩 담뱃대로 냄새를 내뿜던 오오이과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선
"그 게스타 로마노룸이란 게 뭔데?"하고 조심성 없는 물음을 던졌다.
열셋
"중세 전설을 모은 책이에요. 십사 세기에서 십오 세기 사이에 있었던 일인데 원문이 꽤나 어려운 라틴어라――"
"너도 못 읽는 거야?"
"뭐 간신히 읽는 정도려나요. 참고하기에 좋은 번역도 제법 있으니까요――듣자하니 초서나 셰익스피어도 거기서 소재를 많이 취했다고 해요. 그러니 게스타 로마노룸도 바보 취급할 수는 없죠."
"그럼 너도 적어도 소재만큼은 초서나 셰익스피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단 뜻이네."
슌스케는 이런 문답을 들으면서 묘한 발견 하나를 했다. 그건 하나부사의 목소리나 태도가 신기하리만치 후지사와와 똑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도플갱어 같은 게 존재한다면 하나부사는 후지사와의 도플갱어라 해도 좋을 인간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본인이고 어느 쪽이 도플갱어인지는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그는 하나부사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이따금 가슴 주머니의 빨간 장미꽃을 신경 쓰는 후지사와를 훔쳐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후지사와가 테두리에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으로 홍차를 마신 입을 닦으며 또 옆의 독창가를 바라보며
"이번 사 월에는 '시로' 특별호가 나오니까요. 그 전후로 콘도 씨의 힘을 좀 빌려 전시회를 열려고 합니다."
"그것도 묘안이군요. 그나저나 전시회라, 역시 여러분의 작품만을――"
"그렇지요. 콘도 씨의 목판화, 하나부사 씨나 저의 유화――그리고 서양 화가의 사진판을 진열할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경시청이 나체화를 치우라고 소란을 떨 거 같군요."
"내 목판화는 괜찮지만 너나 하나부사의 유화는 위험할걸. 특히 네 'Utamaro의 황혼'에 이르러선――그거 보신 적 있나요?"
코안경을 쓴 콘도는 그렇게 말하며 마도로스 파이프의 연기를 내뿜으며 곁눈질로 힐끔 슌스케로 보았다. 그리고 슌스케가 아직 대답하기도 전에 테이블 너머서 후지사와가 끼어들더니
"그야 아직 안 보여드렸죠. 언젠가 보시겠지만――야스다 씨는 에혼우타마쿠라란 걸 보신 적 있나요. 없어요? 제 'Utamaro의 황혼'은 그 안의 한 장을 장식적으로 그린 것이지요. 방식은――콘도 씨, 그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모리스 드니도 아니고 그렇다고――"
콘도는 코안경 뒤의 눈을 닫은 채로 가만히 생각에 잠겼으나 이윽고 무거운 입을 열려 했다. 그러자 또 오오이가 옆에서 담뱃대를 문 채로
"요컨대 춘화란 거 아냐"하고 난폭한 주석을 덧붙이고 말았다.
하지만 후지사와는 의외로 불쾌하지 않았는지 여느 때처럼 꺼림칙할 정도로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네, 그 표현이 가장 빠를지도 모르겠네요"하고 쾌활하게 오오이에게 찬성했다.
열넷
"확실히 그거 재밌겠군요――그나저나 문득 궁금해지는군요. 춘화란 것도 역시 서양 쪽이 발달되어 있나요?"
시미즈가 그렇게 묻는 걸 시작으로 콘도는 유유히 마도로스 파이프의 재를 털면서 대학에서 속독이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로 천천히 서양의 춘화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흔히 춘화로 퉁치기 쉽지만 대개 세 종류로 구별하는 게 맞지요. 하나는 ××××를 그린 것, 또 하나는 그 전후만을 그린 것. 마지막으로 단순히 ××××를 그린 것――"
물론 슌스케는 이런 화제에 일종의 의협심을 내뿜을 정도의 도덕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콘도의 미적 위선이라 해야 마땅할 게――자신의 외설적 관심 위에 예술이란 금박을 덧칠하는 게 불쾌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콘도가 의기양양히 자못 예술의 극치가 이런 그림에 있는 듯한 저속한 입을 놀리자 슌스케는 담배 연기 너머로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콘도는 그런 건 알지도 못하는지 위로는 고대 그리스의 도기 그림부터 아래론 근대 프랑스의 석판화까지 갖은 그림 형식을 하나하나 설명하고선
"재밌는 건 말이죠. 그렇게나 성실해 보이는 렘브란트나 뒤러마저 이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 있죠. 심지어 레브란트는 그 유명한 렘브란트 광선이 한 곳에 드리워 있으니 놀랍지 않습니까. 요컨대 그런 천재라도 이런 방면에 손을 댈 정도의 속됨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뭐 그런 점은 우리와 엇비슷하단 거지요."
슌스케는 기어코 들어 줄 수 없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오오이가 히죽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짓고는 하품을 눌러 죽이는 듯한 목소리로
"기왕 하는 김에 렘브란트랑 뒤러도 우리처럼 방귀를 꼈다는 고증이라도 발표하지 그래."
콘도는 커다란 코안경 뒤로 오오이를 향한 험악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오오이는 신경도 쓰지 않는 투로 담뱃대를 뻐끔뻐끔 피우며
"아니면 백척간두진일보라도 같은 방귀를 끼니까 너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전체라 자칭하는 것도 멋질지 모르지."
"오오이, 그쭘해둬."
"오오이 씨, 그만하죠."
보다 못 했는지 하나부사와 후지사와가 동시에 부드럽게 말렸다. 그러자 오오이는 교활한 눈동자로 새파랗게 질린 콘도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내가 실수했네. 딱히 너를 화내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아니, 아닌 건 고사하고 네 지식의 박식함에는 감탄을 금하지 못 하겠어. 그러니 뭐, 화내지 마."
콘도는 끈기 있게 입을 다물고서 테이블 위의 홍찻잔을 바라보았으나 오오이가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대뜸 의자서 일어나더니 어안이 벙벙한 주위 일행을 뒤로한 채 곧장 방을 나가 버렸다. 일동은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 서로 어색한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이윽고 슌스케는 아무렇지 않은 채 하는 오오이를 향해 살짝 턱으로 신호를 보내고는 미소를 머금은 조용한 목소리로
"나는 이만 가볼 테니까――"
이게 그날 밤, 그의 입에서 나온 최초이자 최후의 말이었다.
열다섯
그 후로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슌스케는 우에노행 전철 안에서 우연히 타츠코와 만났다.
봄날의 도쿄서 드물지 않게 보는 모래먼지 부는 오후였다. 슌스케는 대학에서 긴자의 야타야에 액자를 주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오와리쵸 변두리서 전철에 올라 타선 양 좌석을 빼곡 채운 승객 속에서 타츠코의 쓸쓸한 얼굴을 보았다. 그가 전철 출입구에 섰을 때, 그녀는 역시나 검은 숄을 걸치고서 무릎 위에 펼친 주부 잡지에 얌전한 시선을 주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문득 고개를 들어 근처 손잡이를 잡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곧 한쪽 뺨에 보조개를 드리우며 앉은 채로 정중히 묵례를 했다. 그는 인사에 대답하기보다 먼저 혼잡한 승객을 밀쳐내며 타츠코 앞의 손잡이를 잡으며
"지난 밤엔――"하고 평범하게 인사했다.
"저야말로――"
두 사람은 그렇게 입을 다물었다. 전철 창문을 통해 밖을 보자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거리가 잿빛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긴자 거리의 모습이 그 잿빛 안에서 떠올라 무너지듯이 뒤로 밀려 간다. 슌스케는 그런 광경 앞에 당전히 앉은 타츠코의 모습을 한동안 내려보았으나 이윽고 그 침묵이 고통스러워져 이번에는 되도록 가벼운 기미로
"오늘은――귀가 하시는 길인가요?"하고 다시 물어 보았다.
"잠깐 오빠한테――고향 사는 오빠가 왔거든요."
"학교는요? 쉬셨나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다음 달 오 일부터라나요."
슌스케는 서서히 두 사람 사이의 서먹함이 얼음처럼 녹는 걸 느꼈다. 그때 광고 가게의 붉은 깃발이 낫팔이나 태고 소리를 바람에 실으며 순식간에 전철 창문을 덮었다. 타츠코는 살짝 어깨를 떨구고서 창밖을 돌아보았다. 그때 그녀의 작은 귓볼이 비스듬하게 드러오는 햇살을 받아 살짝 붉은 빛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슌스케는 그걸 아름답다 느꼈다.
"지난 번엔 곧장 돌아가셨다 들었어요."
타츠코는 슌스케의 얼굴을 보며 그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한 시간 가량 있다 돌아갔죠."
"집은 역시 혼고에 계신가요?"
"그렇죠. 모리카와쵸요."
슌스케는 교복 주머니를 뒤져서 타츠코에게 명함을 건넸다. 건넬 때 상대의 손을 보자 사파이어가 박힌 금반지을 얇은 새끼 손가락에 하고 있었다. 슌스케는 그 또한 아름답다 느꼈다.
