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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요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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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제 말을 믿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뇨, 분명 거짓말이라 생각하실 테죠. 과거라면 또 모를까 제가 하는 이야기는 다이쇼 초대에 있었던 일이니까요. 심지어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이 도쿄서 있었던 일입니다. 밖으로 나가면 전철이나 자동차가 달립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끝없이 전화벨이 울리죠. 신문을 읽으면 동맹파업이나 여성 운동 보도가 이어지고 있어요――그런 오늘날에 이 대도심의 일각에서 포나 호프먼 소설에서나 볼 법한 꺼림칙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건 제가 아무리 사실이라 말해본들 쉽게 믿기지 않기 마련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도쿄 거리에 아무리 많은 등불이 있다 해도 일몰과 동시에 찾아오는 밤을 모조리 떨쳐내 낮으로 되돌리는 것도 아닐 테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무선 통신이나 비행기가 아무리 자연을 정복해도 그 자연 속에 숨은 신비한 세계의 지도까지 빼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문명의 빛을 받는 도쿄라도 평소에는 꿈속에서만 뛰다닐 정령들의 비밀스러운 힘이 때와 경우에 따라선 아우어바흐의 구멍과 같은 신비함을 드러내는 일도 없다고는 못할 테지요. 아니, 때와 경우 따위를 논할 때일까요. 제 관점에서 보자면 놀라운 초자연적 현상도 당신이 어떻게 주의하냐에 따라 마치 밤에 피는 꽃처럼 항상 우리 주위서 출몰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겨울밤에 긴자 거리를 걷다 보면 꼭 한 번은 대략 스무 개쯤 되는 종이 쪼가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한데 모여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그게 전부라면 대단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시험 삼아 그 종이 쪼가리가 소용돌이치는 곳을 세어보시지요. 반드시 신바시부터 쿄바시 사이서 왼쪽에 세 곳, 오른쪽에 한 곳이 있을 터이고 그게 하나도 남김없이 사거리에 가까운 곳일 테죠. 이것도 어쩌면 기류 문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좀 더 주의 깊게 보면 어떤 종이 쪼가리 소용돌이에나 붉은 종이 쪼가리가 하나 섞여 있을 겁니다――활동사진의 광고, 치요가미 조각 내지는 성냥 상표 등 물건이야 여럿 있어도 붉은색이 보이는 건 매한가지일 겁니다. 그게 마치 다른 종이 쪼가리를 이끌기라도 하듯이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살랑 떠오르지요. 그렇게 자그마한 모래먼지 속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주위에 하얗게 퍼진 종이 쪼가리가 곧 아스팔트 위 하늘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실은 사라진 게 아닙니다. 한 번 원을 그리고 흐르듯이 날아가는 거죠. 바람이 떨어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본 바에 따르면 항상 붉은 종이가 먼저 멈췄지요. 이쯤 되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수상쩍게 여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저는 물론 수상했습니다. 실제로 두세 번은 거리에 멈춰 서 가까운 쇼윈도에서 대량의 빛이 들어오는 가운데 끝없이 날아다니는 종이 쪼가리를 가만히 들여다본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때 그렇게 봤을 때는 평소에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도 어둠 속을 나는 박쥐 정도로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도쿄의 신비함이란 긴자 거리에 떨어진 종이 쪼가리만이 아닙니다. 이따금 밤에 늦게 타는 시내 전철서도 평소엔 생각지도 못할 묘한 일을 만나곤 하죠. 그중에서도 재미난 건 인기척 드문 곳으로 가는 빨간 전철이나 파란 전철이 탈 사람도 없는 정류장에 착실히 정차하는 점일 테죠. 이것도 앞서 말한 종이 쪼가리처럼 의심스럽지 싶으면 오늘 밤에라도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같은 시내 전철이라도 도자카센하고 스가모센 둘이 가장 많은데 불과 사오 일 전 밤에도 제가 탄 빨간 전철이 역시나 타는 사람도 없는 정류장에 딱 멈추더군요. 도자카센의 단고자카였습니다. 심지어 차장이 벨의 줄에 손을 뻗으며 거리 쪽으로 반쯤 몸을 빼더니 빠짐없이 "타십니까"하고 묻지 뭡니까. 저는 차장칸 근처에 있었으니 곧장 창밖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밖은 옅은 구름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이 몽롱히 떠올라 있을 뿐으로 정류장 기둥 아래는 물론이요 양쪽의 민가가 모조리 문을 듣은 한밤중의 넓은 거리서도 사람인 듯한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묘하지 싶었던 순간 차장이 줄을 끌어 전철이 그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창밖을 보자 정류장이 멀어짐에 따라 어쩐지 제 눈에도 그 달빛 속에서 점점 작아지는 그림자가 있는 듯했습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제 신경이 잘못된 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서둘러야 하는 빨간 전철 차장이 왜 탈 사람도 없는 정류장에 전철을 멈췄을까요. 심지어 이런 경우는 저만 아니라 제 지인 사이서도 서너 명은 있다고 합니다. 그러하니 설마 전철 차장이 그때마다 잠결에 헛것을 봤다고는 못할 테지요. 실제로 제 지인 중 한 명은 차장을 붙잡고 "아무도 없잖나"하고 물으니 차장도 이상하단 얼굴로 "많이 있던데요"하고 대답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세어보자면 포병 공장의 연기 굴뚝이 바람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치는 사람도 없는 니콜라이 절의 종이 한밤중에 대뜸 울리고 같은 번호의 전철 두 대가 앞뒤로 저녁의 니혼바시를 지나고 사람 하나 없는 코쿠기칸에서 매일 밤같이 수많은 갈채 소리가 들리는 등――소위 '자연의 밤적 측면'은 마치 아름다운 나방이 뒤엉켜 나는 것처럼 이 번화된 도쿄 거리서도 끝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요. 따라서 이제 제가 드릴 이야기도 사실은 당신이 생각할 정도로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철두철미하게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곤 할 수 없습니다. 아뇨, 도쿄의 밤이 간직한 비밀을 대충 훑은 지금이라면 당신도 제 이야기를 허투루 바보 취급할 수는 없을 겁니다. 만약 끝까지 다 듣고도 역시나 츠루야 난보쿠 이후의 꾸민 이야기 느낌이 난다면 그건 사건 그 자체가 거짓인 탓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제 표현이 포나 호프만에 이를 정도로 손질이 되지 않은 죄이지 싶습니다. 왜냐면 1, 2년 전 이 사건의 당사자가 어느 여름밤 저와 마주한 채 이런 신비한 일이 있었다고 자세히 이야기해줬을 때엔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일종의 요기妖気라 음험하게 제 주위를 두른 것만 같았으니까요.

 이 당사자란 남자는 제가 평소 자주 찾는 니혼바시 주변에 자리한 서점의 젊은 주인입니다. 평소엔 볼일만 끝나면 빨리 돌아가는데 마침 그 밤은 해가 진 후로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말이죠. 처음에는 비가 그치는 것만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어느샌가 눌러 앉아 버린 겁니다. 색이 하얗고 미간이 좁으며 지나치게 마른 젊은 주인은 분제등 불이 들어온 툇마루의 옅은 빛 속에서 오후 여덟 시가 될 때까지 잡다한 세상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세간 이야기 속에서 "실은 선생께서 꼭 한 번 들어주셨으면 했는데"하고 거의 걱정하는 듯한 얼굴색으로 천천히 운을 뗐지요.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본론인 요파妖婆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젊은 주인이 질 좋은 마포 어깨춤에서 묵을 한 방을 흘린 듯한 여름 하오리를 입고 수박 접시를 앞에 내놓은 채 마치 누가 듣는 걸 걱정이라도 하듯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모습이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지요. 그러고 보면 또 하나 그 머리 위에서 밝고 희미하게 가을풀을 드리운 분제등빛 너머로 비가 그친 하늘이 어두운 먹구름을 한껏 펼쳐 놓은 것도 역시나 묘하게 몸에 스며들어 잊을 수가 없더군요.
 또 그 이야기란 건 그 신조란 젊은 주인이(다른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이렇게 부르도록 하지요) 스물셋 먹었을 적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에 조금 고민거리가 있어 혼죠 인근서 살고 있는 신내림 받은 노파를 찾아간 게 일의 발단이라고 합니다. 유월 상순의 어느 날, 신조는 근방서 옷가게를 하는 상업 학교 시절의 친구를 데리고 요베즈시에 갔다던가요. 거기서 한 잔 마시는 동안 누가 묻지도 않은 걱정을 토로하고 있으니 친구 타이 씨께서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 "그럼 오토리 할멈을 찾아가 봐"하고 열심히 권하지 뭡니까. 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2, 3년 전에 아사쿠사 근방서 지금의 위치로 이사 온 신내림을 받은 노파라는데, 점은 물론이요 가지加持도 한다지요――그 사람은 꼭 여우 요괴라도 쓰는 것처럼 영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너도 알 거야. 왜 얼마 전에 할머니 하나가 몸을 던졌잖아――그 시체가 도무지 떠오를 줄을 몰랐는데 오토리 할멈이 부적을 가져와 이치노하시서 강으로 던지니 하루도 안 돼서 떠올랐다지. 심지어 부적을 던진 기둥 바로 아래서 말야. 마침 저녁의 밀물 때였는데 우연찮게 강을 지나던 돌배의 사공이 발견했거든. 손님이 빠진 거네, 익사체네 뭐네 소란을 떨다 바로 다리 근처의 파출소로 전달해준 거겠지. 내가 지날 즘엔 이미 순사가 와있었는데, 인파 뒤에서 들여다보니 떠오른 돗자리 아래로 삐져나온 노인의 시체발에 뭐가 붙어 있잖아. 그게 뭐가 있었을 거 같아? 그 부적이 비스듬하게 꽂혀 있는 거야. 정말 오싹하더라고"――그런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신조 역시 등골이 오싹해져 저녁 빛을 머금은 강물이니, 다리 기둥의 형태니, 또 그 아래에 떠오른 노인의 모습이니――그런 게 눈앞에 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술기운이 있으니까요. "그거 재밌네. 한 번 봐야겠다"하고 지지 않고 밀고 들어갔죠. "그럼 내가 안내할게. 요전 번에 금전운을 본 후로 그 할머니하고 꽤나 친해졌거든", "그럼 부탁할게"――그런 식으로 이쑤시개를 문 채 요베즈시를 나와 밀짚모자로 장마철의 서쪽 햇살을 막으며 여름 외투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그 노파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럼 신조의 걱정은 무엇이었는가. 집에서 고용한 여종 중에 오토시란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신조하고 일 년을 걸쳐 서로 마음이 맞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작년 말 숙모의 병문안을 간다더니 자취를 감추어버린 겁니다. 놀란 건 비단 신조만이 아니라 오토시가 마음에 들었던 신조의 어머니도 매한가지였지요. 걱정이 되어 보증인을 시작으로 사람 사람을 거쳐 찾았는데 도무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간호사가 된 걸 봤네, 어디서 첩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네 말은 많지만 막상 파고들면 도무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온 신경을 쓰고 또 화도 났던 신조는 기어코 멍하니 생각에만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기운 없는 모습이 희박하게나마 둘의 관계를 느꼈던 어머니께 새로운 걱정이 된 걸 테지요. 연극을 보게 하고, 온천에 보내고, 때로는 장사꾼 모임에 아버지 대신 보내고――억지로나마 신조의 기분을 띄어주려 노력했습니다. 그날도 기분 풀이 삼아 놀다 오라고 말만 하지 않았지 외각 가게들을 둘러 보고 오란 구실로 용돈까지 쥐여주었습니다. 신조도 마침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타이 씨가 히가시료고쿠에 있겠다, 오랜만에 요베이즈시에 한 잔 마시러 간 셈이지요.
 그런 사정이 있으니까요. 아무리 살짝 취한 신조라 해도 오토리 할멈을 찾는 심정 한구석에는 진지함이 묻어 있었을 겁니다. 히토츠메바서 왼쪽으로 꺾어 인기척 적은 타테가와 강변을 후테츠메 쪽으로 걸으니 미장집과 초물전 사이에 대나무 격자 창문이 달린 그을음투성이에 격자문 건물이 한 척 자리해 있었습니다――그게 그 신내림을 받은 노파의 집이라 들으니 마치 오토시와 자신의 운명이 이 수상한 노파의 한 마디에 갈릴 법한 꺼림칙함이 앞서 췻기마저 싹 가셨다고 합니다. 또 노파가 사는 집이 척 보기만 해도 기가 꺾일 듯이 지붕이 낮은 건물인 데다가 최근의 날씨 탓에 색이 드러나기 시작한 돌 위의 푸른 이끼서도 균 정도는 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묘하게 끈적하게 들러 붙는 듯한 분위기가 묻어나 있었습니다. 그런 데다가 옆집 초물전의 경계에 자리한 버드나무가 창문도 가릴 정도로 뻗어 있으니 지붕에마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지 뭡니까. 장자 하나 너머에는 심상치 않은 비밀이 숨어 있을 듯한 음험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타이 씨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 대나무 격자 창문 앞에 서고는 신조를 돌아보며 "그럼 도깨비 할멈을 보러 가볼까. 단지 놀라지나 말라고."하고 새삼스럽게 겁을 주었습니다. 신조는 물론 비웃으면서 "어린애도 아니고 누가 할머니한테 겁을 먹어"하고 가볍게 받아쳤습니다. 하지만 타이 씨는 그 대답에 되려 사람 안 좋아 보이는 눈초리를 보이며 "그야 할머니를 보고 놀랄 일은 없겠지. 하지만 여기엔 너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할 미인이 있으니 말야. 그래서 충고해둔 거야"하고 말하고는 격자에 손을 얹고서 "실례합니다"하고 기세 좋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곧 "네"하는 말이 의미심장한 투로 돌아오더니 장자가 열립니다. 그렇게 현관에 얌전히 무릎을 꿇은 열일곱이나 여덟 쯤 되는 소녀 하나가 보였지요. 옳거니, 이래서야 타이 씨가 '놀라지 말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색이 하얗고 코가 곧게 뻗었으며 턱선이 아름다운 가녀린 얼굴이었죠. 특히 눈은 생기로 가득 찼습니다――하지만 어딘가 그 얼굴에선 안타까운 야윔이 엿보이고 패랭이꽃이 그려진 오비마저 화려한 콘가스리 옷의 가슴을 조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타이 씨는 소녀의 얼굴을 보곤 밀짚모자를 벗으며 "어머니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면목 없단 표정을 지으며 "아쉽게도 부재중이십니다"하고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문득 힘이 없는 눈초리를 격자문 밖에 주더니 불쑥 얼굴색을 바꾸어 "어머"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서지 뭡니까. 타이 씨는 장소가 장소인 만큼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황급히 뒤를 돌아봅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저녁노을 안에 서있던 신조의 모습이 안 보이지 뭡니까. 그리고 다시 놀랄 새도 없이 타이 씨의 소매를 붙든 건 그 노파의 딸로, 숨을 헐떡이면서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로 "손님, 지금 같이 온 일행분께 전해주세요. 두 번 다시 이 근처로 오시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그분의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하고 띄엄띄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이 씨는 대체 뭐가 뭔지 꼭 여우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으로 멍하니 서있었습니다만, 어찌 됐든 전언을 부탁받은 듯하니 "그래, 전해둘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지간히 당황한 걸 테지요. 밀짚모자도 고쳐 쓰지 않은 채로 대뜸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신조의 뒤를 쫓아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쫓아 달려간 곳이 마침 쓸쓸한 이시가시 앞이었습니다. 위쪽만 서쪽 햇살로 물들어 전신주 이외엔 볼 것도 없는――그런 곳에서 신조는 멍하니 여름 외투 소매를 맞잡은 채 발밑을 바라보며 서있었습니다. 하지만 따라 잡은 타이 씨가 아직도 가슴이 뛴다는 식으로 "어처구니가 없네. 놀라지 말라고 한 내가 너 때문에 더 놀랐다. 너 대체 그 미인을――" 그렇게 말하자 신조는 다시 한 번 히토츠메 다리 쪽으로 진정되지 않는 걸음을 옮기며 "알고 말고. 저 사람이 바로 오토시니까"하고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타이는 또 깜짝 놀랐죠――놀랄만도 합니다. 실종자를 찾기 위해 찾아가니 그 당사자가 오토리 할멈의 딸이라니까요. 단지 타이 씨도 그 딸에게 심상치 않은 전언을 받은 참입니다. 마냥 놀라고 있을 수도 없었지요. 그러니 밀짚모자를 다시 쓰자마자 두 번 다시 이 근처로 다가오지 말라는 오토시의 말을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들려주었습니다. 신조는 그 말을 조용히 들었습니다만 이윽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수상쩍단 눈초리로 "오지 말라는 건 이해하지만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 이상한데. 이상하다기보단 난폭하다 해야겠지"하고 화난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타이 씨도 단지 전언만 들었을 뿐 자세한 영문은 듣지 않고 뛰쳐나온 참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상대를 위로하고 싶어도 적당한 말을 늘어놓는 것 이외엔 방도가 없었지요. 그러자 신조는 더더욱 다른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는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다시 요베즈시 앞에 이르자 불쑥 타이 씨를 돌아보더니 "오토시를 만나주는 건데"하고 아쉽다는 양 말했습니다. 그러자 타이 씨는 별생각 없이 "그럼 다시 한 번 만나면 되지"하고 놀리듯이 말했죠――나중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신조의 마음서 불타고 있는 불꽃 같은 그리움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습니다. 곧 타이 씨와 헤어진 신조가 향한 곳은 에코인 앞의 보즈샤모로 주위가 어두워지는 걸 기다리며 병을 두세 개나 비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짐이 깊어짐과 동시에 그곳을 뛰쳐나와 술 냄새 섞인 숨을 내쉬며 여름 외투의 소매를 뒤로 뒤집어 찾아간 곳은 오토시가 있는 곳――그 신내림 받은 노파의 집이었습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엔 땅에서 솟는 갑갑한 열기가 감도는 주제에 이따금 차가운 바람이 부는, 장마철 특유의 날씨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신조는 물론 화가 나서 오토시의 속내를 듣기 전에는 잠자코 돌아갈 생각이 없었지요. 그러니 묵을 흘린 듯한 하늘에 버드나무가 우뚝 솟고 그 아래에 대나무 격자 창문 너머로 불빛을 드리우고 있는 꺼림칙한 집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대뜸 격자문을 벌컥 열고는 좁은 현관에 서서 "누구 없나요"하고 성을 냈다고 합니다. 그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겠죠. 상냥함을 머금은 채 대답했던 그 목소리도 지금은 살짝 떨리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조용히 장자가 열리더니 초췌한 오토시가 문지방 너머로 손을 짚고 자세를 낮춘 채, 방에서 내려오는 전등 불을 받으며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이 가련한 기미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신조는 취해 있었지요. 밀짚모자를 비스듬하게 쓴 채로 험악하게 오토시를 내려다보며 "네, 어머님께선 계시나요? 봐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 찾아왔는데――봐주시나요? 여쭤봐 주시면 좋겠군요"하고 시치미를 뚝 뗀 채 말했습니다――그게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오토시는 역시나 자세를 낮춘 채로 힘없이 어깨를 떨구고선 "네"하고 말하곤 한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신조가 다시 한 번 "어서요"하고 말하려 하자 후스마를 둔 방 너머서 마치 두꺼비가 우는 것처럼 "누구십니까. 사양 않고 들어오시지요"하고 힘없고 콧소리가 빠진 오토리 할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오토시를 감춘 장본인이지 않습니까. 먼저 이 녀석을 혼쭐 내주자――그렇게 마음먹은 참이니 신조는 척척 걸음을 옮기며 여름 외투를 벗고는 저도 모르게 멈추려 한 오토시의 손에 밀짚모자를 남긴 채로 방에 들어갔습니다. 홀로 남은 오토시만 불쌍하게 되었지요. 후스마 옆에 조용히 몸을 낮춘 채로 여름 외투나 밀짚모자를 정리하려는 기미도 없이 눈물을 머금은 허망한 눈초리로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가련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하염없이 무언가를 기도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방에 들어온 신조는 거침없이 방석 위에 앉아 주저 없이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방은 상상한 것처럼 천장이나 기둥이나 검게 그을러진 볼품없는 팔 첩 방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면에 얕은 육 척 마루가 있어 바사라 신을 그린 족자 앞에 거울 하나, 술병 하나, 또 적청황 종이를 묶은 작은 헤이소쿠 서너 개가 공손히 자리해 있었지요――그 왼쪽의 툇마루 밖에선 곧장 타테가와가 흐르고 있어 세워진 장자 너머로 자그마한 물소리를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정작 중요한 상대를 보니 마루 앞을 오른쪽으로 빗겨난 곳에 과자, 사이다, 설탕, 계란 등의 시주품을 쭉 줄지어 놓은 서랍장 아래서 몸집이 크고, 단발에, 입이 크고, 새파랗게 질려 퉁퉁 불어 오른 노파가 검은 홑옷을 입은 채로 속눈썹이 드문 눈을 감고서 고창이 온 듯한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이매망량처럼 한 첩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에 이 노파의 목소리가 두꺼비가 우는 듯했다고 말했었죠. 하지만 이렇게 앉아 있는 걸 보니  두꺼비도 보통 두꺼비가 아니라 심상치 않은 두꺼비 요괴가 사람 모습을 하고서 독기를 내뿜는 것만 같은 기색이었다 합니다. 그런 모습엔 신조마저도 머리 위 전등마저 빛이 희박해지나 싶을 정도의 꺼림칙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물론 충분히 각오해둔 신조는 "하나 봐주셨으면 합니다. 혼담인데요."하고 딱 잘라 말했죠――그 말이 들리지 않은 걸까요. 오토리 할멈은 겨우 작게 눈을 뜨고서 한 손을 귀에 얹으며 "무슨 혼담"하고 되물었습니다만 이윽고 마찬가지로 흐릿한 목소리로 "그대는 여자를 원하나 보군"하고 코로 비웃었다고 합니다. 신조는 속이 뒤집어지는 걸 참으면 "원하니 봐달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이런――"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성질을 부리며 지지 않고 코로 웃어줬습니다. 하지만 노파는 태연했습니다. 마치 박쥐 날개라도 되는 것처럼 귀에 얹은 한 손을 움직이며 "화내지 말아, 입이 험한 게 버릇이라 그래"하고 여전히 반쯤 비웃듯이 신조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도 이윽고 분위기를 다 잡고는 "나이는"하고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합니다. "남자는 스물셋――닭띠입니다." "여자는." "열일곱." "토끼 뛰로군." "태어난 달은――" "됐어. 나이만 알면." 노파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 위에서 두세 번 손가락을 접고는 별이라도 세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피부가 처진 눈을 들어 올리더니 신조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텄다, 텄어. 대흉도 이런 대흉이 없어."하고 성대히 겁을 주더니 또 혼잣말처럼 "이 혼담은 맺어져선 안 돼. 그대든 여자든 반드시 한 명은 죽을 팔자야"하고 단언하지 뭡니까. 신조는 물론 화가 났습니다. 허면 목숨이 위험하단 말도 이 노파가 한 걸 테죠. 그런 생각이 드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노파를 향해 자세를 틀고는 아직 술 냄새가 나는 턱을 들고서 "대흉? 