"대학 정문앞의 옆골목이에요. 언제 한 번 놀러 오세요."
"감사합니다. 언제 한 번 하츠코 언니랑 같이 찾아 뵐게요."
타츠코는 명함을 오비 안에 꽂으며 거의 들리지 않는 대답을 했다.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입을 다물고서 전철 소리인지 바람 소리인지 구분 가지 않는 거리의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슌스케는 이 두 번째 침묵은 이전처럼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되려 그는 그 침묵 속에서 어떤 평안한 행복의 존재마저 명확히 의식하고 있었다.
열여섯
슌스케의 하숙은 혼고 모리카와쵸에서도 비교적 한적한 곳에 자리해 있었다. 그것도 쿄바시 주변에 위치한 술집의 2층만 빌린 것이라 다른 하숙에 비하면 훨씬 작고 아담한 구조였다. 그는 그 방에 커다란 서양 책상이나 안락 의자 등을 두었는데 보기엔 조금 갑갑해도 어찌 됐든 살기엔 썩 나쁘지 않을 정도론 서양풍 서재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서재를 장식해야 할 색채란 단지 서재를 가득 채운 서양 서적의 행렬뿐으로, 벽에 걸린 액자도 대개는 흔해 빠진 서양 명화의 사진판이 담겨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게 항상 내키지 않았던 그는 대신 화분을 곧잘 사와선 방 중앙에 자리한 나무 탁자 위에 두었다. 오늘도 이 나무 탁자 위에는 등나무 바구니에 담긴 앵초가 몇 개의 얇은 가지 끝에 붉은 꽃을 달고 있었다……
스다쵸에서 환승하며 타츠코와 헤어진 슌스케는 한 시간 뒤 이 하숙 2층방에서 창가의 서양 책상 앞에 놓은 회전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읽다만 책이 상아 페이퍼 나이프를 꽂은 채로 가만히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 페이지에 담긴 사상을 음미할 끈기가 들지 않았다. 타츠코의 모습은 마치 담배 연기가 주위를 감도는 것처럼 한사코 아름답게 그의 머릿속에 들러 붙고 있었다. 그는 그 머릿속 환상이 앞서 전차서 맛본 행복의 뒷맛인 것처럼만 느껴졌다. 또 동시에 다시 찾아 올 더 큰 행복의 전조처럼도 보였다.
그렇게 책상 위 재떨이에 담배가 둘셋 가량 쌓였을 때, 거창하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돌리더니 누군가 카라카미 너머에 멈춰 서는 소리가 들리고는
"야, 있냐."하고 익숙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신스케가 이렇게 대답하자 조금도 거리낌 없이 카라카미가 열리더니 통통한 노무라가 앵초 화분을 둔 탁자 너머로 어깨를 흔들며 들어왔다.
"조용하네. 현관에서 몇 번이나 불렀는데 여종 하나 안 오잖아. 별 수 없이 아무 말 않고 올라왔어."
처음으로 이 하숙을 찾은 노무라는 방을 주의 깊게 돌아보고는 슌스케가 가리키는 안락 의자에 큰 엉덩이를 깔았다.
"아마심부름이라도 간 걸 거야. 집주인 할머니는 귀가 멀어서 어지간해선 잘 안 나오고――학교 끝나고 오는 길이야?"
슌스케는 탁자 위에 서양 찻잔을 내놓으며 노무라의 교복에 시선을 주었다.
"아니, 실은 지금부터 고향으로 가는 길이야――내일이 아버지 삼주기거든."
"피곤하겠네. 네 고향이면 가는 것만 해도 일이잖아."
"아니 뭐, 이동이야 익숙하니 상관 없는데 그런 시골 행사는――"
노무라는 마치 질색이라는 양 근시 안경 뒤에서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기색을 바꾸더니
"그건 그렇고 너한테 부탁 하나 하고 싶어서 온 건데――"
열일곱
"새삼스럽게 무게는 잡고 그래."
슌스케는 찻잔을 노무라 앞에 두고는 자신 또한 탁자 앞 의자에 앉아서는 의아하다는 양 상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딱히 새삼스러운 건 아니고."
노무라는 되려 어색하다는 양 짧게 깎은 머리를 쓰다듬었으나
"실은 요전 번에도 말한 정신병원 이야기 말인데――어때? 네가 나 대신 하츠코 씨를 데리고 가주지 않겠어? 나는 오늘 내려 가면 이래저래 일주일 가량은 못 돌아 올 거 같거든."
"좀 힘들지 싶은데. 일주일 가량 걸려도 돌아와서 가면 되잖아."
"하츠코 씨가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다 그래서 말야."
노무라는 정말로 곤란하단 얼굴로 한동안은 벽에 걸린 사진판 그림을 하나둘 훑었으나 그 눈이 레오나르도의 레다까지 가고는
"야, 저거 꼭 타츠코 씨 닮은 거 같지 않아?"하고 생각지 못한 방면으로 이야기를 틀었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슌스케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단 자각을 느꼈다. 이는 물론 그에게 썩 재미난 자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또 동시에 자그마한 모험을 하는 듯한 유쾌함이 숨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닮았어, 닮았어. 타츠코 씨한테 살짝 살이 붙으면 저거랑 똑같을걸."
노무라는 근시 안경 너머로 한동안 레아를 바라본 뒤, 이번에는 그 눈을 앵초 화분에게 옮기고는 배 밑에서 올라오는 듯한 커다란 한숨을 내쉬고선
"우리 사이 봐서 한 번만 안내 좀 해주면 안 돼? 나는 네가 가줄 줄 알고 하츠코 씨한테 그런 요지로 편지까지 보내놨는데."
슌스케의 혀 끝에는 "그건 네 사정이고"하는 말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 말이 아직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는 잠시 고개를 숙인 타츠코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리고 그게 상대한테도 통했는지 노무라는 안락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며
"그야 하츠코 씨 한 명이면 네가 꺼리는 것도 이해는 해. 하지만 타츠코 씨도 아마――아니, 분명 같이 가줄 거야.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슌스케는 찻잔을 손바닥 위에 얹은 채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간다 가지 않는다 문제를 생각하는 걸까. 한 번 거절한 부탁을 다시 받는데 마땅한 구실을 생각하는 걸까――그건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 못 갈 것도 없는데."
그는 지나치게 타산적인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그렇게 말한 뒤, 쫓아가듯이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닛타 씨도 뵙고."
"그래그래, 덕분에 마음이 좀 놓이네."
노무라도 자못 마음이 놓인 듯 가슴춤의 단추를 두세 개 풀고는 처음으로 홍차 찻잔에 입을 얹었다.
열여덟
"언제 가면 되는 건데."
슌스케의 눈은 노무라보다도 손바닥 위 홍찻잔을 향해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오후에 보기로 했는데 네 사정 안 되면 월요일이나 금요일로 바꿔도 되고."
"아냐, 수요일이 마침 강의가 비어 있거든. 그래서――쿠리하라 씨한텐 내 쪽에서 가면 돼?"
노무라는 상대의 눈썹 사이에 깃든 망설임 섞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아냐, 찾아 오라고 할게. 그게 가기도 편하고."
슌스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채로 한동안 쉬고 있던 이집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대며
"넌 졸업 논문 시작했냐."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책은 간간히 읽고 있는데――언제쯤 생각이 정리될지 잘 감이 안 오네. 특히 요즘 들어선 일이 많아서――"
그렇게 말하는 노무라의 눈에는 또 냉소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슌스케는 의외로 진지한 기미로
"일이 많다니?"하고 되물었다.
"너한텐 이야기 안 했던가.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서 나 졸업하면 여기 와서 같이 살자 하시더라고. 그러면 고향 땅도 정리해야 하잖아. 이번에 아버지 기일 돌보고 오는 길에 그거까지 해결할 생각이야. 근데 또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 철학서라도 한 권 읽는 듯한 기분이라 좀 어렵네."
"그야 그렇겠지. 특히 너 같은 성격은――"
노무라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슌스케는 노무라의 가정 사정 등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노무라 일가는 시코쿠 남부에선 꽤 유서 깊은 가문이며, 그의 아버지가 정당에 관여한 후로 가세가 조금 기울었으나 그래도 주변에서는 굴지의 부자임이 분명하다, 하츠코의 아버지 쿠리하라는 그의 어머니의 이복 동생으로 정치가로서 오늘날의 위치에 오를 때까진 줄곧 노무라의 아버지에게 신세를 졌다, 그 아버지 사후 첩의 아이라 말하는 여자가 나타나 한 때는 귀찮은 소송 소동이 있었다――그런 여러 소식에 밝은 슌스케는 노무라가 귀향을 필요로 하는 배후에 얼마나 복잡한 문제가 꿈틀이고 있을지 대강 상상이 되는 듯했다.
"하여튼 한동안 슐라이어마허 신경 쓸 새가 없을 듯하네."
"슐라이어마허?"
"졸업 논문 주제."
노무라는 내키지 않는다는 양 대답하고는 짧은 머리를 살짝 숙여 자신의 손발을 바라보았으나 이윽고 기운을 되찾았는지 가슴춤의 단추를 잠그면서
"이만 가봐야겠다――그럼 정신병원 쪽은 부탁 좀 할게."
열아홉
슌스케는 노무라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사냥모에 인버네스 코트를 걸치고 그와 함께 모리카와쵸의 하숙집을 나섰다. 다행히 바람은 진작 잦아들어 거리에는 쌀쌀한 봄저녁이 아스팔트 위를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전철로 중앙정차장으로 향했다. 노무라가 걸친 가방을 인부에게 건네고 전등불이 켜진 이등대합실로 들어가자 벽 위에 걸린 시계 바늘이 발차 시간과 꽤 먼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슌스케는 가만히 선 채 턱으로 그 바늘을 가리켰다.
"시간 좀 있는데 저녁이라도 먹고 갈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노무라는 교복 주머니서 시계를 꺼내 벽 위에 걸린 시계와 번갈아 보고선
"그럼 네가 먼저 가있어. 나는 티켓부터 사야겠다."
"슌스케는 홀로 대합실 옆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거의 꽉 차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입구에 서서 망설임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자니 눈치 빠른 점원 하나가 곧장 가까운 테이블이 비어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그 테이블에선 이미 사업가로 보이는 부부가 마주 앉아 포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서양풍은 피하고 싶었으나 달리 앉을 자리가 없기에 옆에 앉기로 했다. 물론 상대 부부는 별로 민폐라 여기는 기미도 없이 벚나무 한 그루를 둔 채로 줄곧 칸사이벤으로 떠들고 있었다.
점원이 주문을 들으러 오니 노무라가 곧 석간 두세 장을 들고서 바쁘게 들어왔다. 그는 슌스케의 목소리에 겨우 위치를 깨닫고는 옆자리에 앉은 부부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강 의자를 끌어 당기며
"지금 티켓 사면서 오오이하고 닮은 사람을 봤는데 설마 본인은 아닐 테지."
"오오이는 기차 타면 안 되냐."
"아니, 여자를 데리고 있잖아."
그때 수프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오오이는 제쳐둔 채 아라시야마의 벚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니 세토우치의 증기선은 재밌었다니 봄냄새 섞인 여행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노무라가 접시가 바뀌는 걸 기다리며 불쑥 떠올랐다는 양
"아까 하츠코 씨한테 전화로 이야기해뒀어."
"그럼 오늘은 아무도 배웅 안 와?"
"오겠어? 그건 왜?"
왜냐고 물으니 슌스케도 대답이 궁해졌다.
"오늘 아침 편지 쓰기 전까진 고향 간다는 말을 안 했으니까――방금 전화로 듣기론 그 편지도 이제 막 도착한 참이라네."
노무라는 마치 배웅을 오지 않는 하츠코를 위한 변명을 하는 듯했다.
"그래? 아까 타츠코 씨를 봤는데 어쩐지 아무 말도 안 하더라 싶었네."
"타츠코 씨를 봤어? 언제?"
"오후 좀 지나 전철에서."
슌스케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방금 전 하숙집에서 타츠코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제까지 가만히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스스로도 우연인지 고의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스물
플랫폼 위는 여느 때처럼 배웅 인파로 무리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게 끝없이 꿈틀거리는 위로 전등불이 켜진 열차 창문이 하나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노무라도 그 창문서 고개를 내밀고는 밖에 있는 슌스케와 두세 마디 앞뒤 없는 말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주위 군중의 심정에 영향을 받아 발차가 기다려지는 듯 기다려지지 않는 듯한 일종의 번잡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슌스케는 대화가 끊기자 거의 적의가 깃든 눈동자로 좌우 사람을 바라보며 성가시다는 양 게다 신은 발을 구르곤 했다.
그러는 사이 발차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잘 다녀와라."
슌스케는 사냥모 챙에 손을 얹었다.
"그래, 그 일은 잘 좀 부탁하자" 노무라는 새삼스러운 말투로 인사했다.
기차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슌스케는 한사코 플랫폼에 서서 서서히 멀어지는 노무라를 바라볼 정도로 감상벽에 사로 잡혀 있진 않았다. 때문에 그는 다시 한 번 사냥모 챙에 손을 얹고는 미련 없이 주위 인파에 뒤섞여 입구의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문득 그의 앞을 지나는 기차 창문이 눈에 들어오니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오오이 아츠오가 망토 입은 팔꿈치를 창가에 얹은 채로 손수건을 흔드는 게 보였다. 슌스케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또 동시에 방금 오오이를 봤다는 노무라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오오이는 슌스케의 모습을 보지 못 했는지 서서히 기차 창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한사코 손수건만 휘둘렀다. 슌스케는 여우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 들어 멍하니 그 뒤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충격에서 돌아왔을 때, 슌스케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오오이가 손수건을 흔든 상대를 찾는데 바빠졌다. 그는 인버네스 코트를 걸친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린 채 전후좌우로 쏟아지는 배웅인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의 머릿속에는 여자를 데리고 있다는 노무라의 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땅해 보이는 여자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도 마땅한 여자가 항상 그림자 사이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신 누가 진짜 오오이의 상대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찾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차장 밖으로 나와 마루노우치의 커다란 달을 올려다 봤을 때도 슌스케는 방금 전의 기이한 심정서 온전히 해방되지는 못 했다. 그는 오오이가 그 기차를 타고 있었단 사실보다 기차 창문에서 손수건을 흔들고 있었다는 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모순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자타공인 악랄한 인간으로 통하는 오오이 아츠오가 어떻게 그렇게 연극처럼 과장된 행동을 하는 걸까. 혹은 사람이 안 좋은 건 겉꾸밈이고 실은 의외로 정직한 감상주의자였던 걸지 모른다――슌스케는 여러 억측 사이서 헤매이면서 신개척지 같은 넓은 도로로 호리타바까지 이동해 전철에 올라 탔다.
하지만 다음 날 학교에 간 그는 순문학과 공통의 철학 이론 교실서 어젯밤 일곱 시 급행 열차를 탔을 터인 오오이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스물하나
그날 평소보다 살짝 출석에 늦은 슌스케는 강단을 둘러싼 자리 중에서도 가장 뒷 책상에 앉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곳에 앉고 보니 두세 줄 앞 비스듬한 위치에 익숙한 쿠로모멘 몬츠키가 태연히 턱을 괴고 있었다. 슌스케는 뭔가 싶었다. 또 어젯밤 중앙정차장에서 본 게 오오이 아츠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건 역시 오오이가 분명하다는 생각도 뒤따랐다. 그러자 그가 손수건을 흔드는 걸 보았을 때보다도 더욱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오오이는 모종의 박자에 빙글 슌스케를 돌아보았다. 얼굴에는 여느 때처럼 오만불손한 표정이 드리워 잇었다. 슌스케는 당연하다 해야 할 이 표정을 묘하게 신기하게 느끼며 "안녕"하는 인사를 눈으로 보냈다. 그러자 오오이도 쿠로모멘 몬츠키 어깨 너머로 턱을 살짝 들어 인사를 했으나 다시 고개를 틀고는 옆에 앉은 교복 차림 학생과 무어라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했다. 슌스케는 불쑥 어제 본 일을 확인하고 싶단 생각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걸 위해 일부러 자리를 벗어나는 건 귀찮기도 할 뿐더러 한심하게도 느껴졌다. 그렇게 만년필에 잉크를 주입하며 살짝 허리를 굽히고 있자니 철학 개론을 담당하는 유명한 L 교수가 검은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느긋히 들어왔다.
L 교수는 철학자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운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하물며 오늘처럼 유행하는 갈색 정장을 입고서 금반지를 찬 손을 움직이며 가방 안 초고를 꺼내고 있자면 강단이 아닌 사무용 책상 뒤에 서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강의는 교수의 풍채와 어울리지 않게 그 성가신 칸트 철학의 카테고리 논의부터 시작되었다. 슌스케는 전공인 영문학 강의보다 철학이나 미학 강의에 충실한 학생이었으니 대략 두 시간 동안 열심히 만년필을 움직여 솜씨 좋게 노트 필기를 했다. 그럼에도 간간히 고개를 들어선 여전히 턱을 괸 채 쉽사리 펜을 쓰지 않는 오오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이따금 어젯밤 느낀 신비한 기분이 칸트와 그의 사이에 아지랑이처럼 흐르는 걸 느껴야만 했다.
그러니 이윽고 강의가 끝나고 책상 앞 학생들이 하나둘 강당 밖으로 향하자 그는 입구의 돌계단 위에 멈춰서 천천히 나온 오오이와 합류했다. 오오이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노트가 삐져 나온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있었으나 슌스케의 얼굴을 보자 히죽히죽 웃으며
"요전 번에 만난 미인들은 잘 지내냐?"하고 슌스케를 놀렸다.
두 사람 주위엔 수많은 대학생들이 좁은 입구에서 양옆의 돌계단으로 갈라지며 한없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슌스케는 쓴웃음을 지은 채로 오오이의 질문엔 답도 하지 않은 채 척척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싹을 피운 가로수 아래에 와서는 처음으로 오오이를 돌아보며
"우리 어제 도쿄역에서 봤는데 넌 나 못 봤냐?"하고 떠보듯이 물었다.