좋습니다. 남자가 한 번 반했는데 이 몸 하나가 아깝겠습니까. 불난리가 나고 칼에도 맞아 보고 수재도 겪고 해야 반하는 보람도 있는 법입니다"하고 거창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두꺼운 입술을 우물거리며 "허면, 그 남자 때문에 고생해야 할 여자는. 하물며 여자 때문에 고생해야 할 남자는. 울기를 할 거냐 오열을 할 거냐"하고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자식, 오토시의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봐라――그런 기세로 신조가 노파를 노려보며 "여자 옆엔 남자가 있죠"하고 정면으로 말하자 상대는 여전히 깍지 낀 채로 어두운 광택이 감도는 뺨을 히죽 올리고는 "그럼 남자에겐"하고 뱉어내듯 되물었습니다. 그때는 오싹했어. 신조는 후에 그렇게 말했지요. 확실히 노파가 정면으로 맞선 셈이니 꺼림칙할 수밖에 없겠지요. 심지어 그렇게 되물은 노파는 신조가 겁먹은 기색을 보고는 검은 홀옷 소매를 쭉 빼고는 "네놈이 아무리 들여다보려 한들 인간의 힘에는 필시 한계가 마련이 있기 마련이야. 발버둥 치지 말어"하고 부드럽게 타이르고는 불쑥 다시 한 번 커다란 눈을 하얗게 번쩍 뜨더니 "이거 봐라, 증거가 눈앞에 있잖아. 네놈은 저 한숨이 들리지 않는 거냐"하고 이번에는 양 손을 귀에 얹으며 자못 거창하게 속삭인다고 말하지 뭡니까. 신조는 저도 모르게 굳어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지만 후스마 한 장 너머서 숨어 있는 오토시의 기척 말고는 무엇 하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더욱 눈을 부라리며 "안 들리느냐, 네놈처럼 젊은 것이 저 이시가시의 돌 위에서 내쉬는 한숨이 들리지 않는 거냐"하고 서서히 등 뒤의 서랍장에 비치는 그림자도 커질 정도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그 노파의 지독한 냄새가 신조의 코를 찌르더니, 장자도 후스마도, 술병도, 거울도, 서랍장도, 방석도 모두 음습한 요기 속에서 마치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괴이한 형태를 드러내며 "저 젊은 것도 그대처럼 호색에 눈이 멀어 이 늙은 것에게 씌인 바사라의 신을 거스르려 했다. 허니 곧장 신벌을 받아 금세 몸을 버리고 말았지. 네놈에겐 좋은 본보기니라. 잘 들어라"하는 목소리가 무수한 파리의 날개 소리처럼 사방에서 신조의 귀를 덮쳤습니다. 그 박자에 장자 밖 타테가와에 누구도 모르게 몸을 던진 거센 물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는 듯했습니다. 그에 배짱이 꺾인 신조는 그 자리서 오 분도 버티지 못하고 말도 대충 내던지고는 울고 있는 오토시마저 잊은 것처럼 황급히 오토리 할멈의 집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렇게 니혼바시의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신문을 보니 과연 어젯밤 타테가와서 투신 소동이 있었습니다――그것도 카메자와쵸 통장수의 아들로 원인은 실연. 뛰어내린 장소는 이치노하시와 니노하시 사이에 있는 이시가시라고 합니다. 그게 신경에 영향을 준 걸 테지요. 신조는 불쑥 불이 나서 그로부터 사흘 가량을 누워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워서 오토시가 줄곧 마음에 걸리는 듯했습니다. 물론 이제 와서 돌아보면 상대가 변심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사라진 것도,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한 것도 모두 오토리 할멈의 계략이었지 않습니까. 새삼 오토시를 의심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자신에게 어떤 원한도 없는 오토리 할멈이 왜 그런 계략을 세웠는지 궁금해 도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사람 하나를 강에 빠트리는 요파와 함께 있으니 오토시는 지금도 바사라 신이 모셔진 그 방 기둥에 둘둘 묶여서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조는 느긋이 누워 있을 수 없어서 나흘째에 자리서 일어나자마자 무작정 타이 씨를 찾아 지혜를 빌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그 타이 씨가 전화를 하지 뭡니까. 심지어 그 전화가 다른 것도 아닌 오토시의 일이었죠. 듣자 하니 어제 밤늦게 타이 씨한테 오토시가 왔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한 번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은데 이전에 모시던 집에 전화를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전언을 부탁하겠다――고 합니다. 만나고 싶은 건 자신도 마찬가지니 신조는 거의 전화에 매달리는 듯한 기세로 "어디서 만나자는데"하고 열심히 물었습니다. 그러자 말 많은 타이 씨는 "그게 말야"하고 천천히 운을 떼더니 "그런 소심한 여자가 두세 번 만난 나를 찾아올 지경이잖아. 아마 이래저래 생각이 많았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약해져서 말야. 곧장 만나게 하고 싶었는데 할멈한테는 목욕 간다 하고 나왔단 참이라지 말야. 강 건너는 너무 멀고――그렇다고 달리 마땅한 곳도 없으니 그래, 우리 집 2층을 빌려드리죠 하고 말했어. 그런데 미안하다면서 도무지 받아들 이 질 않네. 물론 마음 쓰는 것도 당연하지 싶어서 그럼 어디 마음 닿는 곳 있냐고 물으니 불쑥 얼굴을 붉히더라고. 작은 목소리로 내일 저녁 이시가시로 나와달라 할 수 없겠냐고 묻더라고. 하늘이 지켜보는 와중에 밀회하는 건 꿇릴 게 없으니 좋지"하고 웃음을 눌러 죽이는 기미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신조는 웃을 때가 아니니 "그럼 이시가시란 거지"하고 확인을 받았지요.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정했어. 시간은 여섯 시와 일곱 시 사이. 다 끝나면 나한테도 와줘라 하고 대답했다나요. 신조는 인사와 함께 알겠다 대답하곤 바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질 때까지 도무지 기다릴 수가 없더라고요. 주판을 튕기고, 장부 보는 걸 돕고, 물건을 정리하고――그 틈틈이 초조한 얼굴로 계산대 위에 놓인 시곗바늘만 보았습니다.
 그런 갑갑함 끝에 겨우 가게를 빠져나온 건 아직 서쪽 햇살이 드리우는 다섯 시 전후였습니다. 그때 묘한 일이 있었는데, 꼬마 하나가 걷어차 아직 덜 마른 페인트 냄새를 뒤집어쓴 신간 서적 간판을 뒤로하여 아스팔트 거리로 한 발짝을 내밀자 신조가 쓴 밀짚모자 아래로 나비 두 마리가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제비나비인가요. 검은 날개에 꺼림칙한 광택이 감도는 나비입니다. 물론 그때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지요. 두 마리가 저녁노을이 감도는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걸 올려다보며 마침 지나가던 우에노행 전철에 뛰어올랐습니다. 그런데 스다쵸에서 갈아타 코쿠키칸 앞에서 내려보니 검은 나비 두 마리가 또 밀짚모자 주변서 하늘하늘 어슬렁거리지 뭡니까. 하지만 설마 나비가 니혼바시서 여기까지 뒤를 쫓아올 리도 없으니 그때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지요. 아직 약속 시간까지 조금 여유도 있겠다, 히토츠메로 가는 도중에 야부소바라 적힌 작은 소바집 하나를 발견해 들어갔다 합니다. 물론 오늘은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묘하게 가슴이 갑갑한 걸 냉소바 하나로 풀고서는 길거리서 인기척이 사라질 즘에 마치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부랑아처럼 조용히 노렌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는 걸 쫓아 오기라도 한 걸까요. 어라? 싶은 차에 코 앞을 직선을 뻗은 건 이번에도 역시 검은 날개 위에 푸른 가루를 뿌린 듯한 한 쌍의 제비나비였습니다. 그때는 어째서인지 이마 위로 뻗은 나비 날개의 형태가 차가움을 머금은 저녁 공기를 새라도 되는 것처럼 크게 가로지른 것처럼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놀라서 걸음을 멈추자 그대로 작아져 서로 뒤엉키며 하늘색으로 흐릿해져 갔습니다. 거듭되는 괴상한 나비의 등장에는 신조도 덜컥 겁을 먹고 말았습니다. 혹여 이시가시로 가면 투신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걸음마저 주저되었다지요. 하지만 그만큼 오늘 밤 만나러 오는 오토시가 걱정된 걸 테지요. 신조는 곧장 마음을 다잡고는 황혼 속 그림자가 박쥐처럼 힐끔힐끔 드리운 에코인 앞 길을 따라 곁눈질도 하지 않은 채 약속 장소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달려갈 때에도 다시 한 번 미카게의 코마이누가 줄지은 강뚝 너머 하늘서 푸르게 빛나는 두 나비가 날개와 날개가 엇갈리겠다 생각할 새도 없이 아직 옅은 빛을 남긴 전신주 밑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하니 이시가시 앞을 어슬렁거리며 오토시가 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에도 신조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습니다. 밀짚모자의 위치를 고치고 소매 안에 넣어둔 시계를 보고, 거의 한 시간 가량은 방금 전 가게를 뒤로했을 때보다 더 큰 짜증에 휩싸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토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저도 모르게 이시가시 앞을 벗어나 오토리 할멈의 집 쪽으로 조금 걷고 있자니, 오른쪽에 욕탕 하나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복숭아 열매 위로 만병치료 복숭아탕이라고 페인트칠된 간판이 걸려 있었지요. 오토시가 씻으러 간다는 구실로 집을 나선다는 게 이 욕탕이지 않을까――마침 그때 여탕 노렌을 열며 어두운 길거리로 나온 건 틀림없는 오토시였습니다. 차림은 이전 번과 다름없이 나데시코 모양의 메린스 오비에 콘가스리의 홀옷이었습니다만 오늘 밤은 목욕을 마친 참이라 그런지 혈색도 고았고 이쵸가에시의 옆머리도 아직 젖어 있나 싶을 정도로 요염한 윤기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오토시는 수건과 비누 상자를 살며시 가슴에 안고서 뭐가 그리 두려운지 걱정스레 길거리의 좌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신조의 모습을 발견한 걸 테지요. 아직 어려운 듯한 눈으로 작게 웃고는 가볍게 남자의 옆으로 와서는 "오래 기다리셨죠"하고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기다리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보다 잘도 나왔는걸." 신조는 그렇게 말하며 오토시와 함께 방금 지나온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습니다. 하지만 오토시는 역시나 진정되지 않는 듯한 기미로 안절부절 뒤만 돌아보지 뭡니까. 해서 신조가 "왜 그래? 꼭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하고 일부러 놀리는 듯이 물으니 오토시는 불쑥 얼굴을 붉히며 "어머, 제가 모처럼 와주셨는데 인사 한 마디 안 하고――정말 잘 와주셨어요"하고 그럼에도 불안한 목소리로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신조도 마음에 걸려 이시가시로 갈 때까지 여러 질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오토시는 어려운 웃음을 지으며 "이러고 있는 걸 들켜봐요. 저만 아니라 당신까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요"하는 대답만 반복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둘은 약속 장소인 이시가시 앞까지 왔습니다. 오토시는 어둠 속에 자리한 미카게의 코마이누를 보고는 안심한 듯이 한심을 내쉬고는 그 아래로 강 쪽으로 향하더니, 배와 함께 네부카시이시가 몇 개나 누워 있는――곳까지 와서 겨우 멈춰 섰다고 합니다. 뒤에서 머뭇머뭇 이시가시 안으로 들어온 신조는 코마이누가 가려줘 거리 사람들이 보지 않는 걸 틈타 저녁의 습기를 머금은 네부카시이시 위에 적당히 앉으며 "내 목숨이 위험하다느니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느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하고 방금 전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오토시는 한동안 검푸른색의 돌담을 적시는 타테가와의 물을 보며 입안으로 작게 무언가를 기원하였습니다만, 이윽고 신조를 보더니 처음으로 기쁜 웃음을 지으며 "여기까지 오면 괜찮습니다"하고 속삭이듯 말하지 뭡니까. 신조는 여우에 홀린 듯한 얼굴로 말없이 오토시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오토시가 자신 또한 신조 옆에 앉아 띄엄띄엄,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걸 듣자니 오호라, 두 사람은 때와 경우에 따라선 목숨 정도는 뺏길지 모르는 무서운 적을 두고 있는 듯했습니다.