스물둘
"흐음, 도쿄역에서?"
오오이는 당황했다기 보단 되려 결심을 망설이는 듯한 눈초리로 교활하게 슌스케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 눈이 슌스케의 차가운 시선에 튕겨나가자 그는 불쑥 태연한 태도로
"글쎄. 난 몰랐네"하고 자백했다.
"심지어 미인이 배웅 온 거 같던데."
기세를 탄 슌스케는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낫을 내질렀다. 하지만 오오이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다는 양 입술에 옅은 웃음을 지으며
"미인――그건 내――아니 됐다"하는 은근한 대답으로 도망쳐 버렸다.
"어디 갔던 거야?"
"그야 내――" 그에 질색한 슌스케는 이번에는 조금도 기교도 없이 정면으로 오오이를 추궁했다.
"코즈까지."
"그리고?"
"그리고 곧장 돌아왔지."
"왜?"
"왜냐니――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그때 마침 정향나무 꽃의 달콤한 냄새가 두 사람의 코를 찔렀다. 두 사람 모두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 틈엔가 벌써 디킨슨 동상 앞까지 와있었다. 정향나무는 동상을 둘러싼 나무 울타리 위에서 포근한 햇살빛을 받아 보라색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니까 그 그럴만한 사정을 묻는 거 아냐."
그러자 오오이는 유쾌하다는 양 큰 목소리로 웃었다.
"괜한 걱정을 하고 있네. 그럴만한 사정이라면 요는 그럴만한 사정이란 거 아냐."
하지만 슌스케도 두 번재에는 쉽사리 눈을 감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지만 잠깐 코즈 다녀오는데 손수건까지 흔들 필요는 없었을 거 아냐."
그러자 오오이의 얼굴에도 순간 허둥지둥하는 기색이 감돌았다. 하지만 말투만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다는 양.
그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흔든 거야."
슌스케는 상대의 당황한 허를 찔러 더욱 놀리는 듯한 짓궂은 질문을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오오이는 벌써부터 형세가 안 좋은 걸 깨달았는지 정문 앞에서 이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에 이르자
"너 어디 가냐? 귀가하나 보네. 그럼 난 가볼게. 도서관에 들렀다 갈 거거든."하고 교묘히 슌스케를 남겨두고서 재빨리 어디론가 향해 버렸다.
슌스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단지 이대로 따라가면서까지 말을 토해내게 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정문을 나와서 곧장 전철길을 두고 있는 이쿠분도에 들어갔다. 그렇게 발을 들였을 때, 어두컴컴한 가게 안쪽에서 헌책을 찾고 있던 남자 하나가 그를 보더니
"오랜만이네요, 야스다 씨"하고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스물셋
거의 언제나 저녁 노을처럼 깊이가 부족한 가게의 등불도 새빨간 터키 모자를 쓴 후지사와를 구분해내기엔 충분했다. 슌스케는 답례를 위해 모자를 벗으며 먼지 쌓인 주위의 헌책과 상대의 화려한 복장 사이서 기묘한 대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후지사와는 대영백과전서가 꽂힌 선반에 가련한 한 손을 얹은 채로 요염하다 해도 좋을 웃음을 짓더니
"오오이하곤 매일 보시나요?"
"네, 지금도 같이 강의 듣고 나온 참이에요."
"저는 그날 밤 이후로 한 번도 못 봤는데――"
슌스케는 같은 '시로' 동인인 만큼 콘도와 오오이 사이의 고집이 후지사와마저 말려 들게 한 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후지사와는 그렇게 여겨지는 게 싫은지 더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서는
"두세 번 하숙집을 찾아 갔는데 아쉽게도 매번 자리에 없어 가지고――오오이는 동 쥐앙으로 유명하잖아요. 분명 쉴 새가 없는 거겠죠."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오오이를 안 슌스케는 오늘까지 그 쿠로모멘 몬츠키에 그런 기름기 섞인 연애 사정이 얽혀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로
"그렇게 바람둥이에요?"
"바람둥이라 해야 할지――하여간에 곧잘 여자를 옆에 두는 사람이죠. 그런 면에선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리의 선배였어요."
그 순간 슌스케의 뇌리에는 어젯밤 기차 창문에서 손수건을 흔들던 오오이의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후지사와가 오오이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적당한 중상모략을 내뱉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후지사와는 살짝 고개를 굽혀 아양 떠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듣자하니 요즘엔 어디 레스토랑 여종업원이랑 아주 사이가 좋다나요. 정말 부럽기 짝이 없어요."
슌스케는 후지사와가 되려 오오이의 명성을 위해 이런 말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 오오이는 흔드는 손수건 안에서 농후한 젊은 여성의 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한창 때네요."
"한창 때지요. 그러니 저 같은 걸 만날 새가 있겠나요. 더군다나 제가 찾는 볼일이라 해봐야 세이요켄에서 했던 음악회 티켓의 돈을 받으러 가는 거니까요."
후지사와는 그렇게 말하며 가까운 카운터에 있는 헌책 하나를 들어 올렸다. 적당히 페이지를 넘기고는 슌스케를 향해 표지를 보여주며
"이것도 하나부사 씨가 판 거네요."
슌스케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느꼈다.
"산스크리드어로 된 책이네요."
"네, 마하바라타인가 한다네요."
스물넷
"야스다 씨, 손님 오셨어요."
그런 여종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이미 교복으로 갈아 입어둔 슌스케는 그래요 하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러고선 일부러 기운 차게 계단을 밟으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내려와 보니 현관 격자 안에는 앞머리를 중앙에서 옆으로 가른 채 자루가 긴 보라색 파라솔을 든 하츠코가 바깥 빛을 뒤로한 채 평소보다 한 층 더 발랄하게 자리해 있었다. 슌스케는 문지방 위에 선 채 눈부심에 살짝 인상을 지푸린 채
"혼자 오셨어요?"하고 물어봤다.
"아뇨, 타츠코도 같이 왔죠."
하츠코는 몸을 비스듬하게 틀어 격자 바깥을 보았다. 격자 바깥에는 작은 돌이 깔려 있었고 그 돌 바깥에는 낡은 문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츠코의 시선을 쫓은 슌스케는 열린 문 너머서 익숙한 감색과 남색 줄무늬 기모노가 햇빛을 소맷자락에 드리운 채 서있는 걸 발견했다.
"잠깐 올라 오셔서 차라도 드시죠."
"감사하지만――"
하츠코는 싱긋 웃으면서 다시 한 번 격자 바깥을 보았다.
"그러세요? 그럼 나가시죠."
"계속 폐만 끼치네요."
"아뇨, 어차피 쉬는 날이니까요."
슌스케는 바쁘게 신발끈을 묶고 외투를 팔에 걸친 채로 모자를 적당히 한 손에 들고서 하츠코의 뒤를 따라 문을 나섰다.
하츠코와 마찬가지로 보라색 파라솔을 들고 밖에서 기다리던 타츠코는 슌스케의 모습을 보더니 손을 얌전히 허벅지 위에 얹고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신슈크는 거의 냉담할 정도로 인사했다. 인사하면서 이 냉담함이 혹은 타츠코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동시에 하츠코의 눈에 그의 마음을 배신하는 듯한 상냥함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하츠코는 두 사람의 대응에 별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비스듬하게 파라솔을 펼치며
"전철은? 세이몬 앞에서 타나요?"
"네, 그쪽이 가까울 거예요."
세 사람은 좁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타츠코는 오늘 안 가겠다고 성화를 부리는 거 있죠."
슌스케는 "그런가요?"하는 눈초리로 옆에 있는 타츠코를 보았다. 하얀 가루가 얕게 깔린 타츠코의 얼굴에는 보라색 파라솔이 만드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렇잖아요. 미친 사람이 있는 곳에 가는 건 꺼림칙하니까요."
"나는 괜찮은데."
하츠코는 파라솔을 빙글빙글 돌리며
"가끔은 미치광이가 돼보고 싶단 생각도 들어."
"어머, 별 소리를 다 하네. 왜?"
"그러면 이렇게 사는 것보다 더 독특한 일이 벌어질 거 같으니까.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해?"
"나? 나는 독특한 일은 없어도 돼. 이 정도로 충분해."
스물다섯
닛타는 먼저 세 사람을 병원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곳은 이런 건물치고는 보기 드물게 커튼, 카펫, 피아노, 유화 등이 굉장히 조화스럽게 장식된 곳이었다. 심지어 그 피아노 위에는 아직 계절감이 이른 장미꽃이 적당한 청동 항아리 안에 꽂혀 있었다. 닛타는 세 사람에게 의자를 권하고는 슌스케의 질문을 받아 이건 병원 온실서 피운 장미라 대답했다.