 세간은 그 오토리 할멈을 마치 어머니처럼 보는 듯하지만 실제론 먼 숙모에 가깝다고 합니다. 오토시의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에는 관계조차 없었다고 하지요. 듣자 하니 대대로 신사나 절 따위를 짓는 대공이었던 오토시 아버지의 말을 빌리며 "그 할멈은 인간이 아냐. 거짓말 같으면 옆구리를 봐라. 생선 비늘 같은 게 돋아나 있잖아"하고 말하며 거리서 오토리 할멈을 보아도 곧장 부싯돌을 치거나 소금을 뿌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오토시하곤 친한 친구이자 어머니의 조카인, 한 병약한 고아 소녀가 오토시 할멈의 양녀가 되었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오토시의 집안과 그 오토리 할멈의 집안 사이서 친척간의 왕래가 시작된 거지요. 하지만 그마저도 고작해야 한두 해로, 어머니가 죽고 따로 형제도 없었던 오토시는 백 일도 지나지 않아 니혼바시에 위치한 신조의 집에 가게 되었으니 오토리 할멈하고도 관계가 끊겨버렸습니다. 그런데 오토시가 왜 그런 할멈에게 가게 되었는가. 그건 차차 이야기하게 되겠지요.
 한편 돌아가신 아버지면 모를까, 오토시는 오토리 할멈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지 이전부터 신령을 부르는 무녀 일을 해왔단 것만을 어머니나 주위 사람에게 들었을 뿐이지요. 하지만 오토시가 알고 지내게 된 이후론 앞서도 말한 바사라 대신이라는 괴상한 존재의 힘을 빌려 가지나 점을 봤다고 합니다. 이 바사라 신 역시 오토리 할멈과 마찬가지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이지요. 텐구니 여우니 이래저래 알려진 것도 있었습니다만, 오토시에겐 우브스마가미의 텐만구의 신주 따위는 저 바다 밑 용궁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탓인지 오토리 할멈은 매일 밤 두 시 시계가 울리면 뒤쪽 툇마루에서 다리를 타고 타테가와에 몸을 담그고는 머리까지 물에 들어가서 삼십 분 넘게 들어가 있다지요――그나마 요즘처럼 날이 따듯하면 좀 낫겠지요. 하지만 추운 날에도 역시나 속옷 한 장 차림으로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진눈깨비 속을 마치 사람 얼굴을 한 수달처럼 첨벙 물에 들어간다지 뭡니까. 한 번은 오토시도 걱정되어 전등을 한 손에 들고 문을 열어 가만히 강 안을 들여다보았다 합니다. 건너편 강가에 자리한 창고 지붕에 하얀 눈이 쌓인 만큼 한 층 더 어둡게 보이는 물 위에 노파의 정수리만이 부소처럼 떠올라 있었다 합니다. 그 대신 이 노파가 하는 일은 가지도 점도 영험했다고 합니다――이렇게 말하면 좋게만 들릴까요. 하지만 이 노파에게 돈을 써 부모나 남편, 형제에게 저주를 내려 죽인 사람도 잔뜩 있었습니다. 실제로 요전번 이 이시가시에서 몸을 던진 남자도 같은 야기바나시의 게이샤에게 마음을 둔 쌀가게 주인의 부탁을 받은 노파가 어려울 것 없이 죽여버린 거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비밀스러운 이유가 있는 건지, 한 사람이라도 저주로 죽인 장소에선, 그러니 이 이시가시와 같은 장소에선 아무리 노파의 가지와 기도가 있어도 주위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지요. 그뿐일까요. 거기서 하는 일은 천리안이나 다를 바 없는 노파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듯하니, 오토시는 일부러 이 이시가시까지 신조를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럼 왜 오토리 할멈이 오토시와 신조의 연애를 그렇게나 방해하는가. 요 봄부터 시세를 점쳐 달라며 찾아오는 주식쟁이가 오토시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거금을 미끼로 그 할멈을 낚은 결과, 첩으로 들이게 해주겠단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물론 그게 전부라면 돈으로 해결이 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여기에 또 하나 괴이한 문제가 있었는데, 오토시가 옆을 벗어나면 그 할멈이 가지도 점도 볼 수 없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무슨 말인가 하면 오토리 할멈이 일을 시작할 때면 먼저 바사라의 신을 오토시의 몸에 내리게 해, 신내림을 받은 오토시의 입으로 지시를 받기 때문이라 합니다. 굳이 그럴 것 없이 노파 자신의 몸에 내리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황홀경에 이른 자는 그동안엔 남이 알지 못하는 세계의 소식에도 정통하게 될지언정 눈을 뜨면 그동안의 일을 전부 잊는다고 합니다. 결국 도리 없이 오토시의 몸에 신내림을 받게 해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셈이지요. 이런 사정이 있는 만큼 그 노파가 오토시를 놓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일 테지요. 하물며 주식쟁이 또한 그게 노림수였습니다. 오토시를 첩으로 들이면 오토리 할멈도 따라 오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게 시세를 보게 하면 천하마저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색정과 욕심으로 배를 한가득 채우고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오토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지요. 아무리 꿈과 현실이 구분 가지 않는다 해도 오토리 할멈이 꾸미는 나쁜 일이 바로 제 입에서 나오는 꼴이지 않습니까. 양심이 없으면 또 모를까, 이렇게 도구로 쓰이는 게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앞서 이야기한 오토리 할멈의 양녀란 사람도 거둬들여진 후 같은 역할로 사용되었다 합니다. 안 그래도 빈약한 몸으로 그런 일을 하니 병까지 걸린 데다가 끝내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노파가 자는 사이에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하지요. 오토시가 신조의 집을 나온 것도 이 양녀가 죽었을 때, 고인이 친구인 오토시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 탓이었습니다. 오토리 할멈이 후임으로 오토시를 점찍어 버린 거지요. 그걸 미끼로 신조의 집에서 나오게 해 지금의 거처로 끌어들이고는 죽이면 죽여버렸지 절대 돌려보내진 않겠다고 겁박했다고 합니다. 물론 신조와 굳은 약속을 맺었던 오토시는 그날 밤에라도 도망칠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대도 그걸 모를 리다 없었겠죠. 아무리 현관을 들여다보아도 밖에 한 마리 뱀이 크게 똬리를 틀고 있는 탓에 한 걸음을 내디딜 용기마저 가셨다고 합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틈을 보아 도망 치려했지만, 역시나 엇비슷한 괴상한 일이 벌어져 도무지 해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끝에 결국 이것도 모종의 인과라며 포기한 채 마지못해 오토리 할멈의 말을 따르게 된 것이었죠.
 하지만 요전 번 신조가 오고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진 후, 평소에도 극악무도한 그 노파는 오토시를 꾸지라고 말고 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때리고 꼬집고 하는 걸로 모자라 밤이 되는 걸 기다려선 수상한 술법을 써 두 팔을 공중에 매달거나 목 주위에 뱀을 두르는 등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무서운 꼴을 당하게 했죠.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그런 처벌 틈틈이 히죽 비웃고는 이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신조의 목숨을 거둬서라도 너를 붙잡아둬야겠다며 무섭게 겁을 주었습니다. 이래서야 오토시도 절체절명이 따로 없지요. 이제까지는 숙명이라 마음을 굳혔지만 만에 하나 신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면 큰일이라며 기어코 모든 걸 밝히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신조가 이야기를 들은 후 그런 무서운 여자였냐며 미워하거나 경멸할지도 모르니 타이 씨를 찾아갈 때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몰랐다고 하지요.