또 닛타는 미리 슌스케가 부탁한 걸 따라 하츠코와 타츠코를 향해 정신의학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을 매끄러운 말투로 설명했다. 그는 슌스케의 선배이며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제 분야와 다른 문학에 관심을 가진 남자였다. 때문에 그런 설명 속에도 정신병자의 실제 사례로 니체, 모파상, 보들레르 같은 이름이 번번이 인용되기도 했다.
하츠코는 열심히 그 설명을 들었다. 아츠코도――이쪽은 시종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역시 상당한 관심을 가진 듯했다. 슌스케는 마음 깊은 곳에서 두 사람의 주의를 끌고 있는 닛타가 부러워졌다. 하지만 둘을 향한 닛타의 태도는 거의 사무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또 동시에 줄무늬 정장에 밋밋한 넥타이를 한 그의 차림도 세기말의 예술가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소박할 따름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 저도 꼭 미치광이가 되는 것만 같았네요.
설명이 일단락 될 쯤, 하츠코는 한 층 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 쉬듯이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제정신인 사람과 정신병자 사이의 경계선이란 게 또렷하진 않지요. 하물며 천재라 자칭하는 사람들 쯤 되면 정신병자와 거의 차이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렇게 차이가 없다는 걸 지적한 게 그 유명한 롬브로소의 공적이지요."
"나는 차이점도 지적해줬으면 했는데."
슌스케는 옆에서 농담처럼 이의를 제기하자 닛타는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그야 물론 지적했지. 하지만 없었으니 도리가 없어."
"하지만 천재는 천재고 미치광이는 미치광이잖아?"
"그런 차이라면 과대망상증과 피해망상증 사이에도 있지."
"그거랑 이걸 똑같다 하는 건 너무한데."
"아니, 똑같지. 확실히 천재는 쓸모 있을지 모르지. 미치광이는 쓸모 없을 거고. 하지만 그 차이는 인간이 그들의 행위에 준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야. 자연이 만든 차이가 아니지."
닛타의 지론을 들은 슌스케는 두 여자와 웃음을 나누고선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닛타도 지나치게 진지해진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입술에 옅은 웃음을 드리웠으나 곧 진지한 표정을 되찾곤 세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며
"그럼 한 번 훑어보자"하고 가볍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스물여섯
세 사람이 처음으로 안내 받은 병실에는 머리를 묶은 아가씨 하나가 열심히 오르간을 치고 있었다. 오르간 앞에는 철격자가 내려진 창문이 놓여 있고 그 창문서 들어오는 빛이 아가씨의 얇은 얼굴을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슌스케는 그 병실 문앞에 서서 창밖으로 보이는 흰동백꽃을 보았을 때, 어쩐지 서양의 교회라도 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나가노에 사는 자산가의 따님인데 혼담이 꼬여서 발광했다지요."
"불상한 사람."
타츠코는 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하츠코는 동정하기보다도 되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며 가만히 아가씨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르간만은 잊지 않은 모양이네."
"오르간만이 아냐. 이 환자는 그림도 그리지. 재봉도 해. 글자는 아주 아름답고."
닛타는 슌스케에게 이렇게 말하곤 세 사람을 문앞에 두고서 조용히 오르간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아가씨는 마치 눈치채지 못 했다는 양 여전히 건반 위에 손가락을 뻗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기분은 좀 괜찮으세요?"
닛타는 두세 번 되물었으나 아가씨는 여전히 창밖의 흰동백을 마주한 채 돌아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닛타가 가볍게 어깨에 손을 얹자 무서운 기세로 돌아보면서도 손가락만은 빈틈 없이 이 병실 분위기에 어울리는 우울한 곡을 멈추지 않았다.
세 사람은 일쫑의 꺼림칙함을 느껴 말없이 방밖으로 물러났다.
"오늘은 기분이 안 좋나 보내요. 저래 봬도 내킬 때는 보기보다 애교 있는 여자거든요."
닛타는 병실문을 닫고서 조금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으나 이번엔 바로 앞방의 문을 열고서 "보세요"하고 세 손님을 들였다.
들어가 보니 그곳은 욕탕처럼 나무 바닥을 깐 방이었다. 방 한 가운데에는 항아리를 메운 듯한 구멍이 셋 있으며 또 그 구멍 위에는 수도꼭지 세 개가 갖춰져 있었다. 심지어 그 구멍 중 하나에는 민머리를 한 젊은 남자가 카키색 주머니서 고개만 내민 채 봉을 세우 듯이 들어가 있었다.
"여긴 환자의 머리를 식히기 위한 장소입니다. 단지 날뛸 가능성이 있으니까 저렇게 주머니에 넣지요."
듣고 보니 그 남자가 들어가 있는 구멍에선 얇은 폭포 같은 수도가 끝없이 민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남자의 얼굴에는 단지 공간을 바라보는 어두운 눈초리만 있을뿐으로 어떤 표정도 드리워 있지 않았다. 슌스케는 꺼림칙한 걸 넘어 불쾌한 심정에 떨어야 했다.
"이건 너무하잖아. 감옥 간수나 정신병원 의사는 될 게 못 되네."
"과거엔 너 같은 이상가가 인체해부를 도덕에 반하는 일이라며 공격했었지."
"저거 괴롭진 않나요?"
"물론 괴롭기도 하고 괴롭지 않기도 하죠."
하츠코는 눈썹 하나 꿈틀이지 않은 채 냉정히 남자를 내려다 보았다. 타츠코는――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슌스케가 하츠코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 타츠코는 이미 방 안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스물일곱
슌스케는 마음이 불편해져 하츠코와 닛타를 남겨두고 어두컴컴한 복도로 물러났다. 그러자 타츠코가 하얀 벽에 기댄 채 멍하니 서잇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타츠코는 눈물 젖은 눈초리를 들고서 호소하듯이 슌스케의 얼굴을 보았다.
"아뇨, 불쌍해서요."
슌스케는 저도 모르게 작았다.
"저도 불쾌하군요."
"불쌍하단 생각은 안 드시나요?"
"불쌍한지는 잘 모르겠지만――어쨌든 사람이 저러고 있는 꼴은 보고 싶지 않네요."
"저 사람 보고선 아무렇지도 않고요?"
"그보다 먼저 저 자신을 떠올리고 마는군요."
타츠코의 창백한 뺨에는 옅은 웃음이 드리웠다.
"매정한 분이시네요."
"매정할지도 모르지요. 대신 제가 관여한 일이라면――"
"손을 썼을 거라고요?"
그때 닛타와 하츠코가 나왔다.
"이번엔――그렇지. 저쪽 병실로 가볼까요."
닛타는 타츠코나 슌스케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두 사람 앞을 빠르게 지나 먼복도 끝에 자리한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하츠코는 타츠코의 얼굴을 보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왜 그래? 안색이 안 좋네."
"그냥, 머리가 좀 아프네."
타츠코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며 손바닥을 이마에 얹었으나 곧 여느 때처럼 또렷한 목소리로.
"가자, 별 일 아냐."
세 사람은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면서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었다.
이윽고 복도 끝에 이르자 닛타는 그방 문을 열어 세 사람을 돌아보며 "보시죠"하는 손짓을 했다. 그곳은 유도 도장을 방불케하는 넓은 다다미 병실이었다. 그리고 그 다다미 위에는 대략 스무 명에 가까운 여환자가 회색옷을 입은 채로 난잡히 무리지어 있었다. 슌스케는 높은 천장빛 아래서 이러한 광인 집단을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방금 전의 불쾌함이 강하게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다들 사이 좋네."
하츠코는 가축을 보는 듯한 눈초리를 지으며 옆에 선 타츠코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타츠코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으로 입으론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때요. 안에 들어가 보시겠나요?"
닛타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세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나는 사양이야."
"저도 됐어요."
타츠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츠코 씨는요?"
하츠코는 뺨에 생생한 핏기운이 감도는 얼굴로 아양 떨듯이 닛타의 얼굴을 보았다.
"저는 볼래요."
스물여덟
슌스케와 타츠코는 응접실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방금 전엔 들어오지 않았던 햇살이 비스듬하게 유리창을 투과하여 피아노 다리에 드리우고 있었다. 또 그 햇살을 받은 탓인지 항아리에 꽂힌 장미꽃도 전보다 한 층 더 갑갑한 단나래를 풍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아가씨가 연주하는 오르간이 마치 이 정신병원 건물이 내뱉는 숨소리처럼 이따금 복도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 아가씨는 아직도 연주하나 보네요."
타츠코는 피아노 앞에 선 채로 멍하니 먼곳을 보았다. 슌스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피아노와 마주한 의자에 앉아 지친 허리를 축 낮추며
"실연하는 정도로 미칠 수 있는 걸까"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타츠코가 조용히 슌스케의 얼굴을 보더니
"본인은 미치지 않을 거 같나요?"
"글쎄요――저는 미칠 거 같진 않네요. 그러는 타츠코 씨는 어떤가요?"
"저요? 저는 어떨까요."
타츠코는 누구에게 묻는 법도 없이 그렇게 말했으나 불쑥 창백한 뺨에 혈색을 드리우고는 눈을 하얀 양말 위로 떨구며 "모르겠네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슌스케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한동안 말없이 타츠코의 모습을 보았다. 이윽고 일부러 가벼운 투로
"걱정 마세요. 타츠코 씨라면 실연하는 일은 없을지 모르니까요. 대신――"
타츠코는 또 조용히 고개를 들어 슌스케의 미간을 보았다.
"대신?"
"실연시킬지도 모르죠."
슌스케는 농담조로 한 말이 묘한 진지함을 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진지한만큼 비꼼조인 걸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 건"
타츠코는 곧 고개를 낮추었으나 이윽고 슌스케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가만히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마치 두 사람을 휘감은 장미꽃 냄새가 나는 침묵을 떨쳐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세 번 건반을 두드렸다. 손가락에 힘이 없는지 소리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울림만을 내는데 그쳤다. 하지만 슌스케는 그 울림을 듣는 동시에 평소 그가 경멸하는 감상주의가 눈앞에서 자신을 사로잡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은 그에겐 물론 위험한 신호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그 위험을 피했다는 만족스러움은 더더욱 찾아 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츠코가 닛타와 함께 응접실에 나타났을 때, 슌스케는 평소보다 쾌활하게
"어때요, 하츠코 씨? 모델이 될만한 환자는 찾으셨나요?"하고 물었다.
"네, 덕분에요."
하츠코는 닛타와 슌스케에게 애교를 보이며
"정말로 도움이 되었어요. 타츠코도 오지 그랬어. 불쌍한 사람이 있더라. 항상 자기 배에 아이가 있는 줄 안대. 홀로 방구석에 앉아서 자장가만 부르는 거 있지."
스물아홉
하츠코가 타츠코와 이야기하는 사이 닛타는 슌스케의 어깨를 두들기고선
"야, 너한테 하나 보여줄게 있어"하고 말했다. 그러곤 여자들을 향해
"여러분은 여기서 잠시 쉬고 계세요. 차라도 내올게요."
슌스케는 닛타의 말을 듣고 얌전히 그 뒤를 따라 밝은 응접실에서 어두컴컴한 복도에 나왔다. 그러자 이번엔 방금 전과 반대 방향에 자리한 넓은 다다미 병실로 안내 받았다. 반대편과 마찬가지로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스무 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머리를 한 가운데서 가른 젊은 남자가 입을 벌린 채 침을 흘리며 두 손을 날개처럼 움직이며 괴이한 춤을 추고 있었다. 닛타는 슌스케를 끌고서 거침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무릎을 안은 채 앉아 있던 한 노인을 붙들더니
"그래, 별 일 없지?"하고 당연하다는 양 물었다.
"왜 없겠습니까. 듣자하니 이번 달 말 전에 또 반다이산이 파열한다는군요――어젯밤도 그 이야기를 위해 신들이 우에노에 모였다 합니다."
노인은 눈꼽 투성이 눈을 부릅 뜨고서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닛타는 그 대답을 신경 쓰는 기미도 없이 슌스케를 돌아보며
"어때"하고 비웃듯이 말했다.
슌스케는 옅은 미소만 지을 뿐으로 그 "어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닛타는 또 한 사람, 이번엔 니켈 안경을 쓴 신경질적인 남자 앞으로 가서
"드디야 강화조약이 조인되는 모양이야. 너도 이제 한가해지겠어."
하지만 그 남자는 음울한 눈으로 닛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한가해질 수가 없습니다. 클레망소는 결코 제 사직을 받아 들여주지 않을 테니까요."
닛타는 슌스케와 얼굴을 마주했으나 그 안에 웃음이 떠오른 걸 보고는 또 말없이 병실 구석으로 이동해 아까부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품 있는 반백발 남자에게 물었다.
"아내가 아직도 안 돌아온 거야?"
"그게 아내는 오고 싶어하는데――"
그 환자는 그렇게 말하다 불쑥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슌스케를 보더니 꺼림칙할 정도로 진지하게
"선생님께서 엄청난 사람을 데리고 오셨군요. 이 사람 주변에서 유명한 바람둥이입니다. 제 아내를 데려간 것도――"
"그래? 그럼 경찰에 신고해야겠네."
닛타는 대충 분위기를 맞추고는 또 한 번 닛타를 돌아보며
"이 사람들이 죽고 나서 뇌를 검출해 보면 말야 옅은 붉은 주름 위에 마치 계란 흰자 같은 게 손톱만큼 들러 붙어 있어."
"그래?"
슌스케는 여전히 옅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요컨대 반다이산 폭발도 클레망소에게 낸 사직서도 바람둥이 대학생도 모두 그 흰자 같은 거에서 나오는 셈이지. 우리의 이상이나 감정도――뭐 다른 건 추측해봐야 할 일이지만."
닛타는 전후좌우서 꿈틀이는 회색 옷을 바라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싸움을 거는 듯한 손짓을 했다.
서른
하츠코와 타츠코를 태운 우에노행 전철은 봄의 저녁을 절반쯤 덧입은 채 조용히 정류장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슌스케는 살짝 모자를 들어 창문 안 손잡이를 잡은 두 여자에게 인사했다. 두 여자는 나란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타츠코의 눈은 미소 안에도 우울한 빛을 두른 채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찰나, 그의 마음 속에는 그 허름한 교실 현관서 비가 그치는 걸 기다리던 그녀의 모습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그러고 있자니 전철은 이미 속도를 높여서 창문 너머 두 사람의 모습도 서서히 그의 시야서 멀어져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슌스케는 마음 속에서 어떤 흥분이 불타는 걸 느꼈다. 그는 이대로 혼고행 전철을 타 삭막한 하숙집 2층으로 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석양 속에서 혼고와 정반대되는 방향을 향해 적당히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북적이는 거리는 해가 지는 것이 가까워짐에 따라 한 층 더 많은 인파를 품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쇼윈도 안에서도 아스팔트 위에서도 혹은 가로수 끝자락에서도, 온갖 곳에 폼기운이 만연했다. 그건 마치 그의 지금 심정을 고스란히 방출한 듯한 바깥 풍경이었다. 때문에 거리를 걷는 그의 마음은 석양을 받으면서도 석양에 물들지 않는 머리 위 하늘 같은 미묘한 기쁨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하늘이 어두웠을 쯤, 그는 거리에 위치한 어떤 카페서 식후 사과를 먹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유리 꽃병 안에 조화 백합이 꽂혀 있었다. 그의 뒤에선 자동 피아노가 끝없이 카르멘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좌우에선 몇몇 손님들이 하얀 대리석 테이블을 둘러싼 채 아름답게 화장한 여종업원과 끝없이 떠들고 웃고 있었다. 그는 그런 주위에 몸을 둔 채 정신병원 응접실을 가득 메웠던 울적한 오후의 침묵을 떠올렸다. 계절감이 맞지 않는 장미, 창문에서 드리우는 햇살, 자그마한 피아노 울림, 고개 숙인 타츠코의 모습――화이트 와인에 데워진 마음에는 그런 기분 좋은 구석이 번갈아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곧 여종업원 하나가 홍차를 가지고 온 걸 깨달아 별 생각 없이 사과에서 눈을 떼자 마침 입구의 유리문이 열리며 검은 망토를 입은 오오이 아츠오가 등불이 많은 밤거리서 천천히 들어 오는 게 보였다.
"야."
슌스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오오이는 놀란 얼굴로 담배 연기가 막연한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슌스케의 얼굴을 발견하자
"묘한 곳에 다 와있네"하고 말하며 그의 테이블로 걸어 가 망토도 멋지 않은 채 앉았다.
"너야말로 묘한 곳을 다 다니네."
슌스케는 그렇게 놀리며 오오이에게 붙임성 좋게 인사하는 여종업원을 힐끔 보았다.
"나는 보헤미안이야. 너 같은 에피큐리언이 아니지. 세상 모든 카페, 바 내지는 변두리 선술집도 모두 내가 찾는 곳이야."
오오이는 어디서 한 잔 마시고 왔는지 등불 아래로 새빨간 얼굴을 드리우며 그런 별볼일 없는 기염을 토했다.
서른하나
"뭐 단골이라도 외상 있는 곳엔 안 가지만."
오오이는 불쑥 기분이 가라 앉아서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윽고 카운터를 향해 몸을 내밀어선
"여기 위스키 한 잔"하고 거만한 목소리로 명했다.
"그럼 갈 수 있는 곳이 없잖아."
"헛소리 마. 이래 봬도――적어도 이 가게엔 왔잖아."
그때 종업원 중에서도 가장 키가 작고 가장 어린애 같은 여자가 위스키 컵을 서양 쟁반 위에 얹고서 조심스레 둘에게 다가왔다. 이중턱과 눈이 하얗고 하얀 가루 아래에 호박색 피부가 비쳐 보이는 건강해 보이는 소녀였다. 슌스케는 그 여종업원이 오오이의 얼굴에 친근함 섞인 시선을 보내며 넘칠 거 같은 위스키 컵을 테이블 위로 올렸을 때, 이삼일 전에 이쿠분도서 터키 모자를 쓴 후지사와에게 들은 오오이의 정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오이도 거리낌 없이 여종업원을 향해 새빨개진 얼굴을 보내며
"너무 숨기지 마라. 내가 와서 기쁘잖아. 그럼 사양 않고 기쁜 얼굴 하는 게 좋아. 이 녀석은 내 친구야, 야스다라고 귀족 같은 녀석이지. 뭐 귀족이라 해도 작위 같은 게 있는 건 아냐. 단지 나보다 좀 더 부자인 건 확실하지――내 와이프 될 사람, 오후지 씨야. 이 가게 제일의 미인이지. 언제 또 오게 되면 이 사람한텐 팁 좀 잔뜩 주라."