 이야기를 마친 오토시는 또 여느 때처럼 창백해진 얼굴을 들고서 신조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런 인과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슬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과거라 체념하고 이대로――"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끝내 참을 수 없었는지 남자의 다리에 매달려 소매를 물며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신조는 어쩌면 좋을지 몰라 한동안은 오토시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화도 내고 격려도 했습니다만, 그 오토리 할멈을 상대로 어떻게 해야 무사히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아쉽게도 도무지 승산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오토시를 위해서도 약한 소리를 할 상황은 아니었지요. 억지로 기운찬 목소리를 내면서 "뭐, 너무 걱정하지 마. 기다리면 볕들 날도 오겠지"하고 미약한 위로를 하니 오토시는 그제야 눈물을 거두고는 신조의 다리서 벗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눈물 섞인 목소리로 "그야 시간이 해결해주는 일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모레 밤엔 또 신을 내린다고 하니까요. 그때 제가 괜한 소리라도 한다면――"하고 힘없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는 신조도 한숨이 올라오는 듯하여 모처럼 낸 기운마저 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레에 그런 일이 있다면 오늘내일 중에 어떻게든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은 물론이요 오토시마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말 테지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고작 이틀 만에 그 괴상한 노파를 막을 수 있단 걸까요. 설령 경찰에 호소해본들 법률도 황당 무계한 세계서 이뤄지는 범죄에까지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세상 사람들도 오토리 할멈의 나쁜 짓 따위 우습기 짝이 없는 미신으로 여기며 개의치 않을 테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신조는 새삼 팔짱을 끼고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괴로운 침묵이 한동안 계속된 뒤, 오토시는 눈물을 머금은 고개를 들고는 희미한 별빛을 품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저는 차라리 죽고만 싶어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겁에 질린 것처럼 우물쭈물 주위를 둘러보고는 "너무 늦어지면 또 할머님께 혼날 테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하고 정이 다 떨어진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여기 온 지 삼십 분은 더 지났을 터입니다. 저녁의 어둠은 물줄기의 냄새와 함께 두 사람의 주위를 두르고 건너편 강가의 장작 산도, 그 아래에 묶여 있는 점선苫船도 푸른 어둠에 감춰져 단지 타테가와의 물만이 마치 큰 물고기의 배처럼 옅은 흰색을 꿈틀꿈틀 빛낼 따름이었습니다. 신조는 오토시의 어깨를 안고서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고는 "일단 내일 저녁에 다시 여기에 나와줘. 나도 되도록 지혜를 짜볼 테니까"하고 열심히 힘을 주었습니다. 오토시는 눈물 자국을 손수건을 닦으며 슬픈 얼굴로 말없이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네부카와이시서 일어나 역시나 시무룩해진 신조와 함께 미카게의 고마이누 아래를 지나 한적한 거리로 나오자 또 불쑥 눈물이 솟구친 걸 테지요. 밤눈으로도 아름다운 목 뒷덜미를 보여주며 슬프게 고개 숙인 채로 "아아, 정말로 죽고만 싶어요"하고 다시 한 번 작게 말하였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방금 전 두 마리 나비가 사라진 전신주 밑에서 커다란 인간의 눈 하나가 대뜸 떠오르지 뭡니까. 심지어 속눈썹도 없고 창백한 막이 낀 것처럼 눈이 탁하며 초점마저 흐릿한 눈으로, 크기는 이래저래 삼 척은 되었을 겁니다. 처음엔 물거품처럼 솟고는 땅 위서 살짝 떨어진 곳에 떠오르듯 멈췄습니다만 곧 물컹한 회색 눈동자가 비스듬하게 눈초리를 돌렸다 합니다. 더군다나 기이한 것은 이 커다란 눈이 거리서 흐르는 어둠 속에 숨어 몽롱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어라 말로 못할 악의의 빛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신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서 오토시의 몸을 감싸며 필사적으로 이 환상을 바라보았다 합니다. 실제로 그때는 온몸의 구멍에 모조리 바람이 들어오나 싶을 정도로 등골이 오싹해지고 숨도 쉴 수 없었다지요. 아무리 소리를 내려 해도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눈도 한동안은 증오를 한껏 모아 신조를 노려다 보았습니다만 다행히도 서서히 형태가 희박해지더니 끝내 조개껍질 같은 눈꺼풀이 내려오더니 전신주만 남을 뿐 괴상한 무언가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단지 새 깃털 같은 것만이 하늘하늘 날렸다는데 이는 어쩌면 땅을 스쳐 나는 박쥐였을지도 모르지요. 그 후 신조와 오토시는 마치 나쁜 꿈에서 깬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만, 곧 서로의 눈 안에서 무시무시한 각오의 색을 읽고는 저도 모르게 서로 손을 꽉 쥐고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삼십 분 가량이 지난 후, 신조는 여전히 얼굴색을 바꾼 채로 바람이 잘 드는 뒷방에서 집주인 타이 씨를 앞에 둔 채로 오늘 밤 겪은 다양한 기이한 일을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습니다. 두 검은 나비, 오토리 할멈의 비밀, 커다란 눈의 모습을 한 환상――모두가 현대 청년에겐 황당무계한 일일 테지만 이전부터 그 노파의 괴이한 주술이 가진 힘을 알고 있는 타이 씨는 새로운 걱정을 두는 법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권하며 침을 삼킨 채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합니다. "그 커다란 눈이 사라지니 오토시는 창백한 얼굴로 '어쩌면 좋죠. 여기서 당신을 만난 걸 할머님께 들켜버렸어요'하고 말했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된 이상 그 노파랑 우리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거나 다를 바 없잖아. 들키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하고 허세를 부렸지. 하지만 곤란하게도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내일 또 그 이시가시서 오토시와 만나기로 약속했잖아. 하지만 오늘 밤 만남이 그 노파한테 들킨 이상 아마 내일은 오토시를 놔주려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운 좋게 그 노파의 손아귀서 오토시를 구해낼 명안을 오늘내일 중에 떠올린다 해도 말야, 내일 밤 오토시와 만나지 않으면 계획이 다 헛수고가 되는 셈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신에게나 부처에게나 버림받은 거 같아서 말야. 오토시하고 헤어져 여기 오는 내내 발이 붕 떠있는 것만 같더라고."――신조는 그렇게 자세한 이야기를 마치고는 떠올랐다는 양 부채를 쓰면서 걱정스레 타이 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하지만 타이 씨는 의외로 놀라지 않고 잠시간 단지 풍령이 바람이 흔들리는 걸 보았습니다만 겨우 신조를 향해 고개를 들고는 살짝 눈썹을 으쓱인 채 "요컨대 네가 목적을 이루려면 세 개의 난관을 돌파해야 한단 뜻이네. 하나는 오토리 할멈의 손에서 너 자신이 안전하며 또 안전히 오토시 씨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 둘째로 그것도 모레까진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는 것. 또 계획을 나누기 위해 내일 중에 오토시 씨와 만나야 하는 게――세 번째 난관이겠지. 근데 세 번째 난관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난관만 돌파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하고 자신 있는 듯한 말투로 말하였습니다. 신조는 여전히 밝지 않은 얼굴로 "왜?"하고 의아하다는 양 물었지요. 그러자 타이 씨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얼굴을 하고서 "뭐 대단한 건 아냐. 네가 만나지 않으면――"하고 운을 떼었지만 불쑥 주위를 둘러보며 "아차, 이건 여차할 때까지 숨겨둘까. 방금 전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 할망구가 네 주위에 엄중한 망을 깔아둔 모양이니까. 실수로 괜한 소리는 안 하는 게 좋겠어. 실은 첫 번째나 두 번째 난관도 못 돌파할 건 없을 거 같은데――뭐 어찌 됐든 다 나한테 맡겨만 둬. 그보다 오늘 밤은 맥주라도 마셔서 용기라도 크게 받아 가라고"하고 끝내는 자못 마음 편하다는 양 웃어넘기지 뭡니까. 신조는 물론 그런 태도가 갑갑하기도 하고 화도 났습니다. 하지만 막상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자 역시 타이 씨가 조심하는 게 정답이지 싶었습니다. 그런 것도, 두 사람이 밝지 않은 세상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타이 씨는 문득 신조의 쟁반 위에 훈제 연어와 함께 올라 있는 컵이 거품이 빠진 흑맥주를 담은 채로 입도 대지 않은 채 놓여 있지 뭡니까. 타이 씨는 물방울이 맺힌 맥주병 엉덩이를 붙들고는 "야, 기분 좋게 좀 마셔라"하고 상대를 재촉했을 때였습니다. 별생각 없이 컵을 들어 올린 신조가 단숨에 쭉 들이키자 직경 2촌가량의 원을 그려 맨질맨질히 빛나는 흑맥주 표면에 천장의 전등이나 갈대발 따위가 담겨 있었죠――거기에 순간,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비쳤던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르는 얼굴일 뿐으로 인간이 맞긴 한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새로도, 동물로도, 내지는 뱀이나 개구리로도 볼 수 있었지요. 그나마도 얼굴이라기보다는 되려 그 일부로 특히 눈에서 코 부근이 마치 신조의 어깨너머로 가만히 컵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전등불마저 가로막은 채 또렷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오랜 시간 같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정말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은 눈이 직경 2촌의 흑맥주병의 원 안에서 힐끔 신조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곧장 사라지고 만 거지요. 신조는 마시려던 컵을 내려놓고 앞뒤로 두리번거렸습니다. 하지만 전등도 태연히 빛을 내뿜고 있고, 문가의 풍령도 여전히 바람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시원한 방에는 요기를 두른 듯한 물건도 보이지 않지요. "왜, 벌레라도 들어가 있냐"――타이 씨가 그렇게 물으니 신조는 도리 없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아니, 묘한 얼굴이 맥주에 비치더라고"하고 부끄럽다는 양 대답했습니다. 이를 들은 타이 씨는 "묘한 얼굴이 비쳐?"하고 반향하듯이 되풀이하며 신조의 콥을 들여 보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타이 씨의 얼굴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네가 예민해서 뭘 잘못 봤나 보다. 설마 그 노파도 우리 집에까지 손을 뻗진 않았겠지." "그치만 방금 전에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 노파가 내 주위에 빈틈없는 망을 쳤다고." "그랬긴 했지. 근데 설마――설마 그 맥주 컵에 그 노파가 혀를 넣어 한 입 마신 것도 아닐 거 아냐. 그러니까 마셔 버려"――타이 씨는 그렇게 침울한 상대의 기분을 여러모로 띄어주려 했습니다만, 신조는 더욱 침울해져서 기어코 컵도 비우지 않은 채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타이 씨도 도리 없이 절대 기죽지 말라고 다시 한 번 친절한 말을 해주며 전철로는 미덥지 않다며 차를 불러줬다고 합니다.
 그날 밤은 잠에 들어도 묘한 꿈만 꿔서 몇 번이나 뒤쳑였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간신히 아침을 맞은 신조는 전날 밤의 인사를 할 겸 곧장 타이 씨께 전화를 걸었지요. 그러자 전화를 받은 건 타이 씨 가게의 직원으로 "사장님은 오늘 아침 일찍부터 어디 나가셨어요"하고 인사하지 뭡니까. 신조는 혹여 오토리 할멈이라도 찾아 간 거 아닐까 싶었습니다만 터놓고 그렇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또 물어본들 다른 사람이 알 리도 없으니 돌아오는 대로 연락 달라며 단단히 부탁을 하고는 일단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래저래 오후쯤 되자 이번에는 타이 씨가 전화를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아침 오토리 할멈에게 집안의 미래를 점쳐달라 했다지요. "다행히 오토시하고 만났어. 내 계획을 편지로 적어서 그 사람 손에 슬며시 쥐여주고 온 거지. 대답은 내일이 돼야 알겠지만 급한 상황이니까 오토시 씨도 도리 없이 받아 줄 거야"――그런 타이 씨의 말을 듣자니 마치 만사가 잘 풀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신조는 더더욱 그 계획이란 걸 알고 싶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타이 씨는 역시나 어젯밤처럼 히죽 웃는 듯한 기미로 "뭐, 이삼일만 기다려봐. 그 노파 상대로는 전화로도 방심할 수 없으니까. 그럼 또 내 쪽에서 전화할게. 끊는다"하고 말할 뿐입니다. 전화를 끊은 신조는 여느 때처럼 계산대 뒤에 앉았습니다만 그 이삼 일 만에 자신과 오토시의 운명이 정해진다 생각하니 조마조마한 탓인지, 갑갑한 탓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기쁜 탓인지 단지 묘하게 가슴이 뛰는 심정으로 장부와 주판에도 마땅히 손을 뻗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날은 아직 열이 가시지 않았단 구실로 대낮부터 2층방서 낮잠을 취했지요. 하지만 그동안에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건 누군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가만히 바라보는 듯한 기분으로, 이는 잘 때나 일어날 때나 끈질기게 들러붙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오후 세 시쯤 되니 2층 계단 위에 누군가가 꿇어앉아서 그 시선이 발 너머로 자신을 향하는 듯했지요. 그러니 곧장 일어나 거기까지 나가봤습니다만 단지 잘 닦인 복도 위에 창밖의 하늘이 희미하게 드리우고 있을 뿐으로 사람 같은 건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자 신조는 더더욱 견딜 수가 없어서 타이 씨의 전화만을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그러고는 어제와 같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약속한 전화벨이 울렸지요. 하지만 막상 전화를 받아 보니 타이 씨는 어제보다 더 기운찬 목소리로 "오토시 씨의 대답을 받았어. 내 계획을 실행하기로 한 거야. 뭐, 어떻게 답을 받았냐고? 또 볼일을 만들어 그 할멈의 집에 찾아갔지. 그러자 오토시 씨가 어제 편지에 부탁한 대로 곧장 나와 내 손에 답장을 쥐여준 거야. 귀여운 대답이었어. 히라가나로 '알겠습니다'하고 적혀 있잖아――"하고 의기양양히 대답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묘하게도 말하는 도중부터 타이 씨만의 목소리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습니다. 물론 목소리라 해도 무슨 말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만, 어찌 됐든 기세 좋은 타이 씨의 목소리와 정반대로 콧소리가 섞이고, 힘이 없는 데다가, 신음하는 듯한 느긋한 목소리가 마치 그림자처럼 타이 씨의 말 사이를 누비며 수화기 밑바닥으로 흘려 드는 것이었지요. 처음엔 신조도 혼선이겠지 싶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그래서?"하고 이야기를 재촉하며 그리운 오토시의 소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타이 씨께도 이 묘한 소리가 들린 걸 테지요. "어째 소란스럽네. 네 쪽이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아니, 나 아냐. 혼선이겠지"하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타이 씨는 살짝 혀를 차는 기색으로 "그럼 한 번 끊고 다시 걸어야겠다"하고 말하며 한 번은 고사하고 두세 번이나 교환원에게 잔소리를 하며 끈기 좋게 다시 걸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거북이가 중얼거리는 듯한 웅얼거림이 들렸지요. 타이 씨도 끝내는 고집을 꺾고 "안 되겠다. 어디 고장 났나 봐――그보다 막상 중요한 본론인데, 오토시 씨가 승낙을 했으니 뭐 다 계획대로 성공할 거 같으니까 걱정 말고 좋은 소식만 기다리고 있어"하고 또 방금 전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신조는 역시 타이 씨의 계획이 궁금하여 다시 한 번 어제처럼 "대체 어쩌려고 그래"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타이 씨도 여느 때처럼 태연하게 "하루만 더 참아 봐. 내일 이 시간이면 분명 너한테도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그렇게 조급해할 거 없이 친구 잘 뒀다 하는 심정으로 기다려봐. 인과응보는 자면서 기다리란 말도 있잖아"하고 농담 섞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불쑥 희미한 목소리가 귀에 흘러 들어와 "발버둥칠 생각 말어"하고 비웃지 뭡니까. 타이 씨와 신조는 저도 모르게 양쪽에서 동시에 "지금 이 목소린 뭐야"하고 물었습니다만 그렇게 수화기 안이 조용해지더니 그 중얼거리는 듯한 콧소리마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났네. 야, 그 할멈이야. 자칫하면 모처럼의 계획도――뭐, 그것도 전부 내일이 되어봐야 아나. 그럼 이만 실례할게."――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은 타이 씨의 목소리 안에선 명백한 당황이 느껴졌습니다. 또 실제로 오토리 할멈이 두 사람 사이의 전화마저 신경 쓰게 된 걸 보면 물론 타이 씨와 오토시가 몰래 편지를 주고받은 것도 발견했을 게 분명합니다. 타이 씨가 당황할만한 거지요. 하물며 신조 입장에선 어떻게 할지는 몰라도 하나뿐인 타이 씨의 계획이 그 노파에게 들통난 이상, 정말 손 쓸 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신조는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 마치 상심한 사람처럼 멍하니 2층 방으로 가서 해가 질 때까지 창밖의 푸른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어쩐지 그 하늘서도 이따금 기이한 제비나비가 몇 십 마리나 무리 지어 꺼림칙한 무늬를 꾸미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신조는 그런 기이함마저 기이하다 느낄 수 없었다고 하지요.
 신조는 그날 밤에도 악몽만을 꾸며 제대로 잠에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날이 밝자 꽤나 마음이 풀려서 모래보다 맛이 없는 아침을 먹고선 곧장 타이 씨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바보야, 너무 일러. 나 같은 잠꾸러기한테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너무하지 않냐"――타이 씨는 정말 졸린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투덜거렸지요. 하지만 신조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어제 전화받은 이후로 도무지 마음 편히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이제 바로 너희 집에 갈 거야. 알았어? 전화로 네 이야기를 듣는 정도론 도무지 마음이 안 풀려. 지금 당장 갈 거야"하고 아이처럼 고집을 부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흥분한 목소리를 들어서야 타이 씨도 달리 방법이 없었을 테지요. "그럼 와. 기다릴게"하고 순순히 대답하기에 신조는 전화를 끊자마자 걱정하는 어머니께도 어려운 얼굴만 보여줄 뿐 어디로 간다고 말도 않고 훌쩍 가게를 뛰쳐나갔습니다. 나와 보니 하늘은 어두웠고 동쪽 구름 사이로 적동색 빛이 감도는 묘하게 덥고 갑갑한 날씨였습니다. 하지만 날씨 따위에 신경 쓸 여유도 없으니 곧장 전철을 타고서 비어 있는 정중앙 좌석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잠깐이나마 회복된 듯했던 피로가 억척스럽게 남아 있었던 건지, 신조는 새삼스레 기가 죽어 마치 딱딱한 밀짚모자가 머리를 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격렬한 두통까지 겪었습니다. 그렇게 기분을 풀 생각에 이제까지 신발 밑창만 보던 눈을 주위로 들자 이 전철 또한 기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무슨 일인가 하면 천장 양옆에 규칙적으로 줄지은 손잡이가 전철이 흔들림에 따라 진자 운동을 하는 와중에, 신조의 앞에 자리한 손잡이만이 줄곧 한 곳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당초엔 조금 우습다 싶을 뿐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는 사이 또 누군가가 바라보는 듯한 꺼림칙함이 자연스레 강해졌지요. 이런 손잡이 아래에 앉아 있는 잘못이지 싶어 비어 있는 반대편 자리로 일부러 걸음을 옮겼습니다. 옮겨서 불쑥 위를 보니 이제까지 흔들리던 손잡이가 대뜸 누가 건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더니 대신 방금 전 손잡이가 자못 자유로워진 걸 기뻐하듯이 기세 좋게 흔들리기 시작하지 뭡니까. 신조는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이때 역시 두통마저 잊을 정도로 형용 못할 공포를 느껴 저도 모르게 도움을 청하듯이 다른 손님들의 얼굴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때, 신조와 비스듬하게 마주한 할머니 하나가 쿠로로 히후 소매서 손을 내놓은 채로 금테두리 안경 너머로 신조를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야 그 사람은 신내림 받은 노파하곤 어떤 인연도 없는 사람임에 분명할 테지요. 하지만 신조는 그 시선을 받는 것과 동시에 곧장 오토리 할멈의 새파란 얼굴을 떠올렸으니 이젠 손쓸 도리가 없습니다. 대뜸 표를 차장에게 건네고는 일을 그르친 소매치기보다 빠르게 전철서 뛰어내렸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던 전철이니 발이 땅에 닿는 동시에 밀짚모자가 날아가고 신발 끈이 끊겼지요. 그런 데다가 앞으로 넘어져 무릎마저 까졌습니다. 아뇨, 조금만 일어나는 게 늦었다면 모래먼지를 내며 달려오던 어딘가의 화물 자동차에 치일 뻔했습니다. 흙투성이가 된 신조가 가솔린 연기를 얼굴에 뿌리며 지나간 자동차의 노란칠 뒤로 상표인 듯한 검은 날개를 발견했을 땐, 목숨을 건진 게 신이 내린 축복 같았다고만 합니다.
 그게 루카케바시 정류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데 다행히 지나가던 인력거가 하나 있어서 무작정 그 위로 기어 올라서는 여전히 얼굴색을 바꾼 채로 히가시료고쿠로 서둘렀습니다. 하지만 그 도중에도 가슴은 뛰고 무릎의 상처는 아프고, 더군다나 방금 전 소동 탓에 언제 이 인력거도 뒤집어질지 모르겠단 꺼림칙한 불안도 느껴져 거의 사는 게 사는 거 같지 않았다 합니다. 특히 인력거가 료고쿠바시에 이를 적에 코쿠키칸의 하늘에 잿빛 테두리를 가진 검은 구름이 연이어져 넓은 강 수면에 제첩나비와 같은 그림자를 드리운 걸 보자, 신조는 기어코 자신과 오토시의 생사가 갈릴 날이 다가온 듯한 비장한 감격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눈물마저 머금었다 합니다. 그러니 인력거가 다리를 건너 타이 씨의 집 앞에 겨우 봉을 내렸을 때에는, 스스로도 기쁜 건지 슬픈 건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단지 마냥 가슴이 조여 의아해하는 인력거꾼의 손에 마땅한 돈을 쥐여주는 것마저 아쉽다는 양 황급히 가게의 노렌을 지나는 것이었습니다.
 타이 씨는 신조의 얼굴을 보고는 손만 끌지 않은 채로 뒷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손발의 상처나 터지고 찢어진 여름 하오리를 눈치챈 걸 테죠. "몸이 왜 그래"하고 황당한 듯 물었습니다. "전철에서 떨어졌어.  쿠라카케바시 쯤에서 뛰쳐 내렸거든." "시골 촌뜨기도 아니고――아무리 맨정신이 아니라지만 정도가 있지. 그래서 왜 또 그런 데서 뛰쳐내렸는데?"――그 말에 신조는 전철 안에서 겪은 기이한 일을 하나하나 타이 씨께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타이 씨는 열심히 그 내용을 듣고는 여느 때 이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형세가 안 좋네. 오토시 씨가 실패한 거 아닐까 싶은데"하고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신조는 오토시의 이름을 듣자 갑자기 또 가슴이 뛰는 거 같아서 "실패한 거 같다니? 오토시한테 뭘 시킨 거야"하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하지만 타이 씨는 그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물론 이렇게 된 건 내 죄일지 몰라. 내가 오토시 씨에게 편지를 건넨 걸 전화로 네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 노파도 내 계획을 몰랐을 테니까"하고 굉장히 당혹스럽다는 양 한숨마저 내쉬는 것이었습니다. 신조는 기어코 참을 수가 없어서 "아직도 네 계획을 밝히지 않는 건 너무하다 생각하지 않아? 덕분에 나는 지금 이중으로 괴롭단 말야"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화를 냈습니다. 그래도 타이 씨는 "진정해"하고 말리는 듯한 손짓을 하더니 "그야 왜 모르겠어. 당연히 그럴 거란 건 나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 노파를 상대하는 이상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 지금도 말했지만 내가 오토시 씨께 편지를 건넨 것도 네게 밝히지 않았다면 더 잘 풀렸을지도 모르잖아. 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그 할멈에게 통하고 있는 듯하니까. 아니, 어쩌면 요전 번의 전화 이후로 나도 그 할망구의 눈에 들었을지도 몰라. 아직까진 너만큼 기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내 계획이 실제로 실패했는지 확실해질 때까진 아무리 네게 미움받아도 내 가슴에만 묻어둘 거야"하고 타이르고 위로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신조는 타이 씨가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있어도 오토시가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험악한 표정을 미간에 남겨둔 채로 "그건 그렇고 오토시가 잘못되는 일은 없는 거겠지"하고 내치듯이 확인을 받았지요. 그러자 타이 씨도 역시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글쎄"하고 말할 뿐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만, 이윽고 방 기둥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나도 그게 마음에 걸려 미칠 거 같아. 그럼 노파의 집까지는 못 가도 근처까지만 정찰해볼까"하고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조 또한 이렇게 느긋이 앉아 있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으니 싫다고 할 리가 없었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여름 하오리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재빨리 타이 씨의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타이 씨의 집을 나와 채 얼마 걷지도 않은 동안 뒤에서 누가 허둥지둥 뒤에서 쫓아오지 뭡니까.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니 딱히 수상은 사람은 아니라서, 타이 씨 가게의 어린 직원 하나가 쟈노메 우산 하나를 어깨에 들고서 서둘러 주인 뒤를 쫓아온 겁니다. "우산인가." "네, 사장님께서 비 내릴 거 같으니 가지고 가라네요." "그럼 손님 것도 가지고 와야지"――타이 씨가 쓴웃음 지으며 우산을 받자 아이는 건방지게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인 것처럼 인사를 하더니 기세 좋게 가게 쪽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머리 위에서 아까보다 더 검은 구름이 한가득 무리 지어 있군요.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 하늘빛도 마치 잘 갈고닦은 강철만 같은 꺼림칙한 차가움을 품고 있었다 합니다. 신조는 타이 씨와 함께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또 꺼림칙한 예감에 휩싸여 자연스레 대화도 잘 풀려가지 않고 무작정 발만 서두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타이 씨는 살짝 뒤늦게 시종 그 뒤를 쫓아야 했지요. 