슌스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이런 종류의 여자치곤 드물게 순수한 부끄러움을 뺨에 드리우며 마치 동생이라도 대하듯이 오오이를 살작 노려보고는 그대로 화려한 메이센의 소매를 나부끼며 재빨리 카운터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오오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장스럽게 큰 웃음 소리를 냈으나 곧 테이블 위 위스키를 쭉 들이키며
"어때, 미인이지?"하고 농담처럼 슌스케의 찬동을 구했다.
"그러게, 순수해 보이는 여자야."
"아냐아냐, 내 말은 오후지의――오후지 씨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말하는 거야. 순수하네 어쩌네는 정신적 아름다움이잖아. 그런 건 오오이 아츠오에겐 있든없든 아무래도 좋은 거라고."
슌스케는 상대하지 않고 이집트 담배 연기만 코로 내뿜었다. 그러자 오오이는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슌스케의 등껍질 담배갑에서 담배 하나를 빼내며
"너 같은 도시 사람은 저런 종류의 아름다움을 모르니 안 되는 거야"하고 묘한 곳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야 너만큼 날카롭지는 않지만."
"농담 마라. 너만큼 날카롭지 않네 하고 말하고 싶은 건 내 쪽이야. 후지사와 녀석은 나를 무슨 동 주앙으로 취급하는 듯한데 요즘엔 너한테 많이 주가를 뺏겨서 말야. 저번에 본 두 미인은 어쩌고 왔어?"
슌스케는 어떻게든 이 화제를 피하고 싶었다. 때문에 그는 오오이의 말이 마치 들리지 않은 것처럼 오후지란 여종업원 쪽으로 대화를 끌고 갔다.
서른둘
"오후지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셔?"
"올해로 열여덟. 범띠야."
오오이는 또 새로 주문한 위스키를 홀짝이며 의자 위에서 양반 다리를 하고선
"나이를 생각하면 그리 순수한 거 같지도 않지만――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순수하든 아니든 어차피 여자니까 지루한 사람인 게 뻔하지."
"여자 경멸이 심하네."
"그럼 넌 존경하냐?"
슌스케는 이번에도 미소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오오이는 세 잔째 위스키를 앞에 두고 담배 연기를 상대에게 뿜으며
"여자 따위 지루해. 위로는 자동차 타는 것부터 아래론 벌레 주워 먹는 것까지 전부. 찔러 봐야 고작해야 열 종류 밖에 안 되니 말야. 거짓말 같으면 2년이든 3년이든 제대로 놀아봐. 곧장 여자 종류에 지겨워져 관심을 잃고 말 테니까."
"그럼 너도 재미 없겠네."
"재미 없겠냐고? 웃기는 소릴――아니, 비꼬는 거면 그대로 받아둘게. 재미 없다는 나도 이렇게 여자 뒤꽁무니만 쫓으니 말야. 그야 너한텐 멍청해 보이겠지. 근데 말야, 재미 없다는 건 사실이야. 또 동시에 재밌다는 것도 사실이지."
오오이는 네 잔째 위스키를 주문할 적부터 평소의 오만한 태도를 잃었다. 또 취기를 머금은 눈동자 안에도 눈물과 같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슌스케는 물론 그런 변화를 호기심 머금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오이는 슌스케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양 다섯 잔, 여섯 잔 위스키를 들이 부으며 더더욱 열성적으로
"재밌다는 건 말야, 여자라도 쫓고 있으면 지루할 일이 없다는 거야. 근데 막상 따라 잡지? 그러면 또 이게 재미 없기 짝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하고 싶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좋으냐――그걸 알면 나도 이렇게 갑갑해하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내내 자신에게 그렇게 묻고 있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슌스케는 살짝 텀을 두고서 농담처럼 상대를 달랬다.
"남이 너한테 반하게 하면 되지. 그럼 조금은 재밌을 거 아냐."
하지만 오오이는 되려 진지한 표정을 눈동자와 눈썹에 깃들게 하고선 대리석 테이블을 주먹으로 쿵 치더니
"근데 말야, 반하게 할 때까진 좀 지루해도 참을 수 있어. 근데 반하면? 반하면 끝이야. 정복하는 재미가 없어지지. 호기심도 더 이상 동하지 않아. 그 후에 남는 건 단지 무서운 지루함 뿐이야. 심지어 여자란 건 관계가 어느 정도 발전하면 반드시 남자에게 반하니 더욱 질이 안 좋지."
슌스케는 저도 모르게 오오이의 열성에 끌리고 말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야?"
"말했잖냐.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고."
오오이는 그렇게 말하며 눈가에 살기를 머금은 채 일곱 잔째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서른셋
슌스케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오오이의 손가락 사이에 놓인 담배가 벌벌 떨리는 걸 바라보았다. 그러자 오오이는 그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버리고는 대뜸 테이블 너머로 슌스케의 손을 잡고선
"야"하고 긴박한 목소리를 냈다.
슌스케는 대답 대신 놀란 눈초리를 들고서 오오이의 얼굴을 보았다.
"야 너 아직 기억하지. 내가 그 일곱 시 급행열차 창문에서 배웅 나온 여자에게 손수건을 흔든걸."
"그야 기억하지."
"그럼 들어봐. 나는 얼마 전까지 그 여자랑 동거했어."
슌스케는 호기심이 동하는 동시에 알콜성 감상주의는 이제 그만 사양하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그분 아니라 주위 테이블 사람들이 아까부터 자신들을 향해 성가시다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불쾌했다. 때문에 그는 오오이의 말에 애매한 대답을 하면서 카운터 옆에 선 오후지에게 "이리 좀 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오후지가 카운터에서 벗어나기 전 당초 그의 식사를 옮겨 온 여자가 서둘러 테이블 앞으로 찾아왔다.
"계산해줘. 이 녀석 몫까지."
그러자 오오이는 슌스케의 손을 놓고서 역시나 눈물을 머금은 채로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으나
"야야, 누가 계산해달래? 내 말 좀 들어달라 했잖아. 듣기만 하면 돼. 들어주지 않을 거면――그래, 들어줄 거 아니면 가면 되잖아."
슌스케는 계산을 마치고는 새로 불을 붙인 담배를 문 채 위로하는 듯한 웃음을 오오이에게 보이며
"들어, 들을 거야. 단지 우리처럼 주구장창 앉아 있으면 가게에 민폐잖아. 그러니까 일단 밖으로 나가서 듣자."
오오이는 겨우 납득했다. 하지만 테이블에서 벗어나려 하자 잘 돌아가는 입과 달리 발밑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야, 조심 좀 해."
"조심은 무슨. 고작해야 위스키 따위 열 잔이든 열다섯 잔이든――"
슌스케는 오오이의 손을 잡는 듯 잡지 않으며 입구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오후지가 커다란 유리문을 열면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이 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그녀는 천장에 걸린 중극 등불의 빛을 받으며 아까보다 더 어린애처럼만 보였다. 또 슌스케에는 그만큼 더 아름답게 보였다. 하지만 오오이는 오후지가 보이지도 않는지 듬직한 슌스케의 손에 등을 맡긴 채로 말 한 마디 없이 그 앞을 지나갔다.
"감사합니다."
오오이의 뒤에서 밖으로 나온 슌스케는 그런 오후지의 말 속에 오오이를 향한 그의 온정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오후지를 돌아보며 그 감사에 대답하기 위한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오후지는 두 사람이 거리로 나간 후에도 잠시 밝은 유리문 앞에 서서는 하얀 앞치마의 가슴가서 두 손을 마주한 채 서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서른넷
오오이는 각모 챙 아래에 버즘나무 가로수를 비추는 가로등불이 들어오자마자 슌스케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더니
"그럼 들어줘. 민폐란 거 아는데 들어줘"하고 집요하게 말을 이었다.
슌스케도 약속한 게 있는 만큼 말릴 수도 없었다.
"그 여자는 간호사야. 내가 작년 봄 편도선으로 고생할 적에――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나. 아무튼 나랑 그 여자는 작년 봄부터 알고 지냈어. 근데 왜 헤어졌을 거 같아? 단순히 그 여자가 나한테 반했기 때문이야. 정확히는 우연한 기회에 반한 사실을 내게 들켰기 때문이지."
슌스케는 끝없이 오오이의 걸음을 신경 쓰면서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늘었다 줄어드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아스팔트 위에서 밟아 갔다. 그리고 자칫하면 산만해지려는 주의를 상대의 대화에 집중하는 데 바빠졌다.
"그렇다고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냐. 단지 그 녀석이 내게 온 편지에 질투를 느꼈을 뿐이지.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여자의 속내가 빤히 보인 것만 같아 단숨에 미워져 버렸어. 그런데 그 녀석은 질투했다는 것만이 문제라 생각하니――아니, 이것도 여담이었네. 내가 너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건 나한테 온 편지야."
오오이는 그렇게 말하며 술냄새 섞인 숨을 토하며 슌스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 편지엔 확실히 여자 이름이 적혀 있었지. 하지만 실제론 나였어. 놀랐지? 나 스스로도 놀랐으니 네가 놀라도 이상할 게 없지. 그럼 나는 왜 그런 편지를 섰을까? 그 여자가 질투할지 어떨지 알고 싶었던 거야."
그때는 아무리 슌스케라도 무언가 정체 모를 걸 마주한 듯한 심정이 들었다.
"이상한 녀석이네."
"이상하지? 그 녀석이 나한테 반한 걸 알면 그 녀석이 싫어질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는데 말야. 그리고 그 녀석이 싫어지면 세상 만사가 지루해질 거란 것도 알고 있었어. 심지어 나는 그때 그 여자가 질투하리란 걸 구할구푼까지 알고 있었지. 그러면서 편지를 쓴 거야. 써야만 했어."
"이상한 녀석."
슌스케는 어지러운 거리 속에서 발을 휘청이는 오오이를 감싸면서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그니까 내가 이래――여자를 싫어하지 않기 위해 여자한테 반한다. 지루해지지 않기 위해 지루한 일을 한다. 그런 주제에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조금도 여자를 싫어할 수 없어. 조금도 지루하고 싶어하지 않고. 그러니끼 비참하다 생각하지 않아? 비참하지? 이만큼 도리 없는 일도 없을 거야."
오오이는 더더욱 취기가 올랐는지 목소리마저 울먹이기 시작했다.
서른다섯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혼고행 전철을 타기 위해 어느 북적이는 사거리에 이르렀다. 그곳에선 무수한 등불이 어두운 하늘을 밝히며 전철, 자동차, 인력거 흐름이 끝없이 사방에서 밀어 닥치고 있었다. 슌스케가 취한 오오이를 데리고 이 사거리를 가로 지르기 위해서는 그런 난잡함과 느릿한 오오이의 발밑을 동시에 신경 써야만 했다.
그렇게 겨우 반대쪽에 이르렀을 때, 오오이는 슌스케의 걱정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거리에 위치한 비어홀 간판을 발견하여
"야, 여기서 한 잔 더 하자"하고 짙은 적갈색을 한 막을 무작정 가르려 했다.
"아서라. 이만큼 취했으면 됐지."
"그러지 말고 좀 어울려주라. 이번엔 내가 살게."
슌스케는 이 이상 오오이의 술상대가 되어 그의 특징적인 연애담을 들어서는 화이트 와인의 취기가 깰 것만 같았다. 때문에 이제까지 누르던 망토에서 손을 떼며
"그럼 너 혼자 마셔라. 나는 아무리 비싼 걸 사준다 해도 사양이야."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데――"
오오이는 적갈색 막에 손을 얹은 채로 비틀거리는 발에 힘을 주고서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이윽고 슌스케의 코끝에 취한 얼굴을 들어서는
"너, 내가 그날 밤 왜 코즈에 갔는지 모르지. 그건 말야. 싫어진 여자랑 헤어지기 위한 방편이었어."
슌스케는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오오이와 눈을 마주했다.
"왜?"
"왜냐니――먼저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만든 거야. 그리고 여자와 울며 헤어지는 자리를 만들고 기차 창문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게 대단원이었단 셈이지. 배우가 배우니까 그 녀석은 지금도 고향으로 돌아간 줄만 알 거야. 가끔 나한테 오는 그 녀석의 편지가 이쪽 하숙으로 다시 보내지거든."
오오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비웃듯이 웃고선 커다란 손바닥을 슌스케 어깨에 얹으며
"나라고 그런 가죽이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거라곤 생각 안 해. 하지만 벗겨질 때까진 그 가죽을 소중히 뒤집어 쓰고 있을 생각이야. 이 심정은 너한텐 통하지 않을 거야. 통하지 않으면――뭐 그뿐이지만 요컨대 나는 싫어진 여자와 헤어지더라도 되도록 상대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 되도록――설령 거짓말을 하더라도 말야. 그렇다고 또 착한 아이가 되고 싶단 것도 아냐. 상대를 위해, 여자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가 있는 거 같지. 너는 모순됐다 생각할 거야. 보통 모순된 게 아니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인간이야. 부디 그것만은 알아줘――그럼 실례하지. 내가 친애하는 야스다 슌스케 씨."
오오이는 묘한 손놀림으로 슌스케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그 손으로 적갈색 막을 들어 올려 비틀비틀 비어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한 녀석."
슌스케는 경멸인지 동정인지 구분 가지 않는 일종의 감정을 느끼면서 다시 한 번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클럽 아라이코의 광고 전등이 눈부시가 점멸하는 아래로 붉은 정류장 기둥까지 걸음을 옮겼다.
서른여섯
하숙집으로 돌아 온 슌스케는 교복을 갈아 입고는 푸른 뚜껑이 달린 탁상 전등불 밑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도착한 우편물을 살폈다. 하나는 노무라의 편지였고 또 하나는 봉인에 고평가란 도장이 찍혀 있는 '시로'의 이번 달 호였다.
슌스케는 노무라의 편지를 펼쳤을 때, 그 종이를 메운 건 아마 아버지의 삼주기에 관련된 가족간의 사정일 거란 희미한 예측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그런 소식은 한 구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대신 고향땅의 자연이니 생활 같은 서술이 안갖 곳에 아름답고 시적인 글자로 적혀 있었다. 이소야마의 어린잎 위로 여름에 걸맞는 구름이 오가고 있다. 그 구름 아래에 걸린 산호를 따기 위한 그물망이 햇살을 받아 눈부신 빛을 내뿜는다. 자신도 언젠가 삼촌이 가진 배에 타 심해 밑바닥에 있는 산호 가지를 따오고 싶다――모두가 철학자보다는 시인에 걸맞는 열정의 표현이라 해도 좋을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슌스케는 이 현란한 문구 속에서 노무라의 심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건 하츠코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드리운 마음이었다. 그곳에는 상냥한 기쁨이 있었다. 혹은 희미한 숨소리가 있었다. 혹은 자칫하면 흐를 법한 눈물이 있었다. 때문에 그 심정을 통과하는 한, 노무라의 눈에 비치는 자연이나 생활은 하나 같이 자신의 사랑의 원광 속에 무지개와 같은 광채를 주리라. 어린잎, 바다, 산호 모두가 공통되어 의미하는 건 지상의 실존을 초월한 일종의 계시라 해도 좋았다. 따라서 그의 긴 편지도 그 소박한 사랑의 행복을 공감할 수 있는 자만이 처음으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묵시록과 같았다.
슌스케는 작은 웃음과 함께 노무라의 편지를 둥글게 말두고 이번에는 '시로'의 봉인을 풀었다. 표지에는 비어즐리의 탄호이저 그림이 인쇄되어 있고 그 위에 l'art pour l'art하고 얇은 붉은 문자로 새져 있었다. 목차를 보자 후지사와의 '갈색 장미'란 서정시적 희곡을 필두로 콘도의 롭스론, 하나부사의 아나케르온 번역 등의 여러 제목이 걸려 있었다. 슌스케는 냉정한 눈초리로 한동안 그 제목들을 둘러보았으나 이윽고 '권태'――오오이 아츠오란 이름과 마주하자 불쑥 오오이의 모습히 선명히 떠올라 곧장 그 소설이 실린 마지막 페이지를 향했다. 그건 비록 삼인칭으로 적혀 있을지언정 오늘 밤 들은 오오이의 고백을 그대로 활자로 옮긴 듯한 소설이었다.
별 어려움 없이 10분만에 '권태'를 읽어낸 슌스케는 다시 노무라의 편지를 펼치고서 그 달필 위로 새삼스레 수상쩍단 눈매를 보냈다. 그 편지 안에 담긴 노무라의 사랑과 이 소설 안에 내다 꽂힌 오오이의 사랑――하나뿐인 하츠코에게서 천국을 보는 노무라와 수많은 여자에게서 지옥을 보고 있는 오오이――둘 사이에 자리한 커다란 간격은 대체 어디서 생긴 걸까. 아니, 그보다 두 사람의 사랑 중 어떤 게 진짜 사랑일까. 노무라의 사랑은 환상일까. 오오이의 사랑은 이기심일까. 아니면 양쪽 모두 제각기 의미로 거짓 없는 사랑인 걸까. 그리고 타츠코를 향한 내 사랑은?
슌스케는 푸른 뚜껑이 달린 탁자 전등불 아래서 노무라의 편지와 오오이의 소설을 나란히 펼쳐 두고서, 서양 책상 앞에서 팔짱을 낀 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상으로 '길 위' 전편을 끝낸다. 후편은 훗날을 기약하겠다.)
(다이쇼 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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