자못 바쁘다는 양 땀을 흘렸습니다만 기어코 포기한 걸 테지요. 신조를 앞세운 채로 자신은 뒤에서 우산을 스고 이따금 친구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이치노하시서 좌측으로 틀어 오토시와 신조가 늦은 저녁에 커다란 눈동자의 환상을 본 이시가시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인력거 하나가 옆을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인력거 위 손님의 모습을 본 타이 씨는 불쑥 미간을 찌푸리더니 "야, 야"하고 신조를 불러 세우지 뭡니까. 그러니 신조도 도리 없이 걸음을 멈추고 마지못해 상대를 돌아보며 성가시다는 양 "왜"하고 대답했습니다. 타이 씨는 서둘러 신조를 따라잡더니 "지금 차 위에 탄 사람 봤어?"하고 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봤지. 마르고 검은 색안경을 쓴 남자잖아"――신조는 의아하다는 양 그렇게 답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습니다만, 타이 씨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 층 더 무겁게 "저 사람은 우리 집 단골인데 카기조인가 하는 주식쟁이야. 나는 어쩌면 오토시를 첩으로 들이려 하는 게 저 남자 아닐까 싶은 참이고. 아니, 대단한 이유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그런 거 같았어"하고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신조는 역시 시무룩한 기미로 "그냥 기분 탓이겠지"하고 딱 잘라 버리고는 얼마 전에 본 복숭아 간판마저 보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타이 씨는 우산으로 두 사람이 가는 방향을 가리키며 "꼭 기분 탓인 건 아냐. 저기 봐. 오토리 할멈 집 앞에 인력거가 멈췄잖아"하고 의깅양양히 신조를 보았습니다. 확실히 방금 전 인력거는 비를 맞고 있는 버드나무가 어둡게 가지를 뻗은 아래에 문장이 새겨진 뒤쪽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인력거꾼은 현관에 앉아 있는지 봉도 유유히 내려가 있습니다. 이를 본 신조는 처음으로 밝지 않은 얼굴색 아래에 옅은 정열을 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울적한 첫 분위기는 잃지 않고서 "근데 뭐, 저 할멈한테 점 보러 오는 주식쟁이가 카기조만 있는 건 아니잖아"하고 성가시다는 양 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오토리 할멈의 집과 붙어 있는 미장집까지 왔기 때문이겠죠. 타이 씨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지 않고 빈틈 없이 주위를 살피며 마치 신조의 몸을 감싸듯이 여름 하오리의 어깨를 맞닿은 채 천천히 오토리 할멈의 집 앞을 지났습니다. 지나면서 곁눈질로 안을 확인하니 평소와 다른 건 카기조가 타고 온 인력거뿐으로, 이는 멀리서 바라보던 것보다 더 가깝게, 마침 미장집의 문 앞에 두터운 고무 바퀴를 멈춘 채 담배꽁초를 귀에 꽂은 인력거꾼이 당연하다는 양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엔 대나무 격자 창문도, 그을려진 현관문도, 내지는 문에 달린 발도, 격자 문 안의 낡은 장자색마저 모두가 여전할 뿐 아니라, 집안 또한 평소처럼 음울한 조용함이 감도는 듯했습니다. 하물며 혹시 몰라 확인한 오토시의 모습은 그 얌전한 옷소매가 살랑이는 것마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하니 두 사람은 오토리 할멈의 집 앞을 지나 옆의 초물전에 이르자, 이제까지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 이상으로 모처럼 기대한 게 빗나갔다는 낙담마저 품을 수밖에 없었다지요.
 그런데 그 초물전 앞에 이르자 재생지, 카메노코다와시, 가루 샴푸 따위가 줄지은 위에 모기향이라 적힌 붉은 제등이 잔뜩 걸려 있는――가게 앞에서 초물전 안주인과 이야기하는 건 틀림없는 오토시였습니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마주하고는 거의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여름 하오리의 소매를 나부끼며 척척 초물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기척을 느껴 두 사람을 돌아 본 오토시는 창백한 뺨 아래로 옅은 핏기운을 되찾았습니다만, 초물전 안주인 앞에서도 조심해야만 했던 걸 테죠. 가게 앞에 드리운 버드나무 가지를 어깨에 붙든 채로 가슴이 뛰는 걸 억지로 누르는지 "어머"하고 작게 놀랄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타이 씨는 침착하게 밀짚모자 챙에 손을 얹으며 "어머니 집에 계셔요?"하고 은근슬쩍 물었습니다. "네, 계셔요." "여기선 뭐 하고 계세요?" "손님 부탁으로 종이를 사러――"――그런 오토시의 말이 끝나기 전에 버들로 가로막힌 가게 앞이 한 층 더 어두워진다 했더니 모기향이라 적힌 붉은 제등을 스쳐 얇은 빗줄기 하나가 비스듬하게 빛났습니다. 또 그와 동시에 버드나무 잎도 흔들리나 싶을 정도로 쾅쾅 번개가 울렸다지요. 타이 씨는 이를 계기로 가게 앞으로 발을 돌리며 "그럼 어머니께 전해주세요. 제가 봐줬으면 하는 게 있어 찾아왔다고――지금도 문 앞에서 몇 번이나 불렀는데 답이 없네요.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따님께서 이런 데서 딴짓을 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네요"하고 오토시와 포물전 안주인을 번갈아 보며 솜씨 좋게 쾌활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포물전 안주인은 그런 타이 씨의 교묘한 연기에 홀라당 넘어간 걸 테지요. "그럼 오토시 양, 어서 가봐요"하고 재촉하고는 자신도 내리기 시작한 비에 당황하여 제등을 안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오토시도 "그럼 이모님 또 올게요"하는 인사를 남기고는 타이 씨와 신조를 좌우로 둔 채 초물전을 뒤로 했습니다. 물론 세 사람 모두 오토리 할멈의 집 앞에는 발도 멈추지 않고 하나둘 떨어지는 큼지막한 빗방울을 우산으로 받아내며 히토츠메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실제로 그 몇 분 동안은 당사자들은 물론이요 평소엔 기운 넘치는 타이 씨마저 운영의 주사위를 던져 숫자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은 걸 테죠. 이시가시 앞까지 올 때까지 세 사람 모두 말을 맞춘 것처럼 시선을 낮추고 어느 틈엔가 거세진 비도 신경 쓰지 않으며 말없이 걸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미카게의 코마이누가 마주한 장소까지 오자 타이 씨가 고개를 들고서 "여기가 제일 안전할 테니 비 피하는 겸 안에서 좀 쉬자"하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모두 한 우산 아래서 비를 피하며 쌓인 돌과 돌 사이를 지나 평소에는 석공이 일하는 이시가시 구석의 초가지붕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는 비도 꽤나 심해져 타테가와를 둔 건너편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얗게 내리고 있었죠. 초가지붕 하나로는 도무지 온전히 막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안개와 같은 물보라도 습한 흙냄새와 함께 밖에서 밀려 들어옵니다. 때문에 세 사람은 초가지붕 아래에 들어갔음에도 우산 하나에 의지하여 깎인 채 남아 있는 문기둥으로 보이는 미카게 위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신조였지요. "오토시, 두 번 다시 너랑 못 만나는 줄 알았어"――그러는 사이 또 창백한 번개가 빗 속에서 비스듬하게 뻗어 구름을 찢을 것처럼 울렸습니다. 오토시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무릎 위로 낮추며 한동안 가만히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이윽고 새파랗게 질린 고개를 들고서 꿈이라도 꾸는 듯한 눈초리로 밖을 보며 "저도 각오하고 있었어요"하고 꺼림칙할 정도로 조용하게 말했습니다. 오토시의 말을 들은 순간, 신조의 뇌리에는 마치 인으로라도 쓴 듯한 동반자살――그런 온건치 않은 문자가 새겨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커다란 우산을 잡고 있던 타이 씨는 좌우로 당혹스러운 시선을 주면서도 목소리만은 기운차게 "야, 정신 차려. 오토시 씨도 용기 내시고요. 대개 이럴 때는 사신이 들러붙기 마련이니까요――그건 그렇고 지금 와있는 손님은 카기조란 주식쟁이죠? 네, 저도 조금 알고 있거든요. 오토시 씨를 첩으로 삼으려는 게 저 남자 아닌가요?"하고 곧장 건설적인 방면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습니다. 그러자 오토시도 불쑥 꿈에서 깬 것처럼 기운 없는 눈초리로 타이 씨를 보면서 "네, 그 사람이에요"하고 분하다는 양 대답했답니다. "거 봐라. 역시 내 말이 맞잖아"――타이 씨는 그렇게 말하며 의기양양히 신조를 보았습니다만 또 금세 진지함을 되찾아 오토시를 향해 기운이라도 주듯이 "비가 이렇게 내려서야 카기조도 이십 분이고 삼십 분이고 집에 있을 거예요. 그동안 제 계획이 어떻게 되었나 들려주세요. 만약 실패했다면 뭐, 제가 남자 남자답게 바로 댁으로 가서 직접 카기조와 담판을 져보죠"하고 신조가 듣기에도 듬직할 정도로 남자답게 단언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천둥은 더욱 거세져 낮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번개가 거의 끝없이 이어지며 폭포와 같은 비를 뿌렸습니다만, 오토시는 그런 슬픔마저 잊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던 걸 테죠. 얼굴도 아름답기보단 되려 비장함 따위를 두르고 이것만큼은 여전한 선명한 입술을 떨면서 "그게 전부 들켜버려서――모두 헛수고였어요"하고 가는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그렇게 오토시가 번개와 비를 받아내는 초가지붕 아래서 안타깝다는 양 한숨을 내쉬며 띄엄띄엄 이어가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신조가 몰랐던 타이 씨의 계획은 어젯밤을 기점으로 완전히 실패해버렸다고 합니다. 그에는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요.
 신조가 오토리 할멈이 오토시에게 신을 내려 신탁을 받는단 말을 해줬을 때, 타이 씨는 곧장 그때 오토시가 신내림을 흉내 내 그 노파에게 한 방 먹이는 게 가장 빠르겠단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때문에 앞서 말한 것처럼 점을 봐달라는 구실로 오토리 할멈을 찾았을 때에 그런 요지를 적은 편지를 오토시에게 건네둔 거지요. 오토시도 꽤나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계획이라 생각했습니다만 달리 눈앞의 재난을 빠져나갈 묘안도 떠오르지 않는 판이었지요. 다음 날 아침 마음을 굳게 먹고 "알겠습니다"하는 대답을 타이 씨께 건넸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열두시, 여느 때처럼 노파가 타테가와의 물에 몸을 담근 후, 바사라의 신내림을 시작하자 인간으로선 어쩔 수 없는 장애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게 뭔지 자세히 이야기하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그 노파의 기이한 수법을 이야기해야만 할 테지요. 오토리 할멈은 여차 신을 부를 때면 어떻게 된 건지 오토시를 속옷 차림으로 만들곤 두 손을 뒤로 묶고서 머리마저 뿌리채로 뽑고는 전등불을 끈 방 한가운데로 끌고 가 북쪽을 향해 앉혔다 합니다. 그러곤 자신도 전라가 돼선 왼손에는 촛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거울을 들고서 오토시 앞에 선 채로 비밀의 주문을 외고 거울을 들이밀며 일사불란히 기도를 올렸지요――평범한 여자라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게 분명합니다만, 그러는 사이 주문을 외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노파는 거울을 옆으로 돌려 조금씩 밀어내더니 끝내는 그 거울에 억눌린 건지 두 손을 쓸 수 없는 오토시의 몸이 쓰러질 때까지 조금도 힘을 빼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렇게 쓰러지자 노파는 마치 시체를 먹는 파충류처럼 기어 와서는 오토시의 가슴 위로 올라타 촛불 빛이 드리운 꺼림칙한 거울 안을 아래서 한사코 들여다보지 뭡니까. 그러자 곧 그 바사라의 신이 마치 오래된 연못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증기처럼 소리도 없이 어둠 속을 지나 여자의 몸에 깃든 걸 테죠. 오토시는 서서히 눈이 감기고 손발을 움찔움찔 떨더니 노파가 바쁘게 던지는 의문에 숨도 쉬지 않고 비밀의 답을 토해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토리 할멈은 그날 밤에도 이런 순서를 밟아 신을 내리려 했지요. 하지만 오토시는 타이 씨와 한 약속을 지켜 겉으론 정신을 잃은 척 꾸미며 속으론 빈틈 없이 기회가 생기면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는 거짓된 신탁을 내릴 셈이었습니다. 물론 그때 노파가 파고들 질문은 신기가 닿지 않는 척 하나도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촛불 빛을 받아 작지만 밝게 빛나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자연스레 마음이 느슨해지고 여느 때처럼 자신을 잊을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노파는 주문을 외우는 동안에도 빈틈 없이 얼굴을 살피니 틈을 노려 거울서 눈을 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거울은 오토시의 시선을 끌어내듯이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조금씩, 일분씩 숙명보다도 꺼림칙하게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더군다나 그 푸르게 부풀어 오른 얼굴로 끝없이 주문을 외는 목소리도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사방에서 오토시의 마음을 옭매어 어느 틈엔가 꿈인지 현실인지 알지 못할 경지로 끌고 가려 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흘렀을까요. 오토시 스스로도 나중 되어서야 생각하면 희미한 기억마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자신에겐 하룻밤 종일이라 여겨질 정도로 길고 긴 시간 끝에, 오토시는 기어코 마음 고생한 보람도 없이 그 노파의 비술에 빠져 버린 걸 테죠. 어두운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크고 작은 검은 나비가 끝없이 원을 그리며 천장으로 오른다 싶더니 그대로 눈앞의 거울이 보이지 않게 되어 여느 때처럼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 없이 잠에 들어버렸습니다.
 오토시는 번개와 빗소리 속에서 눈과 입술에 긴장을 한껏 머금은 채로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아까부터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 타이 씨와 신조는 나란히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나눴습니다. 계획 실패야 미리 각오해둔 바였지만 이렇게 자세히 들으니 이번에야말로 모든 게 도루묵이 되었다는 새삼스러운 절망의 위력에 통절한 걸 테지요. 두 사람은 한동안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로 하늘을 덮은 채 내리는 거센 빗소리만 막연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타이 씨가 용기를 쥐어짰는지, 이제까지 흥분한 반동인지 더더욱 음울해진 오토시를 향해 "그동안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세요?"하고 격려하듯 물었다 합니다. 그러자 오토시는 시선을 낮추고 "네, 아무것도――"하고 대답했습니다만 곧 애원하는 듯한 눈초리로 머뭇머뭇 타이 씨의 얼굴을 보고는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날이 밝아 있었어요"하고 억울하다는 양 덧붙이더니 불쑥 소맷자락에 얼굴을 묻고서 소리 죽여 울고 훌쩍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바깥 날씨는 여전히 개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로 모자라 번개는 당장이라도 떨어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머리 위에서 웅웅 울리며 그때마다 눈동자를 태우는 듯한 빛이 끝없이 초가지붕 아래서도 빛났습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신조가 무슨 생각인지 대뜸 벌떡 일어나더니 무시무시한 얼굴색을 한 채로 거친 비와 번개 사이를 뚫고 가려 하지 뭡니까. 심지어 그 손에는 어느 틈엔가 석공이 잊고 간 듯한 곡괭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를 본 타이 씨는 우산을 던지자마자 그 뒤를 쫓아 안듯이 신조의 어깨를 붙들었습니다. "야, 정신 나갔어"――타이 씨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치며 억지로 신조를 끌어내려 하자, 신조는 다른 사람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이거 놔.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죽나 그 노파를 죽이나 둘 중 하나야"하고 무작정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헛소리하지 마. 애당초 오늘은 카기조도 같이 와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거기 가서――" "카기조가 뭐. 오토시를 첩으로 삼으려는 녀석이 네 부탁이나 들어줄 거 같아? 그보다 이거 놔. 네가 내 친구가 맞다면 이거 놔야 해." "오토시 씨는? 네가 그런 무모한 짓 하면 오토시 씨는 어쩌라고"――두 사람이 그렇게 다투는 사이 신조는 얇은 두 팔이 부들부들 떨면서도 강하게 목 주변에 둘러진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머금은 힘없는 눈동자가 한없이 슬픈 빛을 머금고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보는 걸 봤습니다. 끝으로 큰 빗소리 사이를 누비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함께 죽어주시지요"하고 속삭이는 걸 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근처에 번개가 떨어진 걸 테죠.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벽력과 함께 보라빛 불똥이 눈앞에 튀자 신조는 연인과 친구에게 안긴 채로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의 일입니다. 긴 악몽과 같은 혼수상태서 깨어난 신조는 니혼바시의 집 이 층서 얼음 주머니를 머리에 얹고서 조용히 누워 있었습니다. 머리맡에는 약병이나 체온기와 함께 작은 나팔꽃 화분이 놓여 다소곳한 유리색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아마 아직 아침일 테죠. 비, 번개, 오토리 할멈, 오토시――신조가 그런 기억을 더듬으며 문득 옆을 보자, 발이 달린 문 옆에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인쵸가에시 옆머리가 흐트러지고 아직 뺨이 창백한 오토시가 걱정스레 앉아 있었습니다. 아뇨, 앉아 있는 건 고사하고 신조가 정신이 든 걸 보곤 곧장 얼굴을 붉히고 "젊은 주인님, 정신 드셨나요"하고 얌전히 말하지 뭡니까. "오토시"――신조는 아직도 꿈에서 깨지 않은 듯한 심정으로 연인의 이름을 중얼거렸습니다만, 그때 또 머리맡에서 "하아, 이걸로 한숨 놨네――아, 가만있어. 되도록 안정을 취해야 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또한 생각지도 못한 타이 씨의 목소리였지요. "너도 있었냐." "그럼 나도 있지. 너희 어머니께서도 와계셔. 의사는 막 돌아간 참이고"――이런 문답을 나누며 신조는 오토시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마치 먼 곳이라도 보는 것처럼 가만히 반대편을 바라보니 확실히 타이 씨와 어머니가 안심한 얼굴을 마주하며 머리맡에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겨우 정신이 돌아 온 신조는 그 무서운 호우 후, 어떻게 니혼바시의 집에 돌아 온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한동안 멍하니 세 사람의 얼굴만 바라볼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부드럽게 신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 무사히 해결됐어. 이제 너도 기운 차려서 하루라도 빨리 건강해져야지"하고 위로하듯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타이 씨도 그 말을 받아 "걱정할 거 없어. 너희 둘의 뜻은 신이 알아줬으니까. 오토리 할멈은 카기조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번개神鳴り에 맞아 죽었으니까."하고 여느 때 이상으로 쾌활히 말했습니다. 신조는 그 생각지 못한 좋은 소식을 듣는 동시에 기쁨인지 슬픔인지 형용하기 어려운 기이한 감동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더니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간호하던 세 사람은 그게 꼭 실신한 것처럼 보인 걸 테죠. 모두가 허둥지둥하기 시작하기에 신조가 다시 눈을 뜨자 허리를 들던 타이 씨가 일부러 거창하게 혀를 차더니 "뭐야, 사람 놀래키기는――이거 큰일이네요.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는데"하고 두 여자를 보며 말했습니다. 확실히 신조는 더 이상 그 괴이한 노파의 그림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졌던 것입니다. 한동안 이 행복한 미소를 즐긴 후, 신조는 타이 씨의 얼굴을 보면서 "카기조는 어떻게 됐어?"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타이 씨는 웃으면서 "카기조? 그 녀석은 기절만 했더라고"하고 말하며 어째서인지 잠시 주저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생각을 바로잡았는지 "내가 어제 병문안을 가서 그 남자 입으로 직접 듣고 온 건데, 오토시 씨는 신내림을 받아 너희 둘의 사랑을 방해하면 그 노파의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몇 번이나 경고했다나 봐. 그런데 그 노파는 헛소리라 생각해서 다음 날 카기조가 왔을 때 누구 하날 죽여서라도 너희 둘의 사이를 찢어 놓을 거라며 열변을 토했다나. 그렇게 생각하면 내 계획은 분명 실패했지만 그 계획이 실제로 일어난 셈이기도 하네. 그나저나 오토리 할멈이 신탁을 헛소리라 생각한 끝에 기어코 자멸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걸. 이래서야 바사라 신도 선한 신인지 악신인지 모르겠어"하고 의아하다는 양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 신조는 얼마 전부터 자신을 손안에서 가지고 논 괴이한 힘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곧 자신이 그 비오는 날 어떻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럼 나는?"하고 물으니 이번엔 오토시가 타이 씨를 대신해 "그 이시가시서 곧장 인력거에 옮겨 가까운 의사를 찾았어요. 단지 비를 너무 많이 맞은 탓인가 열이 높아져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도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죠"하고 절절히 말했습니다. 그걸 듣자 타이 씨도 만족스레 무릎을 내밀고는 "그 열이 가신 건 전적으로 너희 어머니랑 오토시 씨 덕이야. 오늘까지 삼일 동안 헛소리만 하는 너를 간병하느라 오토시 씨에 어머님도 한숨도 못 잤어. 물론 오토리 할멈 쪽은 선심 쓰는 셈치고 장례까지 내가 다 치러주고 왔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어머님 손을 안 거친 게 없어."하고 여전히 격려하듯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엄마." "너도 참, 내가 아니라 타이 씨한테 인사해야지"――그렇게 말하는 모자는 아니, 오토시도 타이 씨도 모두 눈물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이 씨는 남자인 만큼 금세 기운찬 목소리를 내서 "이래저래 벌써 세 시네요. 그럼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하고 몸을 반쯤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신조는 의아하다는 양 "세 시? 아침 아니었어?"하고 묘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당한 타이 씨는 "무슨 헛소리래"하고 말하며 오비춤의 시계를 꺼내 뚜껑을 열어 보여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신조의 눈이 머리맡의 나팔꽃에 향해 있는 걸 보더니 갑자기 활짝 웃고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 나팔꽃은 오토시 씨가 그 노파의 집에 있을 때부터 정성스레 기르던 거야. 그런데 그 비 오는 날에 핀 유리색 꽃만은 기이하게 오늘까지 시들지 않더라고. 오토시 씨 말론 이 꽃이 피어 있는 한 네가 정신을 차릴 게 분명하다나? 자기도 믿는 걸로 모자라서 몇 번이나 우리에게도 말하더라고. 그 보람이 있어 네가 정신을 찾은 거니 같은 기이한 현상이라도 이것만은 상냥하다 해야 하지 않겠어?"

(다이쇼 8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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